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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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력
2.1. 정계 진출
2.2. 1970년: 전쟁의 서막,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2.2.2. 9월 29일의 반전
2.3. 독재 15년, 협력적 상생
2.4. 87년: 돌이킬 수 없는 후보 분열
2.4.1. 6.29 선언 이전의 상황
2.4.2.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87년 대선
2.6.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15대 대선
2.7. 결말
3. 계파
4. 관계
4.1. 양김의 관계
4.2. 양김의 성향 비교 및 대조
4.3. 양김 시대의 다른 거물들


1. 개요[편집]


한국 현대사의 거물 정치인인 김영삼김대중을 같이 엮어서 부르는 말이다.두 인물은 단순한 거물 정치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치 민주화의 초석을 마련하고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둘 다 한때는 민주화 투사였고 정치계에 있어서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자랑했던 그야말로 정치계의 거물이었다. 사이가 매우 좋았던 그들은 87년 6월 항쟁 전후로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동년 대선에 독자 출마를 강행하면서 완전한 이 되어 버렸다.

92년에는 김영삼, 97년에는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98년과 2003년에 각각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서 양김은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워낙 거물이었던 둘은 은퇴 이후에도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었으며, 2009년에는 김대중, 2015년에는 김영삼이 사망하면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2. 내력[편집]


두 사람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화합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전 세계적으로도 김영삼김대중같은 관계는 찾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로 매우 특수한 사례다.[1]


2.1. 정계 진출[편집]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은 1950년대에 20대의 나이로 정계에 뛰어들었다.

거제 지주의 아들이었던 김영삼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당 후보로 통영군 을(현 거제시) 선거구에 나가 역대 최연소 의원[2]으로 당선된 이래, 이승만 정권 연장에 반대하여 뜻이 같은 당원들을 모아 투쟁했으나 이승만에게 밉보여 자유당에서 축출당했다. 이후 민주당으로 옮겨가긴 했으나, 민주당 내에서도 민주당 구파의 휘하에서 빠르게 자신의 조직과 세력을 정비해 나가며 1964년에 가면 원내총무[3]도 하는 등 이미 당의 중진 중 한 명으로 부상한 의원이었다.

반면, 신안 출신의 사업가였던 김대중은 한국전쟁에서 느꼈던 바에 따라 역시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첫 출마를 했으나 번번이 낙선만 반복하고 첫 부인도 잃기까지 한다.[4] 장면의 눈에 띄어 민주당 신파의 휘하에 들어가서 대변인 활동을 기반으로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초선 의원이 되는 등[5] 가까스로 정계에 기반을 마련하고 그 특유의 연설로 막 유명세를 얻은 상황이었다. 다만 1968년 원내총무에 지명되었으나[6] 낙마해서 당의 핵심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미흡한 상황이었다.

2.2. 1970년: 전쟁의 서막,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편집]


어쩌면 가장 극적인 드라마.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후보가 돌풍을 일으켜 당선된다.


2.2.1. 9월 28일까지[편집]


김대중이 원내총무에서 떨어질 당시만 해도, 1971년 대선은 김종필유진오의 대결로 점쳐지고 있었다. 윤보선은 이미 두 번의 대선에서 패배했고,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 차[7]로 석패한 것과는 달리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0%가 넘게 패하면서 정치적 중량감이 많이 사그라든 상황이었다. 이 사이 헌법학자 유진오는 1967년 정계에 입문한 이래 대통합야당이었던 신민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선명야당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또한 박정희는 연임 제한에 걸려있었고, 이에 따라 박정희의 후계자를 찾는 노력들이 공화당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만일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공화당의 역학구도로 봤을 때 김종필이 당연히 후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9년에 일어난 3선 개헌은 이 모든 예상을 뒤엎어버리는 결과를 불러온다. 박정희는 3선 개헌안에 따라 다시금 대통령 후보가 될 자격을 얻었고, 3선 개헌에 충격을 받은 유진오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 때 중앙정보부는 쾌재를 불렀는데, 신민당의 역학구도 상 다음 후보는 유진산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유진산은 공화당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정치인이라 야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지지도가 높지 않은 정치인이었고, 박정희와 유진산이 붙는다면 박정희의 낙승은 눈에 보이는 일이었다. 또 유진산이면 야권과 공조도 긴밀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 김영삼이 뜬금없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면서 대권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해버린다.

