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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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군의 전투영상.

AP통신의 보도. 곳곳에 참호전의 흔적이 보인다.영상

1. 개요
2. 상세
3. 종전



1. 개요[편집]


1998년~2000년간 일어났던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의 국경 분쟁이다.

사실 국경 분쟁으로 시작했지만 양측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 전면전으로 치달아 사망자만 10만 이상이 났던 대규모 전쟁이었다.

먼 아프리카 국가간의 전쟁이라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정도의 사망자가 난 양국간의 전쟁은 이란-이라크 전쟁,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정도 밖에 없다.[1]


2. 상세[편집]


1993년 30년간의 지독한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이후 독립한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관계는 매우 나빴다. 1991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정권이 붕괴하고 내전을 수습한 에티오피아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했고, 친했던 러시아와의 관계를 정립하며 간신히 국가를 수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리트레아의 독립으로 인해 내륙국이 된 에티오피아의 경제 발전은 한계가 있었고 양측의 민족감정이 매우 상한 상태였다. 에티오피아는 자국의 통화 사용과 항구 사용권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에리트레아는 자체 통화를 발행하고 에티오피아 항구 사용에 대해서도 협조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에리트레아와의 국경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국경에서 양측의 분란이 자주 일어났고 이는 소규모 국지전으로 비화되었다.

1998년 5월 에리트레아령이었던 접경지대인 바드메[2]에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진입하여 지역을 점령하고 에리트레아 군사들을 내쫒았다.

양측의 총격전으로 에리트레아 군인들의 희생자가 나자 에리트레아는 즉각 철수를 요구했으나 에티오피아는 이를 거부했다. 에리트레아는 이를 에티오피아의 선전포고로 간주,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총동원령을 내리고 약 1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이에 멜레스 제나위 에티오피아 대통령 역시 총동원령을 내리고 3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국경 전역에서 대규모 전면전에 돌입했다. 양측은 공군을 동원해 서로의 수도를 폭격했는데 에티오피아는 우호국이었던 러시아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았고 에리트레아는 우크라이나[3]불가리아[4]의 지원을 받았다. 한편 이들 지원국들은 중동전쟁냉전 시대 당시에 군비 확충으로 남아돌던 화기와 탄환, 전투기와 같은 무기와 군수물자의 생산분 제고들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양쪽에 팔았으며, 특히 이 전쟁 당시에 러시아제 전투기인 Su-27MiG-29간의 공중전도 일어났을 정도였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는 Su-27을, 에리트레아는 MiG-29를 운용했는데, 세 차례의 공중전에서 Su-27이 완승을 거두며 에티오피아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다. Su-27의 손실은 0기, MiG-29는 총 3기(에리트레아 주장), 또는 4기(에티오피아 주장)를 손실당했다.#

4주간에 크게 세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 이때 약 7만에 달하는 사망자가 났다고 한다. 국경 지대에는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여 인근 지역으로 피신하고 기아 문제까지 겹쳐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있었던 참호전이 전쟁의 특징이었는데 이 참호를 1차 대전때처럼 포격 후 무리하게 알보병으로 공격하다가 부지기수의 사망자가 났다고 한다. 양측 모두 기갑 전력과 공중 전력이 부족한 빈국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다. 차량도 부족해서 보급은 말과 당나귀를 주로 사용했다.

유엔과 아프리카 통일 기구가 중재에 나서 유엔은 에티오피아에게 바드메를 에리트레아에게 돌려주고 철수할 것을 권유했지만 당연히 에티오피아는 거절하고 에리트레아에 대해 맹공격을 가했다. 전쟁은 전반적으로 국경지대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계속 됐지만 전체적인 국력이 더 강성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에 유리했다.[5]

에티오피아는 2000년경 에리트레아 영토의 4분의 1을 점령하고 변경 지대에서 살던 에리트레아인 주민 65만명을 학살하거나 추방시켰다. 이러한 인도적 위기가 발생하자 유엔 안보리는 뒤늦게 무기 금수 조치를 취했으나 이미 전쟁은 완료단계에 이르러 2000년 5월 25일 에티오피아는 일방적으로 승리 선언과 전투 중지를 단행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양국은 아프리카 통일 기구의 중재를 받아들여 2000년 6월 18일 휴전협정에 사인했다. 이후 12월 12일 알제리에서 알제리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3. 종전[편집]


휴전협정에서 즉각적인 휴전과 양군의 철수, 평화유지군이 정전 협정을 제대로 맺는지 감시를 하고, 국경지대에 대해 국경을 확정지었다. 바드메는 에리트레아령으로 회복이 결정되었으나 에티오피아가 불만을 가져 할양을 거부했다. 이후 에리트레아군이 철수하고 25km의 안보지대를 설치하였다.관련 기사 알제리 조약에서 이러한 결정이 재확인 됐으나 양국간의 갈등은 이후에도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2004년, 2007년, 2012년, 2016년에도 서로간의 소규모 국지전이 일어났다. 2018년 양국은 다시 평화조약을 맺기로 하고 공식적으로 분쟁을 종결지었으며 에티오피아는 바드메를 에리트레아에게 돌려주고 대신 항구 사용권과 여러 편의를 얻었다.

아비 아머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가 이 공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평화조약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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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망자가 많이 났지만 여러 나라가 개입한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수단 내전, 콩고 전쟁, 시리아 내전 같은 내전들은 마찬가지로 양국간 전쟁이라 볼 수 없다. 더해서 콩고 전쟁은 전쟁 사망자 자체보다는 내란으로 인한 기아와 학살, 전염병 사망자가 더 많았다.[2] 에리트리아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할 때 국경선 문제를 말끔하게 매듭짓지 못해서 바드메 지구 내에 국경선이 통과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게다가 국경선이 몇몇 집 내부를 관통하면서 월경지가 대량으로 발생했다.[3]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갈등관계에 있지만, 이 시기에는 러시아와 사이가 나빠서 에리트레아를 지지했다라기 보다는 어려운 경제 때문에 군축 겸 해서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치운 것이다.[4] 우크라이나와 다르게 러시아와는 역사적, 외교적으로 사이가 나쁘지 않은데도 에리트레아에게 무기와 물자를 공급했다.[5] 사실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의 경우 에티오피아가 막 정권이 무너지고 혼란한 틈을 타 에리트레아가 승리한 것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