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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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양준명(梁濬明)
생몰
1876년 2월 1일 ~ 1949년 12월 23일
출생지
평안북도 선천군 천낙동
사망지
평안북도 선천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양준명은 1876년 2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 천낙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신민회가 결성되었을 때 선천에 신민회의 연락기관으로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여 문화의 계발과 사상계몽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1911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105인 사건의 관계자로서 체포되어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그후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근무하면서 선천남교회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석창(金錫昌)·홍성익 등과 함께 학생과 교인을 동원하여 선천에서 시위를 주동했다.

1919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동년 5월에는 임정 교통부위원에 임명되어 국내외 교통기관의 조직운영과 재정에 관한 수입, 지출 등을 관장하였다. 또한 1920년 1월에는 안동교통사무국을 지휘하다가, 안동교통사무국장 홍성익(洪成益)이 안동 태성 병원에 입원하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피살되자, 그는 1920년 1월 29일 후임 사무국장에 임명되어 재정자금의 모집, 통신업무, 인물 소개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특히 역체식 진전법(驛替式 進傳法)이라는 연락방법으로 안동과 황해도 간의 통신연락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다가 1921년 5월에 사임하였다.

이후 선천에 돌아와 계속 활동하였으며, 1936년 봄에는 안창호, 이광수, 오순애(吳順愛) 등과 함께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수양동우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후 대다수 인사들이 전향하는 와중에도 자택에서 은거할 뿐 전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광복 후 선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9년 12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양준명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