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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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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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6년
후보자격 연도
1986년
후보선정 연도
1986년
















































Guiness World Records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
Best-selling solo artist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솔로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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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수치
출처
엘비스 프레슬리
약 13억
#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파일:Elvis-profile.jpg

본명
엘비스 에런 프레슬리
Elvis Aaron Presley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생
1935년 1월 8일
미시시피주 투펄로
사망
1977년 8월 16일 (향년 42세)
테네시주 멤피스
직업
가수, 배우
서명
파일:엘비스 프레슬리 서명.png
[ 기타 정보 펼치기 · 접기 ]
묘소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그레이스랜드
장례일
1977년 8월 18일
학력
흄즈 프레파토리 아카데미 미들 스쿨 (졸업)
병역
미합중국 육군 병장 전역[1]
1958년 ~ 1960년
종교
개신교(오순절교회)
신체
182cm, 약 80~150kg[2]
활동
1953년 ~ 1977년
데뷔
1954년 7월 19일, 싱글 <That's All Right>
장르
로큰롤, , 컨트리, 로커빌리, 가스펠, R&B
악기
보컬, 기타, 피아노
민족
체로키, 프랑스계 미국인, 독일계 미국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별명
로큰롤의 왕
King of Rock and Roll
상징
파일:7C45849B-6414-4016-81E1-F7DEB428349B.png
부모
버넌 프레슬리 (1916년 ~ 1979년)
글래디스 프레슬리 (1912년 ~ 1958년)
배우자
프리실라 프레슬리 (1967년 ~ 1973년, 이혼 / 1945년)[3]
자녀
리사 마리 프레슬리 (1968년 ~ 2023년)
외손주
라일리 키오 (1989년 ~ )
벤자민 키오 (1992년 ~ 2020년)
하퍼 록우드 (2008년 ~ )
핀리 록우드 (2008년 ~ )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스포티파이 아이콘.svg | 파일:디스코그스 아이콘.svg
홈페이지
공식 엘비스 샵
그레이스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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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엘비스 프레슬리
일본어
エルヴィス・プレスリー
중국어
埃爾維斯·皮禮士利
그리스어
Έλβις Πρίσλεϊ
러시아어
Элвис Пресли
아랍어
إلفيس بريسلي
페르시아어
الویس پریسلی
히브리어
אלביס פרסלי
힌디어
एल्विस प्रेस्ली


1. 개요
2. 생애
3. 성격
4. 가족
5. 평가
6. 디스코그래피
6.1. 정규 앨범
6.2. 싱글
6.3. 사운드트랙 앨범
7. 빌보드 핫 100 차트인 목록
7.1. 빌보드 핫 100 이전 싱글 차트 1위
7.3. 빌보드 핫 100 2위
7.4. 빌보드 핫 100 3위 ~ 10위
7.5. 빌보드 핫 100 11위 ~ 20위
8. 필모그래피
8.1. 영화
8.2. 다큐멘터리
9. 여담
10. 생존설
10.1. 엘비스 생존설을 채용한 작품
11. 패러디



1. 개요[편집]




역사상 최고의 티비쇼 중 하나라고 불리는 68 컴백 스페셜의 If I Can Dream

The King[1]

엘비스 프레슬리의 칭호


미국가수이자 배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솔로 가수이다.


2. 생애[편집]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0년대 초반부터 기타를 배우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당시 그와 함께 음악적 교류를 하던 사람들이 브루넷츠 형제[2]였다.

사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미 이 시기부터 여러 밴드나 가수 경연대회에 수차례 응모했다 떨어진 전적이 있었으며, 새로운 멤버를 구하는 기성 밴드들의 오디션에 응모했다가 떨어진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시부터 이미 여러 실패를 경험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앨비스는 트럭 운전수 일을 하며 꾸준히 오디션에 참가했다.

처음으로 어머니를 위해 제작한 레코드판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심리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자작판이라도 만들어 선물하자는 결심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 - Jailhouse Rock[3]

1956년 1월, RCA Victor 레코드사에서 싱글 〈Heartbreak Hotel〉을 발매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했고, 데뷔 직후부터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하반신을 흥겹게 흔드는 당시로는 아주 파격적인 춤과, 흑인들의 전유물로 취급되던 로큰롤을 선보여 미국을 뒤흔들었고,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에게 혐오를 받았으나[4], 젊은 층에게는 인기가 대단했다.


파일:Elvis Presley Draft Card.jpg

엘비스 프레슬리의 징병통지서


파일:Elvis Presley 1202.jpg

첫 소집에서의 모습

당시 미국은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병역의무가 부과되어 1958년에 입대했다. 주 서독 미 육군에서 복무를 했는데,[5] 당시 수많은 여성팬들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기 위해 서독을 방문했다.

복무 당시 독일 민요 Muss i denn, muss i denn zum Städtele hinaus(노래는 즐겁다)를 'Wooden Heart(목석같은 마음)' 라는 곡으로 개사해 부른 것이 유명하다. 이 곡은 엘비스가 출연한 영화 G.I.블루스에 삽입되었다.

이 때, 그가 입던 군복은 지금도 잘 보관되어 있는데, 나중에 경매로 팔려 다름아닌 이란 팔라비 왕조 후손들이 미국에서 경매로 사서 지금도 소유 중이다.

영화도 많이 찍었다. 데뷔한지 몇 개월 후인 1956년 11월, <러브 미 텐더>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은막에 데뷔했고, 이후 잠깐 사랑에 빠졌던 앤 마그렛이 여주인공으로 같이 나온 <Viva Las Vegas>(1964)에서부터 다큐멘터리 <Elvis on Tour>(1972)까지 총 3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바 있다. 10년 동안 30편의 영화를 찍었으니 매년 3편을 공장식으로 찍은 것이다. 거의 다 엘비스의 노래 선전용 90분 짜리 뮤직비디오에 가깝다.

히트곡을 영화화했거나 영화에 나온 노래가 히트하는 식인 것이 많아 배우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다. 그럼에도 워낙 인기가 좋아 그가 나온다 하면 극장으로 소녀 팬들이 몰려들어 영화는 계속 찍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엘비스가 주연으로 나오고 주제가도 부른 <블루 하와이>가 1961년에 개봉했던 바 있다.
<Girls Girls Girls>(1962)[6]

그래도 1960년플레이밍 스타는 작품성이나 연기력 모두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백인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를 둔 혼혈 청년이 백인과 인디언의 충돌이 격해지자 그 가운데서 선택을 강요받고 피해받는 모습이 잘 그려졌고, 노래로 도배하다시피 한 다른 작품과 달리 노래씬도 최소화하면서 영화 자체에 집중했다.[7]

