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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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Herzogin Elisabeth in Bay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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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엘리자베트 아말리 오이게니
(Elisabeth Amalie Eugenie)
출생
1837년 12월 24일
바이에른 왕국 뮌헨
사망
1898년 9월 10일 (향년 60세)
스위스 제네바
장례식
1898년 9월 17일
카푸친 교회
신체
173cm[1], 몸무게 46kg ~ 49kg
배우자
프란츠 요제프 1세 (1854년 결혼)
자녀
장녀 조피, 차녀 기젤라, 장남 루돌프, 삼녀 마리 발레리
아버지
바이에른에서의 공작[A] 막시밀리안 요제프
어머니
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2]
형제
루트비히 빌헬름, 빌헬름 카를, 헬레네, 카를 테오도어[3], 마리 조피, 마틸데 루도비카, 막시밀리안, 조피 샤를로테, 막시밀리안 에마누엘
종교
가톨릭 (세례명:엘리사벳)
1. 개요
2. 외모
3. 생애
3.1. 어린 시절과 결혼
3.3. 암살
4. 평가
4.1. 동정적
4.2. 비판적
5. 가족 관계
5.1. 조상
5.2. 자녀
6. 기타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이자 헝가리 왕국의 왕비. "시씨"(Sisi)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시시'라고도 읽힌다.[4][5] 헝가리식 이름은 비텔스바흐 에르제베트,(Wittelsbach Erzsébet) 결혼 전에는 엘리자베트 인 바이에른 여공작.


2. 외모[편집]


당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족 여성으로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미녀 왕비의 대명사처럼 꼽힌다.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외모를 가꾸는 일에 열중하고,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다이어트를 감행하기도 했다. 당시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기초 화장품을 테스트하고 일기에 기록까지 해가며 가장 효과적인 제품을 찾을 정도로 피부관리에 열중했다. 또한 색조 화장은 피부를 상하게 한다며 거의 하지 않았다.

몸무게 관리에도 철저해서 거의 거식증 환자 수준으로 굶었는데, 정확히는 거식증이 아니라 폭식증으로 추정된다. 기록을 보면 시씨는 평소 하루에 우유나 오렌지 6개로 때운 반면 종종 혼자 식당에 가서 풀코스 식사에 디저트까지 싹 비웠다고 한다. 식욕을 참지 못하고 가끔 과식도 했지만 식단과 무지막지한 운동으로 이를 상쇄하는 식. 다만 온갖 산해진미 음식이 넘쳐나고 낭비되고 비만과 성인병이 흔했던 궁정에서 그런 평가는 거식증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인의 영양 관점으로 보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식단 관리라는 이야기도 있다.

식단뿐만 아니라 운동에도 열중해서 궁과 별장 등에 온갖 운동 기구를 설치해 중독 수준으로 걷고 운동하여 평생 키 173cm, 몸무게 46~49kg를 철저히 유지했다.[6] 현대 기준으로도 170cm대의 여성은 거의 모델급의 장신인데 평균 신장이 휠씬 작았을 1800년대에는 같은 여인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과도 키가 비슷한 엄청난 장신이었을 것이다.[7] 이처럼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장신에 몸무게도 저체중 수준으로 적게 나가고, 얼굴은 말할 것도 없는 미녀에다 몸매도 좋았으니 당대의 연예인 혹은 모델이나 다름없었을 듯. 그러나 실제로는 기아처럼 마르고 툭하면 영양실조 등으로 흉하게 보이기도 했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카락 무게를 빼면 실제 무게는 그것보다도 가벼웠다. 매일 3시간 이상을 머리 관리에 투자했고 그 시간동안 외국어나 철학, 과학, 문학 등의 과외를 받았다고 한다. 그 머리카락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 이에 관련된 일화가 많다고.

윗대에서 오랫동안 근친혼이 반복된 탓인지 그녀의 섭식장애나 예민함, 아들 루돌프의 자살 이유를 유전적인 요인에서 찾는 설도 있다. 대부분 근친혼 = 무조건 기형, 정신이상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작 반복된 근친혼에서 태어났어도 엘리자베트나 그 남매들, 루돌프는 오히려 지적, 신체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8] 다만 유난히 예민한 성격 등 유전적 요인과 환경에서 오는 극단적 스트레스로 벌이는 일탈이 보수적인 이들의 시각에는 돌아버린 것처럼 보인 듯.

외모에 대한 이러한 강박증에 가까운 성향 탓인지 나이를 먹고 늙기 시작하자, 시씨는 초상화와 사진을 매우 싫어했고 모든 개방된 장소에서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시작한다. 현재 남아있는 시씨의 사진과 그림 대부분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것인 이유도 모두 그러한 까닭이다. 나이 들고 찍힌 사진은 거의 다 흐릿하거나 부채로 가리는 등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들이다. 인터넷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늙은 엘리자베트의 초상화는 생전에 그린 게 아니라 대부분 그녀의 사망 이후 그려진 것이다.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과 결혼[편집]


1837년 12월 24일에 바이에른에서의[A]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와 바이에른의 공주 루도비카[9]의 차녀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 모두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으로 바이에른 왕가에 속했지만 엘리자베트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놀며 자랐다. 바이에른 왕가의 외손이고 독일 내 여러 왕가와 가까운 친척이었지만, 방계에 공작 가문에 불과한 친정이 왕가 친척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애매한 포지션이라 빡센 교육이나 에티켓에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

외삼촌: 루트비히 1세
이모: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아우구스타[10]
이모: 오스트리아 황후 카롤리네 아우구스테[11]
이모: 프로이센 왕비 엘리자베트 루도비카[12]
이모: 작센의 왕비 아말리에 아우구스테.[13]
이모: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조피. 나중에 시어머니가 된다.
이모: 작센의 왕비 마리아 안나.[14] 조피와 쌍둥이 자매.

