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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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콜린스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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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10
1911
1913
1917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Collins%20Eddie%20Plaque%20167_N_0.png
에디 콜린스
헌액 연도
1939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77.74% (4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14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에디 콜린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조지 시슬러[1]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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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트로브릿지 콜린스 시니어
Edward Trowbridge Collins Sr.

출생
1887년 5월 2일
뉴욕 주 밀러튼
사망
1951년 3월 25일 (향년 63세)
매사추세츠보스턴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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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좌타
신체
175cm, 79kg
소속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06~1914)
시카고 화이트삭스 (1915~1926)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27~1930)
감독
시카고 화이트삭스 (1924, 1925~1926)

1. 개요
2. 선수시절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4. 은퇴 후
5. 여담



1. 개요[편집]


1910~20년대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던 위대한 2루수이자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좌타 2루수[1]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멤버다. 한때 당대 최강 2루수 이미지였던, 냅 라조이[2]의 뒤를 잇는 최고의 2루수라는 평가도 받았던 선수다.[3] 리그 전체에서 원톱으로 튀는 몬스터 시즌들보다, 공수 모두에서 톱급 플레이를 유지하는 최정상급 시즌을 40대 초반까지 이어가는 꾸준함[4]이 장점이었던 선수라 주목을 덜 받았던 데다가, 범인이 아니었음에도 블랙삭스 스캔들로 밉상으로 찍혀 영구결번[5] 대우도 못 받았을만큼 저평가가 가장 심한 선수[6]이다. 세이버매트릭스상으로의 커리어는 로저스 혼스비[7]와 유사하며, 냅 라조이[8]를 압도할 정도이다.

아메리칸 리그 MVP도 수상한[9]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교타자 중 한 명.

통산 25시즌 2826경기 12,087타석/9,949타수 3,315안타 438이루타 187삼루타 47홈런 1,299타점 1,821득점 1,499BB/467K 741도루 .333/.424/.429 .853OPS/142OPS 512희생번트 124.4bWAR.

2. 선수시절[편집]


1887년 뉴욕 주 밀러튼의 하류층 가정[10]에서 태어난 콜린스는 어릴때부터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눈에 띄어 1906년 입단했다. 하지만 콜린스는 당시 컬럼비아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입단 초에는 학업을 수행하느라 별로 뛰지 못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인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한 1908년, 콜린스는 타율 .273 90안타 8도루 40타점을 기록한데에 이어,1909년에는 타율 .347 198안타 63도루 54타점으로 새로운 스타가 나타났음을 알렸다. 다음 해인 1910년에는 타율 .347 188안타 81도루 81타점으로 도루왕을 차지했으며 그 해 애슬레틱스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물리치고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11] 이후에도 콜린스는 프랭크 베이커[12]등과 함께 활약하며 일명 10만 달러 내야진을 구축했다. 이 내야진의 활약으로 애슬레틱스는 월드시리즈 3연패를 할 수 있었다.

1914년에는 타율 .344 181안타 58도루 85타점으로, 무려 6년 연속 3할을 기록하고 아메리칸리그 MVP까지[13]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지만 시즌이 끝난 이후 팀의 재정이 악화됨에 따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된다. 화이트삭스에서도 콜린스는 '맨발의 조' 조 잭슨, 에디 '너클스' 시카티 등과 함께 활약하며 화이트삭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1917년에는 리그우승과 동시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던 1920년 콜린스는 블랙삭스 스캔들에 휘말리고 만다. 당시 자신의 연봉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화이트삭스의 몇몇 선수들은 도박사들과 결탁하여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승부조작을 했던것이다.[14] 이로 인해 조 잭슨을 비롯한 대부분의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제명당했으며, 월드시리즈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던 콜린스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콜린스는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아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사실 콜린스는 팀내 최고연봉자로 그들보다 연봉을 거의 3배로 받아서 할 이유가 없었고, 의심도 많이 받지 않았다. 애초에 화이트삭스 이적 이유가 필라델피아에서 원래 주던 연봉을 못 주게 돼서 그만큼의 연봉을 받는 조건으로 이적한 것이다. 그리고 후세의 오해와 달리, 애초에 그들은 당시 리그 상위권 선수긴 해도 경력이나 인기로 콜린스와 비교할 급[15]이 아니었다. 콜린스는 1910년대 내내 타이 콥, 트리스 스피커, 조지 시슬러 등과 타격왕이나 안타왕[16], 도루왕 자리를 경쟁했고, 함께 스포츠 언론을 도배하면서 2루 수비의 달인이라 불리던 최고 인기스타이며 항상 팀 연봉 1위였다. 조 잭슨이 블랙삭스 멤버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해도 성적이 넘사벽이며, 막상 조 잭슨은 과거 자기 팀으로 이적해 온 선배 콜린스를 인터뷰에서 리스펙했었다.[17]

