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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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할거정권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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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耶律留哥, 1165~1220
금나라의 장수이자, 동요의 건국자. 이후 칭기즈칸에게 투항한다.

2. 생애[편집]


1165년 출생으로, 그는 요나라 종실의 후손이었고, 그의 조상은 요 멸망 시 금에 투항했다고 한다. 금나라에서 북변천호의 관직을 지냈다.

1211년 야호령 전투에서 금군이 몽골군에게 패하자[1], 금은 거란인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결국 그 이듬해 야율유가는 요동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잦은 부역에 시달렸던 거란인들[2]과 북부 여진족들의 호응을 받았다.

이에 호사호가 60만 대군을 이끌고 난을 진압하러 출전하자, 아직 자기들이 중과부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몽골에 지원을 요청하여[3] 호사호 휘하의 금군을 격파했다. 그 뒤 동요의 건국을 선포했다.

이를 들은 선종이 격노해 포선만노로 하여금 반란을 진압하게 하나 이를 격퇴한다.[4] 그 뒤 이랄도가 이끄는 금군을 격파한다.

1215년 요양 점령 뒤 부하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하나 이를 거절하고, 칭기즈칸에게 신하를 자처한 뒤, 요왕에 봉해지고 후요를 멸망시킨다.

1220년 사망했다.

3. 기타[편집]


1215년 야율유가가 칭기즈칸에 의해 요왕에 봉해진 뒤, 야율유가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중 야율시불[5]후요 정권을 세우나, 3년 만에 소멸되고 만다. 여기서 칭기즈칸에게 패하였던 후요 사람들 대다수가 고려를 침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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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이전 칭기즈칸은 거란인들을 준동하여 난을 일으키게 했으나 모두 금군에게 진압당했다.[2] 세종 때, 몽골을 막기 위하여, 대규모로 거란인을 동원하여 계호를 쌓은 뒤 장종때는 다시 수만의 거란인들로 하여금 계호와 변보를 쌓게 하는 등 거란족들은 금의 압제에 시달렸다.[3] 거란족들은 몽골족들과 같은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다.[4] 포선만노는 이후 간도 지역에 동진국을 건국[5] 야율유가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