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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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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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구회
회원번호
기록
가입년도
비고
2
2,318안타
2007년
최초 창립멤버 3인







양준혁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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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2
2005
2006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3 KBO 리그 신인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3, 1996, 1998, 2001 KBO 리그 타격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6, 1998 KBO 리그 최다 안타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4 KBO 리그 타점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3, 1996 KBO 리그 장타율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3, 1998, 2006 KBO 리그 출루율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3, 1998, 2001 KBO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자









보유 기록
1993~2008
16년 연속 100안타[1]
1380개
통산 최다 사사구
1278개
통산 최다 볼넷
150개
통산 최다 고의사구


양준혁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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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삼성 라이온즈|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0번}}}
정성용
(1989~1992)

양준혁
(1993~1998)


김기태
(1999)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0번}}}
최훈재
(1997~1998)

양준혁
(1999)


김경언
(2001~2002)
{{{#fff [[LG 트윈스|LG 트윈스]] 등번호 57번}}}
김종헌
(1998~1999)

양준혁
(2000)


김신섭
(2001)
{{{#fff [[LG 트윈스|LG 트윈스]] 등번호 10번}}}
안상준
(1998.5.15.~2000)

양준혁
(2001)


이일의
(2002~2003)
{{{#fff [[삼성 라이온즈|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0번}}}
김승권
(2001.4.28.~2001)

양준혁
(2002~2010)


KBO 영구 결번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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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양준혁해설2.jpg

파일:MBC SPORTS+ 로고.svg 해설위원
삼성 라이온즈 No.10
양준혁
梁埈赫 | Yang Joon-Hyuk

출생
1969년 7월 10일 (54세)[1]
경상북도 대구시 중구 대봉동
(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남도초 - 경운중 - 대구상고[3] - 영남대[4]
신체
188cm, 111kg[5], O형
포지션
지명타자[6], 우익수, 좌익수, 1루수[7]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2년 2차 2라운드 (전체 11번, 쌍방울)[8]
1993년 1차 지명 (삼성)[9]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3~1998)
해태 타이거즈 (1999)
LG 트윈스 (2000~2001)[10]
삼성 라이온즈 (2002~2010)
해설위원
SBS ESPN 야구 해설위원 (2011~2013)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4~)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해설위원 (TV조선)
경력
양준혁 야구재단 이사장 (2011~)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 (2017~)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1992)[11]
소속사
장군엔터테인먼트[12] | 메이시안[13]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양준혁 야구재단)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양신 양준혁)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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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배우자
박현선(1988년생)(2021년 결혼 ~ 현재)[1]
부모
아버지 양철식(1936년생)[2][3]
형제자매
누나[4], 형(1966년생)[5]
친인척
사촌형 양일환
본관
남원 양씨
응원가
해태 타이거즈 시절: Old MacDonalds Had a Farm[6]
LG 트윈스 시절: Queen - We Will Rock You[7][8]
삼성 라이온즈 시절: 위풍당당 양준혁 듣기[9][10][11]
MBTI
ISFP
서명
파일:티스토리 아이콘.svg

1. 개요
4. 은퇴 이후
4.1. 은퇴 후 진로
4.3. 양준혁 야구재단
4.4.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그저 1루까지 열심히 뛰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난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한 번도 걸어서 1루까지 간 적이 없다."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이자, 現 MBC/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양준혁야구재단 이사장 및 멘토리 야구단 감독이기도 하며 예능에 출연하는 방송인이기도 하다.

은퇴 시점에서 3000타석 이상 타자들 중 KBO 통산 wRC+ 1위, 야수 WAR(스탯티즈, KBreport) 1위 자리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14] wRC+ 200을 2번 넘겨본 유일무이한 타자이다.[15][이종범]] 등 쟁쟁한 타자들도 커리어하이에 못 넘긴 스탯이며, 82백인천(227.0), 15테임즈(222.3), 83장효조(215.4), 93양준혁(212.0), 03심정수(210.7), 96양준혁(207.0), 84이만수(204.6), 91장종훈(204.2), 97김기태(202.6)라는 단 9개의 사례만 있을 뿐이다. 이 중에서 두 번 넘겨본 선수는 오직 양준혁 밖에 없다.] 슬럼프를 겪었던 2002년과 2005년, 말년 노쇠화로 기량이 떨어지던 2008년과 2010년을 제외하고는 전부 3할대의 타율을 기록, 배트를 거꾸로 들고 쳐도 3할이라는 비유까지 만들어졌다.[16] 타격과 관련된 온갖 누적 기록 1위였는데 본인이 가장 안 깨지기를 바라는 기록은 볼넷이라 말한 적 있다. KBO에서 대표적으로 선구안이 좋았던 선수.

