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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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바쿠토
1.2. 데키야
2. 에도막부 말기
3. 근현대
4. 구렌타이의 성장
5. 미군정과 야쿠자의 관계변화
6. 고다마 요시오의 등장과 관동-관서의 대립
6.1. 관서-야마구치 구미의 세력 감소
6.2. 관동-스미요시 연합의 세력 감소
7. 류큐지방에서의 폭력조직의 발전과 1991년 폭력단 대책법의 도입
8. 2011년 폭력단 배제조례의 도입과 야쿠자 조직원의 감소 및 지하화


1. 에도 막부 시대[편집]


일본 야쿠자의 역사는 이른바 폭력을 주무기로 하는, 국가가 승인하지 않은 사설 집단의 역사로 그 기원은 일본 센고쿠 시대가 끝난 이후 에도 막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대부분의 전란이 종료, 사회가 안정화 되면서 150여년의 세월 동안 무력 계급에 위치해있던 수많은 사무라이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이 중 현실의 흐름을 잘 파악한 일부는 관리나 학자, 상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1] 소수에 불과했고, 살인 기술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던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제대로 된 봉록을 받는 것은 꿈도 못 꿀 형편으로 전락했다. 결국 정해진 직업을 가지지 못한 채 떠도는 낭인이나 최하위 계층에 놓인 하타모토 얏코(旗本奴)들은 전쟁에서 배운 각종 살인 기술들을 바탕으로 폭력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가부키 모노에서는 기이한 복장과 머리 모습을 한 사내들이 무방비한 상태의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며 칼날이 잘 드는지 시험하겠다는 미친 이유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무뢰배로 전락한 낭인들은 묻지마 식의 폭력과 공포를 바탕으로 여러 지역에서 분탕질을 쳤고, 이런 조직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에 대항하는 마을 젊은이들의 모임인 마치 얏코(町奴)도 등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야쿠자의 뿌리라고 부를 만한 일본내 폭력조직은 크게 하타모토 얏코와 마치 얏코 두 축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현대의 야쿠자들은 자신들이 하타모토 얏코에 대항한 용감한 하층민들인 마치 얏코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곤 한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 수많은 가부키 연극에서 하타모토 얏코를 악역으로 설정하고 마치 얏코를 미화한 탓에 저렇게 여겨질 뿐 실제 마치 얏코들 역시 하타모토 얏코와 유사하게 도박장을 차리고 보호비를 갈취하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이 시기 마치얏코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폭력으로 맞서는 용감한 하층민이라는 이미지는 후대에 본격적으로 야쿠자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미화하는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대 야쿠자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바쿠토[2]와 데키야[3], 구렌타이[4]가 등장한 건 이로부터 좀 더 시간이 지난 18세기 경이다. 이들은 대체로 범죄자, 농토가 없는 평민, 사회에서 소외된 무뢰한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바쿠토는 주로 대로변과 큰 읍의 상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름바닥을, 데키야와 구렌타이는 무역이 증가하면서 늘어난 장터와 암시장을 중심으로 서서히 세력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로부터 나타난 것이 오늘날 야쿠자 조직의 기본적인 틀인 오야붕(親分)과 꼬붕(子分)의 개념이다. 한자를 보면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폭력조직들은 두목과 부하 간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며 조직원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강요했다. 야쿠자하면 떠오르기 마련인 오야붕의 죄를 대신 떠맡아 감옥에 가는 꼬붕의 역할이나, 사카즈키고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잔을 나누는 의례' 등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형성되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바쿠토와 데키야, 구렌타이 3대 깡패 조직들이 자신들의 주 활동무대였던 시장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통적인 상인, 직공 계층들의 스승과 도제 관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관계나 의례는 과거 주로 오야붕과 꼬붕 간의 수직적 관계에 한정되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서 형제의 관계를 맺거나 조직끼리 관계를 맺을 때도 유사한 형태의 의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아버지라 불러라!' '형이라 해' '우린 가족이다' 등등은 범죄조직은 물론 악덕기업이나 사기꾼들이 좋아하는 술책이다.


1.1. 바쿠토[편집]


먼저 바쿠토(博徒)는 주로 정부의 토목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돈을 다시 회수할 목적으로[5] 정부의 관리나 유지들이 고용한 노름꾼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정부나 지역유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각종 노름기술들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였는데 초기에는 주로 하층 노동자나 농민들을 주로 상대했지만 후기에는 고위 사무라이스모 선수들도 이들의 손님이 되었다. 바쿠토라는 말 자체가 '도박하는 무리'라는 뜻.

이렇게 형성된 바쿠토 조직들은 그 자체로 일본 민담속 폭력조직들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는데 실제로 야쿠자라는 용어의 기원이나 유비쯔메(指詰め) 즉 ,단지의식이라는 행위나 파면장 문화같은 것들이 바쿠토 조직들에서 처음 등장해서 데키야 조직으로까지 퍼져갔다. 야쿠자라는 말의 어원이 도박장에서 뒤에 앉아서 관리하는 직책 또는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즉, 어깨들이 도박장을 직접 운영하거나, 뒤를 봐주려면 도박판 뒤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 관리자(役)의 자리(座)라서 야쿠자(役座)인 것.

