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면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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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전쟁의 정석인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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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빌헬름 2세가 오토 폰 보겐호프(Otto von Bogenhoff) 장군에게 수여한 IWC 회중시계다.
시계 케이스에 적혀있는 독일어는 FELDZUG GEG FRANKREICH RUSSLAND ENGLAND usw로,
해석하자면 '프랑스, 러시아, 영국, 기타 국가들과의 전쟁'이다.[1]



1. 개요[편집]


전쟁의 한 당사국이 각기 다른 2개 이상의 전선을 형성하여 전쟁에 돌입하거나 대치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 엄밀하게 말해 학술적인 용어는 아니다. 전선이 2개 이상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전력을 선택과 집중하기 어려우며, 상대방 하나를 쓰러트린다 해도 곧바로 다른 상대를 치기가 어려운 상황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에 총력전 양상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보통 한 국가가 다른 한 국가와 두 개 이상의 전역에서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그냥 전선이 넓어진 것일 뿐, 상대 국가도 전력이 분산되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양면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예로는 7년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본토와 북미 식민지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 경우가 있고,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미국은 스페인과 쿠바와 필리핀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 경우가 있으며,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영국과 대서양 전투북아프리카 전역을 동시에 수행한 바 있다.[2]

역사적으로 많은 양면전쟁이 있었지만, 유명한 예라면 위의 지도에 나와있듯이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및 동맹국, 추축국 진영이나, 1500년대 카를 5세 치하의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에 둘러싸인 프랑스,[3] 발칸 반도의 아바르족, 슬라브족, 불가리아와 동방 지역에서 사산조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셀주크 투르크 등의 세력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동로마 제국, 토번한반도에서 동시다발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던 당나라, 요나라서하와 맞서던 북송 등이 있다.

사실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사례는 독일보다는 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과 유럽에서 동시에 두 개의 대전쟁을 수행했던 미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양면전쟁 하면 독일처럼 양방향으로 쌈싸먹혀 불리하게 돌아가는 전쟁을 연상하는 데 반해 미국은 두 전선이 모두 본토 밖의 동맹국, 식민지, 바다 위에서 펼쳐진 데다가 미국의 국력이 워낙 초월적이어서 이러한 양면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2. 예시[편집]



2.1. 아르메니아[편집]


자세한 내용은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참고.

아르메니아는 서쪽에는 튀르키예, 동쪽에는 아제르바이잔에 둘러싸여 있는데 튀르키예가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면서 아르메니아는 앞뒤로 포위당했다. 거기에다 중립국 조지아가 아르메니아로 가는 길을 막고, 군사 동맹국 러시아도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는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고립당한 채 싸우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2.2. 독일[편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양면전쟁의 대표적이면서도 실패한 사례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만큼 가장 베르됭 전투, 솜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 탄넨베르크 전투, 유틀란트 해전 등 극적인 전과와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레닌그라드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바그라티온 작전 등 대규모 전투가 많았으며, 당사국인 독일극적인 패망이 이루어진 역사적 사례이다. 독일은 지정학적으로 중유럽에 위치하고 있어 사방이 프랑스, 러시아 등 강한 가상적국으로 둘러싸인 것이 역사적 숙명이기도 했다. 그나마 통일 이후의 독일은 자체적인 국력 강화와 외교적 노력을 통해 세력균형을 유지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사례는 그 균형이 깨져서 발생한 가장 안 좋은 결과였다.

서부의 프랑스와 동부의 러시아는 통일 이후 독일의 주적이었으며 독일 통일 이전에는 합스부르크 왕조 치하의 오스트리아 제국과도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에 포위되어 3면전쟁을 치러야 했고, 너무나도 유명한 제1차 세계 대전의 경우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정립했던 삼국 동맹빌헬름 2세에 의해 깨진 이후 삼국 협상에 의해 러시아와 프랑스가 독일을 동서로 포위하는 형세가 전개되자 전쟁 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슐리펜 계획까지 수립해놓았던 적도 있었다. 물론 실전에선 서부전선묶여버려서 말아먹게 되지만.

양면전쟁은 공자와 방자간의 정점을 빨리 불러올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공자와 방자간의 정점은 공자와 방자의 군사적 우위의 전환점을 이야기한다. 공세 초기에는 공자가 유리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내선보급이 유리한 방자가 군사적 우위를 가지게 되는 그 순간이 나타난다. 정점이 발생한 이후로는 특별한 사유 없이는 방자가 이후로 계속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지게 되므로, 공자는 정점이 오기 전에 신속하게 방자를 격파해야 한다.

냉전기 미국이나 소련과 같이 인적, 물적, 경제적 자원이 충분하지 않고 미사일이나 핵무기와 같이 대규모로 피해를 입히는 무기가 개발되지 않은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집중의 원칙이 공세의 주요 교리로 이용되었는데, 양면전쟁은 국가 역량의 분산을 초래해 집중의 힘을 약화시킨다. 슐리펜 계획이 실패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후티어 전술을 사용하기엔 이미 솜 전투 이후로 정점을 지나갔고, 이를 캐치한 영국이 캉브레 전투를 이끌어내면서 공방의 전환이 일어났다. 이후 독일은 한동안 전선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다가 루덴도르프 공세로 잠깐 반격을 가지다가 말아버린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초창기 프랑스의 심리를 파악한 독일의 전략이 빛을 발했다. 단치히 문제를 두고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 일전에 히틀러는 서유럽과의 양면전선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고 빠르게 폴란드를 밀어버리기 위해 소련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 소련이 침략해올 우려를 지워버린다. 그리고 소련과 함께 빠르게 폴란드를 밀어버렸다. "당시 프랑스는 뭐하고 있었는가?" 에 대해서, 프랑스는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피해가 엄청났던 프랑스 북부의 재건과, 마지노선 증축으로 독일과 전쟁을 치르기에는 예산 상황이 탐탁치 않았다. 또, 프랑스 내에서 반전 여론이 들끓었고, 3달은 버틸 것이라 예상했던 폴란드가 1달 만에 작살이 나자, 프랑스는 징집을 하기에 시간이 벅찼다. 그래서 독일과 전쟁하기에 꽤나 부담스러웠고, 독일 역시 이를 모르고 있지 않아서 프랑스와 가짜 전쟁을 일으키며 가상 양면전선을 만든다. 이후 프랑스는 독일이 베저위붕 작전을 진행할 때 "어?...어어?" 이러다가 프랑스 침공으로 독일에게 쌈싸먹힌다.

