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모리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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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니오 모리코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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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RI
엔니오 모리코네
Ennio Morricone


파일:Ennio-morricone-portrait-Photo-PierMarcoTacca-GettyImages@1400x1050-800x600.jpg

출생
1928년 11월 10일
이탈리아 왕국 로마
사망
2020년 7월 6일 (향년 91세)
이탈리아 로마 캠퍼스 바이오 메디코 대학병원
국적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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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1928~1946년)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1946~2020년)
직업
작곡가, 편곡가, 지휘자, 오케스트레이터, 프로듀서
장르
영화 음악, 클래식, 절대 음악, 재즈, ,
활동
1946년 ~ 2020년
학력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EM-Signature.pn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이력
2.2. 새로운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주목받기 시작
2.3. 거장 감독과 거장 작곡가의 마지막 걸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2.4. 영화 음악 작곡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다
2.4.1. 아카데미 시상식 명예 오스카상 수상
2.4.2.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상 수상
2.5. 전 세계인의 애도 속에 타계
3. 여담
4. 주요 작품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이탈리아작곡가, 편곡가, 오케스트레이터이자 지휘자.

미국존 윌리엄스와 함께 전세계 영화팬들과 음악팬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고, 국경과 세대를 뛰어넘는 최고의 명곡들을 작곡한, 현대 영화 음악의 거성이자 20세기 전후세대 작곡가 중 가장 영향력있는 거장[1]중의 한 사람이다.

1960년대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유럽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들의 작업을 오가며 전설적인 작곡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평생 고향인 이탈리아의 로마에 살면서 엄청난 양의 다작을 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까지 400여 편이 넘는 영화 및 드라마 음악과 100여 곡에 이르는 클래식 음악을 작곡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품 리스트를 보면 그가 지난 60여 년간 영화, 연극, 뮤지컬, TV, 국제적 이벤트, 콘서트 홀, 비디오 게임 (*) 등 음악 예술이 향유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창작과 지휘 활동을 병행해온 전설적인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탁월한 음악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그의 앨범들은 연주음악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전 세계적으로 7,0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이 중 프랑스에서 650만 장, 미국에서 300만 장, 한국에서 2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전 세계 인터넷 음악 데이터 베이스인 Allmusic에 확인해보면 무려 3,301장의 앨범에 그의 크레딧이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2. 생애[편집]



2.1. 이력[편집]


1928년 11월 10일 이탈리아 로마 중심부의 트라스테베레에서 태어났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태어나던 날은 이탈리아가 파시스트 정권 통치하에 들어가던 날이었다고 한다. 나이트 클럽과 댄스 클럽 등지에서 활동하던 프로페셔널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 로베르토 모리코네 덕분에 어릴 적부터 트럼펫과 음악 이론을 배울 수 있었다. 어머니 리베라 모리코네는 소규모 가내직물업을 하며 엔니오 외에도 프랑코, 아드리아나, 마리아, 알도의 5남매를 키웠다.

여섯 살에 처음 곡을 쓰기 시작하고 아홉 살에 이미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개인적으로 트럼펫 레슨을 받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아버지의 연주가 집안 전체의 유일한 수입원이어서 아프거나 하시면 종종 어린 엔니오가 대신 나가서 클럽 연주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열네 살에는 공식적으로 같은 음악원에 등록해 일종의 예비 과정인 하모니 프로그램과 트럼펫 전공 본과정을 차례로 이수했다. 이 기간 동안 트럼펫 외에 작곡과 지휘도 같이 배웠고, 특히 작곡 지도 교수였던 전위파 성향의 작곡가이자 20세기 현대음악의 위대한 거장인 고프레도 페트라시(Goffredo Petrassi)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한창 예민한 10대 시절, 제2차 세계대전 을 겪고 비무장 도시인 로마에 독일 폭격기들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극심한 굶주림과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힘들게 생활해야 했다. 이때 어린 모리코네가 겪은 처절한 고통과 생생한 경험은 평생 그의 기억에 남아 이후 영화 음악가로서 작곡한 작품들에도 크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당시 작은 악단에 소속되어 있던 모리코네는 독일군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는 독일군들 앞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고, 2차대전에 승리한 미군이 로마에 입성했을 때는 미군들 앞에서 트럼펫 연주를 하였다고 한다.

1946년에 트럼펫 연주 전공으로 학위를 따서 음악원을 졸업했다. 하지만 작곡을 제대로 깊이 있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모리코네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작곡과에 재입학해 페트라시 교수의 지도 하에 공부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 당시 클래식 음악계는 극히 보수적이어서 연주자가 작곡을 배우고 싶어한다는 것은 거의 스캔들에 가까웠는데, 생계를 위해 밤에는 틈틈이 트럼펫으로 클럽 연주를 하면서 이 기간 동안 가곡을 비롯한 소위 '순수음악'에 속하는 곡들을 작곡하였다. 1954년에 작곡 학위를 획득해서 두 번째로 음악원을 졸업했다. 졸업 이듬해인 1955년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상 높은 젊은 예술가에게도 현실은 현실인지라 경제 사정이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고 한다.

1956년에 마리아 트라비아(Maria Travia)와 결혼했으며 그 해 첫 번째 아들인 마르코를 얻었다. 부양해야 할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자 그는 더 이상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교를 나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는 대중음악의 전통을 벗어난 작곡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다음 몇 년 동안 자신이 추구해온 예술음악, 혹은 절대음악의 정의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에 있던 당시 유명 음반사인 RCA의 문을 두드렸고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대중음악 가수들의 편곡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 활동하기 시작한 시절에는 몇 년간 유명 작/편곡가들의 작업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고 경험을 쌓았다. 그는 스승 페트라시 및 같이 공부한 학구적인 동료 작곡가들의 비난이나 그들과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본명을 쓰지 않고 한동안 이런 저런 가명을 썼다.

모리코네의 회고 인터뷰 <Ennio Morricone:In His Own Words>에 따르면, 당시 로마에서 유명 작곡가들이 간단한 스케치를 해서 던져주면 이를 확장해 오케스트레이션을 하거나 노래 반주를 만드는 편곡 작업을 하는 젊은 도제들을 "니그로(negro)"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리코네는 동시에 이탈리아 국영방송국(RAI)의 관현악단에서 트럼펫 연주자와 작/편곡가로 활동하면서 당시 유명 팝 가수였던 폴 앵카의 편곡 작업을 하는 등 대중음악 분야의 경험도 많이 쌓았고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틀어 수백 곡의 노래들을 편곡했다.

모리코네는 이 당시 클래식에 아직 미련이 남아 있어, 1960년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베네치아의 라페니체 극장에서 자신이 작곡한 협주곡 지휘를 하며 클래식 음악계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기왕 대중음악을 할거면 음반 제작과 히트곡을 만드는 과정에 핵심 역할을 함에도 음악 업계 관행으로 인해 늘 그늘에 가려진 편곡가보다는 이름 있는 작곡가로 더 알려지고 싶어했다. 그런 연유로 가명을 쓰기도 하며 주위에 자신의 편곡가 활동을 비밀로 하기도 하였으나, 곧 수많은 히트곡을 내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편곡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중음악 작업을 하면서도 순수음악에 대한 흥미도 잃지 않아, 당시 이탈리아 전위음악의 선두 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프랑코 에반젤리스티가 주축이 되어 1964년에 결성한 '새로운 어울림음의 즉흥연주 그룹(Gruppo di Improvvisazione di Nuova Consonanza)'이라는 연주단의 일원으로도 활동하며 당시 영화음악 분야의 상업성이나 통속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대음악가로서의 진지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본격 장편영화의 음악 작업은 루치아노 살체의 파시스트(The Fascist (Il federale))의 음악을 작곡한 1961년부터 시작했다.

Ennio Morricone -- BBC2 Documentary
- 1995년에 BBC2에서 방영한 엔니오 모리코네 다큐멘터리. 그의 생애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와 함께 작업한 브라이언 드 팔마 등 유명 영화인들이 그의 천부적인 감각과 끊임없는 열정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영자막, 39분)

Ogni Volta - Paul Anka 1964
- 1965년 엔니오 모리코네가 편곡한 곡들 중 가장 높은 순위로 차트에 오른 캐나다 출신의 팝 가수 폴 앵카의 "Ogni Volta (Every time)". 폴 앵카의 전기에 의하면 이 곡이 담긴 45회전 싱글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300만 장 이상 팔렸다고 한다.

Mina - Se telefonando
1966년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 및 편곡으로 참여한 이탈리아 가수 미나(Mina)의 "Se telefonando (If calling)". 언뜻 평범한 60년대 팝송 같지만 후렴부를 자세히 들어보면 3개의 음으로 구성된 멜로디 구조가 한 싸이클을 돌 때마다 한 음씩 추가되며 전조되는 모리코네의 탁월한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Gruppo Nuova Consonanza Azioni Documentario
- 엔니오 모리코네가 1960년대에 트럼펫으로 참여한 작곡가들의 모임이며 전위 창작집단인, '새로운 어울림음의 즉흥연주 그룹 (Gruppo Nuova Consonanza Azioni Documentario)'의 다큐멘터리.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된 희귀 영상이며 영어 자막이 있다. 엔니오의 연주와 인터뷰를 포함해 그룹의 실험적인 음악은 충분히 들어볼 수 있다.

"전위부대"라는 혹은 "선발대"라는 말과 관계가 있는 "전위, 혹은 아방가르드"는 원래 군사용어로 전투시 최전방에 위치한 선발 부대가 신속하게 진로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며 돌진해 나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전위 음악은 음악인들이 예술가로서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을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마음대로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청중이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현재의 음악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얻을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 대중음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당시는 특히 전후 세대의 충격과 공포, 냉전시대 핵무기에 대한 불안감, 근현대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성의 상실으로 인해 생긴 모호성 및 불확실의 역설과 주체의 붕괴 등을 반영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태동으로 인해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급진적인 실험을 추구하던 시기인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1960년대 후반 북부독일방송에 의해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평소 일반적으로 듣기 편하고 아름다운 영화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로만 대중에 알려진 엔니오 모리코네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 2분 15초부터 트럼펫으로 즉흥 연주를 하는 모리코네와 다른 그룹 멤버들의 모습이 나온다. 언뜻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자세가 그의 선구적인 영화 음악 사운드 디자인 실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보통 음악인들은 대중성, 음악성, 실험성 등 대부분 한쪽 성향으로 크게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대중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 실험적인 면을 차별하지 않고 적극 수용하고 다양한 관심을 보였던 엔니오 모리코네의 광범위한 폭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모리코네는 20세기 이후에도 영화음악보다는 자신이 더 하고 싶어했던 절대음악 양식의 클래식 협주곡이나 오라토리오, 관현악곡, 실내악 등도 다수 작곡했으며, 대중에 잘 알려진 영화음악의 후광에 가려있던 이들 작품도 최근 들어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다음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초기작들 중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작품들이다.

Ennio Morricone - The Battle of Algiers
- 북아프리카 알제리 국민들이 130년간 통치받던 식민지를 벗어나 나라의 주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 열강 프랑스를 상대로 1954년~1962년까지 8년간 벌인 알제리 전쟁에 바탕한 1966년 명작 영화, "La Battaglia di Algeri (The Battle of Algiers)"의 테마. 영화의 작품성도 뛰어나 1966년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1972년도 영국 영화 아카데미 (BAFTA) United Nations 상을 수상했다. 전 세계 영화 감독들이 지금도 이 영화의 드라마틱한 리얼리즘찬사를 보내고 있고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으로도 출시되었다. (크라이테리온 온라인 채널로도 영자막과 함께 시청 가능). 프랑스에서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려 5년간 상영 금지되었으며, 2003년에 미 국방부에서 이라크 전쟁 문제와 관련해 아랍권 문화에 대해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하던 군 장성들이 단체관람하며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Ennio Morricone - La Battaglia di Algeri
"La Battaglia di Algeri (The Battle of Algiers)"의 메인 테마. 알제리 독립 투쟁 당시의 저항하던 민중들의 처절한 전쟁과도 같았던 시기의 강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Theme (From "Love Circle", 1969)
- 1969년 드라마 영화, "Metti, una sera a cena (혹은 "One Night at Dinner" and "Love Circle")"의 메인 테마. 싱커페이션과 전조 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드라마 등장 인물들의 알송달송한 애정 관계들과 유혹을 표현하고 있다. 지금 들어도 세련되고 감동을 주는 상큼한 멜로디의 보사노바이다.

