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모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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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모모에
山口(やまぐち (もも( | Momoe Yamaguchi


파일:Apple_Music_Momoe_Yamaguchi.jpg

본명
((うら (もも( (미우라 모모에, Momoe Miura)[1]
출생
1959년 1월 17일 (65세)
도쿄도 시부야구
출신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2]
거주지
도쿄도 구니타치시 후지미다이[3]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직업
가수, 배우, 작사가
활동 기간
1973년 4월 14일 ~ 1980년 10월 15일(총 2,741일)
서명
파일:야마구치 모모에 서명.jp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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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61cm, A형
학력
요코스카시립 츠루쿠보초등학교 (졸업)
요코스카시립 이리야마즈중학교 (전학)
사립시나가와중학교 (졸업)
히노데 여자고등학교[1] (졸업)
데뷔
배우 그럴 즈음 (영화, 1973. 04. 14.)
가수 그럴 즈음 (싱글, 1973. 05. 21.)
필명
요코스카 케이[2] (横須賀 恵(よこすか けい)
장르
, 가요쿄쿠(歌謡曲)
소속사
호리프로(1973~1980)
레이블
파일: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일본) 로고.svg}}}(활동 당시 명칭은 CBS 소니)
어머니
야마구치 마사코
자매
동생 야마구치 토시에(1964년생)
배우자
미우라 토모카즈(1980.11.19 결혼 ~ 현재)
자녀
장남 미우라 유타로(1984년생)
차남 미우라 타카히로(1985년생)

1. 개요
2. 생애
2.1. 데뷔까지
2.2. 커리어
2.2.1. 데뷔
2.2.2. 사회 현상
2.2.3. 국민 스타가 되다
2.2.4. 은퇴 선언
2.3. 은퇴 이후
3. 음악 스타일
5. 필모그래피
5.1. 드라마
5.2. 영화
5.3. 라디오
5.4.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
6. 저서
7. 여담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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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배우, 가수.

2. 생애[편집]



2.1. 데뷔까지[편집]


야마구치 모모에는 1959년 1월 17일 도쿄도 시부야구 에비스에서 태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4살 무렵, 그녀는 그녀의 부모에게 돌아왔고 가족은 요코하마시로 이사했다. 의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모에의 어머니에게 자신을 총각이라고 속였고,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지기에 이른다. 이후 모모에는 어머니와 5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끔씩 모모에의 집을 방문했지만, 이미 그에게는 본처와 아이들이 있는 상태였다. 그는 마지못해 모모에와 그녀의 여동생을 인정했고 법적으로도 아버지가 되었지만, 부모의 책임을 거의 하지 않은 최악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모모에의 어머니는 혼자의 힘으로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인 토시에를 길렀다. 모모에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로 이사를 하였고, 중학교 2학년 때 가수로 데뷔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녀는 미국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조카가 있다고 한다.



스타 탄생! 출연 당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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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그녀의 가수 데뷔의 계기는 하기모토 킨이치가 사회를 맡은 스타 탄생!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당시 13세였던 그녀는 TV에 자신과 똑같은 13세 소녀가 똑같이 나오는 것에 자극을 받고 '나도'라고 반응하며 엽서를 응모했다. 그리고, 출연이 인정된 1972년 11월의 예선이 열린 유라쿠쵸 NTV 홀의, 자택이 있는 요코스카에서부터 혼자서 NTV 홀로 갔다. 노래한 것은 마키바 유미의 '회전 목마'. 그리고 결승전 진출이 확정된다. 700명이 넘는 응모자 가운데 텔레비전 심사가 열리는 결승에 올라간 것이다. 예선 때는 혼자 나선 모모에였지만 결승에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따라갔다. 떨어질 때 위로하는 역할로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모모에는 달랐다. 예선과 같은 '회전 목마'를 결승에서 당당히 노래한 모모에는 그때 이미 '나는 가수가 되는구나'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가수가 되려고 한 계기는 또래인 모리 마사코가 TV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리 씨처럼 되고 싶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왜 가수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재정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초등학교 말에 가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을지 처음 생각한 것 같다. 정말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그건 돈 때문이 아니라 어린 소녀의 꿈이었고 동화 같은 공주였다.

나는 노래를 좋아했고, 몇몇 사람들이 내게 "노래를 잘 부르네"라고 말했을 때, 내가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만큼 간단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 자서전 "푸른 시절"에서


스타 탄생!에서 준우승해 20개의 예능 프로덕션에 스카우트 되어 일약 주목받게 된다. 합격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의 어머니는 모모에의 연예계 진출에 반대했다. 그러나 모모에는 연예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었다. 그래서 내건 조건이 "고등학교 만큼은 반드시 졸업한다."였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야마구치 모모에는 호리프로 소속이 됐다. 그리고 이 호리프로에는 모모에의 연예계 입성 계기가 된 스타탄생에서 먼저 합격했던 모리 마사코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리 마사코야말로 모모에가 텔레비전에서 '스타 탄생!'을 보고 있었을 때에 충격을 받은 '같은 13세의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요코스카에 살던 모모에는 연예활동을 시작하면서 도쿄로 이사하게 됐고 중학교도 시나가와 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그리고 그 시나가와 중학교에도 같은 스타탄생에서 우승자가 되어 가수 데뷔를 하기로 한 13세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사쿠라다 준코였다. 그 후, 야마구치 모모에는,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쥰코와 함께 꽃의 중3 트리오라는 별칭으로 불려, 일약 스타가 되게 되었다. 데뷔 초창기에는 준코와 모리의 인지도에 밀렸으나, 그 이후로는 우승자 준코와 모리를 압도하는 커리어를 냈기 때문에 트리오 중에서도 최고격의 대접을 받는다.

당시 호리프로와 계약하고, 가수로 데뷔하는 것이 결정된 야마구치 모모에였지만 중학교 2학년이던 야마구치 모모에는 연예활동에 앞서 의무교육인 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가 살던 곳은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다니던 중학교는 요코스카시립의 이리야마즈중학교다. 연예활동은 당연히 도쿄 도심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된다. 요코스카시에서 도쿄로 다니는 것이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중학교 수업이 끝나고 도쿄를 다니며 연예활동을 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그래서 호리프로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중학교 3학년으로 진급하는 타이밍에 모모에를 도쿄에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모모에는 거주지는 도쿄가 되는데 무려 1년전에 호리프로에서 먼저 가수로 데뷔했던 모리 마사코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던 것이다. 목욕탕 없는 연립주택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모리 마사코와 가족들은 모리 마사코의 데뷔곡 '선생님'이 히트를 치자 데뷔 직후 도쿄도 미나토구의 한 아파트로 이사해 새 생활을 시작했다. 모모에는 그곳에서 얹혀 살게 된다. 지금 일본 아이돌 산업에서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아이돌 비즈니스 창세기1970년대 있어서는, 이러한 일도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어머니, 여동생과 살던 친정을 떠나 모리 마사코 일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 모리 마사코의 집은 맨션이라고 해도 2DK의 작은 방 구조이고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개인실이 주어질 리 없다. 무려 야마구치 모모에는 모리 마사코의 4장 반짜리 개인실에서 공동생활하게 된다. 모리 마사코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한 야마구치 모모에는 중학교 수업이 끝나자 모리 마사코와 함께 일터를 따라갔다. 이른바 '따라다니며 신변을 돌보아 주는 사람(付き人)'으로 활동한다. 모모에는 가요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는 모리 마사코의 옆에서 모리 마사코의 서포트를 하면서, 연예계의 일을 가까이서 보고 배워 갔다.

동갑이라고는 하지만, 모리 마사코가 선배 티를 내며 상하관계를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둘은 친구처럼 지냈다. 일이 끝나자 모리 마사코와 야마구치 모모에는 다 함께 모리 마사코의 집으로 돌아가 함께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한 작은 침대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잠을 자면서 친한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4]


2.2. 커리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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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30주년 기념 "야마구치 모모에 특집" 명곡 퍼레이드

}}}
더 베스트 텐의 야마구치 모모에 명곡집

은퇴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연예인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은 일본에서도 극히 드물다. 미소라 히바리사카모토 큐, 오자키 유타카 혹은 이시하라 유지로와 같은 전설적 엔터테이너의 특집 프로그램은 종종 있지만, 살아있으면서 은퇴한 지 30년이 지난 흘러간 가수를 특집 프로그램으로 재조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일본 내 위상을 역설하는 장면.

동영상 내내 탄식을 내뱉고 "凄い"(엄청나네) "かっこいい"(멋지다)를 연발하며 그녀의 아우라에 홀리기 시작하는 패널들의 표정도 포인트. 특히 광팬인 마츠모토 히토시는 진행자임에도 불구하고 넋을 뺀 표정으로 그녀의 퍼포먼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실제 패널들의 대화에서도 그녀의 아우라는 그녀가 침묵하고 있어도 상대가 반해버릴 정도였다고 술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2.2.1. 데뷔[편집]


커다란 소니, 커다란 신인[5]

─ 데뷔 당시의 캐치프레이즈

1973년 야마구치 모모에의 첫 영화작이자 데뷔작이 결정됐다. 쇼치쿠 배급의 '그럴 즈음'이다.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있어서, 이것이 연예계에서의 최초의 일이 된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데뷔 싱글 타이틀도 '그럴 즈음'이라 이 영화의 주인공도 야마구치 모모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연히 아니다. 갓 데뷔한 신인이 주연 타이틀을 얻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이 영화의 주연은 와다 아키코였다. 현재 일본에서 각종 막말비호감 이미지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당시 와다 아키코는 이미 'R&B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인기 가수이자 호리프로의 대표 가수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서브 주인공으로 이미 '선생님'의 히트로 스타 가수가 되어 있던 모리 마사코와 호리프로 소속의 기대 신인가수 이시카와 사유리가 발탁된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모리 마사코 이시카와 사유리와 같이 호리프로의 탤런트였지만, 이 영화에서는 단순한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주역인 와다 아키코는 중학교 배구부의 코치역을 맡았고, 그리고 모리 마사코, 이시카와 사유리, 야마구치 모모에 등이 그 부원이라는 설정이다. 게스트 출연으로 무라노 다케노리, 니시시로 히데키, 사카이 마사아키 등의 당대 스타들이 등장했다. 덧붙여 영화 '그럴 즈음'의 개봉 직후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데뷔곡 '그럴 즈음'을 발표한다.
}}}
데뷔곡 <그럴 즈음(としごろ)>

이 해는 중학교 3학년생 아이돌 가수인 꽃의 중3 트리오 3명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준코, 그리고 야마구치 모모에다. 상술했듯 매스컴은, 이 3명을 꽃의 중3 트리오라고 불렀다. 이 셋 중 처음으로 데뷔한 사람은 모리 마사코다. 중학교 2학년의 6월에 '선생님'으로 가수로 데뷔해, 대히트. 그리고, 다음 해 15살에 NHK 홍백가합전에도 출장해 3명 중 유일한 출전인 데다 당시 사상 최연소 기록이기도 했다. 사쿠라다 준코도, 1973년의 2월에, 즉 중학교 2학년 때에 '천사도 꿈꾼다'로 가수 데뷔를 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나의 파랑새'로 일본가요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야마구치 모모에는 1973년의 5월에 치이에 카즈야 작사, 토쿠라 슌이치 작곡에 '그럴 즈음'으로 가수 데뷔를 했다. 하지만 이 곡은 팔리지 않았고 이 당시에는 이 둘보다 무명인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모모에는 자신이 스타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야마구치 모모에의 그 확신 같은 생각이 실현되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13세치고는 어른스럽고 약간 그늘이 있으며 무엇보다 아름다운 생김새를 가진 사람이었죠. 이 아이는 대스타가 될 거라는 걸 직감했어요. 그런데 데뷔곡 그럴 즈음은, 음역이 좁기도 해서[6]

, 세일즈는 생각만큼 늘어나지 않았죠. 거기서 2번째 작품에서는 청순한 이미지에서 일전, 「당신이 원한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라고 노래하는 「푸른 과실」의 발매를 단행했습니다.

― 사카이 마사토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프로듀서)#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레이블 CBS 소니의 음악 프로듀서 사카이 마사토시는 모모에의 노선 수정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가 밀던 컨셉은 화려함, 반짝반짝한 아이돌이었지만 프로듀서 마사토시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가수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통파 아이돌과 차별화된 스타일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사카이 마사토시는 작사가 센가 카즈야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음 차기작의 노래 제목은 푸른 과실(青い果実)"로 하자고 말했다. 작사가 센가 카즈야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청순한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하듯 데뷔곡 '그럴 즈음'을 썼는데 '푸른 과실'은 완전히 다른 노선인 성과 관련된 노래로 그 이미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처음에 센가는 주저했으나 고민 끝에 푸른 과실 가사를 쓰기로 했다. 이 노래의 대표적인 가사가 바로 "네가 원한다면 난 뭘 하든 상관없어"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가 이런 노래를 부르는게 신기해한 언론들은 대대적으로 야마구치 모모에를 보도하기 시작한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일약 주목받는 가수가 된 것이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데뷔곡이 히트하지 않아 사무실에서 차기작 가사가 적힌 흰 종이를 건네받았고 '죄책감 비슷한 것이 내 의식 속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고 야마구치 모모에는 이때의 심정을 자서전 '푸른 시절'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후에도 <금지된 놀이>, <한여름의 경험>과 같은 비슷한 컨셉의 곡들이 계속 히트했다. 아이돌 가수 가운데 야마구치 모모에가 이색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프로듀서 사카이 마사토시가 다룬 가수는 차례차례로 히트해 갔다. 엔카계가 주류였던 1970년대의 일본 가요계에서 사카이 마사토시는 아이돌 가요곡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인물이었던 것이다.[7] 그리고, 야마구치 모모에라는 전설의 가희를 낳은 것도 사카이 마사토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카이가 컨셉을 잡은 차별화된 노선은 야마구치 모모에는 스타 가수의 한 사람으로서 인지되게 되었다. 하지만,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런 컨셉의 노래하는 소녀들로 끝난 가수가 아니었다. 이윽고 야마구치 모모에는 사카이 마사토시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대스타로 성장해 간다.

"이걸 꼭 불러야 하나요?"

내가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안 했더라도 나는 완전히 반대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린애 같은 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대한 본능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그 사업체계에 있어서 내 망설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스튜디오로 이끌려 갔고, 내 세상과 단절되었다. 헤드폰으로 그 노래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마지못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혹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후 나는 멜로디를 잡고 그것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모든 망설임이 사라졌다. 우울해서 그런지 그 노래가 정말 좋아지기 시작한 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 자서전 "푸른 시절"에서


중학교 3학년생에 인기 아이돌 가수가 된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준코, 그리고 야마구치 모모에. 3명은 그 당시부터 인기 아이돌 가수가 드라마에 출연하는 된 이미 스테디셀러의 아이돌이었다. 3명 중 먼저 인기를 끌었던 모리 마사코와 사쿠라다 아츠코는 둘이 모여 드라마 텐쯔쿠텐[8]에 출연했다. 사쿠라다 준코가 변두리에 있는 츠쿠에도야 집 딸을 연기하고 그 옆의 타이야키 집 딸을 모리 마사코가 연기했다. 당시 이 들은 가수만으로도 바쁜 스케줄인데, 드라마에도 출연하는 살인적인 스케쥴이었다. 게다가 야마구치 모모에 등 3명은 중학교 3학년생이었다. 3명 모두 고등학교 진학을 원했던 터라 통학은 물론 수험공부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이 셋은 "아무리 힘들어도 고등학교는 가자."라고 말하며 서로를 격려했다고 한다. 특히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준코는 같은 시나가와 중학교에 다녔고, 게다가 학급도 같고 자리도 같은 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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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츠이 켄과 야마구치 모모에
한편, 2번째 싱글 '푸른 과실'이 히트 한 야마구치 모모에도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다. TBS 드라마 '얼굴로 웃고'다. 여기에서 모모에에게 있어서 연예계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인 우츠이 켄[9]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이 드라마에서 모모에는 우츠이 켄의 딸 역을 연기했다. 우츠이 켄과 야마구치 모모에의 부녀는 미우라 토모카즈와 야마구치 모모에의 연인과 같은 골든 콤비라 할 수 있는데 이 얼굴로 웃고가 우츠이 켄과 야마구치 모모에의 부녀의 탄생이었다. 이 드라마의 녹화가 시작되고 얼마 후, 모모에는 우츠이 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처음엔 걱정이 많았는데 다들 착한 분들이라 안심했어요.특히 우츠이 켄씨는 「더·가드맨」으로 보고 있었습니다만, 텔레비전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냥한 사람. 정말 더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어요." 실제로, 야마구치 모모에는 이 드라마의 촬영을 통해서 우츠이 켄으로부터 연기나 텔레비전에 대해서 차분히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일 이외의 인생에 대해서도 우츠이 켄은 모모에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 촬영을 계기로, 드라마의 설정에서의 부녀라고 하는 관계를 넘어, 야마구치 모모에와 우츠이 켄의 길고 긴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에게 친아버지는 존재했지만, 모모에 자신은 친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모에에게 있어서 우츠이 켄은, '연예계의 아버지'이며, 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생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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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다 준코와 야마구치 모모에
다음 해인 1974년 1월 17일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가수로 데뷔한 후 처음으로 맞는 생일이었다. 연예계에 들어가기 전에도 물론 모모에는 가족들로부터 생일을 축하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해에 모모에의 생일을 축하하는 생일 파티는 무려 세차례나 열렸다. 신인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를 알리기 위한 사무실의 전략적 파티였다. 일단은 실제 생일 이틀 전인 1월 15일 그 때 출연하고 있던 TBS 드라마 얼굴로 웃어의 스탭과 부친역으로 공동 출연하고 있던 우츠이 켄 등이 스튜디오에서 파티를 열었다. 우츠이 겐은 마치 진짜 아버지처럼 늦잠 자지 말라고 자명종을 모모에에게 선물했다. 다음은 실제 생일인 17일. 이날 모모에는 연예잡지 취재를 위해 도쿄 시내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스태프들이 모모에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호텔로 초대하여 가족과 직원들과 함께 모모에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8일. 모모에가 묵었던 같은 호텔에서 이틀 연속 모모에의 생일 파티가 열렸다. 그 파티에 초대된 것은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쥰코, 이시카와 사유리다. 즉, 꽃의 중3 트리오와 호리프로 3인 딸의 멤버가 모여 모모에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하는, 매스컴 전용의 파티였다.[당시사진]

2월에는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준코는 신진기예 사진가 시노야마 노리노부의 촬영을 위해 하와이로 갔다. 당시 에피소드로 어른들은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준코의 구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준코는 생김새가 무척 닮아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가요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할 기회가 많았지만, 그 현장에서 자주 디렉터등이 사쿠라다 쥰코를 향해 '모모에'라고 말을 걸거나 반대로 야마구치 모모에에에 대해 '준코'라고 이야기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준코는 일부러 화내는 표정을 보였다고 한다. 나중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자서전에서 그때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 당시 모모에와 준코는 사생활에서도 마음을 터놓고 친해지고 있었다. 당시 하와이에서의 촬영은 수영복 차림이었다. 그때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준코는 아직 중학생이라 과격한 것이 아니라 해변에서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준코를 간단하게 찍은 것이었다. 당시 촬영날 밤, 모모에와 준코는 같은 방에서 웃고 떠들며 놀다가 잠들었다. 이렇게 친했던 둘이지만 이후 매스컴은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쥰코를 라이벌 소재로 쓰게 되었다.

