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카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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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o Caruso (1873년 2월 25일 ~ 1921년 8월 2일)
이탈리아의 성악가.
세계의 성악가들은 카루소 이전과 카루소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전혀 아닌데, 왜냐하면 음반으로 녹음된 최초의 성악가가 카루소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카루소 이전의 성악가들은 그 일화가 구전으로나 전해질 뿐 직접 들어볼 길이 없다(...). 하지만 카루소 이후의 성악가들은 대부분 음반을 남겼기 때문에 세상을 떠난후에도 사람들이 들어볼 수 있다.
카루소는 나폴리에서 농부 집안의 아들로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음악 선생은 카루소에게 노래의 재능이 없다고 폄하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카루소의 노력을 진심으로 칭찬했다.[1] 또 그의 음악 레슨비를 모으기 위해 신발 없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위대한 헌신에 더해 본인도 공장에서 일하며 계속해서 성악을 공부하는 열정을 발휘해 카루소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21세에 오페라에 데뷔해 유명해졌고 곧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을 비롯한 여러 극장에서 푸치니, 조르다노 등 유명 작곡가들의 오페라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에 출연한 모습.
카루소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당대 최고의 성악가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라아치>에서 '베리스모 오페라'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190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 데뷔한 후 그 곳에서 18년 간 40여 편의 오페라를 600회 이상 공연하였으나 1921년 늑막염에 걸려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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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Enrico Caruso (1873년 2월 25일 ~ 1921년 8월 2일)
이탈리아의 성악가.
세계의 성악가들은 카루소 이전과 카루소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전혀 아닌데, 왜냐하면 음반으로 녹음된 최초의 성악가가 카루소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카루소 이전의 성악가들은 그 일화가 구전으로나 전해질 뿐 직접 들어볼 길이 없다(...). 하지만 카루소 이후의 성악가들은 대부분 음반을 남겼기 때문에 세상을 떠난후에도 사람들이 들어볼 수 있다.
2. 생애[편집]
카루소는 나폴리에서 농부 집안의 아들로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음악 선생은 카루소에게 노래의 재능이 없다고 폄하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카루소의 노력을 진심으로 칭찬했다.[1] 또 그의 음악 레슨비를 모으기 위해 신발 없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위대한 헌신에 더해 본인도 공장에서 일하며 계속해서 성악을 공부하는 열정을 발휘해 카루소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21세에 오페라에 데뷔해 유명해졌고 곧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을 비롯한 여러 극장에서 푸치니, 조르다노 등 유명 작곡가들의 오페라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에 출연한 모습.
카루소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당대 최고의 성악가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라아치>에서 '베리스모 오페라'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190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 데뷔한 후 그 곳에서 18년 간 40여 편의 오페라를 600회 이상 공연하였으나 1921년 늑막염에 걸려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3. 대표곡[편집]
4. 기타[편집]
"당신을 누가 나에게 보냈소? 하느님께서 보냈는가?"
- 그가 스스로를 모델로 그린 자화상 캐리커쳐가 꽤 많이 남아 있다. 음반사에서 카루소 시리즈물을 낼 때 이 캐리커쳐를 음반 재킷으로 활용한 적도 있다.
- 생활의 참견에서 소개된 일화로, 차가 고장나서 한 농부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농부가 자신의 이름을 듣자 알아보고 감탄해서 뿌듯해 했지만 사실 농부는 그를 로빈슨 크루소로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 미국 공연 당시 미국 여성과 시비가 붙어서 폭행죄로 고소당한 바 있다. 다행히 무죄로 끝났으나, 당시 미국의 모 신문은 이탈리아 여성 소프라노 엔리코 카루소라고 보도하여 졸지에 성전환을 당하기도 했다(...). 더불어 1906년 미국 공연 중 호텔에 머물다가 지진을 경험하기도 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 지진이었다.
- 루치오 달라[2] 가 작사/작곡한 카루소를 기리는 칸초네 'Caruso'라는 노래가 있는데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른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 파바로티와 친구들 1992년 공연에서 파바로티와 듀엣으로 불렀다. 늑막염에 걸려 화려한 과거를 뒤로하고 고향 나폴리만으로 돌아온 카루소의 심경을 묘사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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