이후 독일은 영국을 점령하고자 했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크게 패한 이후 영국을 견제하는 선에서 일단 놔두기로 한다. 이후 독일군 사령부 OKW는 히틀러가 바르바로사 작전을 계획하고 이를 수립하려 하자 예스맨들을 중심으로[4] 이를 수용했고, 이후 영국이 건재해 서부전선이 아직 존재하는 상황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행해 동부전선이 발생하고, 이후 북아프리카 전선이 발생하자, 연합군은 1942년 횃불 작전1943년 시칠리아 침공(이탈리아 전선), 1944년 오버로드 작전을 진행하여 독일에게 양면 전쟁을 통한 지속적인 소모를 강요하였고, 이로 인해 결국 독일은 패망하게 된다. 여기서는 영국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소련을 침공한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의 오판이 컸다.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에 더해서, 1943년 7월 5일 쿠르스크 전투가 일어나고, 이후에 7월 9일 시칠리아 침공이 일어나면서 히틀러가 쿠르스크 전선에 있던 1개 군단을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하면서 쿠르스크 전투 전투에서 독일의 '집중의 원칙'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주코프가 예비대를 잔뜩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집중의 원칙'은 당연하게도 먹힐 리가 없었고, 결국 쿠르스크 전투에서 전력을 대규모로 소모한 독일은 이후에 진행되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힘을 쓰지 못하며 발칸 반도 전역을 소련에게 내어주게 된다.

2.3. 프랑스[편집]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랑스가 양면전쟁의 상황이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한 후 군대를 돌려 스페인을 점령. 하지만 정부는 뒤집어 엎고 정규군은 격파했어도 게릴라와의 비정규전에 빠져버린 데다가 스페인 반군을 지원하려고 이베리아 반도에 주둔한 영국군과도 싸워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륙 봉쇄령을 어긴 러시아 제국을 응징하기 위해 러시아 원정을 벌였다가 망했다. 점령 지역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고 섣불리 러시아 원정을 떠난 것도 오판인데, 러시아 원정이 있는 동안 스페인 게릴라의 비대칭 전략으로 스페인 왕권 안정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2.4. 루마니아[편집]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카르파텐 산맥 이북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공격하고, 도나우 강 남부의 평지인 불가리아를 상대로는 방어를 하는 최악의 작전을 택하여 중앙국이 패전할 때까지 군정 상태에 있었다. 1차대전 전후에도 서쪽으로는 헝가리, 동쪽으로는 볼셰비키와 전쟁을 벌여서 각각 트란실바니아와 몰도바를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2.5. 영국[편집]


원래 영국은 유럽 서쪽 끝 섬나라라는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 대륙의 강국들을 양면전쟁 상황으로 일방적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로 오히려 대서양 한가운데서 두 대륙을 신경써야 하는 위치가 되어갔다. 미국 건국 초기 프랑스가 미국과 손을 잡고 영국을 압박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벌이면서 프레스 갱질을 해대서 미국과 미영전쟁까지 같이 벌이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영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동시에 병력을 파견하였다.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 싱가폴, 홍콩, 말레이시아 등이 함락되고 말레이 해전실론 해전에서 동양함대가 궤멸한 이후 본토 방위와 북아프라카 전선에 집중하고 태평양은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에게 맡기기도 하였지만 버마 전선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였고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항모 기동부대를 운용하기도 하였다.


2.6. 폴란드[편집]


폴란드 분할독소 폴란드 점령 참고.

독일에 가려져서 주목을 못 받을 뿐, 이쪽도 양면전쟁을 했을 때의 최악의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1, 2차 분할은 프로이센러시아 제국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조약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3차 분할 당시에는 2차 분할에 분노한 폴란드 국민들과 귀족들이 대대적으로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장군 휘하 무장봉기를 일으켜 프로이센군, 러시아군과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이전의 분할로 인해 국내 사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진압당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영토마저도 쪼개지는 결과를 맞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독립하자마자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소비에트 러시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양면도 아니고 삼면 전선을 형성하는 신화적인 업적(...)을 이룩하기도 했다.[5] 다만 여기서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와는 말 그대로 국경분쟁에 그쳤고[6] 우크라이나는 전면전을 벌이긴 했지만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루마니아, 데니킨의 백군 등 우크라이나 주변의 모든 세력에게 다굴을 맞아 아주 가루가 되어버렸으며, 리투아니아는 애초에 힘이 너무 없었다. 국운을 걸고 전쟁을 벌인 상대는 바르샤바까지 위협했던 소비에트 러시아가 유일했다(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쯤되면 폴란드가 독립하자마자 막장외교를 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진짜 막장외교는 거의 20년이 지난 1930년대 말에 가서야 벌였지, 독립 직후 벌어진 전쟁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많았다. 폴란드 회랑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폴란드령으로 인정된 것을 독일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고, 테셴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전역을 합병하겠다고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며, 소비에트 러시아는 혁명 수출하겠답시고 동유럽의 모든 신생국을 침공하고[7] 독일로 진출하려 했으므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분쟁을 벌인 곳은 애초에 국경선도 확정되지 않은데다 폴란드인도 적지 않게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폴란드 자체가 독일 제국령과 러시아 제국령,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곳에 세워졌으므로 자연스레 기존 주변국 및 신생국과 국경 문제로 갈등을 빚기 더 쉬운 국가였다.

폴란드 제2공화국 말기에는 나치 독일이 힘을 키워가면서 유럽 정세가 불안정해지는 와중에, 영프 공략을 위해 동부를 안정시키고자 했던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잃은 제정 러시아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던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브주라 전투의 전세가 독일에게 기울자 간보던 소련도 참전해면서 버틸 수가 없게 된 폴란드는 패배하여 폴란드는 나치와 소련에게 반갈죽당해 점령당한다.

