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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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토프(Erich Topp : 1914년 7월 2일~2005년 12월 26일)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해군의 잠수함 U보트의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종군하는 동안 연합군 선박을 무려 35척(197,460톤)이나 격침시키고도 무사히 살아남은 에이스 함장이었다. 이 무공은 모든 U보트 함장을 통틀어 오토 크레치머볼프강 뤼스 다음인 3위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적이다.



2. 나치즘에 빠진 청년[편집]


독일 제국 시대이던 1914년, 공업도시 하노버에서 기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희망을 잃은 전후 시대에 자라난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강한 조국과 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을 외치는 히틀러나치즘에 깊이 동조하게 되어 1933년에는 나치당에 입당함과 동시에 친위대 장교 양성 코스에 자원하게 된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가족의 혈통 이력이 친위대의 기준에 미달되어 알게마이네 장교가 될수는 없었다.

실망한 청년 에리히 토프였지만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약관 스무살이 되던 1934년크릭스마리네에 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며 정식으로 군문을 밟았다. 첫 순양 항해 훈련을 1929년에 취역한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2번함인 카를스루에(Karlsruhe)에 승선해 경험한 생도 토프는 1937년 4월 1일에 해군 소위가 되어 잠수함대(U-Bootwaffe)에 배속되었고 U46에서 함장 헤르베르트 졸러(Herbert Sohler : 1908~1992 / 2척 격침) 소령 휘하에서 근무하면서 4회의 초계 임무를 완수하며 잠수함 항해 경험을 쌓았다. 그가 4번째 원양 초계를 마치고 돌아와 중위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3제국폴란드를 침공해 앞으로 6년간이나 이어지며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부르게 되는 미증유의 전쟁을 일으켰지만, 25살의 엘리트 장교가 된 에리히 토프는 유럽을 지배할 강대한 조국을 건설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3. 개전과 함께 대활약[편집]


1940년 5월 5일부터 U57로 갈아탄 그는 9월 15일에 함장으로 임명되는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에리히 토프는 중위 계급장도 떼지 못한 대위 진급 후보장교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충분한 조함과 지휘 경험을 쌓은 그에게 계급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잠수함장에게 요구되는 정확한 상황판단 능력과 두둑한 배짱까지 더해져 U57은 그가 지휘한 이래 2회의 초계 임무를 수행하면서 적함을 6척이나 침몰시키고 있었다.

1940년 12월부터 1942년 9월 8일에 걸쳐 VIIC형 U보트 U552의 함장이 된 에리히 토프 대위는 항해 도중 소령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북대서양 방면으로 1차 항해를 나선 U552는 토프 소령의 노련하고 탁월한 지휘 아래 10회나 초계 임무에 출격하면서 연합군 함선을 30척이나 격침시키며 "대서양의 붉은 악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1941년 10월 31일에는 미 해군의 클렘슨급 구축함 루벤 제임스(USS Reuben James DD-245)를 가라앉히는 무공을 더하며 곡엽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1942년 10월에는 폴란드의 점령지 고텐하펜(Gotenhafen : 현재의 그디니아)에서 제27잠수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후배 잠수함장들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최신예 잠수함인 XXI형 유보트의 배치를 서두르는 상급 지휘관이 되었다. 종전이 가까와지던 1945년 1월에는 군목의 딸과 결혼하며 잠시 동안 신혼의 단꿈에 젖기도 했지만 잠수함장들이 잇따라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며 지휘관이 부족해지자 곧바로 U-2513의 함장으로 임명되었고, 노르웨이의 호르텐 해군기지에서 출격을 대기하던 도중 직속상관인 칼 되니츠 제독으로부터 독일의 항복 명령을 전해듣고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4. 패전 이후의 삶[편집]


전쟁포로 신세가 되어 노르웨이의 수용소에 투옥되었던 에리히 토프 중령은 뜻밖에 8월에 석방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의 민간인으로 돌아간 그는 1946년부터 고향으로 되돌아가 하노버 공과대학에서 건축 수업을 받고 건축가 생활을 시작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예전 드넓은 바다를 누비며 항해하던 군시절 기억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기회를 노리다가 재건된 서독 해군(Bundesmarine)에 1958년에 복직된 에리히 토프는 과거의 전투와 지휘 경험을 인정 받아 서독 해군 각부대 참모장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 군사위원회 수석 참모장을 거치며 승진을 거듭했고, 나중에는 해군 소장까지 진급해 제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아마도 과거 나치당원 경력만 아니었다면 그 이상의 고위직까지도 충분히 넘보았을 인물로 손꼽혔던 그는 미국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서독 해군의 재건에 몸을 바쳤다.

그 공로로 독일 연방공화국 최고 등급의 훈장인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그는 1969년에 퇴역했다. 군복을 벗은 후에 토프는 해군 관계 업무로 조선소나 공업회사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05년에 쥐센(Süßen)에서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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