박통과 싸워서 이길 의지도 힘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 보고 있을 수 없다. 이제 40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그러면서 당권을 쥐고 있는 유진산을 사쿠라라고 비판하면서 당을 쥐고 있던 원로들과 반쯤 척을 지는 상황에 이른다. 유진산은 이런 김영삼의 도발에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말로 맞대응했다.[8] 결국 고립된 김영삼은 같은 40대였던 이철승과 김대중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게 되고, 김대중은 장고 끝에[9] 당과 국민들의 여론이 김영삼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1970년 1월에 대권 출마 선언을 하였다. 2월에는 이철승도 출마 선언을 하게 된다.

상황이 이쯤 되자, 유진산은 자신이 출마해봐야 득이 없다는 사실을 읽고서 불출마 선언을 하게 되는데, 유진산은 대신 이철승, 김영삼, 김대중을 불러 놓고 후보 지명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철승과 김영삼은 동의했으나 김대중은 거부했다. 이철승과 김영삼은 각자 서로가 유진산과 맺은 연(緣)[10]으로 자신을 지원할 거란 희망이 있었던 반면, 김대중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당시 계파 상황을 보면, 김대중은 소수파여서(당시만 해도 김대중은 이철승보다 지명도가 낮은 인물이었다. 김영삼과는 비교도 되기 어렵고...) 김영삼과 이철승의 개인 계파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는 상대였는데, 여기에 최대 계파를 가진 유진산(당내 계파의 40% 보유)이 힘을 실어준다면 당연히 그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민당 경선 하루 전인 9월 28일, 유진산은 김영삼을 지지한다고 발표를 한다. 김영삼은 흐뭇한 마음으로 다음날 전당대회에서 읽을 후보수락연설문을 작성하고, 언론사는 김영삼 신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이라는 기사를 미리 적고 있던, 1970년 9월 28일의 밤이었다.[11]

2.2.2. 9월 29일의 반전[편집]


9월 29일 아침 9시, 신민당 전당대회가 시작되었다. 이철승이 김영삼을 지지한다는 연설을 하려고 하다가 취소가 되긴 했으나, 이철승이 김영삼을 지지한다는 건 안 봐도 비디오였기에 투표 결과는 당연히 김영삼의 과반 득표일 줄 알았다.[12] 그런데 1차 투표 결과 총 885표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표 82표로 누구도 과반을 얻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모두가 김영삼의 후보 선출을 믿던 9월 28일 밤, 김대중은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의 여관과 여인숙을 부인, 그리고 김상현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지지를 부탁했다. 이철승계는 기본이고, 유진산계와 심지어 김영삼계에게도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무효표 82표 중 대부분의 표는 이철승계에서 나왔다. 이철승계는 유진산이 김영삼을 지명한 반발심으로 무효표를 던졌고, 이 반발심이 결선투표로 이끌었다.[13]

결선투표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 이철승계의 표심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김영삼 측이 예상치 못한 결선투표에 당혹스러워 하는 동안, 김대중은 이철승계의 주요 정치인 조연하를 직접 만나 '명함 서약'을 진행하며 이철승계의 표심을 끌어오는 데 성공한다.[14] 그리하여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은 458표를 획득, 410표를 얻은 데 그친 김영삼을 누르고 신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그리고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다. 박정희가 고무신, 대야같은 걸 사람들에게 뿌린 것도 모자라 지역감정을 긁어내고, 개표부정까지 해가면서 싸웠는데도 겨우 95만 표 차이로 졌다. 그리고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패한 것을 승복하고, 김대중을 적극 지원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제도에서 무주 구천동까지" 유세를 다녔다. 이 YS/DJ의 경상남도/전라도 민주세력의 연합은 후에 신군부 전두환이 매우 신경쓰며 어떻게든 경남/호남을 갈라세우려던 주요 사유가 된다.


