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티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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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등장인물
3. 줄거리
4. 의미
5. 여담


1. 개요[편집]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이다. 부제는 '경건에 관하여'. 시간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직전, 재판을 위해 관아에 온 소크라테스와 역시 재판을 위해서 온 신관 에우튀프론의 대화가 주된 내용이다.


2. 등장인물[편집]




  • 에우튀프론 : 신관. 다른 대화편에서도 소크라테스가 신비주의적인 영감을 바라는 이들에게 "자네는 에우튀프론의 무리들과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군."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을 볼 때 어떤 종교적인 집단을 비유로 나타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보통 광신도라고 해석되지만 행보를 보면 광신도보단 종교 근본주의자에 가깝다.


3. 줄거리[편집]


에우튀프론이 아르콘 바실레오스[1]의 회랑에서 소크라테스를 우연히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째서 늘 있던 곳이 아닌 이곳에 왔냐는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2]에게 젊은이의 타락 건으로[3] 고발을 당해 왔다고 한다. 그에 더해 멜레토스가 젊은이들 생각을 하는걸 보면 참 나라와 사회를 깊이 우려하는 것 같다고 비꼰다. 에우튀프론이 멜레토스 쪽이 오히려 나라를 망치는 것 같다고 반발하며[4] 멜레토스 그 녀석이 소크라테스가 어떤 식으로 젊은이들을 망쳤다고 주장하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5]이라는 새로운 신을 떠들며 진짜 신들[6]을 부정했다는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이라고 말해준다. 에우튀프론은 원래 참을 말하는 이들은 질투를 많이 산다며 재판에서 이길 것을 응원해준다. 그리고 자신도 비슷하게 재판에서 이길거라 한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도 소송을 한다는 얘기에 궁금증이 동해 무슨 소송에 휘말렸는지 묻는다. 에우튀프론은 이에 자기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소했노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한다.[7][8] 소크라테스는 이에 경악하며 아버지가 가족 일원을 죽인거냐고 묻는다. 에우튀프론은 죽은 이는 타인이라고, 그가 혈연인지 아닌지보단 행동이 옳은지의 여부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가족의 정보단 옳고 그름을 따랐노라고 답한다. 어떤 일인지 들어보니, 농장일을 돕던 고용인이 술에 취해 집안 하인을 죽여 그의 아버지가 심하게 두들겨 팬 뒤 도랑에 던져넣었는데, 재판관에게 처분을 구하러 전갈을 보낸 사이에 저체온증으로 사망케 했다는 것이다. 대개는 가족의 허물을 덮게 마련인 데 굳이 아버지를 고소하는 아들이 놀라워서 소크라테스가 물어보자 에우튀프론은 가족들도 자신을 비난하지만 그는 그들이 무엇이 경건하고 옳은지를 모르는 것일 뿐, 자신은 경건한 일이 뭔지 알기 때문에 경건한 일을 했다고 얘기한다.

하필 "불경하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한 소크라테스였기에 경건이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고 그 "경건함"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냐고 묻는다.[9] 에우튀프론은 당연히 알고 있으며 만일 자신이 경건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하등 쓸모없는 이에 불과할 거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에우튀프론의 제자가 되어 경건을 배우면 멜레토스의 고소를 이겨낼 수 있겠다고 경건이 정확히 무엇인지 가르쳐달라 하며 산파술을 시작한다.