1974년은 꽃의 중3 트리오가 브레이크한 해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아슬아슬한 가사를 노래했던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세상의 관심은 집중되어 있었다. 이윽고 기레기들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기사 소재로 다루게 되었다. 연예 주간지가 야마구치 모모에의 성장 내력을 파헤치는 결정적인 기사를 발표했다. 그 기사에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호적등본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직후였다. 모모에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는 혼인 관계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자신이 총각이라고 속여서 모모에의 어머니와 결혼했지만, 사실은 가정이 있는 남자였기 때문에 호적에 오르지 못한것이다. 모모에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부터 자신의 가정이 여느 가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 모모에와 아버지의 관계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이 '야마구치 모모에 출생의 비밀'이라는 기사를 야마구치 모모에 자신이 읽었을 때였다. 모모에는 "사실을 통보받고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머니에 대한 마음도, 자신이 현재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그때까지 딸들에게 한 번도 꿀릴 수 없는 강인한 존재 엄마가 있었다. 기사를 읽으며 나는 엄마에게 또 한 번 고마움을 느꼈다."라고 그때의 심정을 자서전에 적었다. 불과 15세 소녀가 자신이 몰랐던 출생의 비밀을 연예 주간지를 통해 알게 된다. 알려지고 싶지는 않을 자신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일본 전체에 폭로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한 가사로 세간의 호기심을 샀던 야마구치 모모에가 이 기사로 인해 더욱 주목받게 된다. 웬만한 정신력이라면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혹자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일본 연예사에 남을 전설스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사납게 날뛰는 연예계의 폭풍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갖고 자랐고 그리고 활짝 핀 것이다.

1974년 꽃의 중3 트리오는 모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이미 인기 아이돌 가수로서 한창 바쁜 3명이었지만 일하는 틈틈이 수험공부를 열심히 한 보람에 모두 지망 학교에 합격했다. 꽃의 중3 트리오였던 3명을 매스컴은 이때부터 '꽃의 고1 트리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진학처는 달랐다. 사쿠라다 쥰코는 재학중이던 시나가와 중학교의 자매교인 시나가와 고등학교에 진학했고[10] 모리 마사코는 오노 학원 여자 고등학교에 진학[11]했으며 야마구치 모모에는 히노데 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한다. 당시 모모에는 고교 진학하면서 "호리코시 고등학교 같은 탤런트 고등학교에서 특별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여고에 진학하면서 모모에에게는 작은 소망이 있었는데 바로 친구를 사귀는 것과 배드민턴부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푸른 과실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살인적인 스케쥴을 보내던 터라 힘든일이었다.

1974년 6월 15세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미우라 토모카즈[12]와 광고 촬영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장소는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키나타공원. 글리코 광고를 촬영하기 위해 야마구치 모모에, 그리고 미우라 토모카즈가 선택됐다. 그러나 당초 예정됐던 촬영 장소와 탤런트는 달랐다. 실은, 이 직전에 모모에는 섬에서 다른 남성 탤런트를 상대로 글리코의 광고 촬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완성된 영상을 보면, 아무래도 사이가 좋은 커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급히 다시 찍는 것이 결정됐다. 광고 방영 시작까지 시간이 없다. 다시 해외까지 갈 시간이 없으므로, 도쿄도내의 공원에서 녹지공원이 선택된다. 다음으로 모모에의 남자친구 역이 필요했는데 잘나가는 배우는 벌써 스케쥴이 꽉 차 있어 갑자기 부를 수는 없었다. 거기서, 아직 유명하지 않았지만 '시크릿 부대'라고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던 산뜻한 이미지를 가진 미우라 토모카즈가 캐스팅됐다. 그리고 광고 촬영을 했고 두 사람은 그 역에 딱 어울렸다고 한다. 이 광고는 평판이 되게 좋았다. 이 광고가 계기가 돼 야마구치 모모에 첫 주연 영화 '이즈의 무희'의 상대역으로 미우라 토모카즈가 낙점됐다. 여기서 모모에, 토모카즈 골든 커플이 탄생한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공동 출연을 계기로 결혼까지 가는 연예인 커플이 많지만, 그 시초는 모모에-토모카즈 커플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모모에는 은퇴전까지 도호 영화사의 간판 스타로 활약하여 10편의 주연작을 당해년 흥행 10위안에 올려놓는다


2.2.2. 사회 현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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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경험 (ひと夏の経験)

1974년 당시 푸른 과실이 대히트해 인기 가수 반열에 오른 야마구치 모모에는 이후 내놓은 싱글 '금지된 놀이', '봄바람의 장난'도 매상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비슷한 노선을 했기 때문에 콘셉트의 변화를 줘야만 했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부르는 악곡은 데뷔곡인 '그럴 즈음'부터 쭉 작사 센게 카즈야, 작곡 토쿠라 슌이치 콤비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5번째 싱글도 센게 & 토쿠라의 콤비로 만들기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토쿠라 슌이치(먼 훗날인 2021년 일본 문화청 장관에 부임하는 인물)와 센게 카즈야는 위기감을 안고 있었다. 이에 미야코와 센게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5번째 싱글 작성에 즈음하여 면밀한 협의를 거쳐 더욱 과격한 노래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 미팅 일주일 후 작곡가 토쿠라 슌이치에게, 센게 카즈야가 작사한 노래가 도착했다. 이 노래의 대표적인 가사가 바로 "당신에게 여자의 가장 중요한 것을 주었다."였다. 이것은 미야코 슌이치의 예상을 웃도는 과격한 가사였다. 하지만 토쿠라는 당황하면서도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능성에 기대어 이 가사에 곡을 붙였다. 이 콤비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새로운 도약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담담하게 노래를 불렀다. 무표정하고, 억양을 붙이지 않고, 오히려 던지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으로, 15세의 야마구치 모모에가 '한여름의 경험[13][14](ひと夏の経験)'을 노래했다. 일명 '소녀성'을 표현한 노래. 검소한 의상, 청초한 얼굴 과격한 가사와의 갭. 이 노래의 반향은 푸른 열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완전히 일본 전국을 뒤집어 놓는다. 당시 음반업체 프로덕션에 항의 전화와 비난 편지가 연일 무더기로 쏟아졌다. 언론도 술렁였다. 일본의 학부모 단체에서는 이 노래들이 방송에 나오지 못하도록 단체활동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비난했다. 사실 본인도 이런 노래들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꼈으며, 그래서인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종종 뻘쭘해했다. 그러나 이 곡은 대 히트해 한마디로 사회현상이 되어버렸다. 이 곡으로 모모에는 부동의 톱 스타가 되며 이 노래로 처음으로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한다.

프로듀서 사카이 마사토시, 작사 센가 카즈야, 작곡 토쿠라 슌이치의 콤비가 만들어 낸 야마구치 모모에의 노래는 연달아 히트 해 갔다. 그리고 5번째 싱글 〈한여름의 경험〉은 약 45만장의 판매량을 쏟아냈고 이 무렵의 야마구치 모모에는 더 이상 밀리지 않는 톱스타가 되었다. 모든 것이 프로덕션의 계산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런 과격한 노선은 모모에 역시 거부감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 공포심과 방어적 본능이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또한 그녀는 "확실히 노래로서 보았을 때, 아슬아슬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노래를 부름에 따라 내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여성의 신경이라고 하는 받아들이는 방법이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라고 자서전에 적기도 했다. 1974년 12월에는 야마구치 모모 최초의 발라드 곡 '겨울의 색(冬の色)'이 발매되며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며 판매량도 52만장을 기록하며 모모에 커리어 역대 최고 판매량을 갱신하며 톱 가수로서 발돋움한다.

금지된 놀이, 한여름의 경험에 이어 나중에 푸른 노선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작품에는 전국의 PTA로부터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화제가 되고, 작품마다 표현력을 몸에 익혀 대히트를 연발한 결과, 야마구치 모모에는 톱 아이돌의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데뷔 초의 그녀는 왜 자신이 이렇게 자극적인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당혹스러웠을지 모릅니다. 야마구치 모모에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제안에 대해서도 「네, 알겠습니다」라고 조용히 받아 들여 결코 감정을 겉으로 나타내는 일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감독이 세아미의 '숨기면 꽃'이라는 말을 배웠다고 하는데도 그 받아들이는 방법에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 사카이 마사토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프로듀서)#


히트곡이 푸른 열매부터 금지된 놀이, 봄바람의 장난, 한여름의 경험으로 이어진 히트곡 가운데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창력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6집 싱글 작은 감상 때문이다. 1974년 9월 발표된 작은 감상은 당시로서는 꽤 참신한 록 사운드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비트로 자연스럽게 불렀다. 그것이 레코딩의 스탭에게 이해되어, 단지 노래 부르는 것에의 익숙함이나 리듬의 좋은 것 뿐만이 아니라, 가창력 그 자체가 향상되고 있다고 재검토되었던 것이다. 음반 제작 디렉터였던 호리 프로의 가와세 야스오는 싱글 3개월 뒤 발매되는 앨범 <15세>를 위해 느린 편곡으로도 레코딩을 하고 있다. 그 무렵의 심정을 이것은 '록 밴드의 사운드다'라는 제목 아래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앨범 무렵, 모모에는 아직 미묘하게 어린 티가 남는 발성이었다. 그러나 노래를 시작한 「물론 할 수 없는 일이지만~」이나, 사비의 「왜 사랑받으면 안되는거야~」의 리듬에도, 모모에는 실로 기분좋은 듯 노래를 부르고 있다. 처음의 업 템포의 록 사운드라고 하는 어레인지였지만, 이런 리듬이라도 해내 버리는가 하는, 약간 놀라움을 가진 곡이었다." 그 당시의 아이돌이 2 종류의 다른 어레인지로 노래를 레코딩하는 등, 예산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와세는 앨범·버전에 대해서, 이런 견해를 나타내고 있었다. "싱글 창법이 약간 돌진하게 부르는 업템포 록이라면 이쪽은 미묘하게 무겁게 리듬을 타는 헤비 록의 느낌이다. 이러한 차이로 요구되는 창법의 변화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표현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모모에의 노래가 능숙해진 것이다." 앨범 버전의 작은 감상을 들어 보면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창력이 향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4세에 데뷔한 야마구치 모모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격한 주제와 가사를 가진 작품에 대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스태프에게 주어진 노래와 함께 성장해 왔다. 그리고 두 가지 '작은 감상'을 부르면서 그녀의 보컬에는 비트감 있는 록 사운드와 정감을 담은 어른스러운 세계가 모두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노래에 대한 내용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자서전에서도 기술되어 있다.

확실히 노래로서 보았을 경우 아슬아슬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노래하는 것에 따라, 내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여성의 신경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아직 상상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자의 미묘한 심리를 노래라는 매체를 통해 스스로 하나하나 확인해온 것 같다.

― 자서전 "푸른 시절"에서#


당시 희망대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야마구치 모모에. 그러나 가수로서 인기가 폭발한 야마구치 모모에의 일과 학업 양립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사쿠라다 준코 등 다른 고교생 탤런트도 그랬지만, 모모에가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시간은 늦고, 그런데도 아침 8시 반에는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노래 과외를 다닌다. 그리고, 밤에는 TV의 노래 프로그램의 녹화나 드라마의 촬영. 매일이 이런 스케줄이었다. 아무리 젊은 나이라도 엄청나게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그러한 식으로, 보통 고교생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보내고 있던 모모에였지만, 그런데도 모모에는 학교에서 인기 탤런트라는 특별 취급을 받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힘들어도 아침엔 정시에 등교해 숙제도 내고 시험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기본 부기 수업 중의 일이었다. "내 딸이 너의 팬이라서 말이야, 사인을 원해" 수업 담당 교사가 수업 중에 모모에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리고 다음 기본 부기 시간. 또 같은 교사가 이번에는 모모에의 손목시계를 보며 "어, 너,예쁜 시계를 차고있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교 동급생들과는 함께 놀 시간도 없어 그렇게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를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어른인 교사가 한 학생인 모모에에게 그런 말을 던지는 것이다. 모모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를 느꼈고 모모에는 이후 기본 부기 수업을 졸업할 때까지 보이콧했다. 모모에의 성적업의 부기란에는 번외라고 주필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모모에는 "일은 일, 학교는 학교"라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한다. 그래서 모모에는, 함께 노는 시간은 적어도, 자신을 특별 취급하지 않는 친구들을 진심으로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1974년 10월, 야마구치 모모에의 두 번째 장편 드라마 '붉은 미로'가 시작된다. 이것이 그 대박 시리즈가 된 붉은 시리즈의 첫 번째다. 이 시리즈는 그녀의 대표작이 된다. 우츠이 켄이 모모에의 부친역으로서 출연하고 있다. 지금은 '붉은 시리즈'라고 하면 야마구치 모모에의 작품이라는 이미지가 정착되어 있지만, 의외로, 이 '붉은 미로'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는, 주역이라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붉은 미로에서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존재감, 그리고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로 인해 붉은 시리즈 2번째 작품인 붉은 의혹에서 야마구치 모모에가 주역으로 나오게 된다. 또, 야마구치 모모에와 마츠다 유사쿠가 공동 출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작품이다. 붉은 미로는 평균 시청률은 18.9%, 최고 시청률 22,7%를 기록한다.

붉은 미로가 방영을 시작한 1974년 10월 25일, 호리프로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팬클럽지 '코끼리'를 창간한다.[15] 이름의 유래는 그녀가 좋아하는 동물이었던 '코끼리'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코끼리' 사랑은 사실 당시 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왜냐하면, 모모에의 데뷔 싱글 '그럴 즈음'의 쟈켓이나, 팜플렛, 광고지등에는,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코끼리의 일러스트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동년 10월 25일에 창간 된 팬클럽 잡지 코끼리 NO.1에는, 그 당시 방영되고 있던 텔레비전 드라마 '붉은 미로'의 특집이나, 발매 예정의 레코드 리스트, 모모에의 최신 스케줄 등 팬들이 궁금해 한 정보가 가득했다. 그 후로도, 정기적으로 '코끼리'는 간행되어 모모에 팬을 향해서 여러가지 정보가 전달되었다. 덧붙여 이 팬클럽 잡지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와 함께 폐간이 되었지만, 모모에의 팬클럽 그 자체는 해체라고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의 시점에서 팬클럽의 회원이었던 사람들은 '영원히 회원'으로서 호리프로의 명부에 게재된 채로, 그 후에도 야마구치 모모에 관련의 신상품의 안내등이 보내지게 되었다. 실제로, 야마구치 모모에 은퇴 후 2년 정도는 영화의 비디오 발매 정보 등이 팬클럽의 회원에 전해지고 있엇다.

1974년은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준코는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양분했다. 이 둘은 전국적인 스타가 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열광적인 세대가 바로 대학생이었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이 도쿄대학와세다대학의 투쟁이다. 우선은 와세다 대학이, 먼저 인기를 얻고 있던 사쿠라다 준코를 이미지 걸로 했다. 그리고 와세다의 학생들 사이에서 '사쿠라다 준코를 지키는 모임'과 같은 마음대로 사쿠라다 준코를 응원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이것에 대항한 것이 도쿄대학이었다. 이번에는 도쿄대학이, 사쿠라다 준코의 대항마인 야마구치 모모에를 이미지 걸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도쿄대 학생들은 야마구치 모모에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모모에를 응원했다. 도쿄대학에서는 만담 연구회가 '야마구치 모모에와 친구가 되는 모임'을 만들었다. 물론 이 모임에 들어갔다고 해서 정말 야마구치 모모에와 친구가 될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래도 이 조직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심지어 이 싸움에 게이오기주쿠대학 등 다른 대학들의 참전도 시작됐다. 오히려, 이번에는 와세다대학에 '야마구치 모모에를 도쿄대학으로부터 되찾는 모임'이 발족했던 것이다.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집단이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혈안이 되어 각 모임에서 열띤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1974년 9월 야마구치 모모에의 첫 주연 영화가 발표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원작의 이즈의 무희다. 이 작품은 1966년요시나가 사유리의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는데, 그 때의 감독인 니시카와 카츠미가, 모모에의 작품으로도 연출을 하게 되었다. 이즈의 무희는 지금까지 무려 5차례나 영화화됐다. 주연 여배우의 면면이 화려하다. 다나카 키누요, 미소라 히바리, 와니부치 하루코, 요시나가 사유리, 나이토 요코. 이즈의 무희에 주연했던 여배우들은 그 후 모두 유명 여배우로 성공하고 있다. 거기에 신인인 야마구치 모모에가 발탁됐고 호리프로는 가수로서 브레이크한 야마구치 모모에를 여배우로서도 본격적으로 홍보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야마구치 모모에를 주연으로 시작한 이 기획의 가장 중요한 결정사항은 모모에의 상대역이었다. 영화제작사인 도호는 당시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폭발하고 있던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에 말려드는 형식으로 모모에의 상대역 일반모집을 했다. 젊은이들은 '나야말로!'라며 모두 모집에 응모했다.

서면으로 응모한 남자의 수는 무려 1만 5천명.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을 본 남자들은 4천명. 일찍이 유례없는 대규모 오디션이었다. 심지어 이 오디션은 아무나 응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응모할 수 있는 남성의 조건은 3가지 ①나이 17세부터 23세까지 ② 신장 170cm 이상 ③ 인상은 상쾌한 느낌으로서 다이쇼 시대의 고교생 분위기의 남성. 그리고 최종 전형에 통과한 남성은 23명. 그중에는 '야마구치 모모에를 지키는 모임' 등에서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미쳐가고 있는 도쿄대 학생도 있었다. 그 밖에도 13명의 대학생이 있었다. 당시 언론들은 '드디어 대학생이 진짜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다가간다!'라고 거기에 관심을 집중했지만 결국 상대역은 글리코 CF에서 공동 출연한 미우라 토모카즈로 결정됐다. 결국 모모에의 팬들은 영화 이슈 만들기에만 이용됐을 뿐이다. 그 대신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무라. 토모카즈 라는, 이후의 일본 영화사를 논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골든 콤비가 이즈의 무희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아직 이 무렵의 모모에와 토모카즈를 세간에서는 골든 콤비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즈의 무희'는 대박이 났다. 흥행 수입 8억 3,000만엔. 당시 흥행 3위를 기록했다. 그렇게 첫 주연작을 히트시킨 야마구치 모모에는 배우로서도 한걸음 내딛었다.

1975년 당대의 스타로 등극한 야마구치 모모에는 설날부터 TV에서 그녀를 보지 못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의 톱스타를 기용하던 기업 후지 컬러는 이 해 정월판부터 광고에 야마구치 모모에를 기용했다. 1탄은 그 유명한 '모모에를 지키자'편이다. 설에만 있었던 특별 버전이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는 명작이다. 그 후로도 가요프로그램, TV드라마 등 야마구치 모모에는 TV에 계속 출연했다. 대여배우에의 등용문이라고 불리던 이즈의 무희에서 훌륭하게 주연을 연기한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2번째의 영화 주연이 정해졌다. 유명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파도소리가 그것이다. 이 영화도 당시 아오야마 쿄코, 요시나가 사유리, 오노사토 미도리 등 유명 여배우에 의해 영화로 제작됐다. 미시마 유키오는 살아 있을적에 촬영지를 가미시마로 만드는 것을 영화화의 조건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모모에가 주연한 파도소리도 당연히, 카미시마에서 촬영되게 되었다. 당시 유명 작품들에 기용으로 모모에도 부담이 컸지만 미우라 토모카즈도 부담이 컸다. 이즈의 무희에서 야마구치 모모에의 상대역이 되어 처음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이미 톱스타로 올라선 모모에와 달리 이때의 토모카즈는 어디까지나 모모에의 상대역으로서 포지션에 불과했다. 파도소리는 그 해 흥행 6위를 거두었고 모모에는 착실하게 배우 커리어를 쌓는다. 한편, 1975년 꽃의 중3 트리오는 꽃의 고2 트리오로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생 3명의 아이돌 가수의 등장은 센세이셔널했지만, 이들의 인기는 멈출 줄 몰랐다. 각각의 활동도 물론 주목받았지만, 3명이 함께 하는 가요 프로그램도 많이 출연해서, 이 때의 시청률은 매회 폭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3명이 함께 영화 공연은 없었다. 영화 촬영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세 사람의 일정을 조율하기 어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1975년 세명이 공동 출연한 8월 '꽃의 고2 트리오 첫사랑 시절'이 개봉한다. 야마구치 모모에, 사쿠라다 준코, 모리 마사코의 3인방을 주연으로 하는 청춘 영화이다. 공개 전 예상대로 영화는 대박이 났다. 흥행 수입 5억 9600만엔. 그 해 흥행 4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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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화제를 몰고 다녔던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 콤비는 '러브 러브 쇼'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내용은 프로그램이 마음대로 선출한 남녀의 연예인을 출연시켜, 그대로 커플[16]로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계기가 돼 실제 결혼까지 한 커플은 무려 8쌍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결혼 활동 프로그램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에 당시 CF나 영화에서의 공동 출연으로 화제가 됐고, 이미 '골든 커플'로 알려진 모모에와 토모카즈가 출연했다. 위의 영상이 프로그램 내용 중 일부다. 당시 토모카즈와 모모에는 사귀지 않고 있었지만 요즘으로 치면 망붕이라고 불릴 일을 방송국에서 판을 깔아준 것이다.