2.3. 독재 15년, 협력적 상생[편집]


7대 대선 유세에서 김대중은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주장했는데 둘 다 현실이 되었다. 1972년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통해 국민에게 표 달라고 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명백한 헌법 유린에 양김은 반발했다. 김대중은 재야의 유력 인사로, 김영삼은 정치권의 실력자로 유신에 저항했다. 물론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폭주하던 박정희는 당연히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10월 유신 이후 망명을 선택한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 각지를 오가며 반유신 투쟁을 벌이던 중 1년도 안 되어서 그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일어나 가택 연금 상태에 처했다.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경찰 병력이 에워쌌고, 골목 어귀에는 여러 개의 감시 초소가 만들어졌다. 중앙정보부는 외부인의 동교동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가족들의 전화 사용도 금지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셋째 아들이 등교할 때도 감시 요원들이 따라붙어 미행했다.

한편 임시 전당대회로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은 강력한 대여(對與) 공세를 펼치고자 했으나, 대내외적인 정세상의 문제로 대여 강경 투쟁에 차질이 생겼다. 때문에 정식으로 총재를 뽑는 전당대회가 다가오자 김영삼은 자신의 재신임을 통해 단일지도체제를 확고히 하려 했으나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 터지고 만다. 하지만 김영삼이 그 정도로 호락호락 고개 숙일 사람은 아니었기에, 기어코 79년 총재직을 탈환했고, 이에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김영삼의 의원직을 제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유신 정권의 몰락의 시발점이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선출한 국회의원 자리를 정부가 멋대로 박탈한 사건'에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경남을 중심으로 민심이 들끓었고 여기에 국내 경제 악화로 부마민주항쟁이 발발, 뒤이어 찾아온 10.26 사건의 방아쇠가 되었고 유신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권불십년을 증명하듯 허망하게 유신 정권이 무너지면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다시금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올랐으나, 권력의 단맛에 익숙해진 군부는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김영삼은 가택 연금 되어 정권의 강압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갖은 고초를 당한 김대중 역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2.4. 87년: 돌이킬 수 없는 후보 분열[편집]



2.4.1. 6.29 선언 이전의 상황[편집]


김영삼은 80년 가을, 신군부의 강요에 의해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고 전두환 정부 시기 정치 활동을 사실상 전면 금지 당했다. 1981년 가택 연금이 해제되자 가신 그룹인 상도동계를 주축으로 하여 정치 규제에 묶인 인사들을 규합할 단체를 만든 것이 바로 민주산악회. 그러나 1982년 4월 뉴욕타임즈 도쿄지국장 헨리 스톡스와 북한산 산행을 하며 인터뷰를 한 것이 정치 규제 위반이라는 이유로 두 번째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83년, 5.18 민주화운동 3주년을 기념하고자 희생자들을 위령하고 독재에 항거하는 뜻으로 김영삼은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그는 구속 인사의 전원 석방과 해금, 해직 교수 및 근로자와 제적 학생의 복직, 복교, 복권, 언론 자유, 개헌 및 국보위 제정 법률의 개폐 등을 요구하며 단식을 계속했다. 전두환 정부는 5월 25일 김영삼을 서울대학교 병원 특실에 입원시켰고, 링거 치료를 받게 하였으나 6월 9일까지 단식을 멈추지 않았다.

김대중 또한 1982년 치료를 가장했던 망명길을 마무리하고 1985년의 총선을 앞두고 귀국하게 된다. 하지만 2년 전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 후 돌아와서 공항에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암살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미국 정가에서는 김대중의 암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강했다. 따라서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김대중의 안전 귀환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예정된 전두환의 방미를 무산시키겠다고 재차 압박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 없었던 미국의 몇몇 의원들과 저명 인사들이 김대중의 귀국길에 자진 동행하였다.