요약하자면, 프로이센-나치 독일, 러시아 제국-소련이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 딱 끼어있었던 지정학적 상황,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한 국력과 외교력의 전반적인 부재가 초래한 최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7. 우크라이나[편집]


정확히 말하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시절. 우크라이나 내의 세력은 물론이고 벨라루스를 제외한 모든 접경국(소비에트 러시아, 폴란드 제2공화국, 루마니아 왕국, 헝가리 제1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과 싸워야 했다.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통일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1919년 1월 초까지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병력도 20만에 달했지만[8], 이 병력들은 모두 접경국과의 전쟁에서 모두 소모되었다. 폴란드는 동부 갈리치아를 놓고, 루마니아 왕국은 몰도바 일대를 놓고, 소비에트 러시아 및 데니킨의 백군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놓고 싸웠다. 이 중에서도 특히 소비에트 러시아는 키예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전역을 점령하여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고, 폴란드도 서우크라이나를 멸망시켰다.

1919년 초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반격을 펼쳤고, 8월 말 키예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직후 모스크바 공세를 펼치던 데니킨에게 다시 키예프를 빼앗겼다.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병력의 70-90%가 티푸스에 감염되어 전멸했고, 데니킨을 패배시킨 소비에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도 우크라이나 서부로 몰아붙였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폴란드와 동맹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계속 항전했지만, 전쟁이 폴란드의 어중간한 승리로 끝나면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그대로 붕괴되어버리고 말았다.


2.8. 로마 제국[편집]


근현대의 양면전쟁은 독일이 거의 다 겪었다고 한다면, 중세의 양면전쟁은 동로마 제국전공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고대 로마 제국시절부터 로마는 북방의 게르만족[9]과 동방의 파르티아[10], 사산조 페르시아[11]와 양쪽에서 전쟁 상태에 있었는데 동·서 분리 이후에는 동로마가 동방 전선을 전부 떠맡게 되어버려서 서로마가 게르만족과 투쟁하는 사이 동로마는 다뉴브 강 너머의 훈족, 고트족과 전통의 라이벌사산 왕조와의 양면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로마보다는 그래도 동로마가 견실한 편이어서 2개의 전선을 가지고도 오히려 버텨내고 일시적이나마 지중해를 다시금 로마의 호수로 만들기까지 했다는 것.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콘스탄티노폴리스천도한 이래, 동로마의 군사 구도는 다뉴브 강을 경계로 하는 유럽 전선과 폰토스, 오리엔트를 중심으로 사산조 페르시아와 맞서고 있던 동방 전선의 두 전선이 기본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형태였다. 4세기에는 유럽 전선에서는 주로 고트족과 훈족을 상대하고 동방 전선은 페르시아와 대치하는 구도가 이어졌는데, 337년에는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의 실지 회복을 위해 침입하여 30여년 간 전쟁을 벌였고, 율리아누스가 일시적으로나마 크테시폰으로 쳐들어가는 등 승세를 잡았다가 율리아누스의 급사로 인해 결국 페르시아로부터 탈취한 영토를 다시 토해내고 아르메니아를 페르시아의 세력권으로 넘겨주는 협약을 맺어야만 했다. 동방 전선은 이렇게 일단락되었으나, 376년 훈족을 피해 제국 영역으로 정착 허가를 받아 다뉴브 강을 넘어온 고트족과 전쟁에 돌입하게 되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완패당하고 만다. 이때도 제국의 주력군은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동방 전선에 묶여있어야만 했고 발렌스 황제도 서로마 측에 지원을 요청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결국 고트족의 정착을 인정하고 그들을 동맹 상대로 대우해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5세기는 유럽 전선의 상대방이 바뀌었는데, 바로 아틸라의 치세에 접어든 훈족이 판노니아에 둥지를 튼 시점이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틸라가 제안한 콘스탄티아 평화 조약을 무조건 수용하여 훈족 출신의 도망자들을 송환하고 훈족에 대한 공납을 늘리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게 되자 훈족은 441년447년 두 차례의 발칸 침공을 단행하여 나이수스, 세르디카 등 주요 도시들이 함락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 테살로니키까지 진격해 내려온다. 다행스럽게도 훈족이 서로마로 타깃을 바꾼 덕에 아직 요새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격당하지는 않았다. 이 당시 동방 전선은 페르시아의 내분 및 에프탈과의 대결로 인해 큰 전쟁이 벌어지진 않았다.

6세기 초에는 내분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카바드 1세가 침공해옴에 따라 다시금 지루한 공방전을 벌였다. 영토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페르시아에 바치는 공납금을 올려주는 대가로 532년 휴전 협정을 맺는다. 동방 전선에서 한숨 돌린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영도 하에 서로마 고토 수복을 위해 우선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을 정벌하기로 하여, 534년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해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북아프리카 수복 직후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시칠리아를 교두보로 삼아 536년 로마 시를 탈환하고 고트족의 역공을 막아낸 뒤, 540년 동고트 왕국수도였던 라벤나에 입성하는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이 때 동방 전선에서 내정을 안정시킨 페르시아의 호스로 1세가 휴전을 깨고 로마를 침공하면서 니시비스, 안티오키아 등이 공격당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고트 전쟁을 어느 정도 정리한 벨리사리우스를 동방 전선을 전임시켜 페르시아를 상대하게 했다. 이번에도 동방 전선은 어느 한 쪽이 우세를 점하지 못하는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545년 다시 동로마 측이 공납금을 올려서 바치기로 하고 다시 휴전에 돌입한다. 제국이 동방을 신경쓰는 동안 이탈리아에선 토틸라의 지휘 하에 다시 고트족이 재기하는데 성공하여, 541년 벨리사리우스가 고트 전선에 재투입되었을 땐 남이탈리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가 다시 동고트 왕국의 세력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의심을 받아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한 벨리사리우스는 자진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물러나고, 대신 환관 나르세스가 후임으로 고트 전쟁을 맡아 552년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를 패사시키고 이듬해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한편 동방 전선에서 다시 충돌이 벌어져, 라지카를 두고 549년 동로마와 페르시아 간 전쟁이 재개되어 또다시 10여년 간 싸우다 다시 10년 정도 휴전기를 거쳐 571년 아르메니아에서의 반란으로 다시 전쟁을 시작한 후에도 승부를 내지 못하다가, 페르시아 내부의 분란으로 동로마로 피신한 호스로 2세마우리키우스가 후원하여 제위에 앉힘으로써 591년에 가서야 전황이 마무리되었다.

