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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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종의 수상 이력 및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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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 결정전 우승 반지
2012
2017
2021
2023



파일:양희종2022-23.png
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영구 결번
No. 11

















안양 KT&G카이츠 등번호 11번
단테 존스
(2006~2007)

양희종
(2007~2009)


전병석
(2009~2010)
안양 KGC인삼공사 등번호 11번
전병석
(2009~2010)

양희종
(2011~2023)


영구 결번


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No. 11
ANYANG JUNG KWAN JANG RED BOOSTERS

파일:양희종2022-23.png

양희종
梁熙鍾

출생
1984년 5월 11일 (39세)
경기도 수원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신장 193.1cm|체중 96kg[1]
직업
농구 선수 (스몰 포워드[2] / 은퇴)
학력
매산초등학교 (졸업)
삼일중학교 (졸업)
삼일상업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학사)
프로 입단
2007년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안양 KT&G)
현역 시절 등번호
11 (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 영구 결번)
병역
상무 농구단 (2009~2011.02.)
소속
선수
안양 KT&G-한국인삼공사-KGC인삼공사 (2007~2023)
가족 관계
배우자 김사란(2019년 결혼)
장남 양태웅(2020년 2월 4일생)
장녀 양세연(2021년 2월 25일생)
응원가
한나 - Luxury
HAM - So Sexy[3]
유재석, 박진영 - I'm so sexy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커리어
3. 아마추어 시절
4. 프로 데뷔 이후
4.1. 2007-2008
4.2. 2008-2009
4.3. 상무
4.4. 2010-2011
4.5. 2011-2012
4.5.1. 2011-2012 포스트시즌
4.5.1.1. 2011~2012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
4.6. 2012-2013
4.7. 2013-2014
4.8. 2014-2015
4.9. 2015-2016
4.10. 2016-2017
4.11. 2017-2018
4.12. 2018-2019
4.13. 2019-2020
4.14. 2020-2021
4.15. 2021-2022
4.16. 2022-2023
5. 신경전
5.1. 윤호영과의 관계
6. 플레이 스타일
7. 기타
7.1. 김태술
7.2. 슬램덩크 실사판
8. 역대 프로필 사진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안양 KGC인삼공사 소속 농구 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스몰 포워드였으며 2020-21 시즌부터는 파워 포워드로도 뛰었다. 또한 안양 KGC인삼공사를 상징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삼공사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 선수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상무 복무 중에도, 제대 후 삼십대 중반에 이른 2010년대 중후반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국가대표로 발탁된 선수로, 뛰어난 수비력으로 KBL을 대표하는 블루워커[4] 플레이어에 속한다.

별명은 무록자, 양무록인데, 어떤 경기에서 풀타임을 뛰고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 기록한 스탯이 하나도 없어 붙은 별명.[5] 특히 상무 제대 후, 11-12 시즌에는 바닥을 친 슛감 덕에 반쪽짜리 선수란 이야기까지 들었다.

거의 모든 포지션의 수비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수비력을 인정받아 2008-09 시즌에는 수비 5걸로 선정, 수비력과 공에 대한 집착, 허슬플레이는 KBL에서도 정평이 난 선수다. 리바운드에 적극 가담하고, 몸싸움과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팀의 살림꾼 역할을 하는 선수로 감독이나 코치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의 선수다. 그러나 허슬플레이로 인해 잦은 부상이 많아 풀타임 출전에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 받는다.

플레이가 거칠고 동업자 정신이 결여된 모습이 보여 비매너 논란에 항상 대두되는 선수이지만(부상을 유발한다든지...) 코트 내의 플레이와는 별개로 코트 안팎의 리더십과 파이팅으로 타 선수들에게 존경 받는 선수이다.


2. 커리어[편집]


  • 1999 제29회 추계연맹전 남중부 미기상 수상
  • 2001 제56회 전국남녀종별농구선수권대회 MVP
  • 2001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남자농구팀 청소년 국가대표
  • 2002 제27회 협회장기 최우수 선수상
  • 2003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남자농구팀 청소년 국가대표
  • 2004 제22회 동아시아선수권대회 남자농구팀 국가대표
  • 2005 제23회 하계유니버시아드 남자농구팀 국가대표
  • 2005 제4회 동아시아경기대회 남자농구팀 국가대표
  • 2006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남자농구팀 국가대표
  • 2006 월드바스켓볼챌린지 국가대표
  • 2007 제24회 동아시아 남자농구 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08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남자농구 국가대표
  • 2008 2007-2008 스포츠토토 한국농구대상 신인상
  • 2009 2008-2009 동부프로미 프로농구 수비 5걸
  • 2010 2009-2010 농구대잔치 남자부 MVP
  • 2010 제16회 광저우 아시안 게임 남자농구 국가대표
  • 2010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은메달
  • 2011 제26회 동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11 제32회 윌리엄 존스컵 국가대표
  • 2011 제26회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12 제30회 런던올림픽 남자농구 국가대표
  • 2014 2013-2014 한국프로농구 최우수수비수상
  • 2014 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금메달


3. 아마추어 시절[편집]


수원 출신으로 어릴 때는 태권도를 했다고 한다.[6] 그러던 중 농구부 감독이 '체격이 허재를 닮았다'는 말로 양희종의 부모를 설득해서 그때부터 농구를 시작했다. 대개 프로에서 성공한 선수들이 그렇듯 양희종 역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또래 선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실력을 갖춘 에이스로 평가받았다. 특히 삼일상고 시절에는 센터 하승진을 필두로 박구영, 정승원 등과 함께 무적삼일을 이끈 주축선수였다. 이후, 연세대에 입학한 후, 농구대잔치 3연패를 이끌며 연대 전성기를 구가할 때 김태술, 이광재와 함께 그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래서 대학생 때 부터 성인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하며 대표팀의 세대 교체의 주역이자, 차세대 국가대표 포워드로 일찌감치 선정되었다.

