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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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 세가(世家) ]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 ※ [ 열전 ]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표(表) ]
86·87권 「연표(年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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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후비·종실·공주 ]
88·89권 「후비(后妃)」
90·91권 「종실(宗室)」 · 「공주(公主)」
태조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성무부인 소생 공주)
혜종
정종
광종
의화왕후 임씨 · 후광주원부인 왕씨 · 청주원부인 김씨 · 궁인 애이주
문공왕후 박씨 · 문성왕후 박씨 · 청주남원부인 김씨
대목왕후 황보씨 · 경화궁부인 임씨
흥화궁군 · 태자 왕제 · 경화궁부인 · 정헌공주 · 명혜부인
경춘원군 · (문성왕후 소생 공주)
효화태자 · 천추전부인 · 보화궁부인 · 문덕왕후
경종
성종
목종
헌숙왕후 김씨 · 헌의왕후 유씨 · 헌애왕태후 황보씨 · 헌정왕후 황보씨 · 대명궁부인 유씨
문덕왕후 유씨 · 문화왕후 김씨 · 연창궁부인 최씨
선정왕후 유씨 · 궁인 김씨
-
원정왕후 · 원화왕후
-
현종
원정왕후 김씨 · 원화왕후 최씨 · 원성태후 김씨 · 원혜태후 김씨 · 원용왕후 유씨 · 원목왕후 서씨 · 원평왕후 김씨 · 원순숙비 김씨 · 원질귀비 왕씨 · 귀비 유씨 · 궁인 한씨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평양공 왕기 · 검교태사 왕충 · 효정공주 · 천수전주 · 인평왕후 · 경숙공주 · 효사왕후 · 효경공주 · 경성왕후 · 아지
덕종
정종
경성왕후 김씨 · 경목현비 왕씨 · 효사왕후 김씨 · 이씨 · 유씨
용신왕후 한씨 · 용의왕후 한씨 · 용목왕후 이씨 · 용절덕비 김씨 · 연창궁주 노씨
상회공주 · (유씨 소생 공주)
애상군 왕방 · 낙랑후 왕경 · 개성후 왕개 · 도애공주
문종
인평왕후 김씨 · 인예순덕태후 이씨 · 인경현비 이씨 · 인절현비 이씨 · 인목덕비 김씨
대각국사 왕후 · 상안공 왕수 · 도생승통 왕탱 · 금관후 왕비 · 변한후 왕음 · 낙랑후 왕침 · 총혜수좌 왕경 · 조선공 왕도 · 부여후 왕수 · 진한후 왕유 · 적경궁주 · 보령궁주
순종
선종
정의왕후 왕씨 · 선희왕후 김씨 · 장경궁주 이씨
정신현비 이씨 · 사숙태후 이씨 · 원신궁주 이씨
-
한산후 왕윤 · 경화왕후 · (사숙태후 소생 공주) · 수안택주
숙종
예종
명의태후 유씨
경화왕후 이씨 · 문경태후 이씨 · 문정왕후 왕씨 · 숙비 최씨
상당후 왕필 · 원명국사 징엄 · 대방공 왕보 · 대원공 왕효 · 제안후 왕서 · 통의후 왕교 · 대령궁주 · 흥수궁주 · 안수궁주 · 복령궁주
승덕공주 · 흥경공주
인종
의종
명종
폐비 이씨 · 폐비 이씨 · 공예태후 임씨 · 선평왕후 김씨
장경왕후 김씨 · 장선왕후 최씨
광정태후 김씨
대령후 왕경 · 원경국사 충희 · 승경궁주 · 덕녕궁주 · 창락궁주 · 영화궁주
효령태자 왕기 · 경덕궁주 · 안정궁주 · 화순궁주
왕선사 · 왕홍기 · 왕홍추 · 왕홍규 · 왕홍균 · 왕홍각 · 왕홍이 · 연희궁주 · 수안궁주
신종
희종
선정태후 김씨
성평왕후 임씨
양양공 왕서 · 효회공주 · 경녕궁주
창원공 왕지 · 시령후 왕위 · 경원공 왕조 · 대선사 경지 · 충명국사 각응 · 안혜태후 · 영창공주 · 덕창궁주 · 가순궁주 · 정희궁주
강종
고종
원종
사평왕후 이씨 · 원덕태후 유씨
안혜태후 유씨
순경태후 김씨 · 경창궁주 유씨
수령궁주
안경공 왕창 · 수흥궁주
시양후 왕이 · 순안공 왕종 · 경안궁주 · 함녕궁주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제국대장공주 · 정신부주 · 숙창원비 김씨
계국대장공주 · 의비 · 정비 · 순화원비 홍씨 · 조비 · 순비 허씨
복국장공주 · 조국장공주 · 경화공주 · 명덕태후 홍씨 · 수비 권씨
강양공 왕자 · 소군 왕서 · 정녕원비 · 명순원비
세자 왕감 · 덕흥군
용산원자
충혜왕
공민왕
공양왕
덕녕공주 · 희비 윤씨 · 화비 홍씨 · 은천옹주 임씨
휘의노국대장공주 · 혜비 이씨 · 익비 한씨 · 정비 안씨 · 신비 염씨
순비 노씨
석기 · 장녕공주
-
세자 왕석 · 숙녕궁주 · 정신궁주 · 경화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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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 - 제신(諸臣) ]
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121권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123권 「폐행(嬖幸)」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嬖幸)」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姦臣)」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姦臣)」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127권 「반역(叛逆)」
128권 「반역(叛逆)」
129권 「반역(叛逆)」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130권 「반역(叛逆)」
131권 「반역(叛逆)」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叛逆)」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대고려국 삼한후벽상공신
상서성 명예 공부 장관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楊規

