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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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작대1.jpg
업성터(삼대)에 세워진 조조의 석상. 업성삼대는 동작대, 금봉대(금호대), 빙정대를 말한다.

1. 개요
2. 역사
2.1. 전성기
2.2. 1차 몰락
2.3. 일시적 부활
2.4. 2차 몰락
3. 복원
4. 업성박물관


1. 개요[편집]


鄴, 邺 (위나라수도[1])

업성(鄴城) 또는 그냥 업이라고도 부른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로 업군(鄴郡)이라고 나온다. 오늘날 표준중국어로는 邺城이라 쓰고 'yèchéng'(예청)이라고 읽는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河北省) 한단시(邯郸市)[2] 린장현(临漳縣)과 허난성(河南省) 안양시[3] 안양현(安陽縣)에 걸쳐 있다. 업의 가운데는 장수(漳水)강이 흐른다. 종종 육조고도 (六朝古都)라 불리며, 중국 7대 고도에 있어 안양시 대신에 들어가기도 한다.


2. 역사[편집]


파일:조조삼대.png
원소조조가 세운 조위 대의 업성 (업 북성). 서북쪽 공터의 3대가 보인다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이 처음 건립했다고 전해지며, 전국시대에는 위나라의 영토로, 서문표가 부임하여 치수를 위해 인신공양을 하는 무당을 처단하고 장수에 수리시설을 만들어 홍수를 이겨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전국 말 위나라가 대부분의 영토를 진나라에게 뜯기는 등 망해가면서 북방 지역인 업성은 조나라에 넘어갔으나, 3년 만에 다시 진나라가 왕전을 앞세워 탈취. 통일 진제국의 36군 편제에서는 조군(趙郡, 한단군)에 속하였으며, 전한 초에 한단 일대가 제후왕의 봉지인 조국(趙國)이 되면서 여기서 분리되어 위군(魏郡)의 치소가 된다.

후한 말부터 기주의 주도이며 원래 전한-후한 시절에는 상산국에 속한 고읍현[4]이 주도였다. 또한 하북평야의 중심에 있어 위진남북조 시대에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한복원소가 각각 본거지로 삼았으며, 조조가 원소 세력을 멸망시킨 뒤(208년) 위공(魏公)에 오른 뒤 허창을 떠나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다.[5] 조조에게 실권이 있어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게 되었고, 황제가 있는 허창(당시 이름은 허도)은 행정중심지 정도의 위상으로 내려갔다.[6]

2.1. 전성기[편집]


파일:업성 유적.jpg
6세기 중반 업성의 모습

조조가 동작대를 세워 유명하고, 동작대 준공 뒤 조조가 업군에서 살면서 실질적인 본청으로 번성했다. 그러나 조조 사후 조비가 즉위하자 허창으로 잠시 옮겼다가 바로 낙양으로 다시 천도했다(...). 동탁이 불태운 후 낙양은 한동안 쇠락했었지만 조비 시대쯤 되면 어느 정도 수습이 됐고, 고대 중국에서 중국 전체의 수도로 가장 좋은 곳은 누가 뭐래도 낙양장안 두 도시로 통했기 때문이다.[7] 업성은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에 불바다로 도시가 홀랑 날아가는 등 엄청난 수모를 자주 겪었지만, 중요도시 취급을 받았다. 화북 관동지방과 관중지방에 각자 독자적인 정권이 수립될 경우, 관중지방의 입장에서는 장안에 정도하였으며. 그리고 관동지방의 입장에서는 업에 정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북위가 업으로 천도하려 했고 위진남북조시대의 끝인 동위와 그 실질적 후신인 북제도 업에 수도를 두었다. 오호십육국 시절에 파괴된 업성은 다시 동위의 실권자였던 고환이 업으로 천도를 정하게 되고[8] 북위의 본래 수도인 낙양에서 궁성의 자재들까지 직접 옮겨와서 새로이 지었는데, 고환은 기존의 업성이 작고 협소하다고 기존의 업성에다가 남성(南城)을 덧 붙여 크게 증축하였다. 뿐만아니라 외성을 낙양보다도 크게 만들고 북위의 낙양 시절에 처음으로 생긴 방(坊)을 깔끔하게 기획하여 중국 도성사적 관점에서 도시구획의 방리제가 기본옵션이 되는 첫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새로운 성의 남문인 주명문(朱明門)은 중국의 역사국가들의 도성 가운데서 처음으로 거대한 쌍궐식 구조로 축조되기도 하였다.

