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카이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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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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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특임행정위원
성명
양카이후이(楊開慧)
아명
양룬후이(楊潤慧)

운금(雲錦)
한국 한자음
양개혜
영문
Yang Kaihui
출생
1901년 11월 6일 청나라 후난성 창사부 창사현 반장 촌락
사망
1930년 11월 14일 중화민국 후난성 창사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1. 개요
2. 생애
2.1. 총명한 아가씨, 아버지의 제자와 결혼하다
2.2. 공산당에 뛰어들다
2.3. 최후
3. 세 편의 수필
4. 60년 후에 발견된 그녀의 시
5. 평가
6.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마오쩌둥의 2번째 부인이자 중국공산당의 특임행정위원. 마오쩌둥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았고 남편과 함께 공산주의 투쟁을 하다가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어 1930년 11월 14일 처형되었다.


2. 생애[편집]



2.1. 총명한 아가씨, 아버지의 제자와 결혼하다[편집]


양카이후이는 1901년 11월 6일 후난성 창사현의 작은 촌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양창지(楊昌濟)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좌익 지식인이었는데, 그녀가 태어났을 때 영국으로 유학가 있었다. 그녀의 본래 이름은 양룬후이(楊潤慧, 양윤혜)였지만 아버지에 의해 양카이후이로 변경되었다. '카이후이(開慧, 개혜)'의 의미는 "지혜를 열다"라는 뜻으로, 양창지는 딸이 자신처럼 서구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여 신지식인으로 성장하길 희망했다.

1908년, 양창지는 외국에서 딸을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따라 양카이후이의 어머니는 창사 보통학교에 딸을 입학시켰다. 이때까지 이 학교에서 여학생을 들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양카이후이는 유일한 여학생이었으며 학우들 중에서 제일 어렸다. 그녀는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상하이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1911년, 양카이후이는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20리 떨어진 여고로 전학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산업 교육을 받았으며, 그녀는 고등 교육을 이수했다.

1913년 귀국한 양창지는 창사의 후난 제1사범학교 윤리학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중국을 구하기 위한 개혁을 모색하는 토론을 벌였다. 이때 양카이후이는 한쪽 구석에 앉아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없이 밝히곤 했다. 또한 마오쩌둥도 이시기 양창지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며 양카이후이와 종종 대면했다.

그러다가 1918년 6월, 양창지가 베이핑 대학 교수로 고용되면서, 양카이후이는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이사갔다. 그리고 1918년 9월, 마오쩌둥이 후난성에서 뜻을 함께한 동지들과 함께 베이징에 왔다. 그는 같은 후난성 출신인 양창지의 추천을 받고 베이징 대학 도서관에서 조교로 일했다. 마오쩌둥은 양창지를 스승으로 모시며 그의 집에 투숙해 가르침을 받았다. 이 시기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의 미모[1]와 지성을 흠모했다. 그는 양카이후이와 자주 대화를 나누며 중국을 서구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하고 인민을 구제하겠다는 자신의 야망을 솔직하게 밝혔고, 양카이후이는 어느새 마오쩌둥에게 홀딱 빠져 그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다른 후난성 출신 학생들과 함께 비좁은 임대 숙박 시설에 살고 있었고 그녀와 결혼식을 치를 자금이 없어 쉽사리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던 1920년 1월, 양창지가 사망했다. 양카이후이와 그녀의 어머니는 양창지의 유골과 함께 창사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버지를 장사지낸 뒤 푸샹 여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양카이후이는 학교 규칙을 번번이 위반하고 종종 학생 운동을 이끌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

한편,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가서 처음으로 공산주의 단체에 가담했고 그에게 호의적인 장교들에 의해 후난성을 지배하던 장징야오가 축출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1920년 7월에 창사로 가서 문화 서점 클럽을 설립했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의 서점 지금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자 친척과 친구들에게서 돈을 빌린 후 이를 마오쩌둥에게 전해줬다. 마오쩌둥은 그녀의 지원에 힘입어 후난성에서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발돋움했고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후원을 얻어냈다. 이리하여 자금이 풍족해진 마오쩌둥은 1920년 말에 양카이후이와 결혼했다.


2.2. 공산당에 뛰어들다[편집]


양카이후이는 1920년 하반기에 중국 사회주의 청년 동맹에 가입했다. 그 후 1921년 여름 상하이 공산당 제1차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마오쩌둥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1922년 초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2] 1923년 4월, 마오쩌둥은 후난성 중국공산당 위원회를 구성하고 지구당위원회의 비서관을 지냈으며, 양카이후이는 지역위원회의 기밀 유지 및 교통 연락 업무를 담당하면서 마오쩌둥을 보좌했다. 이듬해, 양카이후이는 두 아들 마오안잉마오안칭과 함께 상하이에서 남편과 합류하여 면직물 공장에서 야간 학교를 조직했다.