1970년대에도 엘비스의 인기는 여전했으며, 1973년 하와이 콘서트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으로 생중계된 공연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중이 늘기 시작했고, 약물 치료 등을 해 보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하술할 식성 및 식습관도 당연히 연관이 있다. 1977년 1월엔 몸무게가 350파운드(158킬로그램)에 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977년 8월 16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서 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고,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그의 사망과 관련해 여러가지 근거없는 괴담들이 난무하지만, 의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의 사망 원인은 가족력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엘비스의 어머니도 심장병으로 40대의 창창한 나이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엘비스의 외가 친척들 대부분이 심장병으로 일찍 사망했다고 한다. 엘비스의 외동딸 역시 50대 중반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때문에 각종 괴담들은 별로 근거가 없다. 그가 약물을 투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약류가 아니라 각성제, 수면제 등 일상적이고 가벼운 약들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변기 위에서 바지를 반쯤 벗은 채로 약을 맞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런 사례 때문에 망가진 록스타의 전형으로 까이기도 한다. 그 밖에도 살을 빼기 위하여 손댄 게 마약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래서인지 로보캅 2를 보면 그의 사진과 그를 연상케하는 말라빠진 미이라가 잠깐 나오기도 한다. 마약밀매범들이 쾌락과 마약으로 죽은 가수라고 찬양하는 이미지. 그 덕에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의 대표적인 희생양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그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도되지 않지만, 아직도 많은 미국과 영국의 타블로이드들이 사생활에 대해 근거없는 루머를 생산 중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새로운 사망설이 제기된다. 바로 변비로 인한 죽음이다. 실제로 엘비스 사망 후 부검에서 엄청난 양의 대변[8]이 대장에서 검출되었고, 몸무게가 갑작스럽게 불어난 이유를 근거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사망설에 의하면 엘비스는 대변을 보지 못해 힘겨워했고 항상 대변이 마려운 그 상태가 멈추지 않은 상태로 살아야 하는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주치의는 엘비스에게 항문 이식 수술을 권유하였으나, 엘비스는 연예인 신분인 자신이 항문 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 일어날 후폭풍을 견디지 못해 자꾸만 수술을 미루다가 계속 쌓이는 대변의 독성에 점점 더 중독되었다는 설이다.

또한, 약물 과다 복용[9] 역시 그의 심장마비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고 한다. 위에서 나온 주치의 역시 이를 인정하였으나, 이러한 처방은 엘비스를 마약에 손을 안 대도록 하기 위한 선택이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포레스트 터넌트 박사는 처방보다 10배 더 투여된 코데인 역시 약리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10배에 달하는 코데인 또한 치사량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정이 났다. 그런데 코데인은 변비를 유발한다. 설사 치료제로 과거에는 코데인이 자주 처방되었다.

그리고 엘비스의 부검 당시, 많은 약물의 성분이 나온 건 맞지만 그 중에서 불법성 마약이나 알코올은 일절 나오지 않은 것 역시 주목할 만한데, 이는 엘비스가 말년까지도 마약이나 술에 쩔어 사는 방탕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기도 한다.

사망한 지 50년이 다 됐음에도 아직도 현역 가수 못지않은 수익을 벌고 있다. 포브스 사후 수익 순위를 집계한 2001년 이래로 한 번도 순위권에 빠진 적이 없으며 마이클 잭슨 사망 전까진 1위를 도맡아 했다.


3. 성격[편집]


잘생기고 화려한 비주얼과 로큰롤의 상징이라는 큰 존재감, 그리고 이후 대중매체에서 느끼하게 나오는 특유의 이미지들 때문에 사치를 좋아하고, 거만한 스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전술되었듯 엘비스 프레슬리는 스스로에게 엄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약물 남용으로 사망했다는 오명과는 달리 코카인이나 엑스터시 같은 불법 마약에 찌들었던 중독자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겉만 멋지고 잘생긴 게 아닌 그 당시 미국의 방탕한 분위기와 그 분위기를 조장하고 즐기기 바쁜 대부분의 연예인들의 모습에 반기를 든 마음 속까지 품위있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시절을 보냈기에 성공한 뒤에도 어려운 사람들의 입장을 잘 이해해서 자선단체에 꾸준히 많은 기부를 했으며, 우연히 만난 팬들에게도 선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대중문화의 중심이 된 후에도 국민적 인기를 끄는 가수임에도 특권을 거부하고 군대에 자발적으로 입대해서 모범적인 군생활을 했으며,[10] 관계자들에게도 늘 존중하는 모습과 겸손함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종내에는 젊은 시절 그의 춤과 노래를 보며 눈쌀을 찌푸리던 미국의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이자 국민 가수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면모는 복잡한 사생활과 괴팍한 성격, 뒷세계와의 커넥션등으로 논란이 많은 이전 세대 아이콘 프랭크 시나트라와 차별되며, 엘비스 프레슬리를 미국의 수많은 이들이 지금까지도 그리워하는 이유기도 하다.


4. 가족[편집]



파일:엘비스 부모님.jpg

버넌 프레슬리와 글래디스 프레슬리
  • 글래디스 프레슬리 - 어머니
남편 버넌 프레슬리가 교도소에 들어간 뒤 집이 없어서 컨테이너를 개조한 집들이 모인 곳[11]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그를 무척 아꼈기에 어머니를 무척 좋아했다. 상술한대로 성공한 엘비스는 활동 초기의 음반들은 어머니의 생일을 위해 조그마한 싱글 레코드나 한 장 만들어서 선물할까 하는 생각에 레코드 회사를 찾아가서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엘비스의 어머니는 1958년, 40대의 나이로 급사했고 엘비스는 당시 군복무 중이라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했다.

  • 버넌 프레슬리 - 아버지
어릴 적에 여러가지로 서먹서먹했지만 그래도 가수로서 대박이 나면서 아버지를 위해주었고 아버지도 어릴적 가난 속에 절망으로 술과 여러가지로 아들을 못살게 굴던 것을 후회하며 아꼈다. 그래서 아들이 갑자기 죽자 아버지도 충격 속에 죽은 아들을 부여안고 통곡하면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엘비스의 장례식에서 아버지 버너드는 종일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엄마를 만나러 간거니? 그래… 너를 꾸짖지 않으마. 이 애비도 곧 가서 우리 식구 다 같이 영원히 오붓하게 살자꾸나." 그리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아들 사진을 쥐고 멍하게 지내다가 결국 엘비스가 사망한지 2년 만인 1979년에 66살 나이로 아들과 아내를 따라갔다.[12]

  • 프리실라 프레슬리 - 이혼한 부인[13]
제임스 와그너와 앤 와그너 부부의 딸로 태어났으나 6개월 뒤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퀘벡주 출신의 미국 공군과 재혼하면서 성이 볼류로 바뀌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1959년 군복무를 위해 독일에 있을 때 만났다고 한다. 14살 때부터 교제했지만, 엘비스의 존중으로 당시에는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국내 기사 1967년 5월에 결혼했다. 엘비스와의 사이에서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얻었는데, 엘비스의 바쁜 일정 탓에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삶이 유지되다가 둘 다 바람피우면서 1972년 별거에 들어갔으며, 결국 1973년 이혼에 이르게 된다. 결별 후 프리실라는 의류 및 향수 사업을 하기도 했고, 연기자가 되어 영화에 출연했으며, 엘비스를 주인공으로 한 넷플릭스의 성인 대상 코미디 애니메이션 시리즈 "에이전트 엘비스"(2023)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8년생. 명성이 어마어마한 아버지를 둔 관계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데뷔 전부터 유명인사가 되었다.
결국 가수로 데뷔해 2003년, 2005년, 2012년에 정규 앨범을 냈다. 싱어송라이터다. 팝/락 장르로 날카롭고 꾸밈없는 음악 색깔이 호평을 받았다.
두 번째 남편은 마이클 잭슨, 세 번째 남편은 니콜라스 케이지였다.
2023년 1월 12일 심장마비로 쓰러진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향년 54세로 사망하였다.

1989년생. 35세. 모델 겸 배우. 2010년에 데뷔했고, 2015년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케이퍼블 역으로 출연해 한국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이 영화 촬영 중 알게 된 스턴트맨과 2014년에 결혼하였다.

  • 벤자민 키오 - 외손자
2020년 7월 13일 사망했다. 향년 27세.[14]


5. 평가[편집]


"엘비스 프레슬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화적 힘이다. 그는 모든 것에 리듬을 도입했고 음악, 언어, 옷 등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것은 완전한 새로운 사회 혁명이었다. 60년대가 그것에서 왔다."