이후 7세기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하자,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외치며 전쟁을 일으켰는데, 포카스를 타도하고 집권한 이라클리오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아레반트, 이집트를 정복한 후, 유럽아바르, 슬라브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라클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사수하는데 성공하여 전세를 반전시켰고, 역으로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 외곽까지 진격하여 위협했다.

그런데도 호스로 2세가 전쟁 지속을 외치자 분노한 귀족들이 그를 축출한 후 카바드 2세를 옹립했고, 사산 왕조의 점령지를 모두 동로마에 반환하는 강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로써 로마공화정 시대카르헤 전투에서부터 시작된 700여년에 걸친 과의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으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오랫동안 로마와 이란이라는 두 고래 사이에 끼인 새우에 불과했던 아랍인들이 이슬람 제국을 세운 후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레반트북아프리카를 휩쓸었으며, 발칸 반도에서는 불가르족슬라브족이, 이탈리아에서는 랑고바르드족이 새로운 위협으로 대두하여 다른 형태의 양면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동로마는 아시아에서는 이슬람 세력[12]을 막고, 유럽에서는 랑고바르드, 프랑크, 불가리아, 신성 로마 제국, 노르만, 베네치아, 페체네그 등 다양한 세력을 상대하는 양면전쟁에 시달렸는데, 이는 1204년 4차 십자군에 의한 동로마의 일시적 멸망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동로마 유민들의 나라인 니케아 제국튀르크계 국가들을 상대하거나, 같은 동로마계 국가인 트라페준타이피로스와 싸울 때도 있었으나, 주로 라틴 제국 방면 전선에 집중하여 1261년로마 제국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도 수복의 공을 세운 미하일 8세는 이후 외교에서 삽질을 거듭하며 악몽같은 다중전선을 만들었고, 이는 그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2세의 치세에 오스만 제국이라는 신흥 강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14세기의 동로마는 오스만을 상대하면서도 이피로스, 세르비아, 아테네 공국, 아카이아 공국 등 다른 기독교 국가들까지 상대하는 양면전쟁을 지속했는데, 일시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지만, 양면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내전이 겹쳐서 만신창이가 되었다.

1432년 동로마는 아카이아 공국을 멸망시키면서 오직 오스만 하나만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오스만은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 를 두고 1:1 양면전쟁(?)을 강요했다.

결국 동로마는 베네치아 등 과거의 주적에게 힘을 빌리고, 동서 교회의 재통합까지 추진하면서 오스만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1453년 수도가 함락되면서, 고대부터 2,206년 동안 이어온 로마 제국역사를 마감했다.

2.9. 중국[편집]


역사적으로 중국은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양면전쟁이 엄청 잦았다.

우선 중국은 수많은 나라 및 소수민족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라, 주변 세력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해서 자연스럽게 전쟁으로 이어지군 했다. 중국이 강성하면 주변 민족들의 복종을 받아내기 위해 전쟁을 치렀고, 반대로 중국이 약하면 주변 민족들이 중원의 풍요로움에 눈독을 들여서 약탈과 침략을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왕조가 멸망 징조를 슬슬 보이기 시작하면 수많은 정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모두 천하통일을 위한 배틀 로얄을 벌이게 된다. 수많은 세력들이 서로 충돌하다보면 양면전쟁 같은 게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즉 양면전쟁은 중국 역사의 필수요소라고 해도 무방하며, 지금까지 수많은 중국 왕조들이 양면전쟁을 치르면서 망했고, 한편으로는 양면전쟁의 승자들이 새로운 천하의 주인으로 등극했다.


2.9.1. 당나라[편집]


건국 때부터 계속 양면전쟁에 시달렸다. 건국 초기에는 당태종이 어떻게든 해결해줘서 분할될 뻔한 중국을 다시 합치고, 이후 북쪽의 돌궐, 동쪽의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어떻게든 돌궐을 패퇴시키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한반도를 먹으려다 신라와 맞붙게 된다. 당이 신라에 보낸 편지도 그렇고 원래 국력으로 따지면 당이 신라를 압살하는게 당연하지만 시기적절하게 토번이 서쪽에서 내려오고, 신라가 예상외로 잘 버텼으며 매소성, 기벌포에서 연달아 신라한테 깨지면서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어 토번을 신경쓰는 와중에 돌궐이 다시 강성해지고, 토번, 돌궐에 신경쓰다가 옛 고구려 지역에 발해가 건국되어서 등주를 점령당하는 등 이래저래 시달리고, 초기에는 안정적인 정치와 강력한 군사력 및 적절한 외교수완을 발휘해 다른 국가들을 압도했지만, 당 현종 말기에 안록산의 난을 시작으로 곳곳에 반란이 일어나고 내정도 급격히 악화된다. 곽자의가 나서서 위기 상황을 해결해주는 등 어떻게든 버티지만 내부에서 계속 일어나는 반란, 이민족들의 계속된 침공에 시달리다가 결국 멸망하고 5대10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2.9.2. 북송[편집]


동북쪽에는 요나라가, 서북쪽에는 서하가 각각 송을 괴롭히는 형세였다. 그렇다고 요와 서하가 협공을 하던 건 아니고, 이들 셋이 상호견제하는 구도에서 주로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약탈할 수 있는 재화가 풍족한 북송을 털어댄 것. 애초에 구도 자체가 북송에게 불리했는데, 후진석경당이 요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찬탈하고 나서 그 대가로 동북방에서 제대로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 연운 16주를 요에게 넘긴 터라 방어에 애로사항이 있어 요와의 싸움에서 항시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했고,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북쪽 방비에도 도미노처럼 영향을 끼치며 서하가 흥기할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거기에 송군 자체도 전투력이 별로여서, 요에게는 하북의 전주에서 전연의 맹을 맺어 요를 사실상[13] 형의 나라로 받들고 비단과 은을 매년 일정량 이상 상납해야 했고, 서하와는 삼천구 전투, 호수천 전투에서 제대로 쳐발리고 난 다음 요의 공격을 우려하여 서하에게도 비단과 은, 차를 상납하는 신세가 된다. 대신 요와는 다르게 명목상 서하가 신하국이 되었다.