"CHI MAI" - Ennio Morricone live in Moscow, 2012
- 1971년 영화, "막달레나(Maddelena)"의 영화 음악, "Chi Mai (Whoever: 누구든지)."

이후 1981년에는 프랑스 영화 "Le Professionnel"과 같은 해 영국의 인기 TV 드라마, "The Life and Times of Lloyd George"에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91년 10월 5일, MBC 주말의 명화에서 패트릭 알렉산더(1926~2003) 원작 소설 제목인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Death of a Thin-Skinned Animal'》으로(비디오는 영화 원제목으로 출시) 방영한 바 있는데 주인공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제목이다. 대림맛살 TV 광고(씁쓸하게도 일본 광고를 베꼈다...)에도 나온 바 있다.

Ennio Morricone - Come Maddalena
- 영화 "막달레나"의 메인 테마 "Come Maddalena". 비교적 긴 라틴 재즈 드럼교회 오르간 인트로로 시작하는 이 곡은, 현악 앙상블, 소프라노 보컬, 여성 합창,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소리 등이 어우러진 창의적인 편곡이 일품인 작품이다. 영화는 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욕망에 번민하는 가톨릭 신부를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nnio Morricone - Amore per amore, pt. 1 - Così Come Sei (1978)
- 80년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독일 출신 모델이자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가 주연으로 출연하고 이탈리아의 알베르토 라투아다가 감독한 1978년 영화 "그대 머무는 곳에 (Così Come Sei)"에서 사용된 애틋한 테마, "사랑을 위한 사랑 (Amore per amore), pt. 1. 사랑 없는 건조한 결혼 생활을 하던 한 중년 건축가가 젊고 아름다운 대학생을 만나 호감을 갖게 되는데, 20년 전에 함께했던 연인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혹시 자신의 친딸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노심초사하다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마지막엔 20년 전의 연인처럼 헤어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2.2. 새로운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주목받기 시작[편집]


"I've always said that my best dialogue and screenwriter is Ennio Morricone." - Sergio Leone

"난 항상 내 영화 최고의 대화와 화면을 만든 각본가는 엔니오 모리코네였다고 얘기해왔다." - 세르조 레오네


1964년에 동향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화 감독 세르조 레오네와 연결되어 황야의 무법자의 음악을 맡아 영화 음악가로서 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저예산 호러영화, 홍콩쿵푸 영화,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 자극적인 야한 영화(...) 등 온갖 장르의 영화들을 돌아가며 박리다매로 하루종일 틀어주는 "그라인드하우스(Grindhouse)"라는 저렴한 연중무휴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 80-90년대에 재개봉관 혹은 동시상영관이라는 국내외 온갖 상업 영화들을 가져와 돌려가며 상영하는 저렴한 영화관들이 있었다.)

이들 영화들은 대부분 저예산으로 만들어지고 미국인들이 좋아하던 보편적인 헐리우드 상업영화들과는 다른 관점이나 이미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간혹 작품성있는 영화들마저도 도매금으로 B급 영화로 부르며 불량식품처럼 푸대접하는 편견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외국인들에 대해 왠지 모르게 남아있는 미국인들의 선입견 때문에 엔니오 모리코네는 '댄 새비오’라는 이탈리아계 성씨이긴 하지만 영어권 거주자 느낌을 주는 가명을 써야 했던 웃픈 일화가 있다. 이후에도 이런 이유로 그는 '리오 니컬스' 등 여러 가지 다른 가명을 쓰기도 했다.

많은 팬들이 세르조 레오네와 엔니오 모리코네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한 죽마고우인 것으로 알고 있고 최근 일부 국내 언론에서도 그렇게 보도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약간 다르다. 2014년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뉴욕 대학교 교수 안토니오 몬다의 인터뷰를 담은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에서 작업차 성인이 되어 만났을 때 레오네의 특이한 입술 모양을 보고 모리코네가 먼저 알아보았다고 한다. ‘트라스테베레 거리에 있는 학교에 다녔던 거 맞아?’라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레오네가 ‘그래! 바로 네가 그때 그 모리코네구나!’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작곡가 모리코네가 순식간에 초딩 모리코네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고. #

물론 레오네와 모리코네는 둘 다 로마 출신이었고 2차대전 동안 그들이 겪은 전쟁의 공포와 인류애의 파괴, 아사 직전의 빈곤 경험 등을 겪어 여러 작품들을 거치면서 단순히 프로페셔널 예술가들로서의 관계를 뛰어넘어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가까운 의형제같은 친구사이가 되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황야의 무법자로 알려진 명성으로 레오네와 맺은 인연은 석양의 건맨, 석양의 무법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석양의 갱들과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된 1984년 작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까지 이어졌다.


- 세르조 레오네가 처음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을 크게 흥행에 성공시킨 1964년 작품 황야의 무법자(A Fitsful of Dollars) 테마.

원래 모리코네는 서부영화의 음악을 이미 두 편 담당한 적이 있었는데 레오네 감독이 이 음악들을 들어보고 전혀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리코네와 함께 이런 저런 음반을 함께 들어보다가 미국의 포크 가수이자 민중 가요의 전설인 우디 거스리원곡을 모리코네가 편곡해 가수 피터 테비스(Peter Tevis)가 부른 "드넓은 초원들 (Pastures of Plenty)"을 듣고서야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모리코네가 "그 곡은 잊어버려라"며 컨셉에 맞게 새로운 음악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는데도 고집불통 레오네 감독은 끝까지 이 음악을 넣어야 한다고 우겼다. 결국 모리코네의 기존 편곡에 가수 목소리에서 휘파람 소리로 옷만 갈아입힌 같은 멜로디를 다시 얹은 것이 황야의 무법자의 메인 테마가 되었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전형적인 사운드 트랙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모리코네는 황야의 무법자가 단돈 20만 달러(한화로 약 2억 2천만 원. 나중에 극장수익으로 70배가 넘는 1,450만 달러을 벌어들이는 대 히트를 침.)로 만든 저예산 영화이기에 음악 예산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녹음을 할 돈이 없어 소규모 앙상블로 사막의 청각적 풍경(sonic scape)을 표현해 내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된 것이 이런 제약으로 인해 스파게티 웨스턴 특유의 이미지와 어울릴 만한 소리를 가져다 쓰게 된 것이다. 보통 엄청나게 비싼 악기를 당연스럽게 내세우는 클래식을 바탕으로 한 영화 음악계에서 일반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악기로 여기던 하모니카, 전기 기타, 주즈하프, 마리아치 트럼펫, 리코더, 오카리나, 휘파람, 샤우팅, 채찍 등 영화 속 시대 배경과 멕시코 사막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소리들을 현악 앙상블, 오페라 가수의 노래, 남성 합창 등과 함께 지금 들어도 기가 막힌 감각으로 편곡해 넣은 것이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든 스파게티 웨스턴 스코어의 이러한 신선한 기법은 할리우드 황금기에는 스튜디오 시스템에 전속 계약된 작곡가, 오케스트레이터, 오케스트라 악단에 페이가 주단위로 계속 지급되고 있어서 산업구조상 꽉 짜여진 미국의 A급 메이저 서부 영화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그렇게 혁신적인 실험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엔니오 모리코네가 자원이 부족한 가운데 만들어낸 사운드가 오히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중의 기억에 남아있는 독특한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 사운드 트랙의 주요 소스가 되었고 창의성 면에서도 더 크게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반적으로 영화 음악을 만드는 작업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각본과 기획, 섭외, 촬영, 이후 더빙과 함께 최종 후반 작업(post production) 단계에서 이루어지는데 레오네의 영화에서 모리코네의 음악은 이와는 정반대로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엔니오 모리코네가 영상을 보면서 거기에 맞춰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감독과 함께 구상을 하고 이미 음악을 다 완성해 놓았다는 것이다.

레오네 감독은 촬영장에서 모리코네의 음악을 바위 모양 등 위장으로 가려놓은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크게 틀어놓고 마치 오페라 무대 연출을 하듯이 거기에 맞춰서 드라마틱한 촬영 예술(cinematography)과 배우의 동선 및 감정선을 만들어나갔다고 한다.
Why Sergio Leone Played Music On Set
- 레오네 감독이 왜 촬영장에 모리코네의 음악을 틀어놨는지 설명해주는 NerdWriter의 영상 에세이. (영어)

이런 연유로 레오네의 영상미와 모리코네 음악의 싱크로율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당시 천재 감독으로 불리던 스탠리 큐브릭황야의 무법자(A Fistfull of Dollar)를 보고 도대체 어떻게 음악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영화를 만들었는지 레오네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레오네 감독이 설명을 해주자, 큐브릭은 이번에는 모리코네에게 전화를 걸어 차기작으로 구상중이었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의 음악을 만들어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고 모리코네는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하지만 레오네는 이를 전해 듣고 모리코네가 아직 바빠서 작업을 못할 것이라고 큐브릭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했다. 물론 이것은 레오네 감독이 자기 친구이자 독보적인 작곡가인 모리코네를 다른 중요한 감독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만들어낸 거짓말이었다. 큐브릭은 결국 더 이상 모리코네에게 연락하지 않고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클래식 신디사이저 연주자인 웬디 카를로스와 작업하게 되었다. 모리코네는 나중에 회고 인터뷰 책 <Ennio Morricone: In His Own Words>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큐브릭 감독과 작업하지 못한 것이 영화 음악가로서 상당히 아쉬웠다고 밝혔다.
Ennio Morricone on Kubrick &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 스탠리 큐브릭과의 작업이 무산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리코네.

보통 작업이 끝나면 할리우드에서 일반화된 계약방식인 "Work for Hire"의 경우 작곡가가 PRO (Performance Rights Organization_미국 공연권 조직)와 나눠 퍼블리싱 로열티를 50% 받기는 하지만 최종 악보나 스코어 소유권은 영화 제작사에 모두 종속된다. (2014년 국내에 출간(절판)된 인터뷰 책,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에 의하면 모리코네는 작업 전 반드시 선금을 미리 받는 방식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영상의 도움 없이도 영화 음악이 그 자체의 두 발로 스스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는 했다. 그의 음악들이 영화와 만나도 거대한 씨네마틱한 시너지 효과를 내지만, 음반이나 콘서트에서 연주되었던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예술적 평가와 전 세계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For A Few Dollars More Theme
- 1965년 작 석양의 건맨(For a Few Dollars More) 테마.

The Ecstasy Of Gold
- 1966년 작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클라이맥스에 사용된 'The Ecstacy of Gold', 시대를 타지 않는 걸작 영화 음악이다.[2]


-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메인 테마. 서부 영화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조차 들어본 적이 있을 그 유명한 "아이아이야~!"하는 부분은 사막의 코요테 소리를 흉내낸 것이라고 한다.

Once Upon a Time in the West • Soundtrack Suite
- 서정적인 소프라노 음성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은 1968년 작 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의 테마 모음.

A Fistful of Dynamite - Duck, You Sucker
- 1971년 작품 석양의 갱들(A Fistful of Dynamite - Duck, You Sucker)의 메인 테마.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 The Danish National Symphony Orchestra (Live)
- 엔니오 모리코네의 테마는 워낙 인상 깊어서 그런지 스파게티 웨스턴과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북유럽에서도 알아준다. 이 연주는 덴마크 국립 오케스트라가 원곡과 거의 똑같이 커버한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테마이다.

A Fistful of Dollars - The Danish National Symphony Orchestra and Tuva Semmingsen (Live)
- 덴마크 국립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석양의 갱들 테마. 왠지 좀 건달스러운 휘파람 소리와 민속적인 느낌의 오카리나와 리코더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For a Few Dollars More // The Danish National Symphony Orchestra (Live)
- 덴마크 국립 오케스트라 연주의 황야의 무법자 테마.

모리코네는 마카로니 웨스턴 전성시대였던 1960년대 동안에는 레오네의 영화 외에도 여타 비슷한 계열의 영화들에서도 음악을 맡았고, 그 외에 전쟁 영화멜로 영화, 느와르풍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위해 음악을 작곡했다. 물론 엘리오 페트리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처럼 이탈리아 영화계 거장을 위한 곡들도 써주었고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들에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3]

음악을 잘 쓰기로 유명한 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영화 음악으로 실제로 모리코네의 음악을 (심지어는 어떤 때는 허락도 받지 않고) 여러 번 사용했다.