일본의 봉건시대는 바쿠토 조직들이 성장하는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당시 에도 막부는 모든 다이묘들에게 매년 도쿄를 한차례 방문할 것을 명령하고 그 가족들이 도쿄에 거주하도록 규정함에 따라 도쿄에 이르는 주요 도로들은 그 자체로 경제적인 부문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부문에서도 핵심적인 생명선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바쿠토 조직들은 수많은 귀족들과 명망있는 인사들이 지나갈 수밖에 없는 도로들에 있는 숙박소를 이용해 도박장을 활성화시켰고 이는 바쿠토 조직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자토이치 같은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서 많이 보이는 주사위 도박장에서 나오는 야쿠자들이 에도시대 전통적인 바쿠토라고 할 수 있다.#[6]


1.2. 데키야[편집]


데키야(的屋)의 기원은 크게 3가지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는 장터를 떠도는 유랑민들이 조직화했다는 주장, 2번째는 시골을 떠돌아다니는 낭인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 3번째는 약장사를 하면서 떠돌던 행상인들에 의해 조직된 집단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다만 그 기원에 대한 추측이 다양한 것과는 별개로 데키야의 조직화가 1700년대 중반 도쿠가와 막부의 불안 속에서 상권의 이익과 보호를 위해 이루어졌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이렇게 조직화된 데키야는 일반적으로 지역의 시장역할을 담당한 신사의 자리다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초기에는 일부 상인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위해 시작된 데키야는 곧 얼마안가 자리세를 걷거나 싼 물건을 비싸게 파는 등 사기행위를 벌여대는 범죄조직으로 변질되었다.

데키야 조직들내에는 봉건적 신분제를 모방해서 크게 5가지 신분계급이 존재했는데 두목, 부두목, 조장, 꼬붕, 견습생이 그것이다. 이러한 계급구조하에서 오야붕의 집은 조직의 본부인 동시에 견습생들의 훈련소 역할을 담당했고 적절한 훈련을 거쳐 꼬붕이 된 조직원은 조직의 상품을 팔기위해 곳곳으로 흩어졌다.

데키야 조직들에는 크게 3계명이 일반화돼서 공유되고 있었는데 첫째, 다른 조직원의 처를 건드리지 말것,[7] 둘째, 잡히더라도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것, 셋째, 오야붕과 꼬붕의 관계는 철저히 지킬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규칙하에 오야붕은 꼬붕을 행상인으로 돌리거나 특정한 가게를 배정해서 가게 사용료와 보호금을 받았다. 또한 행상인들의 가게를 열 권리를 사고 팔거나 상품 자체를 사고 팔기도 했으며 만약 이를 거부하면 부하들을 시켜 상품을 도둑질하게 하거나 손님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곤 했다.

이외에도 데키야 중에서는 아예 자체적으로 서커스같은 조직을 구성해서 전국을 떠돌면서 물건과 예능을 파는 조직들도 있었다.

그러나 바쿠토가 초기 정부관리나 지역유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등장했지만, 나중에 와서도 계속 불법적 위치를 점했던 것과 달리, 데키야는 막부정권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누리는 일이 흔했다. 수많은 데키야의 오야붕들이 표면적으로는 각종 사기행위와 시장에서의 폭력사태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막부로부터 시장감독자로 임명되곤 하였다. 실제로 이렇게 임명된 오야붕들은 자체적인 성을 사용할 수 있었고 검도 휴대할 수 있었다. 물론 바쿠토 조직들 중에서도 좀 큰 조직들은 어느정도 공식 승인을 받아 상당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지만 데키야처럼 아예 공식적인 지위까지 받아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런 데키야의 전통은 마츠리에 야쿠자들이 개입하고 노점상의 자릿세를 받는 등 지금도 강하게 남아있다.

테키야(的屋)는 노점상을 운영하거나 제비뽑기나 화살이나 공기총으로 쏘아서 목표물을 넘어뜨리면 경품을 타가는 류의 사행성(射倖性) 게임을 운영하던 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的屋라는 말 자체가 사행성 게임을 하는 과녁(的)이 있는 점포라는 뜻이다. 일본의 지역 마츠리(축제)에 수없이 등장하는 야시장 노점상이 거의 테키야 계열 야쿠자가 관리하는 거라 보면 된다. 심지어는 타코야키를 파는 야쿠자들이 있을 정도. 직접 장사를 하거나 자릿세를 받는 식. 2022년에 사망한 한국인 조규화가 이끌던 고쿠도카이(極道会)가 테키야 계열 최대의 조직이었으며, 지정 폭력단 중 유일한 테키야 계열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바쿠토.


2. 에도막부 말기[편집]


시미즈노 지로쵸(清水次郎長)는 에도막부 말기에 활동한 전통적인 야쿠자 조직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1820년 시미즈항에서 탄생한 지로쵸는 어렸을때 부유한 친척에게 입양되었다가 양부가 죽은 이후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곧 싫증을 내고 아내와 사업을 내버린채 당시 도쿄로 이어지는 도로를 왕래하던 바쿠토 조직에 가담하게된다.

