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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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텔러
Edward Teller

출생
1908년 1월 15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사망
2003년 9월 9일 (향년 95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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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분야
물리학
서명
파일:Edward_Teller_signature.svg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헝가리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2. 생애[편집]


헝가리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청년기인 1920년대에 독일로 이주해서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들어 독일에서 유태인 박해가 심화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1940년대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어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에 일조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자 핵분열 기술에 바탕을 둔 기존의 원자폭탄보다 훨씬 강력한 핵융합 무기(즉, 수소폭탄(일명 H-Bomb))의 개발을 옹호하였고, 결국 1950년대 초 이를 개발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냉전 시대를 비롯한 일생의 대부분을 통틀어 핵 군비 경쟁에 적극 찬동하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냉전 막바지인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우주 배치형 미사일 방어, 즉 SDI[1]에도 찬성한 바 있다. 역시 핵무기 개발의 선구자격 인물로 유명한 동시대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핵무기 개발 후 양심의 가책으로 반(反)핵, 평화주의를 주장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2][3] 심지어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데도 핵폭탄을 사용해서 한방에 공사를 끝내자는 주장까지 했을 정도다.

2003년에 향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3. 기타[편집]


각종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전쟁광 유형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그를 모티브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대표적이다.

1957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중국양전닝은 그의 제자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3년작 영화 《오펜하이머》에도 등장한다. 배우는 감독으로 유명한 사프디 형제의 베니 사프디. 실제 역사대로, 주인공인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수소폭탄의 개발을 놓고 대립하였으며, 그가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할 때 불리한 증언을 하는 등의 행적이 묘사되었다. 그나마 영화 종반부에 엔리코 페르미 상을 받은 오펜하이머와 화해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4]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연출로, 오펜하이머와 텔러가 서로 미소를 지으며 악수하는 사진을 《타임》 사진 기자가 찍기도 하였다. 다만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는 굳은 얼굴이었고 여전히 텔러를 경멸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 본인도 텔러에게 상처를 받은 것을 완벽히 떨쳐내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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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뜻한다. 스타워즈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2] 같은 유태인이었지만 오펜하이머가 태어날 때부터 미국인이었던 반면, 텔러는 유럽에서 살다가 나치의 박해를 직접 경험하고서 미국으로 망명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텔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나치즘냉전을 계기로 등장한 소련 공산주의 위협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반공주의자였고, 핵무기를 통한 힘의 우위를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3] 물론 망명 유태인 출신 과학자들 중에서도 이후 반(反)핵, 평화주의로 돌아선 사례는 적지 않다. 맨해튼 계획이 시작된 계기를 마련했던 레오 실라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여기에 포함되었다.[4] 실제 역사에서 텔러는 오펜하이머보다 1년 앞선 1962년에 페르미 상을 받았는데, 오펜하이머를 다음(즉, 1963년) 수상자로 추천하여 화해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