여러 번의 간청 끝에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됐지만 모리코네는 이후에 타란티노가 자신의 음악을 쓰는 방법과 그의 영화의 폭력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는 그와 작업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 후 타란티노 감독의 후속작 헤이트풀 8에서 다시 작업을 하게 되었다. 타란티노와 같이 작업하지 않겠다는 공언을 깬 이유는 모리코네 사모님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타란티노는 자신이 모리코네에게 보낸 시나리오를 그가 쳐다보지도 않자, 대신에 그의 부인에게 대본을 전달한 것이다. 후에 모리코네는 그 일을 회술하며, "타란티노는 매우 영악한 친구다. 그는 누가 우리 집에서 보스인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헤이트풀 8을 위한 테마곡도 만들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드디어 그의 음악 인생 60년 만인 2015년, 아카데미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상 수상의 영광으로 이어졌다.

Ennio Morricone - Neve - From "The Hateful Eight" Soundtrack
- 영국, 런던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모리코네의 지휘로 녹음된 헤이트풀 8의 "Neve."

L'Ultima Diligenza per Red Rock (The Last Diligence for Red Rock)
- 헤이트풀 8의 "L'Ultima Diligenza per Red Rock (The Last Diligence for Red Rock)" 엔니오 모리코네는 이전 자신이 만들어낸 스파게티 웨스턴과는 다른 새로운 웨스턴 스코어의 이미지와 영화의 절망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특이하게 저음 목관악기인 바순을 대거 사용하였다. 비디오 후반부에 모리코네의 음악을 자신의 영화제작과 인터뷰 등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아낌없이 극찬해온 타란티노의 만면에 흡족해하는 웃음을 볼 수 있다.

Ennio Morricone and The Hateful Eight (speciale)
-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의 헤이트풀 8 오리지널 스코어 녹음 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 (중간 Q&A 시간에 타란티노 감독의 인터뷰도 있다. 영어, 이탈리아어 자막)


2.3. 거장 감독과 거장 작곡가의 마지막 걸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편집]


"In my childhood, America was like a religion. Then, real-life Americans abruptly entered my life - in jeeps - and upset all my dreams." - "Yosamite Sam," Sergio Leone (January 3, 1929 – April 30, 1989)

“내 어린 시절, 미국은 하나의 종교와도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진짜 미국인들이 지프차들을 타고 내 삶 속으로 벌컥 들이닥쳤다. 그렇게 내 모든 꿈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 “요세미티 샘세르조 레오네 (1929. 1. 3 - 1989. 4. 30)



-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ST 중, "가난 (Poverty)".

6년간 이어진 2차 세계 대전의 처절한 인명과 재산의 파괴 이후, 미국의 원조와 미국에서 대량생산된 공산품의 도움을 받아 재건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문화 및 자본주의는 전 세계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1929년생인 세르조 레오네는 엔니오 모리코네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비극과 전후 세대의 지독한 궁핍을 겪으며 어린 시절 재즈를 듣고 헐리우드 만화영화 등을 보며 동경해왔던 “미국의 신화”에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한 어두운 폭력과 물질주의허무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유럽은 1960년대 말, 전후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하게 되기는 했지만 전쟁을 일으킨 기성세대에 대한 대학생들의 반감이 점차 고조되었고, 전범 출신들이 고위직에 앉는 등 전쟁의 잔재가 깔끔히 청산되지 못한 상태에서 자본주의 기업가들을 상대로 노동자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자 분노한 프랑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68운동이 시작되고, 독일, 네덜란드, 캐나다 등지로도 번져나갔다.

미국 역시 같은 시기에 반전시위히피 운동 등으로 혼돈에 빠져 서구 전체에 주류문화에 저항하는 반문화반권위주의 운동이 움트게 되었다.

당시 소련공산주의 확산 방지를 위해 도미노 이론에 입각한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통킹만 사건빌미로 시작한 베트남전은 설득력이 약했다. 청년들의 반전운동, 반제국주의 운동, 70년대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지나면서 “캡틴 아메리카” 이미지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미국 외부에서뿐만 아니라, 일부 미국인들조차도 미국의 정의로운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위상과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어가면서 제시했던 시장경제민주주의의 이상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레오네가 생전에 만든 작품은 총 7편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미국 헐리우드의 장르 영화들이 선호하는 권선징악의 뚜렷한 선악 대결 구조를 거부했다.

그의 영화에는 슈퍼히어로가 악당들을 물리치고 힘 없는 이들을 지켜주는 기존의 단순한 흑백논리 공식에 입각한 할리우드식 스토리가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세상에 찌들 대로 찌든 나쁜 주인공과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이들을 쫓아오는 더 나쁜 놈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다룬 이야기들은 주로 서부개척 당시 무법자들의 폭력과 생존을 위한 계급 투쟁, 뉴욕 뒷골목 갱스터들의 범죄와 파란만장한 인생 등을 다루었다.

레오네는 이른바 '미국 신화'라는 화려한 외피로 포장된 프로파간다의 숨은 이면과 정체를 낱낱이 파헤치고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자신의 애증을 담아 영화 속 인간 군상들도 관객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낭만적인 음악을 통해 영화 감독으로서 역사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감성적으로 표현해 기존의 우리 무의식에 숨어든 아메리카에 대한 미화된 통념을 전복하고 그 안에서 다시 휴머니즘을 되찾아보자는 것이 사회주의 좌파 예술가였던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1960년대에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을 만들어 히트시킨 후, 레오네는 우연히 실재 전직 뉴욕 러시아계 유대인 갱스터 출신의 소설가 헤리 그레이(본명: 헤리 골드버그)가 감옥에서 쓴 <더 후즈 (The Hoods)>를 읽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즉 "옛날 옛적 미국에서"의 구상을 시작했다. 주연 배우였던 로버트 드 니로는 2012년 칸 영화제 인터뷰에서 영화 제작 당시 이 소설을 읽다 보니 어린 시절에 자신이 읽었던 소설임을 알게 되었고, 캐릭터 연구를 위해 다시 읽고 나니 새롭게 다가왔다고 밝혔다.

레오네는 그의 웨스턴 영화가 미국을 바라보는 방식을 좋아했던 소설가 헤리 그레이와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뉴욕 맨해튼의 한 바에서 처음 만난 후, 금주법 시대 당시의 갱스터들의 관계와 실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여러 차례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다.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 - 스포일러 주의!

그는 70년대에 대대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600만 불의 제작비로 전 세계에서 무려 2억 불을 벌어들인 마피아 영화, 《대부(영화)》 시리즈의 파라마운트사의 감독직 제안마저 거절했다. “만들고 싶은 갱스터 영화가 따로 있어요."라며 단박에 튕겨버린 것이었다.

레오네 감독이 5명의 각본가들과 10년 넘게 구상해 온 인생의 “드림 프로젝트”였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드디어 이스라엘 출신 유대인 사업가이자 거물급 영화 제작자인 아논 밀천[4]의 지원을 받아 크랭크인하게 된다.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등지에서 1982년 6월 14일부터 1983년 4월 22일까지 약 9개월 간의 촬영을 마치고 1984년에 개봉했고, 레오네 감독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198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nnio Morricone - Childhood Memories & Friends
- "짝눈의 노래" 팬플룻 멜로디를 친근한 재즈 스타일로 편곡한 "어린시절 추억과 친구들(Childhood Memories & Friends)"[5]

영화는 19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뉴욕 브루클린게토를 배경으로 유대계 미국 이민자 아이들의 성장기와 아메리칸 드림 특유의 순진무구함, 성인이 되어 본격 갱스터 집단으로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겪는 폭력과 섹스, 부와 권력이라는 일장춘몽의 덧없는 욕망을 그렸다.

거기에 사나이들의 우정, 주인공 "누들스"의 이룰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한 여인을 향한 평생에 걸친 사랑, 모든 것을 잃은 노년에 되돌아보는 어린 시절 아련한 추억과 되돌릴 수 없는 회한까지 한 남자의 진심을 깊이있게 다루었다.

하지만 개봉 당시 레오네의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미국의 "영웅 만들기" 신화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대다수 미국인들은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폭력과 총성이 난무하는 싸구려 B급 영화나 만드는 감독이라는 낙인을 찍어 아웃사이더 취급하던 보수적인 미국 영화 평론가들은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나 만들던 놈이 갑자기 진지한 느와르 갱스터 영화라니 정신이 나간 게냐?”라며 대놓고 비웃기도 했다.

처음에는 두 편에 나눠서 상영할 예정으로 6시간 분량의 영화였으나 제작자들이 너무 길다며 흥행 참패를 우려해 편집을 요구했다고 한다. 레오네는 결국 4시간 분량으로 완성했으나 제작자들은 이마저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현재와 과거의 회상을 끊임없이 오가는 미스테리한 플래시백플래시포워드 (최소한 두어번은 봐야 각 장면의 디테일들과 등장인물들의 심리, 시간적인 연결고리들이 제대로 이해된다)를 사용하는 몽타주 기법에 바탕해 시공을 뛰어넘는 감정의 연결이 가장 중요한 이 영화가 제작비 회수할 궁리만 하던 미국인 제작자들에게는 제대로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결국 그들은 거장 레오네 감독에게 의사 한 번 묻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영화를 연대기순으로 편집한 뒤, 두 시간 분량으로 가위질해 미국에서 개봉하는 바람에 아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망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로버트 드 니로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제작사의 이러한 갑질 횡포가 '전형적인 (classic)' 관행이었다고 한다. 결국 저예산 명품 영화를 만들어 승부를 보는 것으로 유명했던 레오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사상 최대 예산이었던 3,000만 달러 (현대 한화 가치로 약 330억 원)를 투자해 만든 영화가 극장수익에서 530만 달러 (한화로 약 58억 원)밖에 벌어들이지 못해 흥행 참패를 당하며 작품성마저 같이 평가절하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소문난 골초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촬영 당시부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던 레오네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무차별 난도질 당한 이 영화의 미국판을 보고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미국의 대표 영화평론가인 로저 이버트는 당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감독판을 보고 “폭력과 욕망의 장대한 서사시"라며 높은 작품성을 격찬하는 한편, “미국 극장판은 졸렬한 모방"이라며 프로듀서들과 제작사 워너 브라더스의 갑질 횡포에 일침을 가했다. 그와 영화 평론 콤비인 진 시스켈 역시 "무삭제 감독판은 올해 최고의 걸작이며, 순차적으로 편집된 축소 버전은 올해 최악의 영화”라고 뼈있는 한마디를 날렸다.

여담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1994년 8월 17일 FM 영화음악실에서 전했던 '세계영화 7대 미스테리'에 의하면 이 영화는 무려 11가지 편집 버전이 존재한다고 한다.

나중에 미국에서 제대로 개봉한 거의 4시간에 육박하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감독판은 많은 영화팬들과 평론가들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재평가하였다.

2012년 명품 패션 브랜드 구찌가 설립한 영화재단에서 지원받고 작가 감독으로 유명한 마틴 스코세이지의 감독 하에 세월에 따라 손상이 진행중이던 아날로그 필름의 디지털 복원이 시작되었다. 복원과정에서 발견된 19분의 미공개 분량이 추가되고, 레오네 감독의 그린 비전대로 고화질 4K 버전으로 완벽히 색감 보정을 하여 칸 영화제에서 새로운 버전을 재상영하기도 했다.

특히 엔니오 모리코네가 담당한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평생 잊지 못한 첫사랑이 담긴 영화 음악, “데보라의 테마”는 그의 최고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고, 한스 짐머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음악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주인공 누들스가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의 연방 준비 위원회 강도 계획을 경찰에 밀고한 뒤, 괴로운 현실을 잊고자 찾은 아편굴에서 아편을 한 모금 빨고는 슬픈 눈으로 해맑은 미소를 짓는 취생몽사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쓰인 이 테마는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나중에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후보에 오른 “말레나”에서 거의 같은 멜로디가 그대로 다시 쓰이기도 했다.


