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윈 반 데 사르

덤프버전 :


에드윈 반 데 사르의 역임 직책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프랑크 더부르
(1996~2004)

에드윈 반 데 사르
(2004~2008)


지오바니 판브롱크호르스트
(2008~2010)


에드윈 반 데 사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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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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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프리미어 리그 골든글러브(2000년대)|파일:프리미어 리그 심볼.svg

2008-09 PL 골든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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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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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 · 2008-09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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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6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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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반 데 사르의 기타 정보





네덜란드의 축구인


이름
에드빈 판데르사르
Edwin van der Sar
출생
1970년 10월 29일 (53세)
네덜란드 포르하우트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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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97cm,[1] 93kg[2]
직업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 경영인
소속
선수
포레홀테 (1980~1985 / 유스)
VV 노르드베이크 (1985~1990 / 유스)
AFC 아약스 (1990~1999)
유벤투스 FC (1999~2001)
풀럼 FC (2001~200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5~2011)
VV 노르드베이크 (2016)[3]
경영
AFC 아약스 (2012~2016 / 마케팅 디렉터)
AFC 아약스 (2016~2023 / 사장)
국가대표
130경기[4] (네덜란드 / 1995~2008)
가족
아들 조 반 데 사르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이후
4. 플레이 스타일
5. 평가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수훈
7. 여담



1. 개요[편집]


네덜란드축구 선수 출신 축구 경영인. 2016년부터 AFC 아약스CEO를 맡았다.

아약스에서 1군 무대에 데뷔한 이래 황금 세대의 멤버로 활약했고, 맨유에서는 페테르 슈마이켈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며 팀의 전성기를 지탱하였다.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도 1998 월드컵 4강, 유로 2000 4강, 유로 2004 4강을 이끌면서 오렌지 군단의 골문을 사수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2.1.1. AFC 아약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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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홀테와 노르드윅에서 유년기를 보낸 반 데 사르는 1990년 에레디비시의 명문 아약스로 이적하여 1990-91 시즌부터 성인팀에서 뛰었다. 같은 해 루이 판 할이 아약스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점차 팀의 주전으로 올라섰고, 1991-92 시즌 UEFA컵 우승과 1994-9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경험하며 세계적인 골키퍼로 성장했으며 1995년 유럽 최우수 골키퍼에도 선정되었다. 1995-96 시즌에 무려 1082분의 무실점 기록을 세웠다. 1997-98 시즌 더 흐라프스합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골키퍼에겐 드문 골 기록을 남겼다.

2.1.2. 유벤투스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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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 유벤투스와 계약, 유베 역사상 최초로 비이탈리아인으로 주전 골키퍼의 등번호인 1번을 받은 선수가 되었다.[5]

유베에서 좋은 활약을 펼칠 거라 예상했으나, 유벤투스의 낮은 수비 라인에 적응하지 못하고 종종 실수를 범해[6] 신뢰를 잃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유로 2000에서도 네덜란드의 주전 골키퍼로 맹활약했으나, 하필이면 4강에서 만난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톨도가 날아다니는 바람에 또 패배. 그 자신에게는 바로 전 메이저 대회인 98년 월드컵에서의 승부차기에 이은 또 다른 승부차기 패배가 되고 말았다. 이후 당시 파르마의 슈퍼 유망주였던 잔루이지 부폰이 계약하는 바람에 바로 풀럼으로 이적하게 된다.[7]

2.1.3. 풀럼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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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1일, 7.1m 파운드의 이적료로 프리미어리그풀럼과 4년 계약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비록 유벤투스에서의 부진이 있었지만, 여전히 A급 골키퍼였고 나이도 많지 않았던[8] 반 데 사르를 원하는 구단은 세계적인 팀들은 많았다. 그러나 반 데 사르는 우승이나 유럽대항전에 대한 부담이 없는 풀럼을 선택했다. 풀럼 이적을 보고 당시 전문가들은 이제 반 데 사르는 끝났다는 설레발을 치기도 했다.

