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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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승의 수상 및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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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승
梁熙勝|Yang hee-seung


파일:/image/143/2010/01/19/100118s2.jpg

출생
1974년 3월 1일 (50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신체
195cm, 83kg
학력
광주서석초등학교 (졸업)
광주충장중학교 (졸업)
광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 / 학사)
병역
전시근로역[1]
포지션
스몰 포워드
프로입단
1997년 창원 LG 세이커스 입단
소속팀
창원 LG 세이커스 (1997~2000)
대전 현대 걸리버스/전주 KCC 이지스 (2000~2002)
안양 SBS 스타즈/KT&G 카이츠 (2002~2007)
부산 KTF 매직윙스 (2007~2009)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2010~2013)
국가대표 경력
올림픽 1회(1996[2])
FIBA 아시아선수권 3회(1997,2003,2005)
수상경력
FIBA 아시아선수권 우승 1회(1997) / 준우승 1회(2003)
등번호
11[3], 12[4], 71[5]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선수 시절
3. 은퇴 후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국의 前 농구 선수. 2017년 현재 펄하우스스토리 이사.


2. 선수 시절[편집]


파일:LG 양희승 선수.jpg

광주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진학하면서 농구대잔치의 최전성기에 고려대의 주축 포워드로 활약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당시 고려대의 막강 라인업의 주전으로 외곽 슈팅력을 바탕으로 한 플레이가 인상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고려대는 끝내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농구대잔치 PO에서 4강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대학 시절의 활약 때문에 1997년에 창단한 LG 농구단에 계약금 4억 5천만 원을 받고 LG 세이커스의 창단멤버로 입단하면서 대학 시절의 명성을 보상 받았다.

그런데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부상이었다. 일단 프로 첫 번째 시즌에 연봉 협상 문제[6]로 팀과 갈등을 빚으면서 훈련량이 줄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연봉 협상을 끝내고 팀에 복귀해서 얼마 뛰지 못하고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는 중상을 입으며 시즌아웃된 것. 이 때 부상은 심각해서 거진 두 시즌을 다 날리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1998-99 시즌 후반에 복귀하면서 재기에 성공했고, 1999-2000 시즌에 45경기 전 경기 출전하며 평균 13점을 넣으면서 비로소 완벽하게 부상을 이겨내는데 성공했다.

마침 토털 바스켓볼을 표방하며 전 포지션의 장신화를 추구하던 현대의 신선우 감독과 새롭게 감독에 부임해 팀을 갈아엎던 LG의 김태환 감독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양희승은 조성원과 맞트레이드되면서 현대로 이적하게 되었다. 현대-KCC에서 양희승은 준수한 활약을 보이면서 특급은 아니어도 정상급 포워드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두 시즌을 뛴 후, 2억 6천만 원의 연봉을 받고 FA 계약을 맺으며 SBS로 이적했다.

SBS에서는 김성철과 함께 팀의 쌍포로 활약해 나쁘지 않은 활약을 이어갔다. 평균 15점 가량은 꾸준하게 기록해 FA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을 수 있는 활약을 보여줬다. 팀도 꾸준히 전력이 강해지고 2004-05 시즌에는 단테 존스의 합류와 함께 15연승을 기록해 주는 등 정말 잘 나갔다. 그렇지만 4강에서 전주 KCC의 조성원을 막지못해 결국 챔프전 진출에는 실패했고 준수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우승 반지와는 연을 맺지 못했다.

2006-07 시즌 종료 시점에 평균 15.8점을 넣으면서 팀의 주포로서 활약하고 다시 FA를 맞았지만, 그 사이 바뀐 새 모기업인 KT&G는 양희승의 나이를 들어 재계약을 주저했다. 마침 이를 노린 팀이 외곽 슈터의 부재로 2006-07 시즌 챔프전에서 졌다고 판단한 추일승 감독의 부산 KTF였고, 결국 양희승은 황진원,옥범준과 1:2 사인 & 트레이드의 형식으로 KTF로 가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KTF의 실패였다.

양희승이 정말 노쇠해진 것이었다. 어깨 부상과 발목 부상이 겹치면서 슈터로서의 능력은 곤두박질쳤고, 팀의 전력을 일으키기에는 양희승의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노장으로서 한계에 조금씩 봉착하기 시작한 것. 반대로 KTF가 내준 황진원은 준수한 활약을 보이면서 KT&G에 보탬이 되었다. 여기에 다시 무릎까지 다치면서 양희승의 가치는 급락했고, 이적해온 다음 시즌에는 팀은 최하위로 떨어졌다.

새롭게 부임한 전창진 감독은 양희승을 단칼에 웨이버로 방출하는 결정을 내렸고, 양희승은 방출된 후, 아무도 자기를 찾지 않게 되자 그렇게 은퇴하게 되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선수치고는 다소 허망한 은퇴였다. 그리고 그가 은퇴한 후, kt의 성적이 부진했다면 잘못된 결정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은퇴 후에 다른 포워드들의 포텐이 다 터지면서 우승을 다투는 팀이 되면서 더 좋지 않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3. 은퇴 후[편집]


다른 선수들과 달리 지도자가 아니라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22년 현재 펄하우스스토리 이사. 이 때문에 농구 팬들은 은근히 떨떠름해 하고 있다. 왜 그런 지는 이진주 문서 참고. 참고로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전에 골드미스가 간다에 나와 현영과 커플로 엮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식에게 팔씨름에서 완패했다(...). 그나마 윤동식은 같은 프로에 격투기 선수니까 완력에서 밀리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 옆에 있던 노홍철에게도 졌다. 지못미.[7]

2017년 2월 3일부터 tvN에서 방영 중인 연예인 농구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 '버저비터'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팀Y'의 감독을 맡아 본격적으로 방송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21년 뭉쳐야 쏜다에 고려대 팀의 선수로 출전했다.


4. 관련 문서[편집]



[1] 아킬레스건 파열[2] 부상당한 김영만의 대체인원으로 고려대 4학년때 처음 발탁되었다.[3] 경남/창원 LG 시절[4] 전주 KCC, 안양 SBS/KT&G, 부산 KTF 시절[5] 대전 현대 시절[6] 실업농구 시절 LG로부터 계약금 5억을 받았는데, NBA식 운영을 표방하며 계약금 폐지, 샐러리캡 제도를 도입한 KBL은 당시 현역 선수들을 대상으로 연봉에서 매년 일부를 공제하는 방식으로 실업팀 시절 받은 계약금을 토해내게 했다. 양희승은 CF 출연과 옵션으로 손실을 최소화하길 원했으나, 구단은 상큼하게 묵살했다고 한다.[7] 물론 노홍철도 완력 좋은 걸로 유명하긴 했다. 그래서 그게 위안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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