오빠: 루트비히 빌헬름[15]
언니: 투른-탁시스 공비 헬레네(네네)
동생: 카를 테오도르(바이에른에서의 공작)[16]
동생: 양시칠리아 왕비 마리 조피[17]
동생: 트라니 백작부인 마틸데 루도비카[18]
동생: 알랑송 공작부인 조피
동생: 막시밀리안 엠마누엘

조카들로는 벨기에의 왕비 엘리자베트, 바이에른 왕태자비 마리 가브리엘레 등이 있다.

15세에 이종사촌인 프란츠 요제프 1세[19]와 결혼하게 되었다. 사실 원래 프란츠 요제프의 신부 후보는 엘리자베트의 언니 헬레네[20]였다. 그러나 정작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헬레네와 맞선을 보던 날, 어머니와 언니를 따라온 어린 엘리자베트를 보고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구혼한다.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이 청혼을 받아들여 2년 뒤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3.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편집]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하면서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이중제국 체제를 이루게 되자 헝가리의 왕비로 즉위했다. 그녀가 정치에 개입한 것은 단 한 번이었는데, 1867년 헝가리의 독립내각 구성을 강력하게 지지한 것이다. 일전에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헝가리인들이 보여준 환영에 큰 감명을 받아 헝가리를 매우 좋아했고, 다른 이유는 사이가 나빴던 시어머니 조피가 혁명에 가담했던 헝가리를 싫어했기 때문. 시어머니를 굉장히 싫어한 엘리자베트는 시어머니 속을 뒤집으려 작심하고 헝가리의 극성팬을 자처했던 것.

그러나 바이에른에서 자유롭게 생활해온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엄격한 황실 예법에 잘 적응하지 못해 방황했다. 허례 허식과는 거리가 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절에는 호프부르크의 예법은 이웃 나라 프랑스 왕국이나 프로이센 왕국에 비해 무척이나 자유롭고 편안했으나, 프란츠 요제프 대에 이르러서는 궁정 문화가 엄청나게 보수적으로 변해 있어 숨 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여기에 시어머니가 된 이모 조피 대공비와의 갈등도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게다가 남편 프란츠 요제프도 워커홀릭에 마마보이였던 탓에 엘리자베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아 그녀는 신혼 초기부터 고독하고 외롭게 지냈다.

16세에 결혼한 어린 엘리자베트는 처음엔 조피에게 반발하지 못했지만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아들 루돌프를 낳아서 궁정에서의 입지가 강화된 다음에는 정신병원을 후원하거나[21] 국내외 여행 등 이런저런 다양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실의 공식적인 행사는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피해서 황후답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에게 약했던 남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신이 도와주지 못해 아내가 힘든 결혼 생활을 보낸 것을 자책해서 그녀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엘리자베트가 남편을 자기한테서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정부를 소개시켜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항목 참조. 나랏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약해진 남편을 돌봐주기는 귀찮고, 놓고 가자니 심한 가책을 느껴 돌봐줄 사람을 대신 고용한(?) 후 자기는 마음 놓고 도망간 셈.

아이러니한 것은 시어머니에게 억압 받던 그녀도 자기 며느리인 벨기에 공주 스테파니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는 조피 대공비의 사랑을 받으며 엘리자베트와 갈등을 빚던 동서 샤를로트(벨기에 공주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가 스테파니의 고모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1세기 들어 프란츠 요제프 1세와의 불화에 대해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Family Tree DNA라는 집단의 DNA 연구(https://www.familytreedna.com/public/habsburgfamilyproject)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인인 찰스 홀트(Charles Holt, 1865~1947)가 프란츠 요제프의 사생아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부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 그녀가 찰스 홀트의 존재를 알았는지는 현재의 기록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찰스 홀트가 태어난 1865년 이후로 엘리자베트 황후는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고(1867년), 막내인 마리 발레리를 출산(1868년)했다. 루돌프를 낳은 이후 임신하는 것을 극히 꺼리다가 갑작스럽게 막내를 갖기로 결정한 것인데, 궁정에 머무르지 않고 평생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건 루돌프를 출산한 이후다. 더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아예 남편을 피해 빈을 탈출하기 일쑤였던 것.

엘리자베트는 결혼 후 조피[22], 기젤라, 루돌프, 마리 발레리 등 4명의 아이를 낳았다. 첫째 조피는 헝가리 여행 중 요절했는데 엘리자베트는 딸의 죽음에 어린 아이를 무리하게 여행에 동반한 본인 탓이라 자책하며 자식들을 외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일한 아들 루돌프는 성인이 된 후 세간에 '마이어링 사건'으로 알려진 밀월여행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기젤라와 마리 발레리만이 엘리자베트의 사후까지도 살았다. 엘리자베트는 자기 손으로 키운 막내 마리 발레리에겐 지나칠 정도로 애정을 쏟았지만,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에게 기젤라와 루돌프를 싹 떠맡겨 놓고는 그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

