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우드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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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왕 · 영국 왕비



잉글랜드 왕국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파일:Elizabeth Woodville.jpg

이름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출생
1437년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사망
1492년 6월 8일 (향년 55세)
잉글랜드 왕국 서리
장례식
1492년 6월 12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배우자
그로비의 존 그레이 (1452년 결혼 / 1461년 사망)
에드워드 4세 (1464년 결혼 / 1483년 사망)
자녀
토마스, 리처드, 엘리자베스, 메리, 세실리, 에드워드 5세, 마거릿, 리처드, , 조지, 캐서린, 브리짓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
어머니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형제
루이스, 앤, 앤서니, 메리, 자퀘타, 존, 라이오넬, 마사, 엘레노어, 리처드, 마거릿, 에드워드, 캐서린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에드워드 4세의 왕비로 에드워드 5세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이다.

장미 전쟁 시기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요크 가문에 속해 있었지만 같은 가문의 리처드 3세가 자신과 자기 자식들을 해치려고 하자 경쟁관계에 있던 랭커스터 가문과 손을 잡았으며 결과적으로 튜더 왕조의 창시자인 헨리 7세의 즉위를 돕게 된다.


2. 생애[편집]


1437년 리처드 우드빌과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의 장녀로 태어났다. 1452년 랭커스터 가문의 기사 그로비의 존 그레이와 결혼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1] 1461년에 장미 전쟁에 참전한 남편이 전사하면서 24살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첫 번째 남편 존 그레이가 죽은 지 3년 뒤인 1464년 국왕 에드워드 4세와 결혼했다.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 4세가 만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남편의 사후 상속 문제로 왕에게 탄원하겠다고 그가 다니는 길목에 죽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에드워드 4세가 보고 잉글랜드 최고의 미인 엘리자베스를 궁으로 데려왔다는 설이 있다. 이 결혼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는데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룩셈베르크의 자퀘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배출하기도 한 룩셈부르크 가문 방계 출신에 헨리 6세의 인척이기도 했다. 자퀘타는 헨리 6세의 숙부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의 과부이자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과도 친척이어서 궁정 여성 중 서열 2위기도 했던 반면,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은 귀족이 아닌 베드퍼드 공작의 일개 시종무관이었으니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사실상 평민이었다. 이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에드워드 4세도 처음에는 신분이 낮은 엘리자베스를 그냥 정부로 삼으려고 접근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저는 왕비가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정부가 되기엔 너무 출신이 훌륭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증거 기록이 없는 명백한 야사이지만 엘리자베스의 자신감과 매력을 나타내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과정이 어떻든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최초의 평민 출신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의 결혼에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크게 당황하고 분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쾌해한 사람은 에드워드 4세의 사촌으로 장미전쟁에서 요크 왕조의 편에 서 에드워드 4세를 옹립한 일등공신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킹메이커로 불린 리처드 네빌은 에드워드 4세의 집권 초기에 가장 큰 세력을 자랑했고, 정국 안정을 위해 에드워드 4세를 프랑스의 공주와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왕이 말도 없이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한 가문 출신의 평민과 결혼한 것이다. 당연히 리처드 네빌은 에드워드 4세가 본인에게 알리지도 않고 몰래 결혼했다는 것에 모욕을 느낀 건 물론, 에드워드 4세의 갑작스런 결혼으로 부랴부랴 혼인동맹을 수습하느라 대외적으로 명예가 크게 실추당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런 귀족들의 분노를 뒤로하고 에드워드 4세에게 여러 자식을 낳아주었고, 전 남편 소생의 자식들도 왕의 총애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왕의 총애를 업고 친정 가족들을 유력 귀족 가문의 인물과 결혼시켜 세력을 늘렸지만 너무 이때다 싶은 노골적인 욕심 때문에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이로 인해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던 리처드 네빌은 프랑스의 루이 11세의 고무와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섰고, 1469년 7월 에드워드 4세를 사로잡는 기염을 토하며 그대로 구금했다. 하지만 이미 에드워드 4세의 지지자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가두진 못하고 그해 10월에 석방했다. 와중에 리처드 네빌은 재판조차 없이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과 남동생 한명을 사형시켰다.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리처드 네빌은 본격적인 원수로 돌아섰다.

결국 반격에 실패한 리처드 네빌은 요크 왕조를 배신하고 랭커스터 왕조로 전향한다. 리처드 네빌은 랭카스터 왕조 최후의 왕자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자신의 막내딸 앤 네빌을 결혼시켜 동맹을 맺고, 에드워드 4세를 몰아붙인 다음 헨리 6세를 성공적으로 복위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재정비를 마친 에드워드 4세에게 반격을 당해 리처드 네빌은 바넷 전투에서 전사하고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도 투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랭커스터 세력도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반란이 마무리되어가던 때에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 4세의 맏아들인 에드워드 5세를 낳았다.

