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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嚴昌錄
생년 미상 ~ 1988년

1. 개요
2. 생애
2.1. 김대중 곁에서
2.2. 갑작스러운 실종
2.3. 지역감정의 설계자?
2.4. 최후[1]
3. 능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마타도어의 귀재,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지역감정을 선거판에 끌어들인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 3명 김대중, 박정희, 노태우에게 지원 요청을 받은 대한민국에서 유례없는 킹메이커다.

2022년 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설경구, 이선균 주연의 킹메이커가 제작되었다. 다만, 실명은 사용하지 않아 서창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2. 생애[편집]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온면에서 태어났다. 주을중학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인민군 징집을 피해 산속에 숨었고, 중학교 선배 및 학우들과 함께 반공 유격대에 입대해 내무서를 파괴하는 등 유격 활동에 참여했다. 1950년 11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북진해 온 국군에 편입되어 헌병대 보조원으로 있던 중 월남했고,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現 동해시 묵호동),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 등지에서 KSC(미군부대 노무자부대) 소속으로 복무했다.[2] 이후 부상을 입어 양구군 국립구호병원에 입원했다가 제대했다.[3]

제대 이후 강원도 인제군에 정착해 이곳에서 한약방을 개업해 경영하던 중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김대중을 알게 되었고, 이듬해인 1961년 김대중의 비서에 임명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4]

2.1. 김대중 곁에서[편집]


계속 낙선하던 김대중을 도와 그의 약점을 보강시키고 1961년 재보궐선거와 1963년 총선에서 재선까지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보좌역에 이르기까지 10년간 김대중의 참모로 선거를 도왔다. 그의 선거 전략은 당시 박정희 세력의 주된 방식이던 공권력 남용과 돈을 이용한 금권력 양쪽의 틀을 부수고 당시 여당의 위기상황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2.2. 갑작스러운 실종[편집]


1971년 박정희에 맞서 김대중 캠프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던 중 이후락이 개입된 것이 의심되는 중앙정보부 요원 4명이 그의 집에 방문하자 아내에게 '동교동에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선거 끝날 때까지 실종되었다.[5]

그의 실종 이후 지지율이 밀리던 박정희경상도를 중심으로 지역감정론을 창출하여 중부와 남부간 투표를 부수고 전라도를 격리하여 전라도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에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이때 박정희의 선거 전략이 수정된 방식을 보고 김대중을 위시한 동교동계 측에서는 엄창록의 솜씨가 보인다면서 상대편에 강제로 합류한 것이 아닌가 크게 의심하였다.[6]

그렇게 1971년 대선이 끝나고 박정희가 당선된지 한 달 후, 실종됐던 엄창록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발견하여 찾아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일이 있어 한동안 속리산에 있었다'고 해명하였으나, 이후로 그렇게 존경하던 김대중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평생을 김대중이나 동교동계를 만나는 것을 피하고 도망다녔다.


2.3. 지역감정의 설계자?[편집]


당시에는 여촌야도 성향이었으므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박정희 지지가 강했으니 전라도에서 김대중을 밀어주는 게 현실성이 없다는 얘기도 있으나, 7대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도시화가 가장 늦었던 전라도 지역은 박정희의 공화당 지지에서 야당인 민주당 계열로 지지를 바꾼 상태였다. 광산 지역을 제외하면 마찬가지로 도시화율이 미미했던 강원도의 경우, 5대 대선에서는 윤보선을 지지했다가 6대 대선에서는 여당의 박정희를 지지하는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 전라도와 강원도의 지지세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대선에서의 무조건적인 여촌 지지 경향은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었으며[7],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박정희가 강세였던 것은 7대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무려 10년이나 지난 옛날 이야기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1987년 야권 단일화 실패로 인한 평화민주당 분당으로 지역감정이 생겼다는 설에 대해서도, 1970년대에도 이미 한국 사회에 전라도에 대한 혐오 감정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증언들도 많다. 한 예로 민주당 신경민 의원은 1970년대 무렵, 어느 여대생과 미팅을 하러 나간 자리에서 그 여대생이 신경민더러 혹시 고향이 전라도냐고 묻기에 신경민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여대생은 자기 부모가 전라도 사람과는 결코 사귀지 말라고 했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이야기를 그의 저서인 개념사회에서 말한 바 있다. 또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을 하러 파견된 공수부대원들 사이에서 "전라도 XX들 다 때려 죽인다"라는 말이 나온 바 있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영상도 남아있다. 심지어 2020년 5월 미국 기록물관리청에서 기밀이 해제된 43건의 기록물의 내용에서도 광주에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의 원인으로 전라도에 대한 혐오 감정 등의 지역주의를 들고 있다.#


2.4. 최후[8][편집]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안기부를 시켜 대선 선거 캠프에 합류시키려 하였으나 "지금은 어차피 아무 것도 안해도 당신들이 이긴다."며 웃기만 하고 합류를 거절하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함께 대선에 출마했기 때문에 이미 둘의 패배를 예견한 것이다. 결국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13대 대선 직후, 평생을 피해 다녔던 김대중의 근황을 물어본 뒤 사망했다.[9]


3. 능력[편집]


실종 전까지는 박정희 정권이 공무원들과 경찰까지 동원한 공권선거와 금권선거를 하는 것에 반발하여 당시 기준으로 국내에서는 없었던 획기적이고 전략적인 방식과 유권자 심리를 이용하는 선거 운동을 실행하였다. 화장실에 김대중이 쓰여진 고급비누를 배포하여 표심을 얻는가 하면, 상대편 후보 캠프 사람인 것처럼 꾸며 짝짝이 고무신을 선물하거나 봉투에 형편없는 액수의 돈이나 싸구려 담배를 살포하는 등 '비호감'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교묘한 선거 전략을 펼쳤다.

게다가 그는 상황을 예측하는 판단력도 뛰어나 투표 이후 당시 박정희 정권이 투표함에 비리를 저지를 것을 예상하고 선거 감시인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손전등을 배포하였고, 실제로 그의 실종 이후에 투표장에서 야간에 박정희 정권의 공무원들이 투표함을 도둑질하려고 왔다가 선거 감시인단들에게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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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8년1월 사망링크[2] 기존 서술에서는 조선인민군심리전 담당 하사관으로 복무했다고 하나 1971년 2월 4일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오히려 조선인민군 징집을 피해 반공 유격대원으로 활동했고, 항간에 떠도는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이나 조선인민군에서 복무했다는 것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3] 1971년 2월 4일 동아일보 기사[4] 김대중은 1958년부터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당적으로 정치활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현지에서 상업 활동을 하던 엄창록을 알게 된 것 같다.[5] 정확히는 71년 1월 27일 '김대중 후보 집 폭발물 사건'이 일어나자 중정에서는 자작극이라며 김대중 측 인사 51명을 조사하였고 심지어, 김대중의 14세 조카 김홍준이 범인이라며 고문까지 가했다. 이때 엄창록, 아내, 가정부 까지 다 끌려갔는데 이와중에 엄창록에 대한 중정의 회유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6] 엄창록의 스타일이 여당운동원인척 하며 비싼 담배를 피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싸구려 담배를 뿌려서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전술이다. 그런데 갑자기 경상도 일대에서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호남후보에게 몰표를 주자'라는 유인물이 호남향우회 이름으로 돌았는데 이것이 엄창록의 평소 전술과 같다는 것이다.[7] 서울과 부산에서는 "야도"가 두드러지긴 했지만.[8] 88년1월 사망링크[9] 호흡기 질환으로 인해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 말을 못하는 상태라 글씨를 써서 선거 결과를 물어볼 정도로 최후까지 김대중에게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