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탄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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两弹一星
두개의 폭탄과 하나의 인공위성

1. 개요
2. 핵개발
3. ICBM 개발
4. 현재 중국의 핵무장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중국의 핵개발과 장거리미사일 개발을 중국에서 일컫는 말이다. 1950년대 중반 중소결렬이후 기존의 적이였던 미국뿐만 아니라 그동안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모셨던 소련과의 사이도 악화되자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과 유도탄을 개발하여 안보를 담보하려고 했으며,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차례차례로 원자폭탄, 수소폭탄, ICBM을 개발하여 핵클럽과 ICBM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양탄(两弹)은 바로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말하며 일성(一星)은 인공위성(동방홍 위성)을 가리킨다. 중국의 인공위성개발도 실제 목적은 ICBM을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양탄일성에 성공함으로써 소련을 의식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국제적으로 독자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대만을 제치고 UN 상임이사국이 되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2. 핵개발[편집]


중국의 핵개발은 1955년 첸쉐썬 박사와 함께 매카시즘 분위기의 미국에서 코로 콜라를 시식하던 100여명의 과학자들[1]이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첸쉐썬 박사는 상하이자오퉁대학 출신으로 MIT에서 석사를, 칼텍에서 박사를 받은 천재 과학자로 수학과 항공 공학에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MIT 교수를 거쳐 칼텍 교수로 재직하던 중, 미국의 미사일 개발에 참여하였는데, 1950년 매카시즘 시기에 중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5년간 감금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에서 잡힌 미군 포로들과 교환되어 중국에 돌아왔다.

처음에 중국은 소련에게 기술을 이전받아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으나, 소련은 거액을 챙기고도 중국에 기술을 이전해주는 척만 하고 핵심 기술은 알려주지 않았다.[2] 거기에 중소결렬로 그나마 있었던 소련 기술진들도 1959년 중국에서 철수하여 중국은 자체 기술진이 독자적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1950년대 말이 되자 중국은 해상으로부터 미국에 의해 봉쇄되었고, 소련과 사이가 틀어져서 북쪽으로도 안보의 위협을 되었고 여기에 인도와도 사이가 매우 나빠져서 남북서로 위협을 받게되었다.

이에 첸쉐썬 박사는 귀환한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전공인 유도탄(미사일) 개발 계획뿐만 아니라 핵무기 제조도 감독했다. 다만 첸쉐썬 박사는 핵 과학자가 아니라 기계공학/항공공학 전공이었다보니 그는 총감독만 했을뿐 실제 설계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했다. 첸쉐썬 박사팀은 중소결렬 후 1959년 미사일 독자개발을 시작하여 소련의 R-2의 복제부터 시작했고, 이후 자체 기술을 축적하여 유명한 둥펑(DF) 시리즈 미사일을 개발하게 된다. 한편 핵무기는 1962년부터 개발을 추진했고, 2년만인 1964년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롭누르 지역에서 최초의 핵실험인 596 프로젝트(원자폭탄)를 성공했다. 그리고 3년뒤 1967년에는 미국,소련,영국에 이어 TNT 3.3메가톤 위력의 수소폭탄 개발에도 성공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핵처리 시설의 폭격을 검토했으나,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절에 베트남 방면에서 중국의 전면적인 개입을 부를 수 있는데다가, 오히려 중국이 다시 소련에 접근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결국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배했다

핵실험성공을 알리는 인민일보의 호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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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실험 직후, 세계 최초로 핵폭발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의전투를 했다. 영상에 나타나듯이 간단한 방호구만 착용한 채 그라운드 제로로 돌진하는 기병과 보병들은 대륙의 기상을 보여준다 참가부대가 전원 피폭당해 즉사했다는 도시전설이 있긴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나중에 여기에 참여한 사람 중 상당수가 암에 걸려서 고통속에 죽었겠지만, 적어도 즉사할 정도의 피폭량은 아니다. 중국의 첫번째로 터트린 원자탄은 탄두중량이 1톤 정도로 방사능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3] 그리고 이런 훈련은 방사능의 폐해가 알려지기 전인 핵만능주의의 미친 시대에 미국과 소련도 자주 벌이던 짓거리다.