레너드 번스타인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엘비스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존 레논


"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았어요."

밥 딜런


"엘비스 프레슬리는 전 세계 많은 팬들에게 미국 문화를 규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가스펠, 컨츄리, 리듬앤블루스(R&B) 등을 자신의 음악에 융합해 10억장이 넘는 음반판매 기록을 세웠다. 사후 40여년이 지났지만 프레슬리는 영원한 미국의 영웅으로 남아있다."

백악관, 2018년[15]

[16]


1950년대, 혜성처럼 등장하여 당시 주류 미디어들이 천박하다고 경멸하던 로큰롤 음악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은 문화의 아이콘.

흑백 인종차별이 매우 심하던 시대에 흑인 음악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이루며 음악으로서 인종의 화합을 이루었고,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우상으로 떠오른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대중문화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핵심이 중장년층에서 10대 ~ 20대의 젊은층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주요층이 중장년층에서 청년층으로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인 분기점으로, 그전까지는 장년층를 겨냥한 문화 산업과 오락 산업, 트렌드가 주였다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폭발적인 인기를 기점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청년층도 겨냥하기 시작한다. 이는 훗날 후배 음악가인 비틀즈의 문화 혁명으로 문화계 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10-20대의 이념, 서브컬처가 메인스트림으로 오르게 되면서 사실상 주 핵심이 청년층이 됐는데, 이러한 혁명의 첫 신호탄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공이었다.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록스타이자 당시 음악계의 주류를 혼자만의 폭발적인 인기로 변화시켜버린 대중음악사의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엘비스의 등장 이전에도 리틀 리처드, 척 베리와 같은 초기 로큰롤 장르를 탄생시키고 활동한 아티스트들도 있었으나 로큰롤 장르를 영미권 대중음악의 주류로 끌어올리고 범세계적인 인기를 처음으로 갖게 한 장본인은 엄연히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엘비스가 일으킨 로큰롤 열풍은 스탠다드 팝, 재즈 등으로 대표되던 기성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었으며 본고장인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무수히 많은 '엘비스 키즈'들을 만들어 냈고 그렇게 자란 엘비스 키즈들이 1960-70년대 대중음악 시장을 지배한 전설적인 록 음악 아티스트들이 되었다.[17]

북미 음악계에서 그의 위치는 아직도 확고해서 'King of Rock 'n' Roll'은 그의 별칭이기도 하다. 유럽에선 아직도 생존 가수들보다 더 많은 앨범 판매고를 올리는 등 유럽과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큰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18] 비틀즈는 엘비스를 보며 로큰롤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웠다. 존 레논폴 매카트니 역시 60년대 초반까지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와 함께 자신들에게 영향을 준 뮤지션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늘 언급했다. 그리고 엘비스와 만났을때의 경험과 감동을, 다들 노년에 접어든 1990년대에도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감명깊게 얘기했다. 밥 딜런도 자신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되고 싶다고 늘 말했었고, 실제로 그의 10대 시절 사진을 보면 가죽재킷과 리젠트 머리를 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패션을 그대로 따라한 모습들이 있다.

60년대의 전설적인 록 스타들이 록의 꿈을 꿀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가장 핫한 로큰롤 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은 자신들에게 처음으로 '우상으로서의 로큰롤 그 자체인' 음악을 알려준 스타 혹은 아이돌이기도 했던 엘비스에 대한 경배이자 지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엘비스가 최초로 레코드를 녹음했던 스튜디오에 밥 딜런이 와서 엘비스가 서있던 자리를 표시해 둔 흔적에 무릎을 꿇고 키스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19]

현대에서 엘비스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의 음악은 흑인음악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백인이 흑인음악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흑백 인종차별이 매우 심하던 시대에 인종의 크로스오버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점이다. 다만 사실 그것보단 엘비스가 백인이라서 대중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이 때문에 많은 흑인 가수들은 엘비스가 우리의 노래를 빼앗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을 빼앗아다며 팻 분을 비난했던 리틀 리차드가 훗날 인정했듯, 엘비스를 비롯한 백인 스타들이 알앤비, 로큰롤을 대중들에게 소개해줬기에 그들이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걸 생각해야 한다.

또한, 현재와는 달리 기독교 힙합이나 록 등의 장르가 활성화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로큰롤이 악마의 음악으로 여겨졌던 1960-1970년대에 < He Touched Me > 와 같은 가스펠 앨범들을 발매함으로써 선교 방식을 다양화하는 데 기여한 가수로도 평가받는다. 특히 미국에서 소위 Megachurch 라 불리우는 대형 교회들이 록밴드 또는 기타 대중음악팀을 필수적으로 고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혜안.

은근히 까도 많은 편이여서, 평가 절하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으며 70년대 펑크 록 뮤지션들이 엄청나게 씹어댔다. 이들은 이전 세대인 히피 문화부터 구닥다리 로큰롤까지 모두 척살 대상으로 삼았다(...). 심지어 더 클래쉬는 그들의 노래 "1977"에서 No Elvis, Beatles or Rolling Stones in 1977이라고 노래했다. 그런데 클래쉬가 위에 언급된 뮤지션들을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의 앨범 London Calling커버 자체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Elvis Presley' 앨범에 대한 오마주였으니까.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기타 케이스에 엘비스의 욕을 적어놓기도 하였다.

특히 흑인 음악 쪽에서는 '흑인의 음악을 훔쳐와 적당히 흑인 색을 탈색시킨 뒤 백인들의 인기를 얻었다'며 싫어하기도 한다.(이런 시각은 특히 힙합 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모스 데프 1집의 'Rock & Roll'이나 퍼블릭 에너미[20]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21]그가 이후의 록 아티스트와는 달리 창작곡이 없던데다가 대다수 히트곡이 (라기보단 전부) 흑인 작곡가, 싱어가 버젓히 있는 원곡이 있었다. 인종 차별로 흑인 싱어의 음악은 방송금지 되었고 오로지 메이저 채널에서는 엘비스의 음악만을 들을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보면 흑인들 입장에서 열 안 받을 수가 없다. 이런 현실은 영화 드림걸즈에서 잘 표현된다. 이에 반발한 흑인들이 메이저에 진출하려고 만든 제작사가 바로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마이클 잭슨 등등을 배출한 모타운이다.[22]

그러나 흑인 음악가이자 로큰롤의 전설 리틀 리차드는 이 의견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엘비스를 “그는 통합자였다. 엘비스는 축복이었다. 그들은 흑인 음악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흑인 음악을 위한 문을 열었다.”라고 평했고, 제임스 브라운은 “엘비스와 나는 유일한 미국의 오리지널”이라고 평하며 엘비스의 독보적임을 인정했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다 못해 거의 당연시 여기던 그 당시에 사실상 백인 청년이 흑인 음악을 들고와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신드롬급의 인기를 일으킨 것부터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넘어 당대 미국 사회 시스템 자체를 뒤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와 비슷한 시기를 같이 보낸 흑인 뮤지션들이 그를 인정하는 부분도 이런 시대적 배경을 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현 시점의 시각으로만 판단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저작권법이 잘 지켜지지 않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엘비스는 죽을 때까지 흑인 원작자들에게 단 1페니도 지불하지 않았다.[23] 그러나 이를 전적으로 엘비스의 책임이라 보기는 어렵다. 엘비스는 생전 매니저에게 혹사당하며 착취를 당했던 것으로 유명한 슈퍼스타였다. 천하의 엘비스도 업계의 구조적인 문제의 희생양이 될 정도로 악덕 제작자가 많았던 시대였던 것이다. 링크 따라서 흑인 원작자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은 당시 악덕 제작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이런 쟁점들과 약물 문제로 인해 죽었다는 오명으로 인해 당대에는 평론가들에게도 대차게 까이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관리의 문제일 뿐 음악적인 면에서는 엘비스가 대중들에게 아주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과 그만의 독특한 패션 등은 아직도 심벌처럼 남아 그가 남긴 영향력은 지속돼 현재는 평론가들도 모두 인정한다. 적어도 엘비스가 있었을 때랑 없었을 때를 상상해 본다면 미국을 넘어 전 세계 대중음악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평가는 계속 변하는 것.


