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토르 스카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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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토르 스카로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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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svg

17대


엑토르 스카로네의 수상 이력

1917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엑토르 스카로네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우루과이의 前 축구인


파일:external/www.muchomundial.com/hector-scarone-fc-barcelona.jpg

이름
엑토르 스카로네
Héctor Scarone
본명
엑토르 페드로 스카로네 베레타
Héctor Pedro Scarone Beretta
출생
1898년 11월 26일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사망
1967년 4월 4일 (향년 68세)
국적
우루과이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신체
171cm | 체중 73kg
직업
축구선수 (인사이드 라이트 / 은퇴)
축구감독 은퇴
등번호
-[1]
소속
선수
나시오날 (1916~1926)
FC 바르셀로나 (1926~1927)
나시오날 (1927~1931)
암브로지아나 인테르 (1931~1932)
US 팔레르모 (1932~1934)
나시오날 (1934~1939)
감독
미요나리오스 FC (1947~1948)
레알 마드리드 CF (1951~1952)
나시오날 (1954)
국가대표
파일: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51경기 31골 (우루과이 / 1917~1932)

1. 개요
2. 생애
2.1. 데뷔부터 월드컵까지
2.3. 월드컵 이후
2.4. 감독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개요[편집]


우루과이의 前 축구인.


2. 생애[편집]



2.1. 데뷔부터 월드컵까지[편집]


스카로네는 1898년 몬테비데오의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공을 차고 노는 걸 좋아했던 스카로네의 주요 훈련법은 집안의 울타리에 난 작은 구멍에 공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렇게 축구 기술을 연마하던 스카로네는 15살 때 우루과이의 명문 클럽 중 하나인 나시오날에 입단 테스트를 요청하였지만 체격이 작다는 이유로 떨어졌다. 보통 축구 선수가 어렸을 때 이런 스토리를 겪게 되면 자신을 버린 친정팀의 라이벌팀에 입단 테스트를 거쳐서 합격, 그리고 라이벌 팀에서 만날 때마다 복수, 그리고 이 선수가 대단한 선수일수록 친정팀의 역사적 뻘짓으로 역사에 남곤한다. 하지만 진성 나시오날 빠돌이었던 스카로네는 나시오날의 지적대로 체격을 불려서 다시 테스트에 임했고 결국 합격했다.

나시오날에서 갓 데뷔한 19살짜리 공격수가 기존 축구판 무서운 줄 모르고 골을 때려박자 우루과이 대표팀에서 자국에서 열린 191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참가할 때 그를 뽑아갔다. 그리고 그는 전 경기에 출전[2]하여 2골을 넣으며 그를 뽑았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냈다. 게다가 서로 2승을 거둬서 사실상 우승자를 가리는 마지막 아르헨티나와의 시합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1대0으로 이겼는데 결승골이니 그야말로 만점짜리 활약이었고 스카로네는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게다가 그의 형인 카를로스 스카로네 역시 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전 경기에 형제가 같이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대표팀의 주축 멤버가 된 스카로네는 우루과이가 뭔가 중요한 대회에 참석하면 항상 명단에 올라갔다. 그리고 이 시기는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 1920년대의 웬만한 중요 국가대표팀 대회 우승팀의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있었다.

또한 1926년에는 스페인FC 바르셀로나로 건너가서 18경기에 출전 17골을 넣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3]

그리고 월드컵 이전의 세계구급 무대인 올림픽에서 우루과이는 2연패에 성공했다. 스카로네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바르셀로나를 떠날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다시 나시오날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카로네는 올림픽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뽑아냄으로서 앙헬 로마노를 제치고 역대 우루과이 대표팀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우루과이를 생각했고, 1928년 올림픽이 다가온다는 것, 하늘색 유니폼과 나시오날도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사인을 안 하면 다시는 나시오날에서 뛸 수 없을 것 같았죠. 계약 마감일 전 마지막 제안을 하더군요. 5년간 3만 달러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시오날과 대표팀에서 뛰기 위해 다시 우루과이로 돌아왔어요.

엑토르 스카로네



2.2. 초대 월드컵[편집]


국가대표팀이 이런 대단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우루과이 정부는 초대 월드컵 유치를 위해 FIFA를 설득했고, 마침 1930년이 우루과이의 독립 100주년도 되는 의미가 있는 해였기 때문에 FIFA의 승인을 받아 초대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었다. 스카로네는 당시 31세의 노장이었고 처음 생기는 월드컵을 제외하면 이룰 거 다 이룬 상태. 하지만 마지막을 준비하는 노장에게 월드컵의 유혹은 떨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스카로네는 월드컵의 첫 시합인 페루와의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후 3경기에는 내리 출전하며 우루과이의 첫 우승에 큰 보탬이 되었다.


2.3. 월드컵 이후[편집]


스카로네는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나시오날에서 보냈다. 월드컵 이후에는 이탈리아에 건너가서 암브로지아나 인테르[4]팔레르모에서 뛰기도 했다. 그리고 1934년에 다시 우루과이로 리턴하여 1939년까지 나시오날에서 뛰다가 은퇴하였다.


2.4. 감독 생활[편집]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 FC[5]레알 마드리드, 친정팀 나시오날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기술적이고 강한 인사이드 포워드.

지금은 깨졌지만 31골로 79년이나 우루과이 대표팀의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던 선수. 그리고 당대 최고의 인사이드-라이트 포워드. 평가는 이 두 마디면 설명이 끝난다.


4. 뒷이야기[편집]


  • 당시 축구 선수들은 프로의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잡을 뛰는 선수들이 많았다. 스카로네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집배원 일을 했었다. 둘 다 뛰어다니는 직업이다.
  • 1926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그는 볼리비아를 상대로 한 경기에 5골을 넣었다. 이는 코파 아메리카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인 동시에 우루과이 대표팀 역대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이다.


5. 수상[편집]



5.1. 클럽[편집]




5.2. 국가대표[편집]




5.3. 개인[편집]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당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은 4개의 팀이 참가하는 풀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3경기면 전 경기 출전이다.[3] 당시 FC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전체를 아우르는 라 리가의 출범 전이라 카탈루냐 지역 리그 소속이었다.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리오넬 메시 이전의 역대 클럽 최다 득점자이자 필리핀-스페인 혼혈로 유명한 파울리노 알칸타라, 주젭 사미티에르 등 바르셀로나 역사 초기의 전설적인 선수들이 뛰고 있었다.[4]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하던 당시에는 이 이름이었다[5]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콜롬비아에서 뛰었던 그 팀이다. 하지만 디 스테파노와는 1년 차이로 선수와 감독으로 만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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