에우튀프론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 즉 부정의한 행동을 한 이가 있다면 그가 비록 자신의 부모여도 고소를 하는 것이 경건한 행위라고 주장한다.[10] 그러면서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11]를 근거로 삼는다. 소크라테스는 신화 속 이야기들이 정말로 일어났는지를 의심해보지만 에우튀프론은 물론 전부 사실이고 자기에게 오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일단 그게 주제는 아니니 신화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하고 이는 경건의 보편적 정의는 아닌 것 같다고, 모든 경건한 행위들을 설명할 수 있는 정의를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에우튀프론은 신에게 사랑받는 행위가 경건이고 신들이 싫어하는 행위가 불경이라고 정의내린다. 소크라테스는 신들은 서로 반목하고 적대하기도 한다면서 에우튀프론의 행위 역시 제우스는 좋아하겠지만 크로노스우라노스는 싫어할 것 아니냐, 즉 신들 사이에서도 정의관이나 관점이 달라질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12] 에우튀프론은 그렇더라도 정의롭지 못한 이를 고소한 자신의 행동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신은 없을 거라고 반발한다. 소크라테스는 그건 법정에 서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서로 반목하는 이유는 정의롭지 못한 이가 처벌받아야 한다는 데에 이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이 정의로운지의 문제로 싸우는 것이고 이는 신들도 똑같지 아니냐고 한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고소하는 행동이 정의롭다고 볼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에우튀프론은 너무 복잡해서 당장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반응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럼 법정에서도 자기가 정의로운 이유를 해명 못할테니 패소하겠다면서 어이없어한다. 그리고는 일단 이 문제는 제쳐두고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 모든 신들이 미워하는 행위가 불경이라고 정의내리면 어떠냐고 묻자 에우튀프론은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한 것 같다고 동의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소크라테스는 신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지, 아니면 경건하기 때문에 신에게 사랑받는 것인지를 물어보고[13] 에우튀프론은 경건하기 때문에 신에게 사랑받는다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경건한 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다면 신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경건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꼬집는다.[14] 소크라테스가 마치 다이달로스의 미로 같아 자신을 빙빙 헤메게 만든다고 비난하는 에우튀프론에게 소크라테스는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남의 작품, 즉 에우튀프론의 논리까지 돌릴 수 있으니 내가 다이달로스보다 더 지혜롭겠다고 능청스럽게 받아치고 지금 에우튀프론이 너무 지혜롭다 못해 논의에 적극적이지 않으니 자신이 좀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겠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이 경건한 것은 정의롭다고 확신하는 걸 확인한 후 그렇다면 경건이 곧 정의인지, 아니면 경건은 정의의 일부인지 묻는다. 에우튀프론은 정의 중 신을 보살피는 분야를 경건이라 하고 인간을 보살피는 분야를 경건이 아닌 정의의 나머지라고 답한다.[15] 소크라테스가 신을 보살피다는게 양치기가 양을 보살피는 것과 같은거냐고 묻자 에우튀프론은 펄쩍 뛰면서 그게 아니고 노예가 주인을 보살피는 것과 같다고 한다.[16]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경건이란 일종의 섬기기 기술이 아니냐고 묻고 에우튀프론이 긍정한다. 소크라테스가 의사를 섬기는 이유는 치료를 위함이고 건축가를 섬기는 이유는 건물을 짓기 위함인데 그럼 신들을 섬긴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묻자 에우튀프론은 신들이 행하는 많은 훌륭한 행위를 위한 것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린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당연하게도 에우튀프론을 놓아주지 않고 거의 다 왔는데 말을 돌리냐면서 어서 그 훌륭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말해달라 종용한다.[17] 에우튀프론은 이에 경건이란 적절한 기도와 적절한 제물을 바쳐 신들을 흡족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대답한다. 경건함을 통해 신들의 마음을 사면 신들의 훌륭한 행위로 보답받는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하면 경건함이란 신과 하는 일종의 상거래라고 볼 수 있는 거냐고 묻자[18] 에우튀프론은 떨떠름해 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고 반응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그렇다면 결국 경건함이란 무엇이 신에게 적절한지에 대한 앎(episteme)일텐데, 그럼 이건 결국 신이 맘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게, 즉 신에게 사랑받는 게 경건함이므로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말과 충돌되어 부정당한 아까의 순환 논법과 다를 게 없지 않냐고 반박한다.[19][20]

소크라테스는 자기 아버지를 확신에 차 고소할 정도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경건함이 뭔지 모르고 있을 리 없다고, 에우튀프론이 숨기고 있는[21] 경건의 정의를 말해줄 때 까진 놔 주지 않을거라 하며 논의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결국 에우튀프론은 멘붕에 빠져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급히 자리를 뜬다.


4. 의미[편집]


소크라테스는 덕이란 곧 앎이고 나쁜 행위는 무지로 인해 생겨난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덕이란 무엇인지를 정의내리기를 통해 진리와 참된 선을 추구해왔는데,[22] 에우튀프론은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와 이를 위해 행한 산파술 화법을 가장 잘 드러낸 대화편 중 하나이다. 거기에다 길이도 짧고 구조가 직관적이고 단선적이라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아 플라톤 대화편 입문 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어를 배운 후 처음으로 읽어보는 원전 텍스트로도 많이 이용된다. 배경 시간대도 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 파이돈으로 이어지는 소크라테스 3부작의 직전 시간대라 에우튀프론으로 시작해 소크라테스 3부작을 이어 읽는 경우가 많다.

