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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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초년
2.2. 런던 대공습 중계
2.3. 매카시즘을 비판하다
2.4. 말년
3. 업적과 한계


1. 개요[편집]


Edward R. Murrow.
1908년 4월 25일 ~ 1965년 4월 27일

미국언론인.

CBS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역사적인 순간을 중계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나치 독일영국 본토 항공전을 중계한 방송, 매카시즘을 비판한 방송은 오늘날까지 세계 방송사에 길이 남아있다.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60분(시사 탐사보도)의 진행자 마이크 월리스 등과 함께 CBS가 자랑하는 전설적인 언론인으로 평가받는다.


2. 일생[편집]



2.1. 초년[편집]


1908년에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서 1930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1935년에 CBS에 입사했다.

2년 뒤 유럽으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2차 대전을 맞이한다. 그리고 역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2.2. 런던 대공습 중계[편집]


1940년 여름, 독일의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었고 머로는 이를 열심히 보도했다. 당시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했고, 엄청난 수의 가옥 및 건물들이 파괴되었는데, 그 와중에 마이크를 들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목숨을 걸고 공습상황을 라디오로 생중계했다.[1] 너무 위험했기에 윈스턴 처칠은 처음엔 머로의 중계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머로가 처칠을 설득하여 중계를 하게 되었고, 이 방송을 계기로 2차 대전 참전에 부정적이던 미국 내 여론이 바뀌는데 기여했다. 방송 기록은 2004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선정한 National Recording Registry에 영구 등재되었다.


2.3. 매카시즘을 비판하다[편집]


전쟁이 끝난 뒤에는 씨 잇 나우(See It Now)란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이것도 대박을 터뜨렸다. 제작비만 해도 1주당 2만 3천 달러가 편성될 정도로 CBS의 간판 프로그램이었다. 이는 CBS가 저녁뉴스에 할당한 것보다도 많은 액수였다.

1950년 조지프 매카시가 "국무부에 공산주의자 205명이 암약하고 있다!"라는 폭탄 발언을 한 뒤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닥칠 때, 미국의 언론은 공산주의자로 몰리지 않기 위해 침묵을 지켰는데,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최초로 매카시와 싸운 인물이 머로이다.[2] 머로는 1954년 3월 9일 방송에서 그대로의 사실만을 이용해 매카시의 행적을 논리적으로 비판했고 이에 분노한 매카시는 약 일주일 뒤인 4월 6일 반박 방송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 머로의 논조가 냉철했던 반면, 매카시는 흥분조로 머로에 대한 인신공격을 잔뜩 담아 반박 방송을 치렀으며, 이는 TV에 그대로 여과없이 방영되었다.

머로 팀은 그의 반박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CBS 사장 프랭크 스탠턴의 입장은 달랐다. 반박 방송이 나간 뒤 스탠턴 사장은 머로를 불러 설문조사 결과를 보여주었다. 반박 방송을 통해 머로가 친공산주의자라고 믿게 되었다는 대답이 전체의 3분의 1인 33퍼센트를 차지한 것이다. 비록 매카시 보도 이후 머로와 뉴스 팀은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이 방송이 그들의 저널 인생을 정점으로 이끌었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머로와 매카시의 싸움은 머로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씨 잇 나우의 가장 큰 업적은 '미국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했다'는 매카시의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한 TV 청문회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매카시는 이 방송으로 인하여 궁지에 몰린 나머지 미군 내에도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주장을 해 버렸고, 이건 미 육군 원수 출신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연관지어질 수도 있는 또다른 스캔들을 낳게 된다. 거기다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출신으로, 이 주장으로 자기 당을 팀킬해버린 것이다. 이 결과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까지 매카시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청문회가 열린 것이다. 매카시는 이 청문회를 통해 증거도 없이 허위주장을 한 것이 들통났고 상원의 비난결의안 채택으로 매카시는 정치적 생명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 성과에도 불구하고 씨 잇 나우는 시청률에서 쇼 프로그램에 밀려 편성시간을 심야로 옮겼고 결국 1958년에 폐지되었다.

비록 씨 잇 나우 자체는 폐지되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퀴즈쇼 스캔들로 방송사들이 궁지에 몰리면서 공익성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CBS 리포트가 씨 잇 나우의 후신격인 시사프로그램으로 재편성되었고, '60분'(Sixty Minutes)[3] 등 여타 미국의 TV 시사프로그램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60분'은 오늘날의 추적 60분, PD수첩 등과 같은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효시에 해당한다.