또한 이 해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모모에짱 축제'를 열어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은퇴할 때까지 5회, 신쥬쿠 코마 극장에서 개최된 콘서트다. 여름방학 기간 중 개최되었고 이 해 8월부터 시작됐다. 첫회인 이 축제의 구성은 앞부분 1부가 검은 천사라는 제목의 록 뮤지컬이다. 무려 야마구치 모모에가 리젠트에 검정색 가죽 자켓이라고 하는 스타일로 열연했다. 후반의 제2부에서는 "노래다!! 축제다!! 모모에"라는 버라이어티 쇼를 열었다. TV 가요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그녀의 매력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팬들에게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녀는 결과적으로 1980년에 은퇴할 때까지, 이 '모모에짱 축제'를 계속하게 된다. '모모에짱 축제'는 그녀를 전국구 스타로 만드는데 큰 영향을 줬다. 당시 이 콘서트에는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폭 넓은 세대가 이 콘서트를 보러 오게 된다. 모모에짱 축제는 당시 젊은 세대에게만 인기였던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지도를 크게 올리는 계기가 된다.

모모에씨의 스테이지는 단순한 젊은 인기 가수의 무대라고 하는 들뜬 분위기가 아니고, 연극이든 온스테이지든 본격적인 격조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리허설에 입회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머리가 좋고, 무엇보다 쿨(냉정)함을 잃지 않는 '어른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무대의 진행을 담당하는 것은 무대 감독입니다만, 모모에씨는 사전에 제대로 대본 암기하고 있고, 무대의 능숙(객석에서 보고 오른쪽)이나 서투름(객석에서 보고 왼쪽)에서의 움직임이나, 상대역과의 대응에 정확한 판단을 나타내고 있던 것을 목격했을 때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 와타나베 키요시 지음, 고스게 히로시·듣는 사람 『「신주쿠 팽이」 단장들의 무대 뒤』#


당시 모모에는 여배우로서도 한층 더 비약을 보이게 된다. 1975년 이 해 10월에 바로 붉은 시리즈의 두번째 드라마 '붉은 의혹'의 출연하게 된다. 1편에서는 조연이었지만 이 드라마부터 주연을 맡게 된다. 시리즈 제1탄의 붉은 미로에서는 주역이라는 입장이 아니었던 야마구치 모모에였지만, 이번 붉은 의혹에서는 뚜렷한 야마구치 모모에 주연이라는 자리매김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붉은 의혹의 평균 시청률이 23.4%, 최고 시청률 30.4%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냄으로 1탄을 뛰어 넘어 대히트를 기록해 붉은 시리즈는 완전 야마구치 모모에의 작품이 되었다. 붉은 미로에 이어 다시 우츠이 켄이 모모에의 부친역이 되어, 이것으로, 야마구치 모모에와 우츠이 켄의 이른바 골든 부녀 등도 정착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모모에의 연인 역으로 미우라 토모카즈가 또다시 발탁됐다. 붉은 미로에는 출연하지 않았던 토모카즈였지만, CM, 영화에서 연달아 모모에와 공동 출연해, 이미 세간으로부터 인정받은 모모에와 토모카즈를 붉은 시리즈의 간판으로 만든다는 자연의 흐름이 되었다. 이 드라마는 매번 높은 시청률을 얻으면서 드라마가 시작되는 시간대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TV 앞에 몰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TBS계의 텔레비전 드라마 '붉은 의혹'에서 백혈병에 걸린 히로인을 연기한 야머구치 모모에는 일본 전국으로부터 '모모에짱, 죽지 마'라고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시청자를 그 세계로 끌어 들였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기세는 바다 건너까지 영향을 끼쳐 중국에서도 드라마가 대히트했다. 당시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중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여배우로 등극한 것이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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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붉은 의혹

1975년에는 싱글 '호수의 결심'[18], ''여름을 여는 청춘, 작은 욕망/고마워요 당신, 하얀 약속/산비둘기를 발매한다. 지난 해만큼 임팩트있는 노래들은 없지만 가수로서 안정기를 보낸 해라고 볼 수 있다. 여름을 여는 청춘으로 2회 연속 홍백가합전에 출장하게 된다. 고마워요 당신은 그녀의 주연 드라마 붉은 의혹에 주제가였으며[19] 산비둘기는 그녀의 영화 절창의 테마곡, 하얀 약속은 붉은 의혹에 ost이기도 했다. 또한 12월에는 미우라 토모카즈와 공동 출연한 영화 '절창'이 개봉. 이 절창은 과거에 닛카츠로 아사오카 루리코·코바야시 아사히, 이즈미 마사코·후나키 카즈오의 콤비로 영화화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대박이 났다. 모모에·토모카즈가 이전까지의 영화 '이즈의 무희', '파도소리'는 모두 리메이크며 게다가 모두 대여배우, 명배우가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곤 했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러한 부담감을 떨치고 모든 영화를 흥행시켰고 절창도 흥행 수입은 9억엔을 거두며 흥행 대박을 거둔다. 1975년은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있어서 비약의 해였다. 그와 동시에 모모에 팬들의 활동도 확대되어 갔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이 팬클럽 잡지들의 발행이다. 인터넷이 흔한 지금은 감을 못 잡을지 모르지만, 책자로 배달되는 팬클럽지는 당시 연예인 팬들에게는 보물처럼 소중했던 것이다. 당시의 아이돌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인기가 있던 야마구치 모모에에게는 여러 팬클럽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1976년 1월 17일, 야마구치 모모에는 17번째 생일을 맞았다. 직업상 있었지만 모모에는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요정 시골집에서 스탭에게 생일을 축하받았다. 17살이라고는 하지만 연예계에 들어온 지 벌써 4번째 생일이었다. 톱스타로서의 자각도 충분히 갖춘 야마구치 모모에의 정신연령은 실제 그것을 훨씬 웃돌았을 것이다. 바쁜 일과 양립하면서 다니던 히노데 여자고등학교에서도 벌써 최상급생이 된다. 일하는 틈틈이 학교에 다니다가 학교 앞에 마중 나오는 사무실의 차를 타고 다시 사무실로 직행. 그런 생활을 2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모모에였다. 당시 모모에는 '나만 남들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거부감이 생겨'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본래라면 친한 친구들에게 천천히 생일을 축하받는 나이이니 그런 고민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이 해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수학여행에도 참가하게 된다. 그 때의 모습은, 팬 클럽이 발행하는 '야마구치 모모에 신문'에도 사진을 첨부해 게재되고 있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가수로서뿐 아니라 영화배우로서도 부동의 톱스타였다. 영화 세 작품을 모두 히트시킨 후 '야마구치 모모에가 주연 하면 대박이 난다'는 것은 당시의 영화계의 상식이 되었다. 도호 영화가 모모에 주연의 신작을 기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76년 4월 야마구치 모모에의 영화 에덴의 바다가 개봉한다. 상대역은 계속 맡았던 미우라 토모카즈가 아닌 난조 유타카. 미우라가 아닌 난조가 나와 사람들은 항의를 했고 영화는 이전과 달리 흥행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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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 중 한 명이었던 야마구치 모모에
영화면 영화, 드라마면 드라마 모두 히트시켰다

1976년 4월, 야마구치 모모에 주연의 TBS 드라마 붉은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붉은 운명'이 시작됐다. 바로 전작품인 붉은 의혹의 히트 이후 이제 붉은 시리즈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중심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첫 신호탄이 될 작품이었다. 때문에 붉은 시리즈 제3탄 역시 야마구치 모모에가 주연으로 발탁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상대역은 미우라 토모카즈가 아닌 무명의 신인 배우 난죠 유타카였다. 미우라 토모카즈가 참여하지 않은 영화 '에덴의 바다'로 실망한 팬들에게 난죠 유타카는 그리 만족할만한 상대역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에덴의 바다와는 달리 붉은 운명은 호조를 보였다. 우려와는 달리 평균 시청률 23.6%를 기록해 붉은 의혹에 버금가는 대박 드라마가 된 것이다. 평균 시청률은 전작보다 더 잘나왔다. 아무래도 텔레비전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접근성이 높은 점도 이유겠지만 무엇보다 드라마의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 연출 등이 보는 사람을 매료시켰을 것이다. 이 덕에 앞으로 찍게될 드라마나 영화의 상대역이 미우라 토모카즈가 아닌 난죠 유타카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다음 야마구치 모모에 주연 영화 '바람이 분다'의 상대역은 미우라 토모카즈로 결정되었다.

바람이 분다는 7월 31일에 개봉했고 영화는 예상대로 대박을 쳐 7억 9,200만엔이라는 엄청난 배급 수입을 올렸다. 같은 해 흥행 수입 순위 6위라는 성적이다. 1976년 11월에는 붉은 시리즈의 네번째 작품 '붉은 충격'이 방영된다. 역시나 상대역은 미우라 토모카즈. 전작 붉은 운명의 상대역이 난조 유타카였던 것에 팬의 항의가 많아서였는지 결국에는 미우라 토모카즈가 다시 상대역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아버지 역으로 우츠이 켄이 아닌 나카조 시즈오가 발탁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역은 거의 우츠이 켄이 맡아왔으나 빡빡한 스케줄로 건강이 악화된 탓인지 반년간의 휴양을 취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역이 아닌 의사 역으로 초기에 잠깐 나온다. 이 드라마도 대박을 치게 되는데 평균 시청률 27.0%, 최고 시청률 32.6%를 기록했다. 붉은 시리즈 최고 시청률. 연기만 했다 하면 승승장구하는 그녀에게 모 평론가는 "연예인으로서 모모에가 가진 진정한 재능은 노래가 아니라 연기다."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2.2.3. 국민 스타가 되다[편집]



그는 기타를 들고 있었고, 그가 즉석에서 만든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것은 꽤 짧은 노래였다.

어린 소녀에게 어른이 되자고 부탁한 조용한 노래였는데, 사랑에 빠졌으면, 비록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녀가 그것에 대해 말해 줄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우자키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누군가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은 것도 처음이었고, 매니저와 감독에게 소망을 전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 자서전 "푸른 시절"에서


1976년 그녀의 인기가 더욱 더 높아짐에 따라,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녀의 경력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얻게 되었고, 그녀 자신의 노래의 작곡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선택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우자키 류도였다. 그녀는 다운타운 부기 우기 밴드가 녹음한 그의 노래 "눈물의 시크릿 러브(涙のシークレット・ラヴ)"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를 선택했다. 당시 우자키 류도의 이미지는 선글라스를 쓴 록 음악 가수로 모모에의 관계자는 기겁을 했다. 모모에는 여고생 아이돌이고 두 사람의 이미지와 스타일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모모에 스탭들은 그녀의 바람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한 당시에 우자키는 신인이었고 그의 아내 아키는 "아직 10대의 톱 아이돌이, 우리와 같은 신출내기에게 스스로 곡을 써달라고 말할 리가 없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라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20] 그러나 모모에의 스탭들은 결국 그녀의 소망에 굴복했고, 실험적으로 우자키 류도의 노래를 주문하여 앨범을 만들었다. 몇몇 곡들 중 하나가 바로 그녀의 최고 명곡 중 하나인 "요코스카 스토리"였다. 이들의 첫 번째 콜라보레이션은 1976년 우자키가 그의 아내 아키 요코가 작사, 작곡한 요코스카 스토리가 되었다. 아키는 이 곡을 쓰게 된 계기는 원래 이 곡이 주문되었을 때 만난 적이 없었던 그녀와 야마구치 둘 다 요코스카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후에 야마구치 모모에의 전성기 시절 작품 대부분은 아키 요코와 우자키 류도 콤비가 만들었다. 야마구치 모모에와의 협업은 그들에게는 큰 기회였고, 그들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작사, 작곡이 되었다.[21]

요코스카 스토리는 요코스카 마을을 배경으로 한 노래로, 소녀가 첫사랑을 경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과 같은 사춘기적 시각에서, 박동감 넘치는 록 비트를 동반한 이 노래의 활기차고 힘찬 세계는 모모에가 그 동안 부르던 노래와 분명히 구별되었다. 요코스카 스토리는 싱글 판매량에서 60만 장 이상 판매하며 가장 큰 인기를 끌었고, 차트 1위를 정점을 찍었다. 이 곡을 통해 새로운 야마구치 모모의 세계가 태어났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아이돌에서 진정한 아티스트로 발돋움하는 전환점이되는 음악이었다. 이 노래로 '소녀 아이돌' 이미지에서 벗어나 아키와 우자키의 노래를 통해 가수로서 한 단계 진화한다. 이전까지는 조숙한 여자 아이돌 이미지였다면 요코스카 스토리 이후의 야마구치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깨끗하게 지금을 사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게 되며 여성팬들의 지지도 늘어나게 된다. 이 부부가 제작한 노래들은 연속으로 대박 히트를 치게 되며 이때부터 앨범의 퀄리티도 완벽하게 상승하며 당시 소니의 기술력이 더해져 당시 아이돌계의 최고의 앨범 퀄리티를 자랑했다. 이때부터 만들어진 그녀의 최고 작품들은 여전히 시대를 초월하여 특별하게 들린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일본의 전설적인 가수가 된 이유는 그녀의 극적인 은퇴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음악에 있다. 히트 싱글들도 많지만 그녀가 대단한 점은 그녀의 앨범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앨범에서 모모에는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으며 당시 일본 아이돌 가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소울 음악, 록 음악 가릴거 없이 많은 장르를 앨범에서 보여준다. 이러한 폭넓은 그녀의 장르 스펙트럼은 후세의 일본 아이돌의 다양한 콘셉트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한마디로 당대의 일본 아이돌의 선구자적인 존재이다.

1976년 말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원작에 영화 슌킨 이야기의 골든 콤비 미우라 토모카즈와 함께 영화에 기용된다. 흥행 수입 8억 8,400만엔에 흥행 8위를 기록한다. 또 다시 영화를 히트시키며 흥행 불패 기록을 이어간다. 1977년 1월 17일, 그녀의 18번째 생일 파티로 도쿄 히비야의 일본 프레스센터 홀에서 참가자 300명이 넘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연예계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참석했으며 우츠이 켄, 쿠사후리 미쓰코, 아키 요오코 등이 참석했다. 모두 그를 친분이 깊은 연예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형국이다. 이제 18세밖에 안 된 젊은 연예인을 위해 거물급 유명인사들이 스케줄을 조정해 파티에 참석했다. 그의 18번째 생일에는 총 300명이 넘는 연예인들이 모이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당시의 연예계의 있어서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존재의 크기를 상징하는 하루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출석일수가 부족해 고등학교 졸업을 못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급우들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모에는 졸업만은 포기하지 않았고 동급생이 모두 졸업해 버린 학교에, 모모에는 출석 일수를 채우기 위해 4월부터 계속 다녔으며 6월에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졸업] 이 졸업식에 어머니도 참석한다. 1977년 3월 27일에는 '꽃의 고3 트리오'가 해산하게 된다. 이 셋이 고등학교를 졸업해 더 이상 학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나의 단락으로 보고 개개인이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하자고 결심했다. 데뷔 당초는, 비슷한 노선을 걷던 3명이었지만, 이제는 이미 각각의 캐릭터도 확실히 확립되어 있어, 이미 트리오라는 묶음에는 들어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본 무도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3명이 모여 콘서트를 개최하게 되었다. 모모에, 쥰코, 마사코의 3명은 각각 많은 스케줄을 조정하고, 해산 콘서트를 향한 준비에 힘을 쓰고 있었다. 셋은 콘서트 마지막에 억제할 수 없었던 눈물을 참으면서, 손을 잡고, 계속 노래했다.

1976년은 가수로서 야마구치 모모에가 다시 한번 반등하게 되는 해다. 먼저 요코스카 스토리가 대박을 치며 3회 연속 홍백가합전에 출장하며 다시 한번 상승세를 타게 된다. 요코스카 스토리 이외에 이 해에 나온 히트곡으로 사랑에 달리고/붉은 운명펄 컬러에 흔들리고, 붉은 충격이 있다. 요코스카 스토리와 붉은 충격은 하프 밀리언이 넘는 대히트를 거뒀고, 사랑에 달리고와 세번째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한 펄 컬러에 흔들리고도 40만장이 넘어 히트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을 하게 되는 해가 된다. 노래, 영화, 드라마 모두 히트시키며 당대의 국민적인 톱스타 위치에 오른것도 이 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는 젊은 층에 한정된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넓은 팬층을 자랑했다. 그만큼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리고 남녀의 구별 없이 사랑을 받았다.#


