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로쿠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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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사건의 진행
4. 사건 이후
5. 평가
6. 대중 문화에서


1. 개요[편집]


永祿の 變 / 영록의 변(えいろくのへん)

에이로쿠(永祿) 8년 5월 19일(1565년 6월 17일), 미요시 요시츠구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공격해 살해한 사건.

무로마치 막부 후기의 권위없는 쇼군 가문을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로, 일반적인 인식을 보면 오닌의 난 다음의 지명도를 자랑한다.


2. 배경[편집]


미요시 가문의 새로운 당주 미요시 나가요시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으로 활동했으나, 끝내는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하였던 하루모토에게 반발하여 하루모토의 정적이던 호소카와 우지츠나와 연합, 하루모토를 패배시키고 키나이를 차지하였다. 하루모토와 손을 잡고 있었던 쇼군 요시테루는 이에 타격을 입고 오우미로 물러났고, 그에게서 이반한 만도코로[1] 수장 이세 사다타카는 나가요시와 손잡고 쿄토의 정국을 운영하기 시작, 이로 인하여 교토의 질서를 유지하는 "협의의 막부"는 쇼군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이런 상황 속에서 나가요시와 전쟁을 하며 분전, 결국 1558년에 나가요시와의 화친을 이끌어 냈다. 이로써 요시테루는 교토로 복귀하여 "협의의 막부"를 부활시키게 되었다. 그는 미요시 나가요시와 그 후계자인 미요시 요시오키, 일족 미요시 짓큐와 중신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막부 역직을 부여하여 막부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을 통하여 중앙에서 막부를 지탱하는 다이묘가 거의 남지 않은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이는 막부가 나가요시에게 상당한 권위를 부여해준 것 역시 되어,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상태가 되었다.

막부와 연합한 이후 순조롭게 영토 확장을 실시하던 나가요시였으나 미요시 정권의 혈족이자 공신들이 차례 차례 요절하였고 본인도 병에 걸려 1564년 7월에 43세라는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후계는 소고 카즈마사의 장남인 미요시 요시츠구가 이었으며 미요시 산닌슈의 필두 미요시 나가야스야마토의 군단장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보좌하는 형태로 미요시 가문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2] 그러나 미요시 정권의 지탱점이었던 미요시 일문들의 사망은 정권의 쇠퇴가 진행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편 쇼군 요시테루는 그 동안 여러 다이묘들의 대립에 중재를 나서고 그들과 친목을 다지며 다이묘들에게 쇼군의 존재를 부각시켜왔다. 우에스기 겐신 등의 다이묘들은 직접 쇼군을 만나러 오기도 했고, 오토모 소린은 총을 보내왔다. 이러면서 쇼군의 입지를 굳히던 중 미요시 가문이 쇠퇴하자 요시테루는 미요시 가를 이용하여 쇼군의 권위를 해치며 막부 재판을 불투명하게 운영해온 만도코로 수장 이세 사다타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측근 셋츠 하루카도를 임명하여 막부 재판을 장악하였다.


3. 사건의 진행[편집]


이런 쇼군의 행동을 요시츠구는 굉장히 아니꼽게 바라봤다. 거기다 본인은 막부의 존재 자체를 탐탁치않게 여겼고 초기의 나가요시나 조부 미요시 모토나가와 같은 사상을 가져 아예 막부를 전복시키고 없애버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결국 요시츠구는 미요시 산닌슈[3], 마츠나가 히사미치(松永久通)[4]와 함께 쇼군을 토벌하기로 마음먹는다.

1565년 5월 19일 오전 8시경, 미요시 요시츠구는 미요시 산닌슈, 히사미치와 함께 쇼군의 거처 니조어소를 포위공격한다. 쇼군 측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어 성을 보수해두는 등 방어의 준비를 갖추었으나,[5] 당시 주둔 중이던 병사의 수가 적어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쇼군의 군사들은 맹렬히 미요시 군과 맞섰고, 어느 정도 선전한다. 그러나 결국 밀렸고, 니조어소에 미요시 군의 침입을 허용하게 된다.

니조어소 내부로 처들어온 미요시 군은 쇼군의 살해에 나섰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성이라고 불린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덴에게서 사사해 검호 쇼군이라는 이명이 있을 정도로 검술의 달인이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처음에는 나기나타를, 후에는 검을 들고 직접 응전하였는데, 그 싸우는 모습은 승리를 눈 앞에 둔 사람과 같이 기세등등하였다고 되어 있다. 아시카가 계세기에서는 잘 드는 칼들을 어전에 세워두고 바꾸어가며 베어넘겼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라, 결국 검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사망하고 만다.[6] 요시테루의 어머니로 코노에 가문과의 연결점이 된 케이쥬인도 미요시 군에게 살해되었다. 그뿐이 아니라 쇼군의 측실 코지쥬노츠보네도 살해되었다.


4. 사건 이후[편집]


쇼군은 사망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기능이 정지했다. 요시츠구는 새로운 쇼군을 옹립하지 않았고 호족들을 진정시켜가며 키나이를 통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히사히데는 이 소식을 듣고 요시츠구의 정치 모토에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히사히데는 승려로 있던 요시테루의 동생 가쿠케이나라현에 유폐, 사실상 그를 보호해주었으며 그 약조의 서신을 가쿠케이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두 달 뒤인 7월 28일에 가쿠케이는 요시테루의 근신 잇시키 후지나가, 호소카와 후지타카 등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가쿠케이는 다음 해 2월에 환속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로 이름을 바꾸고, 아케치 미츠히데의 인도로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반면 막부를 멸망시킨 미요시 가문은 내분이 일어났다. 나가야스와 히사히데가 서로를 혐오하며 경멸하였고 이에 나가야스는 아예 요시츠구를 통해 히사히데와 반목할 것을 요청했으며 요시츠구가 나가야스의 의견에 따르자 나가야스가 본격적으로 히사히데를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히사히데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영토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애초에 맞설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히사히데는 패퇴하여 미요시 가문에서 쫓겨났고 미요시 가문은 산닌슈의 원탑 체제가 되었다.