약 3년간 바쿠토 조직들 사이에서 중재자이자 싸움꾼으로 명성을 얻은 지로쵸는 시미즈로 돌아와 수많은 낭인, 노름꾼, 노동자들을 규합해 자신만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19세기 중엽 도쿠가와 막부가 쇠락해가는 사이 지로쵸는 정부에 뇌물을 주고 공권력들이 존재했던 자리에 자신의 조직을 침투시켰다.

이렇게 성장한 지로쵸의 조직은 곧 일본열도를 뒤흔든 존왕양이 운동을 마주하게되는데 지로쵸는 당시 많은 야쿠자 조직들이 막부편에 선것과 달리[8][9] 존왕파에 가담했고 결국 최종적으로 지로쵸는 막대한 승리를 거머쥐게된다.

사실상 막부가 몰락해가는 시점에서 지로쵸의 도박이 성공함에따라 지로조는 공식적으로 과거의 모든 죄과를 지울 수 있게되었고 이에 따라 본거지인 시미즈를 말그대로 지배하는 수준에 이르게된다.

지로쵸는 1893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지로쵸의 이러한 성공은 그 자체로 야쿠자 조직들 사이에서 전설로 자리매김하게되었고 수많은 민담과 극의 소재로 사용되었다.[10]다만 수많은 민담 등에서 시미즈의 지로쵸를 전설처럼 떠받드는것과는 별개로 결국 이 사람은 폭력조직의 두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의 행정문서를 살펴보면 지로쵸는 지역주민들에게 전혀 존경을 받지 못한 두려움의 존재였을 뿐이며, 공식적으로 정부의 인정을 받은 이후에도 깡패두목으로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 시미즈를 폭력으로 지배했다고한다.


3. 근현대[편집]


1800년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시미즈노 지로쵸의 성공 이후 극우 국수주의에 기반한 야쿠자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특히 아시아 대륙과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본래 반정부 사조가 강했던 후쿠오카는 오늘날 일본 우익세력의 원조격 인물인 도야마 미츠루의 등장 시점과 함께 군국주의애국주의의 중심지로 변모하게된다. 도야마는 이 시기 후쿠오카에서 빈민가의 황제로 군림하면서 폭력단을 동원해 세력을 확대했다.

도야마가 구성한 겐요샤(현양사)라는 조직은 당시 국수주의 연합체로서 수많은 극우폭력활동을 주도했고 이 과정에서 구마모토 등 큐슈 지방의 도시 폭력조직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이렇게 성장한 겐요샤는 이후 일본 전국으로 확대돼서 극우 비밀결사의 상징같은 조직으로 자리잡게 되며 이는 후신이 되는 흑룡회로까지 이어지게된다.

미군정(일본) 이전까지 정치조직과 영합해 크게 성장한 야쿠자 조직들은 전후 미점령하에서 다시 물밑으로 숨어들어가기 시작했다가 삼국인과의 충돌로 다시 성장할 수 있게된다.

당시 일본은 이른바 삼국인이라고 불려지는 한국, 중국, 대만인들이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계층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송환된 이들도 많았지만 일본에 정주한 이들도 상당했기 때문에 이들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의 대부분은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온 케이스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증오가 상당했고 동시에 일본인들에게는 차별의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요 암시장을 중심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미군정은 당연하게도 일본인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고 이에 따라 삼국인 계층을 미국인 관리들의 조수로 임용하거나 주요 일본인 범죄조직에 대한 제보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들 세력이 일본인들을 밀어내고 성장하기에는 더욱 용이했다.

이윤이 높은 암시장에서의 삼국인들의 세력확장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무력충돌로 이어지기도했는데 실제로 고베에서는 삼국인 조직 300명이 실력과시용으로 경찰서를 습격하자 야마구치 구미의 다오카 가즈오가 부하들에게 각종 무기를 동원해 경찰을 도와(!) 이들을 진압하기도했다. 당시 일본 경찰조직은 미군정에 의해 완전 무장해제된 상태여서 힘이 매우 약했고 무장도 기껏해야 방망이 수준이었는데, 그에비해 야마구치구미는 당시 진압에서 수류탄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다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무력충돌속에서 야쿠자들은 이른바 삼국인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써 경찰을 포함해 지역정부기관과 협력하는 일이 많았고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외국인들로부터 패전한 일본인들을 구하는 영웅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과거 마치 얏코의 이미지를 덧씌워서 자신들을 합리화한 것과 동일한 양상이었다.

다만 위의 마치 얏코에 대한 설명에서도 언급한 거지만 결국 이들은 악랄한 폭력조직이었다. 미국공공사업부의 해리 슈파크가 당시 관동에서 알아주던 조직인 마츠다구미를 지휘하던 마츠다의 처 요시코를 심문한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데키야적 전통을 계승해서 일대의 모든 노점들을 암시장화해서 노점상들에게 허가증을 팔아넘겼으며, 매달 사용료, 청소비 및 전기료를 징수했다고 밝히고있다. 또한 삼국인들을 포함한 경쟁조직과의 항쟁도 상당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자신들을 외국인에 대한 영웅처럼 포장해댔지만 결국 이들의 행동은 암시장을 확보하기위한 경쟁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4. 구렌타이의 성장[편집]


이러한 삼국인 계층을 공격하는 집단으로써 이 시기의 폭력 조직들은 과거의 극우적 성향의 연장선상에서 많은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구렌타이는 기존의 조직화된 바쿠토(노름꾼) 혹은 데키야(행상인)들 중심의 야쿠자 집단에서 한발 더 나아가 더 무자비하고 단순화된 갱집단에 가까운 폭력조직으로 전쟁말기부터 전후에 이르기까지 존재한 혼란속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전의 전통적 형태의 야쿠자 조직들이 오랜기간 가문을 중심으로 이어져오면서 발전했고 정치권과의 연결은 그 자체로 곁다리였던데에 반해 구렌타이는 주로 젊은 청년층을 1대로 하여 정치권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급격하게 성장했으며 그 범주또한 일본인과 삼국인을 가리지않고 구성되어있었다.