1977년은 그녀가 가수로나 배우로나 한층 더 성장해 일본을 대표하는 스타가 된 해다. 7월 30일 개봉한 영화 '진흙투성이의 순정'은 9억엔을 기록하며 또 다시 흥행을 성공시킨다. 8월 25일에는 제3회 일본 TV 페스티벌에서 톱 아이돌을 수상했고 이 해에 나온 가장 대표적인 히트곡이 바로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코스모스(秋桜)>다. 사다 마사시가 제공한 곡으로 이 가사의 내용은 원래 사다 마사시의 여동생 사다 레이코의 이야기로, 레이코가 결혼적령기가 될 무렵 그걸 걱정하는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모모에는 가족 이야기라면 지긋지긋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기에 이 곡을 이해하기 힘들어했지만, 훗날 결혼을 앞두고 "이 곡을 이제서야 이해했다"고 사다 마사시에게 이야기하며 그 노래를 은퇴 콘서트에서 불렀다. 4월에는 그녀가 주연을 맡은 슌킨 이야기가 칸 영화제에 출품하게 되기도 했으며 5월 16일에는 칸 영화제에 참석하기도 한다. 6월 19일에는 일본 무도관에서 여섯 번째 도쿄음악제(도쿄음악세계대회)가 개최됐다. TBS의 도쿄 음악제 하면 야마하 주최 세계 가요제와 함께 일본에서 개최된 양대 국제 음악제로 자리매김하는 권위 있는 음악제다. 레코드 대상과 같이 얼마나 팔렸는가를 평가하는 음악제가 아닌, 노래의 퀄리티, 가창력에 중점을 두어 평가되는 대회로서 알려져 있다. 모모에 역시 이 음악제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당시 노미네이트 된 가수로는 사와다 켄지, 오오하시 준코, 시미즈 켄타로 등 장장한 멤버였다. 그랑프리를 차지한 사람은 두 사람의 맹세의 마릴린 맥과 빌리 데이비스 주니어. 그리고 그 결과 외국인 아티스트가 다수 출연해 수상하는 가운데 무려 일본인인 야마구치 모모에가 부른 '몽선안내인'이 당당히 동상을 수상했다. 이미 배우로서도 한층 성장을 거둔 야마구치 모모에였는데 가수로서도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이 해에도 많은 히트곡을 내게 되는데 몽중안내인, 코스모스 모두 판매량이 40만장을 넘었고 첫사랑 책, 붉은 인연도 20만장을 넘는다. 또 이 해에 나온 또 다른 히트곡이 바로 이미테이션 골드다. 이 곡도 48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보여주며 모모에가 발매한 싱글 중 이 해에 가장 큰 히트곡이 되며 홍백가합전에 4회 연속으로 출장한다. 이때 입으려고 했던 드레스가 도난 당해서 다른 옷으로 입고 출장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1977년 12월에는 붉은 시리즈의 6탄 '붉은 굴레'가 방영된다. 이 드라마 역시 역대급 성공을 거둔다. 평균 시청률 29.5%. 최고 시청률 32.4%. 시리즈 최고 성적이었으며 모모에 커리어 최고 시청률이었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의 반열에 오른다. 12월에는 추리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 원작의 서스펜스 영화 '안개의 깃발'이 개봉한다. 야마구치 모모에, 미우라 토모카즈 골든 커플의 영화 제7편이 정해졌다. 모모에 영화라면 순애노선이 정평이었지만, 현대극에 도전하게 된것이다. 전작의 히트를 이어 받아 도호 영화는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마츠모토 세이초의 서스펜스에 도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영화의 감독을 맡은 니시카와 카츠미는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이 역을 맡기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모에 자신이 꼭 하고 싶다고 희망해 이 영화가 성사됐다고 한다. 이미 요코스카 스토리의 대히트로 가수로서는 아이돌의 이미지를 탈피한 야마구치 모모에였다. 모모에는 당시 이 역을 연기하는데 있어서 "육체적으로는 20대라도 정신적으로는 30대 같은 여자의 집념을 표현하는 역은 매우 불안하지만, 노래에도 여러 가지 레퍼토리가 있듯이, 이런 역할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모모에 영화 최초 현대극 도전이라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 공개에 앞서, 주연 야마구치 모모에와 공동 출연자인 미우라 토모카즈에 의한 히트 기원이라는 떡메치기가 신주쿠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당시 그녀의 인기로 방대한 수의 팬이 모이는 것으로 예상은 끝난 상태지만 떡메치기 당일이 되어 보니 합리적으로 예측한 것보다 야마구치 모모에를 보려고 훨씬 많은 거대한 군중이 한꺼번에 신주쿠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엄청나게 몰리자 영화 관계사의 요청을 받은 요츠야 경찰서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수의 경찰이 출동했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떡방아는 불과 3분 만에 끝났다. 경찰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다. 이 영화 역시 히트를 치며 흥행 수입 8억 8,900만엔. 흥행 8위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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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뛰어넘은 명곡 <플레이백 파트 2>(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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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유철도의 캠페인이자 동명의 캠페인 송이었던 <좋은 날 여행(1978)>
1978년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인기 스타에서 일본 연예계 최정상의 군림하게 된 해다. 1월에는 처음으로 오사카 지역에서 모모에짱 축제를 개최한다. 1월 28일, 29일의 2일간 한정으로, 오사카인을 초빙한 모모에 축제가 열렸다. 그 내용은 전년도에 신주쿠 팽이에서 개최된 제3회 모모에짱 축제와 거의 동일하다. '제3회 모모에짱 축제'는 TV로 방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텔레비전으로 그 내용을 보고 있는 팬도 많았을 터이지만, 그래도 오사카 코마 극장은 사막에 끓은 샘물처럼 군중이 몰려들고 있었다. 뮤지컬 거미 마을, 히트 퍼레이드 모모에와 함께 2부 구성. 티켓은 매진으로 대성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뿐인 공연이 된 오사카 모모에짱 마츠리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3월에는 3시간 드라마 시대극 바람이 불탔다에 미우라 토모카즈와 함께 주연으로 기용된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의 후처 이토 우메코의 생애를 그린 드라마로 미우라 토모카즈가 이토 히로부미 역할을 맡았으며, 모모에는 그의 부인 이토 우메코 역할을 맡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를 청년기, 장년기로 나누어 2부로 구성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시청률 34.4%를 기록하며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 당시 모모에의 인기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대 일본 최고의 거물급 작가 중 한 명인 노사카 아키유키[22]가 야마구치 모모에를 극찬한것이다. 이 둘은 1978년 4월 4일 NHK에서 방송된 '빅쇼'에 두 사람이 함께 출연했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19세였고, 노사카 아키유키는 47세였다. 노사카는 이 방송에서 계속 야마구치 모모에를 존댓말로 대했다. 그리고, 야마구치 모모에를 만난 것을 "너무 영광스럽다" "차츰 마음이 이루어졌다"라고 말하며 극찬하기도 했다. 고집이 대단한 그가 모모에를 극찬한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노사카는 아직 10대인 야마구치 모모에를 내세워 "전후 첫번째 스타다. 화려함을 지닌 15대 우자에몬 이치무라[23]다"라고 절찬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는 또 모모에를 보고 "야마구치 모모에가 부르면 작사 작곡가의 재능을 뛰어넘어, 무엇을 불러도 야마구치 모모에가 된다." "정신적으로 뼛골이 굵어 외형적으로 쓸쓸하면서도 화려함을 지니고 있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무대에 서면 다른 스타가 희미해져 버린다."라고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을 앞에 두고 대절찬의 말을 보냈다. 또 그는 야마구치 모모에를 '상연'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높은 신분과 높은 지위를 가진 여성, 귀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노사카는 모모에를 보고 "아름답고, 품위 있고, 윤기 있고, 당신(야마구치 모모에)에게 딱"이라고 말했다. 관련 문서

5월 1일에는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플레이백 파트2'를 발매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냉담하고 무정한 음색, 표정, 제스처. 그녀의 퍼포먼스는 가히 혁명적으로 쿨&시크 그 자체였다. 이 노래마저 하프 밀리언이 넘는 히트를 기록하며 8월 24일 제4회 일본 TV 페스티벌에서 톱 아이돌 상과 감투상을 수상한다. 9월 1일에는 그녀의 대표적인 명반 앨범인 '드라마틱'이 출시된다. 당시 소니의 기술력으로 야마구치 모모에 사운드의 최절정을 달한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11월 15일 플레이백 Part.2로 제9회 일본가요대상 방송음악상을 수상한다. 또한 이 해에 나온 또 다른 히트곡으로 '절체절명(絶体絶命)'이 있다. 이전까지 시도했던 록 음악에 실험적인 요소를 접목시켰는데 37만장이 넘으며 역시 히트한다. 11월 21일에는 일본국유철도의 테마송으로 나온 <좋은 날의 여행(いい日旅立ち)[24]>이 전일본적인 히트를 치면서 그야말로 국민 가수로 발돋움한다. 당시 거물 싱어송라이터 타니무라 신지가 작곡한 걸작으로 누계 매출은 100만장을 기록하고 누계로는 야마구치 커리어 가장 큰 히트 곡이되었다.[25] 일본 음악 사상 최고의 노래 중 하나로 평가받는 노래로 2006년에는 PTA가 선정한 일본의 노래 100선에도 선정됐으며#, 2016년에는 뮤직 스테이션이 발표한 '일본에 영향을 준 노래'에서 1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햇병아리 아이돌을 넘어서 확고부동한 스타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선곡의 자유가 그녀에게 주어졌는데, 그녀가 선택하여 취입한 노래들은 지금도 일본 가요계를 빛내주는 명곡들이다. 모모에는 영리하게 타니무라 신지, 우자키 류도/아키 요코 콤비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녀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젖힌다. 고작 10대의 안목과 비전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전위적이고 독창적이었으며 노련했던 것이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압도적 인기와 실력은 일본 가요사의 역사마저 바꿔놓았다. 바로 19세의 나이에 NHK 홍백가합전의 홍팀 토리(마지막 무대)를 맡게 된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그녀가 탑스타지만 너무 어리지 않냐라면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2000년대, 2010년대 들어서 위상이 떨어진 홍백가합전이라면 모르겠지만, 당시의 섣달 그믐날의 NHK 홍백가합전이라고 하면, 가족 전원이 한자리에 모여 그것을 보면서 해를 보내야 한다는 일본의 전통 행사라고 해도 좋은 신성한 의식이었다. 당시 홍백의 평균 시청률이 무려 70%가 넘었다. 그 홍백의 토리 또한, 특별한 존재다. 당시의 홍백의 토리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거물 엔카 가수만이 담당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특히, 홍조의 토리는 10년 연속으로 쇼와의 대표 가희이자 국민가수인 전설 미소라 히바리가 토리를 맡은 역사가 있어, 바로 성역이라고 말해도 좋은 포지션이었다. 아무리 노래가 히트하거나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쉽게 자리를 뺏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그 인기가 무시무시한 모모에라고는 해도, 엔카 가수도 아니고, 게다가 아직 10대였던 야마구치 모모에가 홍백의 토리를 맡다니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야마구치 모모에가 토리로 결정되면서 19세의 야마구치 모모에가 홍백의 토리를 맡은 것은 일본 가요계 역사의 중대사건이 된 것이다. 그녀는 그 해 히트곡 '플레이백 Part.2'를 부른다. 이때 야마구치 모모에의 나이는 19세 11개월이었다. 이 최연소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녀는 명실상부한 일본 가요계 최정상의 위치를 굳건히 한다. 이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역대급 인기로 그녀의 소속사 호리프로의 메구로구에 세운 자사 빌딩은 '모모에 빌딩(百恵ビル)'이라고 불렸다.

1978년에는 가수로 정상을 차지한 해지만 영화에서도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이 해에는 영화 '돌아보면 사랑'과 '불꽃의 춤'이 개봉한다. 그리고 또 두 편의 영화를 흥행에 성공시킨다. 두 편 모두 흥행 순위 10위안에 안착시키는 등 대단한 티켓 파워를 보여준다. 불과 4년간 영화 10편을 흥행을 시키는 진기록을 보여준다. 가수로나 배우로서나 독보적인 커리어를 보유한 당대의 스타였다.

절체절명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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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연소 홍백 토리로 무대를 펼치고 있는 야마구치 모모에
1979년 1월 17일, 야마구치 모모에는 20세 생일을 맞이한다. 일본 연예계 최고 자리로 군림하고 있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것이다. 이날 밤 생일 파티는 도쿄 도라노몬 호텔 오쿠라에서 열렸다. 주역은 물론 야마구치 모모에. 초대받은 손님은 모두 800명. 야마구치 모모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거물급 연예인이 축사와 꽃다발을 들고 모였다. 이 파티에서 야마구치 모모에는 일무를 선보였다. 그것은 하나야나기 이토유키 스승이 일부러 이 파티를 위해서 창작했다고 하는 '쥬우하츠하루'다. 하나야나기 이토유키라고 하면, 일본인이라면 누구나가 몇번이나 본 그 백댄서 그룹 '하나야나기 이토유키사중'의 리더다. 실은, 야마구치 모모에·사쿠라다 쥰코·모리 마사코의 꽃의 고3 트리오 졸업 콘서트 안무를 한 것도 하나야나기 이토유키다. 모모에는 이 파티에서 "올해야말로 큰 상을 받겠습니다"라고 많은 참가자들 앞에서 야마구치 모모에는 선언했다. 1979년 3월 30일, NHK와 야마구치 모모에는 과거 전례 없는 이색 도전을 했다. 그것은 움직이는 화면이 없는, 스틸 사진만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의 방영이다. 이 사진들은 시노야마 노리노부[26]가 야마구치 모모에를 찍은 사진이다. 시노야마는 모모에가 14살부터 자신의 바쁜 스케줄을 모모에의 스케줄에 맞춰 계속 그녀를 찍어댔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흘렀고 시노야마가 모모에를 향해 누른 셔터 수는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시노야마 노리노부가 계속 찍어 온 14세부터 20세까지의 야마구치 모모에를 뽑은 사진 1500장을 일거에 내보낸다는 대담한 기획이었다. 후일 시노야마는 "야마구치 모모에는 쇼와 시대의 고도 성장기 때의 공적인 존재물이었다. 누구나 쇼와라고 하는 좋았던 시절을 되돌아 볼 때, 거기에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4월에는 후지 테레비에서 방송한 드라마 '일본의 여자 북국에서 온 여자'의 참여한다.

1979년 8월에는 골든 콤비로 불린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의 공동 출연 영화가 공개된다. 이 당시 영화계에서는 이 둘이 출연하면 반드시 대박을 터뜨린다라는 속설이 있었다. 그것이 당시 영화계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도호는 새로운 시도에 임했다. 8월에 공개되는 그들의 10번째 작품이 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무려 일반인 공모를 했던 것이다. 상금은 무려 100만엔. 토호에 보내져 온 응모 작품은 무려 1만 1천편을 넘었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완성해 보낸다. 설마 이 정도로 많은 시나리오가 보내질 줄은 도호 기업도 예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선된 작품은 '화이트 러브'. 원작자는 나고야에 거주하는 나카가와 미치코였으며 29세에 평범한 주부였다. 이 영화의 제작비에는 무려 1억 5천만엔이 투자되고, 그리고 8억 6000만엔의 배급 수입을 기록해 모모에, 토모카즈 골든 콤비 흥행 불패를 또 한번 증명했다. 이 영화 촬영 중 스캔들이 터진다. 화이트 러브 촬영으로 스페인으로 날아간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 콤비였다. 한정된 시간 내에 촬영을 마쳐야 하는 이들의 일정은 빡빡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는, 촬영 사이의 얼마 안되는 시간을 찾아내서는 둘이서 관광이나 쇼핑을 즐겼다고 한다. 영화 화이트 러브 개봉 몇 달 뒤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의 스페인 밀회 사진이 사진 주간지에 특종되고, 그 직후에 야마구치 모모에가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교제 선언을 했다. 스페인에 촬영 중이던 시절의 모모에와 미우라는 그야말로 열애가 한창이었다는 것이다. 팬들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둘이 사귄것으로 추측한다.

1979년 8월 23일, 제5회 닛폰 테레비 음악제가 개최되었다. 매년 여름 열리는 이 가요상 레이스에는 그해 히트곡을 날린 창창한 가수들이 일제히 출전한다. 제5회 니혼TV 음악제의 출전 가수도 그야말로 호화 그 자체였다. 고 히로미, 코바야시 사치코, 니시시로 히데키, 주디 온그, 노구치 고로, 야시로 아키, 나카하라 리에, 와타나베 마치코, 사잔 올 스타즈 등 쇼와 가요사에 찬연히 빛나는 거물급 가수들만 한자리에 모였다. 이 니혼 TV 음악제에서는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노래에 주어지는 「그랑프리」,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에게 주어지는 「가창상」, 장래성이 기대되는 가수에 대해 수여되는 「금비둘기상」등 여러가지 상이 있지만, 시청자가 가장 주목한 것이 잡지 「월간 명성」독자의 투표에 의해 결정하는 「톱 아이돌상」이다. 다른 상들은 누가 어떤 전형기준으로 뽑는지 불투명한데, 이 톱아이돌상은 팬들의 직접 투표로 결정되어 인기의 지표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아이돌상 레이스는 치열했다. 노미네이트 된 아이돌은 이시노 마코, 시부야 텟페이, 핑크 레이디, 사카키바라 이쿠에, 사쿠라다 준코가 있었다. 수상자는 당연히 최고의 인기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몫이었다. 또한 1979년 싱글 애염교[27]의 발매로 모든 싱글 총 판매량이 마침내 1,000만장을 돌파했다. 핑크 레이디, 모리 신이치 이후 세번째로 나온 일본 음악계 싱글 판매량 1,000만장 달성이었다. 2021년 기준 모모에의 싱글 판매량은 1,142만장으로 1970년대에 가장 많은 싱글 판매량을 판 아티스트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인지를 초월한 신비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해요. 얼굴도 내면도 보살 같다고 저는 생각했고, 그 이미지에서 나온 게 만주사화(만제샤카)라는 노래였습니다.

― 사카이 마사토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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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화>(1980). 섬칫할 정도의 카리스마와 아우라,
10대라고 도저히 보기 힘든 중저음의 보컬과 처연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당시 그녀는 가수로서는 10대임에도 40대를 연상케 하는 중후한 보컬링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이점은 이 해 발매한 <曼珠沙華(만주사화)>라는 곡에서 절정에 달하여 엔카에서도 그 기질을 많이 보여주었다. <만주사화>의 경우 아키 요코 작사, 우자키 류도 작곡[28]인데, 이 작사/작곡가와 연계하여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곡들이 수없이 탄생된다. 또 일본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타니무라 신지가 작곡한 "좋은 날의 여행"과 "이치에" 등은 평범한 틴에이저 아이돌은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어른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노래들인데, 모모에는 이 곡들을 연달아 히트시킨다. 또한 그녀의 경력이 끝나갈 무렵, 모모에의 음악은 더욱 정교해졌으며, 장르의 폭도 넓혔다. 대표적으로 그녀의 12번째와 18번째 앨범, 골든 플라이트 그리고 L.A. 블루는 런던과 로스앤젤레스에서 각각 현지 음악가들과 제작진을 이용하여 녹음되었다. 그녀의 21번째 앨범인 <피닉스 전설>은 록 오페라로 쓰여졌다. 그녀가 활동을 끝내기 전에 록 노래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우자키와 아키는 그녀를 위해 "Rock 'n Roll Widow"를 썼고, 이 곡은 콘셉트 앨범 뫼비우스 게임에 수록되었다. 이러한 히트곡을 연달아 내며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아이돌을 넘어서 명실상부한 일본의 가희(歌姫)로 우뚝 서게 된다. 1979년에는 평론가 히라오카 마사아키[29]는 "야마구치 모모에는 보살이다(山口百恵は菩薩である)"라는 평론집을 쓴다.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야마구치 모모에를 "보살"로 비유하며 은퇴 이후에도 개정판을 쓰며 그녀를 전설화했다. 그녀는 문화인들에게 당시 현대일본을 상징하는 스타로서 다뤄지며, 노래면 노래, 영화면 영화 모두 흥행을 시켜 미소라 히바리에 필적하는듯한 여왕이라는 칭호도 받게 된다.

1979년 8월 25일, 매년 여름 행사였던 '모모에짱 축제'의 다섯 번째 행사가 신주쿠 코마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해의 모모에짱 축제도 8월 31일의 마지막 날까지 1주일 연속으로 공연되는 대장정이어서, 예년보다 모모에의 열기가 대단했다. 직전기는 연일 심야까지 연습에 힘쓰고 있었다고 한다. 무대는 예년과 같이 뮤지컬과 히트 퍼레이드의 2부 구성. 그러나 1부 뮤지컬은 그동안 취향을 바꿔 고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 됐다. 제목은 '사막의 불사조' 여주인공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는 것은 물론 야마구치 모모에다. 이 무대의 연출을 다룬 것은 무려 다카라즈카 가극단 전속의 연출가·우에다 신지[30]. 우에다 신지는 당시 이케다 리요코의 인기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타카라즈카에서 상연해, 전무후무한 다카라즈카 붐을 일으킨 연극계의 거물이다. 그런 때의 연출가·우에타 신지가 한 사람의 아이돌 무대를 위해서 각본을 써 내려갔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를 이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무대 협연자도 호화롭다. 시저역에 이노우에 타카오, 안토니오역에 미네기시 토오루 같은 베테랑 배우가 겨드랑이를 굳혔다. 2부 히트 퍼레이드 야마구치 모모에와 함께는 '요코스카 스토리', '플레이백 파트2', '코스모스', '좋은 날 떠나라', '나긋나긋하게 노래해' 등 야마구치 모모에의 대표곡뿐만 아니라, '도쿄의 하늘 아래 당신은', '윈도'라는 환상의 명곡으로 불리는 음악도 선보이고 있다.

1979년 10월 1일2일, 도쿄 히비야의 제국극장에서 야마구치 모모에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그것은 야마구치 모모에 있어서의, 첫 노래에만 의한 리사이틀이었다. 리사이틀의 이름은 사랑이 시로 바뀔 때(愛が詩にかわる時). 이 타이틀명은 야마구치 모모에 자신이 생각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아이돌 리사이틀은 커버곡을 다수 선곡한 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사랑이 시를 대신할 때는 모두 야마구치 모모에의 오리지널 곡으로만 구성됐다. 게다가 전체 20곡 중 싱글곡은 6곡에 불과하고 다른 노래는 오리지널 앨범에서 선곡된 것. 리사이틀 구성에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의사도 크게 반영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둘째 날 야마구치 모모에는 불쑥 팬들에게 고백을 한다. '지금 내겐 특정 연인이 있어요' 장내는 순식간에 아주 조용해졌다. 팬들은 대부분 야마구치 모모에의 연인이라고 하면 누구나가 미우라 토모카즈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때까지 본인들의 입에서 연인 사이라는 등의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하는 사진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도 믿고는 있어도, 바라고는 있어도, 확신에 이르는 것은 하지 못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팬들은 숨을 죽이고 모모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모에는 "'그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서른 조금 전[31]...'이라고 말하고 애인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후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二人の恋について真実を語れないことが辛かった、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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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이틀의 야마구치 모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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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에 보도된 야마구치 모모에, 미우라 토모카즈
그리고 1979년 10월 19일, 둘의 열애 사진이 주간지의 특종으로 실린다. 이 사진을 찍은 기자 후쿠다는 도쿄 시부야구에 있는 배우 미우라 토모카즈의 자택 맨션 앞에서 잠복하기 시작했다.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의 교제를 특종사진 형태로 증명하려고 후쿠다는 주간지에 그 기획을 가져갔다. 하지만 차마 두 사람의 꼬리를 잡을 수는 없다. 신뢰할 수 있는 소식통으로부터 야마구치 모모에가 미우라 토모카즈의 자택에서 밀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그러나 전혀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후쿠다의 잠복은 그로부터 11개월에 이르렀다. 1979년 10월 19일 오후 10시 40분 잠복 중이던 현관문에서 모자에 선글라스, 바지 차림의 남녀가 나왔다. 미무라 토모카즈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후쿠다는 그 사진을 찍게 된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후쿠다 후미아키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순식간에 일본열도를 석권했다.