-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최고의 명곡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사용된 "데보라의 테마." 2016년에 이탈리아어로 출간된 인터뷰 책, "엔니오 모리코네: 나의 어록 (Ennio Morricone:In My Own Words)"에 따르면 이 테마는 사실 브룩 쉴즈 주연의 1981년도 미국 영화 끝없는 사랑을 위해 만들었으나 제작사에서 흥행을 위해 라이오넬 리치의 주제가 "엔들리스 러브(Endless Love)"를 사용하기로 하면서 엔니오 모리코네가 처음과 얘기가 다른 것에 기분이 상해 프로젝트를 떠나면서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던 테마를 다시 사용한 곡이라고 한다. 데보라를 향한 누들스의 불가능하지만 변함없는 사랑이 이 곡의 정서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야말로 신의 한수 레오네는 이 숨겨진 뒷이야기를 모리코네에게서 전해 듣고 아주 통쾌해했다고 한다. 역시 요세미티 샘

이 영화는 당시 불과 14살이었던 제니퍼 코넬리의 데뷔작으로 어린 데보라 역을 맡은 그녀의 앳되면서도 단아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뒤에 크레딧을 보면 데보라가 발레 연습 뒤 옷을 갈아입으며 주인공 누들스가 화장실 구멍으로 몰래 훔쳐 보는 것을 알면서도 슬쩍 보여주는 뒷모습 누드 장면은 제니퍼 코넬리가 미성년자였던 이유로 대역을 사용했다.

The Death of Dominic
- (스포일러) 무리의 막내인 도미닉이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맨해튼교를 배경으로 벅시가 쏜 총탄에 쓰러지고 누들스 품 안에서 죽을 때 팬플룻 소리를 이용한 멜로디가 나온다. 친동생같은 도미닉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인해 그만 누들스는 그 자리에서 벅시를 찔러 죽이고 그를 체포하려던 순경에게까지 칼을 꽂아 정상 참작 없이 꼬박 12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이 장면은 그들에게 가난했지만 순박했던 그들의 어린 시절이 폭력에 의해 끝이 났음을 의미한다. 세르조 레오네가 전쟁을 겪으면서 어린 시절 동경해왔던 아메리칸 드림의 상실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Morricone conducts Morricone's Once upon a Time in America: Cockey's song (Pan flute)
- 모리코네는 동유럽에 위치한 루마니아의 민속악기인 팬플룻의 명연주자인 기오르게 잠피르(Gheorghe Zamfir)를 기용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나오는 동유럽 출신 유대인 이민자들의 감성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 영상에서는 뮌헨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독일의 작곡가이자 팬플룻 연주자, 울리히 헤르켄호프(Ulrich Herkenhoff)가 협연했다.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마지막 장면을 찍는 촬영장에서도 "데보라의 테마" 음악을 틀어놓고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어 방송, 00:00-03:45. 아쉽게도 현재 개인 비디오로 프라이버시 상태가 전환되었다.)

Deborah's Theme (In Concerto - Venezia 10.11.07)
- "데보라의 테마." 2007년도 베니스에서의 실황 연주.

Deborah's Theme - Khatia Buniatishvili
- 동유럽 국가인 조지아 출신의 클래식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가 해석한 "데보라의 테마" 연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영원의 시간 속에서 추억을 통해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을 묻는 영화에 답하듯, 느리고 우아한 터치가 감동을 준다.


2.4. 영화 음악 작곡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다[편집]


스파게티 웨스턴이 쇠퇴한 뒤에도 영화음악가로서의 명성을 발판으로 여타 할리우드 작품의 음악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엑소시스트 2, 햄릿 같은 작품을 맡았다.

할리우드 진출 후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천국의 나날들(1978)로 시작하여, 미션(1986)[6], 언터처블(1987), 벅시(1991), 말레나(2000)를 후보에 올렸지만 안타깝게도 수상에 실패했다.[7]

외국어 작품상을 받은 시네마 천국이나, 당시에도 유럽 평론가들로부터는 80년대 최고의 걸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아예 음악상 후보에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전 세계 평론가들과 음악팬들은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모리코네의 깊은 음악성과 어떤 영화를 맡아도 가장 잘 어울리는 씨네마틱한 사운드를 창조해내는 그의 탁월한 예술적 안목을 격찬했다.


- 테런스 맬릭 감독의 1978년 작품 천국의 나날들(Days in Heaven)의 사운드 트랙 모음. 엔니오 모리코네는 이 사운드 트랙에 크로매틱 미디언트 화성 기법을 적극 사용해 따뜻하면서도 동시에 몽환적인, 후기 낭만주의에 영향받은 현대적인 음악을 들려주었다.


- 영국 출신 롤랑 조페 감독의 18세기 예수회 선교사남미 원주민들의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 미션의 테마, "지상에서도 천국에서와 같이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우리나라에서 1986년 12월 24일에 호암아트홀과 서울극장에서 개봉하여 서울 5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당시 기준 외화 성적으로서는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80년대 군부 정권 당시 암울했던 정치상황과 우리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도 관계가 있지 않나 한다. 2008년, 2017년, 2019년에 네 차례나 재개봉하여 또 다시 국내 팬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혼을 뒤흔드는 강렬한 음악과 함께, 거룩하게 순교한 이들을 기리는 영화 속 추기경의 마지막 독백은 아직도 큰 여운을 남긴다. “신부들은 죽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자는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곡 "지상에서도 천국에서와 같이(On Earth as it is in Heaven)"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한국 팬들과 전 세계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영상에 있는 앨범 버전을 자세히 들어보면 메인 합창 외에도 다른 합창 소리의 레이어들이 마치 천국에서 아이들이 기쁨으로 뛰어 노는 것과 같은 환상적인 체험을 하게 해준다.

미션은 1986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최우수 촬영상을 받았다.

The Mission (1986) OST Gabriel's Oboe
- 엔니오 모리코네 작곡의 미션의 메인 테마, "가브리엘의 오보에 (Gabriel's Oboe)"는 1986년 영화가 상영된 이후 전 세계에서 사랑받으며 영화의 명성을 이미 오래 전에 뛰어넘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2016년 자신의 회고록 "내 인생의 음표들 (Life Notes)"에서 작곡 작업에 임하기 전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당시 역사에 대한 책을 읽으며 선교사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과 신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고 술회했다.

On Earth as it is in Heaven (In Concerto - Venezia 10.11.07)
- 영화 미션의 "지상에서도 천국에서와 같이 (On Earth as it is in Heaven)" 라이브 버전. 음악적으로 보면 두 가지 다른 선율의 테마가 원시적인 봉고 리듬과 유럽의 클래식 화성,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대선율로 한데 어우러져 하나로 나아간다.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순교를 통해 태어난 새로운 영성과 구원에 이르는 상징적인 주제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Mission (Natale 2012 - Basilica Superiore di San Francesco d'Assisi)
-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역의 마을, 아시시에 소재한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연주된 "가브리엘의 오보에"와 "지상에서도 천국에서와 같이".

The Mission - Yo Yo Ma plays Ennio Morricone
-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연한 앨범 "Yo-Yo Ma Plays Ennio Morricone"의 첫 트랙, "The Mission".


- 영국의 클래식 크로스오버 소프라노 가수인 사라 브라이트만은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 위해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수년간 편지를 보내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모리코네는 자신이 깊은 신앙심으로 만든 작품에 가사 붙이는 것을 꺼려 이를 거절했으나, 결국 3년 뒤 그녀의 지극 정성에 감동해 수락했다고 한다. 이후 수많은 다른 가수들이 이 곡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Jackie Evancho ~ Nella Fantasia
- 2000년도 출생의 2011년 당시 우리나이로 12세에 불과했던, 아메리카 갓 탤런트 출신의 소프라노 재키 이뱅코가 부른 "넬라 판타지아." 전문 성악 전공자들이 봤을 때는 오페라를 부를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른만 할 수 있는 클래식 발성 흉내를 억지로 낸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지만, 일반 대중의 눈에는 12살이라고는 믿기 힘든 청아한 목소리와 뛰어난 실력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빌보드 앨범 차트 2위와 클래식 차트 1위에 오른 이 앨범은 그래미 16회 수상경력의 팝음악계 미다스의 손이자 명작곡가인 데이빗 포스터가 프로듀싱했다. 포스터는 이 영상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City of Joy (For a Daughter's Dowry)
- 인도 캘거타를 배경으로 미션롤랑 조페가 감독하고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한 1993년 휴먼 드라마 영화 씨티 오브 조이의 테마, "For a Daughter's Dowry".

Andrea Bocelli, Ariana Grande - E Più Ti Penso
- 안드레아 보첼리가 이탈리아계 미국 팝 가수 아리아나 그란데와 협연한 엔니오 모리코네 작곡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주제가, "데보라의 테마"의 이탈리아어 버전, E Più Ti Penso (The More I Think of You).

The Untouchables (End Title)
- 케빈 코스트너, 숀 코너리, 앤디 가르시아,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한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1987년 작 범죄 스릴러 드라마, 언터처블의 엔딩 테마. 엔니오 모리코네는 이 영화로 그래미 최우수 영화음악상, 골든 글러브 음악상과 BAFTA 최우수 영화음악상을 수상했다. 금주법 시대 알 카포네를 상대로 한 경찰내 정예 조직 "The Untouchables (뇌물에 대한 유혹이나 생명에 대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아무도 못건드리는 이들"이라는 뜻)"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이들은 나중에 ATF의 전신이 되었다고 한다. "부와 권력이 정의를 위협하는 세상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모리코네의 엔딩 테마가 관객의 가슴을 울린다.


- 1988년 작품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명장면 (영상 스포일러 주의!). 대중에 널리 알려지고 큰 사랑을 받은 "사랑의 테마"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그의 아들이자 영화 음악가, 지휘자인 안드레아 모리코네와 함께 작곡했다. 인터뷰 책,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에도 나오지만 아무래도 안드레아를 밀어주려고 한 듯.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도 영화음악을 하겠다고 나서자 처음에 모리코네는 "네가 미쳤구나.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긴 알고나 하는 소리냐?"라는 반응을 보이다가 결국엔 안드레아의 열의를 알아보고 승복했다고 한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프로듀서 프랑코 크리스탈디의 설득으로 당시 신인 감독이었던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각본을 읽고 "키스를 통해 영화에 대한 애정과 역사를 풀어낸 마지막 장면에 대단히 감동하였다"고 전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 당시 진행중이던 제인 폰다와 그레고리 펙이 나온 영화인 "올드 그링고" 작업을 전화를 걸어 포기해 제작자 로이스 본피글리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결국 "올드 그링고" 영화는 아이티 출신인 미국 작곡가 리 홀드리지(1944~ )가 음악을 맡았고, 이 영화는 3천만 달러 가까운 제작비를 들여 만들어 겨우 15% 정도 흥행에 그치고 평도 그다지 좋지 않아 지금은 잊혀진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 음악을 맡은 리 홀드리지도 수백여 편에 달하는 영화음악을 맡은 만큼 헐리우드에서 인지도가 있는 편으로, 톰 행크스의 출세작인 스플래시나 드라마인 블루문 특급, 드라마 미녀와 야수 같은 작품이 알려져 있다.

결국 시네마 천국은 1990년 골든글러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 작품상,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 작품상을 받고 모리코네 부자의 서정적인 음악도 대표작으로 남아 그의 콘서트마다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Andrea Bocelli - Cinema paradiso
- 안드레아 보첼리가 이태리어 가사를 붙여 노래한 시네마 천국의 "사랑의 테마."

Pat Metheny with Charlie Haden - Cinema Paradiso
-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팻 메시니가 동향 출신 절친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과 연주한 시네마 천국의 메인 테마와 사랑의 테마.

Casualties of War (The Healing)
- 브라이언 드 팔마가 감독하고 마이클 J. 폭스와 숀 펜이 주연한 베트남 전 실화를 바탕으로 한 1989년 작, 전쟁의 사상자들(Causalties of War)의 사운드 트랙에 수록된 "힐링 (Healing)". 모리코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처럼 고독한 느낌의 팬플룻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 곡이다.

Ennio Morricone - The Legend Of 1900
- 국내에서도 음악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엔니오 모리코네 작곡의 피아니스트의 전설 메인 테마. 2007년 로마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영상.