반 데 사르는 2005년까지 풀럼에서 127경기를 뛰었다. 2001년 8월 18일이 반 데 사르의 프리미어리그 데뷔전. 장소는 공교롭게도 올드 트래포드였다.[9] 02-03 시즌에는 앨런 시어러가 선수 시절 단 5개만 실패한 페널티 킥 중 하나를 막아내기도 했으며, 2003-04 시즌에는 하이버리에서 아스날의 소나기슈팅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2004-05 시즌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 후안 파블로 앙헬[10]로부터 페널티킥을 2번이나 선방해내며 1-1 무승부를 이끌어낸 명경기도 있다.

이렇듯 이적할 당시의 우려와는 달리 풀럼에서도 여전히 좋은 활약을 보이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당시 맨유의 고질적인 골키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m 파운드의 이적료에 반 데 사르를 영입하게 되었다. 이 당시 훈훈한 미담을 남겨서 풀럼 서포터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11] 다만 맨유 이적 대단한 활약을 기대했다기보다는 당장 급한 불을 꺼줄[12] 적당히 안정적인 키퍼 및 자리가 안정화되면 추후 서브 키퍼로 옮겨갈 키퍼 즉, 긴급 수혈 차원으로 영입한 것이었다. 당장 이적 당시 나이를 봐도 35세로 골키퍼임을 감안해도 전성기에서 내려올 시기였다. 현대에도 30대 중후반에 빅클럽 주전으로 활약하는 골키퍼는 많지 않은데 2000년대 중반은 더욱 그러한 시기였다. 사실상 각종 팀의 백업 키퍼로 옮겨다녀도 이해할 나이고 더욱이 빅클럽도 아닌 풀럼에서 활약한 반 데 사르에 대해 오랫동안 활약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영입해보니 그 결과는...

2.1.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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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는 과거 1999년 피터 슈마이켈이 팀을 떠나면서 새로운 골키퍼를 찾기 위해 반 데 사르도 주시했으나 유벤투스로 이적하면서 성사되지 못했는데, 돌고 돌아 2005년 6월 10일에 드디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적하자마자 팀의 부동의 주전을 꿰차면서 슈마이켈 이후부터 골칫거리였던 골키퍼 불안을 해소했다.[13] 이들의 뒤를 이어 입단한 반 데 사르도 사실 처음에는 길어봐야 2~3시즌만 하고 은퇴하거나 이적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무려 6시즌동안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며 맨유의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물론 나이가 나이인지라 간혹 실수가 나오기는 했다.[14]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에 비하면 매우 훌륭하고 든든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2006-07 시즌에는 이전 시즌 이적해온 네마냐 비디치파트리스 에브라가 적응을 마치고 반데사르 본인도 안정적인 선방 능력과 수비 조율로 수비진을 안정시켜 맨유의 4년 만의 PL 우승에 공헌하였고,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비록 굉장히 잘했지만 이미 만으로 36, 37줄에 들어선지라 후임이자 백업으로 전 시즌에 임대했던 토마시 쿠슈차크을 완전영입했다.

여담으로, 이 시즌 리그 26R 토트넘 전에서 로비 킨과 충돌해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문제는 교체카드를 이미 전부 써버린 것. 결국 존 오셰이의 만능땜빵 능력이 발동하여(...) 잠시나마 반 데 사르의 빈자리를 든든하게 지켜내며 클린시트(!)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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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 시즌에는 2007년 FA 커뮤니티 실드 첼시와의 경기에서 승부차기를 3번 연속 막아내면서 우승을 만들어내며 시즌을 시작했다. 시즌 초반 약간의 부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맹활약을 펼치며 EPL 2연패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어 맨유의 더블을 이루어냈다.[15] 특히 챔스 결승에서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니콜라스 아넬카의 슛을 막아내어 맨유의 9년 만의 빅 이어를 따내게 했다.