1979년 10월 20일, 프리랜서 카메라맨 후쿠다 후미아키가 특종사진을 찍은 다음 날이었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후생연금 홀에서 리사이틀을 열고 있었다. 낮의 부와 같이 밤의 공연에서도 야마구치 모모에는 예정 대로 다섯 번째 곡의 「요코스카 선셋·선라이즈」를 불렀다. 그 직후의 일이었다. "'요즘 주간지 같은 데서 많이 떠드는데...제 애인 얘기 들어주실래요? 엉뚱한 사람에게 폐를 끼쳤지만 이제 말해도 되잖아요."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의 골든 커플은 너무나 유명했지만 뜻밖에도 야마구치 모모에에게는 미우라 토모카즈 이외의 남자와의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모모에가 19세 때에는 무려 1년간 13명이나 되는 남자와 열애, 밀회가 있다고 기레기, 연예 주간지들이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물론, 그 소문은 모두 가짜였지만, 야마구치 모모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모에는 이름을 밝힌다. "그 사람 이름은 미우라 토모카즈라는 사람이에요." 오랫동안 끼어 있던 안개가 걷힌 듯 행사장 팬들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연인선언(恋人宣言)' [32]은 특종 사진이 찍힌 다음 날이어서 연인 사이라고 고백한 것이 특종 사진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기 때문이라고 언론은 보도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후쿠다 후미아키의 플래시에 터진 뒤에도 미우라 토모카즈와 야마구치 모모에는 카메라를 뺏는 것도 아니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걸었다. '볼 수 있었던 것에 충격은 없었다. 자연스러운 형태로 이야기할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진실을 이야기하자. 활자가 아닌 내 목소리와 내 말로 전하고 싶다.' 나중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자서전에서 그렇게 회상하고 있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는, 두 사람의 사이에 이미 그렇게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그는 직접 팬들 앞에서 두 사람의 진실한 사랑을 전하고 싶어 했다.

1979년 11월 8일, 야마구치 모모에의 갑작스런 (연인) 선언으로 일본 열도가 흥분 식지 않은 가운데 모모에-토모카즈 콤비가 연인 선언을 한 이후의 첫 번째 영화인 천사를 유혹의 촬영이 시작됐다. 모모에·토모카즈 골든 콤비의 영화라고 하면, 그렇지 않아도 일본 대중으로부터 주목받아 왔지만, 모모에와 토모카즈의 연애 관계가 공개되었던 것으로 천사를 유혹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일본 대중으로부터의 주목을 끌었다. 천사를 유혹의 제작 발표에서도 언론은 당연하듯이,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에게 교제에 대한 질문을 연달아 던졌다. 하지만 야마구치 모모에는 일과 사생활은 확실히 구별하고 있다며 냉정하게 대응했다. '천사를 유혹'은 아쿠타가와상 작가인 다카하시 미치쓰나가 1979년에 발표한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동 작품은 동거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 그 당시의 젊은이의 사랑의 형태를, 케이코(영화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연기한다)와 코헤이(영화에서는 미우라 토모카즈가 연기한다)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무려 1970년대의 닛카츠 로망 포르노로 청춘영화의 거장으로 불린 후지타 토시하치였다. 후지타 감독은 '톱스타인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를 굳이 평범한 일상생활을 그리는 작품에 투입함으로써 어떤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생기는지를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천사를 유혹은 도호의 설날 영화로 개봉됐다. "연인 선언"에 기인하는 팬 이탈을 걱정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그것은 기우로 끝났다. 개봉 당일부터 극장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는 연말부터 설까지 하와이에서 지낸다. 이것은 1974년부터의 항례 행사였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가 함께 출연했던 글리코의 광고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연인 선언 이후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는 다섯 번째 하와이로 떠났다.


2.2.4. 은퇴 선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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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회견의 야마구치 모모에, 미우라 토모카즈 커플

伝説から神話へ

전설에서 신화

― 마지막 라이브 앨범 제목


1980년 3월 7일, 충격의 뉴스가 일본 열도를 휩쓸었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뉴스였다. 그 진실이 밝혀지기 2시간 전. 때는 오후 2시였다. 매스컴 각사에 제1보가 도착했다. 제목은 "발언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가 기자회견을 연다."였다. 기자회견 장소는 바로 도쿄 프린스 호텔이었으며 언론사 기자들과 카메라맨은 총동원해 기자회견 장소로 도쿄 프린스 호텔로 몰려들었다. 회견 개시 예정 시간인 오후 4시보다 늦은 시간인 4시 15분에 등장해 베이지색 스리 피스를 입은 미우라 토모카즈, 그리고 검은 바탕에 꽃무늬 원피스에 순백의 블레이저를 입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회장에 나타났다. 미우라 토모카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약혼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연인선언을 하기 전부터 우리를 따뜻하게 지켜봐 주신 팬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미우라 토모카즈가 야마구치 모모에와 약혼해, 그리고 11월에 결혼하는 것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잠자코 듣고 사진사는 계속해서 플래시를 터뜨렸다. 이어 야마구치 모모에가 마이크를 잡았다. "제 자신이 이렇게 순조롭게 여러 가지 일이 진행되는 게 너무 행복해요." 그러나 다음 한마디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기자들의 움직임이 한순간에 멈췄다. "일은 전적으로 은퇴하겠습니다." 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 인기 최정점에서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한 기자가 "지금 은퇴라는 중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가수를 은퇴하면 여배우는 어떻게 할 건가요"라고 질문했다. 모모에는 "전적으로라는 뜻입니다만…"라고 조금 당황한 표정의 야마구치 모모에가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시선을 돌려 정중하게 답했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너무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결혼을 할 거면 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거기에 가까운 상태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일이 있다고 해서, 여러가지 일을(남편이 되는 토모카즈에게) 참아달라고 하는 것은, 매우 싫었습니다···" 은퇴를 결의한 이유를 담담하고 있는 그대로 모모에는 말했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미우라 토모카즈가 준 다이아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고 미소를 지었다. 당시 회견에 참석한 닛칸 스포츠의 기자에 회고에 의하면 그는 당시 보조요원으로 참여했는데[33] 진행 요원이 아무리 제지해도 멈추지 않는 셔터음과 플래시의 홍수였다고 한다. 그 후로 그는 이런 규모의 회견에 여러 차례 참가했지만 그만한 빛의 홍수는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결혼으로 절정기의 21세에 연예계를 떠난 모모에의 은퇴 선언은 그만큼 일본 연예사의 임팩트있는 순간 중 하나였다.#

1980년 5월 3일,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 발표 후 첫 TV 드라마가 방영됐다. 후지 테레비 계열의 단발 드라마 '나나한 학원·위기일발'이다. 이 프로그램명은 이 드라마가 매주 토요일 오후 7시반부터 방영되는 것에서 유래됐다. 당시 동시간대 프로그램으로 전설적인 국민 코미디 그룹 더 드리프터즈의 <8시다! 전원집합>이다. 최고 시청률 50%를 넘는 이 괴물 프로그램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후지 테레비는 매회 호화로운 배우진을 캐스팅 한 옴니버스 형식 드라마 나나한 학원·위기일발을 방송했다. 이 드라마의 제4화 '이제 외롭지 않아'에서 주연 여배우로 발탁된 야마구치 모모에다. 은퇴하는 10월 15일까지 야마구치 모모에의 스케줄은 어느 때보다 가혹했다. 각 방송사들, 영화사들의 러브콜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야마구치 모모에가 이 '이제 외롭지 않아'의 촬영에 들이는 시간은 단 5일. 리허설 1일, 본방송 4일 만에 찍어야 했다. 당연히, 촬영은 이른 아침부터 심야까지 이르렀다.

1980년 5월 7일, 야마구치 모모에의 마지막 주연 작품이 될 도호 영화 '고도(古都)'의 제작 발표가 있었다. 영화 개봉은 12월이었다. 바로 야마구치 모모에가 은퇴한 후이다. 본래라면 야마구치 모모에의 영화라고 하면, 여름과 정월 개봉이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의 골든 콤비에 의한 영화가 당시 기본적인 항례였다. 그러니까 도호도 예년과 같이 이번 여름에 모모에와 토모카즈 영화를 1편, 그리고 다음 해 정월에 은퇴 기념의 영화를 찍을 생각으로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은퇴를 향한 야마구치 모모에의 스케줄은 살인적이었다. 도저히 여름 영화를 촬영할 시간을 낼 수 없었고 그래서 도호는 여름의 영화를 포기하고 12월을 향해서 야마구치 모모에 은퇴 기념 영화 1편으로 좁히게 되었다. 야마구치 모모에 마지막 주연 영화로 선정된 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원작의 고도. 당초는 은퇴 기념 영화이므로 해외 로케이션의 대작도 검토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야마구치 모모에의 스케줄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국내에서 촬영할 수 있는 문예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되어, 데뷔 영화 이즈의 무희와 같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작품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미우라 토모카즈의 존재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영화라고 하면, 상대역으로 당연히 미우라 토모카즈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고도라는 이야기는 생이별한 쌍둥이 자매가 우연히 재회하고 다시 떨어지는 내용이라 연애 이야기가 아니다. 즉, 미우라 토모카즈가 연기하는 역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야마구치 모모에는 혼자서 회견에 임했다. 당시 영화팬들은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 커플을 볼 수 없는것을 보고 도호 영화, 호리프로에 분노를 향해, 각지에서 반발하게 되었다. 이대로는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영화감독 이치카와 쿤은 급히 원작에는 없는 나무꾼 역을 억지로 만들어 미우라 토모카즈를 급히 영화에 출연시키기로 했다. 이 영화도 10억엔 히트를 거두며 야마구치 모모에, 미우라 토모카즈 콤비는 마지막 영화마저 흥행을 기록한다.

1980년 9월 9일, 야마구치 모모에의 마지막 TV 드라마 제작 발표가 나왔다. 그녀의 대표작인 TBS 텔레비전 붉은 시리즈의 특별편이자 최종작인 '붉은 사선'이다. 원작은 미국의 추리작가 윌리엄 아이리시의 새벽 사선이다. 물론 주연 여배우는 야마구치 모모에고 상대 역의 주연 배우는 모모에의 약혼자인 미우라 토모카즈였다. 야마구치 모모에 있어서는 이것이 6번째가 되는 붉은 시리즈다. 붉은 시리즈에서의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공동 출연은 3번째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붉은 시리즈가 된다. 그의 아버지로 출연했던 우츠이 켄도 출연한다. 또 타카하시 마사야, 이시다치 테츠오, 사카가미 지로, 마츠바라 치에코같은 명 배우나 야마구치 모모에의 제일 친한 친구인 안 루이스, 전 캐럴의 조니 오오쿠라등이 출연하는 호화 캐스트다. 제작비도 두 시간짜리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일억엔을 쏟아부은 대작이다. 그렇다고 해도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전의 마지막 텔레비전 드라마이며, 높은 시청률을 취할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충분히 본전은 뽑을 수 있다라고 하는 제작사의 입장이었다. 제작 발표 후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까지는 대략 1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야마구치 모모에는 콘서트와 TV 출연 등 빡빡한 스케줄이 꽉 차 있어 붉은 사선을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닷새밖에 되지 않았다. 모모에는 짧은 준비기간 동안 익숙하지 않은 고고댄서 역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1980년 8월 21일에는 모모에의 31번째 싱글 '이별의 저편'이 발매된다. 동년 10월 5일에 일본 무도관에서 행해진 파이널·콘서트의 라스트를 장식한 노래이기도 하다. 우자키 & 아키 부부의 아래에서 악곡 의뢰가 있던 것은, 모모에의 은퇴 발표 직후였다. 우자키는 "모모에씨의 마지막 곡으로서 그리고 파이널·콘서트에서 라스트에 노래하는 곡으로서 써 달라는 오더였습니다."라고 우자키는 회상한다. 모모에의 마지막 곡을 만들 때에, 우자키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고 한다. "하나는 「에? 벌써 모모에씨에게 곡을 만들 수 없는 거야?」라고 하는 낙담.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제 쓰지 않아도 되겠구나」라고 하는 어깨가 내려진 기분이었어요. 당시는 자신의 밴드 활동과 병행해서 3개월에 한 곡 사이클로 신곡을 쓰고 있었습니다. 레코딩하고, 그것이 텔레비전에서 불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벌써 다음 곡의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을 반드시 히트시켜야 했습니다. 겨우 4년 정도의 일이었습니다만, 너무나도 어지러웠습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모모에의 전담 히트 메이커의 숙명이기도 한, 부담과의 싸움의 날들이기도 했다. 우자키 & 아키 콤비로서의 마지막 모모에의 곡은, 아이돌 가요곡으로서는 드문 6분을 넘는 대작이었다. 팬에 대한 모모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과 동시에, 우자키&아키 콤비로부터의 모모에씨에게의 이별의 말처럼도 읽어낼 수 있다. 우자키는 "끝맺음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낳은 고통도 있었는가 했더니 그건 전혀 없었습니다.아키가 준 가사를 눈으로 쫓는 것과 동시에 글자 뒤쪽에서 음표가 튀어나온 듯한 감각으로, 가사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멜로디가 입을 찧어 나왔죠.「작곡도 아키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너무나 쉽게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후일담을 밝히기도 했다.[34]#

1980년 9월 30일, 야마구치 모모에의 파이널 콘서트가 막을 열었다. 삿포로 공연을 시작으로 후쿠오카, 오사카, 나고야 등 전국에서 공연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10월 5일의 도쿄에서 막을 내린다. 운명의 10월 5일이 왔고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지만 언론매체들은 그의 은퇴 소식을 톱뉴스로 국민에게 알렸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는 쇼와 시대 역사를 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1980년 10월 5일 오후 6시 5분 일본 무도관에 드디어 마지막 야마구치 모모에의 콘서트 개막시간이 되었다. 야마구치 모모에 마지막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전국민이 치열한 티켓 쟁탈전을 벌였고, 극심한 경쟁을 이겨낸 뽑힌 자만이 공연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회장은 1만 명이 넘는 관중으로 꽉 찼다. 일반 팬들만이 아니라 연예계 인사들도 그를 둘러싼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의 마지막 무대를 보기 위해 무도관으로 모여들었다. 니시시로 히데키, 노구치 고로[35], 안 루이스, 쿠와나 마사히로, 우자키 류도, 아키 요코, 타니무라 신지, 사이조 히데키 등이 참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거물은 연예계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전후 최대 배우 중 한 명인 모리 미츠코다.[36]

모모에는 은퇴 콘서트에서 기획 회의부터 참여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선곡에는 강하게 참여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당시, 구성을 담당한 연출가 미야시타 야스히토는 이렇게 밝힌다. "우자키 류도 씨, 아키 요코 씨 부부와 처음 팀을 이룬 요코스카 스토리가 만들어 졌을 때 모모에 씨가 미야 씨 들어봐! 다음에 엄청난 노래가 생겼으니까라고 하더군요. 모모에씨는 거기서부터 변해갔군요. 은퇴 콘서트에서 모모에 양이 「어쨌든 나는 이 1곡을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 것도, 우자키씨 부부가 제공한 「만주사화」였습니다" 그 선곡을 둘러싸고, 모모에 팬의 사이에 소문이 퍼지고 있는 도시 전설이 있다. 왕년의 팬들은 "은퇴 콘서트에서 모모에씨는, 데뷔곡으로부터 최신곡까지 망라한 전 30곡을 피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뒤에서, 베스트 반적인 선곡을 요구한 종합 연출의 TBS 야마다 슈지 프로듀서에 대해서 '80년 발매의 앨범 「뫼비우스·게임」의 곡목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싶었던 모모에씨가 맹반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야시타는 소문을 "그것은 사실입니다"라고 인정한 데다가, "개최 위기"가 있던 것까지 밝혔다. 미야시타는 "모모에씨는 「요코스카 스토리」보다 이전의 노래는 별로 부르고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처음에 데뷔 초 때 곡은 아예 들어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TBS측에서 모모에씨와 친한사람을 통해서 설득하려고한거였어요. 그랬더니 모모에는 「나의 소중한 친구를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라고 불필요하게 화나게 해 버리고. 모모에 양은 이제 방송은 필요 없다고까지 했어요. 최종적으로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 모모에짱도 「알았어요」라고 하는 것으로 수습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모모에 씨는 항상 보고 있었던 때보다 몇 배의 아우라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금, 전신전령(全身全靈)을 관객에게 던지고, 안녕을 고하고 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 사카이 마사토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음악 프로듀서)#

야마구치 모모에는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은퇴 콘서트를 위해서 전 앨리스의 타니무라 신지가 작사 작곡한 노래 This is my trial부터 부르기 시작한다. 플레이백 Part2, 이미테이션 골드 등의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우자키 류도, 아키 요코 작사 작곡의 록 노래를 연발한다. 계속해서, 새빨간 드레스로 갈아입은 모모에는 그녀를 브레이크 시키는 계기가 된 한여름의 경험, 파란 과실등의 히트곡을 불렀다. 푸른 드레스로 갈아입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스테이지 위에 나타났다. 그리고, 타니무라 신지가 작사 작곡해 국철의 캠페인 송으로 채용된 명곡 '좋은 날의 여행'을 열창했다. 그리고, 요코스카 메구미라는 필명으로 야마구치 모모에 자신이 작사한 '카즈에'까지 열창했다. 그리고계속 부르는 노래처럼'으로 콘서트는 일단 끝났지만, 앵콜 소리에 응해 순백의 마치 웨딩 드레스 같은 의상을 입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다시 스테이지 위에 나타났다. 그러면서 눈물을 참으며 야마구치 모모에는 팬들을 향해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제가 선택한 이기적인 삶을 고집하게 됐습니다. 8년간 함께 걸어온 여러분이 '행복하게'라는 말이 가장 기뻐서··. 지금, 여러분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무리 거듭해도, 저의 기분에는 따라잡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멋대로인 저를 용서해 주세요.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무도관 은퇴 콘서트[37]

에서의 야마구치 모모에[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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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본에서 수많은 연예인들이 따라한 전설의 퇴장 장면.[39]
그러고 나서 야마구치 모모에는 마이크를 아주 조용히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 콘서트의 연출을 담당한 미야시타 야스히코는 이 장면을 "자주 연출로 마이크 놓게 했어요? 라고 묻는데 그렇지 않아요. 역시 모모에씨의 "마지막 기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녀의 메시지를 그 무대에 담아 만들고 있었겠지요. 어쨌든 21살에 진심으로 존경받을 줄 아는 여자였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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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노래 <이별의 저편>(1980년).
팬들에게 헌정하는 노래로, 1980년 은퇴 콘서트에서 울먹이며 노래를 부르다 마이크를 무대에 내려놓고 퇴장하는 장면이 매우 유명하다.
[40][41]
일본무도관에서의 파이널 콘서트가 있고 이후 1980년 10월 6일, 야마구치 모모에는 마지막 TV 생방송에 출연했다. 프로그램은 '밤의 히트 스튜디오'. 야마구치 모모에가 데뷔 이후 8년 동안 수도 없이 출연해 온 전설의 인기 가수 프로그램이다. 본래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는 인기 가수를 수십 명 불러 각각의 개인 노래를 선보이게 하는 구성이다. 하지만 이날은 특별했다. 프로그램의 최대의 공로자라고 해도 좋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결혼 발표로 은퇴를 했고, 거기서 야마구치 모모에를 위해서만, 아니, 오히려 일본 전국민을 위해서, '사요나라 야마구치 모모에(サヨナラ 山口百恵)'라는 이름을 붙여 야마구치 모모에의 노래만으로 구성한 스페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이 방송은, 일본 음악방송 사상 최대의 걸작으로 현재도 얘기되고 있다. 한 가수의 은퇴를 작별하기 위해서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모두 모인 방송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와 위상을 알 수 있는 방송이다. 그녀가 그만큼 모두에게 사랑받은 아티스트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대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다시는 없을 일본 방송계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다. 당시 은퇴 방송에 수많은 스타들이 출연하며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엔딩에선, 그날의 게스트 출연자들이 모모에를 에워싸고 "The Last Song"을 합창했는데, 이 때 모모에는 일절 눈물을 보이지 않고, 밝은 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들며, 코스모스의 화도를 향해 사라졌다. 또한 이 방송 시청률은 27.1%를 기록했다. 이 해 레코드 대상은 그녀에게 특별 대중상을 수여했다. 불과 21살의 나이로 공로상을 수여받은 것이다.