요시아키가 동쪽에서 준동하자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새로운 쇼군을 옹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산닌슈는 이에 찬동하였고 결국 14대 쇼군으로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선발되어 키나이로 향하기 시작, 이로써 막부는 부활하였다. 이에 요시츠구는 자신의 정치 모토를 부숴버린 것에 분노하였고 나가후사와 산닌슈의 냉담한 시선이 이어지자 히사히데에게 투신, 자신이 미요시 가문과 대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다.

이렇게 미요시 세력과 마츠나가 세력은 끝없이 격돌하였고 내분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않고 있었다. 토다이지에서의 역공에도 수세가 변치않는 요시츠구와 히사히데는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상락의 기미를 보이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윽고 노부나가는 키나이에 당도하여 분열된 미요시 가문을 그들의 본거지인 아와로 내쫓았으며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옹립하여 막부를 재정비하고 오다 가문을 새로운 키나이의 주인으로 바꾸는 것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로써 키나이 미요시 가문은 멸망하였다.


5. 평가[편집]


결과적으로 미요시 가문에 있어서는 정말 최악의 한 수가 되었다. 쇼군을 살해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이후 요시츠구가 가신단 컨트롤을 전혀 하지 못한데다 이로인해 히사히데가 떨어져 나가고 자신의 모토도 박살이 났으니 요시츠구 입장에선 정말 일이 완전히 꼬여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여러모로 무로마치 막부 후기의 혼란함을 대표하는 사건 중 하나. 쇼군의 사망도 그렇고 노부나가의 상락도 그렇고, 여러모로 스펙타클한 아시카가 가문 후기 역사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건이다.[7]

사건을 결행시킨 요시츠구는 당시 10대 중반 쯤의 나이였다.

초창기에는 히사히데가 진정한 주모자라고 알려졌으며 덕분에 히사히데를 다루는 매체에선 빼도박도 못하게 그의 독단이라고 설명하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로인해 히사히데의 이미지는 악독한 인간으로 정착해버렸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로 이 사건에 히사히데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8] 사건 당시 히사히데는 야마토의 군단장을 맡아 정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현재 히사히데가 상락했단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만약 이 사건의 주모자가 히사히데라면 쇼군을 죽이는 거사에 병사만 보내놓고 자기는 본거지에 박혀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또한 쇼군 살해이후 히사히데는 자신의 주가와 싸웠으면 싸웠지 자기가 쇼군을 새로 옹립하지도 않았고 쇼군을 웃도는 세력에도 붙지않았다.

히사히데와 쇼군은 적대적 관계에 있지 않았으며, 생각보다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였다. 요시오키와 함께 오토모슈를 맡아 미요시 가문과 쇼군 가문의 외교 관계를 책임졌으며 요시테루가 살해당하자 동생인 요시아키를 유폐시키고 "목숨을 뺏지 않을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6. 대중 문화에서[편집]


태합입지전 5에서 이벤트로 발생한다. 요시테루로 플레이할 시 개인 전투에서 승리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전국무쌍 4-2에서는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주인공인 반역의 장 오프닝에서 다뤄진다. 여기서는 요시테루가 잡졸들을 상대로 간지나게 무쌍을 펼치지만 히사히데가 던진 폭탄에 의해 폭사해 버린다.

활격 도검난무 7화에서 에이로쿠의 변이 묘사된다. 불타는 니죠성에서 아시카가 요시테루호네바미 토시로를 들고 저항하나 등에 검에 찔려 죽는다. 살해당한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원념이 한냐 가면에 스며들더니 악귀화해 자신을 공격한 미요시 요시츠구의 병사들을 전부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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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로마치 막부의 다이묘간의 영지 분쟁 등을 해결하던 재판소[2] 전 후계자였던 요시오키도 보좌역의 나가야스, 동료인 히사히데와 함께 일을 수행해 나갔다. 이 두명이 미요시 가문의 최고 가신임을 넌지시 추측할 수 있는 부분.[3] 나가야스의 독자행동일 가능성 있음.[4] 히사히데의 아들. 당시의 이름은 요시히사(義久)였다.[5] 그러나 단지 누군가 공격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는 말도 있다. 미요시 요시츠구가 군을 이끌고 상경했는데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6] 계세기에 따르면 미요시 측의 무장 하나가 문 뒤에 숨어있다가 기습적으로 요시테루의 다리를 찔러 쓰러뜨렸고, 이를 틈타 미요시 군이 장지문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서 창을 찔렀다고 한다.[7] 무로마치 후기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정리해보면 후계자 문제로 고위 임원들이 서로 들이받질않나, 싸웠던 임원은 쇼군을 폐립시키고 양자만 세명을 데려와 카오스를 열질않나, 카오스를 틈타 새로운 중앙 정권을 세우는 인간이 있질않나, 그 아들 놈은 진짜로 막부를 때려 부수질않나, 겨우 자리잡았더니 이번엔 그 후계자가 때려 부수질않나, 이젠 도와준 녀석이 뒤통수를 후려갈겨 막부를 멸망시켜버리질않나... 여러모로 정말 혼란한 시기였다.[8] 아들 히사미치가 사건에 크게 관여했기 때문에 히사히데가 암묵적 동의를 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는 학자 분들도 있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