2.4. 말년[편집]


한편 1958년 10월 15일, 시카고에서 라디오 텔레비전 뉴스국장 연차총회가 열렸다. 머로는 이 총회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논쟁적 연설을 한다. #들어보기 #전체 스크립트

"처음에 우리 역사는 우리가 만든다고 말씀드렸죠. 우리 방송이 이대로 가면 역사의 비난을 받을 것이며,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생각과 정보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맙시다. 에드 설리번이 장악한 일요일 저녁 시간이 '미국 교육현실 진단'에 할애되리란 꿈도 가져봅시다. 한 두 주 뒤면 스티브 앨런의 시간도 '미국의 중동정책 철저분석'에 넘어가겠죠. 그런다고 광고주 기업의 이미지가 손상을 입을까요? 주주들이 불평과 분노를 토로할까요? 수백만 시청자들이 조국과 기업의 미래가 달린 주제에 관해 폭넓은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 외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자만에 빠져 고립되든 말든 아무도 관심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단 한 기자의 의견이라도 논박하려면 충분한 증거가 있어야 된다고요. 만약 그들이 옳다면 무엇을 잃어야 될까요? 그들이 옳다면 TV는 바보상자가 되어 세상과 격리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겠죠. TV는 지식을 전합니다. 깨달음도, 영감도 선사합니다. 허나 그것은 오직 최소한의 참고용으로 쓰일 때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TV는 번쩍이는 바보상자(wires and lights in a box)에 불과합니다. 좋은 밤 되시고, 행복하십시오(Good night, and Good luck.)"[4]


이 연설은 일명 '바보상자 연설(The wires and lights in a box speech)'이라고 불리며 20세기 미국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으나, 그 자리에 있었던 CBS 중역들은 머로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실추했다고 격분했다. 참고로 이 연설이 있을때가 미국 방송계가 퀴즈쇼 조작의혹으로 몸살을 앓았을때이고 실제 의회 조사결과에서 실제 조작으로 드러나서 더더욱 충격을 주어 시청자들 사이에서 아예 방송을 국유화시켜야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었다. 에드워드 머로의 해당 발언도 퀴즈쇼 스캔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한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는 연상할수 있는 발언임을 알수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발언에 광분했던 것과는 별개로 각 방송사에서 퀴즈쇼 스캔들로 시청자들의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별수 없이 퀴즈쇼를 폐지시키고 그 자리를 뉴스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등으로 채울수밖에 없었다. 이 날 연설 이후 완전히 멘붕이 온 머로는 1959년 8월 26일, 1년 간의 안식 휴가를 받고 유럽으로 떠났다. 사임 혹은 해고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했지만, 본질적으로 머로는 자신의 직업에 환멸을 느낀 것이 분명한 듯하다.

복귀 후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해외공보처[5] 국장직을 제의 받았고, CBS를 떠났다. 1965년 57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6]


3. 업적과 한계[편집]


에드워드 머로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때에 억울한 의심을 받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권력에 맞섰고 진실을 보도했다. 비록 방송은 종영되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머로는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큰 힘에 굴하지 않고 불의를 폭로한 훌륭한 기자였다. 사회를 바꾸기 위한 최후의 희망이 진실 보도라고 끝까지 믿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의 핵심이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만큼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훗날 언론의 자유를 지켜낸 이 고집스런 방송인은 신념을 관철해 낸 저널리즘의 파수꾼으로 기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머로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라는 잣대에 밀려 몰락하게 된 사례는 시청률과 수익이 최고권자인 저널리즘의 환경 속에서 개별 저널리스트의 한계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가 매카시와 싸웠던 때의 일은 2005년에 만들어진 굿나잇 앤 굿럭이라는 영화로도 볼 수 있다. 데이비드 스트라탄[7]이 머로역을 맡아 상당한 싱크로율과 머로의 목소리를 재현해냈다. 조지 클루니가 이 영화의 감독을 맡았으며, 머로의 친구이자 <See It Now>의 PD 역할을 연기 하였다. 2013년에 뉴스타파에서 그를 다룬 영상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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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로가 방송을 중계하던 건물은 공습의 한가운데에 있었다.[2] 마침 매카시즘이 군부를 덮치며 전쟁영웅이자 후일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가 반발하고 맞서기 시작하여 최고의 아군이 되어주었다.[3] 마이크 월리스가 장기간 진행자로 활동했다.[4] 참고로 1957년 2월 2일 일본의 저널리스트 오오야 소이치도 '일억총백치화'라는 말을 사용하여 TV의 해악을 비판했으나 오오야의 발언은 TV가 무조건적으로 저속한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도 일본에서 '일억총백치화'라는 단어는 방송금지용어로 올라가 있다.[5]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USIA). 미국 정부의 대외 홍보 기관[6] 하루에 카멜 담배를 3갑 정도 피웠으며, 그로 인해 왼쪽 폐를 잘라내야만 했다.[7] 본 얼티메이텀에서 CIA 부국장 노아 보슨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