2.9.3. 금나라[편집]


양면전쟁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최악의 선택을 했다.

건국 초기에는 요를 단숨에 밀고 송도 남쪽으로 밀어내면서 잘나갔는데,[14] 몽골이 떠오르면서 상황이 이상해졌다. 남쪽에 남송이 건재한 상황에서 북쪽에 몽골에게 밀리기 시작했는데... 금의 황제 금선종이 한 선택은 "송을 공격한다." 송을 정벌해 힘을 키워 그 힘으로 몽골을 막자는 계획이었지만, 이전에 상황이 좋았을 때도 밀지 못했던 남송이 몽골에게 밀리는 안좋은 상황이었던 당시 금에게 밀릴 리가 없었고 몽골에게 밀리는 상황만 계속됐다. 그 다음 황제인 애종이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남송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끝까지 몰린 상황이 되자 남송에 "우리 망하면 니들도 망해!"라며 대 몽골 동맹을 제의했지만, 그동안 한 짓이 있으니 남송이 금을 믿을리가... 결국 남송과 몽골의 양면공격으로 금은 멸망하고 만다.

사실 애종 시점에서는 신뢰의 원인 외에 남송 입장에서 현실적인 원인이 있었는데, 바로 금나라의 멸망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 괜히 도우려고 나섰다가는 오히려 몽골을 자극하여 전쟁구실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15] 일단 최종적으로 몽골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더라도 준비할 시간을 최대한 버는 것 역시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는 것. 금이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송도 몽골에 멸망했다고 하지만... 반대로 남송이 금을 지원했다면 과연 무사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남송은 이때 금을 공격하면서 양양 등의 고토를 수복하였고, 이 영토들은 훗날 몽골에 저항하는 완충지대 및 방어기지로 작용하여 남송은 장장 44년에 걸친 항전 끝에서야 무너졌다.

하지만 금선종대에 남송을 공격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연합해서 몽골에 대항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때는 몽골 내부의 상황이 잠시 안좋아지자 역습으로 영토를 되찾을 정도의 힘은 남아있었다. 금도 몽골에게 23년을 싸웠고 완안진화상수부타이를 격파한 게 멸망 4년전이다. 역사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높은 것.



2.9.4. 명나라[편집]


명나라는 16세기 초반부터 북로남왜에 시달렸다. 즉 북쪽으로는 오이라트, 남쪽으로는 왜구가 창궐한 것이다. 17세기에는 둘은 진정되지만, 동쪽에서는 만주족이, 서쪽에서는 이자성군이 명나라를 압박했다. 결국 명나라는 두 전선에 대처를 잘 못하여 이자성군에게 멸망하고, 만주족은 그 틈을 이용해 어부지리로 베이징을 점령한다.


2.10. 미국[편집]


오리건 국경 분쟁 때 미국-영국(現 캐나다) 국경 분쟁 지역이었던 오리건을 북위 49도로 반띵(…)하는 걸로 해결했다. 당시 미국이 미국-멕시코 전쟁 중이라 양면전쟁이 어려워서 영국-캐나다한테 양보한 것이다. 사실 미국은 당시 "54도 40분(알래스카 접경) 아니면 전쟁!"을 외칠 정도로 강경했다.

영국[16]일본[17] 둘 다 미국의 최우선 동맹국인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20세기 초의 미국은 영일동맹(1902-1923)으로 인해 서쪽의 태평양에서 일본 해군과 싸우게 되고 동쪽의 대서양에서 영국 해군과 싸우게 되는 양면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영일동맹을 종료하게 했다. 그 후 영일동맹의 종료가 아쉬웠던 영국 재무장관 네빌 체임벌린과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에 의한 영일동맹을 대신하는 영일불가침조약[18]을 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미국에게 영일동맹의 재림으로 보일 수 있다는 당시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의 우려와 일본의 런던 해군 군축조약 탈퇴 통보로 인해 무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국은 특이케이스로 성공한 양면전쟁의 가장 대표적이자 몇 없는 사례이며, 상대방을 모두 압도하기도 했다. 일단 2차 세계대전은 하도 구도가 혼돈스러워서 영국[19]이든 프랑스든 소련[20] 너도나도 양면전쟁이나 다름없던 상황이었으나 프랑스는 독일에게 빠르게 털려버려 자유 프랑스가 결성되었으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도 순식간에 뺏겨 사막에서 개싸움을 벌이고 영국은 초반에 일본에게 말레이시아와 인도양에서 동양함대가 궤멸되어 털리고선 버마까지 내주고 영국령 인도 국경까지 위협받으며 본토방위에 집중하다가 유럽에서 승기를 잡은 이후 전쟁 말미에 동남아시아 전선을 중심으로 주력함과 병력을 끌어모아 반격하였고 중국은 이미 1937년부터 수천만 명이 사망하는 고배를 연거푸 마시고 나중엔 대륙타통작전으로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상황인데다 소련 역시 핀란드와의 계속전쟁을 나치와의 독소전쟁에 합쳐서 보는 시각이 보통인데다가 이미 독일한테 최소 수천만이 사망하는 고배를 계속해서 마셨고, 일본과 전쟁 극후반까지는 맞붙지 않았기에 연합군에서 가장 제대로 양면전쟁을 펼친 것은 미국이다.

