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토리 에르제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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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에르제베트
Báthory Erzsébet

파일:Báthory Erzsébet.jpg
출생
1560년 8월 7일
에르데이 공국 니르바토르[1]
사망
1614년 8월 21일 (향년 54세)
헝가리 왕국 체이테[2]
배우자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
자녀
8명

1. 개요
2. 생애
2.1. 명문 귀족의 딸
2.2. 차흐티체 성의 악녀
2.2.1. 대 튀르크 전쟁(15911606)
2.2.2. 남편의 죽음
2.2.3. 피의 목욕
2.3. 재판
2.3.1. 사망
3. 사후 의혹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4.2. 기타



1. 개요[편집]


블라드 체페슈, 질 드 레 등과 함께 흡혈귀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 세간에는 영어식 표기인 엘리자베스 바토리로 잘 알려져 있으나, 외래어 표기법에 근거한 올바른 표기는 바토리 에르제베트(Báthory Erzsébet)이다. 헝가리인동아시아처럼 성이 이름 앞에 위치한다.


2. 생애[편집]



2.1. 명문 귀족의 딸[편집]


바토리 남작, 또는 바토리 부인이라고 알려진 이 인물은 1560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3] 명문가인 바토리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시절에 바토리 가문은 에르데이 공작이자 나중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으로 선출된 바토리 이슈트반(Báthory István)[4]의 치세 아래 동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위세를 떨쳤다. 에르제베트의 어머니 바토리 언너(Báthory Anna)가 바토리 이슈트반의 누나라, 에르제베트는 바토리 이슈트반의 조카라는 높은 위치였다.

젊은 시절에는 점잖고 상당한 미인으로 알려졌으며 궁중의 예법을 배워 현모양처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에르제베트는 에체드(Ecsed) 성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1571년 11세에 5살 연상인 나더슈디 가문의 장남 나더슈디 페렌츠(Nádasdy Ferenc) 백작과 약혼했다. 그 후 시어머니가 될 오르쇼여(Orsolya)로부터 무인의 아내가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미리 배우기 위해 시댁인 샤르바르(Sárvár) 성으로 보내졌다. 오르쇼여는 매우 엄하고 잔소리가 많았기 때문에 어린 에르제베트에게 잔소리를 끊임없이 했다고 한다.

1575년 약혼자였던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과 결혼했는데, 이때 식장에는 하객 4500명이 참석하는 등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런데 에르제베트는 남편보다 신분이 더 높았다. 나더슈디가 장군이나 재상이 되는 귀족임에 비해 에르제베트는 공녀급 신분[5]이었다. 그 덕분에 결혼 후에도 '바토리'라는 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후 에르제베트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1585년부터 1598년까지 자녀 5명을 낳았다.
  • 나더슈디 언너(Nádasdy Anna, 1585~?): 크로아티아 왕국 출신 귀족 즈리니 미클로시 6세(Zrinyi Miklós VI)의 아내가 되었다.
  • 나더슈디 오르쇼여(Nádasdy Orsolya, 1590~?): 베뇨 이슈트반 2세(Benyó István II)의 아내가 되었다.
  • 나더슈디 커털린(Nádasdy Katalin, 1594~?)
  • 나더슈디 언드라시(Nádasdy András, 1596~1603)
  • 나더슈디 팔(Nádasdy Pál, 1598~1650)
  • 그 외에 나더슈디 미클로시(Nádasdy Miklós), 나더슈디 죄르지(Nádasdy György), 나더슈디 페테르(Nádasdy Péter)라는 자녀가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2.2. 차흐티체 성의 악녀[편집]


그러나 남편은 주로 전쟁터에서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으므로 결혼 생활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왜냐면 남편은 1578년 헝가리 왕국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는 등 막중한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기에 가정과 영지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에르제베트는 거대한 차흐티체(Čachtice)성[6]의 여주인으로 남아 성과 주변 마을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렇게 그녀는 할일이 많다보니 자녀들조차 제대로 신경쓰지 모하여 유모들에게 맡길수밖에 없었다.