1925년,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과 함께 사오산으로 가서 농민 운동을 이끌었다. 마오쩌둥은 농촌 야간학교를 설립하고 그곳의 교사로 일했으며, 양카이후이는 남편을 보필하고 자식들을 길렀으며 남편이 동지들에게 연락하는 걸 돕고 쓸만한 정보를 입수해 남편에게 전해주는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다. 같은 해 12월, 그녀는 자료 수집,원고 준비, 연락 업무 수행을 위해 남편과 함께 광저우로 옮겼고 그곳에서도 대외활동을 하느라 바쁜 남편 대신 가정을 돌봤다.

그런데 1927년 4월,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당의 지령을 받고 후난성에서 추수폭동을 준비했다. 그해 8월 말,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에게 세 아들들을 데리고 친척의 집에 가라고 지시했다. 이때 양카이후이는 남편과 헤어지기 직전에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사서 남편에게 선물로 줬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후로 다시는 재회하지 못했다.


2.3. 최후[편집]


양카이후이는 추수폭동 실패 후 핑장에서 지하혁명조직을 구성하고 창사, 핑장 및 샹인 현에서 국민당을 상대로 투쟁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그녀는 사촌인 양카이밍에게 "내가 갑자기 죽게 될 지도 모르니 자식들과 어머니를 잘 돌봐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마오쩌둥은 3년 동안 그녀에게 단 한번도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28년에 여군으로서 무장 투쟁을 함께하고 있던 동지 허쯔전과 결혼했다. 오히려 시동생인 마오쩌민이 그녀를 부양하기 위한 생활비를 보내주었다.[3]

그러던 1930년, 후난성 정부주석으로 부임한 허젠펑더화이가 거느린 홍군이 7월에 창사 폭동을 일으키자 8월 5일에 창사를 탈환하고 공산당 간부들을 대거 체포했다. 이때 양카이후이는 현상금 1000위안이 자신에게 걸리자 지하에 숨어 적의 추적을 몇차례 피했지만 10월 24일에 그녀의 어머니와 아이들이 있는 창사로 몰래 들어가다가 체포되었다.

간부들은 그녀에게 갖은 고문을 가하면서 아들 마오안잉까지 체포한 사실을 들이대며 공개적으로 마오쩌둥과 이혼하고 중국 공산당을 탈퇴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너희들이 원한다면 나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너희는 내 입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라며 끝까지 거부했다. 북경대 교수 출신으로 양카이후이의 부친 양창지의 동료였던 국민당 고관(감찰원장)인 차이위안페이는 허젠에게 "그녀를 살려주라"고 권고했으나, 허젠은 처형을 강행하여 양카이후이는 11월 14일 총살되었다.[4]

사형집행인들은 망자의 원한이 자신들에게 미치지 않기 위해서 양카이후이의 신발을 벗어 멀리 던져버렸다. 군인들이 막사로 돌아와 밥을 먹고 있는데 사형집행을 구경하고 있던 주민 한명이 와서 양카이후이가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고 전해주었다. 이에 군인들은 다시 형장으로 돌아가 양카이후이를 확인해보았는데 양카이후이는 숨이 끊어지지 않고 땅바닥을 손으로 긁으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야 양카이후이의 숨은 완전히 끊어졌고 그날 밤에 친지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매장하였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와 정식으로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해방구에서 당의 승인을 받고 허쯔전과 재혼했다. 하지만 양카이후이가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눈물을 흘리며 양카이후이의 유족에게 "나의 백개의 목숨으로도 바꿀수 없다(百身莫赎)"며 조전을 보냈다고 한다.