2008-09 시즌에는 노쇠화의 기미 따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경기력이 계속 유지하였다. [16] FIFA 클럽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95-96 시즌의 1082분의 무실점 기록을 뛰어넘어 14경기, 1,311분의 무실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선 페트르 체흐의 1,035분이 최장시간 무실점 기록이었는데 이것마저 깨버렸다. 나이 39에 이걸 달성하다니 엄청난 기록이다. 이후 시즌 막바지에도 계속해서 꾸준히 나와 좋은 경기력을 펼치며 결국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챔스도 4강에서 아스날을 꺾으며 2년 연속 챔스 결승행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챔스 결승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전반전 에투의 득점과 후반 메시의 헤딩 골로 2점을 허용, 메시의 골에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습을 보였다. 결국 2:0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2009-10 시즌에는 프리시즌에 아우디컵 경기에서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시즌 초반 12경기에 나오지 못했다.[17] 이후 10월 6일 에버튼전에 복귀했으나, 11월 말에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전력에서 이탈하였고, 1월이 되어서야 복귀했다. 결국 2009-10 시즌은 부상으로 21경기 출전에 그쳤고 그 동안 대신 나오던 쿠쉬착과 포스터는 이전에 가끔 나왔을 때의 좋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아주 불안한 경기력을 보이며 이전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했고, 반 데 사르였다면 선방할 슈팅이나 잔실수를 범하며 그의 빈자리를 메꾸지 못했다. 이 시즌에 맨유는 리그 타이틀을 다시 첼시에 내주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에 의해 탈락하면서 8강에 그쳤다. 한편, 2월 26일에 1년 재계약을 체결해 다음시즌도 맨유에서 보게 되었다.

2010-11 시즌, 올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어차피 지난 시즌부터 지속적으로 마지막 시즌 떡밥이 나오기도 했고 나이도 40대에 다다른 만큼 팬들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 분위기지만, 시즌 막바지에 이른 첼시와의 사실상 우승 결정전에서도 눈앞에서 오는 헤딩슛을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막거나 프리킥을 슈퍼세이브 하는 등 꼭 은퇴를 해야만 하나...? 라는 반응을 이끌어 낼 정도로 마지막까지도 활약은 상당했다. 퍼거슨 감독이 한 시즌은 더 뛸 수 있다고 설득했는데도 거절했는데 그 이유가 감동적이다. 뇌졸중으로 투병 중인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서라고...[18]

반 데 사르의 대체자가 누가 될 것일지도 관심사였는데 당초 후계자로 지목됐던 토마스 쿠슈차크나 벤 포스터는 선방 능력에 비해 안정감에서 부족한 모습으로 나사 빠진 플레이를 보여준 데다가 벤 포스터는 지난 시즌에 잦은 실수를 범하면서 결국 여름 이적시장에 팀을 떠났다.[19]

2011년 2월 2일에 펼쳐진 아스톤 빌라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어시를 기록했다.[20]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박지성의 골이 나왔을 때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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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리그에서는 우승을 거머쥐었고, 리그 최종전인 블랙풀과의 홈 경기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섰다. 2실점을 허용하긴 했지만 4골을 터뜨린 공격진 덕분에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자신의 축구 커리어 마지막 경기인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의 압도적인 공격을 투혼의 선방으로 선보였지만 결국 3-1로 무릎을 꿇었다. 이 날 반 데 사르는 8개의 슈팅을 막아냈다. 그리고 반 데 사르는 40세 211일의 나이에 결승에 출전한 것인데, 이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개편 이후 역대 최고령 출전이라고 한다. 마지막까지 이런 활약을 하였으니 대단한 것이 아닐수 없다.

시즌이 끝나고 예정대로 은퇴하였다.


2.2. 국가대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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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메이저 대회 출전이었던 유로 2008에서의 모습.
1994년 미국 월드컵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3번째 골키퍼로 명단에 올랐으나, 출전하지 못했다. 1년 뒤인 1995년 6월 7일 벨라루스전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유로 1996을 시작으로 유로 2000, 유로 2004, 1998년 프랑스 월드컵[22], 2006년 독일 월드컵, 유로 2008까지 총 6번의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였다.