영국이 핵실험을 성공하고 나서 5년만에 수폭실험을 성공했고 프랑스는 첫 핵실험 이후 8년이 지나서야 수폭실험을 성공했던 걸 감안하면, 중국이 얼마나 인밀레를 울렸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시 중국은 미국-소련과 같은 양대 강국에 덤으로 인도까지 모두 적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기살기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돈도 없고, 기술도 없는 중국의 안보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핵실험이 성공한 직후 김일성이 방중했는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와 회견하던 도중 "핵개발에 도대체 얼마 들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저우언라이가 국가기밀이라 답변에 머뭇거리자 마오쩌둥이 "김일성 동지는 우리와 혈맹인데 비밀이 어딨나. 약 40억달러 들었다네."라고 답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 40억달러면 상상하기 어려운 액수임엔 틀림없다.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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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핵실험을 참관한 뒤 저우언라이에게 전화로 성공을 보고하는 부총참모장 장아이핑 상장. 아이러니하게도 장아이핑 상장은 문화대혁명4인방 집권기 때 첸쉐썬 박사에게 까였다.

3. ICBM 개발[편집]


중국의 ICBM개발은 위의 첸쉐썬 박사의 귀국과 함께 소련과 유도탄 라이센스 협정을 맺으면서 시작된다. 소련은 이미 대륙간 탄도탄급인 R-7을 보유하고 있었고, 중국은 당시 소련의 외교방침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었지만, 전략무기인 R-7을 제공하지는 않고, V2의 단순복제형인 R-1과 이의 사정거리만을 늘린 R-2를 제안했다. 미사일을 포함한 전투기, 구축함, 잠수함에 대한 광범위한 라이센스 계약이 체결되자 소련은 총 1400여명의 기술진을 파견하였고, 이들 중 미사일 전문가는 100여명이었다.

중국은 소련의 설계국을 모방한 여러 "연구원"을 설립하였고, 첸쉐썬 박사는 탄도 미사일만을 담당하는 제5연구원의 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기반기술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술흡수가 매우 미진하였다. 기초적인 기계제작 기술마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장장이들이 무기제작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소련 측은 계약과는 무관한 용접기술이나 공작기계 취급법까지 전수해야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 서기장이 집권하면서 공산주의의 세계혁명론을 수정,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반대했고, 이렇게 중국과 소련의 사이가 점점 나빠짐에 따라서 소련의 기술 전수는 무성의해지고, 특히 핵심 기술에 관련된 문서는 절대로 중국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이가 흔들리던 중국과 소련은 1960년 완전히 결렬되었고, 중국에서 기술개발을 돕던 소련 기술진은 모두 소련으로 돌아갔다. 중국측에 남겨진 것은 첸쉐썬 박사를 비롯해 국공내전 이전에 미국-유럽에서 공부한 석박사급 인재 100여명, 소련에서 수입한 R-2 시제품 및 소련인들이 귀환하면서 미처 파기하지 못한 문건들, 그리고 소련에서 공부를 마쳤거나 혹은 재학중 송환된 젊은 인재들이었다.

첸쉐썬 박사는 한편으로는 미사일 기술 인재들을 기르면서 한편으로는 소련의 기술고문단이 지도하던 복제작업을 독자적으로 감독했다. 첸쉐썬팀은 1960년 11월 내몽골에 위치한 주취안 우주기지에서 R-2 복제형인 둥펑(DF)-1의 발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하지만 약 1000km의 사정거리만을 갖는 DF-1은 전술적인 가치밖에 없었기 때문에, 중국은 좀 더 늘어난 사정거리를 보유한 미사일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번에는 카피할만한 원본을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수히 중국 기술진이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하고 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유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단순 복제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몇년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DF-2는 일본을 사정거리로 두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으나 계속 실패했다. 첸쉐썬 박사는 몇년간 베이징 자택에도 돌아오지 않고 주취안에 상주하면서 미사일 개발을 감독할 정도였다. 5년간의 실패 끝에 DF-2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한 개량형 DF-2A는 1965년 발사에 성공했으며, 여기에 막 개발된 중국의 핵폭탄을 탑재하여 발사하는 실험도 성공하였다. 이 실험 성공으로 첸쉐썬 박사는 일약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특히 "첸박사가 미국에서 연구하면서 얻은 지식은 이미 구식이기 때문에 별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며 첸을 중국으로 추방한 미국 관계자들이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1966년부터 벌어진 문화대혁명 때문에 중국의 여러 연구기관은 타격을 입었고, 제5연구원도 홍위병 직원들이 난동을 벌여서 원장이었던 첸쉐썬이 2주간 물러나고 홍위병이 접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개입하여 홍위병의 접수는 진압되고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여러 차질을 빚기는 했지만, 중국정부는 안보를 위해서 (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홍위병의 습격대상이 될 수 있는 여러 과학자들에게 보디가드를 붙여주었을 정도였다.