공신호
추증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역임 직위
형부낭중(刑部郎中)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 都巡檢使)[1]
추증
공부상서(工部尙書)[2]
성씨
양(楊)
이름
규(規)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
아들
양대춘(楊帶春)
생몰년도
? ~ 1011
《고려사》 <양규 열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전초전
2.3. 대활약
2.4. 장렬한 최후
2.5. 후일담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임금의 명을 받고 오노니, 의 명은 받지 아니하노라."

"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

.

거란 성종이 강조의 편지를 위조해 항복하라 하자 답한 말. 이후 서북을 사수하며 고려의 승리를 뒷받침한다. 《고려사》 <양규 열전>서 발췌.

고려시대 여요전쟁 때 활약한 문관이자 무장.[3] 거란 성종이 직접 침입했을 때 소수 정예 병력을 이끌고 각지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잡혀가던 백성들을 구출해낸 명장이다. 《고려사》에서 척준경, 김경손 등과 함께 소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전과를 올린 고려용장 중 1명이다.

중군사 서희가 거란의 공세를 이겨낼 기틀을 마련했고 상원수 강감찬이 길었던 전쟁을 대승리로 끝냈다면, 도순검사 양규는 둘 사이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고려의 멸망을 막아낸 명장이라 할 수 있다.[4]

고려사》 <양규 열전>을 보면 초년의 기록이 거의 없고, 거란 성종의 침입 때인 1010년 11월부터 1011년 1월 말 사이의 활약상만이 존재하지만 3개월간의 활약이 매우 굵직하다.[5] 암울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양규의 활약상은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과 같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장렬한 최후를 맞은 부분까지 거의 일치한다 서양사로 보면 잔다르크 같은 인물로도 볼 수 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대(對)거란 전쟁 이전 초년기의 양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그의 <열전>에 목종 때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형부 낭중이 되었다는 기록만이 파편적으로 남아있는데 이를 근거로 추측하건대 성종 말년이나 목종 재위기에 관직에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당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그걸 명분삼아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 무렵 양규는 도순검사가 되어 흥화진[6]에서 흥화진사 정성, 흥화진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함께 흥화진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양규의 전임 도순검사가 바로 '강조'였다. 양규는 강조의 후임으로 흥화진에 부임한 것인데 아무래도 정변 직후의 군 인사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강조의 추천이나 승인없이는 이 요충지에 강조의 후임으로 부임하기는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이 때문에 양규는 어떤 형태로든 강조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2.2. 전초전[편집]