유로 1996과 1998년 프랑스 월드컵[23]에서 대표팀에 선발되어 맹활약했다. 안타깝게도 1998년 월드컵 4강에서 브라질과 웬 탈모 키퍼를 만나 패배.[24]

2002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포르투갈과 아일랜드에게 패하며 조 3위로 본선 진출에 실패하여 월드컵 출전이 불발된 적이 있다. 이후 절치부심하여 유로 2004에서는 8강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승부차기 끝에 네덜란드를 4강에 진출시켰으나 포르투갈에게 패해 결승 진출은 좌절되었다.[25] 유로 2004 이후 대표팀 주장으로 임명되었고, 2006년 독일 월드컵부터 주장으로 참가하게 된다. 2007년, 유로 2008을 끝으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회 기간 네덜란드는 같은 조였던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대파하며 조 1위로 8강에 올랐으나, 자국 출신의 명장인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러시아에게 1-3로 패해 자신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를 마감하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으나 새로 부임한 베르트 판마르베이크 감독이 2008년 10월, 2010 월드컵 유럽 예선을 치르는데 골키퍼 마르턴 스테켈렌뷔르흐와 케네스 베르메르가 부상으로 나오자 못하자 긴급히 판데르사르에게 국가대표팀 임시 복귀를 요청했고 판데르사르는 이를 수락했다. 2경기 모두 출장하였고 A매치 총 130경기를 뛰어 웨슬리 스네이더가 2017년 6월 A매치 134경기로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전 선수였다.


3. 은퇴 이후[편집]


은퇴하자마자 2011/12 시즌 복귀 떡밥이 떴다. 다비드 데 헤아나 리니고르가 아직 여물지 못해 최후방이 매우 불안해져서 맨유팬들은 복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26] 그러나 데 헤아가 후반기부터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여 잠깐의 떡밥으로 끝났다.

이후에도 맨유에 도움을 주었는데, 2012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당시 맨유와 유벤투스를 놓고 고민하던 같은 네덜란드의 선수 로빈 반 페르시에게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27]

유베의 부회장으로 일하는 파벨 네드베드처럼, 은퇴 후에는 지도자 대신 구단의 프런트로 활동하고 있다.

은퇴 이후 아내의 병간호를 하면서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으며, 향후에는 아약스의 코치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한 적도 있다.

2012년 말에는 친정팀인 아약스에서 마케팅 담당으로 보드진에 이름을 올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사업 수완이 중요한 자리인데 새로운 일에 대해 전 소속팀이었던 맨유의 데이비드 길 사장에게서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2015년 11월 14일 영국 vs 세계 올스타로 치러진 유니세프 후원 자선경기에서 박지성, 지단, 피구 등과 함께 월드팀의 멤버로 선발되었고, 전반을 1실점으로 막고 경기 본 사람은 알겠지만 현역으로 복귀해도 될 듯 보였다후반 시작과 함께 교체 아웃되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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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자신이 데뷔 후 5년간 몸 담았던 네덜란드 3부 리그 노르드윅에서 주전 골키퍼의 부상으로 인해 SOS를 보냈다고 한다. 즉, 한시적 현역 복귀를 원했는데 반 데 사르의 응답은 OK.# 그리고 복귀전에서 PK를 선방하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걸 입증했다. 경기는 1:1 무승부.

2016년 11월 AFC 아약스 구단의 CEO로 승진했음을 밝혔다.

2018-19 시즌에 CEO로서 팀의 22년만의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을 경험했다.

2020년 여름 도니 판더베이크의 맨유 이적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4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에드 우드워드 부회장이 사임 의사를 밝히자 그 후임자로 부임설이 나왔으나 2023년까지 AFC 아약스 구단과 재계약을 해서 무산되었다.

2022년 6월에 방한해서 한국과 브라질의 경기와 2002 레전드 올스타전을 관람했다.

2022년 9월 9일, AFC 아약스 구단과 2025년까지 연장계약을 하였다.

그러나 2022-23 시즌 아약스 팬들의 민심은 험악한 편이다. 마르크 오베르마스가 떠난 뒤 디렉터 대체 없이 본인이 운영에 적극 참여했으나 팀 성적이 좋지 못하고, 에릭 텐하흐 이후 부임한 알프러트 스뢰더르는 성적 부진으로 일찌감치 경질되었다. 스뢰더르 경질 이후 대체 감독을 찾지 못해 용 아약스에서 욘 헤이팅아를 급하게 콜업하기에 이르렀다. 급히 부임한 헤이팅아는 경험 부족을 드러냈고, 팀은 3위로 쳐지며 UCL 진출에도 실패했다. 현지에서는 팀이 이 지경이 된 데에 반 데 사르의 책임을 묻고 있다.