기젤라와 루돌프에게도 아예 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편애는 아들 루돌프가 자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생각되며 딸 기젤라를 정략결혼의 도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엘리자베트의 막내 동생 막시밀리안은 작센의 공녀 아말리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아말리에는 엘리자베트의 친척[23] 바이에른의 레오폴트 왕자와 약혼 직전이었다. 원래 기젤라의 이른 결혼을 반대하던 엘리자베트는 경쟁자인 레오폴트에게 아말리에 대신 자신의 딸 기젤라와 결혼하길 권했고 그렇게 15세의 기젤라는 레오폴트와 결혼했다. 엘리자베트는 연애결혼을 하고도 16살 어린 나이에 결혼한 것 자체를 한탄했지만 정작 자신의 딸을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시집 보낸 것. 아이러니하게도 기젤라는 비록 남편의 외모가 못생긴데다 정략결혼이었지만, 금혼식까지 치를 정도로 엘리자베트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 그렇게 애정 없는 딸을 시집 보낸 후 시씨는 딸과 외손자들에게도 철저하게 관심 끊었다(...)

부모에게 제대로 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의지해 자란 루돌프와 기젤라는 깊은 우애를 갖고 있었다. 루돌프는 엘리자베트의 자식들 중 그녀와 가장 닮은 아이였으나, 아들의 약혼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한 어머니 탓에[24] 두 사람 모두 살아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1889년에 루돌프가 자살하자 실의에 빠져 남은 평생을 검은 상복을 입고 이전보다 더욱 도피성이 짙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1888년 아버지를, 다음 해 아들을 잃은 시씨는 1890년에는 언니, 1892년에는 어머니, 1893년에는 막내동생을 떠나보냈다. 연달아 겪는 비극에 살아갈 의지를 잃으며 그러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몸 상태가 더 나빠지기 시작했고, 여행도 쉬지않고 계속 다니다보니 죽을 때까지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딸 마리 발레리는 기젤라와 자신은 힘을 다해 엘리자베트를 위로했지만 그녀가 결국 루돌프를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고 썼고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죽음과 자살을 원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일련의 사건 이후의 여행에는 경호원을 대동하지도 않고, 가명을 사용하며 소수의 시녀들만을 동반했다. 이 때부터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유럽 밖 모로코, 이집트, 알제리 같은 나라들도 방문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이 결국 엘리자베트의 죽음을 부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암살당한 순간에도 엘리자베트는 경호원은커녕 시녀 한 명만 대동하고 있었다.

3.3. 암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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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날 마지막으로 사진에 잡힌 시씨. 오른쪽의 여인은 시녀인 헝가리 왕국의 여백작 스타러이 이르마(Sztáray Irma 1863~1940)로 평생 결혼하지 않고 시씨를 보필했다.

파일:Lucheni_fitxa (1).jpg
암살범 루이지 루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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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당시 사용된 흉기

1898년 9월 시씨는 비밀리에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다. 그러나 황후의 신원은 노출당했고, 이 사실을 안 스위스의 한 신문에서는 오스트리아 황후의 여행 이야기를 실었다. 이 기사를 읽은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1873-1910)[25]는 엘리자베트에게 접근해 그녀를 암살한다.[26] 루케니는 가는 송곳(needle)[27]으로 시씨의 가슴을 찌르고 도망쳤는데, 시씨는 찔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사실을 몰랐다. 단지 소매치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루케니는 암살 훈련을 받아 작은 상처를 통해 치명적인 출혈을 유도했던 것이다. 시씨의 가슴에 난 작은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왔지만 입고 있던 검은 옷[28]과 그 안에 받쳐 입은 코르셋 때문에 황후 자신도, 시녀도 상처와 그로 인한 출혈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씨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임신 기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꽉 조이는 코르셋을 착용하고 다녔는데 그 때문에 시씨가 칼에 맞고 비틀거렸을 때도 시녀나 목격자들은 코르셋이 너무 조여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비틀거리던 시씨는 계속 걸어서 스위스를 떠나는 배에 승선했으며 꽉 조였던 코르셋을 풀고 나서야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곧 혼절했다. 코르셋 때문에 칼에 찔리고도 별로 출혈이 없는데다가 검은 옷을 입었던지라 얼마 없던 출혈도 티가 안 나던 것인데 코르셋을 풀자마자 심각한 출혈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응급처치를 받으면 살 수 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배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승선하고 있지 않았다. 시녀가 급히 선장에게 황후의 신분을 알려 회항했고 죽어가는 황후는 뒤늦게서야 호텔로 옮겨졌고 급히 의사를 불러왔지만, 단 한 번 정신을 차렸다가 한 마디만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였다. 유언마저 남기지 못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시씨의 죽음은 당일 바로 전보로 부쳐졌는데, 그 날도 어김 없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있던 프란츠 요제프는 아내의 죽음을 듣고 충격을 받아 책상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나마 그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부분은 시씨가 살해당했다는 점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항상 시씨가 루돌프를 따라 자살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신앙심이 깊은 프란츠 요제프로서는 가톨릭 교리에 따라 자살한 이가 천국에 갈 가능성에 회의적 태도를 가졌고 아내가 자살한다면 그녀 또한 구원받기 힘들거라 생각했다고.[29]

후계자를 앞세운 데다가 갑작스런 사별까지 겪은 이후 프란츠 요제프는 더욱 실의에 빠져 지낸 나날이 많아졌다. 사적인 자리에서 시씨를 회상하며 측근들에게 종종 "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그녀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모를거야." 등의 얘기를 했다고 한다. 프란츠 요제프와 시씨는 평생 애증이 뒤섞인 미묘한 결혼 관계를 유지했는데, 루돌프의 죽음 이후로 남편과 화해하며 나이 먹고 사이가 좀 좋아지려고 하다가 시씨가 암살당하면서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늘 빈을 떠나 있던 시씨는 세간에서 거의 잊혔고 황제도 그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후 시씨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화려하게 살아나 오스트리아의 상징관광 상품이 되었다.


