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저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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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관광지인 서우시후 호(瘦西湖)의 오정교(五亭桥)
1. 개요[편집]
중국 동부 장쑤성의 지급시. 난징에서 동북쪽으로 50km 떨어진 도시로, 시가지는 양쯔강 북안에 위치해 있는데, 강 건너에는 전장(镇江)이 위치해 있다. 대운하의 건설과 함께 발달하였으며, 복잡하게 얽힌 운하들 사이의 옛 거리와 정원들로 안정적이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쑤저우와 함께 중국 강남 지방의 '물의 도시'로 유명하다.
2. 역사[편집]
도심 서부의 구도심인 둥관 역사 거리
후한 대에 광릉현이라 불리었으며 동명의 군(서주 광릉군)의 치소도 당연히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쪼개지고 삼국시대가 되어 이 지역이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의 최전방이 되자 위나라는 광릉군의 치소를 화이안시 일대로 옮겨버렸다. 수나라 대에 양주를 재설치하고 치소를 이곳에 두었는데 지금의 양저우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후에 대운하가 양주 옆에 건설되자 양쯔강과 대운하가 교차하는 환상적인 위치 조건이 갖추어져 엄청난 번영을 이루었다. 강도(江都)로 불리며 남쪽의 부수도가 되었고 수양제가 수서호를 세워 즐겨 찾았으며, 마지막에는 결국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암살되었다.
당나라 대에는 아시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광저우나 하노이 등에 내려서 올려보낸 제품, 사천에서 보내온 비단 등이 대운하를 통해 화북으로 보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결하는 물류의 허브가 되었다. 그렇기에 환전업, 금융업도 번영하고, 큰 신라방과 페르시아, 아랍 상인의 무역거점인 번방(蕃坊)이 존재하던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다. 당나라 대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양주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 양저우에서 시안으로 보내던 물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소금과 곡물이었는데, 황하 유역의 지력이 다해 늘어나는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양저우는 당나라의 식량 안보를 책임지는 최중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8세기~9세기 동안 전신공, 필사탁, 손유 같은 반란군 우두머리들이 양저우를 뻑하면 털어대고 상인들을 학살했고, 마지막으로는 10세기에 후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도시가 결국 몰락하고 만다. 결국 송나라 대에는 시인들이 양주의 적막한 풍경을 노래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수운 교통의 최중요지 역할도 인근의 쑤저우, 항저우 등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남침으로 송 조정이 피신하였을 시에 임시 수도로 삼아질 만큼 여전히 요충지로 대접받고 있었으며(1128 ~ 1129년),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마르코 폴로가 양저우의 행정관이 되었다고 한다.
원명 대에 도시는 소금 유통의 중심지로 다시 번영하였다. 하지만 명청교체기 (남명) 시기 병부상서, 예부상서를 지낸 사가법(史可法)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군대에 함락된 후 수만명이 학살되는 피해[1] 를 입었다. 이후 강 건너 전장과 동쪽의 난퉁이 번영하게 된다.
3. 특징[편집]
춘하추동의 경관을 자랑하는 개원
현재 인구는 450만명이다. 시가지 동쪽에 양저우 타이저우 국제공항이 있는데, 아직도 수운 교통이 활발하다. 관광지로는 남조 시대에 지어진 대명사와 서호, 그리고 그 주변의 여러 정원들이 있다. 인근의 명나라 시대 묘역에는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의 16대손의 무덤과 14세기 이탈리아 상인의 무덤도 있어 중근세 이슬람/기독교 공동체의 존재를 보여준다.
볶음밥만을 위해 도시를 찾는 미식가들도 있을 정도로 볶음밥이 정말 유명하고 맛있다. 얼마나 유명하냐면 양주가 아니더라도 중국 전역의 어느 중식당에서도 '양주식 볶음밥(扬州炒饭)'을 주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수나라 대에 "쇄금반"이라고 하여 밥을 볶을 때 기름과 달걀노른자가 어울려 금가루처럼 보인다고 이름붙은 볶음밥 요리가 있었는데, 수양제가 양주에 방문했을 때 이 쇄금밥을 양저우에 전파한 것이 현재의 '양주식 볶음밥'의 기원이라고 한다. 미식가들은 새우, 관자, 달걀, 해삼 등 재료가 최소 10가지는 되어야 제대로 된 양주볶음밥으로 평한다지만, 이는 표준화된 레시피이며, 양주 내에서도 서민들은 계란 파 햄 등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먹는다. 전국적으로는 '깔끔하고 맛있는 볶음밥'이라는 이미지이다.
신라의 문인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빈공과 급제 후 관리생활을 할 때 근무했던 곳이 양저우였다. 그래서 양저우 웨이양구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가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웨이양구에는 최치원 기념관도 있는데,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세워진 외국인 기념관(第一外國人紀念館)이라고 입구에 써 있다. 그 외에 한중 친선 바둑시합 등 활발한 친선교류를 하고 있다고 한다.
4. 매체[편집]
드라마 해신의 전반기의 주요 무대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양저우는 실제로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큰 규모의 신라방이 있었을만큼 신라 상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번성한 상업도시였던만큼, 장보고의 당나라 체류 시절의 배경으로 적합한 곳이라 설정된 듯 하다. 다만 드라마 상에서는 이곳이 당나라 최고의 상업도시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위에서도 봤듯이 당나라 대에는 항저우에 밀려서 콩라인이 된지 오래였다(...).[2]
5. 기타[편집]
버스 업체 양저우 아시아스타의 본거지로, 이 회사의 차량들 중 일부의 부품이 한국으로 수입 후 국내에서 조립되어 국산차로 둔갑한 사례가 있다. 에디슨 스마트 087/093의 중형 모델[3] 과 범한 E-STAR 8, 11의 원본 차량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 양저우다.
6. 갤러리[편집]
개원과 함께 양주 양대 정원인 하원
명나라 대의 성벽과 옛 도시
둥관 역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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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0만명이 학살당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이건 과장되었다는 의견도 있다.[2] 그래도 항저우가 너무 발전해서 다소 입지가 낮아졌을 뿐, 이 시기에도 여전히 당나라의 주요한 대도시들 중의 하나였다.[3] 심지어 스마트 110도 헤드라이트 부품은 양저우 아시아스타 것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