1937년 여름, 마오쩌둥은 아그네스 스메들리와 인터뷰하던 도중에 양카이후이를 기리며 시를 낭송했다. 그리고 1957년 봄, 1933년 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했다가 처형당한 공산당원 류직순(柳直荀)의 아내 리숙일(李淑一)이 자신에게 남편을 기리는 시를 보내자, 마오쩌둥은 류직순과 더불어 양카이후이를 기리는 답시를 보냈다. 이 시는 곧 출판되어 중국 인민들에게 배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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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러운 백양나무를 잃었고 그대도 버드나무를 잃었지만,(我失骄杨君失柳)[5]

두 버드나무는 구천으로 가볍게 날아가리라.(杨柳轻扬直上重霄九)

오강[6]

에게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라,(问讯吴刚何所有)

오강이 그들에게 계화주를 대접하고 있으리라(吴刚捧出桂花酒)

적막했던 항아[7]

가 큰 소매를 펼치니,(寂寞嫦娥舒广袖)

천리 하늘에 뻗어나가 영혼을 위해 춤추는구나.(万里长空且为忠魂舞)

언론인이 급히 호랑이를 잡았음을 알리니(忽报人间曾伏虎)

눈물이 흘려내려와 큰 비가 되어 그릇에 떨어지는구나.(泪飞顿作倾盆雨)


이후로도 마오쩌둥은 여러 여인과 관계가 있지만, 양카이후이는 마오 평생 그의 공식 아내로서 대접받았으며, 마지막 부인인 장칭도 양카이후이의 위상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3. 세 편의 수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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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양카이후이가 푸샹 잡지에 실은 3편의 수필 스캔본

2012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 암 통계센터의 수석 통계분석가인 리중쩌(李忠泽)는 예일대학 도서관에서 양카이후이가 1921년에 출간한 3편의 짧은 수필을 발견하고 양카이후이에 관한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발표했다. 그보다 3년전, 리중쩌는 예일대 신학교가 푸샹 여학교에 관한 두 가지 역사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확인한 결과 1921년 6월에 출판된 푸샹 잡지 중 하나를 발견했다. 예일대학교는 1900년대 초반에 예일대학교 관리인이었던 장웨이가 푸샹 여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고 예일대 학생들이 푸샹 여학생과 결혼하는 등 푸샹 여학교와 긴밀한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21년 6월에 출판된 푸샹 잡지 중 한 권이 예일대 도서관에 보관될 수 있었다. 그는 즉각 예일대 도서관의 허가를 받고 잡지의 페이지별로 스캔한 뒤 이를 연구한 후 세상에 알렸다.

양카이후이의 첫번째 수필은 "치모공서(致某公书)"라는 제목이 달렸다. 이 수필은 아버지 양창지의 '친애하는 친구'를 대상으로 작성되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삶의 의미, 특히 양심에 대한 이해를 상세히 서술하고 당시의 중국 남북 정부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한 후 어른들이 평화를 위해서 행동을 하는 건지 의심했다. 그녀는 노인들이 조언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자신의 힘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또한 그녀는 양심의 힘이 태양만큼 크며 태양의 빛처럼 밝다고 주장했으며 사람들의 활동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양심의 빛"이라고 밝혔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양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며 어둠을 쓸어버리고 세상을 빛으로 가득 채울 책임이 있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수필 마지막에서, 양카이후이는 어른들에게 아버지 양창지의 저작 "상하이에게 바치는 책"에서 "죽어가는 슬픈 말"을 고려하여 군대, 관료 및 정치인들과 떨어져서 "자립을 달성하라고 요청했다. 불행히도 이 수필에는 그녀가 줄곧 언급하는 노인의 이름이 처음부터 끝까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리중쩌는 이 수필에서 양카이후이가 사용한 마지막 단어가 그의 아버지 양창지가 장쉬자오(Zhang Shizhao)에게 한 말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카이후이의 두번째 수필인 <수감록(随感录)>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정적이고 무의미한 삶을 사는 사람은 동물과 마찬가지다.


이 문구는 동적인 것이 인간의 본질과 미덕임을 의미한다. 그녀는 당시 학교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는 "많은 숙제에 치이느라 활동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몸이 건강할 때 마음이 강해지고 에너지가 풍부하며, 정력적인 사람들은 무식하지 않다고 믿었으며 몸이 약할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대해 리중쩌는 "이 구절은 오늘날의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현재 많은 학교가 공부에 몰두하느라 스포츠를 소홀히하고 있는 세태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시 19살밖에 안됐던 양카이후이의 높은 문학수준과 깊은 통찰력을 높이 평가했다.

양카이후이의 세번째 수필은 <선부사략(先父事略)>이다. 이 수필은 1920년 1월에서 1921년 6월 사이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수필에 따르면, 양창지는 어렸을 때 현명하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시와 문학에서 뛰어났다고 한다. 양창지는 8살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공부했으나 14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낙관적인 성품이었기 때문에 부모를 잃은 뒤에도 부지런히 공부했고 마침내 19세에 과거에 합격했다. 양창지는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 자매를 아낌없이 사랑했으며 아내와 시누이를 존중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행복을 가족과 공유하고 온 가족과 시국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양창지는 그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32살때 그의 형제와 다른 사람의 얼굴이 현실 문제 때문에 낙담해있는 것을 보고 유학을 결심했다. 수필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여행을 할 수 없다면, 나의 영적인 삶은 죽은 것이다."