블랙삭스 스캔들이 터진 이후에도 콜린스는 화이트삭스에 계속 남아 선수생활을 했다.1924년부터 화이트삭스의 감독 겸 선수가 된 콜린스는 3년간 감독으로서 174승 160패를 기록했으며 이후 1927년 친정팀인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돌아와 선수 겸 코치로 뛰다가 1930년 은퇴를 했다.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에디 콜린스
19
271
250
71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Second Base (2nd)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에디 콜린스
123.9
64.2
94.1
2루수 HOF 입성자 평균
69.4
44.5
56.9


4. 은퇴 후[편집]


은퇴 후 애슬레틱스의 코치로 일하던 콜린스는 193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으로 임명되어 1947년까지 보스턴의 단장으로 일했다.

콜린스는 1939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4수만에 77.74%의 특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블랙삭스 스캔들 때 범인은 아니었지만, 범인들이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서 이미지가 나빠져 3번이나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18] 추후에도 100년간 저평가를 심하게 받는다.

194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레드삭스의 단장직에서 물러난 콜린스는 이후 1951년 3월 25일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64세였다.


5. 여담[편집]


  •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운동선수다. 콜린스 본인은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19세기 말 ~ 20세기 초 메이저리그에는 의외로 아이비 리그 등의 명문대 출신 메이저리거들 비율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 당시 제도가 대학선수 겸 프로선수가 가능했기 때문이고, 사립대학은 장학금 퍼주기 식으로 대학에서도 선수가 실질적으로 연봉처럼 돈을 받는게 가능했기 때문인데, 지금은 불가능해서 극도로 적다.

  • 명문대학교 출신의 운동선수라 상류층 엘리트 이미지도 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하류층이라 할만한 가난한 서민 출신[19]으로, 실제와는 다르다. 그는 부모가 둘다 세탁이나 주류 배달 등 단순 육체노동을 하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훗날 본인도 인정했을만큼 거친 환경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힘들게 자라서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청소년기 아마추어 야구를 시작한 계기도 아마추어팀에 들어가 야구를 하면 적지만 돈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가난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보려고 했던 것이다. 대학 야구부 시절에도 대학측에서 학비 면제와 대학리그 출전시 소액의 경기출전료를 받는 형태로 계약을 하여 메이저리그 출전비 따로 대학야구 출전비 따로 돈을 받았었다.[20]

  • 또한 당시 야구선수 평균 될까말까한 수준의 키(175cm)에 체격이 같은 키 선수들 기준으로도 작고 마른 편인데다가, 명문대 엘리트 출신이면 운동선수여도 뭔가 약할 것 같은 편견과 달리, 실제로는 외모와 달리 싸움을 잘하고 성격이 상당히 드세고 하류층 출신답게 욕도 무서운 욕을 써서 사적으로는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힘 좀 쓴다는 선수들도 그에게 눈도 못 마주쳤을 정도. 필라델피아에서 풀타임 주전을 맡자마자 스타가 된 뒤 군기반장으로 활동했는데, 주장을 많이 했지만 주장을 안했던 해에도 군기반장은 그였다고 한다. 본인보다 덩치 큰 후배들도 훈련이나 일정을 게을리하면[21] 콜린스가 따로 사람들 없는 곳으로 끌고 가서 폭행하거나 기합을 주거나 해서, 후에 그들 몸에 멍이나 상처들이 발견되어 팀내 소문이 크게 났었고[22], 한때 구단 간부들이 말리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근데 희한하게도 훈련 안하다가 그에게 두들겨 맞은 선수들이 성적이 올라가거나, 그가 태도불량 사유로 주전에서 빼거나 방출하라고 구단에 요구한 선수들이 빠지고 다른 후보 선수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팀 성적이 급상승하자 구단이 그의 후배폭행을 방치했다고 한다.[23] 그래도 열심히 하는 후배들에게는 배트그립이나 투수 투구버릇(쿠세) 찾는 법 등 상세한 조언을 해주고 도움을 주었다고 하니, 성실한 후배들까지 때린건 아니었던 듯 하다. 특히 선수를 완전히 그만둔 필라델피아 전업코치 시절에는 가장 무서운 코치이자, 가장 타격이나 내야수비를 잘 가르치는 코치로 유명해서 코치로도 꽤 롱런했다고 한다.