6. 디스코그래피[편집]



6.1. 정규 앨범[편집]


  • 1956년
  • 1957년
  • 1960년
  • 1961년
    • Something for Everybody
  • 1962년
    • Pot Luck
  • 1965년
    • Elvis for Everyone!
  • 1967년
    • How Great Thou Ar
  • 1969년
    • From Elvis in Memphis
    • From Memphis to Vegas/From Vegas to Memphis
  • 1970년
    • That's the Way It Is
  • 1971년
    • Elvis Country (I'm 10,000 Years Old)
    • Love Letters from Elvis
    • Elvis Sings The Wonderful World of Christmas
  • 1972년
    • Elvis Now
    • He Touched Me
  • 1973년
    • Elvis
    • Raised on Rock
  • 1974년
    • Good Times
  • 1975년
    • Promised Land
    • Today
  • 1976년
    • From Elvis Presley Boulevard, Memphis, Tennessee
  • 1977년
    • Moody Blue

6.2. 싱글[편집]


  • 1954년
    • That's All Right
    • Good Rockin' Tonight
    • Milkcow Blues Boogie
    • I’m Left, You’re Right, She’s Gone
    • I Forgot to Remember to Forget
  • 1955년
    • Heartbreak Hotel
    •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 Shake, Rattle and Roll
    • Money Honey
    • Just Because
    • I Love You Because
    • I'll Never Let You Go
    • I Got a Woman
    • Blue Suede Shoes
    • Love Me Tender
    • Don't Be Cruel
    • Hound Dog (B면)
  • 1957년
  • 1958년
  • 1959년
  • 1960년
  • 1961년
  • 1962년
  • 1963년
    • One Broken Heart for Sale
    • (You're the) Devil in Disguise
    • Bossa Nova Baby
  • 1964년
    • Kissin' Cousins
    • Kiss Me Quick
    • What'd I Say
    • Such a Night
    • Ask Me
    • Blue Christmas
  • 1965년
    • Do The Clam
    • Crying In The Chapel
    • (Such An) Easy Question
    • I'm Yours (Single Master)
    • Puppet On a String
    • Santa Claus Is Back In Town
    • Tell Me Why
  • 1966년
    • Milky White Way
    • Joshua Fit the Battle
    • Frankie and Johnny
    • Love Letters
    • Spinout
    • If Every Day Was Like Christmas
  • 1967년
    • Indescribably Blue
    • Long Legged Girl (with the Short Dress On)
    • There's Always Me
    • Big Boss Man
  • 1968년
    • Guitar Man
    • U.S. Male
    • You'll Never Walk Alone
    • Your Time Hasn't Come Yet, Baby
    • A Little Less Conversation
    • If I Can Dream
  • 1969년
    • Memories
    • His Hand in Mine
    • In the Ghetto
    • Clean Up Your Own Back Yard
    • Suspicious Minds
    • Don't Cry Daddy
  • 1970년
    • Kentucky Rain
    • The Wonder of You
    • I've Lost You
    •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
    • I Really Don't Want to Know
  • 1971년
    • Rags to Riches
    • Life
    • I'm Leavin'
    • Merry Christmas Baby
    • I Just Can't Help Believin'
  • 1972년
  • 1973년
    • Steamroller Blues
    • Raised on Rock
  • 1974년
    • I've Got a Thing About You, Baby
    • If You Talk in Your Sleep
    • Promised Land
  • 1975년
    • My Boy
    • T-R-O-U-B-L-E
    • Bringing It Back
  • 1976년
    • Hurt
    • Moody Blue
  • 1977년
    • Way Down

6.3. 사운드트랙 앨범[편집]


  • 1965년
    • Love Me Tender
  • 1957년
  • 1958년
    • King Creole
  • 1960년
    • G.I. Blues
  • 1961년
    • Elvis by Request: Flaming Star and 3 Other Great Songs
    • Blue Hawaii
  • 1962년
    • Follow That Dream
    • Kid Galahad
    • Girls! Girls! Girls!
  • 1963년
    • It Happened at the World's Fair
    • Fun in Acapulco
  • 1964년
    • Kissin' Cousins
    • Viva Las Vegas
    • Roustabout
  • 1965년
    • Girl Happy
    • Tickle Me
    • Harum Scarum
  • 1966년
    • Frankie and Johnny
    • Paradise, Hawaiian Style
    • Spinout
  • 1967년
    • Easy Come, Easy Go
    • Double Trouble
    • Clambake
  • 1968년
    • Speedway
  • 1968년
    • Elvis
  • 1970년
    • That's the Way It Is
  • 2010년
    • Viva Elvis
  • 2022년
    • Elvis[24]

7. 빌보드 핫 100 차트인 목록[편집]



7.1. 빌보드 핫 100 이전 싱글 차트 1위[편집]


위 곡들은 빌보드의 바꿔진 규칙에 의해 비공식 1위로 기록되었다.

7.2. 빌보드 핫 100 1위[편집]


이 노래들은 개편 이후에 차트에 오른 노래들이다.


7.3. 빌보드 핫 100 2위[편집]



7.4. 빌보드 핫 100 3위 ~ 10위[편집]


  • 1958년
    • Wear My Ring Around Your Neck
    • One Night
    • I Got Stung
  • 1959년
  • 1961년
    • I Feel So Bad
    •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
    • Little Sister
  • 1962년
    • She's Not You
  • 1963년
    • (You're The) Devil in Disguise
    • Bossa Nova Baby
  • 1965년
    • Crying in the Chapel
  • 1969년
    • In the Ghetto
    • Don't Cry Daddy
  • 1970년


7.5. 빌보드 핫 100 11위 ~ 20위[편집]


  • 1959년
    • My Wish Came True
  • 1960년
    • Fame and Fortune
    • I Gotta Know
  • 1961년
    • Flaming Star
  • 1962년
    • Follow That Dream
  • 1963년
    • One Broken Heart for Sale
  • 1964년
    • Kissin' Cousins
    • Such a Night
    • Ask Me
    • Ain't That Loving You Baby
  • 1965년
    • (Such an) Easy Question
    • I'm Yours
    • Puppet on a String
  • 1966년
    • Love Letters
  • 1968년
    • If I Can Dream
  • 1970년
    • Kentucky Rain
    •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
  • 1972년
    • Separate Ways
  • 1973년
    • Steamroller Blues
  • 1974년
    • If You Talk in Your Sleep
    • Promised Land
  • 1975년
    • My Boy
  • 1977년
    • Way Down[25]


8. 필모그래피[편집]



