야구통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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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球統制令
정식 명칭은 야구의 통제 및 시행에 관한 건(野球ノ統制並施行ニ関スル件). 법령번호 문부성 훈령 제4호.
1932년 4월 1일에 일본제국 문부성[1] 이 "문부당국이 각급 학교의 야구활동을 직접 통제하겠다"고 밝힌 훈령이다. 일본야구의 폐단을 잡겠다는 취지로 시행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한국의 야구계는 1932년부터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당시 일본야구계는 비리가 많았다. 주요 큰 비리들은 다음과 같다.
이런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벌이제 되자 문교부는 1930년대 부터 일본 전체야구계를 총괄할수 있는 일본야구협회 또는 야구총연맹을 결성하도록 유도할 계획이었고 1930년 10월 22일 문부성의 야마가와 체육과장 주재로 아베 이소오, 히라누마 료오등 야구계의 유력 인사들과 제6대학리그 수뇌부를 초청해 총괄단체 설립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결국 총괄단체는 만들어 지지 않았고 학생야구에서 벌어지는 비리들을 뿌리 뽑으려는 노력은 당연히 지지부진해질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중 야구계의 비리가 심각해지자 체육운동심의회총회는 문교부에 강력한 대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문교부는 1932년 2월 야구를 통제할수 있는 '전국야구협회'가 설치될때 까지 문부성 자체가 야구통제의 업무를 맡기로 결정한다. 이어 3월 16일 문부성 장관실에서 하토야마 장관 주재로 회의를 열고 '야구통제령'을 발표하고 4월 1일[5]만우절부터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일본 야구계는 이에 대해 "정부의 개입은 너무하다!"라는 반발을 했지만 일각에서는 정화작용을 위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토에서 야구통제령이 실시된 지 5개월 후인 1932년 9월, 2학기부터 야구통제안이라는 약간 변형된 이름으로 규제를 발표한다.
유료경기 대회참가 제한등을 걸고 학무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대회를 참석케해서 고시엔 조선예선, 조선신궁대회등 일제주관대회만을 참가하도록 강제하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는 제제안이었다.[7] 이 야구통제안이 추진된후 한국야구계는 엄청난 위축을 하게 된다.
조선일보 주최의 중등학교야구리그전이 1931년, 동아일보 주최의 4구락연맹전은 1936년을 끝으로 폐지되었으며 조선체육대회는 1933년에 아예 야구종목을 치르지도 않았고 34~35년에는 소학단과 중학단의 경기는 열리지 않은채 성인만이 참가 가능한 청년단만 겨우 두팀씩 나와 경기를 치르다 1936년 이후로는 전면 중단되기에 이른다. 그나마 유지되던 중학야구대회는 2~4개 중등학교만이 출전하다 1937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이 정책이 통과된후 남은건 일제가 주최하는 야구대회 뿐이었다. 1932년 1월, 조선실업야구연맹은 재정난을 이유로 해체되었고, 서울지역 야구팀들끼리 뭉쳐 경성실업야구연맹으로 재편되었는데 경성실업야구연맹에서 주최하는 연맹전과 흑사자기쟁탈 도시대항 야구대회 조선예선만이 개최되었다. 그나마도 1941년부터는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한반도에서 공식야구대회가 전면적으로 중단되기에 이른다.
이후 1945년 해방 되기 전까지 철저하게 야구가 통제되었고 한국야구는 암흑기에 빠져들게 된다.
한국에서는 1945년 8월 15일 대한독립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폐지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47년 5월 21일에 문부성 훈령 제6호에 의해 폐지되었다.
1. 개요[편집]
정식 명칭은 야구의 통제 및 시행에 관한 건(野球ノ統制並施行ニ関スル件). 법령번호 문부성 훈령 제4호.
1932년 4월 1일에 일본제국 문부성[1] 이 "문부당국이 각급 학교의 야구활동을 직접 통제하겠다"고 밝힌 훈령이다. 일본야구의 폐단을 잡겠다는 취지로 시행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한국의 야구계는 1932년부터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2. 왜 이런 통제령이 내려졌나[편집]
당시 일본야구계는 비리가 많았다. 주요 큰 비리들은 다음과 같다.