고려와 거란의 전격적인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1010년 11월 17일부터 1주일간 요나라 성종의 40만 대군이 양규가 지키고 있던 흥화진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양규 이하 3천 명의 흥화진 부대는 이 거센 공격을 막아냈다.[7] 성종은 사로잡은 고려 농민들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요지는 "전왕 왕송[8]은 우리 거란을 잘 섬겼는데 강조가 목종을 시해했기에 이를 정벌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강조를 잡아보내면 돌아갈 것이고 안 그러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강조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따른 사람들은 용서해준다"는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흥화진의 장수들은 정중한 말로 항복 권유를 거절하였고 이에 성종이 다시 흥화진 장수들에게 비단옷과 은그릇 등을 보내면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흥화진 장수들은 끝내 듣지 않고 정중한 말로 항복을 거부하는 서신을 또 한번 보냈다.

성종은 항복 권유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20만 병력을 무로대[9]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직접 20만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그리고 통주[10] 삼수채에 주둔하고 있던 강조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강조까지 포로로 붙잡은 뒤 처형시켰다. 이후 성종은 항복하라는 서신을 작성해 강조의 서신으로 위조하여 흥화진으로 보냈는데 양규는 "우리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이후 남하하던 거란군은 통주성을 공격했으나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했고 근처의 곽주성[11]을 함락하여 6,000여 명의 수비군을 남겼다. 곽주를 일종의 중간기지로 삼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빠른 직공을 위해 최소한의 중간기지를 마련하여 후일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거란군은 개경으로 남하하는 길에 서경[12]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양규의 진짜 맹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3. 대활약[편집]


전력이 계속 갉아 먹히고, 정체불명의 군대는 계속 뒤에서, 동에서, 서에서 번쩍하고, 병력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서) 거란군은 황제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을 거에요. 어디에서도 이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정명섭 |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평화전쟁 1019

서경이 거란군의 맹공을 받고 있었던 1010년 12월, 양규는 흥화진에서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1,000명의 군사를 수습하였다.[13] 특히 흥화진 남쪽이 무로대에 주둔한 20만 거란군에 의해 철저히 틀어막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양규는 소수 정예 병력으로 은밀히 부대를 운용해 거란의 포위망을 뚫고 통주까지 남하한 것이었다.[14]

그리고 이 부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거란군이 점령한 중간기지 곽주로 진격하여 6,000명의 거란 수비군을 몰살하고 성을 탈환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성을 치고 들어갔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공격했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정공법이었을 가능성은 없고, 성내 고려인들의 내응을 통해 무너뜨렸거나 뭔가 책략을 써서 성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순식간에 곽주를 점령한 양규는 이후 붙잡혀 있었던 고려 백성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겨 통주성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곽주 전투야말로 여요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인 승리였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의 손에 남아있었다면 보급로를 확보한 거란군의 공격에 서경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며, 만약 서경이 거란의 손에 떨어졌다면 고려가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개경이 거란의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어 전쟁을 수행할 역량 자체를 상실했을 것이다.

중간 보급기지를 상실한 데다가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거란군은 그래도 서경에서 개경 사이의 길에 고려군이 없었기에 서경도 방치한 채 그대로 진격했고, 1011년 1월 1일, 성종이 수도 개경에 입성해 성을 불태웠으나 고려 국왕 현종은 이미 남쪽으로 몽진을 떠난 뒤였다. 거기에 성종 휘하 거란군도 꽤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의 충신 하공진이 '고려 왕은 이미 남쪽 수천리 밖으로 피한지 오래다.'라고 과장하자 추격을 포기하고 곧 철수를 개시했다. 이들은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 가며 청천강까지 올라갔는데,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귀주 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이들을 습격해 거란군 10,000명을 죽였다. 그리고 때맞춰 양규도 거란군 예비 병력 20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던 무로대를 습격하여 2,000여 명의 목을 베고, 고려 백성 3,000여 명을 구출해냈다.