또한 일명 "만세 타법"이라 불리우는 특유의 타격폼[17]과, 타구나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끝까지 1루를 향해 전력질주하던 모습이 타자 양준혁의 트레이드 마크이다.[18]응원가는 따로 없이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위!풍!당!당! 양!준!혁!"을 외친다.[19]

타자로서도 대단하지만 한 팀의 프랜차이즈로서도 모범이다. 결과적으로는 원클럽맨이 아니지만 본인 팀에 대한 애정은 모든 삼성 팬들이 인정하는 부분.

2011년 7월 23일에는 올스타전에서 은퇴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선정한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0에 선정되었다. 2022년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에서는 7위를 기록하였다.

여담으로 양일환 前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가 사촌 형이며[20], 김태한 kt wiz 투수코치와는 대구상고 동기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은퇴 이후[편집]



4.1. 은퇴 후 진로[편집]


프로야구 은퇴 후 현재는 야구해설가, 인기 강사, 예능인, 사업가, 유튜버로 활발히 활동중이다.

은퇴하면 야구장을 짓고 싶다고 했다. 허구연 필드에 이은 양준혁 필드가 나오길... 은퇴 선언 후 실제로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2군데 정도로 후보가 압축된 듯. 남자의 자격에서 직접 꿈의 구장 모형을 만들어 소개하기도 했다. 후배들을 성심껏 지도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 지도자로서도 대성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다할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지 않고 방송 활동을 하다 자취를 감추어 코치감독이 될 수 있을지는 불분명.


2010년 플레이오프는 덕아웃에서 지켜봤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미디어데이에서 문제가 되어 덕아웃에서 퇴장. 하지만 4차전 도중에 난입(?!)해서 선수들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트위터 문제도 그렇고 왠지 은퇴 후의 행적이 순탄치만은 않아보인다.

지도자의 길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자신이 감독이 된다면 어떻게 해보고 싶냐는 질문에 김성근 감독과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스타일을 섞은 야구를 해보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2011년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양키스 구단으로 연수 예정이었으나 사전 언론 노출 관계로 계속 일정이 지연되다가 본인이 고사했다. 대신 과거 선수협에 같이 참여했었던 김재현이 간다.(LA 다저스 산하 싱글A 쪽으로)

2010년 10월 24일에는 대전 갑천의 잔디구장에서 제1회 '양준혁 전국 청소년 야구 대축제'를 개최하였다. 야구선수의 이름을 딴 야구 대회로는 한국 최초. 1천여 명 55개 팀이 참가했으며 구장만 13개를 대여한 엄청난 규모였다. 경비만 약 5천만 원 들었다고 하는데 양준혁은 이 비용을 사비로 지출했다. 본인 말로는 이 대회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양준혁은 이때를 기점으로 지도자의 길을 일단 접고, 재단 사업을 시작한다. 2011년 7월 30일 2회 대회 개최. 이때 삼성에서 코치 제의를 받은바가 있지만, 코치 업무도 중요하지만 유소년 야구 육성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삼성의 코치 제의를 거절했다고.#

또한 은퇴 후에도 삼성 라이온즈 팀에 대한 조언을 꼬박꼬박 해주는 모양. 실제로 2012년 초반 삼성이 극도로 부진하자, 삼성 타자들의 눈빛이 죽어있고 야구를 너무 쉽게 보는 거 같다는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5월까지 5할 못 맞추면 선두권으로 올라가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5할을 실제로 맞췄다.

은퇴 무렵 김성근의 권유로 SK 와이번스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뻔했다. 본인도 현역 생활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으나 삼성에서 은퇴하는게 본인에게 더 맞는 결정이라는 생각과 야구재단과 멘토리 야구단을 위해 고사했다고 한다.

후의 일로 김응용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복귀했을때 지도자 복귀 의향을 전한게 양준혁 본인이었고 한화로부터 수석코치 제안까지 받았으나 재단 관련 일이 너무 많아 고사했다고 한다.(재단 관련은 아래 문단에 서술)


4.2. 해설위원[편집]


배기완: 좌측 높이 뜹니다. 자 김현수...

배기완&양준혁: 어어어어어!!!

배기완: 쓰리런~~!

양준혁 : 어ㅡ예~

배기완: 쐐기폽니다![21]

이병규~

양준혁 : 아~ 이게 넘어가네여?