파일:external/heyto25.files.wordpress.com/p4080220_copy.jpg

대학교 2학년 때 사실상 대학리그 최고의 선수로 일찌감치 평가되었고, 팀 역시 연승을 이어가며 수차례 우승을 이뤘다. 3학년 무렵 부터는 김재환과 함께 리바운드만 전담하는 롤을 맡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공격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팀과 개인의 목표 모두 너무 일찍 이루었기에 그에 따라 슬럼프도 찾아왔다. 거기에 플레이 특성상 계속되는 잔부상도 대학시절 양희종의 성장을 더디게 했다고 아마농구 전문가들은 평한다. 졸업 1년을 남겨둔 3학년 시절 김태술, 이광재와 함께 얼리엔트리로 참가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당시 연세대 박건연 이뭐병 감독이 이를 만류했다고 알려졌다.[7]

파일:external/heyto25.files.wordpress.com/news1183499499_72850_1_m.jpg

농구대잔치 세대와 유일하게 비견되고 있는 03학번 '황금세대'[8]의 멤버 중 하나. KBL 전설의 진행형이라 불리는 2007년 드래프트 신인들은 2라운드 픽 선수들조차 다른 해에 드래프트에 참가했다면 1라운드에서 뽑혔을 것이라 KBL에서 공인할 정도로 대어들이 즐비한 드래프트였다. 2007년 신인드래프트에 지명된 선수들 중 화제가 되었던 선수들만 살펴보자면, 김태술, 이동준, 양희종, 정영삼, 박상오, 신명호, 이광재, 김영환, 함지훈, 박구영, 신제록, 김봉수, 유병재, 허효진, 송창무 등이 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선수들도 숱하게 많은 다른 시즌의 드래프트와 비교했을 때, 현역선수들, 그것도 주전선수들이 가장 많은 넘사벽급 엔트리라 볼 수 있다. 양희종은 드래프트 전체 3번으로 지명 되었는데, 내심 전체 1번까지도 기대했지만 밀려서 그런지 드래프트 장에서 표정은 좀 떨떠름했다.[9] 하지만 당시 KT&G에 막 취임했던 유도훈 감독은 1순위가 있었어도 양희종을 뽑았을 것이라면서 그를 격려했다.[10]


4. 프로 데뷔 이후[편집]



4.1. 2007-2008[편집]


시즌
소속
경기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블락슛
야투(%)
3점슛(%)
자유투 (%)
2007/08
KT&G
54
7.7
1.8
3.5
0.9
0.6
44.7
29.3
75.0

데뷔 시즌인 2007-2008 시즌 성적은 평균 7.7득점에 3.5리바운드. 외국인 선수 위주로 공격이 돌아가던 것을 감안하면, 주희정과의 뛰어난 호흡으로 팀 디펜스에 일조했다. 또한 루키다운 허슬플레이를 보여주며 자기 역할을 다 했단 평가를 받았고, 대학시절의 명성을 이어 수비력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즌 후, 김태술과 함께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경쟁했다. KBL 시상식에서는 김태술이 수상했으나, 한국농구대상에서는 양희종이 신인상을 받았다.


4.2. 2008-2009[편집]


시즌
소속
경기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블락슛
야투(%)
3점슛(%)
자유투 (%)
2008/09
KT&G
40
9.7
1.9
4.4
1.6
1.1
47.3
36.4
70.0

2008-2009 소포모어 시즌에는 별다른 징크스 없이 평균 9.7득점 4.4리바운드로 데뷔시즌보다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뛴 시간은 많은데 어쩐지 스탯은 없는 '무록자'의 조짐이 보였다. 2009 프로농구 시상식에서 수비 5걸에 선정되었다.


4.3. 상무[편집]


2009 시즌을 마치고 리빌딩이 목표인 팀 사정 상, 권유에 의해 상무로 가게 되었다. 수비형 플레이어로 손꼽히던 양희종은 소속팀에서보다 다양한 롤을 부여받아, 상무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일병 무렵부터 아마시절 전성기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한 득점력으로 팀의 연승을 이끌었다. 제대무렵에는 상무를의 농구대잔치 우승에서 MVP를 수상한다.[11] 또, 군 복무 중에도 아시안게임, 동아시아 선수권 등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2009 동아시안 게임에 이등병 신분으로 출전해, 일본전 23점, 필리핀전 14점, 쿠웨이트전 16점으로 경기당 평균 15.4득점으로,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하고 김주성을 제치고 공격옵션에서 에이스역할을 했다. 상무팀 내에서도, 국대팀에서도 자유로운 공격롤을 보여주며 '수비만 강한 선수' 라는 이미지를 탈피했다.


4.4. 2010-2011[편집]


시즌
소속
경기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블락슛
야투(%)
3점슛(%)
자유투 (%)
2010/11
인삼공사
8
8.8
2.5
5.5
0.8
1.3
33.3
17.2
65.2

시즌 막판에 상무를 제대한 후, 팀으로 복귀. 비록 몇 경기 뛰지 않았지만 양희종, 김태술, 박찬희, 이정현, 김일두. 이들이 모두 한 팀에 모이게 되는 다음 시즌을 기대케했다. 거기에 이어 리빌딩의 마지막 유산인 오세근의 안양행이 결정되고 2011-12 시즌을 앞둔 시점부터 올스타 드림팀이란 평가를 받았다.


4.5. 2011-2012[편집]


파일:external/heyto25.files.wordpress.com/201112261711778620_1.jpg

시즌
소속
경기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블락슛
야투(%)
3점슛(%)
자유투 (%)
2011/12
KGC
49
6.33
1.7
4.2
1.1
0.5
35.0
26.5
69.2

박찬희, 이정현, 오세근 87년생 1라운드 트리오, 공익에서 복귀하는 김태술, 김일두와 함께 리그 최강 전력이라는 평을 들으며 시작한 시즌. 그러나 상무에서의 활약으로 팀 내외부에서 모두 양희종의 활약을 기대했다. 하지만 함께 리그에 복귀한 동기 김태술이 빠른 적응으로 맹활약을 하는데 비해 양희종은 공격쪽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해 시즌 초반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다. 거기에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이자, 양희종보다 한 수 아래란 평을 들었던 동부의 포워드 윤호영이 공격면에서 완전히 각성하여 리그 최고의 선수가 되었고, 양희종은 팀 안팎으로 활약하는 동기들과 비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수비력을 가졌지만 공격이 되지 않는 선수. 그렇기에 주전 3번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희종의 쓰임새와 가치에 대해 많은 논쟁이 오고갔다. 하지만 정규시즌이 끝나갈 쯤에도 양희종의 슛감은 되살아나지 못했고[12], 강점인 수비 때문에 많은 시간을 뜀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스탯은 미미하여 '양무록'이란 별명이 완전히 굳어졌다. 정규시즌의 실망스러운 모습들은 양희종에게 많은 굴욕을 안겼는데, "양희종이 10점 이상 넣으면, KGC가 이긴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고 급기야 시합 중에 상대팀 전창진 감독이 작전타임에서 양희종은 그냥 수비하지 말고 놔두라는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포스트시즌이 되어서도 강동희 감독에게서도 자극하는 듯한 발언[13]을 들어야만 했다.