  •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희생번트 기록을 가지고 있다(511개). 한때 세계기록이었으나, 그의 사후 60여년 뒤 카와이 마사히로가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 메이저리그 올타임 레전드 중에서 동시대의 트리스 스피커, 후대의 스탠 뮤지얼 이상으로 가장 저평가를 많이 당한 선수[24]이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블랙삭스 스캔들로 저평가[25]되는 것도 있지만, 영상중계 이전 시대의 문제로 인한 저평가도 있다. 당시는 TV가 없었기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는 교타자로서의 절묘한 안타 기술이나 선수 말년에조차 묘기 수준으로 화려했다는 전설적 2루 수비를 당시 신문기사의 글로 된 설명으로밖에 찾아볼 수 없다. KBO로 치면 전성기의 정근우처럼 슈퍼디펜스를 보여주며 안타나 도루를 엄청 많이 한 날쌘돌이 이미지의 당대 최고 2루수로 볼 수 있다. 블랙삭스 스캔들 이후에도 10년 이상 당대 야구를 본 팬들에게 찬양받을 정도의 인기를 가지고 있던 건 사실[26]이라서 그가 위대한 2루수였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 타이 콥은 야구계를 떠난지 13년이 된 1941년 7월 31일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다시 감독이 되어 모든 시대의 선수를 다 쓸 수 있다면 누굴 뽑겠느냐"는 질문에 "내야수를 뽑자면, 1루수는 루 게릭, 2루수는 에디 콜린스, 3루수는 벅 위버[27], 유격수는 호너스 와그너, 포수는 미키 코크런을 뽑겠다."는 말을 남겼다. 베이브 루스는 우익수로, 조 잭슨은 좌익수로, 트리스 스피커는 중견수로 뽑았다. 로저스 혼스비[28]를 두고 타이 콥이 일부러 콜린스를 골랐다는 건, 에디 콜린스의 위대함을 알 수 있는 부분. 게다가 타이 콥은 에디 콜린스에 대해 "디트로이트 시절, 우리 팀에 가장 강했던 무서운 타자로 기억한다."는 말도 남겼다. 실제로 희한하게 콜린스는 통산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상대 타율이 가장 높았다. 무려 3할4푼9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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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이저리그 2루수 통산 WAR 2위(1위는 로저스 혼스비)이자, 메이저리그 야수 통산 WAR 9위로 그야말로 대선수이다.[2] 1901년 4할2푼1리를 쳤던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4할 타자이다. 콜린스보다 10년 선배라 콜린스가 MVP를 수상한 시기 이후 몇년 못가 은퇴했다.[3] 문제는 당대 최강의 교타자였던 콜린스의 전성기때 9년 후배이자 인간성 빼고 완성형 2루수라 할만한 거포 2루수 로저스 혼스비(2루수 최초 메이저리그 300홈런 기록 보유자다.)라는 괴물이 등장하면서 그 이미지를 구축할 기간이 짧았다는 것. 그래서, 제대로 따지고 보면 냅 라조이 - 에디 콜린스 - 로저스 혼스비가 당시 최강 2루수 계보가 맞지만, 실제로는 냅 라조이 - 로저스 혼스비로 그냥 이어지는 걸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단 지금까지도 세이버매트릭스상 에디 콜린스를 넘을만큼의 2루수는 안 나왔으므로 1위 로저스 혼스비, 2위 에디 콜린스, 3위 냅 라조이라는 순서는 변함이 없다. 사실 세이버 매트릭스로는 에디 콜린스가 냅 라조이보다 WAR이 15나 높은 넘사벽이며, 혼스비와 차이도 3 정도로 작다. 후술될 블랙삭스 스캔들이 아니었다면 로저스 혼스비와 동급비교되는 선수였을 지도 모른다. 후술될 내용대로, 타이 콥은 은퇴한지 한참 지나서도 냅 라조이나 로저스 혼스비가 아니라 콜린스를 역대 최고의 2루수로 꼽았다.