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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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한국과의 관계
3.1. 독도 영유권 분쟁에서


1. 개요[편집]


Ernst von Hesse-Wartegg. 1851년 2월 21일 ,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나 1918년 5월 17일 , 스위스 루체른에서 사망. 헤세-바르텍은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작가이자 여행가, 그리고 스위스에 있을 당시에는 주 베네수엘라 영사 (1888–1918)였다.

일생동안 전세계를 유랑하였으며 견문을 기술한 29권의 책과 700여개의 논고를 남겼다.


2. 생애[편집]


생애 자체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고 실전된 부분이 많다. 1930년대에 조상찾기를 하며 밝혀진 딸이 하나 있다고 전한다. 1878년 즈음에 미국 오페라 가수, 미니 호크(Amalia Mignon Hauck "Minnie" Hauk)와 결혼하여 스위스 루체른(Luzern) 근처의 트립슌(Tribschen)에 있는 빌라에서 살았다.

평생 동안 그는 전 세계를 여행했는데, 1872년 남동부 유럽을 다녀오고, 1876년은 미국, 1880 년에 튀니지, 1881년에 이집트, 1883년에 캐나다와 멕시코, 그리고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이후 1887년 베네수엘라, 1892년 모로코와 스페인, 1894년 인도, 싱가포르, 홍콩 , 중국, 일본, 한국,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유랑하다가 1898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태평양 등지에 있는 독일 식민지로의 여행은 1900년에 이어졌고 1901년에는 인도와 실론으로 여행했다. 그의 마지막 긴 여행은 1903년, 1910년, 1913년에 이어졌는데 브라질로의 여행이었다.

여행기는 서적으로 출간하였는데 마크 트웨인과 칼 메이가 지리적 설정을 참고할 때 그의 저서를 종종 보고는 하였다고 한다.


3. 한국과의 관계[편집]


헤세-바르텍은 일본을 경유하여 1894년 부산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였다. 당대에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고 일본이 청나라에 조선 출병을 통보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국이었다.

이러한 실정 속에서 그가 한국에 대해 남긴 기록은 썩 좋지만은 않다.

부산의 짐꾼들은 전부 조선인이고 말과 소가 이용되는 일은 드물다. 건장한 장정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조선, 1894년 여름, 책과함께 p 23)

조선 정크선은 길이15m, 폭6m, 깊이3m 정도다. 조악한 나무판으로 건조되었으며, 바닥이 평평하고 용적은 대략 200톤이다. 쉴 새 없이 물을 퍼내야 할 정도로 엉성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보험 가입도 어렵다. 이것이 조선에서 가장 큰 배들이다. (p 39)

일본은 제물포를 점령했고, 이미 수도마저 점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조선군보다 행동거지가 더 낫다. 그들은 모든 물품을 현금으로 지불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술에 취한 채 다니지도 않으며 규율이 잡혀 있었다. (p 55)

공공용지는 오직 길바닥뿐이며, 온갖 오물과 쓰레기 그리고 담장에서 떨어진 조각들은 문 앞에 버려진다. 일고여덟 살이 되도록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길에서도 행인들을 향해 용변을 보는 일이 흔하다. 집 안은 너무 습하고 어둡고 더우며 해충이 많아 안락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집안일을 길거리에서 처리한다. 밤이 되면 집 앞의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잔다. (p 84)

백성들이 얼마나 노름에 빠져 있었던지, 정부는 몇 년 전 카드놀이를 법적으로 금지해야만 했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카드놀이는 투전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돈 싸움이란 뜻이다. (p 174)




물론 몇몇 유튜버들이 이러한 기록을 과장하여 인용을 빙자해 조선의 모습이 상당히 미개했다는 식의 선전을 하는데, 헤세-바르텍은 마냥 부정적인 기술만을 남기진 않았다. 전세계를 다닌 노련한 저술가답게 조선의 대내외적 정세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조선 생활사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은 국가관료의 무능과 열강의 제재와 압박에 기인한 것이라고 분명히 적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생활사에 대한 부분도 기술이 온전히 부정적이지도 않았다.