당시 미국은 동쪽에는 북아프리카 전선, 서쪽에는 태평양 전선이 펼쳐져 있었는데 동쪽에는 대규모 육군 군단들과 전차, 장갑차 등 육군이 주력이었고, 서쪽에는 항공모함, 대규모 해병 원정단, 전투기, 급강하 폭격기 등 해군이 주력이었기에 각자 필요한 물자나 군사계획 자체가 상반되었지만, 양측 전선에서 필요한 군사력과 물자들을 모두 빵빵하게 보급하고도 물자가 그래도 많이 남아 영국 등 다른 나라에 랜드리스까지 해주면서 '전쟁은 돈으로 하는 거다'는 말을 그대로 실현시켰다. 애초에 양측의 상대였던 나치와 일제부터 양면전쟁 중이었으니 미국의 양면전쟁은 딱히 별다른 페널티가 아닐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전략이 가능했던 건 미국이 동쪽과 서쪽이 각각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둘러싸인 북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열강들은 영국을 제외하고는 서로의 힘이 비등한 세력들끼리 육지로 맞대고 있는 반면 미국은 북쪽에 인구가 적고 추운 캐나다가, 남쪽에는 아직 발전중인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사실상 적이 없다.[21]

미국 본토는 상당한 해군 및 공군을 가진 국가가 아닌 이상 접근이 불가능한데 하필 그 미국이 기술과 자원이 사실상 무한한 국가라 한마디로 미국은 바다를 건너 적을 조질 수 있는데 상대국가는 바다는 커녕 미 원정군 막는 것도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네오콘이 장악한 행정부 수뇌부들이 전쟁 계획을 잘못 짠 결과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이라는 양면전선에서 희생은 늘어나고 돈은 쏟아붓는데 전쟁이 끝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래도 이라크는 전쟁 말기에 미국이 안정화시키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다가 2011년 미군 철수 후 누리 알 말리키 행정부의 실정과 ISIL에 의해 헬게이트가 열려 다시 도루묵이 되었으나, 2017년 이라크군과 시리아군에 의해 겨우 제압된 상태. 허나 아프가니스탄은 IS들을 진압한 이라크와 달리 안정이나 개선은 고사하고 현재 탈레반과 정부군의 충돌이 지속되고 있는데다 사실상 미국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대규모 전쟁에서는 압도적으로 털어버리면서도 이런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전쟁에는 목적과 수행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미국이 작정하고 그 나라의 말을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게끔 지우려 든다면 미국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나라는 없다.


2.11. 일본 제국[편집]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선을 크게 나누면 중일전쟁으로 인한 중국 전선과 진주만 공습 이후의 태평양 전선으로 나뉘었다. 태평양 전선도 세부적으로 보면 미드웨이-마리아나 제도-오키나와로 이어지는 중부 태평양의 해상 루트, 솔로몬 제도-뉴기니-인도네시아-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서남 태평양의 루트, 버마-인도차이나 전선 등을 구축해서 말 그대로 사방팔방에 전선을 확대한 꼴이었다. 중국 본토 전선을 포함하면 4면 전선인 셈. 그나마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소련-만주 전선만은 직접적인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작전으로 인해 이곳 또한 공격이 가해졌다.

1945년 8월 기준으로 오키나와에선 미군주로 본토를 노리고, 중국에선 중화민국군이 반격하여 광시를 탈환하고, 동남아에서는 영국군과 인도군, 호주군, 뉴질랜드군, 캐나다군이 접근하고 있었고, 만주에선 소련군함흥까지 내려온, 양면전쟁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4면전쟁을 치뤘다. 거기다 일본은 주변에 있었던 독일과 달리 만주국같은 괴뢰국들을 제외하면 온전한 동맹국이 1개밖에[22] 없었으므로 사실상 혼자서 모두 상대해야 되는 상황이었다.[23]


2.12. 이스라엘[편집]


제1차 중동전쟁에서 동쪽으로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와, 서쪽과 북쪽으로는 이집트, 레바논과 싸웠다. 이스라엘은 계속된 주변 이웃들 간의 삼면전쟁의 두려움 속에서 예방전쟁인 제3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공격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집트와 시리아와 양면 전쟁을 벌였다.


2.13. 파라과이[편집]


브라질과 한판 붙고자 한 데서 시작되었으나, 아르헨티나가 길을 빌려주는 걸 거부했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에게도 선전포고를 걸어버리고, 이어서 우루과이가 반파라과이파라 역으로 선전포고를 당하면서 3국 동맹 전쟁이 터졌다. 결과는 당연히 패배.


2.14. 불가리아[편집]


발칸 전쟁 당시 1차전에서 승리한 동맹들과 영토 배분 문제로 동맹들을 상대로 통수를 쳐 2차전이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 루마니아와 오스만 제국이 뒷치기를 해서 양면전쟁이 되었다. 결과는 당연히 패배.


2.15. 한국사[편집]



2.15.1. 고구려[편집]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고구려가 마주쳐야 했던 양면전선의 위기는 이미 4세기 중반 고국원왕 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고국원왕이 그전까지 간접 지배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던 낙랑군, 대방군 등의 토착 낙랑 세력들을 해체하고 직접 지배화한 정책 방향은 물론 옳은 것이었으나, 고구려 왕실의 이런 조치에 반감을 가졌던 낙랑, 대방인 대부분이 근초고왕의 백제로 건너가고 있었기에 이미 이 시기에 고구려를 괴롭힌 양면전선은 심지가 심어진 셈이었다. 물론 이런 인구 유출 현상 및 백제로 넘어간 낙랑, 대방인 등이 반고구려 활동을 하는 행태 등을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백제에게 큰 타격을 줘서 고구려의 밑으로 무릎 꿇리는 것이었으나, 이 시기 백제는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 큰 진보를 이룬 상태였기에 아무리 고구려가 기본 국력이 압도적이었다고 한들 전연에게 큰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그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국원왕이 조바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369년에 이렇다할 명분이나 이유도 없이 가만히 있는 백제를 먼저 공격해서 크게 자극했고, 그것도 대패하면서 불필요한 양면전선이 열리고야 만다.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이 안간힘을 써서 고국원왕 당시의 참상을 극복했지만 고국원왕이 불필요하게 벌여놓은 양면전선은 광개토대왕에게 사실 큰 부담이었다. 광개토대왕 자체가 대단한 명장이었기에 이런 부담을 이겨내긴 하였으나, 조부 고국원왕에게 물려받은 이 불필요한 유산에 계속 발목을 붙잡혔던 건 사실이다. 일례로 후연에게 크게 요동, 만주 일대 영역을 잃었던 때는 광개토대왕이 친정하는 고구려군이 백제-가야-왜 연합군 등을 크게 두들겨주고 있었던 시절이었고, 백제-가야-왜 연합군에게 역습을 당해 한강 이북 ~ 임진강 유역을 백제에게 잃었을 때는 고구려 주력군이 후연에게 요서와 요동 및 북경 일대까지 헤집으면서 복수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즉 한반도 전선에서의 전과 확대는 대요서 전선에서 받은 부담이 제한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나마 장수왕 시기에는 북위와 화친했고 초원의 야만족들은 북위에게 상당한 열세라 고구려에게 도전해올 형세가 되지 못해 상황은 좀 나았으나,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구려는 큰 위기에 봉착한다.