4.5.1. 2011-2012 포스트시즌[편집]



4.5.1.1. 2011~2012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편집]

라운드
상대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블럭슛
스틸
4강PO-1
vs kt
0
4
4
2
2
4강PO-2
vs kt
10
3
0
0
0
4강PO-3
vs kt
7
6
1
2
1
4강PO-4
vs kt
18
2
4
1
2

2011-12 정규시즌을 2위로 마친 안양 KGC는 대진을 통해 6강 PO의 승자이자 인천 전자랜드와 5차전까지 마치고 올라온 부산 kt와 맞붙게 되었다. 4강 PO 2차전부터 공격감을 되찾기 시작한 양희종은 정규시즌의 무록자의 모습을 버리고 이름값에 걸맞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치 쌓아뒀던 분이라도 풀듯이 특유의 허슬플레이를 보이며, 4차전 18득점을 하며 팀 창단 첫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공헌을 했다.


4.5.1.2. 2011-12 KBL 챔피언결정전[편집]

라운드
상대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블럭슛
스틸
Final-1
vs 동부
10
3
1
0
1
Final-2
vs 동부
9
9
2
1
2
Final-3
vs 동부
17
6
1
2
1
Final-4
vs 동부
13
3
5
2
1
Final-5
vs 동부
15
2
3
0
2
Final-6
vs 동부
6
3
1
1
1

파일:external/heyto25.files.wordpress.com/f.jpg

이미 리그 정상급으로 평가되는 수비였지만, 챔피언결정전 2~4차전에서 동부의 윤호영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전담 봉쇄는 압권이었다. 김주성, 윤호영, 로드 벤슨 등 동부산성이라 불리는 트리플 타워를 막으며, 공격에서도 정규시즌에서 찾지 못했던 슛감을 되찾아 4차전과 5차전에는 외곽슛이 기가 막히게 들어가며 두 자리 수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승리의 직전까지 갔었던 6차전에서는 3쿼터까지도 득점이 4점에 그치며 다소 부진하였다. 동부의 기세에 약간은 움츠러든 듯한 KGC의 선수들은 4쿼터 막판 체력이 떨어진 동부를 몰아붙여 17점차까지 벌어졌던 점수차를 단번에 좁혔다. 그리고 64-64 동점이던 종료 9초 전, 김태술에게 패스 받은 후 라이벌 윤호영을 속이며 미들슛을 성공시켜 KGC의 대역전 드라마의 결정적 주인공이 된다. 66-64 승리. 부진에 빠져 있던 선수가 상대의 계속되는 견제에 자극받아 결승골을 넣는다는 만화 공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플레이오프 MVP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으나 풀타임 전방위 활약의 압도적 신인 오세근의 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의 임팩트로 그는 양유록, 무록신[14]으로 거듭난다.[15] 양희종은 PO 내내, '어차피 바닥이라 편하게 던졌다', '온갖 수모가 다 약이 됐다'며 부진했던 시즌에 대해 쿨하게 자평하는 인터뷰를 했다. 거기다 양희종은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로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


4.6. 2012-2013[편집]


시즌
소속
경기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블락슛
야투(%)
3점슛(%)
자유투 (%)
2012/13
KGC
49
7.8
1.8
4.7
1.3
0.6
39.5
33.9
61.2

지난 시즌의 챔피언결정전의 맹활약으로 양희종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시즌 초반부에는 좋은 공격력과 수비력, 리바운드 가담을 보이며 오세근의 공백으로 약화된 KGC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후 시즌이 막판으로 가면 갈수록 공격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다시 양무록으로 격하됐다. 하지만 부상병동에 시달리는 안양 KGC인삼공사가 팀원들이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에서 막판까지 4강으로 이끄는데 공헌한 부분은 무시할수 없다.

그러나 이 시즌에 거친 플레이가 연속으로 논란에 올랐다. 김시래에게 가한 발차기나 문태영에게 팔걸기, 차바위에게 한 거친 플레이등 비매너 플레이들이 구설수에 올랐으며, 2012년 12월 29일 창원 LG 세이커스전에서 관중석으로 김태술과 관중석으로 루즈볼을 던진 것 등이 부각되면서 동업자 정신이 부족하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4.7. 2013-2014[편집]


시즌
소속
경기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블락슛
야투(%)
3점슛(%)
자유투 (%)
2013/14
KGC
45
7.9
1.9
3.5
0.6
0.5
38.6
32.9
64.3

시즌 이후 FA였지만 2014년 5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5년동안 보수총액 6억(연봉 4억 2000만, 인센티브 1억 8000만)에 구단과 재계약을 체결했다.


4.8. 2014-2015[편집]


시즌
소속
경기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블락슛
야투(%)
3점슛(%)
자유투 (%)
2014/15
KGC
46
6.9
2.6
4.3
1.0
0.5
34.3
33.7
64.8


4.9. 2015-2016[편집]


시즌
소속
경기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블락슛
야투(%)
3점슛(%)
자유투 (%)
2015/16
KGC
44
3.3
1.8
4.5
1.2
0.4
30.2
24.1
46.8

평균 3.3득점을 기록하면서 최악의 공격수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수비 5걸에 들 정도의 수비력은 있지만 5억 7천이라는 연봉 값을 전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플레이오프에서 이정현을 포함해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줘 팀 사기를 떨어트리고 있다.


4.10. 2016-2017[편집]


지난 시즌보다는 나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으나, 슛이 없다는 약점을 이용해 이정현에게 집중적인 수비를 가하고 있어서 2라운드 초반에는 팀 전체의 경기력이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 전치 6주의 부상을 당하게 되어 1월 중순까지 결장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평소 출전을 못하던 문성곤, 한희원의 경기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서 포텐이 폭발하고 있고, 이에 따라 팀 성적은 상승곡선을 달리게 되었다. 이제 뭔가 크게 잘못되지만 않는다면 KGC가 여유롭게 우승을 차지할 것으로 점쳐지며 양희종이 부상을 당한 게 도리어 다행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러나 문성곤이 공격에서 다시 찬물 모드로 돌아서고, 1월 7일 양희종이 다시 복귀하자 공격밸런스가 눈에 띄게 좋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11-12 챔프전 라이벌인 윤호영과 비슷하게 평행이론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2월 5일 엘지와의 경기에서 김종규와 충돌하여 김종규가 부상당하자 논란이 되고있다. 해당 장면 자체만 보면 사실 경기 중에 우연찮게 무릎끼리 부딪혀서 일어난 부상이지만, 수년간 양희종이 동업자 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플레이들도 많이 보여줬기 때문에 없던 논란도 생기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16] 언뜻 생각하면 자업자득일지도.