이 시기 유명한 구렌타이중에는 안도 아키라가 있다. 안도는 미군방첩대가 주목할 정도로 구렌타이중에서는 상당한 거물이었는데 41년 도쿄경찰이 직접 안도를 조선인 노무자들의 수호자이자 조선인 소년들의 보호자로 지명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정도로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주로 일본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어용 폭력조직을 운영하던 안도는 전후 건설업자로 둔갑해서 아츠키 공군기지 건설 등 수많은 기간사업에 참여해서 막대한 이득을 취했는데 겨우 40대밖에 안되는때의 일이었다.

안도는 주로 일본인 정치가와 미국 장성들을 연결해주기 위해 자신의 고급 나이트클럽[11]을 이용한 그는 실제로 수많은 미군 최고위 장성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이면서 로비를 했고 이는 천황제 유지를 설득시키는데에 중요한 역할로 작용했다고도 평가받는다.

이와같은 구렌타이 조직의 성장은 미군공공안전과 분과위원회의 보고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이 보고에 따르면 구렌타이 세력의 중심지인 도쿄에는 꼬붕 7,400여명에 오야붕만 180여명이 있으며 주로 중소기업에 대한 갈취로 각 기업체마다 평균 5,000~1만엔가량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전후 대부분의 구렌타이 조직들은 기존의 야쿠자 조직들에 구렌타이 조직을 통째로 넘겨서 야쿠자 조직들 내에서 탄탄한 지위를 점하게된다. 그러나 야쿠자 조직과는 별개로 구렌타이와 같은 갱 형태의 조직들은 소규모로 면면히 이어져왔고, 70~80년대에는 대규모 폭주족 계열 불량배들이 구렌타이와 같은 위치를 점했으며 2000년대와서는 폭주족 계열 불량배들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한구레라는 형태로 발전해, 오늘날의 야쿠자 조직들과 협력관계로 활동하고 있다.


5. 미군정과 야쿠자의 관계변화[편집]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미군정의 주요 방침은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자들에 대한 박멸에 맞춰져 있었으나 이는 47년 냉전의 시작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정반대로 바뀌게된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일본 공산당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일본 보수파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대놓고 이들을 숙청의 대상으로 삼고 2만명 가량의 공무원 및 교원을 해직하고 언론사들에 대한 대규모 압수수색, 좌익교수들에 대한 해직권고를 단행했다.

이러한 충돌속에서 이미 야쿠자식 조직으로 재편되었거나 극우화된 야쿠자 조직들은 수많은 노조와 좌익지도자들에 대한 공격의 일선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국은 전후 47년까지는 일본 우파조직들에 대한 숙청을 진행해왔지만 47년부터는 그 속도를 늦춰오기 시작했고 49년에는 공식적으로 이를 해제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우익갱단의 수는 750여개가 넘을 정도로 급속도로 증가했고 이들중 일부는 아예 정당을 창설하고 노동운동조직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48년 말 고다마 요시오가 석방되었다.


6. 고다마 요시오의 등장과 관동-관서의 대립[편집]


고다마 요시오는 항목에서도 나온것처럼 1950년대 야쿠자 조직의 정계진출에 중대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특히 유우바리 탄광 노조 탄압에 야쿠자 조직을 개입시키는것으로 미군정계와 일본 정부의 신뢰를 크게 얻게된 고다마 요시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계와 일본내 야쿠자사회를 연결하는 중개인으로 명성을 얻게된다.

60년대 초부터 이렇게 시작된 명성을 바탕으로 고다마 요시오는 관동에서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이나가와회와 손을 잡게된다. 당시 이나가와회의 수장인 이나가와 세이죠는 야쿠자조직들중에서도 특히나 정치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 폭력조직사회와의 연결점을 원했던 고다마 요시오의 입장에서는 관동에서 크게 세를 불리고있던 이나가와회와의 협력은 그 자체로 매우 고마운것이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이나가와회와 고다마 요시오의 협력관계는 관서의 야마구치구미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관동회라는 조직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치게된다. 관동회는 관동지역에서도 특히나 도쿄를 중심으로하는 거대 야쿠자조직들의 모임으로 이나가와회를 중심으로 스미요시회와 같은 거대조직들이 참여해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60년대 초를 기점으로 야마구치구미는 규슈 침공 등 관서지역에서 대규모 세력확장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자연스럽게 관서지역의 통합이 거의 완료되자 일본의 수도가 위치해있으면서 가장 많은 이권이 몰려있는 관동지역 진출에 큰 관심을 표방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에따라 관동지역의 야쿠자 조직들은 야마구치구미라는 강대한 적에 대항하기위해서 조직들간의 의견교환을 위한 모임을 구성할 필요성을 느꼈고[12] 마침 야쿠자세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했던 이나가와 세이쵸와 고다마 요시오는 관동지역의 야쿠자 조직들을 모아 1963년 12월 관동회라는 모임을 결성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하였다.[13]