2.2.1. 대 튀르크 전쟁(15911606)[편집]


1593년부터 1606년에 이어진 전쟁에서 에르제베트가 머무는 영지는 오스만 제국 군대의 침략에 노출되었는데, 이 때에 과부, 전쟁포로의 부인, 그리고 강간의 피해자 여성들을 대표해 사절을 주고받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2.2. 남편의 죽음[편집]


그러던 중 남편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이 1604년 49세 나이로 전사하여[7], 에르제베트는 44세에 차흐티체 성의 유일한 주인이 된다. 성주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에게 사사건건 간섭해대던 눈엣가시 시어머니 오르쇼여를 바로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 뒤 영주로 무난하게 다스렸지만 나이를 먹으며 피부가 점점 노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여[8] 성격이 신경질적으로 변해간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녀가 에르제베트의 머리를 빗기다 실수로 머리를 좀 심하게 잡아당기자 화가 나서 시녀의 뺨을 때린 것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한다. 반지 낀 손에 긁힌 시녀의 얼굴에 흐른 피가 에르제베트에게 튀었고 나중에 핏자국을 닦았는데 피가 묻었던 자리가 평소보다 좀 더 하얗게 보여서, 이후 처녀의 생피가 자신의 노화를 막고 젊음을 되찾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희생자는 머리를 잡아당겼던 그 시녀였다.


2.2.3. 피의 목욕[편집]


시녀를 살해한 에르제베트는 근처 농민들의 딸들에게 일자리를 준다고 속여 성으로 데려온 뒤 피를 짜내기에 이르렀다. 성으로 들어온 처녀를 발가벗기고 강제로 철새장에 가두어 천장에 매단 다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장치해 두었다. 처녀가 깨어나서 몸을 움직이면 새장이 흔들려 자연히 가시에 찔리게 된다. 통증을 못 이겨 몸을 더 심하게 움직이면 다른 가시에 더 찔리게 되다가 결국 기력이 빠져 죽게 만들었고, 에르제베트는 그 밑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목욕을 했다.

처음에는 샤워하고 남은 시체는 신부를 불러 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체가 점점 많아지고 죽은 사람의 숫자도 많아지다보니 신부도 의심스러워서 장례를 거부하는 등 장례의식마저도 여의찮아지자 아무 데나 버렸다고 한다. 에르제베트가 쓴 일기를 토대로 사망자를 추산하면 사망자는 총 612명이라고.

이런 짓을 하다 보니 주변 마을에서 처녀의 씨가 말랐고, 성으로 들어간 여자아이들이 하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두려워진 주민들이 딸을 성으로 보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이제는 마차를 내보내 강제로 여자아이들을 납치해 들였고, 그래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피를 얻을 수 없자 귀족의 딸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친다. 귀족적 소양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성 안에 귀족 여학교를 설립하고 한 번에 25명씩 입학생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평민들은 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벌레보다야 낫지만 아끼는 말보다는 못한 존재였기 때문에 에르제베트가 마음껏 죽여도 별다른 후환이 없었지만, 귀족의 딸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치자 화를 초래하였다.


2.3. 재판[편집]


에르제베트의 손에 붙잡힌 희생자들 중 한 명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외부에 신고하여 그 마각이 드러났다. 그 뒤 군대가 투입되어 전원이 검거되었다. 에르제베트의 성을 수색하던 귀족 지휘관인 죄르지 투로즈와 군인들은 그 참혹한 행각에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마을의 여자들이 에르제베트의 성에 가기만 하면 사라진다는 신고를 받고 조사관인 죄르지 투르조가 에르제베트의 성에 가서 연쇄 살인의 단서를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연쇄살인범으로 기소되어 1611년 재판을 받았지만 본인은 귀족이라 출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범행에 적극 가담한 에르제베트의 집사 및 하녀들은 전원 사형에 처해진 반면,[9] 그 시대 법률로는 귀족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기 때문에[10] 대신 일종의 무기 금고형에 처해졌는데, 능히 사형의 대안이 될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식사를 넣어 주는 구멍 외에는 모든 것이 밀폐되고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탑 꼭대기의 독방에 갇혀 서서히,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형벌이었다.


