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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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일본어): 山下 淸 やました きよし
1922년 3월 10일 - 1971년 7월 12일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방랑
2.3. 방랑 후의 작품 제작
3. 작품
4. 창작물



1. 개요[편집]


일본화가.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22년 도쿄 아사쿠사구(현재 다이토구)에서 태어났지만 태어나고 1년후인 관동 대지진으로 도쿄 일대가 소실되어서 부모의 고향인 니가타로 이사가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고나서 3년 후에 심한 소화불량에 열병이 걸려서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무사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지적장애와 언어장애를 앓게 되기 시작했다. 소학교를 입학했지만 그가 지적장애와 언어장애 때문에 놀림을 당하고 이 때문에 동급생을 해치는 등의 비행으로 치바 이치카와의 야와타 학원(八幡学園)[1]이라는 장애아동시설에 들어갔다. 이 학원에서 생활을 하다가 종이세공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해 이런 재능으로 미술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야와타 학원에서 근무하던 시키바 류자부로라는 정신병리학자가 1939년 오사카에서 그가 만든 작품을 전시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2.2. 방랑[편집]



야마시타 기요시의 방랑과 병역거부 설명 영상

그는 야와타 학원에 오래 있었지만 18살때부터 학원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자유로운 삶을 동경해 방랑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이 징병제 국가였다는 점에서 방랑생활 2년 후, 그는 징병검사를 받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거기에다 태평양 전쟁 기간이라 많은 일본 남자들이 징병되어 일본군에 입대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도 징병검사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징병이 되고 전쟁터에 가는 것에 공포를 느껴서 더욱 더 방랑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그의 일기 내용에도 징병검사에서 갑종합격(한국 징병검사에서 1급 현역 판정)이면 군대에 가게되어 혼나게 되고 전쟁터에 가게 되어 적의 총에 맞아 죽는게 제일 무섭다는 내용이 있다.

1943년에 그는 징병검사를 면제받았다고 생각해 도쿄 신주쿠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왔거나 야와타 학원으로 갔었지만 징병연령(입영의무 연령)이던 그는 자신의 어머니 또는 야와타 학원의 직원에 의해 무리하게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다. 결과는 정종 불합격(한국 징병검사의 6급 상당)으로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다. 이것으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다시 방랑을 하기 시작했다. 이 내용과 관련된 한국 언론기사를 보면 징병검사 연령 직전에 집을 나와 전국을 방랑하는 형태로 징병에서 벗어났다는 식(행방불명을 통한 병역기피)으로 되어있다.(#)

위 내용을 보아 그의 방랑이유를 보면 학원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전쟁터로 동원되는것을 피하고 싶다는 것이지만, 더 큰 이유는 자유롭고 싶다는 소망때문이었다. 그의 방랑생활은 추워지면 남쪽으로, 더워지면 북쪽으로 이동하는 형태의 본능이 향하는 대로의 방랑이었다. 그는 학원생활을 피하는 것이나 병역을 피하는 것을 악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정직한 기분을 표현한 올바른 행동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과 자유로운 시간을 추구해 본능이 향하는 대로의 방랑을 계속한 것이었다. 다만, 지적장애인인 게 확실한 그도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징집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당시 일본의 실정이기는 했고, 소집명령을 무시하고 오랫동안 방랑한 경력이 있어서 징집해 봐야 도움이 안될거라는 판단이 없었으면 사방분간을 못하는 그도 징집되어 어디선가 덧없이 죽어갔을 것이다.[2][3]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일본의 고흐, 벌거벗은 대장으로도 불렸고, 그의 삶을 주제로 한 드라마인 벌거벗은 대장방랑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 내용을 보면 방랑하는 동안 어느 한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등 다양한 감동을 남기는 스토리로 나타난다.

하지만 실제 방랑에서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여행지에서 본 풍경을 자신의 뇌리에 선명히 기억해 야와타 학원이나 집에서 자신의 작품을 단번에 만들었다. 수개월이나 몇년간의 방랑생활로부터 돌아온 그는 경이적인 기억력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게다가 그를 통한 이미지는 실물의 풍물보다 선명하고 독특한 색종이를 붙여 만든 그림이 되어갔다. 그의 방랑여행은 1956년에 "방랑일기"라는 책으로 나왔고, 그의 작품을 만드는 스타일을 보면 그는 서번트 증후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3. 방랑 후의 작품 제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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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다바아의 불꽃

1956년에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람회가 도쿄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해 일본 국내를 순회하는 전시를 130회 정도 열렸고 500만 명 넘게 그의 작품을 보았다. 이 전람회에는 아키히토 당시 황태자도 방문했다. 1961년에는 시키바 류자부로와 함께 40일동안 유럽을 여행하기 시작해 유럽 각지의 명소를 자신의 미술작품으로 남겼다.

말년에는 도쿄에서 교토를 여행한 후에 만든 도카이도 53경을 포함한 55개의 작품을 만들었지만 고혈압과 그것에 의한 안저출혈로 그 완성이 위태로웠고 1971년뇌출혈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향년 49세의 일이었다.


3. 작품[편집]



작품 모음 영상

  • 돈다바야의 불꽃놀이
  • 나가오카의 불꽃놀이
  • 일본평지에서의 후지산 경치
  • 사쿠라지마
  • 글러버 저택
  • 터널의 풍경
  • 에펠탑
  • 네덜란드의 경치
  • 베니스의 곤돌라

자세한 작품 그림은 이곳을 참조


4. 창작물[편집]


1980년부터 1997년까지 방영한 드라마인 벌거벗은 대장방랑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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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8년 쿠보데라 야스히사(久保寺保久, くぼでらやすひさ, 1891~1942)가 세운 장애아동시설로 당시 소재지가 히가시츠시카군 야와타정에 있었기 때문에 야와타 학원이다. 운영 법인은 사회복지법인 춘도회(春濤会, 슌토카이)이다. 법인 홈페이지, 야와타 학원 홈페이지[2] 대한민국에도 지적장애인이 징집되어 만기제대한 사례가 있고, 6.25 전쟁 때는 사지만 멀쩡하면 다 전방으로 보내던 시기이므로 이 때 이런 상태로 전사한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3] 야마기타 기요시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인 벌거벗은 대장방랑기1화(#)에서 방랑을 하던 중 식당에서 식당 주인에게 걸려 경찰에게 잡혀가게 되었을때 야와타 학원의 선생 때문에 잡혀가지 않게 되고 징병검사를 받게 되는 장면이 있다. 징병검사장으로 가기 전 야마시타 기요시가 야와타 학원에서 알게 된 여자아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열차를 타고 징병검사장으로 갔는데 시력검사에서 모른다고 하자 시력검사 담당 군의관이 이상하다고 보고 글자 아는지 확인을 하는 것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