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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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의 지급시
襄阳( Xiāngyáng( Shì
샹양시 | Xiangyang City





시정부 소재지
후베이성 샹양시 샹청구 탄시루219호
湖北省襄阳市襄城区檀溪路219号
지역
중난
면적
19,728km²
하위 행정구역
3구 3현급시 3현
시간대
UTC+8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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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5,260,951명 (2020)
인구밀도
266명/km²
HDI
0.766 (2016)
서기
왕치양(王祺扬)
시장
왕타이후이(王太晖)
GRDP
전체
$742억 2,398만 (2019)
1인당
$10,392 (2019)
상징
시화
쥐똥나무
시목
배롱나무
차량번호
鄂F
행정구역 약칭

행정구역코드
370200
지역전화번호
0710
우편번호
441000 ~ 441900
ISO 3166-2
CN-HB-06

홈페이지
파일: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_4.png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파일:108646909-1.jpg




명칭
한국어
샹양성곽
간체
襄阳城墙
번체
襄陽城墻
영어
Xiangyang Castle
분류
고건축
(古建筑)
시대

일련번호
5-0361-3-167
주소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 샹양시 샹청구 네이환루
湖北省襄阳市襄城区内环路
등재
2003년
차수
제5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AA급


1. 개요
2. 역사
3.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중국 중부 후베이성(湖北省)의 지급시. 한자도 襄陽으로 대한민국강원도 양양군과 동일하다. 중공 수립 이후 2010년까지 샹판(襄樊), 즉 양번으로 부르다가 2010년 12월에 샹양(襄阳), 즉 양양으로 바뀌었다. 시가지는 한수이 강(汉水)의 남, 북 양안에 형성되어 있으며 인구는 570만 명으로, 후베이성에서 성도인 우한(武汉)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시가지 동북쪽 끝에는 샹양공항이 있다. 샹양은 우한에서 시안(西安)로 가는 도로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서 옛부터 각광받았다. 그외에 북쪽 100km에 위치한 난양, 남쪽 100km의 징먼, 더 가면 나오는 이창 등이 주변 도시이다.

삼국지, 남송 시대의 우주 방어 도시로 유명하다. 양양 고성과 강 건너의 판청(번성)은 도시의 유서깊은 역사를 상징한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유표에 의탁할 시에 머문 신예(신야)는 난양 관할이며 샹양 시내에서 북으로 40km 올라가면 나온다. 삼국지 덕후라면 이창 (이릉) ㅡ 샹양 ㅡ 신예난양(남양) ㅡ 쉬창(허창) 순으로 둘러보는 것도 좋다. 3박 4일 정도로 잡고 가면 좋다.


2. 역사[편집]


파일:fQCqTGU.jpg
사대문 중 유일하게 남은 북문 임한문
파일:양양 중국 이집트.png
샹양성의 위성사진. 성벽은 대체적으로 잘 남아있다.