결국 2022-23 시즌이 끝난 후, 한국 시각으로 5월 30일에 아약스 CEO직을 내려 놓게 되었다. #

7월 7일 뇌출혈로 쓰러져 급히 병원에 이송되었다. 현재는 중환자실에 있으며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


4. 플레이 스타일[편집]



199cm의 거대한 신장과 날렵한 다이빙을 이용해서 도저히 못 막을 것 같은 공도 막아낸다. FC 온라인의 능력치 높은 골키퍼들처럼 실제로 막는다고 보면 된다. 다이빙을 개구리처럼 폴짝 뛰는 데에 상당히 능숙하며,특히 뛰어난 부분은 폴짝 뛰어 공을 골문 밖으로 쳐내는 다이빙 능력으로, 장신의 키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팔길이가 어드밴티지로 작용해 이 분야에서만큼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핸들링이 매우 우수하여, 본인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은 아무리 강력하게 날아오더라도 거의 다 펀칭하지 않고 잡아낸다. 공중볼도 마찬가지로 펀칭보단 캐칭을 선호하였다. 골키퍼로서 상황 판단 능력이 좋고, 실수를 거의 범하지 않았다.

아약스 출신답게 선방 능력에서 그치지 않고 빌드업 능력도 좋았다. 특히 전방의 달려가는 공격진을 향해 롱킥이 상당히 정확했다. 상술했듯이 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오른발잡이지만 왼발도 꽤 능숙하게 사용하는 편이다.

선수 경력 후반에 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는 남다른 수비 조율 능력까지 보여주었다. [29] 다만 선수 생활 후반의 선방들은 반응속도가 매우 빠르다 보기에는 어렵고, 정확하게 위치선정을 하고 상대의 발 모양을 보고 어느 정도 슈팅 방향을 미리 예측해 다이빙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때문에 10-11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페드로 로드리게스의 슈팅 방향을 잘못 예측해 골을 헌납하기도 했다.

승부차기에서도 강했다. 2007년 커뮤니티 실드에서는 리그 내 최강 라이벌 첼시와의 승부차기에서 피사로, 램파드, 라이트-필립스의 슛을 모두 막아내며 3:0 승리를 통해 팀에게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안겨주었다. 존 테리의 눈물로도 유명한 07-08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도 첼시의 7번째 키커 니콜라스 아넬카의 PK를 막아내 맨유의 마지막 챔스 우승에 기여하였다.[30][31][32] 이렇듯 승부차기에서는 확실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평소 반 데 사르는 PK를 잘 막는 골키퍼로 명성을 떨치진 않았다. 통산 58개의 PK 상황에서 49개의 페널티킥 실점을 허용했고 9개의 페널티킥을 선방해냈다. 이는 사실 20%도 안 되는 낮은 선방 비율이다.

마누엘 노이어는 반 데 사르를 자신의 롤 모델이라 했는데, 이는 판 데 사르가 준수한 발밑을 가지면서 활동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이다.[33] 이러한 반 데 사르의 역량과 역할은 골문 앞에서 선방만 하기 보다는 빌드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현대 축구의 골키퍼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이 바로 노이어가 반 데 사르를 롤 모델로 꼽았던 중요한 이유였다.[34]


5. 평가[편집]


네덜란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 받는다. 또 당시 1990년대~2000년대, 쟁쟁한 골키퍼들 사이에서도 실력적으로 전혀 밀리지 않는 최정상급의 실력을 갖춘 골키퍼였다. 다만 스타성이 부족해서인지 비교적 축구팬들 사이에서 레전드 골키퍼 반열에 이름이 덜 오르는 선수이기도 하다.

