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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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관련 영상
4.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손자가 장성하여 이를 보게 되면 아마 글로나마 할애비의 마음을 알게 되리라"

-양아록 서문 中




養兒錄. 조선시대 문인 이문건(李文楗, 1494~1567)[1]이 손자 이수봉(李守封, 1551~1594)이 태어난 1551년부터 1566년까지 양육하는 과정을 기술한 현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거주 중인 후손들이 원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편집]


이문건손자인 이수봉[2]이 태어난 1551년부터 자신이 사망하는 1567년 이전까지 16년 간 귀중한 손자를 양육하며 그 경험들을 기록한 일기이다. 외아들인 이온(李熅)이[3] 마침내 손주를 낳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한 손자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16년 간 소중히 지성으로 양육하면서 이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손자 이수봉이 알고 군자다운 인물로 훌륭하게 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온(1518~1557)은 불행히도 아버지보다 10년 일찍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손자 수봉은 할아버지의 지극정성 덕에 장성하여 만 43세까지 살아갔다. 무엇보다 이문건은 당시로는 고령인 50의 나이에 1545년부터 사망하기까지 20년 넘게 귀양지에서 지내다가 73세에 사망했는데 자식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 이쯤되면 자식들이 요절했다기보다 이문건이 비정상적으로 건강하고 장수한 셈이다.

큰 인물로 키우기 위해 인성교육과 학식교육을 병행했으며, 손자가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초제문(醮祭文)을 직접 작성하여 초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자료 중에서 자손교육의 체험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현존 최고(最古)의 육아일기로, 조선 중기 양반 집안에서의 아동교육과 생활풍속 등을 이해할 수 있어 생활사, 미시사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육아일기라는 훈훈한 겉모습과는 달리, 내용을 보면 좀 불행한 부분이 많다. 이문건은 손자가 커가면서 애정을 주면서도 점점 엄격하게 교육을 시켰지만 문제는 기대가 컸던나머지 엄격함의 정도가 지나쳤던 것이다. 특히 손자인 수봉은 이런 할아버지의 훈육을 따라가지 못하고 견딜수가 없어 공부를 점차 멀리하고 술을 가까이 하며[4] 비뚤어졌다. 이에 이문건은 더 엄하게 체벌하며 훈육해서 다스리려 했으나, 이는 수봉이 반항하고 더 비뚤어지는 악순환만 일으켰다.

사실 이는 아들 이온에게 대한 양육 방식에서부터 문제였는데 이문건은 아들 이온에 대한 기대가 커서 이온이 가문을 일으켜주길 바랬지만 문제는 이온이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이온은 어린 시절에 앓았던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인해 굼뜨고 느리며 어제 가르쳐준 글도 까먹을 정도로 이해력까지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이문건은 아들에게 실망해서 엄한 체벌과 훈육으로 다스렸지만 이게 지나쳐서 아들을 학대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하게 되었고(회초리가 부러질 정도로 때리고 빰을 발로 밞고 머리를 한움큼이나 뽑았다. 특히 이것을 기록으로 당당하게 적은것이다. 이 정도면 교육이 아니라 학대인 것.) 견디다 못한 아들이 도망을 자주 가서 다시 데려와야할 지경으로 부자관계가 악화된다. 그래서 손자에게 더 기대를 걸고 집착하게 된 것인데 문제는 손자한테 지나치게 무리한 교육을 시키다가 손자가 견딜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문건은 이에 대해 한탄하면서 노옹조노탄(老翁躁怒嘆)이란 시를 짓고 '늙은이의 포악함은 실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자신의 훈육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할애비와 손자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라고 언급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양아록의 집필을 끝내게 된다.

이문건은 손자가 입신양명해 쇠락한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길 간절히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손자가 출세하는 것을 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수봉은 임진왜란때 우정침(禹廷琛), 윤우(尹佑)와 함께 의병으로 크게 활약했고 조정에서 상을 내리자 "마땅한 도리를 다했을 뿐"이라며 사양했다는 기록을 보면 성장기 때의 방탕한 모습과 달리 철이 들고 성인이 되어서는 의롭고 윤리적인 선비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문건의 정성어린 교육과 훈육이 비록 어린시절에는 즉시 효과를 보지는 못했으나 충분히 의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관련 영상[편집]






4.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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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관은 성주로 8대조가 '다정가'로 알려진 고려 말의 학자 이조년이다. 조광조의 제자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묵재일기를 저술했고(이 속에서 한글본 설공찬전까지 발견되었다!), 묘비에 한글을 새긴 가장 오래된 자료이자 조선시대 유일한 사례인 '이윤탁 한글 영비(보물 제1524호)'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니었지만 생활사와 한글 역사 연구에 가치가 높은 자료를 각각 남긴 셈이다.[2] 양아록에 이문건이 손자 이름을 정할 때 5번 제비를 뽑을 때 수봉이란 이름이 4번 나와서 이름을 손자 이름을 수봉이라 고쳤다고 한다. 원문은 갑자년 10월 11일 밤에 다시 수봉으로 이름을 고치고 자를 경무로 했다. 다섯 번 집주(제비뽑기)하니 수봉이 네 번 나왔기에 많은 쪽을 따라 개정했다.[3] 사실 이문건은 원래 아들이 6명이었지만 모두 요절하고 남은 자식이 이온밖에 없었다.[4] 이는 이문건이 손자가 11살이 되었을때 술을 가르쳤던것도 있다. 술은 중독성이 강한데 빨리 가르친것 자체가 이문건이 한 조기교육의 문제점을 제대로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