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시 한조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tablewidth=100%><tablebgcolor=#062861><width=20%> 대행·초대 ||<width=20%> 제2대 ||<width=20%> 제3대 ||<width=20%> 대행 || 제4대 ||
||<rowbgcolor=#fff,#1f2023> 데라우치 마사타케 || 하세가와 요시미치 || 사이토 마코토 || 우가키 가즈시게 || 야마나시 한조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rowbgcolor=#fff,#1f2023> 사이토 마코토 || 우가키 가즈시게 || 미나미 지로 || 고이소 구니아키 || 아베 노부유키 ||
||<-5> 한국통감 · 군정사령관 ||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eccd7a 제4대 조선총독
야마나시 한조
山梨半造 | Yamanashi Hanzō

파일:야마나시 한조.jpg
출생
1864년 4월 6일
사가미국 오스미군
(現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
사망
1944년 7월 2일 (향년 80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재임기간
제4대 조선총독
1927년 12월 10일 ~ 1929년 8월 17일

[ 펼치기 · 접기 ]
학력
육군대학교 (8기)
직업
군인, 정치가
정당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구8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886년 ~ 1925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주요 경력



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군인. 일제강점기 제4대 조선 총독.


2. 생애[편집]


1864년 4월 6일사가미국 오스미군에서 태어났다. 1886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을 하였으며, 1892년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뒤 1921년 하라 다카시 내각의 육군 대신이 되었다. 이 시기 야마나시는 정치군인으로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의 군 개혁에 크게 반발하여 이를 무산시키면서도, 세계적 대세였던 감군과 군축에는 동의하여 2차례에 걸쳐 이른바 야마나시 군축을 단행하는 등 정당 세력과 군벌 세력간에서 중간적인 입장에 있었고, 그 덕분에 당시 수차례 내각이 바뀌었음에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육군대신을 그만 둔 후 간토 대지진 시절에는 간토 계엄 사령관 및 도쿄 경비 사령관을 하기도 했다.

1925년 4월 동기이자 정치선배인 다나카 기이치입헌정우회의 총재로 되자 곧바로 다음 달인 5월에 전역해서 예비역이 되었고, 정치에 발을 담그면서 당초에는 정우본당에 가까웠으나, 곧 다나카가 있는 정우회에 접근하고 다나카는 야마나시를 이용하여 정우본당의 의원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헌정우회로 끌여들이는 등 적극적인 정치공작을 벌였다. 그리고 이것이 발각되어 야마나시는 정우본당, 그리고 나중에 정우본당이 헌정회와 합당하여 창당된 민정당과는 원수지간이 되었고, 의회에서 문제의 추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자금 출처가 문제로 되면서 시베리아 출병 당시 비자금을 빼돌렸다가 썼다는 의혹까지 일어났다.

전임 조선 총독사이토 마코토 제독1927년 4월 4일, 제네바 해군 군축조약(6월 2일 ~ 8월4일)의 전권대표로 조선 총독직을 일시 사임하자 야마나시는 신임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야마나시가 총독일 당시에는 사이토의 문화 통치를 이어 받아 느슨한 통치를 했으며, 심지어 더 느슨해졌다. 심지어 구색맞추는 기관에 불과했던 친일파 중추원 의원들이 조선인의 권익을 증진하자는 대규모 청원과 요구를 하였는데, 야마나시는 '관대하게도' 이에 큰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경성일보>에 비판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직책을 맡으면서 그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장나게 되었다. 당시 미곡상이 경성(서울)에 미곡 거래소 설립을 허가해주는 대가로 야마나시 장군의 측근에게 당시 금액으로 5만엔의 뇌물을 주었다가 발각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것을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이라고 한다.

여기에 더해 조명하 의사가 타이완에서 천황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을 암살 시도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로 인해 그는 불과 1년 8개월만에 조선 총독에서 사임하게 되고 전임 총독 사이토 제독이 다시 총독으로 복귀했다. 일제의 패전으로 인해 물러난 아베 노부유키를 제외하면 최단임 총독이다.

그는 재판을 받고 주변 사람들은 유죄를 받았으나 야마나시는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이 되었으나 이로 인해 1929년 말에 모든 공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계속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1944년 7월 2일에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80세에 자연사했다.

3. 여담[편집]


  • 부패한 "금권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질과 탐관오리로 유명했는데 결국 이것으로 인해 정치 생명이 끝장났다. 조선총독부 부임 전에도 시베리아 출정 당시 일본군이 획득한 황금을 횡령하는 등의 혐의로 군부 내에서 '배금 장군'이라 불릴 정도였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물들도 역대 조선총독들 중 이 사람은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4. 주요 경력[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8 11:22:15에 나무위키 야마나시 한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