10년 후인 1913년, 독일에서 귀국한 그는 친구들로부터 교육하기 좋은 조건이 갖춰진 베이징으로 가자는 권유를 받았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창사에서 5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는 삶을 살기로 맹세했네."


리중쩌는 이러한 내용은 그때까지 양창지의 삶에 대한 연구에선 거론되지 않았기에, 이 수필의 의미는 크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수필은 양창지의 삶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에 오류가 몇가지 있음을 분명히 밝혀준다고 주장했다. 그 전엔 양창지의 아버지가 먼저 죽고 어머니가 나중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선부사략>에서는 어머니가 일찍 죽은 뒤 아버지가 14살때 사망한 것으로 나와있다. 또한 여러 자료에서는 양창지가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했다고 기술되었지만, <선부사략>에서는 애버딘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4. 60년 후에 발견된 그녀의 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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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후난성 문물국은 양카이후이의 옛 거처 지붕 밑에서 그녀가 남긴 글을 발견했다. 이 글은 1928년 10월 핑장에 있던 그녀가 작성 후 지붕 밑에 숨긴 것으로, 60여 년이 흐른 후 그녀의 옛 거처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그녀의 글엔 "우감(偶感: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이란 제목의 시가 실려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흐리고 삭풍이 일어나니, 짙은 추위가 살과 뼈대를 떨게 한다. (天阴起朔风,浓寒入肌骨.)

생각은 무성하고 행인은 멀어지니, 평평한 물결이 갑자기 일어나 엿본다.(念兹远行人,平波突起伏.)

발병이 나 이미 고칠 수 없는가, 겨울옷을 준비할 수 없는가? (足疾已否痊,寒衣是否备?)

외로운 잠을 누가 사랑으로 돌봐주며, 누가 쓸쓸한 고통을 돌봐줄까? (孤眠谁爱护,是否亦凄苦?)

서신은 오지 않고, 아무에게도 물어보고 싶지 않다.(书信不可通,欲问无人语.)

이 한은 날아가는 두쌍의 새에겐 없으니, 날아서 무수한 사람을 만나거라.(恨无双飞翮,飞去见兹人.)

무수한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비통함과 원망은 끝이 없다.(兹人不得见,惆怅无已时.)

집안에 빼어난 누이가 있으니, 나를 위해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준다.(家有一秀妹,前兹为我亲。)

베이징에서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걸상에서 새벽까지 어둠을 지샌다.(忆昔自京归,同榻共晨昏.)

남편이 간지 삼오일이니, (기다리다) 눈사람이 되겠구나. (偶去三五日,适有冰人至.)

미친듯이 날뛰며 돌아오기를 바라니, 초조함이 눈썹을 불태우는 것 같다.(狂跳盼我归,急切如燃眉.)

가까운 미래에 후난성에 들어가는 행복이 찾아온다면, 나는 웨저우로 가리라.(迩后入福湘,伊自往岳州.)

높은 산에서 셀 수 없는 세월을 기다렸지만, 그는 아직도 창사에 오지 않는다.(住岳不数月,仍复归长沙.)

그에 대한 고통스런 생각을 끊으려 하지만, 남편의 얼굴이 되풀이 떠오른다.(急切思若人,至复得相亲.)

여러시간 동안 옛일을 생각하니, 역력한 흔적이 내 마음에 있다.(当时各陈迹,历历在吾心.)

도시의 정세는 예측할 수 없으며, 인간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风云城莫测,人情亦复如.)

내 마음의 상처를 추적하니, 오장육부가 서로 바싹 졸이는구나.(追索伤我怀,五内相煎熬.)

원하건대 장군의 굳건한 의지가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게 하소서.(愿将金石意,感尔故人心.)

우정은 귀중하지만, 인륜에 비교할 수 없다. (朋情至可贵,无可相比伦)

상하이에는 누이 하나가 있으니, 그녀를 생각할수록 내 마음이 아프다.(沪有一纯姊,思伊伤我怀)

나는 내 진심을 알 수 있고, 내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분별할 수 있다.(能识我衷肠,能别我贤愚)

도시에 친구와 누이가 있으나, 내가 살 곳을 알지는 못하겠다.(城中有友妹,不知伊处居.)