[4] 40대 초반까지도 수비가 뛰어나서 2루 수비의 모범이라 불렸고, 20대에 MVP를 받았지만 30대 중후반까지도 도루왕에 도전하거나 MVP 후보에 들어갈 정도로 공수 밸런스 유지를 매우 잘했었던 역대 최정상급 내야수다.[5] 물론 등번호가 없던 시대라 진짜 영구결번이 될 수야 없지만, 똑같이 등번호가 없던 동시대 타이 콥 같은 레전드들처럼 영구결번 대우는 받을 수 있는데 못 받았다. (자신이 감독일때 제자였던 투수 테드 라이언스조차 영구결번을 받았다. 물론 이쪽은 데뷔 후 10여년이 지나 베테랑이 되었을때는 등번호가 생겼다.) 현재까지 그의 소속팀이었던 팀들의 영구결번 선수들 중 콜린스에 비할 만한 성적을 낸 선수는 아직 없다. 애초에 역대 메이저리그 2루수 투톱이고, 아메리칸리그 원톱이라 있기가 어렵다[6] 동시대의 저평가왕 트리스 스피커보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트리스 스피커는 똑같은 포지션에 타이 콥이라는 원톱 때문에 2인자 이미지로 밀린 거였고, 그럼에도 명예의 전당 투표 2번만에 들어갔지만, 현역 시절에 아메리칸 리그 2루수 중에는 라이벌이 없다 불렸고, 데드볼 시대와 라이브볼 시대 모두에서 2루 수비의 완결판이라 불리워 오히려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하고만 비교되던 최고의 내야수 에디 콜린스는 4번만에 겨우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을 정도이다. 세이버 매트릭스상 기록은 둘다 메이저리그 역대 야수 탑10급의 대선수이다.[7] 사실 이사람도 명전 투표에서는 저평가받았었다. 콜린스가 4수인데 이 사람은 5수다. 심지어 명전이 생긴 시점이 딱 이 사람 은퇴할때여서, 야구 역사상 최고의 우타자인 4할 홈런왕 혼스비를 잘 모르는 기자는 단 한명도 없었는데 계속 떨어졌다. 한국으로 치면 이만수나 이대호가 명전을 계속 떨어지는 수준. 사실 이만수, 이대호로도 부족한게, 우타자가 라이브볼시대에 4할을 치면서 42홈런 홈런왕까지 한시즌으로 다 한 거라, 후대에도 비슷한 수준으로 간 우타자가 미국은 커녕 전세계 프로리그에 하나도 없어서 비교할 선수가 없다. 4할 홈런왕은 아마추어리그에서나 좀 나오는 성적이다.[8] 20대에 1901년 4할2푼1리의 몬스터시즌을 포함하여 임팩트있는 시즌이 많았지만, 30대부터는 의외로 기복이 꽤 있어서 기록상 마이너스가 많아, MVP 시즌도 몬스터 시즌이라 하기는 힘들만큼 괴물같은 임팩트는 없었고 대졸선수라 풀타임데뷔도 늦었지만 30대에도 20대 때처럼 성적이 꾸준했고 40대 초중반까지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으로 활동했던 콜린스보다 세이버매트릭스가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팬들 머리 속에는 아메리칸 리그를 부흥했다시피하는 20대를 보낸 냅 라조이가 더 강하게 남아 있어 콜린스가 무시되곤 한다.[9] 상술된대로 1911년부터 생겼는데 1914년까지 단 4번(리그별 1명씩 총 8명)만 시상했으니 당시 선수들로써는 지금보다 더 희귀한 기회의 수상이었다. 1914년 MVP 당시 타율 2위로 기록되었고 100여년 동안 이 기록이 유지되었으나, 2020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당시 타격왕 타이 콥을 규정타석 미달자로 처리하기로 결정하며, 2위 에디 콜린스를 1위 타격왕으로 수정하여 논란이 있을 예정이다. 1922년에 MVP제도가 부활했으나 에디 콜린스는 당시 30대 중반이었고, 1923년에 만 36세의 나이에 감독 겸 선수로써 도루왕을 하며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MVP를 두고 경쟁하였다. 당시는 블랙삭스 스캔들 이후 3년밖에 안 되어 오히려 에디 콜린스의 이미지가 불리했음에도 MVP투표 2위를 했다. 오히려 그해 4할을 넘게 친 타격왕, 즉 4할 타자였던 해리 하일만이 MVP 3위를 했을 정도이니 전설로만 남아있고 기록으로 표현이 어려운 콜린스의 2루 수비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야말로 2루 수비의 달인이었다고 한다.