4. 평가[편집]



4.1. 동정적[편집]


불행한 인물들 중 유독 엘리자베트가 인기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비극적 결말과 더불어 '마지막 황후'라는 상징성이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는 해석이 있다.[30] 사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는 카를 1세의 아내인 부르봉파르마의 지타지만 지타는 고작 2년만에 남편과 함께 폐위되어 쫓겨난 터라, '저물어가는 거대 제국의 마지막 황후'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 건 엘리자베트다.[31] 게다가 엘리자베트는 외적인 아름다움까지 더해지면서 상업적으로 흥하기 좋은 조건을 갖춘 것.

또한 옛날 사람들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면이 긍정적이고 선한 인물상을 추앙하던 것과 달리 현대인들은 다면적인 인물상을 더욱 인간적이라고 느끼고 선호하는 덕도 있다. 엘리자베트는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헝가리어[32], 고전 그리스어, 라틴어 같은 어려운 언어들을 마스터할 정도로 지성이 뛰어났다. 또한 남성 승마 기수들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스포츠에도 능하고, 문학적 재능도 있어서 시 쓰는 게 취미였고(정작 문학적으로는 저평가를 받는다.),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고관을 가졌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분야에 소질을 보였음에도 그걸 발전시킬 수 없는 황후라는 위치에 있었던 탓에 개인적인 관심사와 취미의 범위를 벗어난 제대로 된 성취는 이룰 수 없었다. 몇 십 년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자유로운 현대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인물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 황실이라는 화려한 감옥에 갇히고 본인, 남편, 자녀들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기에 그 비극성이 매력적으로 비친다는 것.[33] 사실 엘리자베트는 평생 거의 가출 상태로 살다보니, 2차 대전 이후까지도 오스트리아에서 거의 무존재였다.


4.2. 비판적[편집]


한편으로는 아내, 어머니, 황후로서의 역할에 소홀히 했다는 비판적인 평가도 크다. 그에 대해 비판적이든 긍정적이든 대부분이 공감하는 건 그녀가 평범한 귀족으로 살았으면 자신도 주변인들도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는 것.

동시대 인물로 성별만 다를 뿐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앨버트 공은 독일 출신의 외국인이란 이유로 빅토리아 여왕의 재산을 노린다거나 모국 독일의 이익에 충실한 스파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고 때문에 여왕 부군으로서 법적 지위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아픈 과거[34]를 아이들과 아내에게 대물림 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로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내를 도우며 여왕의 부군이자 아버지로서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애들 자체를 싫어해 다 크기 전까지는 본인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여왕과 반대로 가정적이고 온화한 아버지였고 아이들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제한적이긴 해도 아내 빅토리아 여왕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주고 고집센 그녀를 유일하게 달래주는 부군으로서 역할도 톡톡히 했으며, 특히 수정궁으로 유명한 영국 만국 박람회를 주도하는 탁월한 정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시집살이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남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답답하다는 이유로 황후로서의 역할을 등지고 평생 여행으로 회피하였다. 특히 워커홀릭인 아버지와 아이들을 소유물로만 보는 할머니 사이에서 괴로워 하는 루돌프, 기젤라에게 누구보다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줄 생각은 전혀 않고 막내 마리 발레리에게만 온갖 편애를 주면서 정작 사랑을 줘야 했던 딸 기젤라는 정략결혼로 보내버리고 아들 루돌프도 방치하면서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완전 실격이었다.[35]

한편 본인이 불행하다면서 정작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 위주로 행동한 이기주의, 자기 연민, 병적인 자뻑, 갑질, 기타등등 상당한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 까이기도 한다. 실제로 국가 경제가 파탄나고 외교, 정치를 비롯해 오스트리아 제국이 내우외환으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황후로서 의무를 다하긴 커녕 혼자 거금을 쓰며 사치와 낭비, 호화 여행을 즐기고 다니기 일쑤에 시녀든 가족이든 자신에게 무조건 맞춰주길 요구하고, 황후의 하인들은 결혼하면 쫓겨나기 때문에 평생 강제 솔로로 살아야 했다. 엘리자베트 본인은 그런 주변 사람들의 고충은 1도 안 생각하고 혼자 불쌍한 척[36]을 다하고 다니니 보는 사람 입장에선 어이가 없을 수밖에.