삼국지 독자들에게는 친숙한 도시다. 원래 형주자사의 치소는 무릉군 한수현이었으나 후한 말 형주자사로 부임한 유표가 치소를 이 곳으로 옮겼고 한수 건너편에 번성을 세워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유종조조에게 항복한 후에는 위나라에 소속되었다. 위나라 시기 양양은 위나라령 북형주의 중심지로,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적벽대전 이후 촉한이 차지한 강릉의 남형주을 견제하였고, 관우가 양양을 포위해 번성 공방전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즉위하여 양번의 두 성을 불태우고, 손권은 진소를 보내 양양의 빈 성을 점령하게 하였으나, 곧 조비가 손권이 '양양을 무단으로 취했다'는 이유로 조인과 서황을 보내 되찾았다. 이후로 양양은 손오가 차지한 남형주를 견제하는 위나라의 중요 거점이었고, 서진의 시기에는 대장군 양호가 주둔하며 육항과 대치하였다. 269년부터 278년까지 양호는 이 지역에서 대대적인 개발을 실시했는데 양호는 4만 명을 파견하여 800여 경의 밭을 개간했다. 이런 개발로 8만 명의 군사가 먹을 10년 식량을 비축하는 성과를 냈으며, 다음 사령관인 두예는 이곳을 기반으로 손오를 정벌,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렇게 교통과 방어의 이점이 있어 위나라, 진나라 시기부터 잘 개발된 입지로 인해 양양은 육조시대 이래 남쪽 한족 왕조들의 군사적 요충지인 형주 가운데서도 군사적 요충지였다. 특히 장강-회하 유역 사이에서 북방민족을 방어했던 남송 시대에 양양은 침략하는 입장에선 심히 곤란한 성이었는데, 성곽은 튼튼하며 주변엔 깊은 해자가 파여져 있어서 기마대가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378년 전진의 17만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양주자사 주서가 방어에 나서 1년간 항전하였으나 379년 2월 항복하였다. 이때 주서의 모친인 한부인이 성내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취약했던 북서부 성벽을 견고히 지킨 것에서 양양성은 부인성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후세의 양양 공방전과 달리 1235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입에는 양양성은 1236년 3월에 쉽게 함락당했다.(...) 이때 몽골군의 기세는 대단해서 1235년 10월 사천성의 핵심지역인 성도가 몽골군에게 장악당했고, 양양성도 함락, 1237년에 이르자 몽골군은 동쪽으로는 황주까지 이르게 된다. 어쨌거나 송나라의 명장 맹공이 다시 양양을 회복하고 방어선을 튼튼히 다져서, 당시 금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최강이었던 원나라 군세도 여기서 막혀 남송 공략에 애를 먹었지만 결국 이슬람 기술자를 초빙하여 개발한 회회포[1]를 이용하여 6년을 포위한 끝에 결국 함락시킬 수 있었다.[2] 그리고 이 양양 공방전의 패배는 남송의 멸망으로 직결되었다. 해당글 중반부에 양양 공방전에 대해 잘 나와있다. 양양 공방전 관련 참고글 2

원나라, 명나라 시절에는 시대의 흐름에 의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능력이 사라지면서,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하여 일종의 내부 변방지대 화 했다. 이 결과 치안이 혼란하고 도적이 번성하는 골치아픈 지역으로 변모된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청나라때는 주변 지역인 후베이성(湖北省)이 곡창지대가 되었던만큼 다시 경제가 회복되면서 다시 번성, 지금도 후베이성에서는 상당히 큰 도시며, 1949년에 강 건너 옆 도시인 번성(판청)과 합쳐져서 샹판시(襄樊市), 즉 양번시가 되었다가 2010년 상양시(襄阳市), 즉 양양시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의 도시로 치면 대구광역시와 같은 지위에 있는 도시인데 주변에 대구도 경산시, 군위군, 칠곡군같은 위성도시들이 있고 양양도 신야나 상용과 같은 위성도시들이 있다는 것이 유사하다.

3. 매체에서[편집]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편집]


형주를 대표하는 부동의 대도시로 등장한다.특히 양양을 점령하면 양양 이북(신야, 상용 방면)과 이남(강릉, 강하 방면)의 공격을 양양에서 모두 막을 수 있어 전략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하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전한의 수도 장안과 후한의 수도 낙양, 조조대의 수도 허창과 업, 오의 수도 건업, 촉의 수도 성도, 형주의 중심 양양은 시리즈 대대로 유력한 대도시 멤버들이다. 강릉의 경우 대도시가 많은 버전에선 대도시로 나오지만, 대도시가 적은 버전에선 중도시 정도로 나온다.


3.2. 사조영웅전, 신조협려[편집]


