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아노 기론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가메라 시리즈의 기론에 대한 내용은 기론(가메라 시리즈) 문서
기론(가메라 시리즈)번 문단을
기론(가메라 시리즈)#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에밀리아노 기론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에밀리아노 기론의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8번
곽재성
(1993~1995)

기론
(1999~2001)


김정현
(2002~2003)
한화 이글스 등번호 37번
허진석
(2003~2003.7.17.)

기론
(2003.7.22.~2003)


최민준




파일:/image/117/2013/06/28/201306272313392227_1_59_20130628070001.jpg

{{{+2 에밀리아노 히론[* 원래 스페인어에서 G 뒤에 i가 붙으면 ㅎ 발음이 나게 되어 있다. (Gijón=히혼인 것처럼)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에선 다른 언어권 인명도 영어식으로 읽는 관행 아닌 관행이 있어서 등록명은 기론이 되었다. 진짜로 기론이라고 발음이 나게 하려면 Guiron으로 i 앞에 u를 붙여 줘야 한다.]}}}
Emiliano Giron

생년월일
1972년 1월 5일 (52세)
국적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지
산토도밍고 비야멜라
신체
188cm / 74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9~2001)
한화 이글스 (2003)
중신 웨일스 (2004~2005)

1. 개요
2. 선수 시절
2.2.1. 1999 시즌
2.2.2. 2000 시즌
2.2.3. 2001 시즌
3. 은퇴 후
4. 연도별 성적
5. 이야기거리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던 야구 선수.


2. 선수 시절[편집]



2.1. 마이너리그 시절[편집]


신시내티 레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마이너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는 등 준수한 성적을 올렸지만 메이저리그로 올라오지는 못했고, 이후 독립리그에서 뛰었다. 1998년 덜루스 슈페리어에서 주로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여 43경기 3승 2패 18세이브 ERA 1.27을 기록하였다.


2.2.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2.2.1. 1999 시즌[편집]


1999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4순위로 지명되었다. 2순위로 지명되어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한 마이클 길포일이 일찌감치 퇴출되고 대체 선수를 물색하던 롯데는 기론을 입국시킨 후, 경북고등학교의 야구장에서 5월 13일과 14일에 김명성 감독의 앞에서 입단 테스트를 한 후 합격시켰다. 당시 롯데 투수코치였던 양상문이 2013년 MBC SPORTS+에서 방영된 불멸의 명승부에 출연해 언급한 바에 의하면 입단 테스트에 합격한 후 롯데가 묵은 호텔에서 만난 자리에서 짬뽕을 시켜줬는데 기론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 먹었다고 밝힌 일화가 있었다.

파일:기론 영입당시.jpg
기론 영입 당시

6개월간 4만 달러의 조건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롯데 입단 당시에는 펠릭스 호세의 말동무용으로 데리고 온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는데,[1] 키는 당대 기준으로 평범했지만 마른 체구라 타 팀 외인선수와 비교해서 아담해 보였고 최고구속이 140km/h를 간신히 넘는 기론에게 구단이나 팬들 모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중간계투패전처리를 맡았으며, 기록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론에게는 당시 국내 타자들에게 생소한 구질인 서클 체인지업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고, 기론의 특이한 구종 가치를 알아본 양상문 코치가 투구폼을 수정한 후 구속과 체인지업이 더욱 좋아졌다. 게다가 어머니가 방문하여 아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 8월 14일과 15일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7이닝 5피안타 1실점으로 가능성을 보였다. 이어 18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정민태와의 선발 대결에서 8탈삼진 3피안타 2비자책점으로 2:3 완투승을 기록하였다. 정규시즌 24경기에 전천후로 등판해 5승 1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30이라는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친다.

경기는 삼성 쪽으로 기울고... 롯데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기론을 다시 투입한다.

- 롯기도문


하지만 기론은 포스트시즌에서 더 놀라운 활약을 펼치는데,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등판하며 8경기 29.1이닝 평균자책점 0.92라는 무시무시한 투구를 선보이며 롯데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크게 공헌한다.[2] 펠릭스 호세가 자신을 향한 오물투척에 격분하여 대구구장을 진호세무쌍 전장으로 만들고 주장 박정태가 선수단 철수까지 감행했을 정도로 급박했던 그 경기의 롯기도문에 등장하기도 한다. 당시 시도때도 없이 올라와 이닝을 먹는 모습 덕에 '고무팔'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렇게 힘겹게 올라간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는 PO에서 힘을 다 써버린 탓에 뭐 하나 해보지 못하고 1승 4로 준우승에 그쳤지만, 기론은 이 때 롯데가 유일하게 이긴 경기의 승리투수였다. 다시 말해 기론은 현 시점까지도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승리투수다.