[10] 부모가 주류배달이나 세탁물 배달, 세탁소 직원 등 단순노동만을 했고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서민 중에서도 상당히 가난한 편이어서, 선수로 성공하고 스스로한 인터뷰에서 어렸을때 이야기를 보면 빈곤층과 서민층 사이에서 간당간당했던 정도. 대신 신체능력은 어릴때부터 천재라 체격이 크지 않았음에도 운동이란 운동은 뭘해도 날아다닌다는 소릴 들을만큼 다 잘했고, 성격도 매우 거칠어서 빈민가 애들 사이에서 싸움도 가장 잘하는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이후 프로야구 스타선수가 되어 후배들 기합을 상당히 많이 주고, 필라델피아 시절 누가 항명이라도 한번 하면 인적드문 곳으로 끌고가서 죽도록 패는 걸로 유명한 선배가 되어 악명이 높았는데, 어릴때부터 싸움을 잘해서 그랬던 듯하다. 당시 스포츠계 선후배간 폭력에 무관심했던 미국사회의 분위기와 구단이 외부에 안 알려지게 통제하려 했던 시도까지 있었지만, 종종 스포츠신문에 이니셜 형식으로 보도될 정도였으니 사회분위기를 고려해도 심하게 때린듯하다.) 청소년때 아마추어 야구팀에 들어간 계기도 우승하면 돈을 준다고 해서 들어간 것이었다. 명문대도 학비 전액 장학금 처리 면제와 대학야구대회 출전수당까지 계약했기에 들어간 것이지, 금수저라서 학비 비싼 사립 아이비리그 대학을 간 게 아니다. [11] 알려졌다시피 컵스는 이때로부터 2년 전에 우승을 한 뒤 100여년을 우승을 못했다.[12] 한자리수 홈런왕이나 15홈런 미만 홈런왕이 난무하던 데드볼 시대에 홈런왕으로 유명하던 인물이다. 홈런 베이커가 별명을 넘어 선수명이 되었으며, 21세기 현재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아직도 그의 등록명을 Home Run Baker로 유지하고 있다.[13] 그때 MVP의 이름은 MVP가 아니라 Chalmer's award였다.[14] 콜린스는 당시 팀내에서 유일하게 실력대로 연봉을 받는 선수여서 의심을 많이 받지는 않았다. 물론 전에 있던 팀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할 때는 정규리그때 모습대로 활약했었는데,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못해 약간 의심을 받은건 사실이다. 허나 일류선수에게도 단기간의 부진은 흔한 것이라 조작으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이적 직후부터 당시 승부조작 선수들과의 사이도 평소에 좋지 않았던 걸로 알려진다.[15] 한국으로 치면 전성기 박해민과 전성기 정근우의 연봉을 비교하는 격이다.[16] 타이 콥과 공동으로 안타왕을 하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17] 조 잭슨은 당시로 체격이 엄청나게 커서 185cm의 키에 다른 비슷한 키 선수들보다 훨씬 어깨가 넓었고, 콜린스는 175cm에 마른 체형에 불과해 체격 차이가 많이 났는데, 그런 체격에서도 날카롭고 빠른 타구를 만들어내는 선배 콜린스의 압도적인 실력을 부러워했다. 콜린스는 베이브 루스, 타이 콥, 트리스 스피커 등 조 잭슨과 체형이 비슷했던 레전드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봐도 체격이 작다.[18] 그와 동시대 선수들이자 성적도 동급인 트리스 스피커냅 라조이가 1번만 떨어진 걸 보면, 확실히 악영향을 크게 받은 걸로 추정된다.[19] 서민 중에서도 중간 이하였다. 본인이 훗날 인터뷰에서 야구를 시작한 이유가 솔직히 처음에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순수히 돈만 보고 시작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본인을 스카우트한 그 아마추어팀에 들어가서 경기를 하면 돈을 준다고 듣고 들어간 거였다고. 