이렇게 결성된 관동회는 그러나 이나가와 세이쵸와 고다마 요시오가 가진 정치적 목적과 관동회에 참여한 다른 조직[14]의 이견차이로 인해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특히 고다마가 자신과 가까웠던 자민당고노 이치로를 위해 관동회의 명의로 자민당에 파벌정치의 종식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보냈다가 도리어 자민당 정권의 분노를 사 전후 최초의 대대적인 야쿠자 검거였던 제1차 정상작전(第一次頂上作戦)이라는 결과를 불러오자 결국 결성 2년만인 65년에 해산되게된다.[15]

그러나 이렇게 해산되었던 관동회는 야마구치 구미가 고다마 요시오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다나카 세이겐과의 협력 이후 보다 공격적인 확장을 시도하면서 72년에 마츠바회와 이나가와회가 다시 협력하는것을 시작으로 관동계 조직들이 다시 모여 관동이십일회라는 모임을 구성하는것으로 재건되었다. 다나카 세이겐은 15만명의 규모를 자랑하고 더욱이 정치권과의 커넥션도 탄탄하였던[16] 극우단체 전애회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던 거물이었고 이런 인물과 다오카 카즈오의 연대는 자연스럽게 관동계 조직들과 이들과 커넥션을 맺은 고다마의 입장에서는 큰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기적인 회합이 이루어지는 모임을 통해 결속력을 다진 관동계 야쿠자 조직들은 고다마 요시오의 백업을 바탕으로 70년대 내내 야마구치구미와의 대립을 이어갔다.

이렇게 60~70년대의 관동-관서 조직간의 대립은 78년 발생한 벨 아미 나이트클럽 습격 사건 이후 반전을 맞이하게된다.


6.1. 관서-야마구치 구미의 세력 감소[편집]


78년 벨 아미 나이트클럽에서 다오카 카즈오에 대한 암살시도는 야마구치 구미의 상승세가 멈추게된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 습격사건으로 인해 다오카의 카리스마에 대한 의심이 야마구치 구미 내부에서 확산되었고 결국 대규모 기자회견 이후 얼마안가 다오카 카즈오의 사망으로 인해 야마구치 구미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다오카 카즈오 사후 유력한 후계자였던 야마모토 겐이치의 어이없는 사망은 이러한 분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조직의 1인자와 2인자가 연달아 사망하면서 야마구치 구미의 후계갈등은 격화되었고 결국 유력한 후계후보였던 다케나가 마사히사와 야마모토 히로시의 대립이 야마모토 히로시의 독립으로 이어짐에따라 대규모 내부항쟁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항쟁은 결국 야마모토 히로시의 이치와회가 4대 구미쵸 다케나가 마사히사를 습격해 죽이면서 정점에 달했고 최종적으로는 85년 호놀룰루에서 야마구치구미 또한 죽은 구미쵸 다케나가 마사히사의 동생 다케나가 마사시가 대규모 무기밀매로 잡히면서 소강상태를 맞이한다.

대규모 무기밀매의 실패 이후 계속된 내부항쟁으로 일본경찰들의 수사망을 버텨낼 수 없게된 야마구치 구미는 결국 내부항쟁을 멈추고 자중하는 방향으로 선회함에 따라 야쿠자세계에서의 영향력을 상당히 많이 상실하게된다.


6.2. 관동-스미요시 연합의 세력 감소[편집]


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던 관동-관서의 대립은 70년대 후반 야마구치 구미가 내홍으로 약화되는 과정에서 일단락되었다. 이에 따라 관동지역의 조직들은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재편성해나갔으나 스미요시 연합은 그렇지못했다.

82년 스미요시 연합의 산하조직인 이케다회는 극동회와 벌인 이케부쿠로항쟁 도중 경찰관을 사살해버리는 사고를 치고만다. 항쟁 도중에 발생한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스미요시연합은 이케다회를 향해 가장 큰 징벌인 절연을 선포하게 되는데 결국 꼬리자르기에 가까웠던 스미요시연합 간부진의 이러한 결정은 이케다회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고, 여기에 큐슈의 도우진회가 응답하게 된다. 큐슈의 도우진회는 무투파로 유명한 큐슈 조직들 중에서도 규모가 상당한 조직이었는데 이를 도쿄진출의 기회로 본 도우진회는 산하 조직원들을 대규모로 파견하여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감행, 결국 스미요시연합은 수도권지역의 거점을 상당부분 상실하게된다.

이후 스미요시회는 도우진회와 화해를 하고 나중에는 다시 수도권내 주요 거점을 다시 회복하는데에 성공하나 이때의 타격은 상당히 오랫동안 스미요시회의 성장을 가로막게된다.