김대중이 김포 공항 입국장에 들어가자마자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이 곧바로 나타나 김대중을 연행했다. 그리고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에 연금해버렸다. 김영삼의 단식 1년 후인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발족시켰다. 이는 자신의 계파인 상도동계 외에도 김대중계인 동교동계, 양자에 속하지 않는 범야권 세력을 모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김대중의 귀국과 이에 힘입어 창당한 신한민주당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도약하게 된다. 이러한 민의에 힘입어 신한민주당의 총재였던 이민우가 김대중에 대한 사면 복권을 요구하자 김대중에 대한 가택 연금은 곧 해제되었다. 다만 사면과 복권은 5공 측에서 격렬히 반대하면서 무산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의 정당 복귀는 늦어졌고, 그 대신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 추친 협의회 공동 의장에 취임하여,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식으로 정치를 재개하기 시작했다. 인천 5.3 운동, 10.28 건국대 항쟁 등, 굵직한 민주화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이후 6월 항쟁의 뜨거운 함성이 전국을 뒤덮으면서 전두환 정부의 6.29 선언을 불러내기에 이른다.


2.4.2.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87년 대선[편집]


6.29 선언과 함께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양김은 대선 체제에 돌입한다. 그때 국민들이 가장 원했던 시나리오는 양김의 단일화. 하지만 어느 한 쪽도 양보하지 않고, 게다가 7월 11일 김대중은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 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발언하면서 불출마 선언을 하룻밤 만에 뒤집게 된다. 게다가 김대중 당시 후보는 4자 필승론[15]을 내걸며 단일화에 선을 그었고, 두 사람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

결국 양김의 분열 속에 치러진 선거는 노태우의 어부지리 승리로 끝나게 된다.[16] 당시 득표율을 보면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0%이었다. 결국 87년 대선의 패배는 군사정권의 연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을 완벽히 뒤집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2.5. 3당 합당92년 대선[편집]


3당 합당의 배경은 상당히 복잡하다. 우선 87년 대선 이후에 치러진 88년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이 과반을 넘기지 못하게 되면서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졌다. 양김과 김종필까지 비롯한 삼김은 때때로 공조를 하면서 여당인 민정당을 견제하며 대선 때 단일화 실패로 인한 평판을 회복했지만, 김대중이 제1야당 평민당의 당수로 야권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는 동시에 김영삼이 서석재의 보궐선거 후보자 매수 사건으로 나락으로 떨어지자, 결국 3당 합당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에 이른다.

3당 합당 문서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민주정의당이 합당 제안을 가장 먼저 보낸 대상은 김대중과 평화민주당이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거절했고, 그 이후 김영삼과 김종필이 OK라고 하여 3당 합당이 이루어진 것이다.

3개의 정당이 합쳐져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은 순식간에 정치적으로 김대중의 기반 지역인 호남을 고립시켜 버렸다. 13대 대선에서 각 후보의 기반 지역은 노태우 TK, 김영삼 PK, 김대중 호남, 김종필 충남[17]으로 지역주의가 상당히 두각을 드러냈는데, 여기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연합하면서 김대중을 지지했던 호남과 비교적 중립(?)라고 할 수 있는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한 정당의 지지 기반으로 된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92년 대선이 다가왔다. 이 대결은 거대 여당을 이끄는 김영삼과 통합 야당을 이끄는 김대중의 대결이었다. 이 선거는 60년대 이래 군인 출신이 없는 순수 민간인 후보끼리 벌인 대결이라는 점이 특별했다. 또한 정주영통일국민당이 결성됨에 따라 대선에 앞선 총선에서 31석을 획득하며 제 3당으로 부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3당 합당에 반발해 통일민주당에서 탈당한 꼬마민주당 출신의 정치인 박찬종까지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면서 선거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각 후보의 지역을 기반으로 4개로 나눠진 모양인 것에 반하여,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대체로 영·호남의 대결 구도였다. 김영삼 후보의 지지 기반은 3당 합당으로 인해 전통적 지지 기반인 PK에서 TK를 더해 영남 전체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8] 그리고 김대중 후보는 13대 대선과 지지 기반이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초반의 구도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접전이었다. 정확히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1~2위를 치고받고, 정주영과 박찬종이 3~4위를 두고 다투었다. 그러던 찰나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면서 영남권의 결집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김대중 후보를 8.2% 차이로 여유롭게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김대중 후보는 이때를 기점으로 잠정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이후 집권하게 된 민주자유당과 김영삼 정부는 하나회 축출, 금융실명제 등으로 국민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았으며, 이에 힘입어 YS를 재미있게 풍자한 'YS는 못말려'가 베스트 셀러에 등극되는 등, 김영삼 정부는 최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사고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사고들이 생기면서 지지율을 깎아 먹다가 결국 IMF사태로 지지율 6%까지 추락하기에 이른다.[19]