기존 업성(북성)을 재건하고 낙양의 제도를 본받아 더 크고 완벽하게 남성을 증축하고 방리제를 시행한 도시를 만들었던 시점이 동위 북제시기로써 도시만 놓고본다면 이때가 업의 최전성기. 업성은 6개 왕조[9]가 수도를 둔 도시가 되었다.

2.2. 1차 몰락[편집]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에 의해 화북이 통일되고, 이후 제위찬탈을 준비하던 양견에 대항하여 울지형이 업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이후 업도 파괴되어 사실상 몰락하게 되었다. 양견은 업을 수도로 삼을 것에 대해서도 고려하였는데 이 저항으로 인해서 더욱 철저하게 업을 파괴하였다.

수당 통일제국이 들어서자 관동의 중추지인 업보다 옛 전통 도읍지인 장안, 낙양으로 정도하면서 업은 지역도시로 전락했다. 당장 업의 위치가 평야인 데다가 바로 옆에 장하(장수)가 흐르니, 홍수만 나면 업성 전체가 물바다인 등 수공에 취약해서였다. 실제로 삼국시대 때 이 점을 노리고 조조가 심배가 겪은 그 장하의 수공을 폈다.

따라서 도시를 지키려면 장하의 치수 활동 및 주기적인 도시보수작업이 필요했는데, 서진 정권 몰락 후 오호십육국시대가 되자, 그럴 돈도 생각도 인원도 없어 점차 범람하여 유역을 바꾸는 장하가 도시를 파먹었다. 북방 유목민족들인 오호가 중심이 된 북조는 농경을 잘 모르고 수리사업은 더더욱 몰랐던 데다가 북조에서는 북위 전까지 기껏해야 수십 년 집권하고 왕조가 교체될 정도로 불안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대규모 치수사업은 불가능했다. 또한 알았어도 황하의 치수사업은 통일왕조도 어려워할 정도로 엄청난 고난도였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적으로 앞서 있던 근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도 여러번 실패했을 정도였다.[10] 그리하여 업의 성이 크게 중축되었지만 반란 몇 번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은데는 이런 탓도 있다.

다만 전술하듯이 업의 최전성기가 남북조시대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인위적으로 계속 신경써줘야하는 자연적 취약성이 있다는 것이지 단순한 유역 변경과 침식만으로 몰락한 것은 아니다. 대약진 운동/치수사업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황하 유역의 치수는 현대에 와서도 어려운 것이었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전국시대에 일단락 된 장강 상류의 도강언보다도 난이도가 높았다.) 명나라 초기에 몰락했다는 것은 서진의 멸망 이후 최소 천년 뒤의 일이다. 업은 당나라 때까지 지역 거점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업이 장하 때문에 몰락했다는 건 위진남북조 시대를 기준으로는 틀린 서술이다. 저 시대 낙양은 수양제가 복구하기 전까지 아예 폐허였다.

2.3. 일시적 부활[편집]


742년, 당현종이 상주를 업군으로 개칭했다. 756년, 안록산이 다시 상주로 개칭했다. 그후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가 낙양에서 상주로 천도하는 기적이 벌어졌다. 안경서는 상주를 안성부로 승격시키고 흩어진 절도사들을 이곳에서 집결시켰다. 그러나 사사명이 다시 당에 반란을 일으켜 안경서의 연 세력을 몰아내었고 업군도 함께 다시 몰락하였다.

2.4. 2차 몰락[편집]


759년, 사사명이 업군으로 개칭했다. 762년, 업군은 다시 상주로 개칭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업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장수의 유역변경을 아무도 못 막아서 강줄기가 업성 중심부로 들어와 이전에 번화했던 곳이 완전히 습지대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업과 그 둘레는 초토화되었다. 덕분에 위진남북조의 대도시 업은 완전히 사라졌고 업성 변두래의 작은 마을만 남았다.