Theme (From "Bugsy", 1991)
- 1991년 워렌 비티아네트 베닝 주연의 영화 <벅시>의 메인 테마. 엔니오 모리코네는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 라스베가스에 불가능한 꿈을 이루려는 거칠면서도 낭만적인 갱스터 벅시 말론의 인간적인 고뇌와 내면을 잘 그려내었다.

Love Affair - Suite
- 벅시를 통해 제작자 및 주연 배우와 조연 배우로 만나 1992년 결혼에 골인한 워렌 비티아네트 베닝이 출연한 1994년도 로맨스 영화 "러브 어페어"의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주제가 모음. 워렌 비티는 엔니오 모리코네를 지극히 존경해 자신이 1998년에 감독한 정치 블랙 코미디 영화 "불워스(Bullworth)"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대부분 힙합으로 채워진 "불워스" 사운드 트랙에서 이 오리지널 스코어를 녹음하기 위해 당시 20세기 폭스사 음악 부서 부서장이자 영화음악 전문 팟캐스트 "스코어 06:32~10:05"의 진행패널 중 한 명인 로버트 크래프트는 워렌 비티가 오직 엔니오 모리코네만이 자신이 바라는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그가 있는 로마까지 날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엔니오 모리코네의 "포럼 녹음실"에 도착해 들어갈 문을 찾다가 그가 지휘하던 오케스트라 녹음 중 우연히 녹음실에 들어선 순간, 천국을 경험했다고 한다.

Wolf - The Dream And The Deer
국내에서는 졸업으로 유명한 마이크 니컬스 감독, 잭 니콜슨미셸 파이퍼 주연의 1994년 작, 울프에서 "The Dream and the Dear". 원래 존 윌리엄스가 음악을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제작이 지연되자 결국 윌리엄스가 떠나고 모리코네가 음악을 맡게 되었다. 공포영화에 모리코네의 장기인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요소를 잘 결합했다.

In The Line Of Fire (main theme)
- 국내에서는 에어 포스 원, 퍼펙트 스톰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 출신의 볼프강 페테르젠이 감독하고, 클린트 이스트 우드, 존 말코비치, 르네 루소가 출연한 1993년도 정치 액션 스릴러 영화, 사선에서(In the Line of Fire)의 메인 테마.

팬들 가운데 이스트우드와 모리코네를 이 영화때문에 연관지어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 때부터 함께 해온 오랜 동료"라고 생각하거나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하는 경우가 많다. 모리코네의 회고 인터뷰 책, <Ennio Morricone: In His Own Words>에 의하면 사선에서의 제작 당시 LA에서 페테르젠 감독하고만 만나 음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바로 로마에 돌아와 작업을 진행했을 뿐이고 이스트우드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영화는 흥행에 훌륭히 성공하여 페테르젠 감독의 이름을 할리우드에 처음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제6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편집상, 각본상 후보작에 올랐다.

Malena
- 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감독하고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2000년도 작품, 말레나(Malèna)의 테마. 이탈리아 남부 시실리 태생의 토르나토레 감독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 호평을 받았다. 회고 인터뷰 <Ennio Morricone:In His Own Words>에 따르면 모리코네는 이 영화 작업과 관련해 사회약자인 여성을 편견으로 재단하며 마녀사냥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여성들을 이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2001년 제 73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후보에 올랐다.

Peace Notes @ Piazza San Marco,Venice 2007
- 2007년 9월 10일, 9.11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이탈리아 북부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서 개최된 엔니오 모리코네의 대규모 오케스트라 콘서트. 배경 영상이 특히 아름답고, 많은 명곡들이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있다. 클릭 가능한 타임코드는 두 번째 코멘트에 있다.

En mai fais ce qu'il te plait - Il Maestro Morricone
- 모리코네의 유작 가운데 하나가 된 2015년도 전쟁 영화, "En mai fais ce qu'il te plait (What May Come/Darling Buds of May)"의 오케스트라 세션. 2차 대전에 전쟁을 경험해 평생 큰 영향을 미쳤다는 모리코네의 음악이 감동을 준다. 2016년 제 41회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2.4.1. 아카데미 시상식 명예 오스카상 수상[편집]


결국 아카데미 협회도 "도대체 듣는 귀가 있긴 있는 거냐", "해도 너무 한다"는 세계 영화 음악 팬들의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2007년 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명예 오스카상 (Honorary Oscar)을 시상했다.

헐리우드 영화 작업들로 한창 바쁠 때는 LA에 이주할 생각도 해봤지만 가족들도 있고 해서 쉽지 않았고, 본인 표현에 의하면 그가 음악 경력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거의 “미친 놈 (madman)”처럼 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영어를 배울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데 시상식에서도 이탈리아어로 소감을 얘기했다.

사실 말이 쉬워 영화 400여 편이지, 1년에 평균 7-8편씩 꾸준히 작업해서 쉬지 않고 60년을 해야 간신히 400여 편이 된다. 거의 한두 달에 한 편씩이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그의 젊은 시절에는 1년에 무려 20편씩 (거의 1달에 2편 꼴) 해치운 적도 있다고 한다.

셰계 영화 음악 팬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2000년대 중반, 크리스토퍼 놀란의 명품 블록버스터, 다크 나이트(영화)의 흥행 신기록 갱신 이후 할리우드에서 영화 음악계에서 클래식 악기와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오케스트라 스코어로 대세가 되어버린 한스 짐머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스 짐머는 1982년부터 40년 가까운 영화 음악가로서의 경력 가운데, 스탠리 마이어(우리나라에서 디어헌터의 서정적인 기타 테마 Cavatina로 알려진 영국의 작곡가)의 테크니컬 어시스턴트부터 현재 그가 이끄는 리모트 컨트롤 프로덕션 집단의 80여 명이 넘는 스태프들과 함께 음악과 사운드를 제작하는 현재의 도제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150여 편을 작업했다. 현재 60대 중반인 그가 100살까지 산다고 해도 대략 수치상으로 300편이 될까말까이다. 게다가 영화 산업의 변화로 대자본 영화도 예전처럼 많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업량은 동년배의 존 윌리엄스와 함께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것이며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이라 봐도 무방하다.

2019년에 발간된 엔니오 모리코네의 회고록, <엔니오 모리코네: 그의 어록들 (Ennio Morricone: In His Own Words>"에 의하면 이 당시 이야기들이 잘 기록되어 있다.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팝 가수, 셀린 디옹은 "데보라의 테마"의 영어 가사 버전인 "당신을 사랑한 걸 알아요(I Knew I Loved You)"를 축하곡으로 불렀다. 셀린은 무대에 오르기 전 엔니오 모리코네가 앉아 있던 사이드 박스 객석에 직접 찾아와 "마에스트로, 오늘 밤 이 곡을 내 목소리가 아닌 가슴으로 부르겠어요."라고 전한 뒤 전심을 다해 불렀다고 한다.

Celine Dion "I Knew I Loved You"
- 엔니오 모리코네의 절친퀸시 존스가 편곡하고 셀린 디옹이 부른 엔니오 모리코네 작곡의 "데보라의 테마" 노래 버전, "당신을 사랑한 걸 알아요(I know I loved you)"의 녹음 과정을 담은 뮤직 비디오와 미니 인터뷰.

정통 클래식 작곡가 출신으로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영화 음악과 우여곡절 많았던 반세기 음악 인생을 뒤돌아보며, 엔니오 모리코네는 자신을 평생 곁에서 지켜준 아내 마리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고 깊은 감회에 젖었다고 한다. 무대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그를 보면 세계적인 명성과 대조적으로 그가 얼마나 섬세한 거장인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엔니오 모리코네는 시상 발표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시상식 전 여러 차례 리허설을 하였으나 워낙 아카데미 시상식이 연출 등 방송 스태프들에 의해 미친 듯이 빡빡하게 진행돼서 떨리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무대 위에서 미리 준비해둔 수상 수감을 말할 때 순서가 뒤바뀌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통역 역할을 준비한 시상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무대 앞에 설치된 영어로 동시 통역되는 자막 텔레프롬프터를 보다가 종전의 리허설과는 달리 수상소감 내용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돼서 잠시 난감해하다가, 명배우답게 임기응변으로 수습해서 결국 차분히 소화해 내었다고 한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당시 관객석에서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모두 할 줄 아는 지인들은 아마 이를 알아차리며 웃음지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여담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간에 모리코네와 오랜 동료인 것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레오네 감독과의 작업 이후 서로 연락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감독을 맡은 몇 편의 영화를 위해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음악을 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예전에 레오네 감독의 배우로 일한 것을 고려할 때 사람들이 스파게티 웨스턴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에 옛 친구와의 의리와 우정을 생각해서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딱 한 번의 예외로 돈 시겔 감독의 "호건과 사라"를 위해서만 주연이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부탁으로 음악을 만든 적이 있다.

또한 엔니오 모리코네는 회고 인터뷰, <Ennio Morricone: In His Own Words>에 따르면 자신의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 스코어들은 37편 정도로 4백 편이 넘는 필모그래피에서 고작 8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기억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특히 미국 언론들이 자신을 단순히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음악 작곡가로만 규정짓는 것을 다소 거북스러워했다. 타란티노와의 웨스턴 영화 작업 요청을 상당 기간 동안 완곡히 거절한 이유도 그래서인 듯하다.

몇 차례의 작곡 요청 시도 후 결국 포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다행히 본인 스스로가 열렬한 재즈 팬이며 재즈 뮤지션들을 모아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개최하기도 한 아마추어 재즈 피아니스트이기도 해서 기본적인 음악 소양이 있었다.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감독한 2004년 아카데미 남우 주연 및 조연 수상작 미스틱 리버 등 몇 편의 영화에 오케스트라 스코어를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물론 오케스트레이션은 전문 지식과 다년간의 경험이 필요해서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레이터가 해준 것이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2007년 시상식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오래 전에 레오네 감독의 영화에서 작업한 이 작은 이탈리아인을 기억해줘서 고마웠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기 위해 2015년 헤이트풀 에이트로 아카데미 수상 당시에는 전문 통역가가 그를 부축하고 나와서 영어로 동시통역을 해주었고, 수상소감도 작은 종이에 적어 미리 준비했다고 한다.


- 2007년 제 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명예 오스카상을 받은 엔니오 모리코네.

"이런 멋진 영예를 안겨주신 아카데미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엄청난 노력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이 상을 받지 못한 다른 모든 작곡가들을 생각하며 그들도 오늘 밤의 저처럼 언젠가 꼭 인정을 받기를 빕니다. 이 오스카는 "도착지"가 아닌 또 다른 "출발지"로서 제가 처음 시작할 때 스크린에 가졌던 열정과 헌신으로 앞으로도 새로운 음악을 계속 써나가는 지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평생 저를 지극정성으로 돕고 언제나 사랑으로 함께해온 제 아내 마리아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2.4.2.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상 수상[편집]


엔니오 모리코네가 오랜기간 아카데미 오리지널 스코어 (Best Original Score)상을 받지 못한 점을 두고 그가 외국인인 이탈리아 사람이라 차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8][9] 밑에 언급한 영화음악 거장들 가운데서 고인이 된 3명 모두 아카데미 베스트 오리지널 스코어 상을 받았으며[10] 5번이나 받은 할리우드 영화 음악의 최고 거장 존 윌리엄스는 물론, 모리코네의 아들 또래인 한스 짐머도 이미 30대 나이로 이 상을 받았기에 이런 말이 나올 만했다.

항간에는 이러한 수상 불운이 그의 음악이 영화음악의 기능을 뛰어넘어 영화 자체보다 음악에 더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은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었다. 하지만 모리코네는 영국 아카데미로부터 안소니 아스퀴스(음악)상을 7번이나 수상했다. 1987년에는 영화 ‘미션’이, 2000년에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골든글로브 음악상을 수상했고, 2008년에는 프랑스에서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래미상도 1988년 '언터처블', 2010년 석양의 무법자명예의 전당, 2014년 '트러스티'로 세 차례나 받았다. 모리코네가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주요 시상식들에서의 최고 음악상들은 계속 휩쓸어 오고 있었으니, 음악이 영화보다 더 강렬해 아카데미 상을 못 받는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브레이브 하트타이타닉(영화)으로 널리 알려진 할리우드 영화 음악의 거장, 제임스 호너는 1992년 자신의 모교인 UCLA 초청 강연 (47분 6초부터 해당 내용이 나온다)에서 1986년 자신의 에일리언 2 스코어가 아카데미 수상 후보에 올랐으나, 같은 해 수상 후보에 오른 미션을 극찬하며 심지어는 당시 자신의 에이리언 2 스코어 대신 미션에 투표했다고 한다.