2.6.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15대 대선[편집]


김대중은 영국으로 떠나고, 그 후로는 이기택이 단독 대표로 당을 이끌게 되었다. 통일국민당은 군소 정당으로 전락해 사실상 민주당만이 민자당에 대항하는 유일한 야당이 되었다. 이후 새한국당을 흡수해 당세를 확장해 가다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생긴 불화[20]와 때마침 정계에 복귀 선언을 한 김대중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로 동교동계가 이동하면서 또 다른 막이 오르게 된다.

김대중과 새정치국민회의가 처음 맞닥뜨린 것은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로 아쉬운 패배였다. 야권 분열로 인해 민주계[21] 의석은 98~95석에서 94석으로 오히려 줄었고 DJ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한편 자민련은 충청, TK[22], 강원에서 "녹색 바람"으로 두 배로 팽창, 25석을 늘려 50석을 만들면서 제 3당 사상 최대 의석을 만들게 된다. 이런 형국은 김대중이 김종필의 손을 잡아 DJP연합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15대 대선은 어땠을까. DJP연합을 바탕으로 DJ는 대선 3개월전부터 줄곧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한편 신한국당에서 통합민주당[23]을 합당해 만든 한나라당에서는 박찬종, 이인제를 필두로 "9룡"이라 할 정도로 승부를 벌였으며, 결국 이회창의 승리와 이인제의 경선 불복으로 탈당, 국민신당 창당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다시 말해, 보수성향의 이인제가 제3후보로 출마하면서 DJ측은 더더욱 호재를 맞게 되었다. 게다가 1997년 외환 위기까지 겹치면서 김영삼 정부에 대한 지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생긴 이회창 아들들의 병역 비리 의혹, 일명 병풍이 터지면서[24] 이회창의 지지율을 깎고 보수 스펙트럼이 겹친 이인제와 이회창의 표 나눠 먹기로 김대중은 당선된다. 이로써 양김은 모두 한 번씩 대통령을 하게 된 것이다.

15대 대선이 끝난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대통령은 이 대선에 대해 "어려움속에서 선거의 명예혁명을 이뤄낸 국민들의 용기와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 당선자의 대통령당선을 축하하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힘을 모아 협조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25][26]

김대중 정부외환위기 극복, 남북정상회담 개최, 2002 한일 월드컵 개최 등의 빛나는 면과 비정규직 문제 확대, 청년실업 문제, 제2연평해전, 대구 지하철 방화 테러 등의 어두운 면이 공존했다.


2.7. 결말[편집]


김대중의 2003년 퇴임 이후 2009년 7월,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불과 3개월도 안 되어 폐렴이 생겨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이때에 김영삼, 전두환, 이회창, 박근혜, 반기문을 비롯한 많은 수의 거물 정치인들이 문병을 왔다. 김영삼이 문병을 온 이후 기자들이 이 방문을 두분의 화해로 보아도 좋냐고 묻자 김영삼은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 아닙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한달 뒤인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대통령은 폐렴으로 인해 결국 숨을 거두게 되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 역시 2009년 경에 뇌졸중 판정을 받아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고 하며, 2013년 봄에는 그 증상이 많이 심해져 중증 뇌졸중과 폐렴 증상으로 쓰러져 2014년 가을에 퇴원할 때까지 1년 반 정도 장기 입원을 했으며, 그 후에도 사망 전까지 약 1년간 수차례 단기간의 입원 및 퇴원을 반복해 왔다고 한다. 거기다가 심장병으로 인해 스텐트 시술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각종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았다.