이후 챔피언 결정전 3차전에서는 키퍼 사익스의 공백 속에서 3~4쿼터를 거의 멱살잡고 캐리를 하는 수준에 다다르면서 팀의 대역전승을 이끌었다. 그 이전에도 플레이오프 내내 동료 선수들에게 "심판에게 항의하지 마" 등 선수들을 바로잡아주는 등 리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는데, 이 날도 자유투나 타임아웃 상황에서 틈틈이 선수들을 모아놓고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이 자주 잡히는 등 팀 케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은 주장이 된 이후 꾸준한 모습.

대망의 챔피언 결정전 6차전에서 스테픈 커리가 접신한 듯 3점슛을 9개 던져서 8개나 꽂아 넣으며 팀의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참고로 정규시즌 43경기에서 넣은 3점슛이 27개인데 이번 챔피언결정전에서만 14개를 넣었다. 이번 챔피언 결정전에서 필드골 54.84%, 3점 성공률 56%라는 충격과 공포의 활약[17]을 선보였는데, 이는 지난해 챔피언전 우승의 한축을 견인했던 문태종의 성공률과 비슷한 수치를 기록하였다. 선수 커리어 내내 중요한 경기마다 임팩트를 남겼으니 이정도면 빅 게임 킬러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4.11. 2017-2018[편집]


1라운드부터 팀의 캡틴으로 준수한 활약을 펼치다가 원주 DB 프로미와의 경기에서 디온테 버튼에게 팔꿈치에 코를 가격당하는 큰 부상을 입고 2라운드를 거의 통째로 날리는 듯했으나,[18] 수술 후 마스크를 쓰고 돌아와서 팀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꿋꿋이 수행하고 있다. 특히 3라운드 원주 DB 프로미와의 리매치에서는 3점신이 다시 빙의한 마냥의 인생경기를 또 펼치며 셀레브레이션까지 펼치는 등 팀의 상승곡선을 주도하는 모습. 2017년 12월 28일 서울 SK전에서는 경기 시작 4분 30초만에 3점슛 4/4를 성공시키며 12득을 만드는 미친 모습까지 보여줬다.

그런데 오히려 마스크를 쓴 이후에 시즌 평균 성적이 더 좋아지는 현상이 발생해서 팬들은 부상 완치되어도 마스크 벗기지 말라고 아우성을 치는 중이다.(…) 그럴 만한 게 수비 1툴 플레이어가 아닌 공격에서도 좋은 슛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 심지어 3라운드부터는 3점슛 성공률까지 정점을 찍고 있다. 12월 28일 서울 SK 나이츠와의 원정경기에서 한 경기 7개를 성공시키며 자신의 정규시즌 한 경기 3점슛 최다 성공 기록을 경신해버린 것은 덤.[19]

비록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40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평균 7.2점 4.6리바운드 3점슛 1.6개로 회춘한 모습을 보였다. 6강 PO에서도 좋은 슛과 투지 넘치는 수비로 모비스를 꺾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비록 3전 전패로 탈락했지만 4강 PO에서도 투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팬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4.12. 2018-2019[편집]


양희종 본인은 열심히 했지만[20] 팀은 주전 선수들의 줄 부상속에 25승 29패로 7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시즌 종료 후 결혼을 했고 그전에 신부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갔다왔다고 한다. 그리고 2019년 5월 14일 소속팀 안양 KGC인삼공사와 계약기간 3년 당해보수 4억을 맺어 안양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게 되었다.기사


4.13. 2019-2020[편집]


이번 시즌 역시 주장직을 맡게 되었다.

오세근과 함께 팀의 주축이자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 양희종 또한 나이가 적지 않기에 출장 시간을 조절해 주고 있다. 교체 멤버로 출전중이다.

코로나-19로 시즌이 조기 종료되었고 팀은 3위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를 치르지 못한 채 다음시즌을 기약했다.

연봉협상에서 4억원에서 10%가 삭감된 3억 6천만원에 계약을 했다.


4.14. 2020-2021[편집]


문성곤이나 함준후에게 3번을 넘기고 오세근이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못할 때가 많아 4번으로 출전할 경기가 많을 예정이다.

시즌 초반 부상으로 결장 중이었다가 휴식기 이후 처음 출장해 인천 전자랜드와의 경기에서 12득점 6리바운드 4어시스트 활약으로 팀의 91:82 승리를 이끌고 개인 통산 2,100리바운드 고지를 밟았다.

양희종의 복귀 전까지 5할 승률에 머물던 KGC는 이후 6연승을 달리면서 3라운드 초반 단독 선두까지 올라섰다. 37살의 적지 않은 나이인지라 예전처럼 풀타임 소화는 못해도, 확실히 양희종의 존재감이 아직은 상당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2021년 1월 3일 안양에서 열린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경기에서 3쿼터 중반 리온 윌리엄스를 앞에 두고 돌파를 성공시킨 뒤 착지 과정에서 오른쪽 발목이 꺾였다. 진단결과 인대 손상으로 전치 4주 진단을 받았다. 빨라야 설 명절 직전 복귀라, KGC인삼공사의 적신호가 켜졌다.

부상 복귀 이후 벤치에서 주장으로서 후배 선수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이후 안양KGC의 플레이오프 전승 우승에 정신적 지주로서 힘을 보탰고 결국 개인통산 3번째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4.15. 2021-2022[편집]


KGC와 연봉 2억원에 계약을 맺었다. 나이와 기량을 봤을 때 사실상 마지막 계약이며, 선수 생활의 말로에 접어들었다.

2021년 12월 3일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를 예정이다.

시즌이 끝난후 FA를 취득하였으며, 3년 보수 총액 2억 2천만원에 잔류하였다.


4.16. 2022-2023[편집]


출전 시간은 길지 않지만 식스맨이자 베테랑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2023년 2월 22일에 시즌 종료 후 은퇴를 결정했다. 지도자 변신을 위해 해외 연수를 떠난다고 하며, 인터뷰를 통해 시즌 내내 자신의 출전시간 때문에 출전시간을 갖지 못하는 후배 선수들이 많이 보이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본인은 물론이고 팀이 잘 나가고 있을 때 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나중에 밝혀진 사항에 의하면 3년의 계약을 준 것은 구단에서 은퇴 및 향후 진로를 여유롭게 결정하라는 차원에서 넉넉하게 계약 기간을 준 것이었고 남은 2년의 계약은 코치 계약으로 전환될 예정이라고 한다.

