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빈 폰 비츨레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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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
에르빈 폰 비츨레벤
FM Erwin von Witzle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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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Job Wilhelm Georg Erdmann Erwin von Witzleben
요프 빌헬름 게오르크 에르트만 에르빈 폰 비츨레벤[1]
출생
1881년 12월 4일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브레슬라우[2]
사망
1944년 8월 8일 (향년 62세)
나치 독일 베를린 플뢰트첸지 교도소
복무
독일 제국군 (1901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5년)
독일 국방군 (1935년 ~ 1944년)
최종
계급

원수 (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베르됭 전투
상파뉴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주요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1. 개요
2. 생애
2.2.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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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육군 장교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군 사령관으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공모자이다.[3] 1940년에 원수(Generalfeldmarschall)가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편집]


1881년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주의 브레슬라우[4]에서 태어났다. 부친 게오르크 폰 비츨레벤은 프로이센 왕국 군대의 대위였다.

그리고 1901년 독일 제국군에 입대하고 1차대전에서 베르됭 전투, 상파뉴 전투를 겪으며 큰 부상을 입게 되고, 1급과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그뒤 독일 참모 훈련을 마치고 121사단으로 보내진다. 1차대전이 끝나고 전간기 동안에는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그는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며, 1929년엔 중령으로 진급한다. 이후 진급을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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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방위군 시절의 비츨레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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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왼쪽이 아돌프 히틀러, 가운데가 보병대장 시절의 비츨레벤, 오른쪽이 SS 상급집단지도자 시절의 요제프 디트리히다.

그는 반나치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1934년에 비츨레벤은 그와 에리히 폰 만슈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빌헬름 리터 폰 레프와 함께 장검의 밤에서 슐라이허와 브레도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을 때 나치 정권은 반대하였다.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에서 베르너 폰 프리치에 대한 히틀러의 강제 사임에 대한 그의 비판의 결과로, 비츨레벤은 전역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히틀러가 곧 제2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는 데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의 "전역"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실 이외에도 반나치적인 행적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오스터 음모사건의 일원이었으며, 1939년에는 커르트 폰 에쿼드의 음모에 참여하였다.


2.2. 제2차 세계 대전[편집]


2차대전이 발발하자 비츨레벤은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여 서부 전선의 1군을 맡았다. 프랑스 침공 당시 C집단군에 소속되어 마지노선을 돌파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3일만에 프랑스의 몇 사단들을 항복시키는 전공을 기록하였다. 이때의 공로로 비츨레벤은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프랑스 침공의 대승으로 히틀러는 원수 진급 대잔치[5][6]를 치르는데 이때 비츨레벤도 원수로 진급한다.

이후 1941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후임으로 서부전선사령관으로 취임하였으나 1년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하였는데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였다는 이유로 해임당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후 비츨레벤은 퇴역 군인으로써 지내는 듯 했지만...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포섭되어 쿠데타의 성공 이후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는 계획에 동의하였다. 얼굴마담 역할이었기 때문에 비츨레벤이 크게 기여한 것은 없었고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방군에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 영상의 첫번째 인물이 비츨레벤이다. 체포 당시 인사사령부에서 군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민간인 신분이었으며 군복이 아닌 평복을 입고 있다. 그러지 않았더라도 군복을 입을 수 있지는 않았겠지만. 이 재판을 맡은 판사는 바로 그 유명한 롤란트 프라이슬러이다.

군사재판에서 당연히 사형이 언도되었다. 원래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녹화된 재판 내용을 공개하려고 했었으나 비츨레벤이 끝까지 나치식 경례를 하였다는 점과 마지막에 했던 멘트 때문에 비공개로 결정하였다.

"지금은 우리를 처형시키지만, 3개월 후면 너희들이 성난 독일 국민들 손에 거리를 산 채로 끌려다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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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18일 군사재판에서[7]

비츨레벤은 재판이 끝나고 당일 교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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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비츨레벤'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폴란드 돌노실롱스키에브로츠와프[3] 비츨레벤은 이 거사에 참여한 유일한 원수다.[4] 현 폴란드 브로츠와프.[5] 독일 국방군 대부분의 원수들이 이때 진급한다.[6] 영국의 군사학자 존 키건 경은 이를 두고 히틀러의 노골적인 나폴레옹 흉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7] 이 말은 영화 작전명 발키리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