귀주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0,000여 급을 베었다. 양규는 무로대의 거란군을 습격하여 2,000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000여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고, 추격하여 석령까지 가서 2,500여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000여명을 되찾았다. 3일 후에는 다시 여리참에서 싸워 1,000여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000여명을 되찾았다. 이 날 하루 동안 세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고 다시 그들 선봉을 애전에서 맞아 싸워 1,000여 급을 베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양규와 김숙흥은 사전에 서로 연락을 취하며 전투를 치루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해 들어갔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 후미를 공략했다. 계속해서 이수(梨樹)에서 석령(石嶺)까지 추격해 2,500여 명의 거란군을 죽이는 동시에 고려인 1,000여 명을 탈환했고, 3일 뒤 여리참(余里站)에서 세 번의 전투를 벌여 1,000여 명을 사살하고 고려인 1,000여 명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즉 양규의 목적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거란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혀 가며 고려 백성들을 최대한 많이 구출해내는 것이었고, 양규가 이 전쟁에서 세운 최대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속해서 전투를 벌이며 거란군을 압박하다가 이윽고 김숙흥 부대와 합류했다.

이런 양규의 공적은 임경업병자호란 때 요퇴를 공격한 것에 비견되어 폄하될 우려가 있는데, 비록 철수하는 병력을 공격한 것은 동일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임경업은 이미 화의가 다 끝난 상태에서 공격한 것이고, 양규는 엄연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전 의사가 있는 적을 공격하여 전과를 거둔 것이다. 단순히 철수 중인 적을 쳤다고 폄하된다면 살수대첩이나 귀주 대첩 역시 철수하는 수(隋)군과 거란군을 공격한 것이며 노량해전도 철퇴하는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니 별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15] 결정적으로 양규의 게릴라전은 언제 요 성종이 친정하는 거란 본대와 맞딱뜨려 전멸할지 알 수 없는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2.4. 장렬한 최후[편집]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16]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000여명의 수급을 벴다. 그런데 이 애전에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났다. 거란 황제의 최정예 친위군이었던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은 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말 그대로 처절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이다보니 당해낼수가 없었고 마침내 힘이 다해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17]

고려의 무인으로서 극한의 분투를 벌였던 양규 부대는 전멸했지만 거란군도 그 결사적인 맹공에 입은 타격이 너무나도 컸던 데다가 큰 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했을 지경이었다.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수비대장인 정성이 흥화진에서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맹렬하게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익사한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당시 반쯤 건넜다는 말을 보면 이미 요 성종이 건너고 후미 부대가 아직 건너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때 정성의 고려군이 기습하자 지칠대로 지친 요 성종의 직속군조차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강을 건너느라 빠져 죽었을 것이다.[18]

양규는 원군도 없이 1개월 사이에 모두 7번을 싸워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그가 구출한 고려인 포로는 무려 30,000명에 이르렀다. 또한 그가 노획한 군마와 낙타, 병장기도 무수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양규를 비롯한 서북군의 피나는 분투는 거란군에게 무려 400km에 달하는 고립을 강요했고, 초반에 통주의 주력군이 털려 파죽지세로 개경을 잃은 고려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이들의 전공이 아니었다면 거란이 다 이긴 전쟁을 고려의 친조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으로 대충 마무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19] 그토록 탐냈던 노른자위 강동 6주를 어영부영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고려는 무수한 노동력의 손실과 추가적인 배상 등에 시달리면서 파탄을 맞이했을 것이다.[20] 이들의 희생으로 고려는 비록 국토가 초토화되긴 했지만 막대한 노동력을 보전하고 배상을 면하는 등 추가적인 손실을 최소화함으로써 이후 제3차 여요전쟁에서 완벽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2.5. 후일담[편집]