“山口百恵”という時代を作ってきた彼女の最後のステージ。同じ時間を共に出来たよろこびを感じながら武道館にいました。その存在感と圧倒的なオーラは今でも心の中にしっかりと残っています。その潔い去り方と共に彼女の存在は「永遠」になったと思いま

"야마구치 모모에"라는 시대를 만들어 온 그녀의 마지막 무대. 같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기쁨을 느끼며 무도관에 있었습니다. 그 존재감과 압도적인 감정은 지금도 마음속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그 깨끗하게 떠나는 방법으로 그녀의 존재는「영원」해졌다고 생각합니다.

타니무라 신지#

10월 일본 무도관 콘서트에서 은퇴 콘서트를 연 다음 달인 11월 19일 미우라와 결혼 후 연예계를 은퇴하였고 이후 한번도 연예계에 복귀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연예 활동 은퇴는 10월 15일 그녀의 소속사 호리프로 20 주년 기념식에서 참석한게 마지막 연예계 활동이다. 이 때 부른 곡은 '좋은 날 여행'이다. 다만 아내와 달리 미우라는 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으며 이후도 꾸준히 좋은 작품에 출연해[42]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은퇴 당시 나이는 21세[43]. 연예인으로 활동은 7년 반 정도였다. 은퇴까지 싱글 31작품의 누계 1630만장, LP는 45작품 누계 434만장을 판매, 1970년대 일본에서 가장 많은 레코드를 판매#했으며, 찍은 드라마, 영화 대부분을 히트시킨 명실상부 197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수이자 여배우였다. 불과 7년 반 활동하면서 그녀는 일본 음악사의 불멸의 존재로 등극하며 역사에 이름을 새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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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 사진. 둘 다 미모가 정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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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당시 영상
절정의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던 때에 은퇴했기 때문에 은퇴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다. 언론에 대한 혐오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고, 후술한 가정환경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어서, 미우라와의 결혼은 그저 형식적인 동기부여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 모모에 본인이 인정한 공식적인 은퇴 이유는 결혼이며, 평범한 주부로 돌아가서 가정을 돌보기 위한 것. 그 말대로 결혼 후에는 일절 미디어에 본인 측으로부터는 출연하지 않고 있다.


2.3. 은퇴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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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시절, 남편 미우라 토모카즈와 함께

장남을 출산한 후 참석한 기자회견
은퇴 후, 1980년 NHK에서 홍백가합전에 출연 의사를 물었으나 고사했고, 1982년 안 루이스의 곡을 작사해준 것 외에는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매스미디어는 그녀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했었다. 카메라는 늘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1987년, 모모에 개인의 친분인지 아니면 남편 미우라 토모카즈의 친분인지 모르겠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하라 다쓰노리 現 감독의 선수시절 결혼식에 부부가 참석한 적이 있다. 당연하겠지만 모모에 부부 사진을 찍기 위해 그 때도 많은 기자들이 결혼식장에 들이닥쳤다. 여기에서 찍힌 사진들이 공식석상에서 찍힌 마지막 사진들이며 그 이후에 찍힌 사진들은 전부 다 기자들이 모모에 집 근처나 이동하는 루트 주변에 몰래 잠입해 찍은 사진들이다. 이후에도 홍백은 2000년, 2005년 그녀의 복귀 무대 교섭을 시도했지만 당연히 거절됐다. 2019년에는 찌라시 언론 동스포가 '홍백 「모모에씨 출연」빅 서프라이즈 극비 협상 NHK가 찾은 돌파구'라는 기사를 냈지만# 동스포답게 찌라시였다.

은퇴 6년 후 찍힌 영상
일본 대중들은 40년동안 그녀가 한번도 연예계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굉장하다'라고 생각한다. 연예계 평론가들은 그녀의 인생을 '이상적인 인생', '최고의 인생이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1970년대를 그야말로 평정한 스타로 살다가 최절정의 인기에서 은퇴하고 이후 그녀만 바라보는 배우자와 어떠한 구설수 없이 잘 살아가는 인생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남편 미우라 토모카즈에 의하면 장남 유타로의 통학을 위해 자동차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통원하는 날이면 늘 학원 주변에 카메라맨들이 북적였다고 한다. 보다못한 미우라가 일본 인권 옹호국에 요청을 넣어서야 진정되었지만, 유타로의 입학식 때에도 인권 옹호국에 요청을 넣었음에도 담당자가 거부하였다. 어김없이 카메라맨들은 들이닥쳤고 카메라 앵글을 아이에게 줌인하자 아이가 무서워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보다못한 모모에가 해당 카메라맨에게 직접 귀싸대기를 날리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곧 주간지에도 보도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생활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모모에는 미우라에게 "내가 한때 연예계에 있었다는 것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도 했었다고.

은퇴 이후에도 그녀의 거주지에서 팬들이 서성거리는 것이 자주 발견되었고, 팬이 침입을 시도한 사건이 있기도 했다. 1999년, 그녀의 남편인 미우라 토모카즈는 부부가 직면했던 문제들을 상세히 기록한 부분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예전보다는 관심이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간간히 사진이 찍히는 걸 봐서는 어지간히도 모모에 가족을 괴롭히는 모양. 이렇게 사진이 찍히는 걸 보는 일본의 여론은 "이제 일반인이니깐 제발 좀 내버려 둬."라는 반응으로 일본인들도 반응이 나쁘다.

2019년 7월, 은퇴 이후 30여 년간 만들어 온 퀼트를 집대성한 퀼트 작품집 『시간의 꽃다발』이 발간되었다. 모모에가 본인 명의의 서적을[44] 발간하는 것은 1980년 은퇴 직전에 남긴 자서전 『푸른 시절』[45] 이후 39년만이다. 이 책을 통해 작품에 얽힌 비화와 본인의 최근 사진까지 공개하였다. 이 작품집은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10만부가 매진됐다.#

2021년 1월 30일 토요일, 그녀의 마지막 콘서트 『전설의 콘서트 "야마구치 모모에 1980.10.5 일본 무도관"』 이, 4K 리마스터 버전으로 2020년 10월 NHK BS 프리미엄에서 방송되어 대반향을 일으켜, NHK 종합에서 재방송이 결정되었다.[46] 왕년의 가수의 콘서트 영상을 BS로부터 종합으로 옮겨 재방송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NHK의 홍보 담당자는 "모모에씨의 마지막 콘서트 재방송을 원하시는 분들의 문의를 200여 건 받았습니다. 20대 이하의 분도 포함해, 폭넓은 세대의 분들이어서, 전세대의 분들로부터 문의를 받았다고 하는 형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NHK 프로그램의 지휘를 한 것은, 모모에의 현역 시절부터 홍백을 담당하고 있던 인물이며 은퇴 후에도 모모에에게 홍백 출장의 타진을 하고 있던 인물로 모모에는 "이 사람이 프로그램을 맡은 것이라면 괜찮다."고 판단하여 영상 방영의 고싸인을 냈다고 한다.

이 콘서트는 엄청난 반응을 일으켜 트위터 트렌드 1, 2위를 기록하고##[47], 야후! 재팬에서는 '모모에짱'이 실시간 검색어에서 1위를 기록[48]#하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가수로서의 파워를 보여줬다.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의 콘서트 재방송이었기 때문에, 헤이세이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인 SMAP의 콘서트 재방송을 해달라는 여론도 돌고 있다.# 이 방송의 히트로 NHK를 시작으로, 각 민방국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동영상 사용의 장벽이 내리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49]# 이 방송 이후 은퇴 콘서트 DVD 매출이 급상승해 오리콘 주간 DVD 랭킹에서 10년 7개월 만에 톱10 진입을 하기도 했다.#


3. 음악 스타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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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곡 메들리
데뷔부터 은퇴 직전까지의 히트곡을 부른 영상이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음악적 특징을 정리한 문단이다. 불과 7년 반 활동한 그녀지만 다양한 컨셉과 장르를 시도했으며 후에 일본 아이돌들의 다양한 컨셉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1973년 봄, 첫번째 싱글 '그럴 즈음'으로 데뷔한다. 마찬가지로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을 계기로 데뷔한 동갑의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준코와 '꽃의 중3 트리오'라고 불리며, 이윽고 영화 공동 출연도 맡게 되지만, 위에서도 언급됐지만 모모에가 '스타 탄생!'을 보고, 감명깊게 본 "동갑의 소녀"란, 모리 마사코였다. '사랑하는 마음의 눈'이라는 가사를 발랄한 멜로디에 담아 부른 '그럴 즈음'은 14세의 신인으로서 세상에 좋은 인상을 주는 노래이긴 했지만, 다른 여성 아이돌에 비해 월등히 개성이 돋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실제 세일즈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아에 조속히 노선 변경을 도모한 모모에의 스태프들은, 2번째의 싱글에 "푸른 과실"을 발매한다. 이 노래는 "당신이 원한다면 나 무엇을 해도 좋아"라는 가사로 노래 시작부터 센세이셔널했던 노래로, 야마구치 모모에는 당시 세상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에는 정말로 획기적으로 대담하고 조숙한 컨셉이었던 이 컨셉은 "푸른 " 노선이라고 불렸다. 이 노선은 이 후의 모모에의 세계관의 근간이 되어 가는데, 청순한 중학교 3학년이 아슬아슬한 가사를 부르는 것에 대해서 당시의 여론은 "이상하다" "의미를 알고 노래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비판의 소리도 높아졌다. 그렇지만, 원래는 스태프의 아이디어로부터 태어난 노선이기는 하지만, 한창 성장 중인 10대의 모모에는 어느새 그것을 스스로의 것으로서 만들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1974년에 발매한 5번째 싱글 '한여름의 경험'으로 그 극치를 맞이한다. 가사는 더욱 더 파격적으로 변화해 대표적인 가사가 '너에게 여자아이의 가장 소중한 것을 줄게'였다.

아키&우자키 콤비를 만날 때까지의 모모에는, 주로 센케 카즈야(작사)&미야쿠라 슌이치(작곡)의 콤비에 의한 악곡을 부르고 있었다. 청순파이면서도 그 노래는 에 대해 대한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노래들로 그녀가 갖고 있던 약간 어른스러운 분위기와 독특한 그늘과도 어우러져 인기를 끌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노래들은 1966년 프랑스 여가수 프랑스 갈이 부른 노래이자 세르쥬 갱스부르가 작곡한 노래 'Les Sucette'에 영향을 받았다.[50] 이렇게 해서 야마구치 모모에는 당대 여자 아이돌의 기본적인 콘셉트인 왕도적인 콘셉트의 정반대를 걸으면서, 독자적인 세계관을 쌓아 올려 갔다. 그러나 한편, 음악 프로그램에서의 토크나 잡지의 그라비아 등에서는 친근한 캐릭터를 선보여 갭 모에를 보여주기도 했다. 여느 여자와 다르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도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줬고, 반대로 아이돌로서는 더 아이돌 답게 행동하며 당시 대중들에게 호감을 끌어 모았다. '한여름의 경험'이 발표된 1974년에는 소녀에게서 이별을 선언하는 '조그만 감상', 죽음을 생각하는 현실적인 사랑모양을 노래한 '겨울의 색'도 발표했고, 특히 후자는 첫 오리콘 차트 1위의 히트작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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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라드 곡 겨울의 색

열여섯 살이 되던 1975년, 야마구치 모모에는 네 장의 싱글을 발표한다. 그 중에서도 9월에 발매된 '작은 욕망'은, 매우 스산한 멜로디를 가진 이별의 곡으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떠나야 한다"라고 하는 복잡한 감정을 가사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표현력은 고등학교 2학년의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절실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노래는 그녀의 대표곡으로 꼽히지는 않겠지만 그녀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표현력과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준 곡이라 하겠다. 12월 발표의 '하얀 약속'은, 그때까지 대부분의 싱글곡으로 작곡을 다루어 온 츠쿠라 슌이치에 대신해 미키 타카시가 쓴 것으로, 보통의 가수라면 평범한 곡으로도 될 수도 있는 어려운 악곡을 야마구치 모모에는 훌륭하게 부르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던 17세의 모모에는 당초 내세웠던 '푸른 성' 노선에 의해 정착된 이미지에, 그녀 자신이 서서히 위화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조숙한 소녀"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1980년 당시 은퇴 콘서트 연출을 맡은 미야시타에 의하며 요코스카 스토리 이전의 노래는 부르고 싶지 않았다고 하며 데뷔 초 때 곡은 아예 들어있지 않았을 정도로 모모에 본인은 이 당시 활동을 다소 부정적으로 본듯 하다.

이러한 푸른 성 노선에서 완벽하게 컨셉을 변화시켜 작사가에 아키 요코, 작곡가에 우자키 류도[51]를 기용한다. 이렇게 해서 양자 첫 만남으로 만들어진 노래는 13번째 싱글로서 발표된다. 이 노래는 '이 정도 이 정도 겨우 이 정도인가요'라는 가사로 유명한, 일본의 국민 노래 중 하나인 '요코스카 스토리'다. 캐치한 가사와 올디즈 조의 기분 좋은 템포의 노래로 지금까지의 어두운 소녀의 이미지로부터 돌변하여, 강하고, 깨끗하고, "나쁜 냄새"조차 느끼게 하는 여성상으로 컨셉을 일변시킨 것이다. 세일즈면에서도 약 66만장이라는 본인의 최고를 기록했고, 이후 아키&우자키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작곡 콤비로 활약하게 된다. 또한 아키는 모모에 또래 소녀의 시선으로 슬그머니 내려가는 한편, 어떤 때는 모모에에게 실제보다 서너 살 위인 여자의 심정을 노래하게 하고, 어떤 때는 서른이 넘은 여자의 복잡한 심리의 가사를 태연하게 썼다. 이런 당대의 높은 퀄리티로 만들어진 아키&우자키 콤비의 작품은 '1970년대 후반 일본 가요 황금시대'의 아쿠 유[52]가 내놓은 사와다 켄지핑크 레이디의 작품에 유일하게 맞서는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아쿠유 제국'이라 불리는 '70년대 후반 가요계'에서 그의 입김이 닿지 않은 거물급 가수는 야마구치 모모에 단 한 명이라고 해도 좋다.

작사가로 아키 요코, 작곡가로 우자키 류도를 영입했고 1976년 6월 발매된 요코스카 스토리를 계기로 조숙소녀에서 '멋진 여성'으로 컨셉의 변화를 이룬 17세의 야마구치 모모에. 하지만 그런 이미지 변화가 이뤄진 반면 그는 실로 다채로운 장르의 노래를 계속 불렀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8세의 그녀에게 아키&우자키 콤비가 제공한 몽선안내인은 지금까지의 리얼한 취향과는 다른 멜로디의 넘버였다. 로맨틱한 소녀의 마음을 담은 가사로, 말하자면 "모모에답지 않은" 작품이다. 그 후로도 이 곡을 가장 좋아한다는 팬들이 매우 많아, 야마구치 모모에의 장르의 폭이 넓음을 느끼게 하는 멋진 곡이다. 게다가 그 해 10월에 발표한 '코스모스'는 사다 마사시가 작사, 작곡을 한 것으로, 결혼해 부모를 떠나 가는 딸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쓴 노래다. 당시의 평론가들은 이 노래를 일본 여성의 그윽함이 배어 나온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 무렵 야마구치 모모에는 미우라 토모카즈열애설이 터지기 시작했고, 팬들로부터 교제를 바라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이 곡으로 일본 레코드 대상의 가창상을 수상했을 때, 스테이지에서 미우라 토모카즈의 축하 전화를 받고 모모에는 무심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열아홉 살이 된 그녀가 1978년 2월에 발매한 처녀자리 궁도 앞서 말한 몽중안내인의 세계관과도 통하는 낭만적인 노래다. 그러나, 아키&우자키 콤비의 대표적인 노래로서 당시에 팬이 가지고 있던 야마구치 모모에의 이미지는, 역시 '요코스카 스토리', '이미테이션 골드'같은 처연하고 강한 여성으로서의 노선이었다. 당시 우자키가 활약하고 있던 다운 타운 부기우기·밴드가 불량한 노선으로 음악을 하고 있던 영향도 다소 있을 것이다. 그 진면목은, 1978년 5월에 나온 플레이백 파트2나, 8월의 발매한 '절체절명'에서 발휘된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바보 취급하지 마. 당신 탓이잖아" "분명히 견디어 내라"라고 한 단호한 가사로 "강하게 지금을 사는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더욱 더 강하게 해 갔다. 그러면서도 당시에 모모에의 인기는 최고조를 달해 매스컴에는 스캔들이 많은 여성으로 왜곡되고 밑도 끝도 없는 열애 기사도 심심찮게 조작되는 등 그녀에게는 힘든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 야마구치 모모에는 이 노래를 발매하며 완벽하게 국민 가수로 입지를 다진다. 바로 1978년 11월에 발표한 '좋은 날의 여행'이다. 타니무라 신지의 작사, 작곡으로 이 곡은, 결코 청명한 여행의 노래가 아니고, 인생에 걸려 새로운 자신을 찾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고 한 의미도 짐작할 수 있는 슬픈 노래로, 누계로 약 100만장 판매라고 하는 야마구치 모모에 최고의 세일즈를 기록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가수로서 발돋움한다. 이 노래의 대표적인 가사로 '아 일본의 어딘가에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로 당시 19세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당한 모습으로 노래해 내는 모습으로 일본인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평론가들은 이 노래를 "일본의 노래"라고 평하기도 했으며, 일본국유철도의 여행유치 캠페인에도 사용된 이 곡은 국민 노래로서 자리까지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1970년대의 십대에 데뷔한 아이돌의 대부분이 한계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어른의 벽"이다. 기존의 깜찍하고 발랄한 노선에서 표현력도 따라잡지 못한 채 에로틱한 노선으로 전환해 수명을 단축시킨 사례는 솔로 아이돌의 전성기였던 1970~80년대에도 많이 보였지만, 모모에에게는 그런 걱정이 전혀 필요 없었다. 이때부터 모모에는 부드러운 노래를 부를 때도, 불량스러운 노선을 부를 때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돌을 넘어선 가희의 지위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벌써 20세를 맞이하고 있던 1979년 3월의 '비·사일런트에서는, '당신의 ○○○○를 갖고 싶습니다' '불타는 ××××를 좋아하니까'라고 하는 망상을 돋우는 가사가 화제가 되었지만(실제로는 각각 '정열' '설렘'이라고 입만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이 해의 하이라이트는 12월에 발표한 '애염교'일 것이다. 작사 마츠모토 타카시[53], 작곡 호리우치 타카오 콤비로 만든 이 곡은, 호리우치가 그 후에 만들어 가는 "팝 엔카"의 뉘앙스를 찬양하는 작품이다. 칸사이벤을 섞은 가사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불러, 아키, 우자키 콤비의 악곡의 틈새에서, '코스모스', '좋은 날의 여행'에 이어, 모모에는 또 엔터테이너로서 유례없는 개성을 빛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해 10월에 행해진 오사카 콘서트장에서, 모모에는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연인 선언을 하며, 다음 해 3월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한 이 해에는 더욱 더 실험적인 컨셉을 시도했는데, 대표적으로 이전까지는 팝과 록 음악을 결합한 노래들을 발매했는데, 완전히 록 음악인 '로큰롤 위도우'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녀는 가수, 배우로서 당대 최고의 톱스타였고, 더 성장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기에 은퇴 하는 것을 팬들은 아쉬워했고, "그만두지 말라", "아깝다"는 소리도 당연히 들었지만, 결혼일이 다가오면서 대부분의 팬들은 그녀의 은퇴를 축하하며 작별했다. 그것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노래나 연기로부터, 1명의 여성으로서의 진지한 삶의 모습이 비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평한다. 은퇴 직전 저술한 자서전 푸른 시절로 엮어진 모모에의 복잡한 성장 행적과 사생활 등 적나라한 사실을 보았을 때도 독자들은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해 10월 5일. 일본 무도관에서 개최된 라스트 콘서트에서 마지막 곡 '이별의 저편'을 부르고 야마구치 모모에는 무대 위에 하얀 마이크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데뷔 후 약 7년 반의 인생을, 마치 하나의 장대한 라이브와 같이 노래해 낸 가수였다. 그룹이 대부분을 차지해 연기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리얼리티보다, 연기자의 캐릭터에 어울리는 리얼리티가 선호되는 현재의 아이돌계에서는, 이제 야마구치 모모에와 같은 아이돌은 등장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녀의 시대와 함께 잊혀지지 않았고, 생방송으로 그녀의 활약을 체험하고 있지 않는 세대에도 그녀의 이름과 음악은 계속해서 전해지며 불멸의 것이 되었다. 지금도 새로운 아이돌, 스타가 등장할 때 그녀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유일무이한 상징으로서 그 존재가 영원하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언젠가 다시 그녀와 같은 슈퍼스타를 만나게 되리라는 일본인들의 기대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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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위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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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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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제
또한 가창력도 굉장히 높게 평가받는다. 당시 10대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저음의 톤, 특유의 독보적인 음색, 뛰어난 성량, 곡을 효과적으로 살리는 표현력으로 대표되는 가창력으로 오늘날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가창력이 좋은 가희 중 한 명으로 평가 받고 있다. 노래 잘하는 아이돌, 가희 랭킹에서 항상 상위권 혹은 1위를 차지할 정도다. 그녀의 담당 프로듀서 사카이 마사토시는 그녀의 보컬을 "그림자의 양면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밝고 청렴한 사람이지만, 때때로 그림자 부분도 느끼게 했습니다. 빛과 그림자를 겸비한 가수에게는 입체감이 생기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증가합니다. 무엇보다 빛도 그림자도 있으면 밝은 노래도 드라마틱한 노래도 맞고요. 다양한 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빛과 그림자를 가진 데다 대단한 노력가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신곡 녹음 때는 '공부를 많이 못 했어요'라며 스튜디오에 들어갔는데 막상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모든 노래가 완벽하게 제 것으로 바뀌었었죠. 예를 들어 코스모스는 음역이 넓고 어려운 노래입니다. 그래도 모모에씨는 열심히 공부하고 노래해주었습니다. 늘 그랬어요. 모모에씨가 여배우 활동도 했기에, 연기 공부를 하고 있던 것도, 가수로서의 성공으로 연결되었다고 보고 있어요. 표현력이 갖춰졌기 때문입니다. 노래, 표정, 바디액션 모두 훌륭한 표현력이 있었습니다."라고 평했다.# 모모에의 작곡을 담당했던 류도 우자키는 "모모에씨의 노랫소리에는, 본인도 깨닫지 못한 무시무시한 정념이 깃들어 있어요. 그 세대에서 그 만큼의 표현력을 가지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미소라 히바리씨 이래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평했다.#