메이저리그 프로로 뽑혔음에도 대학야구팀에 간 것도(지금과 당시 제도가 다른 것도 있지만), 일시적으로 대학야구팀에서도 출전 수당을 받고, 프로팀에서도 수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20] 현재는 규정상 대학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 선수를 겸임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에는 리그 겸임에 종목 겸임까지 있어서, MLB 선수 겸 NBA 선수 겸 대학야구선수 겸 대학농구선수를 했던 사람의 기록까지 있다.[21] 당시는 워크에씩 개념이 높은 선수가 적어서, 지금보다 더 술먹고 훈련 안 나오고 하는 엉망인 선수들이 많았다. 메이저리그 연봉이 탑클래스 스타 극소수를 제외하면 너무 적기도 했다. 1910년대 전성기 내내 메이저리그 연봉 5위 안에 항상 들었고 주로 2~3위를 했는데 1위를 못한건 타이 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리스 스피커와 함께 2위 경쟁을 했다. 1920년대에는 1910년대 보스턴의 스타투수였던 베이브 루스가 뉴욕 양키스의 전업타자로 변신하며 돌풍을 일으켜 1위로 떠올랐다.[22] 미국 스포츠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다.[23] 유명하다시피 그의 초기 필라델피아 주전 시절인 1909년부터 1914년까지 6년동안 월드시리즈 우승만 3번이다. 실제 팀 성적이 현저하게 향상되었던 것(물론 필라델피아가 약했던건 아니고 상위권 정도에 월드시리즈 우승은 없던 정도였는데, 에디 콜린스가 들어오고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다). 이후 화이트삭스로 이적했는데, 이유는 순전히 필라델피아가 우승을 그렇게 해놓고도 구단주가 돈을 날려 돈이 없어서였지 콜린스의 잘못은 아니었다.[24] 명예의 전당 4수가 이를 증명한다. 냅 라조이트리스 스피커가 재수다. 에디 콜린스의 커리어는 그들보다 높거나 유사한 정도지, 절대 쳐지지 않는다.[25] 콜린스가 당시 스캔들 선수들과 동급선수였다고 오해되긴 하나, 이는 절대 사실이 아니다. 그가 승부조작 선수들보다 연봉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고, 승부조작 선수들 절반 정도가 아메리칸 리그에서 꽤 뛰어난 선수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콜린스가 그들과 비교당할 선수는 아니었다. 에디 시카티건 조 잭슨이건 그들 중 누구도 그때까지 선수커리어로 콜린스와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 중 제일 WAR이 높아 유일하게 60이 넘는 조 잭슨조차 콜린스와 메이저리그 주전 생활을 같은 해에 시작했음(나이는 콜린스가 위지만 대학생활 때문에 늦게 시작)에도 콜린스보다 블랙삭스 스캔들까지 WAR이 30이나 낮고, 콜린스보다 선배였던 선수들조차도 그보다 더 낮다.(에디콜린스는 통산 WAR이 120이 넘지만 그 시기만 쳐도 WAR이 90이 넘는다.) 경력이건 인기건 어디까지나 화이트삭스의 최고 스타선수는 처음부터 그때까지 계속 에디 콜린스였다. 그는 화이트삭스에 오기 전에 이미 이전 소속 팀 필라델피아의 우승을 세차례나 이끈 아메리칸리그에서 비교할 자 없는 최고의 내야수이자 스타였고, MVP도 이미 받았었다. 당연히 필라델피아에서도 최고액연봉을 받다가 이적한 것이다. 게다가 이적 후에도 공격수비 모두 슬럼프 없이 계속 리그 최고의 실력을 보여줬다. 즉, 혹여 승부조작 선수들이 연봉을 실력과 인기만큼 받았다 해도 에디 콜린스보다는 한참 적게 받았을 수 밖에 없다. 단지 그 차이가 실제 차이보다는 적었을 것일 뿐이다. 그들이 콜린스만큼 받았어야 한다는 후세의 오해는 콜린스에게는 억울할 수 밖에 없다.[26] 후배 베이브 루스와도 MVP경쟁을 해 봤다.[27] 이 사람은 블랙삭스 스캔들 연루자이다.[28] 내셔널 리그 선수라 아메리칸 리그 타이 콥과 직접 공식 경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타이 콥이 유격수는 같은 내셔널 리그 레전드이고 직접 경기로 만난 적이 한번 밖에 없는 호너스 와그너를 뽑았기에 내셔널 리그에 차별을 두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