제임스 호너는 이어 그 해 오래된 스탠다드 변주와 짤막한 오리지널 스코어 등에 불과한 허비 행콕의 라운드 미드나잇이 수상[11] 것과 관련해 영화 음악작업 과정과 음악적 가치 판단에 대한 미국 영화인들의 소양 부족, 아카데미 협회의 수상자 선정 과정의 문제점 등 헐리우드 시스템의 뿌리 깊은 관행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엔니오 모리코네도 2016년 출간된 회고록 "Life Notes"에서 미국 영화 산업계의 외국 영화 음악가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페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80년대 중반 영화계를 잠시 떠나 자신이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클래식 순수음악 작곡에 몰두했다. 당시 자신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낮은 페이를 받았는데, 내성적인 자기 성격에 돈 문제를 꺼내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모리코네는 무산자 집안 출신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한 일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80년대 중반, 영화 미션으로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고 영화와 그의 국경을 초월한 감동적인 음악에 대한 세계적인 대호평 이후에야 할리우드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2019년 출간된 인터뷰 책 "Ennio Morricone: In My Own Words"에서는 1986년 미션의 아카데미 수상 탈락과 관련해 수상자 선정 과정에 공정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짤막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2016년 2월 13일 인터뷰에서도 1986년 아카데미 시상식과 관련해 할 말이 좀 남아있었던 듯하다.

통역자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에스트로는 이제 연세 지긋한 87세에도 이 문제에 대해 딱히 웃음을 짓고 있지는 않았다. 아직도 조금 앙금이 남아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나는 198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허비 행콕의 라운드 미드나잇에 밀려 그의 미션 오리지널 스코어가 수상을 하지 못했을 때 그가 특별히 불쾌해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이 애기를 하면서 어두운 구름이 그에게로 몰려 들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라며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 극장에서 (허비 행콕의) 수상이 발표되자 (화가 난) 관객들이 소리를 질렀어요. 그들도 실망을 한 거에요. 그 영화(라운드 미드나잇)에서 허비 행콕의 오리지널 스코어 비중은 겨우 50퍼센트 (나머지 절반은 기존 재즈 스탠다드 편곡)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오리지널 스코어 상) 수상자 선정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던 것이죠. 허비는 물론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편곡자이지만 (라운드 미드나잇의) 영화 음악은 100 퍼센트 오리지널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시상식장을 바로 떠났습니다. 화가 아주 많이 났습니다. 주위 관객들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구요."


참고로 엔니오 모리코네는 본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그가 참여한 영화 필모그래피들을 봐도 알겠지만 가난한 이들과 여성 등 약자의 문제, 사회 정의, 전쟁의 비극, 휴머니티 등의 문제에 늘 관심이 많았다.

허비 행콕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나 모리코네 자신의 음악에 대한 평가보다는 아카데미 협회의 수상자 선정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던 불의에 대해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 오리지널 스코어라고 한다면 "오리지널"이라는 말의 뜻처럼 순수 창작곡을 의미하는데 창작곡 비중이 절반밖에 안되는 앨범이 베스트 오리지널 스코어상 수상을 한 것이 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감성적이고 그들과 정서가 비슷한 데가 많은 한국 사람들도 평소에는 잘 웃고 친절하다가도 정작 말도 안되는 일에 화가 나면 엄청 무서운 다혈질로 돌변하는 성격들이 많다. 이 이탈리안 작곡가 할아버지도 평소에는 재미있고 온화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지만, 일할 때만큼은 확실하게 해야 해서, 연주자들이나 부지휘자들이 자신의 지휘 방향대로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나가면 "제대로 하란 말이다!"라며 매섭게 소리지르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다행히 20여 년 뒤인 2007년 발매된 We All Love Ennio Morricone라는 엔니오 모리코네 헌정 앨범에서 퀸시 존스 편곡의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테마에서 키보드를 연주한 것을 보면 엔니오 모리코네와 허비 행콕 사이는 전혀 문제 없어 보인다.[12]

위의 인터뷰를 한 지 보름 후, 엔니오 모리코네는 우리 연세로 88세가 된 2016년 2월 28일(미국 현지시각),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헤이트풀8의 오리지널 스코어로 드디어 반세기가 넘는 영화 음악가 인생 최초로 아카데미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상을 거머쥐었다.

- 2016년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에이트로 음악 인생 61년 만에 아카데미 베스트 오리지널 스코어상을 수상한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 인기 싱어송라이터 퍼렐 윌리엄스마이클 잭슨을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낸 팝 음악 프로듀서 거장이자 전직 재즈 트럼펫 연주자, 오케스트라 지휘자, 영화 음악가이기도 한 그의 절친, 퀸시 존스가 시상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처음에 여유있는 척 하시지만 여전히 떨리고 경황이 없어서 그러신지 수상자 발표 이후 같이 앉아있던 영화음악의 전설인 존 윌리엄스와 감격의 포옹 후 옆 얼굴을 실수로 살짝 치고 나오신다. 그와 절친으로 알려진 존 윌리엄스도 너무 기쁘고 충분히 이해하는 듯 "그게 뭐 대수냐"고 하는 표정으로 너그럽게 웃는다.

수상 후 담담히 통역자를 통해 감사의 말을 전하는 모습이 흐뭇하다.

"이렇게 최고의 상을 주셔서 아카데미 협회 분들께 감사합니다. 다른 모든 수상 후보들에게도 이 영광을 돌리며, 특히 제가 존경하는 존 윌리엄스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영감을 주는 훌륭한 영화 없이는 훌륭한 사운드 트랙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날 선택해준 것에 대해, 그리고 이 특별한 영화를 만들어주신 제작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기서 절 바라보고 있는 제 아내, 마리아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이후 여러 회고록, 인터뷰책과 자신의 음악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 참여, 매해 수차례의 콘서트, 영화 음악인 후학 양성을 위한 세미나 참여와 영화 음악 작곡 아카데미에서 디렉터로서 다음 세대 영화 음악가들을 위해 지도를 꾸준히 해왔다.

2016년부터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대규모 투어와 2019년 6월 생애 마지막 콘서트 일정을 마치고 그로부터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나며 손수 자기 부고까지 써서 발표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영화 음악의 대가답게 탁월한 타이밍 감각의 소유자이자,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영화처럼 극적으로 생을 마무리했다.


2.5. 전 세계인의 애도 속에 타계[편집]


2020년 7월 6일(현지시간) AFP 통신과 현지 일간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 따르면, 모리코네는 이날 이탈리아 로마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고 한다. # 사망 원인으로 자택에서 낙상으로 허벅지(대퇴부)에 골절상을 입은 뒤 병원 치료를 받아오다가 불과 한 주 만인 6일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회고록 "Life Notes"에 의하면 골반부 뼈에 이상이 이미 수년 전에 발생해서 오래 서 있지를 못하고 오케스트라 지휘를 앉은 자세로 계속 해 오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보통 노령인 분들이 휠체어에서 실수로 떨어지는 등의 사고로 뼈가 부러지면 붙을 때까지 몸의 움직임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혈관에 혈전이 뭉치는 등 복합적인 요인이 발생해서 오래 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마리아 트라비아와 마르코, 알레산드라, 안드레아, 지오반니 등 4명의 자녀가 있다.

부인 마리아 트라비아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곡을 상호 보완하는 많은 시('미션' 합창의 라틴어 가사 포함)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 현지시간 6일, 놀랍게도 그의 죽음을 바로 앞두고서 그가 머물던 병원 앞에 서서 손수 작성한 "나, 모리코네는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부고를 언론에 공개하였다. 이탈리아를 온통 역병의 재앙으로 몰아넣은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서 주위에 민폐를 끼치기 싫었고, 팬들의 운집 없이 조용히 가족 장례를 치르고자 했던 고인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국무 총리, 주세페 콘테는 "우리는 언제나 끝없는 감사와 함께 거장 엔리오 모리코네의 예술적 천재성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꿈꾸게 하고, 우리를 비추어 보게 하며, 음악과 영화의 역사에 잊지 못할 작품으로 남을 명곡들을 썼습니다."라고 트위터에 추모글을 남겼다.

이탈리아의 대통령, 세르조 마타렐라 역시 이 "특별한" 예술가의 유가족에 조의를 표했다.

"수준 높고 동시에 인기있는 음악가인 엔니오 모리코네는 20세기 절반의 음악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의 사운드 트랙들을 통해 그는 이탈리아의 자긍심을 전 세계에 알리고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2014년 예수회 재건 200주년을 기념해 엔니오 모리코네가 미사곡을 헌정하기도 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인에게 전화해 직접 위로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

모리코네는 "나는 일생에 단 두 번 울었는데 한 번은 미션의 음악을 작곡할 때였고, 그 다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을 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교황청 문화 위원장인 프랑코 라바시 추기경은 바티칸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엔니오 모리코네는 음악으로 믿음을 증거했다"며 "그의 음악은 영적인 차원의 음악"이라고 칭송했다. #

모리코네는 2016년 자서전에서 "나의 음악적 토대는 신앙이며 특히 그레고리오 성가가 그 중심"이라고 밝힌 바도 있다.

모리코네는 자신이 작성한 부고 말미에 "형제나 다름 없었고 인생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준 페푸치오(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별명)는 특별히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또한 "아내이자 일생의 파트너였던 마리아에게, 지금까지 우리 부부를 하나로 묶어주었던 각별했던 사랑을 되새기고 싶다. 이제 이를 포기해야 해서 미안하다. 당신에 대한 작별인사가 가장 가슴 아프다”"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음악처럼 듣는 이의 가슴을 절절히 울리는 말을 남겼다. #


3. 여담[편집]


  • 2007년 10월에 서울에서 최초의 내한 공연을 개최했으며, 2011년 5월 영화 음악가로서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한 번 내한 공연을 가졌다.

  •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주최 측이 높으신 분들에게만 신경 쓰다 보니 시간이 없다고 폭우 속에서 우산도 없이 모리코네 부부를 끌고가다시피 하며 홀대한 흑역사가 있었다. 한때 말을 걸거나 의전을 하는 도우미들조차 없어 마리아와 복도에 한참을 서있어야 했다고 한다. 멀리 이탈리아에서 한국 영화제에 직접 오도록 초청해놓고는 정작 영화인에게는 관심이 없고 노출 심한 섹시한 여배우#들과 당시 대선 후보 정치인들에게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것에 심히 불쾌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원로 거장 부부를 모셔놓고는 국내 주요 언론매체들의 참담한 문화 수준을 보여주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부산국제영화제는 이같은 언론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며 뒤늦게 해명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 진행요원이 거칠게 아내 마리아의 손을 끌고 행사장 입장을 재촉한 것에 불쾌함을 표시한 것이었는데, 레드카펫 촬영 시에도 굳어진 표정이었으며 핸드 프린팅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아내 마리아를 정중히 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세상 그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던 모리코네가 당연히 기분 상할 만했다. 다행히 2011년에 관객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던 내한 오케스트라 공연과, 홀대를 만회하는 듯한 깍듯한 예우로 마지막에는 한국에 인상이 좋게 남은 것으로 짐작된다. 내한 공연에 추억이 있으신지 기회가 되면 한국도 다시 방문하고 싶어하신 듯하다.

  • 2011년 세종 문화회관에서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들이자 작곡가인 안드레아 모리코네가 음악 감독을 맡아 뮤지컬 미션을 선보였다. 한국이 저작 허가(라이선스)를 획득해 기획과 국내 뮤지컬 사상 초유 120억원 규모의 투자를 맡았고, 제작은 이탈리아 뮤지컬 제작사 The fabMax Company S.r.l에서 맡았다.

연출을 비롯해 유럽 최고의 스탭들이 참여하고 높이 7m의 폭포를 재현한 열대 밀림 무대세트와 18세기 중세 유럽의 웅장한 교황청, 저택 등 수 십번의 무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개막 전 온라인 티켓 판매 1위를 했다.