또 높게 평가 받는 부분은 바로 특유의 독보적인 분위기. 그녀와 동시대에 활동한 가수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그냥 있는데도 아우라가 대단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4. 디스코그래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야마구치 모모에/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필모그래피[편집]



5.1. 드라마[편집]


방송일
방송사
제목
비고
1973.10.05 ~ 1974. 04.29
TBS 테레비
얼굴로 웃고
(顔で笑って)


1974.07.08 ~ 07.22
NHK
불빛이 글썽거릴 무렵
(灯のうるむ頃)

은하 TV 소설
1974.10.04 ~ 1975. 03.27
TBS 테레비
붉은 미로
(赤い疑惑)

붉은 시리즈 제 1편
평균 시청률 18.9%
최고 시청률 22,7%
1975.10.03 ~ 1976. 04.16
붉은 의혹
(赤い疑惑)

평균 시청률 23.4%
최고 시청률 30.9%
1976.04.23 ~ 10.29
붉은 운명
(赤い運命)

평균 시청률 23.6%
최고 시청률 27.7%
1976.11.05 ~ 1977.05.27
붉은 충격
(赤い衝撃)

평균 시청률 27.0%
최고 시청률 32.6%
1977.07.09
테레비 아사히
들국화의 무덤
(野菊の墓)

토요 와이드 극장
1977.10.02
TBS 테레비
아름다운 다리
(美しい橋)

토시바 일요 극장
1977.12.02 ~ 1978. 06.09
붉은 굴레
(赤い絆)

평균 시청률 29.5%
최고 시청률 32.4%
1978.03.06
바람이 불탔다
(風が燃えた)

3시간 드라마
시청률 34.4%
1978.11.21 ~ 1979.04.17
사람들은 그것을 스캔들이라고 한다
(人はそれをスキャンダルという)


1979.04.25
후지 테레비
일본의 여자 북국에서 온 여자
(日本のおんな 北国から来た女)


1980.05.23
이젠 쓸쓸하지 않아
(もうさみしくなんかないぞ)

토요 나나한 학원 위기일발
1980.10.19
납치된 슈퍼스타
(さらわれたスーパースター)

카오명인극장
1980.11.07, 11.14
TBS 테레비
붉은 사선
(赤い死線)

은퇴 기념 스페셜 드라마


5.2. 영화[편집]


개봉일
제목
상대역
비고
1973. 04. 14
그럴 즈음
(としごろ)

모리 마사코
조연[54]
1974. 12. 29
이즈의 무희
(伊豆の踊子)

미우라 토모카즈
첫 주연작
가와바타 야스나리 원작.
흥행 수입 8억 3,000만엔(1974년 흥행 3위)
1975. 04. 26
파도소리
(潮騒)

미시마 유키오 원작.
흥행 수입 5억 2,000만엔(1975년 흥행 6위)
1975. 04. 26
누나 손 부드럽게!
(お姐ちゃんお手やわらかに!)

와다 아키코
조연
1975. 08. 02
꽃의 고2 트리오 첫사랑 시절
(花の高2トリオ 初恋時代)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준코
흥행 수입 5억 9,600만엔(1975년 흥행 4위)
1975. 12. 20
절창
(絶唱)

미우라 토모카즈
흥행 수입 9억 1,800만엔(1976년 흥행 5위)
1976. 04. 24
에덴의 바다
(エデンの海)

난죠 유타카[55]
바바 마사루 각본[56]
1976. 07. 31
바람이 분다
(風立ちぬ)

미우라 토모카즈
흥행 수입 7억 9,200만엔(1976년 흥행 6위)
1976. 12. 25
슌킨 이야기
(春琴抄)

다니자키 준이치로 원작.
흥행 수입 8억 8,400만엔(1977년 흥행 8위)
1977. 07. 30
진흙투성이의 순정
(泥だらけの純情)

후지와라 신지 원작.
흥행 수입 9억 8,500만엔(1977년 흥행 7위)
1977. 11. 19
마사코 · 쥰코 · 모모에 눈물의 졸업식 ~ 출발 ~
(昌子・淳子・百恵_涙の卒業式〜出発〜)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준코
꽃의 고3 트리오 졸업 콘서트
1977. 12. 17
안개 깃발
(霧の旗)

미우라 토모카즈
마쓰모토 세이초 원작
흥행 수입 8억 8,900만엔(1978년 흥행 8위)
1978. 07. 22
돌아보면 사랑
(ふりむけば愛)

흥행 수입 8억 6,100만엔(1978년 흥행 9위)
1978. 12. 26
불꽃의 춤
(炎の舞)

흥행 수입 9억 2,000만엔(1979년 흥행 8위)
1979. 08. 04
화이트 러브
(ホワイト・ラブ)

흥행 수입 8억 6,000만엔(1979년 흥행 10위)
1979. 11. 22
천사를 유혹
(天使を誘惑)

야마구치 모모에 & 미우라 토모카즈 콤비
연인 선언 이후 첫 영화[57]
1980. 12. 06
고도
(古都)

가와바타 야스나리 원작
흥행 수입 10억 5,000만엔


5.3. 라디오[편집]


방송일
방송사
제목
1974년 4월 - 1975년 10월
닛폰 테레비
야마구치 모모에의 모모모모 30분
(山口百恵のモモモモ30分)

1975년 11월 - 1976년 3월
야마구치 모모에의 러블리타임
(山口百恵のラブリータイム)

1976년 10월 - 1977년 3월
야마구치 모모에와 오오이시 고로[58]의 포에버 포크
(山口百恵と大石悟郎のフォーエバー・フォーク)

1977년 10월 - 1978년 3월
야마구치 모모에의 슈퍼 라이브 컴퍼니
(山口百恵のスーパー・ライブ・カンパニー)

1978년 10월 - 1979년 3월
야마구치 모모에의 컬러풀 팝콘
(山口百恵のカラフル・ポップコーン)

1979년 10월 - 1980년 3월
야마구치 모모에와 우자키 류도[59]의 롤링타운 No.1
(山口百恵と宇崎竜童のローリングタウンNo.1)

1980년 4월 - 1980년 10월
야마구치 모모에 꿈의 앞뒤
(山口百恵 夢のあとさき)



5.4.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편집]


파일:NHK 홍백가합전 로고.png
연도
출장 횟수
곡명
출연 순서
상대
비고
1974년

ひと夏の経験
한여름의 경험
1/25
사이조 히데키
홍조 톱 타자
1975년
2
夏ひらく青春
여름을 여는 청춘
14/24
미하시 미치야

1976년
3
横須賀ストーリー
요코스카 스토리
01/24
노구치 고로
홍조 톱 타자 (2)
1977년
4
イミテイション・ゴールド
이미테이션 골드
13/24
가야마 유조

1978년
5
プレイバック Part2
플레이백 Part 2
24/24
사와다 켄지
역대 최연소 토리[60]
1979년
6
しなやかに歌って
나긋나긋하게 노래하고
14/23
사와다 켄지 (2)



6. 저서[편집]


발매일
제목
출판사
비고
1980. 09. 25
푸른 시절
(蒼い時)

슈에이샤
자서전
340만부 판매
2019. 07. 26
시간의 꽃다발 Bouquet du temps
(時間の花束 Bouquet du temps)

일본 보그
퀼트
미우라 모모에 명의
20만부 판매


7. 여담[편집]


  • 2020년 5월 29일, 600곡 이상의 그녀의 음악이 애플 뮤직, 스포티파이, LINE MUSIC, 아마존 뮤직 등에 풀려 음악 스트리밍이 시작됐다. 일본 한정으로 풀린것이며 국내 음원 사이트에서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해금 정보 모든 싱글, 그리고 정규 앨범 22장, 라이브 앨범 6장, 배우로 출연한 사운드 트랙 앨범 8장 등 600곡 이상이 일제히 전달됐다.# 스트리밍 해금 소식에 트위터 트렌드에도 들어가고 젊은 층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약 2개월 뒤, LINE MUSIC의 최신 TOP100(가요곡·엔카 부문)에서, 「플레이 백 Part 2」(78년)를 필두로 6곡이 랭크 인 했다고 한다.# 또한 3일만에 그녀의 음악이 100만회 재생됐다고 한다. 야마구치 모모에 세대의 가수들중에서 이례적인 기록이라고.#

  • 팬들이 부르는 애칭은 모모에짱(百恵ちゃん).

  • 영화 금옥만당에서 장국영의 배역인 조항생의 이상형의 여자이기도 하며 실제 장국영은 모모에의 열렬한 팬이라고 한다

  • 모모에의 뒤를 이어 80년대 일본 가요계를 장악한 전설적 여가수 나카모리 아키나가 그녀를 존경한다고 스타 탄생!에서 밝혔고, 스타 탄생 3번째 시도에서 모모에의 히트곡 몽선안내인을 불러 역대 최고점으로 합격한다. 아키나는 이후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 1984년에 그녀의 노래인 이미테이션 골드, 1985년에는 몽선안내인을 부르기도 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코스모스를 커버하여 부르기도 했다.

  • 2003년 HMV가 선정한 역대 일본 아티스트 7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녀 앞에 있는 여가수는 마츠토야 유미(3위), 미소라 히바리(5위) 밖에 없다. 그녀의 뒤에는 마츠다 세이코(10위), 나카지마 미유키(20위), 우타다 히카루(24위), 타케우치 마리야(26위) 등이 랭크했다.[61]#

  • 2015년 전세계적으로 '일본하면 떠오르는 인물' 설문조사를 했는데 중국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2위를 차지했다.[62]#

  • 2018년 오리콘이 조사한 '전설의 아이돌 랭킹'에서 10대를 제외한(10대는 2위[63]) 모든 세대(20대~50대)에서 1위를 기록하는 위엄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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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쇼와 시대 전설의 여성 아이돌 랭킹'에서 942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나카모리 아키나(519표), 3위는 마츠다 세이코(445표).

  • 2020년 일본 성악가들이 뽑은 '가장 노래 잘하는 여성 아이돌 총선거'에서 1위를 기록했다.[64]# 선정 이유는 '낮은 음정이 풍부한', '안타까운 미학의 소유자', '빨려 들어갈거 같은 한숨 섞인 위스퍼 보이스'였다.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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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보컬 트레이너가 뽑은 노래를 잘하는 국보급 가희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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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력을 겸비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실력파 아이돌이 등장하면 그녀의 이름을 따서 '헤이세이의 야마구치 모모에', '야마구치 모모에의 재래'라고 타이틀을 붙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나카모리 아키나, 마츠우라 아야, 히라테 유리나[66]가 이런 별명이 붙은적이 있다. 우에토 아야는 외모가 닮아서 신인 시절 '포스트 모모에'라고 불리기도 했다.

  • 야마구치 모모에, 미우라 토모카즈 부부는 일본 연예계의 대표적인 잉꼬 부부다. 2020년 이 부부는 '이상적인 유명인 부부 랭킹'에서 15년 연속 1위를 기록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도 했다.[67]# 미우라 토모카즈는 "믿어 주지 않겠지만, 싸운 적이 없다"라고 테츠코의 방에서 말하기도 했다. 그는 원만한 부부 생활에 대해 "참지 않으면 안 될 듯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설명했다. 지금도 휴일에는 데이트를 자주 한다고 하고, 행선지는 2명의 공통의 취미인 영화 감상이라고 밝혔다. "신주쿠, 롯폰기, 긴자, 시부야의 영화관. 도처에 갑니다". 좌석은 인터넷에서 예약, 싼 편인 부부 할인을 이용. "사실은 정규 가격이 아니면 안되는 입장입니다만… 1100엔이기 때문에"라고 수줍어 하면서 밝혔다. 장남이자 가수 미우라 유타로, 차남인 배우 미우라 타카히로가 탄생한 것은 30대 전반. 정확히 "일이 잘 되지 않았던 시기"에 일의 오퍼가 "1년에 1개"였던 어려운 시기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워서, 일이 없는 것이 괴롭지 않았다. 아이들 덕분" 이라고 생활을 즐겼다. 장래가 불안한 상황에, 모모에는 불평을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우라는 "그 때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굉장히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모에 씨에게는) 대단히 기본적인 힘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모모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는데, 그는 바로 "그렇다면,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또한 "계속 변함없이 있어 주는 것이 고맙다"라고 야마구치 모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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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그녀의 남편 미우라 토모카즈는 아이쇼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하여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생활의 비결을 설명하기도 했다.

  • 그녀의 모든 음악의 프로듀싱을 담당한 프로듀서 사카이 마사토시[68]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은퇴 40년 이후에도 계속 사랑받는 이유를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은퇴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주위에서 신기해 했지만 아쉽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양한 악곡이 만들어져 프로듀서 활동을 만끽할 수 있었으니까요. 모모에씨와의 일은 실로 즐거웠어요. 그래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밖에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야마구치 모모에가 현역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쁜 평판이 일절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역 시절이나 은퇴 후에도 추문이 난 적은 없다고. 그는 "성실할 뿐더러 데뷔 초부터 주위와의 좋은 인간관계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사카이 마사토시는 모모에가 데뷔 당시 '왜 가수가 되고 싶은가?'라는 칸에 '공부 책상이 필요해서"라고 썼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카이는 그녀를 대면하고 "이 아이는 반드시 스타가 된다고 생각했지요"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무언가를 계속 연기하는 아이돌은 계속 되지 않습니다. 재능의 한 단계 더 저편으로 보이는 현실감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해 준 모모에 씨는 최고의 아티스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그대로 연예계에 있었다면 희대의 대여배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래에 따라 그렇게 이미지가 바뀌는 사람은 없었어요. 지금도 야마구치 모모에라는 이름을 들으면 여러 가지 얼굴이 떠오릅니다. 상냥한 얼굴, 쓸쓸한 얼굴, 새침한 얼굴, 부끄러운 얼굴... 정말 매력적이었죠."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은퇴 후 40년이 지난 지금도,《야마구치 모모에》라는 명가수의 빛은 제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녀 속에는 2명의 모모에가 있는 것이겠지요. 은퇴했을 때는 미우라 모모에의 행복을 기원하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그리고 지금은 미우라 모모에가 야마구치 모모에의 관리인이 되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철저히 하고 있다는 거죠. 대스타로서 자기 관리의 천재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중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자랑했다. 지금도 중화권에서 인지도 있는 일본 연예인. 당시 중국에서 인기 있는 일본 배우로 타카쿠라 켄과 야마구치 모모에가 있었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2015년에는 아베 신조 총리 다음으로 인지도 있는 일본인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출연한 '붉은 시리즈'가 중화권에서 역대급 히트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이후 가족의 개념이 붕괴되었을 때, 시청률이 89%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연기한 ‘붉은’ 시리즈를 시청했다고 한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우쓰이 켄(宇津井健)의 부녀간의 애정이야말로 이상적으로 여길만한 가족이라는 연구발표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공리를 중국의 모모에라고 부르거나, 한 때 중국의 모든 장르에 ‘○○의 모모에’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여성 생리용품에 안네 프랑크 이름을 사용하지만, 중국에서는 모모에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의 국민적 히로인이 됐다고 한다.[69]#

  • 야마구치 모모에가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랭킹이 바로 '어머니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유명인 랭킹#'. 2011년에는 이상적인 어머니 랭킹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 그녀의 명곡 중 하나인 좋은날의 여행(いい日旅立ち)은 일본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비록 그 사람이 세계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 자서전 "푸른 시절"에서

  • 아버지는 자신이 총각이라고 속여서 모모에의 어머니와 결혼했지만, 사실은 가정이 있는 남자였기 때문에 모모에는 사생아로 태어나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고등학교에 진학해 초인기 아이돌이 되자 아버지가 어머니로부터 양육권을 뺏으려 해 양육권 소송으로 재판이 벌어져 갈등을 겪었다. 그녀가 인기를 얻자 이 사람은 모모에로부터 돈을 뜯으려고 했다. 그는 야마구치나 그녀의 매니지먼트 회사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가짜 기자 회견을 열었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녀의 경력을 망쳤다. 야마구치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친권 소송을 제기했다. 법정 소송은 그녀의 어머니의 승리로 끝났다. 야마구치는 자서전적 책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다시는 아버지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이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연예인으로 있으면서 발생하는 이런 문제도 그녀의 이른 은퇴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되는 부분이다.[70] 참고로 야마구치 모모에는 아버지는 아예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마지막 콘서트에서 <코스모스>를 부르기 전에 팬들에게 "여러분들의 어머니를 소중히 여겨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 많은 다른 연예인들처럼 재일설이 있지만 모모에 본인이 스스로 재일이라고 밝힌적도 없고 또한 모모에 아버지가 한국계라는 것도 제대로 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루머에 불과하다.