에우튀프론이 신관이라는 점에서 신관의 가장 큰 덕목으로 '경건함'이 뽑힌다. 따라서 에우튀프론은 가장 경건함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사람일텐 데, 그런 에우튀프론조차 경건함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상황 자체가 그러한 경건함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담고 있다. 또한 신비와 열정의 영역으로 취급되던 경건함의 문제 역시 결국 '앎' 의 문제라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훌륭함은 앎에 의해 성취된다는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의 사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5. 여담[편집]


플라톤 대화편 중에 소크라테스가 대놓고 먼저 선시비를 트고 노골적으로 꼬장을 부리는 대화편이다. 언뜻 보기에는 또또또 노인네가 성깔 뻗쳐서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괜히 꼬장 부리면서 괴롭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사실 노인네가 꼬운 이유는 아마도 에우튀프론이 지 애비를 고소하러 가면서 에헴에헴 나는 아주아주 경건한 사람입니다[23] 하고 까부는 것이 안 그래도 늙고 고소당한 처지에 마음에 안 들어서 꼬장을 부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고소당한 내용 중 신앙과 관련된 혹세무민 행위로 아테네 전체에 겐세이를 놨다는 얘기가 있는 것을 보면 에우튀프론 같은 놈들이 자기를 고소했다는 생각에 노인네가 화났을 수 있다.그러나 평생을 이런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에 고소고발을 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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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아테네의 10인 집정관(아르콘) 중 한 명이다. 아테네가 과두정이었던 시절에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민주정이 발전하며 서서히 민회로 권력이 이양, 이 시점에는 제사 및 신성모독과 관련된 일을 맡는 명예직이 되어있었다.[2] 소크라테스 사형 재판의 원고인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원고석에 앉은 모습으로 짤막하게 등장한다.[3] 소크라테스의 사형 당시 고발 사유로 사실 알키비아데스나 크리티아스 같은 그의 제자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매국행위와 폭정을 행한 것을 돌려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제자들의 문제일 뿐이지 이걸로 잘못한 것이 없고 크리티아스의 폭정에 반발까지 한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것이 당대 기준으로도 현대 기준으로도 그다지 정당하진 않다.[4] 그의 주장과 행보로 인한 부정적인 인식을 걷어내고 보면 에우튀프론은 소크라테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며 꽤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 보인다.[5] 소크라테스는 여러 대화편에서 자기 마음 속의 소리를 다이몬이라는 신령의 가르침이라고 표현했다.[6] 물론 이때 당시 신들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말한다.[7] 뒤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반응이나 다른 고대 그리스 문건을 보았을 때 자기 부모를, 그것도 이런 애매모호한 일로 고소하는 것이 그때 당시에도 매우 옳지 않은 일로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특히, 유교적 윤리에 익숙한 현대 한국인의 눈에는 에우튀프론이 인간말종 패륜아로 보여 감정이 격양되기 쉬울 것이다.[8]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나 다른 대화편에서의 행보를 미루어보아 오히려 어느 때에나 훌륭한 삶을 추구해온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처럼 자기 아버지일 지라도 나쁜 짓을 했으면 고소해야 하고 무지한 에우튀프론이 소크라테스처럼 상식적으로 행동해야 하지 않냐는 주장도 존재하나 살인죄와 같은 형사재판을 지금처럼 공익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민사재판처럼 사적 갈등으로 보아 재판장에 검사도 따로 두지 않던 고대 아테네의 정의관을 생각해보면 (현대로 비유하면 재산 관련 민사소송으로 자기 아버지를 고소한 것과 다르지 않을테니) 소크라테스의 반응이 이상할 것도 없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애초에 사건 자체가 사람을 죽인 노예 vs 살인자 노예를 아사하도록 방조한 아버지라는, 현대에도 사람들 가치관 따라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갈릴법한 굉장히 꼬인 사건이기도 하고.[9] 니가 얼마나 경건함을 잘 알길래 그렇게 자랑스레 니 아버지를 고소하냐는 비꼼 의도도 있다.[10] 에우튀프론이 하고 있는, 즉 사례를 들어 무언가를 정의하는 방식을 현대 논리학에선 지시적 정의라고 부른다. 