7. 류큐지방에서의 폭력조직의 발전과 1991년 폭력단 대책법의 도입[편집]


이와같이 60~80년대는 야쿠자 조직들이 일본의 경제성장과 함께 급속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항쟁과 대립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특히 90년대의 폭력단 대책법의 제정은 류큐지역(오키나와현)에서의 항쟁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류큐지방은 일본 본토와는 거리가 먼 특성 때문인지 이른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야쿠자와는 다른 폭력조직들만이 존재해왔다. 그러나 전후 복구과정에서의 혼란은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류큐지방을 피해가지 못했다. 1945년부터 72년까지 오키나와는 미국의 통치를 받았는데(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 이 시기 류큐내 토착 범죄자들의 조직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류큐내 폭력 조직은 52년 이후 크게 나하시를 거점으로 하는 나하파와 코자시(현 오키나와시)를 거점으로 하는 코자파로 양분되어 있었다.[17] 이들 조직은 미군통치하의 류큐지방에서 약 10년간 3차에 이르는 대규모 항쟁을 반복해서 벌이면서 대립을 반복했다. 이들은 일찍부터 미군기지에서 쉽사리 무기를 빼돌려 쓰기도 했기 때문에 곧잘 심각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그러던 가운데 1972년 류큐가 일본에 반환되어 다시 오키나와현이 되고, 70년대 경제부흥의 시작과 더불어 일본 본토의 야쿠자 조직들이 급격하게 조직확장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류큐에도 본격적인 진출이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오키나와의 야쿠자 세력들은 곧 대립을 그만두고 연합하여 류큐연합 쿄쿠류카이를 결성한다.

류큐지방에 대한 본토 야쿠자 조직의 진출은 주로 야마구치구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야마구치구미는 당시 전국규모의 세력확대를 통해 엄청난 세력을 자랑했고, 이러한 야마구치구미의 류큐 진출은 자연스럽게 토착 폭력조직들의 연합 구성 및 토착조직과 일본 본토 조직의 항쟁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18]

이때의 항쟁을 일반적으로 제4차 류큐항쟁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항쟁은 그 주역이 토착세력인 류큐폭력조직과 외부세력인 야마구치구미라는 구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일본 본토에서의 항쟁과 달리 중재할만한 중립적인 조직이 따로 없었던 부분이 커 엄청난 폭력성을 자랑했는데, 실제로 대낮에 총격사건이 벌어지거나 상대 사무실에 수류탄이 날아들어가기도 했으며, 심지어 이들 조직원들이 경찰관을 쏘는 일도 벌어지는 일이 1~2년도 아니고 약 5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이어졌다.

결국 류큐항쟁을 포함하여 전국규모로 벌어지는 야마구치구미 주도의 항쟁들을 보다못한 당시 경찰청 장관 아사누마 세이타로는 77년 전국규모의 야쿠자 소탕작전을 다시금 지시했고,[19] 이에따라 제4차 류큐항쟁 또한 소강상태에 들어가게된다. 결국 이 항쟁은 야마구치구미의 핵심조직인 이나가와카이의 두목인 노가미 테츠오와 류큐의 쿄쿠류카이의 직계조직의 두목 2명이 5분 사카즈키를 맺음으로써, 종결된다.[20]

이렇게 야마구치구미와의 항쟁이 멈추고, 2대 두목의 사망 이후 류큐연합쿄쿠류카이는 쿄쿠류카이라는 이름으로 개칭 후 오나가 요시히로가 3대를 잇게된다. 3대 두목 오나가 요시히로는 몇년간 큰 항쟁없이 조직을 운영했지만, 90년 조직내 2차단체인 토미나가일가의 조직원이 오나가파 산하단체인 마루나가일가를 습격하면서 내부항쟁을 일으켰고, 결국 토미나가일가는 독립하여 류큐쿄쿠류카이를 결성한다.

이들의 항쟁은 민간인 희생자를 낼 정도로 과격하게 진행되었는데, 특히 항쟁 초기 고교생과 경찰관이 이들 조직원들의 다툼속에서 살해되는 대형사고를 쳤으며, 시내에서 자동차 추격전을 벌이거나 화염병 투척을 하는 등 미친 짓을 반복하면서 결국 폭력단 대책법 제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되었고, 이 조직들의 항쟁은 폭력단대책법 제정 이후 멈추게된다.[21] 이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도쿄의 중앙방송국(키국)에서 야쿠자 영화를 편성할 때 오키나와의 지방 방송국에서는 다른 프로그램으로 변경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폭력단 대책법은 일본내 대규모 야쿠자 조직들을 지정폭력단이라는 형태로 규정, 집중 감시하고 기존의 조직들이 파문 등의 절차를 통해서 꼬리자르기를 하여 범죄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엔 대규모 항쟁 발생시 행동대장격인 조직들만 잘려나가는데에 그쳤던 것이 이 법안 이후 최상위 조직들까지 얽힐 수 있게됨에 따라 야쿠자 조직들의 폭력활동이 급격하게 감소하였고 대체적으로 항쟁급 갈등은 실제 항쟁보다는 돈을 통해 해결하는 경향이 늘어나게 된다. 물론 쿠도카이같이 여전히 미쳐날뛰는 조직들도 여전히 존재하나, 과거와 비교했을 때 수십명이 피를 보는 항쟁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8. 2011년 폭력단 배제조례의 도입과 야쿠자 조직원의 감소 및 지하화[편집]


2011년서부터는 폭력단 대책법을 더 강화한 폭력단 배제조례를 전국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다.기사 폭배조례는 야쿠자를 사실상 일본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조례로 야쿠자는 자신의 명의로 휴대폰 개설, 은행거래, 자동차 명의 등록, 보험 가입도 안될 뿐더러 모임 장소를 빌려주거나 주택을 빌려주거나 골프장 출입, 목욕탕 출입 같은 사소한 것까지 금지당한다. 사실상 일본 내에서 야쿠자로 활동했다가는 이제는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보면 된다.

