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페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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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페루 국경 지도

La guerra peruano-ecuatoriana / Guerra del 41


1941년 에콰도르페루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국경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1. 배경
2. 전개
3. 결과
4. 관련 문서



1. 배경[편집]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북미 식민지 13개주가 미국 독립전쟁으로 미국으로 독립한 데 이어서,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을 기점으로 중남미 대륙을 식민지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포르투갈이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장기 지배에 놓여있었던 중남미의 식민지들은 이러한 국제정세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벌이면서 수많은 신생 국가들이 독립에 성공했다.[1]

이들 중남미의 신생 독립 국가들은 명확한 국경선이 없는 관계로 근접한 영토, 강, 바다, 호수 등을 놓고 영토분쟁을 벌이게 되었고, 이러한 영토 분쟁은 국가간 전쟁과 무력충돌로까지 벌어졌다. 페루와 에콰도르 역시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에는 성공했으나, 독립 후 양국은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국민구성에 있어서 독립 당시 페루는 남미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전체인구의 45%를 차지했던데 반해 에콰도르는 스페인 백인과 원주민 혼혈인 메스티소가 66%를 차지하고 원주민은 25%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역사적으로도 잉카 제국 등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의 후예를 자부했던 페루의 입장에서 과거 잉카 제국 시기 피지배국이었다가, 스페인군이 침입하자 현지의 피지배 원주민들이 스페인군과 합세하여 잉카의 멸망을 지원하다 못해, 스페인의 잉카 정벌을 도왔던 잉카 시절의 피지배 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계 백인들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메스티소의 나라인 에콰도르를 적대/멸시했고, 에콰도르 또한 스페인 식민화 이전 자신들을 압제하던 잉카 제국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웃나라 페루를 경계했다.

결국 이 두 나라의 관계를 악화시킨 가장 큰 요인은 두 나라 국경 사이에 놓여있던 내륙 아마존 강 열대 우림 지역의 영유권 문제였다. 국경이고 소유권이고 뭐고 명확하지 않은 이 열대림 지역을 두고 양국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대립하였는데, 에콰도르는 실효적으로 이 지역이 자국이 통제하고 있으니 에콰도르 영토라고 주장했고 페루는 우리도 여기 지배권 있다며 맞받아쳤다.[2] 한편으로 두 나라 지도부들은 서로 협상을 벌였지만 서로간의 의견 불일치로 협상은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협상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자 에콰도르와 페루 양국 모두 불만이 누적되었고, 급기야는 전쟁이라도 불사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에콰도르와 페루 양국내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대립을 거듭하던 에콰도르와 페루는 문제의 영유권 분쟁지역에서 1941년 무력충돌을 일으켰고 7월 5일 양국 모두 전쟁 개시를 선언했다.


2. 전개[편집]


전쟁이 발발하자 전세는 상당히 많은 병력 규모와 현대화된 항공기, 전차, 함대 등으로 무장한 페루군이 상당히 우세했다. 그러나 에콰도르도 영토 수호의지로 페루군의 침공에 저항했고 충돌은 격화되었다. 하지만 인구나 군사력 규모에 있어서 뒤졌던 에콰도르는 분투에도 불과하고 점차 페루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주요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급기야 페루군은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까지 진격하였다.

에콰도르는 전술이나 전세 무기, 병력 규모에 있어서 허약한 자국 군사력으로 페루를 이길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 에콰도르 정계 내부에서도 페루와 휴전을 해서라도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휴전파와 페루와의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전파로 분열되어 대립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국가 간의 분쟁을 중재할 수 있는 국제연맹마저 유명무실해져버린 상황이었던데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당시 분쟁을 중재할 수 있을 만한 다른 해외의 열강들조차 나치 독일일본 제국 등 추축국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 에콰도르에게 외교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결국 에콰도르의 아로요 대통령은 휴전파 세력들의 입장을 수용하여 1941년 7월 31일 페루군에게 휴전을 제의했고 페루가 휴전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의 종전이 성립되면서 에콰도르-페루 전쟁은 페루군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3. 결과[편집]


결국 전쟁에서 패배한 에콰도르는 이듬해인 1942년 브라질리우데자네이루에서 페루와 분쟁중인 열대림 지역 상당수를 페루에 양도하는 내용의 리우 조약에 서명했고 페루는 이 조약을 통해서 12.9만㎢에 달하는 방대한 아마존강 열대림 지역을 자국영토로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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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의 식민지인 아이티는 자체 봉기로 독립.[2] 실질적으로 에콰도르 땅이긴 했는데 에콰도르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오지들이 많이 있었다. 심지어 이 지역에서 살던 원주민 부족들도 여기가 원래 에콰도르 땅이었다가 페루 땅이 된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정도였다. 이는 현재에도 아마조니아 밀림 지대를 각각 자국령으로 영유하고 있는 브라질이나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같은 남미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빽빽한 열대우림에 가로막혀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약한 오지 지역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