사후 양규는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21]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했고,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 벼슬을 내렸다.[22]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건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 뒷날 고려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신흥사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아버지의 공도 있었겠지만 그 자신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으며, 이후로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다.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23]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4년 2월엔 양규의 증손자 양제보(楊齊寶)가 등장한다. 별무반 신기군(神騎軍) 직장(直長) 직위를 지니고 있었고, 예종에게 은가구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양규와 비슷한 행적을 걷는 장수가 나오는데 바로 여몽전쟁 시기의 명장 김경손이다. 양규가 소수의 병력으로 거란군을 격파하거나 김숙흥 같은 유능한 동료와 함께 적을 무찔렀는데 김경손 역시 여몽전쟁 시기 고작 12명의 소수의 병력으로 몽골군을 격파하거나 게릴라 전술을 썼고, 박서와 함께 하며 귀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하는 장면들이 양규와 매우 흡사하다.[24]


3. 평가[편집]


양규는 특공대를 앞세운 인질 구출·게릴라 분야에서만큼은 감히 견줄 자가 없는 한국사 최고의 특수전 사령관이라 할만한 인물로, 활약한 시기가 짧아 기록이 많지 않은게 아쉽다면 아쉽지만 대중매체에서도 스토리를 나름 흥미롭게 다룰 수 있는 소지가 많은 인물이다. 이상 전술한 바를 토대로 양규의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임금(현종)의 명을 받들어 고작 3천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당대 최강 요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 성종이 친정한 40만 대군을 괴롭힘.

[2]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휘하의 날랜 용사 1700명을 차출한 뒤 그들을 특공대로 삼아 6000명의 거란군이 지키고 있던 곽주성을 함락시킴.

[3]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거란 유목민 부대를 상대로 1달간 7번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하고, 적병 수만 명을 죽임과 동시에 고려인 포로 3만 명을 구출.

[4] 양규와 그의 부대가 이룬 죽음을 불사한 활약 덕분에, 고려는 이후 기사회생하여 제3차 여요전쟁 땐 한국 야전 역사상 가장 완벽한 승리라 평가되는 귀주대첩의 신화를 쓰며 요나라와 경쟁하던 여진족에 대한 종주권을 장악하는데 성공, 마침내 독자적인 세계관(해동천하관)을 확립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됨. 그리고 100년 이상 큰 외적인 침략없는 평화가 찾아오는 중세 동아시아 세계의 균형자 국가로 우뚝 서게 된다.[25]

결과적으로 국가 멸망의 위기 상황 속에서 소수의 특수부대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기지를 확보한 후, 많은 적병을 주살한 끝에 적의 우두머리였던 황제 성종을 퇴각시키고, 그럼에도 마지막 한 명의 백성까지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놓음으로써 직분을 다하다 사망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홍일권이 연기했다. 그래도 용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보여주는 모습은 인간흉기로 심지어 과 교감이 가능해서 마음대로 말을 다룰 수 있다. 야율분노이기는 실력이고, 강조를 제압한 적이 있는[26] 야율적로를 1샷 1킬로 베어버렸고, 어지간한 장수 여러 명은 상큼하게 웃으며 베어버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에이스급 장수들과 싸울 때 당연히 진 적이 없다.[27][28] 최후에 그는 김숙흥과 함께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는 순간에도 도망가는 거란군을 노려본다.[29][30] 죽기 전에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김숙흥이 "장군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상당히 멋있는 장면. 그를 죽여야 했던 황제도 적의 용맹에 대해서는 인정했는지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이다.

  • 고려사를 다루는 학습 만화에서도 이들을 빼놓지 않으며 당연히 이들의 최후가 가히 무협지를 뺨치게 한다.[31] 고려사 학습 만화 장면 중 가장 가슴이 찡한 장면이라고 한다.