5. 가족 관계[편집]



5.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in Bavaria)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
(Duke Maximilian Joseph in Bavaria)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피우스 아우구스트
(Duke Pius August in Bavaria)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빌헬름
(Duke Wilhelm in Bavaria)
팔츠 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의 마리아 안나 여백작
(Countess Palatine Maria Anna of Zweibrücken-Birkenfeld)
아렌베르크의 아멜리 루이제 공녀
(Princess Amélie Louise of Arenberg)
아렌베르크의 루트비히 공
(Prince Louis of Arenberg)
마리 아델라이드 줄리 드 메일리
(Anne-Adélaïde Julie de Mailly-Nesle, dame d'Ivry-sur-Seine)
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
(Princess Ludovika of Bavaria)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프리드리히 미하엘
(Frederick Michael,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팔츠줄츠바흐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여백작
(Countess Palatine Maria Franziska of Sulzbach)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공녀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5.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오스트리아의 조피 여대공
(Archduchess Sophie of Austria)
1855년 3월 5일
1857년 5월 29일

2녀
바이에른의 왕자비 기젤라
(Gisela, Princess of Bavaria)
1856년 7월 12일
1932년 7월 27일
바이에른의 레오폴트 왕자
슬하 2남 2녀[37]
1남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Rudolf, Crown Prince of Austria)
1858년 8월 21일
1889년 1월 30일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38]
슬하 1녀[39]
3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잘바토어
대공비 마리 발레리

(Marie Valerie, Archduchess Franz Salvator of Austria)
1868년 4월 22일
1924년 9월 6일
오스트리아-토스카나 대공 프란츠 잘바토어
슬하 4남 6녀


6. 기타[편집]


오스트리아독일 등지의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한 유럽 지역에서는 그녀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엘리자베트(Elisabeth das musical)』가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으며 이후 빈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자리잡는다. 작곡가는 실베스터 르베이, 각본가는 미하일 쿤체. "죽음(Der tod)[40]이 엘리자베트를 사랑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41] 고증도 꽤 잘 되어있고, 엘리자베트의 부정적인 면모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다룬다. 이 뮤지컬은 1992년에 비엔나 가극장(Theater an der Wien)에서 세계 초연을 올렸으며 1992년 비엔나판 초연때 엘리자벳의 배우는 피아 다우스, 토트는 우베 크뢰거, 프란츠 요제프는 빅토르 거노트가 연기했다. 아시아에서는 1996년 일본 다카라즈카 가극단을 통해 먼저 초연했고, 2000년에는 혼성판인 토호판도 역시 상연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도 현 EMK의 제작진이 토호판을 본것을 계기로 라이센스를 구입하여[42] 2012년 2월부터 『엘리자벳』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초연이 올라왔고 2022년 8월에 한국판 10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다.

이 중 일본 다카라즈카판은 세계최초이자 아시아 최초로 논레플리카 무대 형식으로 수입한 버전이며 1996년 설조에서 초연했다. 자세한 항목은 다카라즈카판 엘리자벳을 참조. 다카판 초연은 씨씨 역의 하나후사 마리, 토트(죽음) 역의 이치로 마키, 프란츠 요제프 1세로 타카네 후부키, 루이지 루케기는 토도로키 유, 루돌프 황태자는 코쥬 타츠키 출연하여 열연을 펼쳤다. 단, 다카판이 남역젠느중심이기 때문에 많은 각색이 이뤄졌고 이로인한 비판이 아주 없지않아 빈판과 다카판을 적절히 섞어놓으면서 역시 논레플로 진행하면서 비엔나판 본연에 가까운 토호판이 나오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토호판 엘리자벳 참조. 토호판은 2000년에 초연했으며 초연당시의 출연진은 씨씨 역의 이치로 마키, 토트(죽음)는 더블캐스트로 극단 시키출신 야마구치 유이치로와 극단 문학좌 출신 우치노 세이요, 프란츠 요제프는 시키 출신 스즈키 소마, 루돌프 황태자는 도쿄 예대 성악과 출신 이노우에 요시오가 맡았다. 토호판은 총 세번의 무대변화를 걸쳤으며 2022년에는 22주년 공연을 맞이했고, 22주년 공연에서는 씨씨 역의 하나후사 마리와 마나키 레이카가 더블캐스트로 출연하여 각자의 캐릭터 해석이 담긴 엘리자베트 황후상을 보여주었다. 다카판과 토호판으로 당시 일본인에게는 생소한 유럽의 역사를 알아가게 되는 계기를 만들며 여성들을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제국 붐을 일으킴과 동시에 엘리자벳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한 궁중생활에 대한 동경 등으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는 관광객 증가를 야기하기도 했으며, 씨씨 황후 박물관이 그전보다 오스트리아 인기 관광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토호판의 경우 2019 공연당시 일본과 오스트리아 수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오스트리아 정부와 빈협회로부터 엘리자벳을 포함한 빈 뮤지컬 및 오스트리아 역사와 문화를 전파한 공로를 인정받아 연출감독 코이케 슈이치로 및 토호판 엘리자벳 출연자들에게 오스트리아 공화국 유공 영예 금장이 수여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사연과 10주년 공연까지 했는데 김선영, 옥주현[43], 김소현, 조정은, 신영숙, 이지혜가 엘리자베트를 연기했다.