초원에서 돌궐이 일어나 고구려의 서북방을 압박하였고, 이에 고구려가 돌궐에 신경 쓴 사이 남방에서는 성왕백제진흥왕의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을 하는 등 양면전쟁의 수렁에 빠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한강 유역과 함흥평야의 상실을 야기하였다. 하지만 7세기 들어 백제와 신라가 틀어져 서로 물어뜯으면서 일시적으로 전선이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서는 70년간 이어진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에서는 돌궐, 백제와 연합해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나 돌궐과 백제가 먼저 멸망하게 되며 결국 다시 양면전쟁으로 돌입하였고 서쪽에서는 당나라가 남쪽에서는 신라가 공격해 양면전선이 형성되자 결국 고구려는 망하고 만다.


2.15.2. 신라[편집]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이후로는 서남쪽의 백제와 북쪽의 고구려 양국과 동시에 대치하고 싸워야 하는 양면전쟁의 상황에 놓였다. 반면 백제는 영토가 줄어들었음에도 후방에 다른 적이 없어서[24] 오직 신라 1개국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환경이었고 진흥왕 이후 신라가 백제보다 훨씬 넓어졌는데도 백제 무왕~의자왕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수세로 일관한 이유 중 하나이다. 게다가 동남쪽 일본열도의 왜국까지 백제의 우호국이고 과거 여러 번 신라 수도 서라벌을 공격한 적이 있다보니 일부 학자들은 신라가 왜국 방면까지 어느 정도 대비하느라 신라군의 전력이 더욱 분산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2.15.3. 태봉 , 후백제[편집]


후백제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세 전선 중 두 전선이 태봉과 맞닿아 있었다. 실질적으로 신라가 후백제와 상대할 전력이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25], 후백제는 태봉~고려와의 양면전쟁 상황에서도 오히려 신라를 침공해 헤집어놓고 고려군의 주력을 팔공산 전투에서 박살내거나 홍주·운주 지역을 공략하는 등 불리한 상황에서도 꽤나 선전한 편. 더구나 왕건이 점령했던 나주 일대는 영산강 유역의 농산물과 해산물, 소금 등 자원이 풍족한 지대인데다가 영산강 수로를 활용한 교역·대중국 외교 및 호남 지역을 수군으로 공략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는 점에서 후백제의 선전이 더욱 빛난다. 전쟁과 역사, 한국고대전쟁사의 저자인 임용한은 이를 두고 후백제는 불구의 몸으로 온전한 고려와 경쟁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 시기 후백제는 다름아닌 무열왕계 왕실이 눌지계 왕가에게서 승계해 정예병 양성 지역화한 추풍령 일대를 907년도에 흡수했던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웅진백제와 사비백제가 늘 고심했던 것이 추풍령 일대에서 양성되는 신라 정예병이 괴산과 보은을 거쳐 대전 동부를 늘 불안하게 압박하던 상황이었는데, 후백제는 해당 지역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었기에 적어도 수도권 방어에 열을 올려가며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어서 이 문제도 해결되어 있었다. 즉 후백제는 설령 몸은 불구였어도 한 손에 그전 통일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데 쓴 강력한 철퇴가 들려있었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양면전선은 후백제만의 문제가 아니고 태봉도 심각하게 고민하던 문제였다. 태봉-고려 당시 북방 여진족들의 세력이 이미 강해져서 북방에서 내리누르는 압력도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동북면 방향에서 자꾸 진공해오는 여진족이 큰 문제였다. 훗날 고려가 동북9성 개척에 나서게 되는 문제점이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26] 하지만 태봉-고려의 이 문제는 발해 유민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여진족들을 상대해야 할 북방 국경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해소된다. 후백제가 이 시기부터 고려에게 확 밀려버리는 이유는 고려의 양면전선이 이 시기에 해소된 이유도 컸다.


3. 예방전쟁[편집]


양면전쟁 상황을 만들어놓지 않기 위해 예방전쟁을 통해 교통정리를 시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3.1. 예시[편집]


역시 이 경우에도 빠질 수 없는 것이 독일(프로이센)인데, 독일 통일의 궁극적인 방해자인 프랑스를 치기 전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겨루던 오스트리아를 선제공격하여[27]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꺾어놓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통해 궁극의 적,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수도 파리까지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의 독일제국 황제 대관식까지 치르게 된다.