매스컴에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의견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였는데,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를,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그리고 2015년 11월 19일 정오 경, 갑작스러운 고열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가,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2015년 11월 22일,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당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급성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 향년 87세.


3. 계파[편집]


김영삼을 추종하는 계파들은 "상도동계", 김대중을 추종하는 계파들은 "동교동계"라고 불린다.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이 보수 정당의 일원이 되면서 김영삼계를 "민주계"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서 유래한 것이다. 3당 합당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서 유래한 "평민계"라는 명칭도 있었다.


4. 관계[편집]



4.1. 양김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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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는 양김이 1987년 분열 이전까지 동지였고 같은 진영이었다는 이미지가 강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애매한 곳이 많다.

서로 간의 공동의 적이 있을 때가 아니면 같이 손잡고 활동한 적이 딱히 없다. 공동의 적이 있을 때는 엄청 친해지지만 적이 사라지고 나면 서로를 견제하고 적이 생기면 힘을 합치고의 반복이었다.

민주당과 신민당 시절 양김은 서로 다른 계파 출신이었고 이후에도 각각의 계파를 이끌면서 대권 혹은 당권을 노리고 경쟁하고 견제하던 사이었다.

유신 시대나 5공 시대 같이 공동의 적이 있을 때는 같은 당에서 활동하거나 재야에서 서로 협력했으나 10.26 사건 이후 정치 규제에서 벗어난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을 하지 않았고 김영삼 역시 무조건 입당이 아니라 입당 심사를 하면서 김대중을 견제하려 했다. 또한 6월 항쟁 이후 1987년 대선에서 분열 역시 공동의 적인 전두환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노태우는 양김 모두의 적이긴 했으나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적이라고 봤다. 적어도 양김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4.2. 양김의 성향 비교 및 대조[편집]


양김의 행적 및 성향도 뚜렷하게 대조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김영삼은 현장에서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행동파라면, 김대중은 상황을 연구하고 대처하는 지식인의 면모가 더 강했다. 한 예로 양김이 대통령이 된 뒤의 치적들도 김영삼은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숙청 등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서 한순간에 뒤바꾸는 형태라면[27], 김대중은 IMF 외환위기 극복, IT 벤처산업 지원 등 정책 변화에 따른 점진적인 형태가 많았다.

이 때문에 양김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의 성격도 다른 편이다. 가령 두 사람을 대상으로 한 유머, 풍자의 양 자체도 김영삼에 대한 소재가 더 많은 편. 여기엔 김영삼에 대한 인기 및 지지도의 변화 폭이 급격했던 것도 한몫한다. 김영삼 정부 초기엔 최초의 문민 대통령이란 기대감과 실제 성과들로 인해 인기가 높았지만, 정권 후반기에 '사고 공화국', IMF 외환 위기 등으로 인해 인기가 추락하면서 김영삼에 대한 풍자도 더 거세진 것. 물론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지지율의 변화가 제법 크긴 했지만 김영삼 정부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정치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김대중의 굴곡이 더 많은 편이다. 물론 김영삼 역시 여러가지 사건사고에 얽히며 크게 곤욕을 치룬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백주대낮에 납치당해 죽을뻔 하거나 조작된 공안 사건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은 김대중에 비하면 덜한 수준.

삼김의 일원인 김종필은 두 사람의 성향에 대해 반 농담 삼아 '김영삼이 읽은 책 보다 김대중이 집필한 책이 더 많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4.3. 양김 시대의 다른 거물들[편집]


지금은 아니겠지만, 양김은 서로와 제3의 인물과 함께 비견(比肩)되는 일이 잦았다.