5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 영화 '시씨' 3부작(trilogy)은 그녀의 일생에 관해 다루고 있으며, 엘리자베트를 연기한 여주인공 로미 슈나이더는 이 영화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정작 이 영화가 예상 못하게 큰 히트를 치는 바람에 로미 슈나이더는 그런 이미지만 강요하는 독일 영화계에 질려 프랑스로 도망갔고, 평생 시씨 거부증(?)을 앓았다. 그러나 이후 루키노 비스콘티루드비히: 신들의 황혼에서 전작과는 완전히 반대인 엘리자베트를 연기했다. 오스트리아 영화계에서는 상당히 인기 소재 중 하나로 꽤 자주 영화화되는 소재다. 2022년 빅키 크리엡스도 마리 크로이처의 코르사주에서 시씨 연기를 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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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를 관광할 때 모차르트와 더불어 지겹도록 접하게 되는 인물이다. 특히 호프부르크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시씨 박물관까지 있으며 그 안에는 시씨가 생전에 입던 드레스나 사용하던 물건들, 심지어 그녀를 살해한 도구까지 전시되어있다. 시씨에 대해 잘 모르는 관광객들은 주로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현지인들은 상당히 진지하게 관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쇤브룬 궁전에 가보면 시씨가 거주하던 방과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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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오스트리아의 기념품점에서는 시씨와 관련된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다. 예를 들면 드레스를 입은 시씨의 미니 동상이나 흉상, 초상화 같은 것들. 모차르트 동상, 모차르트 쿠겔,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다"[44] 는 내용이 쓰인 티셔츠와 더불어 기념품점에서 반드시 보게 되는 품목 중 하나다.

한편 시종과 시녀를 전부 헝가리인으로 둘 정도로 헝가리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헝가리에서의 인기가 매우 좋았다. 수도 부다페스트에는 다뉴브강을 가로지르는 에르제베트 다리가 존재하고 부다페스트 제7구는 아예 명칭이 에르제베트구이다. 부다페스트 외에도 헝가리 곳곳의 광장, 공원, 거리 등등 온갖 지명에 그녀를 기념한 에르제베트(Erzsébet)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피자 마르게리타의 유래가 된 이탈리아 왕비 마르게리타[45]는 엘리자베트 황후의 외가 쪽 5촌 조카로 마르게리타 왕비의 어머니인 제노바 공작부인 엘리자베트가 엘리자베트 황후의 이종사촌이다. 또한 스웨덴 오스카르 1세의 왕비 요세피나와는 이종사촌 바이에른의 루이트폴트 왕자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 오톤과는 외사촌 사이.

근래의 필적 감정사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 동안 알려진 별명 '시씨'의 필체가 'S'보다는 'L'에 더 가까워서 실제 별명은 리지(Lisi)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실제로 리지는 엘리자베트의 애칭 중 매우 흔히 쓰이는 버전이다. 철자가 Elisabeth이니 자연히 Lisi라는 줄임말이 나오는 것이다.[46] 다만 '시씨'라는 별명이 워낙 널리 알려져 있어서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게임 타임 프린세스의 스토리 중 하나로 그녀의 일생을 기반으로 한 '프린세스 시씨'가 있다.

넷플릭스에 그녀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 《황후 엘리자베트》가 방영되고 있다. 단 고증이나 스토리 등 모두가 실존 인물들 이름, 모티프만 빌려온 완전 판타지라 역사극을 기대하고 보면 저 세상 고증에 황당할 수 있다. 그냥 이세계 판타지

