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베낭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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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베낭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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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안톤 마레크
파일:OGC 니스 로고.svg
11대
에밀 베낭트

파일:OGC 니스 로고.svg
12대
엘리 루
1947년~1949년

1949년~1950년

1950년



파일:veinete-1405837174.jpg
이름
에밀 베낭트
(Émile Veinante)
생년월일
1907년 6월 12일
사망년월일
1983년 11월 18일 (향년 76세)
국적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출신지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메츠[1]
포지션
스트라이커
신체조건
175cm / 70kg
등번호
-[2]
소속팀
FC 메스 (?-1929)
라싱 프랑스 (1929-1940)
국가대표
24경기 / 14골 (1929-1940)
감독
라싱 프랑스 (1940-1943)
RC 스트라스부르 (1945-1947)
RC 스트라스부르 (1948-1949)
OGC 니스 (1949-1950)
FC 메스 (1950-1951)
FC 낭트 (1951-1955)
RC 스트라스부르 (1960-1961)

1. 개요
2. 생애
2.1. 선수 생활
2.3. 감독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수상
4.1. 클럽



1. 개요[편집]


프랑스축구선수 출신 감독. 1960년부터 1961년까지 RC 스트라스부르 감독을 맡았다.


2. 생애[편집]



2.1. 선수 생활[편집]


베낭트는 스트라이커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그 팀은 고향팀이던 FC 메스였다. 1929년까지 메스에서 활약한 베낭트는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로 이적하였고 은퇴할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1936년에는 RC 프랑스가 더블을 기록하면서 그의 커리어에서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1939년부터는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였고 1940년에 은퇴하였다.


2.2. 국가대표[편집]


에밀 배낭트는 초대 월드컵부터 1938년 월드컵까지 30년대에 열린 3번의 월드컵에 모두 참가한 선수이다.

하지만 초대 대회에서는 마지막 칠레전에서만 출전하였고 1934년에는 대표팀이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이탈리아 구경만 하고 돌아갔다. 1938년 대회에서 드디어 골 맛을 보았는데 벨기에를 상대로 시작한 지 35초 만에 득점을 기록하였다. 이는 종전 기록인 루마니아의 아델베르트 데슈의 50초 기록을 앞당긴 것이었다.


2.3. 감독 생활[편집]


1940년에 은퇴한 에밀 베낭트는 바로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트로피를 얻는 데에는 실패했고 1945년부터 RC 스트라스부르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재임 기간 중 스트라스부르를 3위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재계약이 불발되었다. 이후 후임 감독의 성적이 시원치 않자 스트라스부르는 다시 베낭트에게 SOS를 쳤다. 하지만 베낭트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더욱 추락하여 18개 팀 중 17위로 리그를 마무리하였다.[3] 이 일로 해임을 당한 베낭트는 니스와 친정팀 메스, FC 낭트 등에서 활동을 하였다. 마지막 감독 생활은 스트라스부르를 디비지옹 1에 진출시키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주로 스트라이커 또는 인사이드-레프트로 활약하였다. 게임 디자이너라는 별명이 붙을 수 있는 게임 리딩 능력과 함께 그를 상징하는 것은 킥 능력이었다. 특히 프리킥 능력이 일품이었다 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에드몽 델푸르, 에티엔 마틀레르와 함께 30년대 월드컵에 모두 출전한 3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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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프랑스 그랑테스트 레지옹 메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11위였던 콜마르가 리그앙에서 뛰기를 거부하여 스트라스부르가 강등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스트라스부르는 강등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