첸쉐썬 박사는 DF-2를 개량한 동방홍 로켓을 개발, 동방홍 위성을 띄워서 중국이 스페이스 클럽에 세계 5번째로 가입하게 하는 대업적을 이뤘다. 사실 동방홍 위성은 프로파간다용이었고, 실제로 중국은 모스크바워싱턴 D.C.를 때릴 수 있는 DF-5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첸쉐썬 박사는 4인방을 지지하고, (4인방이 싫어하던) 덩샤오핑 주석 인맥인 제2포병 사령관 장아이핑을 디스하다가 1970년대 후반 4인방이 몰락하자 제5 연구원에서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 때쯤 되면 중국은 첸쉐썬 박사급의 인재들이 여러 명[6]인데다가, 첸쉐썬 박사가 이미 수백여명의 인재들을 길러냈기 때문에, 미사일 개발에 차질을 빚지는 않았으며, 1980년 주취안에서 발사한 ICBM이 태평양 공해에 착지하는 실험을 완료하고 세계에서 세번째로 ICBM클럽에 가입했다. 이 ICBM은 DF-5라는 이름으로 1981년 실전 배치된다.


4. 현재 중국의 핵무장[편집]


지금 중국은 의욕적으로 핵탄두를 늘리고 있다고 한다.

2010년 중국이 공식적으로 보유했다고 천명한 핵탄두 수는 240기이다. 그런데 미국의 연구소들은 240기라는 말을 잘 안믿는듯. 중국이 1960년대부터 돌린 핵처리 시설의 규모로 판단하건데 실제로는 미국과 러시아 수준인 수천기 수준일 수도 있다는 추정을 하고 있다. 운반체로서는 워싱턴 D.C., 뉴욕, 모스크바를 때릴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2000년대 초반까지 20여기 정도였다가 현재는 150여기까지 늘었다. 중국의 대부분 핵미사일은 사정거리 5000km 내의 중거리 탄도탄이다. 그럼 안심해도 되는게 아니라 전략핵이든 전술핵이든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태평양 기지들은 모두 중국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간다.

그동안 일반에 공개한 적 있었던 세계 최대의 지하 핵무기 제조공장을 5차 북핵 이후에 다시 공개했다. #

중국은 핵보유국 중에 유일하게 "적국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한, 중국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적이 있다. 그러나 최근 국방백서에서는 은근 슬쩍 그 조항을 빼버렸다.관련 기사

5. 기타[편집]