또한 90년대의 피터 슈마이켈, 2010년대의 다비드 데 헤아와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6.2. 개인 수상[편집]




6.3. 수훈[편집]


  • 오라녜나사우 훈장 장교장: 2010


7. 여담[편집]


(2014년 프랑스 풋볼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나를 중요한 선구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관점을 매우 이른 시기에 가져온 선수 중 한명은 반 데 사르다. 반 데 사르는 발밑을 매우 자주 사용했으며, 포지션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도록 하였다. 나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난 아약스의 철학을 좋아했다. 어린시절 아약스의 경기를 녹화해둔 비디오가 매우 많았다. 그들의 경기 비디오를 찾아보고 그들의 게임을 따라왔다.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를 묻자) 이거 대답하기 어렵다. 언제나 그 시대 세계적으로 위대한 골키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경기 방식들이 변해져 왔기도하고. 나의 어린시절에는 반 데 사르가 나의 우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굉장히 현대적으로 플레이했고 골키핑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 -마누엘 노이어-


  • 린 반 데 사르라는 딸과 조 반 데 사르 라는 아들이 있다. 유로 2004 당시 스웨덴과의 8강전 경기 직후 반 데 사르가 안고 세리머니했던 아들이 바로 조 반 데 사르인데, 현재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축구를 하고 있다. 포지션도 골키퍼다. AFC 아약스 유스 소속이었으나 아버지가 구단의 레전드고, 또 현재 구단의 CEO를 맡고 있음에도 프로 선수로 계약하는 데 실패했고, ADO 덴하흐와 프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18-19 시즌에는 RKC 발베이크로 이적했다가 19-20 시즌부터는 3부 리그의 노르드베이크에 소속되어있다.

  • 다이빙을 뛸 때 입을 벌리고 뛰는 습관이 있으며 골키퍼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습관이다.

  • 도니 판더베이크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시키면서 맨유팬에게 편지를 썼다.