8.1. 영화[편집]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56
Love Me Tender
클린트 리노
주연
1957
Loving You
지미 톰킨스
주연
Jailhouse Rock[26]
빈스 에버렛
주연
1958
King Creole[27]
대니 피셔
주연
1960
G.I. Blues
털사 맥클린
주연
Flaming Star
페이서 버튼
주연
1961
Wild in the Country
글렌 타일러
주연
Blue Hawaii[28]
채드 게이츠
주연
1962
Follow That Dream
토비 킴퍼
주연
Kid Galahad
월터 굴릭 / 키드 갈라하드
주연
Girls! Girls! Girls!
로스 카펜터
주연
1963
It Happened at the World's Fair[29]
마이크 에드워즈
주연
Fun in Acapulco[30]
마이크 윈드그렌
주연
1964
Kissin' Cousins
조쉬 모건 / 조디 테이텀
주연
Viva Las Vegas
럭키 잭슨
주연
Roustabout[31]
찰리 로저스
주연
1965
Girl Happy
러스티 웰스
주연
Tickle Me
로니 빌 / 팬핸들 키드
주연
Harum Scarum
조니 티론
주연
1966
Frankie and Johnny
조니
주연
Paradise, Hawaiian Style
릭 리차드
주연
Spinout
마이크 맥코이
주연
1967
Easy Come, Easy Go
테드 잭슨 중위
주연
Double Trouble[32]
가이 램버트
주연
Clambake
스콧 헤이워드
주연
1968
Follow That Dream
조 라이트클라우드
주연
Speedway
그렉 놀란
주연
Live a Little, Love a Little
월터 헤일
주연
1969
Charro!
제스 웨이드
주연
The Trouble with Girls[33]
월터 헤일
주연
Change of Habit
존 카펜터 박사
주연

8.2. 다큐멘터리[편집]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70
Elvis: That's the Way It Is[34]
본인
-
1972
Elvis on Tour
본인
-


9. 여담[편집]


  • 자신을 구시대 가수로 만들어버린 1960~70년대 후배 세대의 록 음악, 이른바 "요즘 것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최신 음악은 일부러 멀리 했고, 자신이 예전부터 좋아하던 올드팝이나 가스펠 음악을 주로 들었다.

  • 1974년에 레드 제플린을 만났던 일화가 굉장히 유명하다. 레드 제플린 멤버들은 여타 60-70년대 밴드들처럼 엘비스의 굉장한 팬이었는데, 엘비스의 공연을 본 후 엘비스가 묵고 있던 호텔에 방문하였다.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이 인기 밴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음악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고 상술한 이유 때문에 처음에는 잠깐만 시간을 내 주려고 하였으나, 로버트 플랜트의 재치있는 입담에 푹 빠져서 2시간 동안이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계속했다고 한다. 이때 엘비스의 매니저는 그들이 있던 방 문을 두드렸으나 문을 잠그면서까지 대화를 계속했다고. 당시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을 따라다니던 그루피들에 대해 궁금해 했는데, 답변하기 곤란했던 로버트 플랜트는[35] “그런 건 소문일 뿐이고 우리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린 호텔에 머물 때 딴 짓 안 하고, 오직 당신의 노래를 부르면서 휴식시간을 보내는게 유일한 낙입니다(일동 웃음).”라고 재치있게 답했다고. 또한 로버트 플랜트는 자신의 특기였던 엘비스 흉내 모창을 보여줬는데, 특히 엘비스가 ‘Love Me’를 부를 때의 목소리나 표정을 워낙 비슷하게 흉내내서 엘비스와 레드 제플린 멤버들을 포함한 모두가 폭소를 터트렸다고 한다.

  •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리처드 닉슨을 만난 자리에서 존 레논의 마약 상습 복용을 비난하는 일장 연설을 하고 자신을 마약 단속반장으로 임명하게 해달라고 해 백악관 직원들을 당황하게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닉슨은 그런 프레슬리를 아주 좋아해서 같이 박장대소를 했고 프레슬리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는 백악관 직원들에게 마약 단속반 배지를 만들어 선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는 "엘비스와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영화화되었다.

  • 딘 마틴의 팬이라 I don't care if the sun don't shine을 락앤롤 스타일로 커버했다.

  • 슈퍼스타가 된 후에도 입맛이 변하지 않아서, 햄버거, 콜라, 감자칩 등, 서민적인 정크푸드를 좋아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구운 식빵에 땅콩버터버터를 듬뿍 바르고, 썬 바나나, 튀긴 베이컨을 끼워 만든 샌드위치로 이는 일명 '엘비스 샌드위치'라고 불린다. 엘비스의 기일이 되면 그를 추억하며 직접 만들거나 카페에서 사서 먹는 사람들도 있다. 파운드케이크도 무척 좋아해서 하루에 한 개 이상은 먹어치웠다. 때문에 '엘비스 파운드 케이크'라는 레시피도 존재한다. 죽기 전까지 매일같이 크리스피 크림 도넛의 글레이즈드 도넛 한 상자를 해치웠다는 일화도 유명하고, 일반 도넛 외에도 젤리 도넛을 상당히 좋아하기도 했다. 이런 고칼로리 음식들을 한 번에 4~5개 이상 먹는가 하면, 한 끼에 땅콩버터와 버터 한 통을 다 쓸 정도로 폭식을 했다. 때문에 불균형하고 대식가스러운 식습관이 요절의 원인이 된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 엘비스와 가수 활동을 함께 한 동료 스태프들을 엘비스의 고향 이름을 따서 '멤피스 마피아'(Memphis Mafia)라고 부른다. 여기에서의 마피아는 범죄집단이란 뜻이 아니다. 의미구성원 간의 관계가 매우 밀접한 집단도 중립적인 의미에서 마피아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 앤디 워홀이 가장 관심을 보인 두 명의 남자 스타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제임스 딘. 워홀이 엘비스를 주제로 한 작품을 처음 만든 건 1963년의 일로 <플레이밍 스타>(1960)의 홍보사진을 소재로 삼았는데, 워홀의 작품 전체를 통틀어 전신이 다 나오는 모델은 엘비스가 유일하다.
사실 워홀은 슈퍼스타들의 불행에 가장 관심이 많았고, 그가 엘비스에게 집착하게 된 이유도 당시 신진 뮤지션들이 대두하면서 엘비스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MoMA에서 소장 중인 이 (1963)는 원래 워홀이 밥 딜런에게 선물했던 것인데, 잠재적 금전 가치를 짐작하지 못한 딜런은 이걸 다른 사람의 소파 하나와 맞바꿔버렸다. 딜런은 나중에 "매우 멍청한 짓이었다"며 후회했다.
의 프린팅 중 하나는 2023년 4월 현재 마릴린 먼로, 말런 브랜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다룬 작품들과 함께 역대 가장 비싸게 팔린 워홀 작품 10위권에 속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arhol-Double-Elvis.jpg}}} ||

  • 공연이 끝났음을 지시하는 "Elvis has left the building(엘비스는 이미 건물 밖으로 떠났습니다)"란 관용어구가 있다. 1956년 12월 15일 루이지애나주 박람회의 일환이었던 합동 공연에서 프로모터 호레이스 로건(Horace Logan)이 최초로 쓴 말이다. 공연 중간 순서였던 엘비스가 슈리브포트(Shreveport)의 허쉬 기념 경기장(Hirsch Memorial Coliseum) 무대에서 퇴장하고 한참 뒤에도 관객들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큰 소음을 내자 다음 공연 주자를 등장시키기 위해 말한 것인데, 이후 엘비스의 콘서트나 앨범 속에도 여러 번 이 말이 나왔다.
이 표현은 단지 공연 종료를 관객들에게 주지 시키는 데에만 국한돼 쓰이는 게 아니다. 토론 사회나 스포츠 중계 등에서 극적 퇴장이 이뤄진 경우에도 쓰며, 홈런공이 외야 펜스를 벗어났을 때도 써먹는 등 활용법이 다양하다. 심지어는 누군가가 사망했을 시에도 쓴다. 프랭크 자파는 1988년 앨범 "Broadway the Hard Way"에 "Elvis Has Just Left the Building"이란 곡을 수록한 바 있다. GTA 2 보너스 스테이지에서 앨비스 닮은 사람을 5초 안에 죽이는 데 성공하면 등장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 프로그래밍에 "엘비스 연산자(Elvis operator)"라는 게 있다. 코틀린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항 연산자의 축약형태로, 아래의 예시에서는 s가 null일 경우 빈 문자열을 value에 담는다.
    고개를 왼쪽으로 90도 돌린 뒤 s와 ""사이의 ?:를 쳐다보면 명칭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을 엘비스의 머리모양, :을 엘비스의 눈으로 간주하면 전체 모양이 엘비스의 얼굴과 얼추 비슷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lvis_operator.jpg}}} ||