  • 2019년 JT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배우 이우승[32]이 연기했다. 그동안의 소외를 씻어버리듯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무쌍을 펼친 끝에 자신의 결사대와 거란군도 모두 쓰러지고 홀로 서서 요 성종을 쏘아보다 거란군이 멀리서 쏘아대는 화살비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쓰러지는 모습은 간지 그 자체.
[1] 지금으로 치면 야전군사령관 격 정도인 군의 임시 총사령관 정도된다.[2] 상서성 소속 공부의 장관.[3] 양규는 정식 무관직을 역임한 적이 없다. 하지만 전쟁 중 후방에서 지휘뿐만 아니라 전장에 나가 직접 싸우기도 하는 등 무장의 모습을 보였다. 고려의 문벌귀족 사회 특성상 고위급 장수들은 전부 문관이었다. 강감찬, 윤관 등도 전부 문관. 문관이 나라 거덜낼뻔한 무관보다 낫네.[4] 아쉽게도 교육 과정에서는 비중이 적어서 기껏해야 '양규의 선전'이라는 표현으로 뭉뚱 그려지기도 한다. 실제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거란군의 후방을 괴롭혀서 철수하게 만든 양규가 없었다면 거란이 승리하는 것을 넘어서 고려가 거란의 2차 침공 때 끝장났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거란의 3차 침공에서 다시 한 번 무너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근래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는 그의 이름이 거론된 사료가 문제로 출제되는 등 인지도를 늘려가고 있다.[5] 고려가 조선보다 기록이 부실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활약이 있으려면 실전경험이 매우 풍부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원래부터가 기량이 좋은 명장이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6]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7] 대충 환산해도 병사 1명당 적병 133명의 교환비를 낸 것이다.[8] 목종 선양대왕의 휘.[9] 오늘날의 의주 남쪽 부근.[10] 오늘날의 평안북도 선천군.[11] 평안북도 곽산군.[12]고구려 수도이자 고려 제2수도 평양.[13] 통주에서 1,000명의 병사들이 합류해 1,700명의 병력이 되었다는 의미인지, 통주에서 수습된 병사들까지 합쳐 1,000명의 병사가 되었다는 의미인지 확실하지 않다. ‘JTBC 창사기획 평화전쟁 1019’에서는 1,700명으로 소개했다.[14] 다만 무로대에 위치한 20만명의 거란 대군을 뻥카로 보는 추측도 있다. 아무리 당시 요나라가 최전성기였다고 해도 뒤에 비록 여러 번 발렸다지만 언제든지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북송이 배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중원을 통일한 역대 황제들조차 동원하기 힘든 40만 원정군을 동원할 역량이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며, 우리나라에 20만이란 군세를 주둔시킬 거점이 있는지도 불확실하거니와 이후 전쟁에서 무로대에 남았다는 20만 대군은 행방이 묘연해진다. 물론 무로대에 주둔한 거란군이 20만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병력은 남겨두었다는 것은 분명하다.[15] 철수 중인 군대가 약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집에 갈 일만 남겨둔 상태에선 안 죽으려고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심리를 읽고 일부러 길을 터주는 전술도 있을 정도인데 더 설명이 필요한가?[16] 공교롭게도 지명이 '쑥 애'에 '밭 전'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실향민 출신 전원곤씨의 말에 의하면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 길성동 전촌(전씨 집성촌) 부락 근방에 양규가 전사한 고개가 있었고 거란군과의 전투 이후 마을이 폐허가 되어 인적이 끊긴 이후로 쑥만 무성한 쑥밭이 되어서 애전현으로 불렀다고 한다.[17] 이건 양규와 김숙흥에게 엄청난 전공인데 과거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하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그야말로 고려가 나중에 3차 침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병사로 복무하거나 전시에 필요한 군량미 등을 지원해 줄 수 있었으며, 양규와 김숙흥의 혼신의 힘을 다한 장렬한 혈투 덕분에 고려는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성종 야율문수노에게 굴욕감을 주었다. 명색이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가 후방에서 계속 찌르자 후방 포위라는 위기에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물러날 수 없었으니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에서 물러났다.