폭력단 관계자임을 숨기고 거래를 해도 나중에 발각될 경우 사기죄가 적용되어 처벌받는다. 게다가 본인 명의 은행계좌가 없으니 사회복지 혜택을 받기도 힘들다. 은퇴를 하거나 탈퇴를 해도 5년 동안은 조직 관계자로 취급돼서 이같은 폭대법과 폭배조례의 대상이 된다. 즉 야쿠자들에게 굉장한 제약을 가하는 제도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 정부가 사실상 야쿠자를 사회적으로 아주 씨를 말려서 말살해버리겠다라고 할 정도로 가혹한 제재이다. 다만 이 법으로 인해 야쿠자들의 자식들마저 부모가 야쿠자인게 들통나 차별받는 연좌제 같은 경우도 있으며 조직원이 일반적인 기업에 취직하는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인 차별과 냉대가 악순환이 돼서 야쿠자 조직을 못빠져나온다라는 비판도 있다.

정부와 지자체의 강력한 제재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린 소규모 야쿠자 조직들은 대거 해산되고 있으며 규모있는 야쿠자들은 폭배조례를 피하기 위해 타인의 명의를 쓰거나 한구레를 이용하거나 점조직화 하면서 점점 지하화[22]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야쿠자가 운영하는 합법적인 기업화도 힘들고 그렇다고 총기밀반입 등 불법적인 사업도 단속으로 힘드니 점점 마약 사업에 집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야쿠자도 마약은 지저분한 사업 취급하면서 대놓고 하진 않았지만[23] 지금은 자금난에 워낙 시달리다보니 대놓고 마약에 손을 안대면 조직 유지가 어렵다고 하소연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전에는 일명 보호비라고 해서 뜯어갔다가 빌미를 잡힐까봐 꽃 한송이나 수건 한개를 댓가로 돈을 뜯어가는 행위로 부수입도 있었으나 이제 음식점들도 야쿠자들이 더이상 갑의 위치에 있지 않음을 인지하여 야쿠자 대응 연합을 만든 덕에 이제 야쿠자들을 보면 쫄기보다 바로 일본 경찰에게 신고하여 이들을 전부 철창행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야마구치구미의 분열소동도 결국 이러한 자금난이 심화되는 와중에 상납금을 계속 올리는 고도카이를 비롯한 나고야파의 전횡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야마켄을 비롯한 고베파가 분열해서 생긴 것이며, 전체적으로 과거에 비해 정형화된 야쿠자들의 숫자가 크게 줄고 있다. 이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던 엄청난 조직 구성원들이 양복입고 연회에 모이는 그런 그림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분열되어 음지에서 야비한 짓을 저지르는 점조직화 되어가는 중이라고 보면 편하다.[24] 과거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를 거치며 음지로 스며들어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하고 아웃소싱과 인물 중심의 점조직화를 꾀한 한국의 조직폭력배 테크를 타는 것과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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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도 아닌 정 어쩔 수 없는 경우엔 농사꾼이 되기도 하였다.[2] 노름꾼. 특히 봉건 시대의 길거리 노름꾼 집단.[3] 노점 및 행상인들[4] 무법자 혹은 악한이란 뜻[5] 이러한 사례는 흔한데 과거 열강이 대대적인 공사에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현장 근처에 도박장을 개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6] 저렇게 웃통을 까고 도박을 하는건 손님들에게 사기를 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뜻이라고 한다.[7] 데키야에는 행상인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다 보니, 장기간 집을 비우는 조직원들이 많았고, 이때를 노려서 타 조직원의 처를 건드리는 일로 인해 조직 기강에 문제가 될 수 있어서 이러한 조항이 생긴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러한 규칙은 마피아 등의 고도로 조직화된 다른 범죄 조직에도 많이 존재하는 것으로 데키야와 그 후손인 야쿠자에만 있는 규칙은 아니다. 사실 이런 일이 발생해서 눈 뒤집혀 칼질을 해대면 조직이 유지되기 어렵다. [8] 당시 대부분의 야쿠자 조직들은 막부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기생해서 수입을 얻고 있었다. 바쿠토 조직들이 상대하는 주요 고객들은 막부가 만든 가도나 막부가 벌인 대규모 토목사업을 통해 발생하고 있었고, 데키야 조직들은 아예 한발 더 나아가 막부에 의해 직접 직위를 받는 경우도 흔했다. 이렇다보니 당시의 야쿠자 조직들이 막부편에 서는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9] 흔히 폭력조직하면 반정부조직을 떠올리지만 규모가 성장하면서 상당한 조직화가 진행된 폭력조직들은 소규모 폭력조직들과 달리 대체로 정부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기생해서 이익을 빨아먹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보수성을 띄곤한다. 이러한 폭력조직들은 현시스템의 현상유지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나가는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보수정치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로비활동을 벌이기도하며, 필요할때는 혁신을 추구하는 단체들을 폭력을 동원해 제압하기도 한다.