배기완: 어제는 투런 두 개, 오늘은 쓰리런...

가장 최악의 해설로 꼽히는 2011년 5월 5일 두산 vs LG 전 중[22]



파일:양준혁해설.jpg

SBS ESPN 야구해설위원 시절[23]
2011 시즌부터 SBS ESPN에서 야구 해설을 맡게 된다는 소식이 나왔다. 지도자의 길로 가게 될 거라는 생각과는 다른 의외의 행보. 2011년 초 MBC FM 라디오에서 공익 광고를 했는데, 멘트는 훌륭한데 읽는 게 약간 어색함이 느껴져서 아쉽다. 말을 못하는 사람은 아닌데 녹음 시 긴장을 한 듯. 또한 SBS 지상파 야구 중계에도 투입되어 배기완 캐스터와 함께 했었다.

해설가로서의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은 편이다. 초기에는 경험 부족이라는 실드거리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별로 나아지는 게 없어서 문제. 야구팬들 사이에선 첫해인 2011년 SBS ESPN에서, 아니 모든 스포츠 방송 중에서 최악의 해설자로 손꼽혔다. 지상파 중계에 투입되는 배기완 캐스터[24]와의 조합은 최악으로 꼽힌다. 일단 특유의 사투리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해설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으며, 특히 경기 중 침묵이 너무 잦아서 중간중간 캐스터만 떠들고 있을 때가 많았다. 사실은 이때 트위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해설을 들으면서 양준혁의 트위터를 보면 실시간 업데이트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해설가 초기 시절에는 브라이언 코리 선수에게 외국인인데 영리하다는 외국인 차별 발언을 하였다. 의식적으로 한 발언은 아니겠지만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그 뒤로는 그냥 계속 영리하다고만 해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앞으로 조심해야 할 사항.

그 밖에, 양준혁이 삼성 경기 해설을 맡으면 일방적인 편파 해설이 돋보인다. 특히 4월 중순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가 가장 대표적인데, 당시 해설을 듣던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도 편파 해설 좀 하지 마세요라고 했을 정도. 상대방이었던 한화 팬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때문인지 이후로 편파 해설은 좀 완화된 상황. 삼성 경기를 많이 맡지도 않는 편이고… 그런데 예상 외로 롯데 자이언츠에는 친절한 편이었다고...

2013년 5월 13일, 네이버 라디오볼에서 양준혁의 해설에 대해 한 문장으로 잘 축약했다. "아는 건 많은데 말로 설명은 못한다." 그래도 2013년 들어서는 타격 메커니즘이나 투수 메커니즘, 특히 선구안 관련된 부분 등을 잘 풀어내면서 그 부분만큼은 괜찮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경상도 특유의 억양이나 사투리 등은 여전해 호불호가 갈린다. 공교롭게도 대학친구인 신태용도 똑같은 지적을 받는 중이다.[25]


파일:양준혁해설2.jpg

MBC SPORTS+ 야구해설위원
2013 시즌 종료 후, MBC SPORTS+로 이적하게 되었다는 보도가 났다. 덕분에 동시기에 SBS ESPN으로 이적한 정우영 캐스터에 빗디어 정우영-양준혁 트레이드로 비유되기도 했다

그런데 2014년 1월 15일 네이버스포츠 라디오볼 방송에 전화연결된 MBC 스포츠+ 이석재 PD는 아직 양준혁의 해설위원 영입이 결정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검토 중이고 회의 중이다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후 한참 동안 소식이 없다가 4월 8일부터 베이스볼 투나잇에 출연하고 있으며, 5월 18일 SK vs 한화 경기부터 해설에 투입되었다. 경기 중에 차명석 위원에게 .455의 타율을 기록했다는 것을 자막으로 띄워주면서, PD가 차위원 디스를 하기도 했다. 또한 예전 한밭야구장 이야기를 하니, 자료화면 나오니 '말만 하면 화면이 나온다'며 감탄했다.

사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양준혁 해설이지만 호평을 받은 적도 있다. 2013년 10월 5일, LG 트윈스가 두산 베어스를 꺾고 극적으로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을 따게 되자 박용택, 이동현, 이병규등 2002년 한국 시리즈를 겪은 고참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는데 이를 보고 양준혁이 본인도 울먹거리면서(!) "LG 선수들 오늘은 울어도 됩니다. 정말...얼마나 서러운 세월이었습니까."라고 코멘트를 하는데 극적인 승리와 함께 마침내 끊어진 비밀번호 + 동수옹의 은퇴 + 양준혁의 이러한 코멘트를 들은 쥐갤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며 이날만큼은 양신으로 칭송받았다. [26]

2015년 6월 12일 드디어 종범신과 같이 해설한다. 시청한 사람들의 소감은 '하라는 해설은 안 하고' 만담만 했다고. 그리고 2017년 시즌 들어서는 후술하듯 이종범 해설위원 대비 연전연패를 당하는 중.