한국의 경우 양면전쟁을 당하기보다 이를 막기 위한 북방민족의 예방전쟁의 주요 희생양이 된 적이 많다. 발해의 멸망은 요나라가 중원 진출 전 후방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여 그것이 먹혀든 결과였으며 여요전쟁의 경우도 고려와 북송 양쪽에서 협공당하는 것을 꺼리던 요나라가 예방 차원에서 고려를 침공했었고, 후대인 여몽전쟁 또한 일정 측면에서 예방전쟁적인 면이 있다. 조선 때에도 명나라와 조선의 연계를 끊기 위해 후금정묘호란,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길들여놓고 중원을 침공하기 전 물자를 보급받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폴란드는 제2공화국 시절 소비에트 러시아를 상대로 예방전쟁을 벌인 적이 있다. 독일 제국 항복 직후 볼셰비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파기를 선언, 뒤이어 구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지역에 세워진 모든 신생국가들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거나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폴란드 중심부와 지척이던 벨라루스는 1919년 1월 5일에 멸망했다. 이미 독일,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분쟁을 겪고 있었던 폴란드는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것임을 직감, 2월 중순 벨라루스의 붉은 군대를 공격하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켰다. 그 다음해에는 우크라이나와 동맹을 체결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분쟁은 전면전으로 격화된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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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ELDZUG는 전쟁이란 뜻이고, GEG(gegen)는 "~에 대하여" 란 뜻이며, FRANKREICH RUSSLAND ENGLAND는 프랑스, 러시아, 영국을 의미한다. 마지막 u.s.w.(und so weiter. 영어로는 and so on) 는 "기타 등등" 이라는 의미.[2] 뭐, 북아프리카 전선의 경우 숫적 주력은 이탈리아군이기는 했다만...[3] 그러나 이 시대는 피레네 산맥이라는 거대한 자연방벽을 극복할 만큼 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여 스페인과 프랑스 세력이 집중 충돌한 지역은 이탈리아였지, 막상 양국 간의 자체적인 경계에서 군사적 충돌은 나바라 왕국을 둘러싼 대리전 말고는 드물었다.[4] 전쟁 개시 전부터 히틀러는 카이텔을 비롯한 자신의 예스맨들로 OKW를 채웠었다.[5] 이 중에서 폴란드와 접경선이 꽤 긴 벨라루스가 없는 이유는 소비에트 러시아한테 너무 빨리 망해서 폴란드와 분쟁을 벌일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6] 독일은 폴란드 회랑과 상슐레지엔 문제, 체코슬로바키아와는 테셴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7] 1918년 11월: 에스토니아. 1918년 12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1919년 1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8]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군대인 우크라이나 인민군이 10만,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군대인 우크라이나 갈리치아군이 10만이었다.[9] 공화정 말기의 킴브리 전쟁 때부터 위협적인 북방 세력이었고, 카이사르갈리아 정복 이후부터 북방전선에서 로마의 주적이 되었다.[10] 공화정 말기의 카르헤 전투에서 처음으로 맞붙었다.[11] 3세기에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동방전선에서 로마의 새로운 주적이 되었다.[12] 라쉬둔 칼리파국,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셀주크 제국, 룸 술탄국[13] 명목상으론 송이 형이고, 동생인 요에게 물품을 준다고 써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말만 그런거고.[14] 이때 금나라 군대의 남진 속도가 하도 빨라서 1세기 후의 몽골군조차 중국 남부로 그렇게까지 빨리 진격하지 못할 정도였다. 만약 금나라 군대가 조금만 더 많았거나 혹은 금나라 군대가 남송 고종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다면, 송나라는 완전히 금나라한테 정복당했을지도 모른다.[15] 이 주장을 제기한 사람은 훗날 몽케 칸의 남송 침공 때 조어산에서 우주방어로 버텨냈던 명장 맹공이다.[16] 북대서양 조약 기구파이브 아이즈AUKUS주요 7개국 정상회담으로 미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17] 미일안전보장조약Quad주요 7개국 정상회담으로 미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18] 불가침조약은 일반적인 동맹보다 한 단계 아래로 평가받는다.[19] 유럽에서 나치와, 태평양에서 일본과 전쟁[20] 핀란드 방면의 계속전쟁과 나치 독일과의 독소전쟁, 이 두 전선은 레닌그라드 포위 이후에는 사실상 합쳐진 전선이 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그냥 이격된 전선 정도로 봐서 계속 전쟁을 독소전쟁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21]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서인지 제1차 세계 대전때는 독일 외무장관 치머만이 멕시코에 미국을 공격해주면 미국이 뜯어간 땅을 되찾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멕시코 내부 사정도 엉망인데다가 멕시코 자국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지라 당연히 씹었다. 되레 이게 미국을 자극해서 독일은 더 빨리 망했다. 이것이 치머만 전보 사건.[22] 사실 이마저도 야권 등 저항 세력을 묵인해 주는것 같이 적극적인 협력은 아니었고 이것이 참작되어 태국은 전쟁책임을 크게 지지 않았다.[23] 일제의 동맹국이라 할법한 추축국들은 죄다 최소 수천 km 떨어진 유럽에 있었으니 사실상 이들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거기다 이마저도 이탈리아는 1943년에 항복했으며, 독일도 1945년 5월에 항복했으니 유럽에 있는 일본의 동맹이라 할 수 있는 추축국들은 전부 몰락한 상태였다.[24] 660년 백제 멸망전 당시에는 백제의 후방이던 황해를 통해 당나라 13만 수군이 신라군에 호응해서 쳐들어오게 되지만, 바다를 횡단해서 이런 대군을 보내는건 당시의 부족한 항해술 때문에 전례가 없었고, 따라서 백제가 예상하기 힘든 침공 루트였다. 즉 등애가 음평곡을 넘어 촉한을 멸망시킨 것처럼 백제는 상상하기 힘든 방면의 침공에 완전히 허를 찔린 셈. 게다가 신라군이 고구려를 공격하러 출진한 것처럼 백제 북쪽 경기도로 우회기동한 기만책략까지 있었다.[25] 심지어 신라는 고창, 운주 전투 이후 고려가 경주를 제외한 모든 경상도 지역 영토들을 병합하면서 후백제와 모든 국경이 사라지고 경주와 동해안 일대 일부 영토가 고려에 3면으로 포위된 일방면해국이 되었다. 물론 초창기에는 신라쪽 전선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신라는 비실비실해서 방어만 겨우 하는데다가 그 방어마저도 제대로 못해냈기 때문. 즉 고창 전투 이전까지는 3면중 신라쪽 전선은 문제가 없었다.[26] 이 문제는 다름아닌 요나라가 여요 전쟁 과정에서 여진족의 인력을 대거 강제로 징발했다가 고려와의 전투들에서 연거푸 대패하며 이들을 크게 잃으면서 해결된다. 물론 요나라측 여진 기병들에게 큰 피해를 본 고려 역시 이를 갈고 여진족들에게 여러 차례 보복을 가했음은 물론이다.[27] 다만 선전포고 자체는 오스트리아가 먼저 했는데, 그것도 프로이센이 유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