- 1) 1915년에 제1회 고시엔이 열린 이래 고시엔이 흥행이 되고 수익이 나기 시작하자 일본의 전지역에 중등야구대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또한 일부 사립학교들은 학교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뒷돈을 줘가며 선수들을 스카우트 했고, 해당 선수들의 학업 관련 문제는 내팽긴 채 유료 경기를 치러 돈을 벌어오도록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 2) 1925년에 만들어진 도쿄 6대학 리그[2] 가 관중동원이 되고 흥행이 되자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비영리단체였던 도쿄 6대학 리그에 대해 도쿄시[3] 가 1927년 11월에 일반이벤트사업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물리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에 주최측에서 도쿄 6대학 리그 출신의 고위관계자들을 동원해 반발하기에 이르렀고 "신성한 학생야구에 과세를 하는 건 부당한 짓"이라는 주장으로 정부의 과세정책에 대해 비판하기에 이른다. 결국 정부는
학벌빨에 밀려과세를 포기했고 대신 동경6대학리그 측에서 1940년에 열릴 예정이었던 도쿄 올림픽[4] 기금으로 30만원을 내는 선에서 무마되었다.
- 3) 또한 각 대학들의 전력강화를 위해 유망주들을 일본의 사회인야구로 보낸후 입학시키는등의 비리가 저질러졌고 소위 명문대라는 학교들이 검은 돈과 부정 스카우트에 대한 잡음에 대한 반발이 사회적으로 일어났다.
이런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벌이제 되자 문교부는 1930년대 부터 일본 전체야구계를 총괄할수 있는 일본야구협회 또는 야구총연맹을 결성하도록 유도할 계획이었고 1930년 10월 22일 문부성의 야마가와 체육과장 주재로 아베 이소오, 히라누마 료오등 야구계의 유력 인사들과 제6대학리그 수뇌부를 초청해 총괄단체 설립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결국 총괄단체는 만들어 지지 않았고 학생야구에서 벌어지는 비리들을 뿌리 뽑으려는 노력은 당연히 지지부진해질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중 야구계의 비리가 심각해지자 체육운동심의회총회는 문교부에 강력한 대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문교부는 1932년 2월 야구를 통제할수 있는 '전국야구협회'가 설치될때 까지 문부성 자체가 야구통제의 업무를 맡기로 결정한다. 이어 3월 16일 문부성 장관실에서 하토야마 장관 주재로 회의를 열고 '야구통제령'을 발표하고 4월 1일[5]
당연히 일본 야구계는 이에 대해 "정부의 개입은 너무하다!"라는 반발을 했지만 일각에서는 정화작용을 위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3. 야구통제령 전문[편집]
3.1. 한국야구에 끼친 타격[편집]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토에서 야구통제령이 실시된 지 5개월 후인 1932년 9월, 2학기부터 야구통제안이라는 약간 변형된 이름으로 규제를 발표한다.
유료경기 대회참가 제한등을 걸고 학무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대회를 참석케해서 고시엔 조선예선, 조선신궁대회등 일제주관대회만을 참가하도록 강제하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는 제제안이었다.[7] 이 야구통제안이 추진된후 한국야구계는 엄청난 위축을 하게 된다.
조선일보 주최의 중등학교야구리그전이 1931년, 동아일보 주최의 4구락연맹전은 1936년을 끝으로 폐지되었으며 조선체육대회는 1933년에 아예 야구종목을 치르지도 않았고 34~35년에는 소학단과 중학단의 경기는 열리지 않은채 성인만이 참가 가능한 청년단만 겨우 두팀씩 나와 경기를 치르다 1936년 이후로는 전면 중단되기에 이른다. 그나마 유지되던 중학야구대회는 2~4개 중등학교만이 출전하다 1937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이 정책이 통과된후 남은건 일제가 주최하는 야구대회 뿐이었다. 1932년 1월, 조선실업야구연맹은 재정난을 이유로 해체되었고, 서울지역 야구팀들끼리 뭉쳐 경성실업야구연맹으로 재편되었는데 경성실업야구연맹에서 주최하는 연맹전과 흑사자기쟁탈 도시대항 야구대회 조선예선만이 개최되었다. 그나마도 1941년부터는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한반도에서 공식야구대회가 전면적으로 중단되기에 이른다.
이후 1945년 해방 되기 전까지 철저하게 야구가 통제되었고 한국야구는 암흑기에 빠져들게 된다.
4. 폐지[편집]
한국에서는 1945년 8월 15일 대한독립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폐지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47년 5월 21일에 문부성 훈령 제6호에 의해 폐지되었다.
5. 참고 자료[편집]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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