2017년 6월 27일, MLB 해설에 데뷔했다.# 2017년 10월에는 이승엽의 은퇴 경기에서 해설을 맡기도 했다. 한명재 캐스터와 함께 샤우팅을 한 건 덤.[27]

2018년 들어서 삼성 라이온즈 타자들에게 비 시즌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하라는 대사를 자주 내뱉는다. 팀 선배로써 안타까움이 많이 묻어나는 듯... 삼성 경기 중계 중에도 자주하고, 라디오볼 같은 프로그램에서 다른 패널들이 양준혁의 이 대사를 많이 언급한다. 그 정도로 심각한 삼성의 소총부대화이기도 하다.

해설자로서 편파 중계, 모자란 해설 언어 구사력 등으로 욕을 먹었던 2010년대 초반과는 다르게 해가 거듭될수록 이런 부분들이 개선되며 제법 괜찮은 해설이라는 평을 듣는 중이다. 최근에 들어서는 삼성 경기를 중계할 때 삼성 편을 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걸쭉한 사투리 덕분에 말이 순간 빨라질 땐 알아듣기 어렵다는 점 정도.

하지만 다시 편파 해설이 심해져 듣기가 힘들다. 삼성이 공격할 때는 삼성 야수 이야기만, 삼성이 수비할 때는 삼성 투수 이야기만 하는 해설위원이다. 특유의 사투리까지 더해지면서 듣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3. 양준혁 야구재단[편집]


2011년 6월 13일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양준혁 야구재단이 출범했는데, 재단법인 ‘양준혁 야구재단’은 서울 종로구 부암동 AW 컨벤션센터에서 재단 발대식을 개최했다. 야구 선수가 만든 재단은 2001년 설립돼 야구 유망주들에 해마다 장학금을 주는재단법인 ‘박찬호 장학회’에 이어 양준혁 재단이 두 번째다.

야구 붐을 타고 리틀야구팀도 많이 늘어나는 등 확장세에 있지만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야구는 사실상 정체 상태다. 청소년이 너무 공부에만 얽매이지 않고 야구를 통해 훌륭하게 성장하도록 ‘양준혁 재단’이 힘을 보태겠다.

ㅡ 설립 배경에 대한 2011년 인터뷰[28]


양준혁은 2010년 10월 대전 갑천에서 제1회 양준혁 전국청소년야구대축제를 열어 전국 55개 클럽팀에서 10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양준혁과 배영수, 현재윤 등 전·현직 프로야구 선수들의 지도를 받으며 야구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


4.3.1. 희망더하기 자선야구대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희망더하기 자선야구대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2년 부터 시즌이 끝난 후 절친한 이종범과 팀을 나누어서 매년 12월 마다 자선경기를 펼치고 있다. 입장료 전액은 멘토리 야구단을 포함한 야구 관련 단체에 기부한다고 한다. 취지도 취지지만 그 내용도 그야말로 예능감이 넘치는 덕분에 팬들에게 "올스타전 없애고 양준혁 자선경기로 대체하라"는 호평을 듣고 있다. 특히 2013년 자선경기의 내용은 그야말로 백미. 여담으로 이날 양준혁은 구원등판했다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 잡고 6실점해 자진강판 당했다.

양준혁이 가장 존경하는 사부인 김응용 팔순잔치 때 이순철, 이종범과 함께 타이거즈VS라이온즈 레전드매치 논의를 했고 2020년부터 개최가 유력하면서 자선야구대회는 판이 커질 전망이였는데 하필 코로나19로 인해... 2021년 실제로 열렸다.


4.4.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편집]


2017년 1월 17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로 선임 되었다.