신들의 왕 제우스의 사례를 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에우튀프론은 자신이 든 사례가 경건이란 개념의 대표성을 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나 소크라테스가 원한 정의 방식은 아니었다보니 결국 다른 정의방식을 내리게 된다.[11] 제우스가 자기 아버지 크로노스를 몰아낸 이야기와 그 크로노스가 또 자기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시킨 이야기이다. 그리스 신들을 진지하게 믿는 이가 거의 없는 지금은 종교보단 옛날 이야기에 가까운 그리스 신화이지만 당대엔 성경이나 불경 속 일화들과 비슷한 위상을 지녔을 것이다.[12] 아울러 신들도 정의와 선에 관한 의견이 갈려 서로 싸운다면 신을 믿고 본보기로 삼으며 살 수 없지 않느냐는 주장도 내포하고 있다. 당시의 종교가 다신교였기 때문에 가능한 비판으로 현대의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같이 일신교를 따르던가 아니면 힌두교처럼 다신교지만 신들보다 더 높은 우주적 원리를 인정한다면 피해 갈 수 있는 논리이다. 이를 보고 정암학당 번역자는 대화편 에우튀프론의 저술이 당시의 종교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의도도 있고 플라톤은 이를 통해 불경죄로 사형당한 소크라테스를 변론하려 했을 거라 생각한다.[13] 이 질문을 에우튀프론 딜레마라고 부른다. 후대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신명론, 이신칭의 등의 주의주의(主意主義,voluntarism)와 엮어 수많은 논문을 내며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논리를 분석했으나 정암학당 번역자가 지적한대로 에우튀프론이 신에게 사랑받는 것이 경건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신에게 사랑받는 것이 경건한 것의 공통적 특징일 뿐, 경건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진 않았다), 에우튀프론 딜레마는 주의주의와는 관련없고 그저 논리학적 정의의 방식 문제가 된다.[14] 좀 더 정확히는, 과거형 분사와 과거형 동사를 엄격히 구분하며 동작이 동작의 결과에 우선함과(신들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다.), 행동의 원인이 행동에 우선함(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다.)을 들며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경건함을 정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논리학에선 무언가를 정의할 때 설명적 우선성을 가진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을 중시한다.(ex.정사각형은 같은 둘레를 가진 사각형 중 가장 면적이 넓은 사각형이다(x) 정사각형은 네 변의 길이가 모두 같은 사각형이다(o)) 앞선 각주에서 언급한 신이 원하는 것이 곧 경건과 선이라는 주의주의의 경우, '신에게 사랑받는 것'이라는 동작의 결과가 아닌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동작 그 자체를 원인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반박을 비껴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15] 이 대화편에서는 경건은 정의의 일부라는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 넘어가고 라케스에서도 용기란 덕의 일부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덕은 나누어질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전개한다. 플라톤 대화편의 의도나 주제를 분석할 시 참고해야 할 부분.[16]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들에 대한 오만을 가장 큰 죄중 하나로 봤고 서사시나 신화, 비극들도 신에게 오만한 이를 징벌하는 내용이 많았다.[17] 에우튀프론을 읽은 많은 철학자들이 여기에서 훌륭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면 경건을 정의할 수 있을거라 여기고 자기 생각을 전개해나갔다. 하지만 이는 앞의 논변을 전부 참이라 가정해야 하는데 플라톤이 진짜로 자기 생각을 적은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로 일부로 그른 논답을 묘사한 건지 확실치 않다고 생각해 훌륭한 행위를 정의내리기보단 논답 자체를 분석하는 경우도 많다. 플라톤이 대화편 형식과 아포리아를 고집한 원 의도가 독자가 직접 생각해보라고 권유하기 위함으로 추정되니 만큼 두 입장 모두 올바른 에우튀프론 읽기 방법일 것이다.[18] 고대 그리스의 종교는 고대 다신교답게 기복신앙의 요소가 매우 강했다. 기독교나 불교 신학과 같이 기복신앙을 거부하는 현대 종교의 입장에선 절대 긍정할 수 없는 소리.[19]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에우튀프론을 다이달로스에 빗대며 아까 에우튀프론이 자신에게 다이달로스라 했던 말을 갚아준다.[20] 논의가 빙글빙글 돌아 헤메는 것과는 별개로, 에우튀프론이 마지막으로 한 경건의 정의는 현대 논리학에선 류와 종차에 의한 정의라고 부르는 방식이며, 무언가를 정의할 때 가장 유용한 방식으로 꼽힌다.[21] 물론 에우튀프론이 숨기고 있는게 아니라 흔한 소크라테스의 말 상대들처럼 경건함이 뭔지 모르면서 아는 척 한거다.[22] 이러한 정의내리기를 이어받은 플라톤이 이를 존재론적으로 발전시켜 이데아 이론을 만들어낸다.[23] 좀 말을 바꾸자면 나는 아주 양심적이고 선량하고 올바른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