[10] 당장 도로미즈 지로쵸가 이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다.[11] 말이 나이트 클럽이지 사실상 사창굴이었다. [12] 흔히 일본의 창작물에서 나오는 서쪽으로부터의 침략 같은 클리셰는 사실 이 시기에 영향을 받았다고보면된다. 당시 이러한 흐름은 항쟁이라는 형태로 상당히 이슈화가 많이 이루어졌고, 자연스럽게 작가들이 이에 영향을 받아 묘사한 창작물이 범람하면서 하나의 클리셰가 된것이다.[13] 특히 이는 같은 년도 3월에 이나가와회가 연루된 그랜드 펠리스 사건의 영향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야마구치 구미는 동성회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도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데에 성공했기 때문에 관동계 조직들이 경계심이 강화되기도 하였다.[14] 특히 스미요시회는 정치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야마구치 구미에 대한 견제에만 관심이 있었다.[15] 다만 이는 65년에 스미요시회가 너무 급격하게 세를 불리면서 경찰의 견제를 받아 형식적인 해산을 한 영향도 있었다.[16] 당시 전애회의 의장이던 타케이 케이죠는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요짐보, 친위대장이라고 까지 일컬어질 정도였다.[17] 흔히 본토 야쿠자 조직들이 OO회, OO일가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점에서 류큐 폭력조직의 특성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오늘날에 와서는 큰 의미가 없지만.[18] 이 시기 류큐진출의 계기가 된 조직이 바로 정건영의 동성회다. 정확히는 동아회로 이름을 바꾼 후의 동성회인데, 동성회는 66년 해산 후 동아우애사업조합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해서 재조직되었고, 70년대초반 동아우애사업조합 류큐지부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야마구치구미의 류큐진출 시작을 알렸다. 야마구치구미는 토착조직들의 연합을 경계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새로운 하위조직을 해당지역에 만들어서 기반을 닦곤 했는데, 동아우애사업조합은 효고현의 오오히라카이의 조직원들을 일부 포함시켜 후루카와카이라는 조직을 오키나와현에 만들어서 기반을 닦으려고했다. 물론 곧 이 조직들의 관계를 눈치챈 쿄쿠류카이는 더욱 내부결속이 단단해져서 큰 의미는 없었지만.[19] 이미 66년 제1차정상작전을 통해 일본경찰은 한번 야쿠자조직들의 기를 죽여놨으나, 몇년도 안돼서 또 이런 항쟁들을 벌이니 열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20] 다만 여기서 어이없는건 야마구치구미와의 항쟁은 종결되었지만, 당시 이 항쟁종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쿄쿠류카이의 2대 두목은 항쟁 종결을 강압적으로 진행하였기 때문에 조직내 반대파의 반발을 사, 결국 82년 반대파 조직원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21] 현재 이 두 조직은 2010년에 통합되었다.[22] 예컨대 본부에 등록해야하는 직참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에는 철저히 숨은 조직원이 돼서 조직에 등록도 안하고 심지어 문신도 안하는 기업사제가 되는 식으로 숨어있는 것이다.관련기사 기사에 따르면 지금은 과거와 달리 조직원이 많다고 자랑하는 그런 시대는 아니라고 한다. 조직에 등록을 안하면 일단 폭배조례는 피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신입들은 가급적 등록을 안시킨다고 한다. 최근 야쿠자들이 노인들이 많아 보이는 것도 이미 경찰 관리대상인 간부급 노인들은 어쩔 수 없지만 젊은이들은 폭배조례를 피하기 위해 등록을 안시키거나 야쿠자와 한구레의 중간쯤 느낌으로 빼서 관리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의 통계로 수십명 규모의 작은 조직이 지정폭력단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 규모가 그정도라기 보다는 직참들이 그 정도고 실제 조직원은 그 밑에 숨어있는 인원들이 있어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조직폭력배와 유사한 느낌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23] 물론 알음알음 뒷편으로는 잘만 사업을 해왔다.[24] 폭력조직의 점조직화는 사실 세계적으로 보면 십수년 전부터 조직범죄를 처벌하는 사법기관 대응 노하우의 누적으로 이미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경향이었다. 오히려 일본 내 야쿠자 조직들이 특이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러한 변화를 거부해왔던 것인데, 결국 야쿠자 조직도 이러한 흐름을 버틸 수 없게된 것. 실제로 야쿠자 만큼이나 유명한 범죄조직들인 이탈리아 마피아나 미국 마피아들은 이미 점조직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고, 이 때문에 기존의 조직범죄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는 이들을 잡기가 어려워 많은 사법기관들이 난항을 겪고 있는 만큼, 향후 일본도 점조직화된 야쿠자 조직에 대한 대응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