2.3.1. 사망[편집]


그 안에서 지내다가 결국 감금된 지 4년만인 1614년 54세로 사망했다고 한다. 무덤은 자신이 살았던 성 부근의 교회에 있었으나, 그녀를 공동 묘지에 묻은 것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소란으로 인해 고향으로 이장되었다. 무덤의 현재 위치와 교회에 있을 당시 위치는 모두 알려지지 않고 있다.


3. 사후 의혹[편집]


후대에는 에르제베트는 살인마가 아니었고 그녀의 정적들이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모함을 했다는 주장이 지지를 받고 있다. 더구나 종교개혁 이후로 바토리 가문은 대대로 칼뱅교를 믿었기 때문에 종교분쟁의 희생양 아니냐는 설도 있다.(참고) 실제로 종교개혁 이전 이탈리아의 발도파 공동체 여자들도 마녀라는 누명을 쓴 적이 있었다. 에르제베트가 살인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16세기 초부터 과부, 상속녀, 노파,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귀부인 등을 습격-모함하여 마녀로 몰아 죽인 일들이 매우 빈번했던 시기였기에 이 주장을 묵살할 수는 없다. 2008년작 영화 바토리가 이 주장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에르제베트를 마녀로 고발한 사람은 루터교회 목사였고, 조사관을 맡았던 루터파 제후는 이후 헝가리 변경백에 올랐다고 한다.[11]

영지는 에르제베트의 자녀들이 물려받았다. 반역이 아닌 단순 연쇄살인이기 때문에 당사자만 처벌하고 끝이라는 것. 이 가문은 남자 계통은 2013년까지 이어졌다가 끊어졌고 수많은 여계 자손들이 아직도 귀족으로 살아간다.

이 부분은 2015년 2월 1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기사 영상 1985년에 헝가리의 역사학자 나기 라즐로는 에르제베트가 연쇄살인마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첫째, 재판 기록에는 보통 구체적 죄명과 범행 내용이 정확히 명시되는데, 에르제베트의 재판 문서에는 오직 마녀이기 때문에 종신 구금형을 선고했다고만 기록되었다.

둘째, 당시 조사관들은 에르제베트가 일기장에 살해 명단을 적었다고 밝혔지만 이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에르제베트의 시녀들은 범죄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재판 전 화형당했다. 이는 모두 에르제베트의 결백을 증명할 증인을 없애려는 수작이라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당시 헝가리 국왕 마티아스가 에르제베트에게 전쟁 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분노하며 재산을 몰수하고자 없는 죄를 꾸며 뒤집어씌웠다고 주장했다.

만약 실제 재판내용과 라즐로가 주장한 재판 내용이 일치하면 희생양설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612명이나 죽었다면 그 규모가 전무후무한데, 재판 기록에 없다면 둘 중 하나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서 후대에서 안 믿겠다고 생각해서 은폐했거나 아예 진실이 아니거나.

다만, 바토리 가문과 나더슈디 가문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헝가리의 귀족과 지배층으로 남았고, 헝가리의 상류층들에는 상당수 에르제베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그것을 감안하여 이런 주장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서 개신교는 싹 틔우지 못하고 말살되었다고 한다. 헝가리에서는 천주교인 수가 개신교인 수의 5배가 넘으며 특히 에르제베트의 악행이 주로 행해졌다는 슬로바키아에서는 개신교를 믿으면 나환자 취급을 받았다. 현재 슬로바키아의 개신교 인구가 9%라고 나오지만 20세기 이전에는 개신교도들은 천주교인들과 거의 교류할 일 없이 자기들끼리 따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나머지는 다 천주교이거나 공산통치 시절에 생겨난 무종교인들이다. 아직도 거기서는 개신교도라고 하면 왕따를 당한다.