어쩔 수 없는 호색한이었던 에드워드 4세는 결혼 후에도 정부와 사생아들을 여럿 거느렸고, 엘리자베스는 인내하며 그 사생아들을 돌보고 왕을 구슬러 친정을 키워주느라 고심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엘리자베스도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급사하면서 위기에 처한다. 엘리자베스의 아들 에드워드 5세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숙부 리처드 3세가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 3세는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 5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며 왕위 찬탈을 준비했다. 리처드 3세가 고용한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그녀의 어머니 자퀘타는 마녀이며 주술을 사용했다,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 4세는 합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았다는 등의 소문을 퍼트렸다. 이러한 흉흉한 여론을 조성한 리처드 3세는 '에드워드 4세는 전에 엘레노어 버틀러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나 엘리자베스 우드빌에게 반해 엘레노어를 버렸다'라는 증언을 받아내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해버렸다. 이로써 엘리자베스가 에드워드 4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졸지에 사생아가 되어버렸다. 사생아는 왕위계승권이 없었기에 리처드 3세가 자연스럽게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더이상 왕이 아니게 된 에드워드 5세와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는 런던탑에 감금당했다.[2] 이에 엘리자베스는 남은 자식들을 데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소로 도망갔다.

몸을 숨긴 엘리자베스는 비밀리에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헨리 튜더와 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와 손잡았다.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물리치면 자신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헨리와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동맹을 맺고, 그를 정통성을 갖춘 잉글랜드의 군주로 즉위시키고 딸을 왕비로 앉혀 복권을 노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1485년, 헨리 튜더는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불리한 전력 하에서 헨리 튜더는 보스워스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리처드 3세는 전사했다. 이후 헨리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고 잉글랜드의 왕 헨리 7세로 등극하였다. 헨리 7세는 아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비롯해 리처드 3세가 사생아로 격하시켰던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자식들을 모두 적자로 복권시켜 주었고, 엘리자베스는 궁에 돌아와 대비(Queen Dowager)로 인정받고 연금을 받게 되었지만 대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녀원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선 궁정 내의 권력 다툼에서 졌다는 해석이 있다. 사위사부인[3]도 음흉하기론 만만찮은 사람들이라, 너무 노골적으로 지위와 권력을 끌어모으던 엘리자베스가 상대하긴 어려웠을지도.

그래도 엘리자베스는 여생 동안 왕실의 대비로 대우 받으며 왕실 행사에도 꾸준히 참석했다. 이후 1492년 6월 8일, 버몬지 사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유언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졌으며, 유해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의 에드워드 4세 곁에 안장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연극)에서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등장한다. 이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 리처드 3세(영화)에서는 아네트 베닝이 연기한다.

2013년 BBC 드라마 《The White Queen》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리처드 3세가 마녀로 몰았던 역사적 사실을 따와 미래를 보고 저주를 내리는 진짜 마녀로 나온다. 배우는 레베카 페르구손. 후속작인 《The White Princess》에서는 에시 데이비스가 대비가 된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연기한다.

영국 BBC에서 셰익스피어 희곡들을 원작으로 방영하는 연작 시대극 《The Hollow Crown》에서 킬리 호스가 연기했다.

만화 장미왕의 장례 행렬에서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첫 남편인 존 그레이를 열렬히 사모하였으나 그가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서 싸우다가 죽자,[4] 복수를 위해 에드워드 4세를 유혹해 요크 왕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려 한다. 당연히 왕에 대한 사랑은 눈꼽만큼도 없으며 존 그레이의 자식들과는 달리, 에드워드 4세의 자식들인 왕자녀들도 복수를 위한 도구로만 취급한다. 에드워드 4세 사후 왕태후가 되고 전남편을 죽인 리처드 3세를 없애기 위해 온갖 모략을 꾸미지만 리처드도 가만있지 않고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이전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하루아침에 국왕의 정식 아내가 아니며 왕을 유혹한 마녀로 몰려 에드워드 4세와의 혼인은 무효화되고 왕태후의 신분도 잃고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사실상 연금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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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들 중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남인 제 1대 도셋 후작 토마스 그레이의 증손자가 바로 '9일 여왕'으로 유명한 제인 그레이의 막장 아버지 헨리 그레이다.[2] 리처드 3세 항목에 있듯이 런던탑에 갇힌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두 형제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리처드 3세가 암살했다는 것이 정설이다.[3]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초대 랭커스터 공작이자 헨리 4세의 아버지인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 헨리 7세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이 혈통으로 거의 전멸한 랭커스터 왕조의 몇 안남은 후손을 자칭할 수 있었다.[4] 이 만화에서는 그가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리처드 3세에게 죽었다는 설정이다.[5] 이후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 4세의 장남 에드워드 5세도 가짜 왕으로 몰려 동생 리처드(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 4세의 차남)와 함께 런던탑에 감금되고, 그전에 이미 리처드 3세에 의해 감옥에 갇힌 엘리자베스의 남동생 앤서니 우드빌과 존 그레이에게서 낳은 차남 리처드 그레이마저 살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