  • 이철승: 양김의 전반기(70년~87년) 시절, 양김과 함께 가장 많이 비견되던 정치인이다. 이 세 사람은 민주당계 정당사에서 70-80년대를 관통하는 거물들이었다. 이철승과 김대중은 같이 전라도[28]를 정치 기반으로 두고 있었고, 김영삼은 경남과 부산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이철승과 양김은 유신 이후 군부 정권에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랐는데, 70년대 중반 이후 이철승은 '여당에 협조를 해서 얻을 것을 얻자'는 대여 협상 노선이었고, 양김은 '여당과 싸워서 선명성을 가지고 국민들의 지지를 얻자'는 대여 투쟁 노선이었다. 불안하던 이들 사이 관계는 이민우 구상으로 완전히 틀어졌고, 이후 이철승은 위에 이민우 구상을 발표한 이민우와 함께 정계에서 축출된 반면, 양김은 각자 대통령에 오르고 은퇴한다.

  • 김종필: 양김의 후반기(87년~2004년) 시절, 양김과 함께 가장 많이 비견되던 정치인이다. 이들은 80-90년대 한국 정치사를 관통하는 거물이다. 이들의 특징은 서로 다른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이합집산하였다. 부산경남이 기반인 김영삼, 광주전남이 기반인 김대중[29], 그리고 대전충남이 기반인 김종필은 그 이름하여 삼김이다. 3당 합당[30], 핫바지론과 자민련 돌풍[31], DJP연합[32] 등의 사건으로 90년대 정치사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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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신 이후 군부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김영삼은 주로 국내 정계에서 활동하면서 군부와 투쟁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김대중은 정치참여가 박탈된 채 외국을 돌면서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연설과 강연을 통해 군부에게 외교적 압박을 주는 역할을 했다.[2] 만 26세 5개월, 현재도 깨지지 않았으며, 지역구로는 여전히 깨지기 어려운 기록이다. 다만 2022년 1월 18일, 21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만 25세에서 만 18세로 개정되면서 비례대표로는 깨질 가능성이 높아졌다.[3] 원내대표에 해당하는데, 이것 역시 역대 최연소다.[4] 김대중 대통령은 결혼을 두 번 하였다. 첫 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와 사별하고 만난 사람이 이희호 여사다.[5] 사실, 1961년에 보궐선거로 당선된 적이 있긴 하다. 문제는 당선 12시간 후 5.16이 터지는 바람에...[6] 이 당시 원내총무는 당수가 지명하고 경선은 형식으로 진행하는 식이었다.[7] 한국 선거사에서 가장 표차가 적은 대선이다.[8] 입에서 젖내가 난다. 말 그대로 젖 비린내 나는 꼬마라는 소리다.[9] 당시 김대중은 오지 못한 1975년 대선을 더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된데에는 같은 신파출신인 박순천이 이철승과 김대중을 불러서 71년에는 이철승이 먼저 출마하고 75년에 김대중이 출마하도록 권한것을 받아들여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영삼이 가장 먼저 출마선언을 하고 당내조직을 크게 끌어모으는 상황에서 미국 국무부의 초청을 받고 간 이철승이 돌아올 기약이 안보이자 결국 박순천도 이전의 당부를 철회하고 김대중의 출마를 권하게 되었다 한다.[10] 유진산은 민주당 구파인데, 김영삼도 민주당 구파 계열의 정치인이다. 이철승과 김대중은 신파 계열의 정치인이었으나 이철승의 경우 부친이 유진산과 동업을 했던 경험이 있고, 숙부도 유진산과 잘 아는 사이었다.[11]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은 청진동과 광운동 일대 여관에 머무르고 있던 신민당 대의원들을 부인 이희호와 참모들을 대동하고 일일히 찾아다녔다고 한다. 한편 김영삼도 김대중의 소식을 듣고 대의원들을 만나러 가려다 하필 통금시간이 가까워져서 별일이야 있겠나 싶은 생각에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12] 1차 투표에서 과반이 나오면 그걸로 경선 끝이지만, 1차 투표에서 과반이 안 나오면 1, 2위가 결선 투표를 진행한다.[13] 물론 사전에 김대중이 '만에 하나 이철승이 유진산으로부터 지명받지 못하면 같은 신파 정치인인 나를 밀어달라'고 설득을 한 까닭도 있다.[14] 명함 서약의 주요 골자는, 김대중 대권, 이철승 당권 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15] 즉,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는 서로 인구가 많은 영남에서 대결하며 표가 갈리게 하고, 김종필 후보는 이미 한물 간 사람 취급 받던 터라 당선권에선 멀다고 보고 인구가 적은 충청 지역만 압도한다면...