일단 과학적으로 보면 당시의 기술로 욕조를 피로 채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며 피로 목욕을 하는 것 또한 의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성인 1명의 신체에서 갖은 수단을 동원해 피를 완전히 짜내도 5리터 정도밖에 안 나오는데 욕조의 용적은 대개 300리터 정도이므로 욕조에 피를 채워 목욕을 하려면 한 번에 60명 정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피는 특별한 처치를 하지 않으면(피브린 제거) 금방 굳어버리는데다 피비린내는 상상을 초월하며 대부분의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구역질을 유발한다. 당장 익히지 않은 돼지고기와 소고기의 냄새만 맡아 봐도 역한데 이것도 피냄새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일단 피 몇 방울로도 충분히 물 전체를 붉게 만들 수 있으므로 물에 희석한 상태에서 목욕을 하는 경우는 가능할 수도 있긴 하지만, 피로 목욕을 할 경우 죽은 이의 피에서 발생한 질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다.

바토리가 돈 많은 여자, 과부, 종교 갈등 때문에 왕과 귀족들의 희생양이고 억울한 피해자라는 의혹은 꾸준히 있어왔다.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라 재판 기록도 꽁꽁 숨겨 아예 무존재로 만들려 했던 것 같지만 역으로 그녀의 악명을 높이고 온갖 의혹이 퍼진 것. 일종의 까가 빠를 만든 경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소문 그대로의 도살자인지 불확실한 것처럼 무고한 희생자라고 보기 애매한 점도 있다. 그녀가 결백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여러 정황에서 확인되는데, 일단 바토리의 가족들은 그녀를 위해 탄원을 제출했지만 범행을 부인하지 않았다. 단지 바토리의 목숨만 붙여달라는 내용이었다는 것.

왕과 튀르조 등이 재산을 노려서 누명을 씌웠다고 보기에도 의문스러운 게, 바토리는 잡혔을 때 물주였던 남편을 잃어 돈에 쪼들렸고 그 많은 재산의 공식 주인이 아니었다. 남편의 사후 그 재산은 자녀들, 특히 아들의 소유였고 재산 목적으로 누명을 씌우려면 자녀들을 노렸거나 일가 전체를 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자식들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고 법적으로 튀르조 백작은 바토리를 어떻게 잡아도 그녀의 재산에서 이득을 받을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바토리의 자녀들도 이 범행을 부인하거나 누명, 무죄라 하지 않았다. 자녀들은 바토리를 두고 '감옥에 넣든 어쩌든 제발 법정에 나오지만 않게 해주면 우리도 그 조사 계속 하는 거에 동의할게요. 너무 공개적인 처벌은 엄마한테나 우리한테도 너무 개망신임' 같은 답을 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무엇을 하는지' 목격했다고 추정 가능한 것이다.

바토리의 범행이 사실이라고 해도 피로 목욕한 것은 증언 중 '피를 손으로 퍼낼 수 있을 만큼 흥건한 바닥'이라는 증언을 비롯해 카더라 증언이 쏟아지면서 실제 범행 정도가 과장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실제 법정에서 동조자들이 말한 희생자 수는 수십 명에 불과(?)하다가 조사 중 추정 희생자가 100~200명 안팎, 점점 커지며 왕이 듣기로는 300명, 희생자 수를 적은 일기에는 650명이란 카더라도 있었다. 물론 과장일 확률이 농후하다.

그러나 바토리가 하인들과 농민들 상대로 잔혹한 짓을 즐겼다는 것은 일관된 증언이기도 하다. 고문은 항상 성내에서 행해져 직접 고문을 본 사람은 없어도 야밤에 뭔가를 자주 파묻는 광경을 본 사람은 넘쳐났고, 그녀가 너무 줄초상을 내고 장례 처리를 맡기자 빡친 사제가 더는 못해먹겠다고 욕 아닌 욕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직접적으로 막지 못하면서 더 자신감이 생기고 결국 부주의와 느슨한 처리로 꼬리가 잡혔다는 것 역시 연쇄살인범들이 흔히 보이는 패턴이다.