3월 26일 DB와의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서 양희종이 현역일 때의 마지막 캡틴 데이를 기획했다. 4,929명의 많은 관중 앞에서 하프타임에 은퇴식을 치렀으며 양희종이 사용한 11번을 KGC 구단 역사상 최초로 영구 결번을 지정했다.[21] 경기 직전 2위 LG의 패배로 정규 시즌 우승을 확정함에 따라 은퇴식에서 정규 시즌 우승 트로피도 들어올리는 영광을 누렸다. 플레이오프 경기는 양희종의 마지막을 빛내기 위해 '양희종의 라스트 디펜스'라는 슬로건을 걸고 싸운 끝에 팀의 통합우승을 안기면서 그의 화려한 선수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본인도 연장전 종료 약 3초를 남기고 부상으로 인해 감고있던 깁스를 풀고 코트위로 올라와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22]

2023년 9월 중 KGC 구단의 지원을 받고 약 2년 6개월간 미국 NCAA 텍사스대 알링턴으로 코치 연수를 다녀온다. 연수 이후 코치로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5. 신경전[편집]


국내 가장 인기 있는 프로 스포츠인 프로야구의 시즌 시작과 맞물림에도 2011-12 시즌 KBL 챔피언결정전은 몇년간 열린 프로농구 PO 중, 최고의 흥행시리즈로 손꼽혔다. KGC는 상대팀 동부에 비해 젊고 패기있는 선수들이 있었지만 리그의 역사를 다시 쓴 역대 최강 레벨의 팀인 동부[23]를 이길 수 없다는 평을 들었다. 실제로 정규리그 중 동부에 역대 최소득점(41점)의 굴욕을 당하며 5승 1패라는 상대전적 열세의 입장이었던 KGC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언론과 농구팬 모두가 하나마나한 경기라며, 압도적인 동부의 승으로 끝날 시리즈라고 입을 모았다. 이에 자존심이 많이 상한 KGC 선수들은 더욱 이를 악물고 게임에 임했고, 그 과정에서 양희종의 인터뷰 겐세이 가 연일 화제가 되었다. 이는 NBA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프로선수의 올바른 언행과 품성에 엄격한 한국리그에서는 드문 일이었기에 더욱 주목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 시절부터 양희종과 친한 동기였던 동부의 이광재가 모비스와의 4강 PO에서 승리한 후, "어느 팀과 챔프전을 해도 자신있다" 는 평범한 각오를 밝혔다. 이에 양희종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광재가 인터뷰에서 '챔프전에 아무나 올라와도 좋다'라고 말한 걸 봤다. 웃기지 마, 이광재. 보고 있나" 라고 받아쳤고 1차전 동부의 승리 이후, 이광재가 다시 한번 "잘 봤지 양희종" 이란 인터뷰를 했고, 그러자 KGC가 승리한 2차전 인터뷰에서 이광재의 에어볼 실책을 지적하며 "오늘 광재 때문에 이겼습니다. 아까 레이업 상황에서 공중으로 던진 볼, 옆으로 날아가는 포물선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의리를 배신하지 않은 광재한테 잘 해줬다고 말 해주고 싶습니다. 이말 꼭 써주세요" 라고 말한 것이 그대로 기사로 나가게 되며 슬슬 양 팀 팬들간의 신경전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광재-양희종으로 시작되었던 신경전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양희종-윤호영으로 번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프로농구팬 전체를 흥미롭게 하는 사건이 되었다.


5.1. 윤호영과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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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 시즌 챔피언결정전은 국내 NO.1 센터의 왕위를 놓고 싸우는 자리라 불렸다. 국내 최고의 센터 김주성과 신인으로 그 왕위를 넘보는 오세근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워낙 플레이 자체가 다르고, 돈독한 중앙대학교 선후배 지간이라 뚜껑을 열어보니 그리 화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4강 PO에서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양희종 덕분에 오랜 떡밥이었던 윤호영-양희종의 매치가 성사될 수 있었고 둘은 시리즈를 관통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윤호영과 양희종은 같은 포지션, 다른 대학, 같은 나이, 다른 학번, 같은 드래프트 순번, 미필과 군필, 미혼과 기혼,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과 언론에 친화적인 성격 등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많은 선수로 아마시절부터 라이벌구도를 형성해왔다. 함께 청소년대표팀을 한 적도 있어, 친분이 없지는 않지만 윤호영이 유급을 하여 한 학번 아래이고, 당시 대학농구 최강 자리를 놓고 싸우던 연세대와 중앙대의 선수였기에 대학시절부터 서로에 대한 보이지 않는 미묘한 심리전이 있었을거라 추정된다.

그러나 양희종의 입장에서는 윤호영[24] 보다 일찍 농구를 시작해 초, 중, 고교 시절 늘 에이스였고 고교시절은 물론이고 윤호영의 기량이 성장한 대학 시절에도, 윤호영-함지훈-강병현의 중앙대를 몇번이고 제압한 전력이 있었다. 양희종의 아마시절은 윤호영과 비교하기엔 레벨의 차이가 다른 선수였고, 본인 또한 그 잔상이 강했을 것이다. 강동희가 부임한 이후 동부의 트리플 타워를 구축한 윤호영이 리그 최강의 포워드가 되었던 2011-12 시즌. 하필 양희종이 제대 직후, 자신의 커리어 최악의 부진을 맞게 되며 비교가 불가피해졌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시즌 중 부터 이미 각종 언론 매체와 채널에서 둘을 라이벌 구도로 띄우며 리그 흥행의 한 요소로 만든 부분도 있었기에 팬들도 둘의 장단을 비교하며 오세근-최진수와 함께 오랜만에 형성된 리그 라이벌 매치업을 즐길 수 있었다.

이광재와 가벼운 신경전을 벌였던 양희종은 KGC가 파이널에 진출한 후, 동부와의 매치업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윤호영이 대학 때는 많이 넣어야 한 두 골이었다.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 라고 인터뷰를 했다. 이후 강동희 감독이 양희종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졌고, 1차전 동부의 승리 이후 이상범 감독이 이에 계속해서 양희종에게 1:1로 윤호영 수비를 맡기겠다고 했다. 그리고 2차전에 앞서, 윤호영은 이상범 감독의 발언에 대해 "그러면 저야 땡큐죠" 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잠을 못 잤다던 양희종은 2차전 승리 이후 "윤호영이 동부에 있어서 윤호영이라고 생각한다. 동부에 특화된 선수다" 라는 살짝 수위를 넘은 듯 보이는 어그로 인터뷰를 시전했다.[25]

사실 이는 다소 기자들에 의해서 공격적으로 왜곡된 부분이 많은데, 양희종이 윤호영이 대학때보다 좋아졌다는 발언은 사실이기 때문에 반박의 여지가 없고, 다소 거만한 듯 들리지만 그만큼 양희종의 기량이 대학 때는 월등했기에 윤호영의 괄목상대를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거기다, 큰 경기를 앞두고 정규시즌에 윤호영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을 내며 부진을 면치 못했던 양희종이 기자들의 의도된 질문에 자존심을 잃지 않고 대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루트이기도 했다. 실제로 윤호영의 '땡큐' 발언 역시 모비스전에서 자신을 도움수비까지 들어와서 마크하던 데서 벗어나 1:1로 수비한다면 더 수월해질 것 이라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확실히 뼈가 있는 말들이 오가며 이미 두 선수의 신경전은 극에 달했다.