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으며, 정도 영원히 함께하리라.(爱我尚无变,情怀相永依.)

좋은 친구들은 언제나 똑같으니, 굳이 셀 필요는 없다.(良朋尽如此,数亦何聊.)

멀리 떨어진 그 이를 생각하며 여러 좋은 친구와 화목해야지.(念我远方人,复及数良朋.)

마음은 오랫동안 우울한데, 다시 만날 날은 언제려나.(心怀长郁郁,何日重相逢.)


양카이후이의 시 전체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평이하고 단순하며, 작자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밝히고 있다. 작자는 남편 마오쩌둥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짙게 배여있는 가운데 백색테러에 시달리고 군벌에게 탄압받는 등 여러모로 암울한 현실에서도 끝까지 마오쩌둥을 사랑하며 그와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다지고 있다.


5.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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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카이후이 기념관에 세워진 동상

양카이후이는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마오쩌둥을 충실하게 보좌한 현숙한 부인이자 적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마오쩌둥을 따른 위대한 순교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의 고향마을은 '카이후이진(開慧鎭)'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고 양카이후이 기념관을 세웠으며 그녀의 생가와 무덤을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다. 2001년, 국가 인민회의의 부회장 펑페이윈(彭佩云)은 양카이후이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양카이후이가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사명감을 품고 투쟁한 영웅이었으며 숭고한 최후를 맞이하여 공산주의의 무결성을 입증한 순교자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2009년 9월 10일, 양카이후이는 "신 중국 창립에 탁월한 공헌을 한 100명의 영웅적 모델 인물"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중국 당국의 그녀에 대한 찬사는 물론 그녀의 남편이자 국부인 마오쩌둥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미화된 부분을 걷어내더라도, 양카이후이가 당대 중국의 걸출한 여성 지식인임엔 분명하다. 그녀가 남긴 시와 수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가 갖춘 지식과 문학적 역량은 훌륭했다. 그녀는 아버지 양창지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중국인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사명감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공산당에 가입한 이래 수동적으로 마오쩌둥을 따르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농민들을 가르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고 아이들을 잘 키웠으며 자신이 굳게 믿는 공산 혁명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녀는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마오쩌둥 때문에 짧은 인생을 마쳤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을 위해 자금을 지원해주고 대외 활동을 하느라 바쁜 그를 최선을 다해 보필했다. 그녀는 신여성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인 유교관에 따른 일부종사를 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녀와 헤어진 뒤 1년도 안되어 공식 이혼도 하지 않고 허쯔전과 재혼했다.[8] 다만 그 수많은 신여성중에서 양카이후이가 알려진 것은 마오쩌둥의 첫아내였기 때문이었고, 마오가 집권한 후 양카이후이는 국부 마오의 아내로서 공식 추모되었으며, 마지막 아내이자 사인방의 일원인 장칭보다도 더 높이 대접받았다.

그녀와 함께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었던 큰아들 마오안잉은 공산당원들이 현지 관원들을 매수하여 빼내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6.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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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카이후이의 친구는 훗날 그녀가 "키가 작고 둥근 얼굴, 깊은 눈과 옅은 흰 피부"를 갖춘 미녀였다고 회상했다.[2] 참고로 그녀는 허멍슝의 아내 무백영(繆伯英)의 뒤를 이은 중국 공산당의 2번째 여성 당원이었다.[3] 마오쩌둥도 양카이후이의 안위에 관심을 가지고 마오쩌민에게 양카이후이의 연락처를 묻기도 하긴 했다.[4] 이후 대부분의 상계군벌(후난성 출신 군벌)들은 국공내전 말기 전세가 기울자 동향인인 마오쩌둥에게 투항했으나, 허젠은 이렇게 마오쩌둥의 부인을 처형했기 때문에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간다.[5] 양과 류는 각각 백양나무와 버드나무라는 뜻이면서 두 사람의 성씨로,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6] 옥황상제에게 죄를 지어 달에 귀양가서 지금까지 도끼로 계수나무를 베고 있다는 중국 전설의 인물.[7] 남편 예(羿)를 배신하고 불사약을 훔쳐먹었다가 옥황상제에 의해 달로 유배된 중국 전설의 인물[8] 물론 그당시 중국은 봉건제가 폐지된지 얼마 안되어 현재와 같은 결혼관은 희미했다. 쑨원이나 장제스만 해도 수많은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장제스는 서양에서 교육받은 쑹메이링과 정략결혼하면서 일부일처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