눈여겨 볼 것은 바토리가 어릴 때 어떤 발작을 일으켰다는 기록이다. 이것이 유전적인 영향이었는지 병이었는지는 몰라도, 서너 살경 극히 심하게 앓고 나서 그 후유증으로 이상 행동을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에르제베트가 진짜로 잔혹한 성정이었다고 기록한 것들도 많지만, 마녀 사냥의 정황도 없지는 않다.
고로 현대에 와서는 그 당시 사람들보다 잔인한 짓을 일삼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저질렀다는 범죄들에 대해서는 거짓이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4.1. 영화[편집]


진실이야 어찌됐든 워낙 인류사에 찾아보기 힘든 일화다 보니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 1956년에 개봉한 이 밤피리는 기본 설정은 동일하되 뒤 그랑 공작부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 1971년에 나온 어둠의 딸들은 본격적으로 바토리 백작부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인공으로 삼은 첫 영화다.
  • 1971년에 나온 드라큐라 백작부인은 역시 기본적으로 피로 목욕하는 설정은 같고 엘리자베트 노도셴 백작부인라고 이름을 붙였다.
  • 1973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Contes immoraux (영: Immoral Tales)에도 피로 목욕하는 장면이 나온다.
  • 2006년에 개봉한 공포영화 스테이 얼라이브에서 이 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하였다.
  • 2008년에 개봉한 바토리에서는 다소 색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에르제베트는 살인을 즐겨하던 인물이 아니었고, 재산을 노리던 주변 영주들의 음모에 빠져 피의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감금이 되었다.
  • 2008년에 만들어졌고 2009년에 개봉한 영화 카운테스에서 이 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하였다.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에서 여주인공 셀린 역을 맡은 줄리 델피가 주인공 엘리자베스 바토리 역을 맡음과 동시에 감독도 맡았다.


4.2. 기타[편집]


  • 게게게의 키타로 6기에선 카밀라라는 이름의 여성 흡혈귀가 등장할 예정인데 컨셉을 보면 모티브 중 하나가 이쪽이 된 한 요괴.[12]

  • 다크에덴 - 에르체베르 바토리 - 보스 몬스터이자 중요 NPC로 등장하는데, 처음 보스로 등장했을 당시에는 매우 강한 공격력과 30분의 제한시간, 그리고 미칠 듯한 맷집으로 게임 내에서도 상위 랭커에 속하는 유저들이 파티를 모아 겨우 클리어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갓 승직한 슬레이어 하나가 녹여버린다.

  • 데빌메이커의 5성, 6성 악마 카드로 등장하며 5성의 경우 '바토리'로 6성의 경우 '피의 여왕 바토리'로 등장하는데, 5성은 교복을 입고 있다.

  • 데스티니 차일드에서는 여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에르제베트라는 차일드와 바토리라는 악마(게임 분류상으로는 차일드)가 등장한다. 차이점이라면 에르제베트는 실존인물의 '아름다움의 영원함'에 집착하는 면을 따왔고, 바토리는 실존인물이 그 집착으로 인해 가졌던 '젊은 처녀의 피'에 집착하는 면을 따왔다는게 다르다.

  • 디아블로 2 - 카운테스(Countess, 여백작) - 액트 1에 등장하는 팜용 퀘몹.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잊힌 탑에 들어가기 전에 읽을 수 있는 책에서 나오는 배경설정에 수백 명 처녀들의 피로 회춘을 위해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면 확실히 바토리가 모티프다. 설정 상으로는 원래 여백작 소유였던 수많은 보물 중의 일부(나머지는 성직자들이 분배했다고) 및 희생자들의 썩어가는 시신과 함께 함께 탑 아래 감금당했다고 한다.

  • 바이오하자드 빌리지알치나 드미트리스쿠의 캐릭터 모티브와 디자인은 성에 사는 귀부인+젊은 처녀를 납치하고 죽여 피를 얻는다는 점을 참고해 팔척귀신, 모티시아 아담스와 조합하여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 붕괴3rd에서 엘리자베스 바토리라는 이름의 성흔으로 등장한다. 참고로 컨셉은 흡혈귀.