이후, 이광재가 저 둘 사이에 끼어서 "계속 이겨서 희종이가 인터뷰를 못하게 만들도록 하겠다" 라고 중재적인 성격의 발언을 했지만, 뜬금없이 동부 구단 측에서 나서서 양희종의 윤호영 저격 발언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인삼공사 또한 '선수 끼리의 신경전을 구단에서 나서서 중재하는 것은 어린애 싸움에 어른이 끼어드는 꼴' 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결국 재밌자고 먼저 시작한 양희종이 "이제 그만 하겠다" 는 GG마무리 선언을 하며 코트 밖 언쟁을 끝냈다.

PO 경기 내내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피가 마를 정도로 블록을 주고 받았는데, 각 라운드마다 누구의 승인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이에 두 사람이 공을 다투고 있을 때는 다른 선수들이 그냥 넋을 놓아버리는 등... 치열함의 정도가 갈수록 더해졌다. 실제로 두 사람은 '너만큼은 내가 꼭 이기고 만다' 라는 정신으로 임했다고 말했고, 격렬한 몸싸움이 오고가는 게임이라 혹여 신경전이 잘못된 방식으로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사람들에게 진짜 라이벌의 실력싸움이 뭔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경기장 밖에서 부터 소란스러운 해프닝이라 여기기 쉽지만, 결국 프로스포츠의 세계에서 진짜 프로들이 하는 신경전이란 코트 안에서 시작과 끝을 맺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인삼공사가 우승을 차지하고 잠잠해지나 했지만, 시즌 이후 MVP를 수상한 윤호영이 모 주간지와 취중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음 인터뷰 대상자로 예정되었던 양희종에게 "나와는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런 말을 했느냐"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26][27] 이 인터뷰는 공개가 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결국 담당 기자가 인터뷰 내용을 대폭 수정하고 답변격이었던 양희종 인터뷰에서 민감한 사안을 모두 정리하고 기사 말미에 구구절절한 사과문을 첨부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28] 그러나 두 선수가 확실히 친한 사이가 아니란 것을 확인사살하는 역할을 했다. #1 #2

둘의 관계가 부각되면 리그의 흥행 요소로 떠오를 것이라 관계자들과 팬들은 좋아했지만 윤호영이 2012년 상무에 입대하며 그 기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 2022-23 시즌이 끝난 시점에서는 양희종이 우승 반지 4개에 구단 레전드로 영구 결번의 영예까지 받으면서 사실상 이룰 수 있는 것은 다 이룬 채로 여전한 기량을 유지한 상태로 은퇴했지만, 윤호영은 허리 부상과 아킬레스건 부상 등 잦은 부상으로 무너지면서 우승 반지를 한 개도 차지하지 못하고 은퇴하면서 커리어적으로는 이견이 없는 양희종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6. 플레이 스타일[편집]


전형적인 수비형 선수라 평가받는다. 몸을 아끼지 않는 공격적인 허슬플레이와 공에 대한 집착이 특징. 데뷔 초반에는 '제 2의 추승균'으로 불리기도 했다. 공수 양면이 모두 강해 대형선수로 성장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프로 데뷔 후 외국선수 위주의 공격 루트로 인해 리바운드와 블록 위주의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고[29] 인삼공사의 천운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영혼의 드래프트로 젊고 실력있는 선수들을 끌어모으며 양희종의 팀내 롤 역시 좁아지면서 공격에서마저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잦은 부상 또한 공격력이 더디게 된 계기가 되면서 데뷔 시즌 이후 단 한 시즌도 두자리 수 평균 득점을 한 시즌이 전혀 없다. 물론 두자리 수 득점을 하는 경우가 잦긴 하지만.

사실 양희종은 대학 저학년 시절만해도 블루워커 타입이 아니었다. 공격쪽에서 거칠다 못해 폭발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는데 공격력이 약화된 계기는 연세대학교 고학년 무렵 부터다. 그 시기 감독을 맡은 박건연의 전술에서 양희종은 풀타임으로 게임마다 센터포워드와 리딩가드의 역할을 같이 하는 일이 잦았졌다. 자연스레 혹사와 부상이 생기고, 전담수비라는 자신의 롤에 적응하면서 프로 입단 전 부터 수비형 선수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다. 프로입단 후 수비쪽으로 더 각광을 받아오긴 했지만 11-12 시즌처럼 공격이 부진한 적은 없었는데 자신에게 주어지는 공격옵션이 한정되면서 점점 슛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게 아니겠냐는 지적이 많다. 결국은 멘탈의 문제가 가져온 슬럼프. 이에 관련해 양희종이 다른 팀에 간다면 훨씬 뛰어난 공격력을 보여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3번 포지션이 말그대로 시궁창 수준인 모 팀모 팀..

'에이스 킬러', 남훈, '메타 월드 희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각 팀의 에이스만을 전담 마크하며 그 선수를 무력하게 만드는 수비를 펼친다. 그런 장점을 통해 국가대표에 매년 발탁되었고, 아마시절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비시즌을 국대 경기를 위해 뛰었다. 국대 경기만을 놓고 본다면, 상대 에이스를 잠가버리고 결정적인 순간 클러치 득점을 올려 대표팀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경기도 많아 양동근도 까이는 국대에선 양희종은 웬만해선 까이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플레이가 거칠고 동업자의식도 적은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신인 때의 김시래에게 고의로 발을 뻗어 얼굴을 가격한 짤이 가장 유명하고 뒤져보면 더티 플레이 모음집이 수없이 나온다. 승부욕으로 포장하기에는 너무나 도가 지나치며 영원히 절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놓고 본인이나 팀동료가 당했을 경우에는 누구보다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 내로남불의 정석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팀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상대팀과 팬들, 더 나아가 스포츠 정신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전혀 바람직하지 않으며 많은 우승 커리어와는 별개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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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부터 쌓아왔던 기본기와, 타고난 신체적 능력, 체력, 아마시절 보여주었던 기량으로 기대를 많이 받았던 선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양희종의 플레이를 평가하며 만약 양희종이 저 정도 외모를 가지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평가를 받았겠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장기계약 이후 행보를 보면 포텐은 커녕 점점 기록이 퇴보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수비가 좋다고는 하지만 수비전문 선수로만 남기엔 받는 연봉 액수가 너무 많다. 오죽하면 무록이라는 말까지 나올까, 타고난 수비력 덕분에 공수마진이 마이너스까진 안 가지만, 2015시즌 이후에는 팀 오펜스에서 유일한 구멍으로 평가받고 있고, 상대 수비들은 아예 새깅을 해버리기 때문에 팀 오펜스 전개에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 자체는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단점을 다 커버하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바로 큰 경기에서 정말 강했다는 것이다. 2011-12 챔프전 당시의 결승 위닝샷,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8강/결승전의 활약, 그리고 2016-17 KBL 챔피언결정전 3차전 당시 무록 소리를 쏙 들어가게 만들 정도로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활약, 그리고 6차전에서의 3점슛 8개 싹쓸이 등 정규시즌과는 완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많았다.