김용사조영웅전신조협려에서도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곽정황용 부부가 몽골에서 남하하여 도화도에 머물다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땅이며, 곽부, 곽양, 곽파로 3남매가 태어나 자란 뜻깊은 곳. 곽정은 실존인물인 절도사 여문덕을 도와 이곳에서 몽골의 남하를 30여년에 걸쳐 방어해냈으나, 결국 쿠빌라이 칸 시절 양양성이 함락되면서 곽양을 제외한 일가가 순사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여문덕을 너무 푸대접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인데, 소설에서 여문덕은 소심한 탐관오리 같은 인물로 묘사되나, 실제 정사에서는 곽정 패밀리가 한 업적 모두가 여문덕과 동생 여문환의 업적이다. 여문환이 정사와는 정반대로 묘사 된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결국 원나라에 항복, 양양성이 함락된것이 치명타가 되어서 남송이 망한 것 때문에 폄하한 것 같은데... 솔직히 아무 지원없이 4년간을 버티다가 모두 굶어죽을 상황이 되자 백성들을 위해 항복한건데 취급이 너무 심하다. 다만 작가인 김용은 사서에는 여문덕의 승리로 기록되어있다고 직접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김용이 만들어놓은 소인배 여문덕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중국 내에서도 김용소설 팬픽으로 여문덕이 원전보다 더한 찌질이로 나오는 팬픽이 많다.[3]

몽골답지 않게 양양 주변지역을 중국 배 5000척과 이슬람인 기술자들과 사천 등지에서 노획한 무기 및 그곳에서 잡아온 중국인 보조병들까지 끌고와서 그냥 요새화를 시켜버리고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행동을 한 것이 크다. 당시 남송 정부는 범문호가 지휘하는 10만의 병력을 지원하기도 하고 수천 단위의 병력을 양양성과 연결 시키기 위한 과정중에서 잃는 등 노력을 했으나 요새화를 한 몽골군에게 격퇴당했다.

물론 여씨 형제도 사람이었는지라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나마 여문환은 덜 까이는 편이고 동정론도 많은 반면에, 여문덕은 하자가 많은편이었다. 일단 역사적으로 여문덕이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며, 당시엔 '석숭이 다 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부정축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간신 가사도에게 빌붙어서 친인척들을 요직에 앉혔다는 비판도 있고[4],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원나라의 뇌물을 받아먹고 양양성 근처에 시장을 건설하도록 허락했는데... 시장은 페이크였고, 사실은 양양을 공략하기 위한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중간에 '우리 상인들이랑 짐을 지켜야 하니 성벽도 쌓게 허락해 주시죠'라고 원나라 측에서 제시했는데, 그걸 허락해 버린 것이다.[5] 당시 여문환이 편지를 보내서야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여문덕의 수하가 이를 은폐했고, 이는 이미 늦어버렸다. 그리고 이존효에 필적한다는 명장 유정의 투항도 따지고보면 여문덕과 연관이 있는데, 여문덕이 유정을 무시하였던 데다가 조세웅과 유정을 싫어해서 트집잡아 조세웅을 죽였기 때문에 유정이 불안함을 느껴서 투항을 마음먹었다는 내용이 사료에서 분명 나온다.[6]

[1] 트레뷰셋과 비슷한 계열의 투석기이다.[2] 덕분에 딴 이름이 무려 양양포이다. 회회포는 프랑스포를 의미하는 불랑기포처럼 굳이 직역하면 이슬람포라고나 할까...[3] 대표적인 작품이 색정무협으로 알려진 황용양양비사. 여기서는 무려 여문덕과 그의 아들 여겸이 나란히 황용과 쓰리썸을 한다.[4] 대표적인 예시가 사위 범문호. 상패장군이라 불렸으며, 양양 공방전에서 제대로 싸우지 않은 데다가 이후 원에 투항해 여원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 강남군을 홀로 내버려두고 도망친 장수이다.[5] 請還以玉帶饋之, 求置榷場於襄陽城外. 蒙古從之. 至鄂, 請於文德. 文德許之. 蒙古使曰: 南人無信, 安豐等處榷場, 每為盜所掠, 願築土牆以護貨物. 文德不許. 或謂文德曰: 榷場成我之利, 且可因以通好. 文德為請於朝, 開榷場於樊城外, 築土牆於鹿門山, 外通互市, 內築堡壁. 蒙古又築堡於白鶴, 由是敵有所守, 以遏南北之援. 時出兵哨掠襄樊城外, 兵威益熾. 文德弟文煥知為蒙古所賣, 以書諫止. 文德始悟然, 事已無及. 惟自咎爾.[6] 大將呂文德忌二人, 捃世雄罪逼以死. 整懼禍及己. 遂叛歸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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