5. 미디어 활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활동 내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여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관련 문서[편집]


[1] 음력으로는 1969년 5월 26일. 본인은 음력으로 계산한다고 한다.[2] 김광석거리로 유명한 방천시장 출신이다.[3] 60회 졸업생이다. 대구상업고등학교는 2003년 10월 15일 일반계로 계열전환 및 교명을 대구상원고등학교로 학칙 변경을 인가 받았다.[4] 경제학과 88학번[5] 선수 시절엔 95kg였으나 은퇴 이후 살이 많이 쪘다. 115kg까지 쪘었다고. 키 역시 188cm이었으나 뭉쳐야 찬다에서 187.5cm로 측정되어 나이로 인해 키가 조금 줄어든 것으로 보였으나 다시 건강검진으로 재측정한 결과 188.7cm로 나오고 믿기지 않은 듯 다시 또 재본 결과 188.8cm로 나왔다. 두 번째 측정 당시는 오전에 기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측정된 것으로 보인다 인체는 수면 기상 직후와 저녁에 키가 2cm 가량 차이 난다. 감스트와 합방도중 감스트의 키와 몸무게 질문에 188에 111키로라고 답했다.[6] 커리어의 절반 이상을 지명타자로 나오며 지명타자로서 가장 많이 출전했다. 다만 30주년 레전드는 외야수로 선발되었다.[7] 데뷔 시즌인 1993년에는 1루수와 지명타자를 겸업하여 출전하였으나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으로 인해 이듬해엔 거의 대부분을 지명타자로 나왔고, 이후 외야수로 전향을 하였다가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난 2004년에 다시 1루수를 맡기도 하였다. 데뷔 포지션이지만 실질적으로 2-3년 정도 주전으로 뛰었고, 통산 300경기 정도 출전하였다.[8] 프로야구 역사상 초유의 지명 거부 후 상무 야구단 입대로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O는 아무런 제제를 가하지 않았고 어물쩡 넘어가버렸다. 결국 쌍방울만 억울하게 지명권을 날린 사례. 쌍방울에 입단했다면 김기태와 쌍포를 이뤘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야구에 만약은 없으니... 이후 쌍방울이 IMF 사태로 인해 모기업이 직격탄을 맞아서 구단까지 해체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양준혁의 운명을 바꿔놓은 셈이다.[9] 상무에서 6개월 복무 후 방위병 전환하면서 다음해 드래프트에 다시 나와서 삼성의 1차 지명을 받았다. 이 때문에 삼성과의 밀약설이 퍼졌고 양준혁도 은퇴 후에 이를 인정했다.[10] 짧은 기간이었지만 타격왕 타이틀을 거머쥐며 타이틀홀더로 팀 프랜차이즈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11] 1년만 상무에서 복무하고, 남은 1년은 방위병으로 복무했다.[12] 연예계 소속사. 방송인 김성주와 개그맨 정성호, 해설위원 및 방송인 최준석 등이 소속되어 있다.[13] 개인 유튜브 소속사[14] 야구의 기록 계산법 항목 참조. wRC+는 비율기록이고, WAR은 누적기록이다.[15] wRC+ 200은 이승엽이나 이대호, [16] 이 말은 나중에 '타격기계' 김현수를 상대로도 나왔다.[17] 2002년 겪은 슬럼프 후 2003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18]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도 내야 땅볼로 아웃되었지만 그때도 혼신의 질주를 보여주며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삼성 팬들은 이승엽이 은퇴식까지 홈런을 치고 떠났듯 양준혁도 은퇴식까지 본인다웠다는 평이 많다.[19] 단 반주는 따로 있다[20] 야구글러브 한 개 사지 못할 정도로 집안이 어려워 야구를 못할 뻔 했으나 양일환이 하나 구해줘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삼성을 선택한 데에는 양일환이 삼성 선수였던 부분이 크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21] '쓰레기폽니다'로 들려 양준혁의 어-예만큼 유명하다.[22] 사실 이 쓰리런 당시 이병규 본인도 이 타구에 기대하지 않았는지 뛰지도 않고 실망한 것으로 보아 해설진들 또한 홈런으로 생각하지 않은 듯. 실제로 타격음도 "틱"하면서 좋지 못했다.[23] 배기완 SBS 아나운서와 함께한 무등 야구장에서 생중계된 SBS '2011 프로야구 삼성 VS KIA 개막전'[24]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그 유명한 '기아 우승'을 외친 장본인이다. 믿거배[25] 그나마 신태용은 풍부한 지도자 경험을 바탕으로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과 설명을 해주는 부분은 괜찮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양준혁은 그 부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26] LG 트윈스 시절 주장도 하면서 커리어하이를 찍었던 일도 있고, 이 날의 해설로 인해서 양준혁은 삼성 출신 선수로서는 매우 드물게 LG 팬들 사이에서 사랑받는 선수이기도 하다.[27]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승엽이 홈런을 칠 때의 반응이 마치 관중에 빙의한 느낌이다.[28]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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