현재 독립된 행정구역으로서의 업성은 없다. 도시 폐허의 북쪽은 허베이, 남쪽은 허난성에 속해있는 등 몰락했다. 허베이-허난성의 경계가 바로 업군 가운데를 흐르는 장수다. 그나마 업성이 있었던 흔적만을 알 수 있는 지명들만이 남아 있는데, 북부에 업진촌(邺镇村)이라는 작은 촌락이 남아서 업이라는 이름을 잇고 있다.[11]

3. 복원[편집]


파일:업남성.png
동위 ~ 북제 시절 황궁이던 업 남성의 발굴 현장

그러나 관광객을 끌어모으러 조조의 동상을 세우고 위나라 유적을 복원하는 중이라 한다. 이미 업성 유적지가 나왔다. 그리고 장기적인 발전계획에 따르면 주변을 모두 발굴조사해서 과거의 업성을 모두 되살리려 드니, 해당 계획을 완성한다면 비록 유적지지만 다시 한번 업성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동작대는 이미 3개의 누각 중 남측 1개는 복구해 놓은 상태이다.

동작대의 복원 이후에는 업 남성에 대한 발굴조사도 시작하여 2019년에 들어 동위 북제 시기에 궁성이 있었던 예신장촌(倪新庄村)의 북쪽에서 발굴이 진행중에 있다. 궁성의 차지문(車止門)을 비롯한 궐문이나 본궁 별궁 등의 시설로 추정되는 주요한 건물지들의 초석부분이 확인되었다.


4. 업성박물관[편집]


2009년 8월 11일 업성박물관이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2011년 1월 박물관 본관 건립이 완료되었다. 조위 시대의 업성과 동위 및 북제 시기의 업성 등 업성의 각 역사적 시기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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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상용한자는 아니다. 오른쪽 한자는 간체자다.[2]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3] 상나라의 도읍.[4] 지금의 스자좡시(석가장(石家庄) 가오이 현(고읍(高邑)[5] 한마디로 후한 말에 업을 차지했던 세력가들은 항상 업을 본거지로 삼았다는 소리.[6] 허도는 원래부터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으나 조조 본인의 근거지인 연주와 가깝고 위치상 이점으로 수도로 삼았던 것이었다. 훨씬 번창한 업과 기주를 집어삼키게 됐으니 여기로 근거지를 옮긴 것.[7] 업은 하북쪽에 있어 대오전선이나 대촉전선과도 위치가 멀고, 서량까지 뻗어있는 위나라의 수도로서는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쳐있다. 다만 당시 조조는 낙양과 장안을 둘 다 점거하고 있었는데도 업을 기반으로 삼은 것을 보면 당시엔 업이 더 번창한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낙양과 장안이 둘 다 얼마 전에 동탁, 그리고 이각/곽사의 내분으로 엉망이 된 바 있었기 때문. 낙양을 동탁이 불태운 일화는 유명하고, 삼국지연의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삼보의 난도 장안을 '2~3년간 사람의 흔적이 없어졌다'고 기록될 정도로 초토화한 바 있다. 업 역시 원담/원상 형제의 내전과 조조의 공격으로 전쟁에 휘말린 적은 있지만 피해가 그리 심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난세였던 후한 말에 공격을 겪지 않은 도시는 거의 없었다.[8] 업성이 자리하고 있는 안양한단의 남쪽인 임장현은 진양(지금의 태원)에서 그리 멀지 않다. 고환이 북위 말기에 정권을 좌지우지할 시절에 진양에 거점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보면 업군으로 천도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동위·북제의 황제릉이 업성에서 진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고, 그 길목을 따라 선비족 특유의 석굴을 두는 것 등을 통해보면 타당성이 있다.[9] 후조의 폭군 석호가 천도, 염민의 염위(위나라), 동위와 북제의 수도.[10] 마오쩌둥 정부는 치수사업을 위해 댐을 건설했는데, 토사에 댐이 모조리 막혀서 못쓰게 되자 어떤 댐은 지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철거해야할 정도였다.[11] 그 외에도 과거 성문의 이름을 딴 마을들이 조금씩 남아 있다. 인수문(人壽門)의 이름을 딴 인수촌이라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