  • '파사류(破邪流)'라는 태권도 계열의 특이한 무술을 배운 적이 있다. YMCA권법부 출신의 이강희[36] 사범이 창시한 무술이며, 단순히 명예단증을 받은 게 아니라 제법 오랫동안 진지하게 수련해 무려 7단까지 승단했다고 하며 특히 발붙여 옆차기를 잘했다고 한다. 90년대 초반 성우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에서 나오길, 이강희 사범에게 수고한다면서 비싼 고급차량을 새걸로 사줘 이사범이 나중에 회고하길,수련비보다 각종 선물로 후하게줬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lvis-and-karate-rare-image.jpg}}} ||

  • 엘비스의 군입대 소동에 영향을 받은 "바이 바이 버디"(Bye Bye Birdie)라는 뮤지컬이 있다. 1960년에 초연되었고, 자넷 리, 딕 반 다이크, 앤 마그렛 주연의 영화판으로도 만들어졌다.

  • 2022년 6월 24일 전기 영화 <엘비스>가 개봉했다. 오스틴 버틀러가 엘비스 역으로 나오며 <포레스트 검프>에서 엘비스에게 영감을 줬던 포레스트 검프 역의 톰 행크스도 이 작품에서 다시 엘비스와 재회한다. 배우의 재연 뿐만 아니라 영화 중간중간 실제 엘비스의 영상도 나온다. 영화와 주연 배우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엘비스가 소유했던 검은색 페라리 디노 308 GT4가 핫휠에서 1:18 모형으로 발매되었다.

  • 한국의 가수 남진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반쯤 벤치마킹한 사실도 유명하다.[37] 젊은 시절 인기 절정의 순간에 군복무를 했던 생애도 엘비스와 매우 닮아있다.[38]

  •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미국팀의 경기에서 미국인 관중들중 엘비스 분장을 한 관중이 생중계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당시 국내 해설진들도 이 관중을 언급하기도 했다.

  • 1998년 스웨덴에 사는 리사 요한센이 '나, 리사 마리 : 엘비스 프레슬리의 진짜 딸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발표했다. 자서전에는 엘비스의 외동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사실 가짜라는 주장이 담겨져 있었다. 자신은 1968년 2월 1일 엘비스 에런 프레슬리와 프리실라 앤 볼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멤피스에 위치한 엘비스의 저택인 그레이스랜드에서 보냈는데, 유산을 물려받을 성인이 될 때까지 피신해 있어야 한다는 엄마에 말에 이름을 세리 로젠퀴스트로 바꾸고 유럽에서 숨어 살았다는 것이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자신의 대역에 불과하다는 요지였다. 이 주장은 워낙 전세계에서 화제가 됐던 일이라 2015년 9월 6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
2011년엔 엘비스 유족들을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고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며 소송을 걸었는데# 그 뒤로는 갱신된 소식이 없다. 이미 자서전 출판사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DNA 검사를 거부해 고소를 당한 적이 있듯이, 엘비스 유족들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DNA 검사를 거부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말론 브란도와 서로의 성적 취향을 이야기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 브루노 마스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엄청난 광팬인 걸로 유명하다. 어릴 때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 가수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가수로 활동했으며, 허니문 인 베가스라는 영화에 리틀 엘비스라는 역할로 출연까지 할 정도로 브루노 마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광팬이었으며 브루노 마스가 음악을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그니처 헤어스타일도 2014년에 따라한 적 있다.
파일:bruno elvis.jpg

  • 「また逢う日まで(またあうひまで)」라는 노래를 히트시키며 1971년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은 오자키 키요히코(尾崎紀世彦, 1943~ )의 외모는 좋게 말해서 엘비스 프레슬리와 판박이이다.

10. 생존설[편집]


대중의 시각에선 죽기 직전까지의 행방이 묘연하게 느껴지며 생전의 높은 인기까지 겹쳐 '죽었다고 했으나 실은 살아있다'는 가설이 크게 번졌으며, 이런 류 음모론의 원조격이기도 하다. 통설은 도넛을 너무 좋아해 지나치게 살이 쪄 소속사에서 존재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1984년 무하마드 알리제시 잭슨 뒤에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사진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동영상, 역대 추정사진 모음 등 관련 영상들이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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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케팅용 홍보물까지 나왔다.

이제는 살아있다고 해도 89세의 상당한 고령이기 때문에, 요즘들어 이 음모론은 잦아든 편이다.


10.1. 엘비스 생존설을 채용한 작품[편집]


  • 음모론을 모티브로 한 어드벤쳐 게임 '왕을 찾아서'[39]는 아예 엘비스를 찾는 내용이다.
  • 소설 멋진 징조들에서는 묵시록의 네 기수중 하나인 기아가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굽고 있다. 그가 살아있는 이유는 디스크월드 세계에서 왕과 마법사는 죽음과 직접 접촉해야 죽는데, 죽음은 아직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댄 적도 없기 때문이다.
  •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는 포드 프리펙트가 소설 5권에서 지구로 귀환하던 중 레스토랑에서 술집 가수로 일하고 있었다.[40]
  • 영화 맨 인 블랙 1편에서는 K가 터널 천장에 붙어 달리는 차에서 엘비스의 노래(Promised Land)를 틀자 J가 엘비스는 죽었지 않냐며 딴죽을 걸고, K가 엘비스는 죽은게 아니라 자신의 고향 별로 돌아갔다며 언급된다. 즉, 영화에서는 외계인이라는 설정.
  •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는 불로불사를 얻는 대신 사회적으로 사망해야 하는데, 이 규칙을 가끔 어기고 있다고.
  • 겁스 무한세계에서는 무한경비대 특무부에 평행세계의 엘비스중 하나가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 겁스 판타지에서는 유르스에서 음유시인일을 하고 있다.
  • 샬레인 해리스의 로맨스 소설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에서 영안실로 실려온 엘비스 프레슬리를 본 뱀파이어가 팬심을 이기지 못하고 뱀파이어로 되살리고 만다. 엄청난 유명인이기 때문에 루이지애나의 뱀파이어들 모두가 그를 숨기고 '부바'라고 부른다.(소설 내에서 본명은 한번도 나오지 않으나 묘사는 틀림없이 엘비스이다.) 부활할 때 뇌세포가 파괴되어 지능이 낮아지고 고양이피만 마시게 되었다.
  • 부바호-텝이라는 영화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던 엘비스가 사실은 그를 따라 하던 모창 가수였으며, 진짜 엘비스는 삶에 회의를 느껴 모창 가수와 바꿔치기 한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세월이 흘러 거동이 불편해진 지금은 노인 요양원에서 과거 여자와 마약에 찌들어 가족을 소홀히 했던 자신을 후회하며 살아가고 있었으나, 노인들의 영혼을 빨아먹기 위해 나타난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가 나타나자 홀연히 그와 맞서 싸운다
배우는 브루스 캠벨. 여담으로 본작에서는 케네디 대통령도 생존해 있는 채로 같은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41]
  • 티미의 못 말리는 수호천사의 몇몇 에피소드에서도 등장한다. 뚱뚱한 엘비스이며 해변의 모래사장 밑 지하에 살고 있었다. 도넛을 좋아했다는 이야기에 걸맞게 도넛을 씹어먹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지하세계에 로큰롤 왕국을 세웠다고. 한번은 51구역에서 나타난 적도 있다.
  • 다이 하드 2에서는 공항에서 수상한 자들을 목격한 존 맥클레인이 경찰들에게 이를 알리려 다가갔으나 경찰 두명 중 한 명이 자신의 차를 견인시킨 재수없는 경찰이었고 그 경찰이 "뭘 봤는데"라고 묻자 말을섞기 싫다는 의미로 "엘비스... 엘비스 프레슬리를 봤소" 라고 얼버무리는 장면이 나온다(이는 아마도 엘비스의 생존루머를 빗댄 개그인듯)