[18] 살수대첩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널 무렵에 고구려군이 후미에서 신나게 두들겨 패서 쾌거를 이루었다는 사례와 비슷하다. 다만 압록강 동쪽 흥화진 앞에 거란이 쌓은 '보주'라는 성이 있는데, 이곳의 위치를 생각하면 살수나 귀주에서와 같은 피해를 입었을지는 알 수 없으며 정성의 고려군도 거란군에 비하면 병력이 많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에 큰 피해는 못주었을 가능성이 높다.[19]병자호란처럼 "직접 왕이 나와서 무릎꿇으면 화친해줄게"도 아니고, "나중에 오긴 온다 이거지? 강동 6주도 나중에 돌려줄거라 이거지? 알았어, 일단 돌아갈게 나중에 진짜 강동 6주 들고 꼭 와서 화친해야 돼?"라며 생색만 내고 끝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립을 감수한 수도로의 전격전 및 수도 점령 성공이나 국왕이 적에게 사로잡힐뻔했다는 점 등 여러모로 병자호란을 연상시키는 것이 제2차 여요전쟁이다.[20] 병자호란 당시에 조선이 재기하려고 얼마나 피땀들여 노력했는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만큼 노동력의 중심인 많은 백성들을 잃고, 국토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당장 인조숭덕제에게 항복하고 돌아올 때,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서 갇힌 와중에 왕을 부르며 울부짖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다는 기록도 있다.[21]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임금의 조서라고 임금이 일일이 작성하진 않는다. 내용을 대략 정해주면, 실제로 글을 쓰는 건 한림원에서 한다(한석봉이 바로 이런 작업을 맡던 사람이었다). 워낙 큰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현종이 일부러 직접 글을 쓴 것이고, 그래서 《고려사》에서도 '직접 썼다'고 강조한다.[22]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에게도 장군직을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게 했다.[23] 다만, 재상직에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면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와 비견될만한 공은 맞다. 일단은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같이 전쟁을 막는 것이기도 하며 국가의 부흥의 제일 요소는 바로 서로 간의 응집력인 것을 보면 비록, 전쟁이라는 자극적인 요소에 묻혔지만 그도 아버지의 이름에 걸맞게 노력해 나라를 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요에게 승리했어도 전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과거였는지라 아버지인 양규가 고려를 구한 영웅이었다면 아들인 양대춘은 고려의 황금기를 이끌도록 도운 영웅으로도 볼 수 있다.[24] 다만 최후는 다른데 양규가 거란군과의 최후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과 달리 김경손은 당시 집권자였던 최항의 경계를 받아 백령도로 유배를 떠난 후 그곳에서 독주를 마시고 바다에 던져지는 방법으로 처형되었다.[25] 물론 이때 양규는 이미 사망한터라, 이후의 업적은 현종강감찬 등 다른 인물들이 노력한 덕분이긴 했다.[26] 물론 진짜 실력으로 베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기습이거나 무방비 상태이기는 했다. 드라마에서 묘사한 인물들을 평가하였을 때, 강조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겨뤘으면 야율적로가 질 가능성이 높다.[27] 황제를 죽일 순간까지 이르렀지만 순간 구하러 나온 소배압이 막는 바람에 아쉽게 황제를 죽이지 못했다.[28] 김숙흥 역시 양규에게 정말 단 한끝 차이로 밀린지라 김숙흥 역시 야율적로 따위는 상큼하게 이길 가능성이 높다.[29] 그 때까지 두 사람 모두 밤새도록 1대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서 황제와 소배압이 궁수부대를 부른 것이다.[30] 궁수부대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야율융서(요성종의 중국식 이름) 입장에서는 더 꾸물거렸다가 양규와 김숙흥 같은 고려군이 또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한가롭게 병사들만 보내서 양규와 김숙흥이 지치기를 바랄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31] 양규와 김숙흥이 돌아오는 요 성종의 군사와 마주치자 김숙흥이 "저승에서 뵙겠습니다, 장군."이라고 같이 결의를 다짐하고 함께 싸우다 전사하기 직전에 김숙흥이 "먼저 쉬겠소, 장군."이라며 먼저 쓰러지자 양규도 같이 싸워준 김숙흥에게 "수... 수고하셨소."와 같은 말을 한 뒤에 자신도 전사한다.[32] 2016년 KBS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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