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로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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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660px-General_Edward_L._Rowny_USA_(retired).jpg[1]

에드워드 "레온" 로우니(Edward Leon Rowny)
1917년 4월 3일 ~ 2017년 12월 17일 (100세)

1. 개요
2. 2차 세계대전
2.1. 1941년
2.2. 1944년
3. 6.25 전쟁
3.1. 인천 상륙작전
3.2. 인천 상륙작전 이후
4.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



1. 개요[편집]


에드워드 로우니는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출신이자 퇴역 미 육군 중장이다. 로우니는 총 5명의 미국 대통령을 보좌한것으로 유명하다.


2. 2차 세계대전[편집]



2.1. 1941년[편집]


로우니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제 41공병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까지 대령이였던 스모키 조 우드[2]라는 장군의 휘하에서 복무했다. 로우니의 회고록에 따르는 우드 장군이 자신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2.2. 1944년[편집]


1944년 9월 15일부터 1945년 5월 8일까지 로우니는 보병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하면서 2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투였던 친쿠알레 작전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육군부 작전과에 근무하면서 일본 본토 상륙작전 기획에 참여했다. 여담으로 그가 속해있던 팀에서 사람을 달로 보낸다는 발상을 했다고하더라.[3]


3. 6.25 전쟁[편집]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자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에게 보고를 하고 이후 맥아더에게 보고한다.[4]


3.1. 인천 상륙작전[편집]


로우니는 2명의 장교[5]들과 함께 작전을 계획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로우니를 포함한 3명의 장교들의 공통된 생각은 서해안에 상륙한다는 점이였다. 3명의 장교들은 각각 계획서를 제출했는데 알몬드 장군은 그걸 발표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때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하는건 어떤가?" 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이에 로우니는 두가지를 근거로 반대했는데 첫번째로 서울의 근처이므로 적이 강하게 저항할것이다라고 들었고 두번째로 조수의 차를 예시로 들었다. 로우니의 이런 반대에도 결국 맥아더는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이후 그는 USS 마운트매킨리함에 올라타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다.


3.2. 인천 상륙작전 이후[편집]


이후 장진호 전투당시 로우니 장군은 비행장 활주로를 건설하여 물자보급과 부상자 수송을 담당한다. 그리고 흥남철수 당시에 로우니는 병사들이 탈출한 이후 자신도 탈출해야 되는데 때를 맞추지 못해서 2명의 병사들과 함께 고립된다. 그들은 중공군에게 항복하는 상황까지도 고려했으나 마침 지나가는 미군비행기에 SOS신호를 보내서 다행히 구조되어 일본의 공군기지에 상륙한다. 이후 로우니는 보병연대의 지휘권을 얻는다.


4.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편집]


베트남 전쟁 이전부터 로우니는 무장 헬리콥터의 실전사용을 제의한다. 원래 로우니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고집으로 인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여 본격적으로 무장 헬리콥터를 시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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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년에 찍힌 사진이다.[2] 전쟁 이후에는 도시계획설계자라는 직업을 얻었다고 한다.[3] 운명의 1도 내용[4] 대부분 맥아더에게 먼저 보고했다고 하나 자서전에서는 알몬드에게 먼저 보고했다고 한다.[5] 린 스미스 대령과 , 제임스 랜드럼 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