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골키퍼.pn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골키퍼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최고의 골키퍼 4위에 이름을 올렸다.
[1] 원래키는 199cm인데 나이가 들면서 2cm 줄어들었다[2] 현역시절 88kg[3] 현역 시절 5년간 뛰었던 유스팀이었는데 주전 골키퍼가 부상당해 일시적으로 합류한 뒤 곧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4]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전 2위[5] 이후 2018-19 시즌에 등번호 1번을 받은 비이탈리아인 골키퍼가 한명 더 나왔다.[6] 유벤투스 시절의 지네딘 지단 자책골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도는데 반 데 사르의 실수도 컸다.[7] 그래서 FM의 전신격인 CM3에서 부폰을 싫어하는 선수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실제로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다.[8] 이적 할 당시 만 30세. 골키퍼로서는 한창 전성기일 나이다.[9] 맨유 원정, 2-3 패[10] 2006-07 시즌에는 토트넘과의 경기에서 한 경기 PK 실축+자책골을 기록한 바 있다.[11] 애초에 풀럼과 맺었던 계약기간이 다 되어서 맨유는 풀럼에 이적료를 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반 데 사르는 중소구단인 풀럼에 이적료를 남겨주기 위해 일부러 재계약을 했다. 물론 맨유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이적료를 지출한 것이 되었지만 그 금액이 100억도 되지 않는 헐값이었고 반 데 사르의 활약은 그 이적료 값을 하고도 남았기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12] 마크 보스니치, 파비앙 바르테즈, 로이 캐롤, 팀 하워드 등등이 엄청나게 실수하면서 키퍼야 말로 맨유의 구멍인 시대였다. 여기에 이 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골키퍼는 그 유명한 피터 슈마이켈로 그 어떤 키퍼도 슈마이켈의 후계자로 불릴 정도로 잘 하지 못 했다.[13] 슈마이켈 이후로 맨유는 알다시피 골키퍼 문제가 많았는데, 예를 들자면 마약을 한 마크 보스니치에 야신상 경력이 있으나 기름손에다가 절친 앙리에게 패스해주는 파비앵 바르테즈, 맨유에서 처음에만 잘하고 이후 자신감을 상실한 팀 하워드, 아스날을 상대할 때만 잘했던 로이 캐롤, 맨유 골키퍼 암흑기의 상징으로 평가 받는 마시모 타이비 등 슈마이켈 이후의 골키퍼들은 문제가 많았다.[14] 예를 들면 06-07 시즌 포츠머스와의 경기에서 리오 퍼디난드와의 콜이 맞지 않아 어이없는 자책골을 내주기도 하고, 10-11 시즌 웨스트 브롬위치와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해 무승부를 한 바가 있다.[15] 1994-95 아약스 시절에도 을 기록했었다.[16] 덕분에 자신이 차세대 No.1으로 활약할 것이라고 믿고 맨유로 이적한 쿠쉬착은 그냥 커리어를 날릴 수 밖에 없었다.[17] 벤 포스터가 이로 인해 선발 기회를 많이 잡았으나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며 반 데 사르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18] 이 말은 기량 하락에 따른 은퇴가 아니란 소리다![19] 훗날 밝혀진 바로는 한창 폼이 오를 때 반 데 사르의 후계자로 영입되었던 쿠슈차크는 맨유를 떠나고 싶었으나 놔주지 않았음을 밝혔다. 그러다가 결국 2012년에 임대로 맨유를 떠나고 11-12 시즌이 끝나고는 완전히 이적해버렸다. 2군 골키퍼인 벤 아모스도 마뜩찮은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덴마크의 아네르스 리네고르 이적에 합의하여 2011년 1월 1일에 영입하기로 결정했다.[20] 전반 1분만에 자신의 진영에서 길게 차준 롱킥을 루니가 트레핑 이후 바로 슈팅으로 연결하여 선취골을 뽑아냈고 이것은 정식으로 판데르사르의 어시로 기록됐다.[21] 여담으로 울버햄튼전에서 두 골로 팀의 승리를 이끈 박지성을 경기 끝난 후 돌아갈 때 에브라와 함께 들어 올려주어서 한국 팬들의 훈훈함을 얻으셨다.[22] 당시 대한민국이 네덜란드에 5:0으로 깨진 경기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기에, 대한민국과도 안면이 있다.[23]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를 맞아 경기 막판에 오르테가를 퇴장시키는 등의 맹활약을 펼쳐, 네덜란드 대표팀을 4강에 올려 놨다.[24] 98년 월드컵의 4강전에서 브라질과 맞섰는데, 이때의 브라질은 당시 최전성기의 위용을 자랑하던 희대의 먼치킨 호나우두를 비롯, 둥가, 히바우두, 베베토, 호베르투 카를로스, 레오나르두 아라우주레전드가 즐비했다. 거기에 골키퍼로는 클라우지우 타파레우까지.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했는데, 당시 반 데 사르는 타파레우가 2개를 막아낸 데에 반해 단 1번도 막지 못했다.[25] 승부차기에서 당시 스웨덴의 주장인 올로프 멜베리의 슛을 막아낸 후 무표정으로 마지막 키커 아르연 로번에게 "이제 네가 차서 끝내라"는 식으로 삿대질을 한 건 그야말로 폭풍간지다. #[26] 폴 스콜스도 중원보강을 위해 현역으로 복귀했다.[27] 반 데 사르는 유벤투스와 맨유에 모두 뛰어본 선수인 데다가 같은 고향 출신이라서 같은 두 팀에게 제의를 받은 반 페르시가 그에게 전화로 두 팀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그런데 반 데 사르가 유벤투스에 대해서는 몇 마디만 해주고 나머지 몇십 분을 맨유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고 한다. 반 페르시도 어느 정도 맨유로 마음을 굳히고 전화를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반 데 사르의 조언으로 확고한 결심을 한것으로 보인다.[28] 웬만한 레전드 경기는 선발출전하면 후반에 교체한다.[29] 만 35세가 되어 이적한 맨유에서는 나이 때문인지 실수가 때때로 있었다. 골키핑 자체에서의 실수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수비진과의 콜플레이가 되지 않아서 생긴 실수들이다.[30] 둘 다 상대가 첼시였다는 게 상당히 묘하다.[31] 07-08 챔피언스리그의 경우에는 사실 존 테리의 실축이 아니었다면 첼시가 우승했을 것이다. 체흐가 3번째 키커 호날두의 슛을 막았기 때문.[32] 사실 챔스 결승전에서 반데사르는 방향을 읽고 막으려 했다기보단 방향을 정해놓고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1번째부터 6번째 키커의 슛은 모두 방향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끝내 아넬카는 이 심리전에 말려들었다.[33] 수비라인이 올라가 있을 때는 망설임 없이 하프라인 바로 아래까지 튀어나가며, 가끔씩 나오는 전력질주 상황에서도 주력이 상당히 빠르다.[34] 이런 적극적이라는 점이 반데사르가 수비라인이 낮은 세리에에서는 실패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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