하지만 전개가 너무 느슨하고 준비가 너무 미흡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무대를 개막 전에 겨우 완성하느라 배우들은 무대에 제대로 서보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R석 15만 원, VIP석 20만 원 상당하는 높은 입장료에도 라이브 오케스트라가 아닌 반주 음원을 사용해 (그것도 보컬과의 볼륨 밸런스가 하나도 안 맞았다.) 관객의 기대에 크게 못미쳐 무려 1만 5천여 명의 관객들이 리콜 요청을 하는 사태가 벌어져 많이 아쉬운 작품으로 남아있다.

'여성이 없는 무대는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극작가의 의도로 영화에서는 비중이 적었던 여성 "카를로따"가 뮤지컬 미션에서는 주인공이 돼 극을 이끌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작 영화에서 받은 감동이 강렬히 남아있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주제에 대한 집중력이 분산되는 결과를 가져온 듯하다.

사실 원작 영화가 너무 뛰어난 탓도 있다. 영화 킬링필드미션의 감독, 롤랑 조페는 영화 개봉 이후, 미국의 영화 거장인 오손 웰스뉴욕에서 마주쳤다고 한다.

<미션>을 관람한 웰스는 처음 보는 조페를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다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래 이제 앞으로 뭘 할 생각이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껄껄 웃는 웰스의 말에 조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 일은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영화에서 제가 했던 얘기를 또 다시 되풀이하지 않고 싶습니다."

웰스의 난감한 질문에 대답은 하긴 했지만, 이후 은연중 강박관념이 있었는지 롤랑 조페는 영화감독으로서 비교적 젊은 3-40대에 자신의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것이 늘 큰 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말 이혼한 뒤 영국에서 할리우드로 이주하고 조페는 시티 오브 조이 등으로 괜찮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흥행에 실패하고 미션의 작품성을 뛰어넘는 평가를 받을만한 영화는 다시 만들지 못했다..

  •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명장면 중 하나인 피아노 배틀에서 주인공 1900이 마지막 필살기로 연주한 Enduring Movement는 영화에서처럼 혼자서 완벽한 연주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 악기 소리가 녹음된 녹음된 테이프를 다양한 속도로 뒤로 돌려 원하는 소리를 만들거나, 머릿 속에 상상하는 소리 (예를 들면 "라즈베리" 소리라든지 (!))를 만들기 위해 신서사이저 주자를 따로 기용하는 등, 영화 음악의 테크놀로지 발전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작곡 작업을 할 때는 컴퓨터를 전혀 쓰지 않았다.

- 엔니오 모리코네는 존 카펜터 감독, 커트 러셀 주연의 1982년 작 SF 호러물, "괴물 (The Thing)"의 음악을 담당했다. 존 카펜터의 "음을 적게 써달라"는 요청에 모리코네는 메인 테마에서 신서사이저를 사용해 심장 박동 소리를 흉내내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잘 살려 내었다. John Carpenter Pays Tribute to Ennio Morricone and His Haunting Score for ‘The Thing’

평소 자신의 영화에 기타와 신디사이저로 스스로 음악을 만드는 아마추어 작곡가이기도 한 존 카펜터 감독의 감각을 모리코네는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존 카펜터는 1982년 "괴물" 작업차 로마에 방문해서 모리코네와 같이 영화를 관람한 후 자신의 결혼식에 "옛날 옛적 서부에서 (Once Upon a Time in the West)"의 주제가 (분위기상 "질의 테마"를 얘기하는 듯)를 사용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 한다.

  • 1998년 6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방영되어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KBS1의 의학 휴먼다큐 프로그램인 영상기록 병원 24시에 1970년도 프랑스 영화, La Califa의 동명 주제가가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다.


모리코네는 평소 "인간의 목소리가 모든 소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소리라고 믿는다."고 늘 얘기해 왔다. 이 곡은 그가 작곡, 편곡, 오케스트레이션을 모두 담당했는데, 밀바의 따듯하면서도 깊은 표현력과 정제된 해석력을 좋아해서 자신의 영화음악들을 모아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담은 헌정 앨범, "Dedicato a Milva da Ennio Morricone (Dedicated to Milva by Ennio Morricone)"를 제작하기도 했다.

  • 2010년 LG전자의 의뢰를 받고 LG 프리미엄 폰의 오케스트라 벨소리 테마들을 작곡하기도 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트렌드를 많이 타는 휴대전화 시장의 특성상 '오케스트라 벨소리'라는 아이디어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가 오직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써준 짧은 3곡의 오리지널 테마들은 매우 흥미롭다.

당시 LG에서 4년간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마지막 해에 엔니오 모리코네와 연결이 성사되어 작업하게 된 음악도 출신의 사운드 디자이너, 박도영 선임의 거장과의 만남 후기도 읽어볼 만하다.

모리코네는 영화 음악과 클래식 작곡의 대가로서 전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살아왔음에도 전혀 거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아이처럼 새로운 것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창의적인 정신을 늘 잃지 않았다.

LG Electronics Encore with Ennio Morricone (Part 1)
- (메이킹 필름) LG,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앵콜 (1부)

LG Electronics Encore with Ennio Morricone (part 2)
- LG,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앵콜 (2부)

  • KBS 연예대상[13], 연기대상[14]에서 대상 수상 음악으로, 미션 투 마스의 사운드트랙 "Mission To Mars"를 틀어줬다.[15]

- 엔니오 모리코네가 2000년에 작곡한 SF 영화, 미션 투 마스의 사운드 트랙.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사운드 트랙만큼은 역시 믿고 듣는 엔니오 모리코네다. 그는 회고 인터뷰 책, "Ennio Morricone: In My Words"에서 이 영화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과의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 9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모리코네를 모르는 사람도 알게 모르게 그의 곡을 들어본 적이 있다. 무숙자의 OST가 그 케이스. 광고에서나 라디오 시그널로 자주 쓰이며 생활사투리가 시작하기 전에 정종철이 내는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그 외에도 2000년대 초반에 투니버스에서는 6시가 되면 방송국 소개가 나왔는데 이때 사용된 배경음악이 무숙자 OST.

- 토니노 발레리 감독, 헨리 폰다와 테런스 힐 주연의 1973년도 작 코메디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 무숙자(My Name Is Nobody)의 오프닝 장면에 나오는 메인 테마. 친근한 포크 기타에 여성 합창, 개구리 소리처럼 익살스러운 소리와 따뜻한 휘파람 소리 (모두 아날로그 신서사이저인 듯)가 해맑은 미국 산골의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 2010년 9월 KBS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을 통해 영화 미션의 주제가로 쓰인 엔니오 모리코네의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가사를 붙인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가 박칼린 지휘의 합창곡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방영 당시 수많은 전국 중고교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다들 가사를 "넬라 판타지아~"밖에 몰랐다는 일화가 있다.

  • 넬라 판타지아는 영국의 팝페라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이 불러서 유명해졌는데, 가사는 이탈리아 출신의 여성 작사가 키아라 페로우(Chiara Ferraù)가 쎴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Nella fantasia

Nella fantasia io vedo un mondo giusto

Lì tutti vivono in pace e in onestà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Come le nuvole che volano

Pien d'umanità in fondo all'anima

Nella fantasia io vedo un mondo chiaro

Lì anche la notte è meno oscura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Come le nuvole che volano

Nella fantasia esiste un vento caldo

Che soffia sulle città, come amico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Come le nuvole che volano

Pien d'umanità in fondo all'anima

(영어 번역)

In My Fantasy

In my fantasy I see a fair world,

Where everybody lives in peace and honesty,

I dream of souls that are always free,

Like the clouds that fly,

Full of humanity deep within the soul.

In my fantasy I see a clear world,

Where even at nights there is less darkness,

I dream of souls that are always free,

Like the clouds that fly.

In my fantasy, there is a hot wind,

That blows over the cities, like a friend,

I dream of souls that are always free,

Like the clouds that fly,

Full of humanity deep within the soul.

(한국어 번역)

내 환상 가운데

내 환상 가운데 아름다운 세상을 보아요.

모두 평화롭고 조화롭게 사는 곳,

난 영혼들이 언제나 자유롭기를 꿈 꿔요.

저기 날으는 구름들처럼

영혼 깊은 곳에 인류애 가득히.

내 환상 가운데 투명한 세상을 보아요.

밤이 있는 곳조차 어둠이 덜한 곳,

난 영혼들이 언제나 자유롭기를 꿈 꿔요.

저기 날으는 구름들처럼

내 환상 가운데 뜨거운 바람이 있어요.

도시들 위로 친구들처럼 부는 바람이.

난 영혼들이 언제나 자유롭기를 꿈 꿔요.

저기 날으는 구름들처럼

영혼 깊은 곳에 인류애 가득히.


  •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국내 금연광고로 평가받는 개그맨 이주일이 출연한 금연광고 (0:25-)에도 영화 미션의 주제가 ""지상에서도 천국에서와 같이 (On Earth as it is in Heaven)"가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이주일의 사망 직전 마지막 부탁과 함께 모리코네의 이 거룩한 음악을 들으면 왠지 담배 끊어야 할 사명감이 든다.

  • 한국어 특유의 자음동화 현상 때문에 이름을 엔리오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엔니오가 맞다.


2019년 회고 인터뷰 책, “Ennio Morricone: In His Own Words” 에서 엔니오 모리코네는 존 윌리엄스는 '완전한 의미의 음악가'라며 크게 칭송했다. 다만 스타워즈 스코어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상업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 자신이 작곡한 곡들의 모든 오케스트레이션을 직접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현대 영화음악 산업에서는 영화 제작 후반 작업의 촉박한 데드라인을 앞두고 작곡가와 오케스트레이터가 따로 나눠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메인 작곡가가 대략의 작곡 스케치와 음악적으로 원하는 사항들을 악보에 기재해 놓으면 오케스트레이터가 그것을 이어받아 따로 오케스트레이션을 하는 할리우드 방식의 분업 시스템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오케스트레이션도 오케스트라 작곡의 일부라고 가르치는 정통 클래식 수업을 받은 모리코네는 이와 같은 작업방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예를 들면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오직 스케치만 하고, 채색은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고 상상해보라는 것이었다. 이 그림을 한 사람의 화가가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물론 작업기간과 작업량이 상상을 초월하는 아날로그 방식의 애니메이션이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는 한다.)

그래서 1981년에 순전히 호기심으로 독일에서 영화 음악 연합 공연이 있을 때 미국에서 공수된 버나드 허먼 오케스트라 총보를 들여다 보고 그도 자신과 같이 스스로 모든 곡을 오케스트레이션한 것을 안 후, 그의 높은 음악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는 영화를 볼 때마다 누가 작곡을 하고 누가 오케스트레이션을 했는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마다 유심히 살펴봤다고 한다.

  • 엔니오 모리코네하면 우리에게는 친숙하고 대중적인 이지 리스닝 계열의 부담없는 음악들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그는 필요한 경우 다소 난해한 12음 기법의 무조주의나 다른 실험적이거나 전위적인 기법들의 사용도 많이 했다. 특히 그의 인터뷰 책인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에 따르면 12음 기법은 모든 음을 민주적으로 다루기에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밝히며 12음 기법이 현대 민주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70년대 말에 작곡이 너무 난해한 방향으로 간다는 평가를 받고 음악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이 좀더 접근하기 용이한 방향으로 수정을 해서 8-90년대에 전 세계 많은 팬들이 지금도 사랑하는 주옥같은 명곡들을 남긴 셈이다.

“내가 음악원을 졸업할 때, 내 야심은 콘서트 홀을 위한 곡들을 쓰는 거였어요. 다른 예술을 위한 봉사는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35살이 되었을 때 나 자신에게 얘기했어요. '그래 내가 마흔이 되면 영화음악 쓰는 걸 그만두어야겠다'구요. 나는 이와 똑같은 말을 50살, 60살, 70살이 되었을 때도 했어요. 이제 90살을 먹었으니 정말로 영화 음악 쓰는 것을 그만두어야겠다는 확신이 드네요. 하.."

  • 최근의 영화음악 작업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영상 편집과 관련이 많고, 감독이나 프로듀서들이 비용이 많이 드는 녹음 이전에 거의 완전한 수준의 미디 데모를 듣기 원하기 때문에 영화음악 작곡가들은 컴퓨터를 필수로 사용하는데 그는 컴퓨터로 작곡을 하는 것보다 연필로 그리면서 작곡하는 게 더 낫다고 했다.