11. 패러디[편집]


커리어 후반기에 자주 선보인 하얗고 펄럭거리는 옷과 리젠트 머리가 강렬한 인상을 남겨 여러 미디어에 패러디 혹은 오마쥬 되었고 코스프레 대상으로도 자주 쓰인다. 엘비스 닮은 사람 뽑기 대회가 있을 정도.

  • 의 노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는 엘비스 전성기의 음악과 빼닮았는데, 실제로 엘비스 사후 프레디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기려 엘비스풍으로 만든 헌정곡이다. 심지어 유튜브에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elvis presley라고 치면 엘비스가 진짜로 부른 것처럼 영상이 올라와있는데, 엘비스의 창법과 목소리를 카피해 부른 가짜 커버 영상. 그 많은 퀸의 명곡 중에서도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더불어 단 둘뿐인 빌보드 핫 100 1위 곡 중 하나다. 이 노래는 퀸이 라이브 에이드에서도 불렀는데 보헤미안 랩소디 라이브 에이드 씬에서는 짤렸다. 이후 출시된 DVD/블루레이에는 무삭제판 라이브 에이드 영상이 부록으로 들어 있다.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1989년 발표된 알래나 마일즈(Alannah Myles)의 노래 'Black Velvet'은 멜로디는 엘비스의 음악과 전혀 다르지만 제목부터가 엘비스의 환유이며 가사는 엘비스 찬가다. 엘비스는 벨벳 그림[42]이라는 장르에서 가장 각광 받아온 묘사 대상이며, 특히 검은 벨벳 위에 가장 많이 그려졌다. 또한 엘비스는 블랙 벨벳이라 불리던 미스 클레럴[43]사의 검은색 51D 염색약을 애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당한 명곡이다.
1987년 알래나 마일즈의 당시 애인이 VJ였던 시절 엘비스 프레슬리 사후 10주년을 취재하러 갔다가 버스에 가득 찬 팬들을 보고 이들에게 엘비스가 어떤 의미인지, 자신이 여기서 태어났으면 어땠을지를 생각하며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사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출생지인 미시시피 주 멤피스가 언급되거나, Slow Southern Style 등 엘비스의 느린 남부 스타일 블루스를 언급하고, 소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엘비스와 그의 춤을 표현하는 등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라면 금방 알아챌 수 있는 다양한 구절이 들어갔다. 노래는 크게 히트했지만, 당시 알래나 마일즈가 어렸던 탓에 소속사와 계약을 잘못 해서 쪼들리다가 2008년에나 정산을 받았다고 한다. 분위기를 보면 이해가 가겠지만 스트리퍼들이 춤을 출 때 배경음악으로 자주 사용되며, 이 점 때문인건지 Grand Theft Auto VLos Santos Rock Radio 채널에서도 나온다.

  • 트루 로맨스 - 주인공 클래런스의 환상 속에 여러 번 등장한다. 극 중 엘비스의 역할은 발 킬머가 맡았다.

  • 000 마일 - 주인공인 케빈 코스트너커트 러셀, 크리스찬 슬레이터 등이 엘비스 프레슬리 닮은 꼴 대회가 열리고 있는 라스베가스의 리베라 호텔 카지노를 털기 위해 엘비스 프레슬리 분장을 하고 흉내를 낸다. 사실 단순히 위장한 것만은 아니고 이들 스스로도 엘비스의 엄청난 팬이라 케빈 코스트너는 자신이 엘비스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후반부 총격전에서는 커트 러셀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케빈에게 너 진짜 엘비스 아들이냐?라고 물어볼 정도. 영화의 영어 원제도 '3000 Miles To Graceland'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생가인 그레이스랜드를 포함하고 있다.


  • 릴로 & 스티치 - 릴로가 워낙 좋아하는 가수여서 스티치가 자주 흉내를 낸다. 작품의 OST로도 많이 쓰인다.

  • 롤리팝 체인소 - 최종보스인 킬라빌리는 말년의 살찐 엘비스의 패러디.


  • 팝픈뮤직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티브로 한 이란 캐릭터가 1편부터 등장한다. 금발인 것을 제외하고 외모나 복장, 심지어 설정상의 생일도 1월 8일로 똑같다. 그리고 자칭 "음악의 제왕".

  • 포레스트 검프 - 엘비스가 검프네 집에서 머문 적이 있고 사실 엘비스의 춤은 검프가 버둥대는 모습을 따라했다는 설정.

  • 폴아웃: 뉴 베가스 - 뉴 베가스의 하층민 거주지인 프리사이드에서는 엘비스의 "숭배집단"[44] 갱단이 등장한다. 페이서의 옷은 Jailhouse Rock의 그 옷.



  • 야가미 이오리 - 음악이 사실상 생업에다가 복장을 바꿔도 특유의 리젠트 머리는 안 바꾸었다. 그리고 그가 뜨기만 하면 인기있는 컨셉을 생각하면...[45]

  • OKAWARI-BOY 스타잔S - 악역인 엘비스가 이름이나 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부터가 .... 다만, 키작고 뚱뚱하다.... 부하인 베이더 역시 이름봐도 다스 베이더를 그대로 패러디.


  • Grand Theft Auto: San Andreas - 가끔 사람들이 엘비스 복장을 하고 돌아다닌다. 라스벤츄라스에 있는 4 드래곤카지노 주변에 많다. 종류는 파란색, 회색, 흰색 엘비스 세 가지가 있다.

  • 1999년에 나온 컬트 삼총사(현 컬투) 3집 타이틀곡 <어설픈 엘비스와 살찐 마돈나의 사랑>에서 쓴 복장도 엘비스의 것을 차용한 바 있었다.

  • - 피스톤컵 대회장에서 코스프레한 차가 나온다. 리젠트 머리를 캠핑 트레일러로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 포인트.[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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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딘 쿤츠의 살인예언자 시리즈에서는 한동안 엘비스의 유령이 주인공 오드 토머스의 친구 겸 동료 뻘이 되어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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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썬즈 오브 아나키 - 주인공이 속한 폭주족 갱단 SAMCRO의 회계 담당 로버트 '바비 엘비스' 몬순은 부업으로 가수 활동도 하는데, 그때마다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을 착용한다. 그리고 작중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동양인 엘비스를 좋아한다고 언급된다.