  • 요코스카시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요코스카 스토리'라는 곡을 낸 적이 있다. 요코스카츄오역에서는 이 곡을 발차 멜로디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모모에의 작사가로서의 필명도 '요코스카 케이'였다. 의외로 케이큐 전철과 인연이 깊다면 깊은 연예인이다.[71]

  • 2010년 그녀가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 출연한 DVD와 같은 새로운 음악 제품들이 계속해서 판매되고 있다.

  • 2011년 11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작곡가 우자키 류도는 그녀의 노래 덕분에 기록적인 로열티로부터 많은 수입을 얻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 그녀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DVD로 계속 발매되고 있으며, 2010년부터는 TBS 채널 케이블 TV 방송국에서 매일 방영되고 있다.

  • 고 히로미는 "아이돌 시절 매니저나 주변의 눈을 피해 모모에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지만 연락해주지 않았다"라고 말하기도. 고 히로미는 2020년 나카이 마사히로가 진행한 예능에서 '연예계의 가장 좋아했던 사람'에 대한 질문에 야마구치 모모에를 좋아했던 것을 말하기도 했다. 히로미는 "내가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보다 세 살 아래지만, 훨씬 정신적으로 위였어요. 정신적으로 연령이 위였다고 하는 것은, 아마 나같은 사람을 상대해도, 제대로 된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하며 자학하기도 했다.#

  • 남편 미우라 토모카즈는 일반인이 된 아내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야마구치 모모에를 지켜 왔다고 한다. 좀처럼 결혼 생활을 이야기하지 않는 미우라가, 모모에와의 결혼 생활을 말한 곳이 있는데 바로 「국립시 실버인재센터」라고 하는 지역의 고령자 지원 단체의 40주년 기념 책자이다. 센터 회장과의 대담 내용은, 도쿄·쿠니타치시의 것으로부터 배우업, 가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6 페이지에 걸쳐서 특집이 짜여지고 있다.[72] 미우라는 이 책자에서 "요전에도 이 사쿠라 거리를 차로 조금 달리던 때에, 절실히 좋은 곳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을 처음 보면, 이런 곳에 살아 보고 싶어지겠지.그런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미우라는 부부 원만의 비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결혼 10주년마다 커플링을 만들어 전달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반지는 마음에 들고 어떻게 할까라는 이야기를 어제 했거든요.10주년 때는 페어워치 같이 했지요. (중략) 하지만, 반지가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기념으로."라고 말하기도 했다.#

  •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만화 마루코는 아홉살에서 마루코가 자주 언급하는 '모모에 언니'가 바로 야마구치 모모에다[73]. 그녀가 1970년대 일본 연예계의 아이콘이라는 것을 방증한다.[74]

  • 그녀의 음악에 프로듀싱을 담당했던 프로듀서 중 한 명인 카와 야스오는 그녀의 첫 인상을 "모모에씨는 아직 14살이었지만, 무슨 일에도 진지하게 대항해 가는 성실해 보이는 아이라는 인상은 그 때부터 받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적인 스타가 될 줄 알았냐는 질문에는 "상상도 못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그는 "데뷔부터 은퇴까지가 7~8년간이라고 하는 단기간이며, 게다가 대성공이라고 하는 아티스트는, 야마구치 모모에씨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1994년 왕가위중경삼림의 1막에 등장하는 하지무(금성무 분)의 전 여친 메이가 1막과 2막을 잇는 한 스낵바의 단골이었던 이유는 주인이 그녀가 야마구치 모모에를 닮았다고 해줬기 때문. 헤어질 때 메이는 표면적인 이유로 하지무가 점점 미우라 토모카즈와 안 닮아 간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모든 전말을 알아채고 열받은 하지무는 "미우라 토모카즈 죽일거야"를 외치며 홍콩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간다. 개봉 당시 한국어 자막에서는 브루스 윌리스데미 무어로 바뀌었다.

  • 장남 미우라 유타로가 밴드[75]로, 차남 미우라 타카히로가 배우로 연예계에 데뷔하였기에, 방송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의 화제가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어머니의 은퇴를 생각해서인지 언급을 조심해서 하는 중. 최근에는 많이 해금을 했는지 유타로는 토크쇼에서 대학 시절 만난 여자친구와 호텔에 갔다가 어머니의 노래가 나와서 도무지 집중을 못 했다며 농담을 치기도 했다. 이걸 본 모모에는 본인 얘기가 나오는건 상관없는데 음담패설이 많이 나와서 아들에게 전화로 잔소리를 했다고.

  • 장남 미우라 유타로는 애니메이션 오타쿠로 유명한 데 그 중에서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의 출연 캐릭터인 타치바나 아리스P로 자랑스럽게 아리스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 TV에 공개된 적도 있으며 결혼 발표 직후 트위터에 올라온 글에 의하면 데레마스 라이브에 화환 참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어머니를 생각해보면 묘한 대목. 그리고 결국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 출연하는 캐릭터인 사쿠마 마유 역의 마키노 유이와 결혼했다.[76] 참고로 장남은 결혼 후에 아내에게 앞으로 2D 아내만 늘리겠다는 약속[77]을 했다고 한다. 마키노 유이는 인터뷰에서 시어머니인 야마구치 모모에와 라인 친구라고 말하기도 했다.

  • 미우라 유타로는 처음에는 그가 모모에와 토모카즈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타카히로는 여러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배우이다. 타카히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수영선수와 파도타기 인명 구조원이었기 때문에 자격증이 있는 인명 구조원이기도 하다.

  • 2009년 그녀의 DVD 박스 세트인 '호리프로 창업 50주년 특별 기획 더 베스트 텐 야마구치 모모에 완전 보존판 DVD BOX'가 24,990엔을 넘는 고액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가수로서 사상 최고가격으로의 종합 TOP10에 들어가, 2002년 4월에 발매되어 종합 10위에 랭크 된 오냥코클럽의 "20,790엔"의 기록을 7년 8개월만에 갱신하기도 했다.

  • 장남 미우라 유타로는 음악 방송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커버곡으로 부르기도 했다. 음악 방송에서 어머니의 아이돌 시절 영상을 보는 모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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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인형과 같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이 그렇다는 것이 싫었다. 연극은 팀플레이, 노래는 개인플레이라고 누군가 한 말에도 공명했다. 노래부르기 싫었다. 그래서 멍한 상태로 가사를 틀리는 일이 잦아졌고 매니저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지방 공연도 싫었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역이나 회장, 숙박하는 호텔 이외에는 거리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향토의 맛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무대에 서있어도 진행표대로 부르고, 대본대로 말하고, 보면대로 소리나고, 노래 부르고, 끝. 당시 내게는 개인플레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다는 약간 체념과도 비슷한 외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내 직원을 구하게 되었다.


큰 목표를 향해 마음을 다잡아야 할 기획이 이때 이뤄진 것은 반우연이었고 소속사 호리프로가 창립 15주년을 맞은 이벤트 중 하나였다. 슬슬 기회가 무르익었다고 본 회사가 그녀의 도약을 위해서 준비한 것은, 일류 가수가 큰 극장에서 개최하는 좌장 공연의 소형판이다. 미소라 히바리나 미나미 하루오의 경우는 1개월, 혹은 2개월이나 되는 장기 공연이 되었지만, 그것을 1년에 1회의 여름 축제에 적용시킨 기획이었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경우는 분수에 맞게 4일이 됐지만 그래도 젊은 가수들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나온게 바로 '모모에짱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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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국영이 그녀를 동경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정상의 자리에서 미련없이 떠나가는 모습에 강하게 매료된 것 같다. 70년대 일본 대중문화가 홍콩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예컨대 많은 가수들이 일본노래를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장국영은 자신의 우상이라고 얘기했던 야마구치 모모에의 노래를 번안하여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바로 83년도에 불렀던 초기 대표곡인 <바람은 계속 불고(風繼續吹)>다. 원곡은 야마구치의 다. 장국영 역시 고별 콘서트 마지막 부분에서 마이크를 무대에 놓은 채 퇴장하는 연출로 야마구치 모모에에 대한 오마주를 표한 바 있다. 장국영이 얼마나 그녀를 동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장국영은 그 후 1년이 못되어 연예계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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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리의 우상이기도 했다고 한다.

  • 일본의 유명 작사가,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가 아우라를 느낀 연예인에 야마구치 모모에를 뽑은 적이 있다. 방송국에서 가사를 쓰고 있었는데 본인의 뒷쪽으로 지나가던 모모에에게 그야말로 후광이 비쳤다고. 아름답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번쩍하고 불이 비쳤다고 한다. 인터뷰하는 패널이 믿지못하자 정말로 그랬다며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 기운이 엄청나서 스타의 아우라는 이런거구나 하고 느꼈다고.

  • 산케이신문귀멸의 칼날이 2020년 전국적인 역대급 사회현상을 일으키자 "인기의 정점에서 연재 만화를 완결 한 것은 인기 절정에서 은퇴 한 야마구치 모모에와 귀멸이 겹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사진가 카노 텐메이는 지금까지 찍은 사람 중 가장 인상깊은 여배우를 야마구치 모모에를 꼽았다.#

  •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다. 앞에서 설명한 자서전 「푸른 시절」은 대필 작가 루머가 전혀 없는, 본인이 직접 쓴 책이다.

  • 마츠다 세이코와의 투샷을 볼 수 있는 영상. 당시 마츠다 세이코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고 야마구치 모모에는 한 달 뒤 은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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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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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 전 본명은 야마구치 모모에.[2] 태어난 곳은 도쿄도 시부야구지만, 요코스카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3]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결혼 후 미나토구의 신축 고급맨션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으나, 장남과 차남이 태어난 후 조용한 환경에서의 육아를 위해 구니타치시에 단독주택을 지어 이사했다.[4] 모리 마사코는 지금도 야마구치 모모에와 친구로서 연락하고 있다고 한다.[5] 大きなソニー、大きな新人[6] 사카이는 "데뷔 초에는 음역이 다소 좁아 그래서 포크 조로 음역이 좁아도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준비했는데 본인이 적극적으로 레슨을 받아 곧 음역을 넓혔어요. 그 시절은 말수가 적은 소녀였지만, 항상 우리들 어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7] 이후에 사카이 마사토시는 일본 정부에게 일본 문화공로자 칭호를 받음으로서 업적을 인정받았다.[8] 닛폰 테레비 계열 드라마[9] 당대 최고의 배우 중 한명이다.[당시사진] 파일:72tann.jpg[10] 후에 쿠니모토 여자 고등학교에 전입해 졸업[11] 후에 호리코시 고등학교에 전입해 졸업[12] 일본 드라마 유성의 인연의 카시와바라 형사, 장미 없는 꽃집의 의사원장, 도쿄 DOGS - 최악이자 최고의 파트너의 수사반장 역을 맡은 바 있다. 서부경찰오키타 고로 형사로도 유명하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아웃레이지에서 보스를 배신하고 조직을 장악했다가 후속작에서 다시 후배들에게 뺏기는 야쿠자 역을 하기도 했다.[13] 심야식당 코믹스에서 '리바운드의 여왕' 마유미가 불렀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14] 여담으로 AKB48 멤버들도 이 노래를 불렀다.[15] 이전부터 푸른 과실이나 한여름의 경험으로 부동의 인기를 얻은 이후였기에 야마구치 모모에의 팬클럽은 이미 개설되어 있었다.[16] 당시는 아베크라고 불렸다[17] 남자 배우로는 타카쿠라 켄이 중국에서 인기였다.[18] 인트로에 '운명을 믿나요'가 들어간 노래[19] 2019년 장난 유타로와 남편 토모카즈가 방송에서 부르기도 했다.[20] 은퇴 이후에 아키와 우자키가 모모에와 오랫만에 재회해서 같이 식사를 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곡을 의뢰한 것은, 모모에 씨 자신이다, 라고 하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정말입니까?"라고 물었고, 모모에는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아키는 "그 시절 아이돌이면서도 사무실에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하다. 결혼·은퇴도 그렇지만, 모모애 씨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1] 이후 아내 아키 요코는 2006년 자수포장을 수상한다.[졸업] 당시 사진 파일:D-EJEyiUYAIvaG5.jpg[22] 대표작은 그 유명한 반딧불이의 묘. 나오키상, 요시카와 에이지상을 수상했으며, 참의원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23]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국민 가부키 배우.[24] 현재 도카이도, 산요 신칸센 JR 서일본 소속의 차량의 차내 멜로디로도 쓰이고 있다.[25] 그러나 오리콘 집계에서는 53.6 만매로 요코스카 스토리 에 이어 두 번째이다[26]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집을 찍은 사진가다.[27] 이 곡은 1994년 나카모리 아키나가 커버하기도 했다.[28] 두 사람은 메이지대학 동문이자 부부이다. 또 두 사람 모두 가수, 배우 등의 일을 하는 엔터테이너이기도 하다.[29] 일본의 신좌파 평론가.[30]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이사장이기도 했다,[31] '서른 조금 전'이라고 하면 미우라 토모카즈는 그 범주에 든다.[32] 이 리사이틀에서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고백을 그렇게 불렀다.[33] 100명이 넘는 취재진 뒤에서 회견 장면을 사이드 기사로 써주는 게 역할이었다.[34] 은퇴 후에도 이 부부는 모모에와의 사적인 교류는 계속 되고 있다. 우자키&아키 프로듀스의 무대 「FLAMENCO 소네자키 심중」에는, 모모에의 장남으로 가수 미우라 유타로가 출연했다. 덧붙여서 우자키가 모모에 이외의 「안녕의 맞은편」으로 유일 읊은 것이, 유타로에 의한 커버곡이기도 하다.[35] 이 콘서트를 본 노구치는 "마지막 콘서트 옆자리는 사이조 히데키였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놓았을 때, 저도 히데키도 아티스트석의 모두가, 객석의 팬 분들보다 솔선해서, 기립박수를 했던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36] 생전에 문화훈장, 자수포장, 일본 문화공로자, 국민영예상 등 권위있는 상을 수상한 대여배우다.[37] 마이크를 내려놓는 장면은 영상 2분쯤에 나온다.[38] 장남인 미우라 유타로가 아라시니시야가레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저 하얀 마이크는 결혼 후 모모에의 집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 유타로와 타카하로는 그 의미도 모르고 마이크를 꺼내서 놀았고. 아버지 토모카즈와 어머니 모모에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고 회상했다.#[39] 파일:DLnIlAWVYAQUIps.jpg
예를 들면 이런식으로. 와타나베 마유AKB48 졸업 당시 오마주하였다. 또한 장국영이 고별 무대에서도 이 장면을 그대로 재현했다.
[40] 이 노래는 장국영이 "바람아 계속 불어다오(風繼續吹/풍계속취)"로 리메이크해서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영화 종횡사해 삽입곡으로 나온 바 있다. 또한 장국영은 1989년 자신의 고별 콘서트에서 야마구치 모모에가 그랬던 것처럼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울먹거렸다.[41] 이후, AKB48의 멤버, 와타나베 마유의 졸업 싱글인 11月のアンクレット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오마주 한다.[42] 모모에가 은퇴한 직후에는 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 슬럼프를 극복하고 명배우로 거듭났다.[43] 22세 생일의 약 3 개월전[44] 다만 야마구치 모모에 명의가 아니라 결혼 후 명의인 미우라 모모에로 발간했다. 저자 소개 역시 전 아이돌/배우 정도로 짧막하게 설명해 아이돌 시절과 거리를 두고 있다.[45] 복잡한 유년시절, 연예계 생활의 뒷면을 포함해서 미우라와의 연애나 초경, 첫경험 같은 성적인 이야기도 적나라하게 쓰여졌다. 발매로부터 1달 동안에만 100만부를, 1년 만에 200만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 340만부가 넘게 팔린 스테디셀러로 등극했다.[46] NHK에 따르면 마지막 재방송이라고. 1번 한정이라고 한다.[47] 1위는 야마구치 모모에, 2위는 모모에짱. 전세계 트위터 트렌드 기준[48] 미우라 토모카즈도 실시간 검색어에 들기도 했다.[49] 방송계에서 은퇴한 전직 연예인의 영상을 방송하는 것은 높은 장벽이 있다. 오쿠마 유지 변호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연예인의 과거의 영상을 사용할 때, 실연가에게 인정되고 있는 저작인접권, 저명인이 이름이나 초상을 무단으로 사용하지 않을 권리로 여겨지는 「퍼블리시티권」이 관련해, 본인이 허가하지 않으면 권리침해로 트러블이 되기 쉽습니다. 모모에씨와 같이 완전하게 은퇴한 사람의 경우는 창구가 없기 때문에, 본인의 승낙을 얻는 것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50] 롤리팝 캔디에게 페라치오의 의미를 숨긴 음란한 노래.[51] 한국 발라드계의 명곡 중 하나인 나미의 '슬픈 인연'의 작곡가로 유명하다.[52]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작사가 중 한 명.[53] 이후에 마츠다 세이코의 히트 싱글의 대부분의 작사를 담당한다. 2017년 자수포장 수상.[54] 와다 아키코 주연.[55] 야마구치 주연 영화에서 미우라 토모카즈가 아닌 배우가 상대역인 유일한 작품이다.[56] 쇼치쿠 누벨바그 '의 선구적 영화인으로 평가받는 작가.[57] "연인선언"으로 흥행이 걱정되었지만, 상기의 병영작 「관백선언」의 도움도 있어 히트했다.[58] 라디오 DJ다,[59] 야마구치 모모에의 작곡가 중 한 명,[60] 19세 11개월[61] 전체 1위는 일본의 국민 밴드 사잔 올 스타즈.[62] 1위는 아베 신조.[63] 10대 1위는 아무로 나미에.[64] 2위는 이와사키 히로미, 3위는 마츠다 세이코, 4위는 나카모리 아키나, 5위는 혼다 미나코.[65] 1위는 MISIA, 2위는 우타다 히카루, 4위는 Superfly, 5위는 나카모리 아키나.[66] 재일교포 소설가 유미리가 히라테를 보고 '모모에의 재래'라고 SNS에 발언했다. 히라테도 충분히 실력파 아이돌이지만 비유 대상이 워낙 전설이라 일웹에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67] 지겹도록 너무 많이 1위를 해서 명예의 전당에 보내버린것이다.[68] 2020년 일본 문화공로자에도 임명된 음악계 거물이다.[69] 같은 시기에 요시나가 사유리의 영화도 꽤 들어왔었는데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한다.[70] 그래서 모모에의 결혼식에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았고, 소속사 호리프로의 사장 호리 타케오가 아버지 역할을 대신 맡았다.[71] 야마구치 모모에의 I CAME FROM 横須賀에서는 케이큐 본선상의 역들과 쾌특이 나온다.[72] 미우라에 있어서 쿠니타치시는 연고의 땅이다.고교 졸업 후부터 연예계 데뷔까지 시내 아파트에서 생활했고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난 타이밍에 친구의 연줄로 35세에 시내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대담에서는 국립시에 관련되는 이런 교환도 밝히고 있다.[73] 작가인 사쿠라 모모코가 모모에의 팬이라고 한다.[74] 또 다른 가수로 사이조 히데키도 꽤 언급된다.[75] Peaky SALT. 현재는 밴드 활동은 멈춘 상태.[76] 마키노 역시도 어릴 때부터 음악계에 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 어릴 때에는 영화 러브레터에서 피아노를 치는 아이로 출연했고 이후에도 부단한 노력을 해서 음대 피아노 전공을 하고 성우 데뷔 이후에 성우 업무보다는 가수로서의 활동이 상당히 많았으나 사쿠마 마유 캐스팅 당시때에 그녀를 성우보다는 가수로 아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을 정도.[77] 사실 이 발언은 그동안 유타로가 TV에서 자기는 2D 아내밖에 없다고 말해온 걸 살짝 변화한 것이다.[78] 그의 에세이집으로 250만부가 팔린 역대급 히트 책이다.[79] 그 날 Peaky SALT의 짧은 출연 시간 대부분이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에 관한 얘기만 하다 끝났다.[80] 夢先案内人[81] プレイバックPart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