선수생활 말년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재 오히려 3점슛이 훨씬 좋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7-18 시즌을 기점으로 팀 오펜스의 핵심이었던 이정현이 KCC로 이적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되는 공격옵션이 많아져서인지 자신감 있게 공격력을 발휘하고 있다. 말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견고한 수비는 덤.


7.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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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 서지혜와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관계. 2016-17 KBL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시투를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정규리그 우승 시 시투를 해 주겠다는 공약을 했는데 진짜로 하는 바람에 서지혜 본인이 굉장히 당황했다고...

  • 2009년 <우리 결혼했어요> 환희-박화요비 커플 편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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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재균, 고원준, 문성민, 김요한, 김효범과 정장 화보를 찍기도 했다. 이 합동 정장 화보는 출시 이후, 인터넷에서 꽤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직접 찍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문성민김요한에게 나머지 선수들이 이용당했다는 굴욕의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양희종은 고원준 덕분에 선방했다

  • 야구선수 양현종, 양희승과 이름이 비슷하여 기사에서도 자주 오타를 발견할 수 있다. 장예인 아나운서는 MBC SPORTS+ 소속 시절 야구와 농구리그를 오가며 활동했는데, 야구선수 양현종을 인터뷰하고 농구로 넘어와 양희종을 인터뷰하는데, 양희종을 양현종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고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하여 밝혔다. 이후 양희종이 두고두고 서운해했다나... 알다시피 한국에서는 야구가 농구보다 인지도가 높은 스포츠라서 자연스럽게 양현종이 양희종보다는 인지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 2018-2019 시즌 후 대학 후배인 미모의 치과의사와 결혼했다.


  • 2020년 2월 건강한 아들을 득남하게 된다. 태명은 콩돌이었고, 본명은 양태웅. 이어 2020년 8월 본인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부인 김사란 씨의 둘째 임신 사실을 알렸다. 그 후 2020년 12월 아내가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치과를 개업했다.

  • 코트 내에서와는 다르게 코트 밖에서는 팬 서비스 또한 상당히 좋기로 유명하다. 야구계로 치면 오재원과 비슷하게 평가받는다.

  • 대학후배인 허훈과 매우 친한 사이다.

  • 목소리가 굉장히 허스키하면서도 굵직한 편이다.

7.1. 김태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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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부산이라는 꽤 떨어진 지역을 연고로 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중, 고교시절부터 친분을 다져왔다. 둘 모두 전국구 선수라는 평가를 들어왔고, 청소년 시절부터 대표팀을 통해 함께 시합을 뛰었으며 같은 대학에 입학한 후, 연세대가 리그를 석권할 때에 각각 팀의 살림꾼이자 기둥으로 활약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대표팀과, 대학팀의 에이스 콤비였기에 둘 모두 1라운더 1픽이 당연한 대형 선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프로에서 같은 팀에서 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6년주기 가드설의 주인공이었던 김태술은 SK로 신인 중 가장 먼저 지명이 되었고 양희종은 KT&G에 지명되며 둘 모두 루키시즌을 성공으로 치르고 신인상을 두고 다투는 선의의 경쟁자로 자리잡아갔다.

그러나 KT&G의 간판이었던 주희정이 맞트레이드 격으로 SK에 이적하며 김태술이 김종학과 함께 KT&G로 오게 되는 충격적인 상황 농구계의 LG 트윈스인 SK의 병크 중 하나 이 발생했고, 둘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다시 한 팀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적과 동시에 리빌딩에 착수한 팀 사정상 둘 모두 상무와 공익으로 병역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했고, 2011-12 시즌에서야 정식으로 프로리그에서 함께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우승이었다.

11-12 시즌 PO에서 바스켓카운트를 성공시키며[30] 함께 코트에 쓰러져 부둥켜안는 장면은 이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양희종의 "저희가 더 뜨겁죠" 한마디에 많은 여성팬이 떠나갔다던데....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각별한 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전문가들은 두 사람이 함께 뛸 때 가장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 된다고 생각하여 FA 이후에도 함께 뛰는 것이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겠냐고 평한 바 있었다.

그러나 14-15 시즌에 김태술전주 KCC 이지스로 이적하게 되었고 생이별 15-16시즌부터 20-21시즌까지 봄농구에서 적으로 매번 만났다.


7.2. 슬램덩크 실사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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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서태웅 시절 하관을 가려서 가능한 건 아닐까

국내에서의 슬램덩크의 인기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 그래서 농구선수들을 곧잘 슬램덩크의 등장인물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관습에 의해, 만화같은 외모와 거침없는 플레이 스타일의 양희종은 그에 관해 가장 자주 언급되는 선수다. 대학 시절과 루키 시즌에는 연세대 서태웅, 안양 서태웅으로 불렸다. 차갑지만 잘생긴 외모, 많은 여성팬, 스몰 포워드, 백넘버 11번의 올라운드 플레이어... 실제 언론에서도 그를 서태웅과 자주 비교하며 닉네임을 붙였고, 본인도 직접적으로 인터뷰에서 그 이야기를 많이 들은듯 하다. 그러나 그가 정작 좋아했던 인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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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머리빨의 완성은 얼굴...

젊은 선수들을 이용한 구단 모기업 인삼공사의 적극적인 스타 마케팅으로 굉장히 신랄한 유니폼을 입으며 그에 맞게 빨간 머리로 염색을 한 양희종은 정규시즌 '무록의 전설'을 쓰며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패기만만한 강백호 이미지를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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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정적으로 강백호에 빙의한듯한 2011-12 시즌 챔피언결정전 6차전에서의 '왼손은 거들 뿐' 슛이 골든슛이 되면서 그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산왕공고를 연상시키게 하는 초록색 유니폼의 동부와, 북산을 연상시키는 KGC의 붉은색 유니폼으로 산왕-북산 이미지 매치가 된 결정전에서 그런 슛이 나왔기에 더욱 인상이 강했다.