김대중 자신은 연고지인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인구가 많은 수도권(서울/경기도)에서 승부를 점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것이 바로, '네 사람이 모두 나와도 결국 김대중 자신이 이기는 구상이었다.[16] DJ가 주장하던 4자 필승론이 실패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 -충청권 오판- 김종필이 압도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충청권이 뚜껑을 열고 보니, 충남에서는 예상대로 김종필이 이겼지만, 충북 지역에서는 3위에 그쳤다는 것. 그리고 1위를 노태우가 차지했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2) -KAL기 사건의 여파 및 서울수도권에서의 저조한 성적 - 대선 며칠 전 터진 KAL기 사건과 여당프리미엄으로 인해 인천, 경기, 제주 등 스윙 스테이트에서 노태우가 40%득표율로 모조리 1등을 해버린다. 반면 DJ는 세 지역에서 모두 3위에 그치고 만다. 이 중 경기와 인천은 DJ가 4자 필승론의 예측대로 1위를 했어야만 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타격이 더 컸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김대중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고 서울에서의 김대중 몰표를 예상했지만 서울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은 32.8%에 그쳤다. 서울에서 30%의 득표율을 올리고 2위를 거둔 노태우와도 겨우 2.8%P격차에 그쳤다.
(3) -1위만 적중한 결과- 4자 필승론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의 권역별 순위가 혼재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 결과에서 노태우 후보는 모든 지역에서 1위 아니면 2위를 기록한 반면, YS는 PK를 제외한 지역에서 대체로 2위를 기록했고, DJ는 서울과 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 대체적으로 3위를 기록한다. 이렇게 대체적인 흐름은 4자 필승론이 DJ유세장에서의 열광적인 지지만을 믿고 개표결과에서는 오판에 그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17] 충북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이겼다.[18] 김영삼 후보가 충청도와 강원도에서도 이겼지만 경남(72%)나 경북(64%)에 비해서는 비교적 적은 지지(30%내외)를 보냈기에 완벽한 기반은 아니다. 거기다 김영삼은 권력을 잡은 후 군부 세력의 기반인 경북 정치인을 숙청하며 한나라당이 경북에서 고전하는 일까지 있었다. 90년대~2000년대 초반의 한나라당은 PK 및 민주계의 개혁 세력이 장악할 때라 군부 및 TK가 김영삼/이회창에게 극심한 반감을 보여 선거에서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다. 한나라당이 서서히 TK로 넘어간 건 이명박근혜 시절 이후.[19] 이 최저 지지율 기록은 박근혜가 4%로 새로 경신하게 된다.[20] 이기택이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 민주자유당 이인제 후보에게 패한 것 등.[21] 새정치국민회의+통합민주당 의석수 합산[22] 민자당의 주류였던 상도동계가 민정공화계를 축출하면서 이들의 지지기반이었던 TK에서 反신한국당 기류가 생겼었다.[23] 이때 합당에 반발한 노무현 등의 영남계 의원들은 통합민주당을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로 들어온다.[24] 대선 이후에 병역비리가 아닌 정당한 병역면제로 판결받았지만 이미 이미지는 크게 깎여나간 후였다.[25] 선거 명예혁명을 이룬 국민들 지혜와 경의, 1997.12.20 동아일보[26] 김대통령 담화 의미 1997.12.20 동아일보[27] 보수 정치인 중에서 상당히 급진적인 편이였다. 남북정상회담까지 계획했던 것을 보면.[28] 이철승은 전북, 김대중은 전남[29] 후에 이철승이 13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뒤 그의 기반이던 전북을 흡수하였다.[30]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와 박태준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을 비롯한 구군부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사건[31]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서 공화계와 생존 민정계 소속 의원들이 주도해 분당[32]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 김종필과 박태준의 자유민주연합이 단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