이하 썩 나쁘지만은 않게 평가한 대목들도 존재한다.

상당수의 국민이 글자를 쓸 줄 아는데, 이는 예를 들어 이탈리아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p 212)

이들은 자기들끼리도 그렇지만 낯선 이방인에게도 매우 정직하다. 절도와 강도는 비교적 드물며, 살인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5년간 전체 구역에서 살인은 두 건 밖에 없었다. (p 24)

신체적인 면에서 이들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동아시아의 이웃들을 훨씬 능가 한다. 이들의 키와 건장한 체격, 건강한 외모는 유럽의 여행자들에게 커다란 놀라움을 안겨준다. 나는 이 점에서 조선인과 견줄 수 있는 민족을 동아시아에서 본 적이 없다. 이들은 외양적인 몽골 유형이라기보다는 코카서스족에 가깝다. 조선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너무나도 보잘것 없어서, 사람들은 조선인들도 모든 점에서 보잘것없는 백성이려니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들은 가난하고, 무지하며, 게으르고, 미신을 신봉하고, 이방인을 꺼린다. 하지만 이러한 속성들은 지조 없고 탐욕스러운 정부탓에 생긴 불행한 결과일 뿐이다. 이 정부는 수백 년 동안 백성들 내면에 있는 더 나은 것에 대한 충동을 조장하기는커녕 방해해왔다. 조선인들의 내면에는 아주 훌륭한 본성이 들어 있다. 진정성이 있고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루어낼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이웃인 잽싸고 기민한 일본인들처럼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더라도, 한때 이들의 군주국이었던 중국보다는 훨씬 빠를 것이다.[1]

[2] (p 232)

내 눈앞에 펼쳐진 제물포를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대충 중국 닝보(寧波)나 푸저우(福州)와 같이 탑과 사원들이 있고 기묘하게 흰 지붕들이 있는 아시아의 도시 모습을 기대했다. 이런 기대와 달리 내 눈앞에는 아주 근대적인 유럽의 도시가 펼쳐진 것이다! (중략) 왼편 끝의 언덕에는 영국 영사의 훌륭한 빌라가 있고, 그 뒤에는 몇몇 조선 요새가 능보와 성곽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편 끝자락에는 또 다른 언덕이 있는데, 여기에는 매혹적인 일본식 찻집과 정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두 언덕 사이로 유럽식 고층 건물이 있다. 그 뒤편으로 세 번째 언덕이 있는데, 이 위에는 사각형의 튼튼한 탑을 갖춘 당당한 건물이 있고,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정원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넓은 돌계단이 도시와 이곳을 이어주고 있다. 나는 그것이 아마도 조선의 수령이나 관찰사의 거주지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내가 우리 배의 선장에게 이런 내용의 질문을 하자 그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여기에서 조선인은 그 어떤 것도 명령할 수 없습니다. 조선 관청도 없습니다.[3]

저기 뒤에 보이는 아름다운 집은 마이어 씨 댁입니다.” (중략) 지금까지 일곱 개의 봉인으로 닫혀 있던 땅이 유럽인에게 개방되자마자, 이 땅에 들어온 최초의 유럽인 가운데 한 자리를 마이어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마이어 상사는 조선에서 명성 있고 사랑받는 가장 영향력 있는 상사다. (p 47~48)



3.1. 독도 영유권 분쟁에서[편집]


조선의 독도에 대한 지배를 증명하기 위한 사료로 헤세-바르텍의 책이 인용되고는 한다. 책에 첨부된 고지도에 독도가 등장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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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어도 나라가 2개로 쪼개지고 서로 전쟁이 벌어지면서 70년동안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1960년대부터 고도성장이 시작되고 1987년에 민주화를 달성하며 2000년대에 선진국에 도달했다.[2] 일본의 경우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나라가 초토화되었으나, 6.25 전쟁를 기회로 삼아 부활하고 나서 고도성장이 지속되며 1970년대에 선진국에 도달했고, 중국의 경우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나라가 초토화되었으나 1980년대부터 고도성장을 시작했으나 아직은 개발도상국이다.[3] 조계지를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