엔니오 모리코네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그의 작업실 사진을 보면 악보만 가득하다. 심지어는 그 흔한 피아노조차 없이 (그의 자택 응접실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기는 하다.) 책상 위에서 머리와 마음 속 구상과 이미지만으로 곡을 써냈다. 이 작업실은 철저히 작곡 작업만을 위한 공간으로 작업에 집중을 기하기 위해 아이들도 일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친구인 세르조 레오네 감독과 함께 공공연한 좌파로 알려져 있다. 전쟁과 전후 굶주림, 공포와 사회의 혼란과 부조리를 겪으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온 배경 탓에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 분단체제의 우리나라나 청교도 전통의 미국에서는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으면 공산주의자 빨갱이, 유물론자 내지는 무신론자라고 단순 등식화해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엔니오 모리코네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이 매우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한국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와 각별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AC 밀란 축구와 체스의 열렬한 팬으로 음악을 체스 게임에 비유하기도 했다. 2004년 폴란드의 세계 최강 여성 체스 마스터, 주딧 폴거(Jusit Polgar)에 도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중들의 상상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작곡 스타일은 엄격한 수학 논리에 바탕하고 있으며 "창 밖의 전경을 내다보며 영감을 얻는" 식의 낭만적인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다. 실재로 그는 그의 많은 곡들이 음정이나 음계, 화성 등 이성적인 실험에 바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누구나 듣기 쉬운 감미롭고 감성적이며 음악 이론적으로는 일견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 (Less is more)"라는 "심플의 미학"의 결정체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음악이 사실은 의외로 독특한 실험과 고도의 두뇌 게임 전략에 바탕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 봉준호 감독의 2020년 아카데미 수상작 기생충에서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바로 영화 중간 벌어지는 난투극 신에 쓰인 칸초네가 이탈리아의 저명한 가수 잔니 모란디(Gianni Morandi)가 부른 세레나데 "In Ginocchio Da Te (그대에게 무릎을 꿇고)"가 엔니오 모리코네가 오케스트레이션한 곡이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이 곡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사용하려고 선정된 것이 아니다. 주연 배우들이 모두 무릎꿇고 있는 씬을 찍는 촬영현장에서 쉬어가는 시간에 우연히 미술감독이 오브제로 놓여있던 레코드 판을 집어들어 레코드 플레이어로 틀어보자 봉 감독이 이를 듣고 이 곡을 선정했다고 한다.

  •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자 나이를 뛰어넘은 절친인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5년간 작업해온 110분 분량의 엔니오 모리코네 다큐멘터리의 완결판 및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가 The Glance of Music" 2021년 9월 1일부터 11일에 개최되는 베니스 영화제 비경쟁부문 상영작에 공식 초청되었다.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 엔니오 모리코네

제목은 우리말로 "음악의 시선"이라는 뜻으로, 영화 음악가는 영화라는 시각 매체에 담긴 이미지, 인상, 정신, 메시지나 감성을 음악이라는 보이지 않은 청각 예술로 승화해 보여주기 때문에 붙인 시적인 제목으로 보인다. 2016년 프로젝트 시작 당시 원제는 심플하게 "Maestro (거장)” 였다.

40여 시간 이상 분량의 감독이 직접 엔니오 모리코네의 자택에서 한 인터뷰에는 존 윌리엄스, 한스 짐머, 팻 메시니, 폴 사이먼, 조안 바에즈, 퀸시 존스, 메탈리카제임스 헷필드, 브루스 스프링스틴, 주케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롤랑 조페, 올리버 스톤, 쿠엔틴 타란티노 등 전세계 음악계와 영화계의 유명 인사들과 스타 아티스트들이 대거 출연하여 영화음악의 진정한 레전드이자 영원한 아이콘이며, 현대 대중예술의 위대한 거장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토르나토레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모리코네는 순수 클래식 작곡가로서 영화음악을 하는 것에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모리코네는 영화음악을 하면서 평생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음악을 창작해야 하는 것과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들 사이에 늘 부조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모리코네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영화음악이 컨템포러리(동시대) 음악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

  •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2023년 7월 1일자로 발표 2년만에 국내 개봉되었다. 대부분 서울에 위치한 소규모 아트하우스 극장등을 중심으로 하루 1회정도 상영됨에도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며 개봉 3주차인 7월 19일 2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수입사인 진진 영화사가 인스타그램에 기쁜 소식을 공지했다. #

  • 2020년 6월 6일, 로마에 위치한 'Auditorium Parco della Musica (뮤직 파크 오디토리엄)'가 로마가 낳은 가장 유명한 아들 가운데 하나인 엔니로 모리코네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붙여 'Auditorium Parco della Musica - Ennio Morricone'로 개명되었다. # #

  • 2021년 6월 15일 이태리 로마에서 "위대한 이태리인 예술가" 시리즈로 엔니오 모리코네 기념은화가 발행되었다. 한정판으로 가격은 42유로, 우리 돈으로 약 6만 원 정도 한다. #

  • 2022년 4월. 생전 거주한 이탈리아 로마 시내 아파트가 경매에 나왔다. #


4. 주요 작품[편집]


연도
제목
비고
1961년
파시스트

1962년
미친 욕망

1964년
황야의 무법자
세르조 레오네와의 협업
1965년
석양의 건맨
세르조 레오네와의 협업
1965년
호주머니 속의 손

1966년
석양의 무법자
세르조 레오네와의 협업
1966년
알제리 전투

1966년
매와 참새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와의 협업
1967년
나바호 조

1968년
옛날 옛적 서부에서
세르조 레오네와의 협업
1968년
데인저: 디아볼릭

1969년
시실리안

1970년
호건과 사라

1970년
칼리파 부인

1970년
석양의 갱들
세르조 레오네와의 협업
1970년
수정 깃털의 새
다리오 아르젠토와의 협업
1971년
레드 텐트

1971년
천국으로 가는 노동계급

1971년
아홉개의 꼬리를 가진 고양이
다리오 아르젠토와의 협업
1972년
켄터베리 이야기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와의 협업
1973년
무숙자
세르조 레오네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
1974년
아라비안 나이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와의 협업
1975년
모세
300여분에 달하는 TV영화
1975년
살로 소돔의 120일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와의 협업
1976년
1900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1976년
엑소시스트 2

1977년
올카

1978년
그대 머무는 곳에

1978년
천국의 나날들
테렌스 맬릭의 영화
1979년
혈선

1979년
루나

1981년
프로페셔널

1982년
더 씽
존 카펜터의 영화
1983년
사하라

1983년
열쇠

1983년
황금 열쇠를 찾아서

1984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세르조 레오네와의 마지막 협업
1985년
레드 소냐

1986년
미션
롤랑 조페와의 협업
1987년
사하라의 비밀

1987년
언터처블
브라이언 드 팔마와의 협업
1988년
시네마 천국
주세페 토르나토레와의 협업
1988년
실종자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1989년
전쟁의 사상자들
브라이언 드 팔마와의 협업
1989년
멸망의 창조

1989년
욕망의 낮과 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1990년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
주세페 토르나토레와의 협업
1992년
시티 오브 조이[16]
롤랑 조페와의 협업
1992년
사선에서

1994년
러브 어페어

1994년
단순한 형식
주세페 토르나토레와의 협업
1996년
스탕달 신드롬
다리오 아르젠토와의 협업
1997년
로리타

1997년
유턴
올리버 스톤의 영화
1998년
피아니스트의 전설
주세페 토르나토레와의 협업
2000년
미션 투 마스
브라이언 드 팔마와의 협업
2000년
말레나
주세페 토르나토레와의 협업
2000년
캐논 인버스

2002년
리플리스 게임

2005년
페이트리스

2006년
언노운 우먼
주세페 토르나토레와의 협업
2009년
바리아

2013년
베스트 오퍼
주세페 토르나토레와의 협업
2015년
헤이트풀 8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 음악상 수상작
2015년
5월은, 하고싶은 대로 해라

2016년
코러스 폰더스

2016년
시크릿 레터
주세페 토르나토레와의 마지막 협업이자 유작
2017년
로즈 인 윈터



5. 둘러보기[편집]



[1] 빠삐용을 비롯하여 그렘린, 오멘, 원초적 본능, 오! 인천 같이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제리 골드스미스(1929~2004), 007 시리즈, 늑대와 춤을, 아웃 오브 아프리카, 사랑의 은하수 같은 음악으로 유명한 존 배리(1933~2011), 닥터 지바고, 콰이 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모리스 자르(1924~2009) 같은 거장들도 유명했지만 이젠 모두 세상에 없기에... 사실상 생존한 인물 중에서 이 분에게 비견되는 거장 작곡가는 존 윌리엄스 말고는 없을 듯 하다. 하지만 엔니오 모리코네도 2020년 7월 6일 사망하면서, 현역 거장 영화음악가는 실질적으로 존 윌리엄스만 남은 상황이다.[2] 미국의 스래시메탈 밴드 메탈리카가 이 곡을 매 공연마다 오프닝곡으로 사용하는 것이 유명하다[3] 특히 엘리오 페트리랑 죽이 잘 맞았는지, 페트리가 감독하고 그가 음악을 맡은 '노동 계급은 천국에 간다'와 '완전 범죄' 사운드트랙은 지금도 모리코네의 단골 레퍼토리기도 하다.[4]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스라엘 첩보기관스파이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 이 영화에서 성인이 된 누들스가 데보라와 데이트 후 겁탈하는 장면에서 운전기사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5] 어린시절 추억과 친구들은 같은 음을 공유하나 별개로 분리된다. 어린 시절 추억 같은 경우엔 짝눈의 테마의 구슬픈 멜로디가 흘러나오다 밝게 변하며, 친구들은 일반 재즈 스타일 곡이다. 위 영상은 어린 시절 기억.[6] 이 영화 OST에 있는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에 가사를 붙여 사라 브라이트만과 재키 애반코가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라는 제목의 노래로 발표하였다. 90년 초반 라디오 영화음악실 방송을 진행하던 성우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에서도 미션 음악이 아카데미상을 놓친 건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나올 정도였다.[7] 각각 그 해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영화는 1978년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조르조 모로더), 1987년은 마지막 황제(데이빗 번, 사카모토 류이치, 공수), 1991년에는 미녀와 야수(앨런 멩컨), 2000년에는 레드 바이올린(존 코리글리아노)이 받았다.[8] 비슷한 케이스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디카프리오 역시 이탈리아계 혼혈이다.[9] 더 늦은 나이인 50대에 오스카상을 수상한 알 파치노와 30대에 일찌감치 수상한 로버트 드 니로도 있는 관계로 디카프리오의 이탈리아계 혈통은 그저 가십거리일 수도 있다.[10] 그것도 이들은 이미 1960~1970년대에 받았다.[11] 시상자인 가수이자 배우 베트 미들러가 시상식에 오기 전에 자신의 머리와 마사지, 미용 등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해준 것에 대해 당시 흥행에 성공한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에이리언 2에 빗대어 자기는 여기 오느라 시고니 위버보다 더 많은 에이리언 -이 말에는 “외계생명체”의 의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영주권이나 시민권 없이 “외국에서 온 비이민 거주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들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스탠딩 코미디를 하자 관객들이 파안대소 웃는 것을 보면 당시 주류 미국인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잠시 후 허비 행콕의 수상과 관련된 논란을 무마하기 위해 아카데미 측에서 미리 각본을 써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12] 다만 이렇다해서 허비 행콕이 실력이 형편없는데도 운 좋게 수상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물론 라운드 미드나잇에서의 작업으로 미션에서의 모리코네의 작업을 제치고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것 자체는 다소 의아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비 행콕은 재즈음악계에서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꼽히는 사람이다.[13] 2003년, 2010년 한정.[14] 2005년, 2007~2010년, 2012~2018년.[15] 특이하게도 아래 영상 상에서 7분 52초 부분이 처음에 나오다가 6분 52초 부분으로 다시 돌아간다. 수상음악답게 음원을 짜깁기했거나 KBS 교향악단이 재녹음을 한 것으로 추정.[16] Ennio Morricone - City of Joy (OST from 'City of Joy')네이버 영화 - 시티 오브 조이 (City of Joy,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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