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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세노바츠 절멸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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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야세노바츠 절멸수용소는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의해 세워진 절멸수용소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부와 인접한 크로아티아 야세노바츠시에 위치했다.
2. 역사[편집]
1941년 8월에 설립됐다. 3개의 수용소가 여기에 있었는데, 제1 수용소와 제2 수용소는 1941년 사바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겼고 제3수용소는 1945년까지 존속했다. 1945년 4월 폐쇄될 때까지 약 75,159명의 유대인과 세르비아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당했다. 이 외에도 크로아티아 정부는 1942년 6월 집시 수천 명을 야세노바츠 수용소로 강제 송환했고 집시들은 대부분 수용소에서 죽었다. 비록 가스실과 같은 곳은 없었지만, '발칸의 아우슈비츠'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특히 가톨릭 사제들이 우스타샤에 의해 수용소장이나 교도관으로 선출되어 학살을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고 수용소 바깥에서도 우스타샤와 가톨릭 세력들이 영합해서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들에게 학살과 함께 공동체 파괴, 약탈, 강제 개종을 실행했다.
가톨릭 신부임에도 우스탸샤에 동조해 야세노바츠의 수용소장으로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1945년 영국군에 잡혀 1946년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자그레브 대주교이자 야세노바츠를 포함한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자행된 학살, 파괴, 강제개종 등을 최초로 지시한 사람들 중 하나로 지목받고 있다. 전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의 감옥에서 복역했으나 바티칸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 그가 죽은 후 1993년 10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 이 학살을 저지른 우스타샤의 전범들은 나치전범들과 달리 대부분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들을 학살한 후 그들에게 갈취한 금품과 재산을 챙겨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남미 국가들로 탈출했다.
3. 기타[편집]
- 오스트리아의 전대통령 쿠르트 발트하임과 악연이 있는 장소인데 나치 독일의 육군 장교였던 발트하임의 근무지가 야세노바츠 절멸수용소와 3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덕분에 발트하임의 나치 부역에 대해 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 나치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대체역사물 액션게임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의 스테이지 중 크로아티아에 있는 벨리카 노동수용소의 모티브가 이 수용소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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