2.2.2. 2000 시즌[편집]


전 시즌의 활약을 바탕으로 재계약에 성공했지만, 혹사 여파가 있었는지 KBO 리그 2년차인 2000 시즌에는 제법 고전했다. 이 해 김동주에게 잠실 야구장 역사상 최초의 장외 홈런을 맞기도 했다.[3] 그래도 전년도에 비해 이 해에는 주로 선발로 고정되는 등 169이닝을 소화하면서 10승을 찍었으며, 평균자책점은 5.01. 참고로 이 시즌이 끝난 후 롯데는 10승 외국인 투수를 다시 얻기 위해 무려 1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4]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보면 2년차는 이닝소화도 그저 그렇고, ERA도 Whip도 전혀 아니올시다인 성적이라 이 성적으로 재계약을 한 게 말도 안 되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 시절은 20세기, 선수 퍼포먼스는 오로지 투승타타가 최우선인 시절이라, 비록 방어율은 좀 높지만 10승 투수였던 기론은 재계약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해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타고투저였다.[5]


2.2.3. 2001 시즌[편집]


어쨌든 다시 재계약에 성공하긴 했지만, 기론의 구위는 2년간 전천후로 굴려진 탓에 예전보다 많이 떨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무리하게 구속을 끌어올리려다가 팔꿈치 부상을 당했고, 결국 2001 시즌 4승 2패 평균자책점 5.48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시즌 중이었던 7월 퇴출당한다.


2.3. 한화 이글스 시절[편집]


이후 2년 뒤인 2003년 7월 로베르토 메히아의 대체 용병으로 입단 테스트를 거쳐 한화 이글스에 합류하며 다시 한국 무대에 복귀하는데, 15경기 3승 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4.58로 썩 인상적인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고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 한국 무대를 떠나게 된다.


2.4. 대만 프로야구 시절[편집]


이후 대만으로 무대를 옮겨서 2년동안 중신 웨일스에서 뛰며 13승 6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12의 훌륭한 성적을 거뒀고, 이후 2007년 멕시칸리그에서 뛴 것을 끝으로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3. 은퇴 후[편집]


은퇴 이후 타이어 사업을 대박치며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2018년 3월 2일 라디오볼에 중계된 방송에 따르면, 2018년 6월경 국내에 입국하여 사도스키 코치와 함께 상대 해외선수 전력분석 및 트리플A 더블A 스카우터로 부임할 예정이란 이야기가 나왔으나, 2019년까지 아무 소식도 없는 것을 보니 헛소문인 듯. 아직도 타이어 사업을 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롯데
24
73⅔
5
1
2
0
0.833
3.30
59
7
39
57
29
27
1.25
2000
31
169
10
8
0
0
0.556
5.01
183
(4위)
21
91
(4위)
134
103
(2위)
94
(3위)
1.59
2001
10
47⅔
4
2
0
0
0.667
5.48
42
8
33
42
32
29
1.5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3
한화
15
64⅔
3
3
1
0
0.500
4.59
62
8
34
49
35
33
1.44
KBO 통산
(4시즌)
80
355
22
14
3
0
0.611
4.64
346
44
197
282
199
183
1.48


5. 이야기거리[편집]


실제로 고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야구를 해왔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고, 낡고 볼품없는 야구장비들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동생인 로베르토 기론이 2003년 11월 13일에 입국하여 롯데 자이언츠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6. 관련 문서[편집]



[1] 실제로 기론은 도미니카 산토도밍고 출신으로 호세의 동향 후배다. 전해 용병으로 덕 브래디 한 명만 뽑았다가 적응 실패로 부진했던 사례가 있던 롯데로서는 시즌 초 길포일이 퇴출된 후 최대한 빨리 대체 외국인 선수를 뽑으려 했는데, 뽑은 게 하필이면 호세의 동향 후배였으니 당시 대체불가의 최고 활약을 펼친 호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말동무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당시에는 꽤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었다.[2] 다만 플레이오프 MVP는 16.1이닝 2승 1패 ERA 3.30 박석진이 차지했는데, 그 2승의 임팩트가 시리즈의 향방을 가른 워낙 중요한 경기였어서 별말은 없긴 했다.[3] 다만 이날 경기는 7대6으로 롯데가 승리하였으며, 기론은 7.2이닝 6실점을 기록하며 승리투수가 되었다.[4] 사실 이는 롯데가 타자 위주로 외국인 선수를 구해왔던 이유도 있다. 물론 카림 가르시아 이후로는 대세에 따라 투수 외국인 선수들을 데려왔지만. 또한 롯데의 고질병인 마무리 부재로 인해 가뭄에 콩나듯 데려왔던 외국인 투수도 마무리 투수인 경우가 많았다. 호세 카브레라존 애킨스가 그 경우.[5] 호세가 없는 롯데에 플레이오프 진출의 공신이었던점에서 여론도 긍정적이었다.[6] KBO에서의 성적만 기입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9 04:22:52에 나무위키 에밀리아노 기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