2022년 빅키 크리엡스가 엘리자베트 역을 맡은 전기 영화 코르사주가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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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보다 키가 더 크다.[A] A B Herzog in Bayern(英:Duke in Bavaria). 바이에른 공국은 1506년 이후 기존의 게르만족 전통의 분할상속제를 폐지하고 장자상속제를 적용시켰는데 이로 인해 기존의 자신들의 영지와 공작위를 잃어버린, 그리고 후에 분할 상속을 통해 작위를 받았어야할 이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에른에서의 공작이라는 작위를 만들었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후예들은 모두 이 작위를 받게 되었다. 물론 이 작위는 예우상의 작위였고 실제로는 바이에른 공작(Herzog von Bayern/Duke of Bavaria)이 통치했다.[2]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인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이다.[3] 알베르 1세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왕비의 아버지다. [4] 뒤에 s가 하나 더 들어간 "Sissi"라는 표기도 존재하지만, 관련 박물관이나 문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공식 표기는 Sisi로 쓰고 있다.[5] 그러나 엘리자베트의 필체 상 첫 글자가 'S'가 아닌 'L'인 것이 유력하다는 설이 제기된다. 그렇게 되면 '시씨'가 아닌 '리지(Lisi)'가 되는 셈. 리지도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의 흔한 애칭이다. 사실 시씨도 정확한 독일어 발음은 '지지'라서 굳이 시'씨'라고 읽기도 이상하고 시씨, 시시가 혼용되는 편.[6] 최저 몸무게일 때는 무려 43.5kg였다고 한다.[7] 현대 이전에 170cm가 넘는 근대의 왕후 및 황후들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헤센의 마리,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몬테네그로의 옐레나(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왕비) 등 얼마 없다.[8] 5촌 ~ (부계)10촌 내외로 겹치는 부모의 근친혼에서 태어난 엘리자베트가 이모의 아들과 결혼해 낳은 세 딸들도(장녀는 일찍 잃었지만) 외모, 성격, 정신상태 등에서는 너무 뛰어나거나 처지는 데도 없이 시씨보다 정상이고 평범해서 인생도 잘 살아간 편이었다. 아들 루돌프 황태자만 성격, 지성 등에서 엘리자베트의 판박이라 유난스러웠던 것 뿐, 그녀의 형제들도 사촌이나 가까운 친척과 결혼했지만 그 자식들도 모두 정상인이었고 반복된 근친혼에서 태어났지만 오히려 우수했던 인물들은 한국 역사에도 여럿 등장한다. 유럽 왕가에서 장애로 유명하거나 이상했던 인물들은 거의 근친혼 때문이라고 단정짓는 경향이 강하지만, 이들이 워낙 튀는 기형과 광기로 일당백을 한 것이지(대표적으로 근친혼의 단점 얘기엔 그 많은 왕가 중 거의 혼자 소환당하는 합스부르크 등) 근친혼에서 태어났어도 지극히 멀쩡한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은 무시하는 편. 당장 엘리자베스 2세필립 공 부부도 부모 양쪽으로 7촌 및 8촌 내외라 근친이라면 근친인데 슬하의 3남 1녀 모두 문란한 건 가풍일 뿐 다들 정상으로 태어나 현재까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연산군도 부모가 친척이었으면 근친혼 때문에 미친 짓했다고 했을 판[9]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7녀.[10]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내이자 조제핀 드 로이히텐베르크의 어머니다.[11] 조피 대공비의 시아버지 프란츠 2세의 네번째 황후로 조피의 언니이기도 하다.[12]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왕비. 조카 시씨의 대모였다.[13] 작센의 4대 국왕 요한의 아내. 참고로 요한은 아래에 나오는 마리아 안나의 남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동생이다. 즉, 자매가 나란히 형제에게 시집간 것.[14] 작센의 3대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아내.[15] 장남이었으나 귀천상혼으로 결혼해서 공작위를 남동생에게 양보했다. 외동딸이 엘리자베트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와 헝가리 출신의 소귀족 마리 베체라를 연결해준 마리 라리쉬 백작부인[16] 형의 귀천상혼으로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벨기에의 왕비 엘리자베트의 아버지다.[17]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프란체스코 2세의 왕비.[18] 프란체스코 2세의 이복남동생 루이지와 결혼했다. 루이지는 딸 1명만 둔 채로 형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프란체스코 2세가 자식 없이 죽은 후 명목상의 양시칠리아 왕위는 마틸데의 시동생 알폰소에게 돌아갔다. 외동딸 마리아 테레사는 루마니아 국왕 페르디난드 1세의 형 빌헬름과 결혼.[19] 이모 조피 대공비의 장남.[20] 애칭은 네네(Nene).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바람 맞은 이후 20살 넘도록 결혼을 못하다가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22살에 제국 내 운송 사업을 하고 있던 투른탁시스 가문의 후계자와 연애 결혼을 했다. 남편의 신분이 헬레네보다 낮아서(다만 슈탄데스헤어 가문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격이 좀 낮다 뿐이지 귀천상혼 취급받을 결혼은 아니다) 애로사항이 꽃피었지만 동생 엘리자베트가 적극 도와줘 결혼할 수 있었다. 헬레네는 형제 자매 중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한다.반면 자매들 중 제일 일찍, 가장 돈 많은 과부가 되었다 그게 행복한 거임 또한 헬레네의 피를 이은 투른-탁시스 가문은 지금도 유럽 내 귀족 가문 중, 가장 큰 부를 지닌 가문으로 번성하며 후손을 이어가고 있다.[21] 엘리자베트 자신이 평생 우울증과 온갖 신경증에 시달렸기 때문에 정신의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22] 시어머니가 묻지도 않고 첫 손녀라며 자기 이름을 따서 세례식까지 마쳐버렸다.[23] 외사촌 바이에른의 루이트폴트 왕자의 아들.[24] 며느리 될 스테파니 공주가 보기 싫어서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고.[25] 루이지 루케니는 범행 직후 스위스 경찰에게 체포되어 스위스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사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형당하는 것이 좌절되자 1910년 감옥 안에서 벨트로 목을 매 자살했다.[26] 루케니가 엘리자베트를 특정해서 노렸던 건 아니었다. 아나키스트였던 루케니는 후일 재판을 받으며 타깃이 왕족이면 누구든 상관 없었다고 증언했다. 본래 루케니가 맨 처음 구상한 암살 목표는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였으나 거주지였던 스위스에서 이탈리아까지 이동할 경비가 없어 포기하였고, 이후 프랑스 왕위 요구자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스위스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필리프의 스위스 방문이 취소되어 실패하였는데, 그 직후에 엘리자베트의 스위스 방문 소식을 접하고 엘리자베트를 타깃으로 삼았던 것. 