  • 북한의 핵개발 및 ICBM 개발은 사실 중국의 양탄일성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7]
  • 1960년대 중국(당시에는 중공이라고 부름) 이 핵개발을 하자, 한국은 이 소식을 듣고 정부가 규탄대회를 개최하는 등 중공에 대한 시위를 벌었다.#
  • 중국이 핵개발에 성공하자 대만에서는 충격을 받고 구상만 해두고 있었던 핵개발을 본격적으로 (비밀리에) 진행하지만 1988년에 핵개발이 폭로되면서 계획이 전면 중단되었다. 신주 계획 참조.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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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대부분은 국민정부 시절 유학 보내준 중화민국 국비장학생 출신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이들은 모두 미국 정부의 사찰대상이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국민당이 지배하는 대만 대신 공산당이 지배하는 대륙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이들 중 최고의 커리어였던 MIT-칼텍 교수인 첸쉐썬 박사의 경우는 아예 장인이 장개석의 고문으로서 국민당에서 활동했던 사람이었는데도 빨갱이 소리를 듣고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고, 이 원한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2] 더구나 소련은 중국에 핵무기 기술을 전수해 주는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곡물과 육류 같은 식량들을 가져갔는데, 그런 사정 때문에 중국은 대약진운동 당시에 국민들한테 나눠줄 식량이 모자라 기근이 발생했다. 사실 대약진운동은 중공의 장렬한 자폭이었지만, 관료들은 통계를 조작해 아사자가 발생하는 현실을 대풍작이 든 현실로 바꿔놓았고, 자국에서 천만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식량을 수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3] 사실 원자탄 1톤 중량이면 수백kt의 화력을 낼 수 있으며 실제 BGM-109 토마호크는 450kg급 통상탄두를 사용하지만, 200kt급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다. B41의 경우 약 5톤인데 화력은 mt(메가톤) 단위이다. 반면 팻 맨의 경우 역시 약 5톤인데 화력은 고작(?) 21kt. 거의 비슷한 두개의 핵무기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이, 핵무기의 위력은 중량이 아니라 핵무기 내부에 탑재된 핵물질의 에너지 전환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지가 중요하다.[4] 비교해볼 수 있는 액수가 한일 수교협상 때 한국이 일본에게 받아낸 돈이 5억달러에 불과했는데, 그것만 해도 일본의 외환보유고의 반이 넘었다고 한다. 다만 그 돈은 10년에 걸친 분할 지분이었고, 그 중 차관 2억 달러는 한국에서 35%라는 비싼 이자를 쳐서 갚았다(...)http://doitnow61.tistory.com/637 사실 일본은 이승만 정부 시절에 벌인 한일협정 교섭 당시에 한국한테 단 한 푼의 돈도 안 주려고 했고 오히려 일제 식민지 시절에 일본이 놓고 간 재산을 한국인들이 차지했으니 그 재산의 비용을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한테 모두 배상하라고 억지를 부려서 분노한 한국 정부가 교섭 중단을 선언한 일도 있었다. 그나마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한테 압력을 가해서 박정희 정부 시절에 5억 달러나마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이지, 무슨 일본 정부가 한국을 좋아하거나 양심적이어서 준 것이 결코 아니었다.[5] 당시 미국 달러의 구매력은 미국 국내 기준으로 지금의 8~9배 가량이고, 당시 중국인들의 1인당 명목소득은 미국의 1/(30~40) 가량이었다. 따라서 「명목액수 40억 × 원달러 환율 1000 × 미국내 달러 인플레이션 8 × (역-빅맥지수(?)식 중간재수입 교환가치 확보 필요 노동시간) 30 × (국민에게서 국가총동원령 혈세로 뽑아낼수 있는 최대 잠재치인 '역'엥겔지수 미중간 배율 75%p(미국)/25%p(중국) 가량 ) 3~4 ÷ (한중 인구배수) 30」 으로 환산하면, 노무현 이후 시대 한국인 5천만명 체감 국가예산으로 100조~200조원어치 가치 정도였다고 추산해볼수 있겠다. 1959~1964 또는 1955~1967년 5~12년간 매년 융통가능한 국가예산의 최소 5% 이상을 핵개발에 전용한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토건부처나 교육부 국방부 예산과 비교해보자면 과연 방사능을 뒤집어쓰는 인밀레 외에 아주 엄청난 무리를 들이고 나라살림에 허리가 휘청하는 비율은 아니다. 하지만 진짜 알짜배기인 SSBN 원잠 완전 국산화가 출동하면 어떨까[6] 중국 우주개발 4걸이라고 불리는 투서우어 박사, 런신민 박사, 황웨이루 박사, 량서우반 박사는 모두 중화민국 시절 미국에 유학한 인재들이며 첸쉐썬 박사 보다 5세 정도 어린 인물들이었다.[7] 중국이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를 개발하여 재래식 전력을 줄여서 남는 예산을 경제 발전에 쏟아 경제 부흥을 이룬 과정을 북한이 그대로 따라한다는 분석은 이미 정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