믿기지 않는 탄력

사실 강백호의 특기인 파리채 블로킹을 루키시즌에 보여주면서 강백호와 서태웅을 적절히 섞어놓은 선수라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그간 그 두 캐릭터에 비해 공격적인 측면에서 비교가 불가능했기에 개그소재로 사용되곤 했다.



8. 역대 프로필 사진[편집]


안양 KGC인삼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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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1 시즌
2021-22 시즌
2022-23 시즌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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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양 KGC인삼공사 공식 프로필[2] 2020-21시즌부터 은퇴할 때까지 출전시간을 많이 가져가지 않고 오세근이 빠졌을 때 팀의 4번으로 뛰었다.[3] So Sexy Boy (×3) 양희종! (2번 반복)[4] 연세대 박건연 감독의 밑에서 대학 고학년 시절을 보내며 이런 이미지가 굳어졌다.[5] 본인은 이 사실을 2011-12 시즌 PO에서 알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데뷔 시즌부터 줄곧 있어왔다. 이전에는 '기록지에 쓸 게 없어 슬픈 남자'로 불렸다.[6]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고학년을 이길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태권왕을 했는데 대개 태권왕 출신들은 태권도 국가대표가 된다.[7] 지금도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양희종이 정점을 찍고 1년을 허비하지 않은 채 얼리로 프로에 나왔더라면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큰 선수가 되어있을거라는 것에 대한 의견이 존재한다. 농구에 만약이란 없습니다[8] 03학번 07-08 시즌 신인들이 황금 1세대, 오세근, 김선형, 최진수 등이 포함된 07학번 11-12 시즌 신인들이 황금 2세대로 불린다.[9] 전체 1순위는 김태술, 2순위는 이동준이었다. 지명 후, KT&G를 생각했다고 인터뷰 했지만 드래프트 직전까지 오리온스에 좀 더 생각이 있었던 듯 하다. 당시 여론 또한 김태술과 양희종 중 1순위가 누구일지가 최대의 관심사였고, 가드가 필요했던 SK가 김태술을 뽑는다면 오리온스는 당연히 이동준보다 성장면에서 앞선 양희종을 뽑을 것이라 생각했다.[10] 유도훈 감독은 이 드래프트장에서 처음으로 KT&G의 감독으로서 공식석상에 데뷔했다.[11] 결승 상대는 본인의 모교인 연세대...[12] 정확히 말하자면 돌파와 슈팅까지는 상대가 막을 새가 없을 만큼 대단하지만 손목 부상이 의심될 만큼 지독하게 슛이 안들어갔다.[13] "희종이는 공격에서 별다른 활약이 없다", "양희종은 달리 수비하지 않아도 될 거라 본다"[14] 이미 무록이 별명을 넘어서 양희종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굳어졌기에; 그냥 무록 뒤에 신을 붙여버렸다. 사실상 희종신과 같은 뜻이다.[15] 강동희는 양희종의 크레이지 모드에 "양희종을 봉쇄하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양희종이 계속해서 폭발하면 시리즈를 우리 페이스대로 운영하는 게 힘들다. 앞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라고 자평했다.[16] 다만 경기중 무릎끼리 부딪혀 부상이 나오는 경우는 매우 흔한 일이다. 무릎 십자인대 부상으로 한 번씩 부침을 겪었던 선수들 기사를 보았다면 대부분 이렇게 부상 당한 것.[17] 3점을 던진 선수들을 포함하면 팀내 성공률 2위의 활약이다. 1위는 데이비드 사이먼.[18] 부상 당시 코에서 피를 흘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피에서 뼛조각이 함께 나오던 모습이 TV로 생중계되었을 정도의 큰 부상이었다.[19] 플레이오프까지 놓고 보면 2016-17 KBL 챔피언결정전 6차전에서 8개를 성공시킨 그 경기가 최다.[20] 평균 득점이 올라갔고, 개인 한 시즌 최다 3점슛 개수를 경신했다.[21] 다만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를 포함한 경기가 남아 완전한 영구결번은 시즌이 종료된 후에 이루어졌다.[22] 참고로 챔프전 6차전 이후 양희종 본인이 팀의 주장으로서 스펠맨을 따로 부르더니 '너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우리 지난 시즌에 SK에게 지고 체육관에 남아서 슛 연습을 했던 것을 잊었어?'라고 말하며 스펠맨을 각성시켰다고. 덕분에 챔프전 7차전에서 스펠맨의 활약으로 KGC가 통합우승에 성공했다.[23] 개막전 후 최다 연승(8연승), 최단기간 20승(24경기), 최단기간 30승(89일), 최소경기 30승(37경기), 최단기간 40승(123일), 최소경기 40승(47경기), 최단기간 100승 감독(강동희 : 842일), 최단기간 최소경기 정규시즌 우승 확정(123일, 47경기), 2위팀과 최다경기승차 정규시즌 우승(8경기). 이 모든 것이 2011-12 시즌 원주 동부가 쓴 기록이다.[24] 윤호영은 중학교 3학년때 농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1년을 유급할 수밖에 없었다.[25] 이후 인터뷰에서 양희종은 '동부에 있어서 윤호영이란 말은, 김주성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발전할 수 있고 부럽다는 의미'라고 해명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26] 다소 필터링이 없는 인터뷰로 전반적인 내용 자체도 챔피언결정전 패배를 심판의 탓으로 돌리는 뉘앙스의 대화가 포함되는 등 양희종에게 한 발언을 제외하고도 전반적인 내용 자체가 까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취중 인터뷰라는 성격을 이용해 기자가 인터뷰이와 약속하며 나누었던 선을 제대로 못 지킨 결과란 평과 함께 나중에는 윤호영 본인보다 기자가 더 많이 까였다.[27] 6차전에서 황진원의 에어볼을 림에 맞은 슛으로 인정해 득점 인정을 하는 등 동부에게 유리한 판정들도 꽤 있었다. 결국 1순위로 욕먹어야 할 사람들은 논란의 여지를 만드는 심판들이다. 그러나 판정 때문에 동부가 패배했다기에는 시리즈 내내 안양의 올코트프레스와 빠른 템포에 말려들어서 진 게 훨씬 크다. 5차전 이정현의 3쿼터 버저비터 등이 이를 나타내주는 장면[28] 이 당시 윤호영은 지고서 왜 징징대냐, 군대가서 멘탈이나 키워와라 등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29] 루즈볼, 대인방어에서 완벽에 가까운 수비실력을 갖추었다.[30] 그러나 이후 심판에 의해 무효처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