  • 스타잔 - 엘비스: 작중 메인 빌런 중 1명인 카가미 마네코(국내명 고랑떼)의 외손자로, 외모로 보나 이름으로 보나 영락없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패러디.[47]

  • 안녕 자두야- 엘비스: 자두엄마인 김난향이 엘비스를 좋아하는 팬이었으며 아줌마가 된 지금까지도 엘비스를 좋아하는 팬이다. 사족으로 자두 세계관에서는 내한공연도 했다는 설정인데, 왠 중학교 체육관같은 곳에 의자 수십개 정도 갖다 놓은 수준이다. [48]

  • 주니토니 - 목성: 테마곡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공연장에서 패러디를 한다.


[1] 정확히는 King of Rock and Roll이지만 줄여서 King으로 불린다.[2] 이들은 후에 조니 브루넷 트리오로 이어진다.[3]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엉덩이를 흔드는 춤을 볼 수 있다.[4] 로큰롤이란, 명칭부터가 한국어로 치면 떡치기 정도에 해당하는 속어로 통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1950년대 중반 TV 공연 영상들 상당수가 부자연스럽게 상반부만 보여서 몸을 흔드는데, 당시 검열이 엄격하던 미국에서는 하반신을 흔들면서 춤추는 행위를 외설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흑인 음악과 퍼포먼스를 선보인 최초의 백인 아티스트인 셈. <포레스트 검프> 영화판에서도 나오는데 시내의 TV가게에서 엘비스가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Hound Dog를 부르는 장면이 TV에 방영되자 포레스트의 어머니가 어린 포레스트의 눈을 가리면서 "저건 아이들 보는게 아니야." 라고 말하며 급히 떠나는 장면도 있다. ##. 에드 설리번 쇼에서 보여준 다리 흔들기.[5] 최종계급은 Sergeant이다. 국방부 정식 번역으로는 병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하사에 대응되는 계급이다. 의무복무 기간 중에 이루어진 특진의 연속으로 얻은 계급인데, 당시 대부분의 징집병들이 일병이나 상병(준부사관)이 실질적인 진급 상한선이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국방부의 높으신 분들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엉덩이를 흔드는 춤을 볼 수 있다.[7] 엘비스 본인도 외가쪽에 체로키족 피가 흐른다. 이 영화 감독은 할리우드 B 무비 명장으로 불리는 돈 시겔이다.[8] 이 당시 엘비스의 몸무게가 150kg였는데, 부검에서 나온 대변만 20kg이 훨씬 넘었다.[9] 불법 마약이 아닌 각성제, 진통제와 같은 치료 목적의 약물을 말하며, 엘비스는 말년에 거의 암말기 환자와 맞먹을 정도의 약물을 사용했다.[10] 이때문에 일각에서 큰 성공을 거둔 예술인에게 병역 특혜를 주자는 주장에 대한 반박 사례로 인용하기도 한다.[11] 트레일러 파크. 집을 살 능력도, 집세를 제대로 낼 능력이 없는 빈민들이 사는 곳이다. 미국 빈민의 상징이다.[12] 인기 톱스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 유산을 가지고 대판 싸우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 없이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조용히 죽은 엘비스의 아버지는 어떻게 보면 매우 심약하고 의외로 가정적인 가치관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13] 결혼 전 이름은 프리실라 앤 볼리외.[14] 공교롭게도, 엘비스의 전기 영화가 개봉한 2022년 7월 13일은 벤자민의 두 번째 기일이다.[15] 기사[16] 판매량 부분은 오류가 있는데 엘비스의 공식 판매량은 2억 3천만장 정도이고 비공식으론 약 5억장으로 추정된다. 이는 솔로 가수 중엔 1위이며 전체론 비틀즈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판매량이다.[17] 물론 엘비스는 50년대 당시 초창기 로큰롤을 현재의 록 음악으로 확실히 정의시키거나 더 나아가 세부장르화시킨 인물은 아니다. 엘비스의 역할은 로큰롤을 말 그대로 전세계적으로 폭발적 '유행'시킨 아이콘이었으며 로큰롤 장르를 더 발전시키고 현재의 록 음악으로 완전히 정립시킨 아티스트들은 그 전설적인 비틀즈, 롤링 스톤즈와 같은 60년대 밴드 아티스트들을 통해서이다. 엘비스의 중요성은 비틀즈를 비롯한 후대의 아티스트들의 어린 시절에 록 음악이 뭔지를 알게끔 들려주고 보여준 아이콘이자 첫 선구자의 역할이었다는 점이다.[18] 한국으로 치면 조용필같은 대중음악의 황제이자 영원한 아이콘 대우를 받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일종의 영구결번같은 개념.[19] 반면 비틀즈, 밥 딜런과 함께 록 음악을 발전시킨 롤링 스톤스는 엘비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20] 대표곡인 Fight the Power에서 인종차별주의자인 존 웨인과 함께 극딜한다.[21] 백인 래퍼 중 가장 유명한 에미넴 역시 흑인이 주류인 힙합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Without Me'에서 본인이 흑인 음악을 이기적으로 써먹어서 자신의 주머니를 부풀렸다며 엘비스 이래로 최악이라고 자학드립을 친다.[22] 그런데 마이클 잭슨은 엘비스의 딸과 결혼했다...이혼하긴 했지만.[23] 엘비스는 자기 운전수에게 캐딜락도 펑펑 선물하던 사람이다.[24] 영화 <엘비스>의 사운드트랙 [25] 엘비스의 생전 마지막 히트곡이다.[26] <감옥록>[27] <열정의 무대>[28] <엘비스 프레슬리의 블루 하와이>[29] <엘비스 프레슬리의 박람회에서 생긴 일>[30] <아카풀코의 추억>[31] <카니발>[32] <런던 대소동>[33] <엘비스프레슬리의 소녀는 괴로워>[34] <엘비스>[35] 당시 로버트 플랜트는 유부남이었다. 사실 당시 대다수의 록스타들은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그루피들과 바람피고 다녔다.[36] Kang Rhee,1938 ~ 2019.[37] 당시 경쟁자였던 나훈아톰 존스를 벤치마킹했으나, 한국인 기준으로 볼 때 외형이나 노래 면에서 엘비스만큼 특색 있는 가수가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았다.[38] 엘비스는 서독에 주둔하였고 남진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갔다는 점도 닮았다.[39] 국내에 알려진 제목은 '황제를 찾아서'[40] 포드의 말로는 자기 의지로 따라온 듯.[41] 본인 말로는 당시 저격당하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는데, 존슨 부통령이 보낸 비밀요원에게 납치당해 흑인으로 피부색을 개조당하고 양로원에 처박혀졌다고 한다. 게다가 이사람의 머리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한 같은 곳에 흉터까지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사람이 정말로 케네디 대통령인지, 아니면 정신병자인지 정확히 짚고넘어가지를 않으니, 해석은 관객의 몫.[42] Velvet painting.[43] Miss Clairol.[44] 엘비스에 관련된 것들을 일종의 종교적 심볼로 바라보고있다고 한다.[45] 사실 95시절의 일러스트를 보면 알겠지만, 그냥 엘비스를 보고 그린거나 마찬가지다... 다만 화풍에 따라 가린 비대칭 머리로도 보이기 때문에 리젠트라고 말하기엔 좀 애매한 헤어스타일이다.[46] 실제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가수로 데뷔하기 전 트럭 운전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47] 유감스럽게도 체형은 비만화가 진행되던 말년의 엘비스를 더 닮았다...[48] 어찌 실제로 한국을 방문한 이 분의 위문공연 장소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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