보수주의 왕족을 혐오하여 일으킨 범행이었지만, 막상 당한 건 보수 성향이 아닌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시씨라는 게 아이러니. 여담으로, 루케니가 맨 처음에 암살하려고 했던 움베르토 1세는 그로부터 2년 후에 몬차에서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가에타노 브레시에게 암살당했다.[27] 시씨 박물관에 가보면 전시되어있는데 위에서 보다시피 흔히 보는 과일 깎는 칼보다도 훨씬 작다. 송곳을 흉기로 사용한 이유는, 권총을 구입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28] 시씨는 루돌프를 잃은 후 아들을 애도하기 위해 늘상 검은 옷만을 입고 살았다. 다만 생전에 어머니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아들 루돌프 황태자 입장을 생각해보면 위선까진 아니라 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지만.[29] 비록 원칙적으로 가톨릭 교리는 자살이 죄라고는 가르치지만, 자살자가 지옥에 간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구원 여부에는 죽기 직전의 통회 가능성, 극단적 선택을 할 때 정신적으로 몰려있었을 정황(즉 책임의 경감) 등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30] 덤으로 시씨는 40년이 넘도록 황후 자리를 지킨, 합스부르크 왕조 역사상 최장수 황후이기도 했다.[31] 한국사에서 경술국치 시기에 재위중이었던 진짜 마지막 황제와 황후는 순종순정효황후 윤씨지만, 고종명성황후 민씨의 인상이 더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32] 헝가리어는 라틴어 계열 유럽 언어들과는 계통이 달라 서유럽인들이 배우기 아주 까다로운 언어였다. 남서유럽에서의 바스크어(바스크모로코 아랍어(안달루시아), 남동유럽에서의 튀르키예어, 북유럽에서의 핀란드어·에스토니아어·사미어, 동유럽에서의 타타르어·조지아어·아제르바이잔어와도 비슷한 포지션이었던 셈이다.[33] 물론 이렇게 시대를 잘못 태어나는 재인은 남녀불문 많았다.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도 당차고 총명한 성격의 공주였으나, 정신 지체장애가 있던 프란츠 카를 대공(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버지)와 강제 정략결혼을 했고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던 사람마저 요절하면서 홀로 오스트리아 황실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조피는 황후가 되길 포기하고 아들을 즉위시켰기 때문에 평생 대공비로만 남았다. 때문에 엘리자베트는 엄청난 미녀에 제국의 마지막 황후라는 타이틀까지 얹어지면서 인기가 어마어마해진 것이다.[34] 가정 환경은 별로였지만 적어도 자유로웠던 유년시절을 그리워해 평생 자유 타령을 하던 엘리자베트와 달리, 앨버트는 부모가 사이가 나쁘다 못해 이혼했고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불행한 가정 환경이 만든 과묵하고 우울한 성격과 강박적인 도덕성에 평생을 시달렸다. 심지어 앨버트의 형 에른스트 2세는 불행한 유년시절의 영향으로, 결혼과 여자를 못 믿고 방탕하게 살다가 성병에 걸려 몸이 망가졌고 결국 자녀없이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이 불행한 환경 속에서 앨버트는 자신만은 좋은 아버지, 남편이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으며 형과의 사이도 원만했다.[35] 게다가 기젤라의 정략결혼도 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남동생을 위해 경쟁자를 치워주려는 목적이었다. 상황상 기젤라가 빨리 결혼해야 했고 맞는 신랑감을 찾느라 급할 때여서 겸사겸사 보내버리기도 한 거지만, 정작 그렇게 편애한 마리 발레리는 신분도 재산도 별로인 남자와의 연애 결혼을 본인이 앞장 서서 밀어줬으니 엄마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수 밖에... 하지만 팔리듯 정략결혼한 기젤라는 친가에서 못 받은 사랑을 시가와 남편, 아이들 모두에게서 받고, 남편과 금혼식까지 치를 정도로 오랫동안 해로하고 아이들도 잘 자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반면 연애 결혼을 한 마리 발레리는 남편이 바람 피운 걸로도 부족해 사생아를 낳고는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의 이름을 붙여준 고인모욕을 보고 홧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버린 게 함정.[36] 그녀의 지나친 자기 연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외아들 루돌프의 사후 평생 검은 옷만 입고 다니며 여행을 다니던 말년의 모습이다. 아들을 잃고 괴롭다고 하나 정작 그 아들 루돌프가 생전에 도움을 요청했을때 무시로 일관한 건 본인이었지만, 이건 아들에게 무관심했던 것을 내내 후회하는 일종의 자학에 가깝다. 오히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불쌍해하는 배부른 소리, 자기 연민, 나르시시즘 등이 골고루 심각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은 황후가 어쨌다는 등의 주변 기록, 몰래 쓴 시들(.....).[37] 엘리자베트 마리, 아우구스테, 게오르크, 콘라트 등[38] 레오폴드 2세의 차녀[39]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비 엘리자베트 마리[40] 사신이나 죽음의 신이 아닌 말 그대로의 죽음을 의인화한 것. 국내에서는 '토드'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발음은 '토트'가 맞다. Tod의 d가 독일어에서는 ㅌ로 발음되기 때문.[41] 당시 "엘리자베트가 황궁에 죽음을 데려왔다"는 속담이 있었는데, 이 말이 작품의 모티브라고. 사실 엘리자베트가 황후로 재위하던 시기는 또 마침 전세계가 정치적 격변기를 겪을 무렵이기도 했을뿐더러, 합스부르크 황실이 오랫동안 이어져온 근친혼 정책의 후유증으로 크고 작은 유전병에 시달렸다는 것은 유명하며 그 중에는 정신질환도 있었다. 때문에 황족들 중 일부는 정세에 잘못 휘말려 비참하게 죽고 또 일부는 정신질환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하는 등 아무튼 침대에서 편하게 천수를 다하지 못하는 황족들이 많은 시기였다. 인과관계로 따지면 그 일들이 전부 다 엘리자베트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만도 아닌지라 사실 논리젹 오류가 좀 있기는 한데, '격변의 시기 속에서 저물어가는 제국과 스러져가는 황족, 그리고 그 한복판의 절세미인 황후'라는 상황이 워낙에 드라마틱해서 생겨난 말인 듯.[42] 뮤지컬 사회학(저: 최민우)에서도 언급 된 내용이다.[43] 초연부터 오연까지 꾸준히 참여해 왔다.[44]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 혼동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유머. 호주 관광청에서도 이걸 가지고 유머 하기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오스트리아 출신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를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착각해서) '호주댁'이라고 불렀을 정도.[45] 이탈리아 왕국의 2대 국왕 움베르토 1세의 왕비[46] 영어 버전인 엘리자베스(Elizabeth)도 리사, 리자, 리지, 리즈 등 Lis- 또는 Liz- 형태의 애칭이 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