  • 블러디 로어 시리즈제니 버토리. 수화 시 피를 빨아먹는 기술이 있고, 이름부터 "바토리"이다. 하지만 작중에서 피를 직접 먹는 모습이 나오진 않았고, 캐릭터의 모티브만 따온 듯.

  • 소년탐정 김전일 - 이진칸촌 살인사건: 고토 란. 작중에서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동경한다는 말을 하였고 실제로 미유키의 피를 뽑아 목욕하려는 준비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직전에 범인에게 살해당하면서 미수에 그쳤다.


  • 악마성 시리즈 Vampire Killer - 에르체베트 바토리 - 흡혈귀의 원형이 된 사람 중 하나인 만큼 메인 적 캐릭터로서 등장한다. 여기서는 드라큘라의 조카라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거기다가 정작 성은 영국에 있다. 스토리 상에서 흑마법사에 의해 부활했고, 소설판 드라큘라와 연결하기 위한 것. 보스전은 재밌게도 괴물 형태로 먼저 싸우고 인간형으로 변한다.[13] 때문에 일본판에서는 바토리로 나오지만, 영미판에서는 덕분에 메두사로 나오게 되었다. 인간형에서는 체력 게이지가 구슬 형태로 나오며, 구슬이 소모되면 체력이 깎이는 방식이다. 공격은 일직선 공격이 전부지만, 체력이 낮아질수록 공격 속도가 빨라진다. 애니메이션 캐슬바니아 녹턴에선 속칭 '뱀파이어 구세주'란 이름으로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최강의 뱀파이어 퀸으로 등장한다.


  • 이웃집 흡혈귀 씨의 등장인물 흡혈귀 에리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생년월일이 바토리와 같은 1560년 8월이고 일본어가 어렵다고 헝가리어로 해도 되겠냐고 물었는데, 평소에 피로 목욕을 하는 데다 출신지가 헝가리 근처인 트란실바니아다.

  • 워프레임가루다가 바토리에서 어느정도 컨셉을 차용한 듯 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본래는 인도신화의 그 가루다가 기본 컨셉이지만 다른 워프레임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피와 관련된 스킬셋, 그리고 실제 스킬 내 영향을 받을 시 피칠갑이 되는 효과 등은 바토리에서 모티브를 어느정도 가져왔음이 짐작된다. 고유 동작세트도 잔인하고 폭력적인 스킬과 전용무장에 비해 도발적이고 요염한 모션들을 채용했다.

  • 장갑악귀 무라마사나가쿠라 사요검주로 등장하였는데 일반적인 검주처럼 전신갑주가 아닌 천 장갑의 형태로 만들어져서 스펙이 아예 없고 그 덕에 매우 강력한 음의를 쓸수있는 음의특화형 검주. 음의는 흡혈로 장미줄기같은 촉수가 여러 다발이 장갑에서 뻗어 상대의 피를 빨아내며 바토리의 무자는 일시적으로 전성기의 젊은 모습으로 돌아간다.[14][15] 작중 등장한 음의는 아무리 강력해도 음의 자체가 갑철의 보호를 받는 무자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바토리는 모든 스팩을 음의에 집중해서인지 갑철을 뚫고 흡혈을 하는게 가능하며 열량이 동력인 무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음의이다.[16]




  • 카멜롯(미국의 파워 메탈 밴드)의 노래 Elizabeth 3부작이 바토리 부인을 컨셉으로 잡았다. 2부에서는 딸까지 살해하는 등 어느정도 각색이 가해졌다.

  • 크래들 오브 필쓰(Cradle of Filth)는 영국의 블랙 메탈 밴드로 정규 3집앨범 Cruelty and the Beast (1998)는 앨범 전체가 바토리 부인을 주제로 한 콘셉트 앨범이다.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성에 이후 CoF의 특징인 레즈비언적 에로티시즘이 가미되어있다.


  • 킹스레이드 - 에르제 (끝없는 갈증, 뱀파이어) '바토리 에르제베트'

  • 패스 오브 엑자일 - 중간보스로 등장하는 움브라의 샤브론이 살아 생전에는 처녀들의 피로 목욕을 하면서까지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설정이 있다.



  • The Black Heart에서 ANIMUS의 어머니가 이사람으로 추정된다. 기술도 이사람을 모티브에서 따온 것 같고.


  • Fate 시리즈에서는 서번트로 등장. (본인이 생각하는) 전성기인 어린 시절의 면모와 카밀라의 모티브가 된 성인의 면모 두 가지로 따로 등장한다. 전자는 밝고 명랑하고, 순수하게 잔인한 개그 캐릭터 랜서(바토리 에르제베트)로 소환, 후자는 음습하고 광기에 빠진 악역 어새신(카밀라)로 소환된다. 전자가 지닌 보구를 마개조한 것의 이름도 바토리 에르제베트.

  • X JAPAN의 곡 Rose of pain[17]은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다룬 11분짜리 대곡이다.


  • 오즈랜드의 메리 케락이 여기서 모티프를 따온 모습을 보였다.


[1] 현재 헝가리 북동부 루마니아 국경 도시로, 오랫동안 바토리 가문의 영지였던 곳이다. 현재도 바토리 가문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2]슬로바키아 차흐티체.[3] 우연의 일치겠지만, 블라드 3세와 그를 모티브로 한 드라큘라 백작의 고향이기도 하다. 뭐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오늘날의 헝가리 영토에서 태어난 헝가리인,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헝가리인의 친척뻘인 세케이인, 그리고 블라드 3세는 몸만 트란실바니아에서 태어난 라틴계의 왈라키아인(루마니아인)이라는 세세한 차이점이 있긴 하다.[4] 폴란드어로는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 리투아니아어로는 스테포나스 바토라스(Steponas Batoras).[5]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나 에르데이 공국이나 다 선거군주제였기 때문에 세습지위는 아니지만, 국가를 통치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일개 지방귀족과는 비교를 불허한다.[6] 현재는 슬로바키아 트렌친주 소속이며 폐허만 남아 있다.[7] 정확히는 전투 도중에서 진중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특히 나더슈디는 죽기 3년전에 다리가 쇠약해지는 병에 걸리더니 2년뒤에는 아예 건디조 못하게 되었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다.[8] 이때 에르제베트의 나이는 40대라고는 하지만 평균 수명이 짧은 전근대의 기준으로 보면 많은 나이였다.[9] 다만 범행의 주동자는 아니라는 이유로 일반적인 사형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 일반적인 사형이란 게 참수형 아니면 교수형 후에 이뤄지는 화형이기는 하지만.[10] 사실 당시 법률로도 에르제베트를 처형하는게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처형하면서 그녀의 재산을 몰수하려고 하였기에 에르제베트의 가족들과 헝가리 귀족들이 같은 사례를 남기지 않으려고 강력히 반대하였기에 사형을 면한것이다.[11] 칼뱅교와 루터교는 성만찬이나 성상에 대한 관점 등 여러 가지가 달랐기 때문에 생각보다 매우 적대적이었다. 아예 루터교가 칼뱅교의 성상 파괴 운동을 이슬람 놈들 같다고 디스했을 정도.[12] 이름은 카르밀라를 모티브로 했다.[13] 바토리를 죽이면 다음 탑에서 드라큘라와의 최종전투를 벌이게 된다.[14] 일시적이라고는 하지만 젊어지는 것 때문인지 사용자의 수명을 늘려주는 효과가 있고 실제로 사요는 17세기의 사람이지만 이 검주의 효과로 작중 배경인 19세기 중반까지 2백년을 넘게 살았다.[15] 노화를 두려워한 귀부인을 보다못한 대장장이가 그녀를 위해 바친 검주로 사용자의 수명을 늘리는게 목적이기 때문인지 종래의 검주와는 매우 다른 검주가 탄생하게 되었다.[16] 대신 바토리의 무자가 맨몸으로 검주 대적할수 있는게 전제 조건이지만 사요가 등장인물 중 손에 꼽는 강자인지라 아무 문제가 없었다.[17] 메이저 1집 BLUE BLOOD앨범 수록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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