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해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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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 부인
엠마 해밀턴
Emma, Lady Hamilton


파일:1621981879.jpg

이름
엠마 해밀턴
Emma Hamilton
출생
1765년 4월 26일
잉글랜드 체셔 주 네스턴
사망
1815년 1월 15일 (향년 49세)
프랑스 칼레
배우자
윌리엄 해밀턴 경 (1791년 결혼 / 1803년 사망)
자녀
엠마 케어루, 호레이샤 넬슨

1. 개요
2. 생애
2.1. 신사들의 정부 시절
2.2.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이 되다
2.3. 호레이쇼 넬슨과의 염문
2.4. 해밀턴 경과 넬슨의 죽음
2.5. 초라한 말년
2.6. 사망
3. 기타



1. 개요[편집]


영국의 예술인. 처녀 시절의 이름은 에이미 라이언(Amy Lyon), 엠마 하트(Emma Hart)이다. 18세기 말 ~ 19세기 초 당대 영국 최고의 미녀로 꼽혔다. 영국의 구국영웅 호레이쇼 넬슨과의 염문이 유명하다. 초상화가 정말 많은데 대부분 조지 롬니(George Romney, 1734~1802)가 그린 것으로 엠마는 그의 작품 활동에 영감을 주는 여성이었다.[1] 상단의 그림은 1782년에 당시 찰스 그레빌의 시골집에 있던 17세의 엠마를 그린 롬니의 작품이다.


2. 생애[편집]



2.1. 신사들의 정부 시절[편집]


그녀는 영국 체셔 네스턴 인근 네스 스완 코티지(Swan Cottage)에서 에이미 라이언(Amy Lyo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생후 2개월 때 사망한 대장장이 헨리 라이언(Henry Lyon)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765년 5월 12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나중에 엠마 하트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엠마의 어머니는 엠마를 데리고 외할머니댁으로 가게 되는데, 엠마가 외할머니 댁으로 갔을 당시 외할머니 나이가 벌써 60세였다. 당시로는 당장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딱 봐도 알겠지만 여유있는 집안이 아니었던 관계로 엠마는 12살이 되던 1777년에 체스터에서 일하는 외과의사인 호노라투스 레이 토마스 박사의 하워든 집에서 하녀로 일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달 후 그녀는 다시 실업자가 되었고 몇 달 후 마차를 타고 런던으로 가서 런던 중심지의 한 저택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에도 나름대로 선진국이었다고는 하지만, 영국의 아동 노동 실태와 빈민 생활사는 척박했다. 12살부터 부잣집 부엌데기로 일하던 엠마에게 인생을 바꿀 사건이 찾아오는데, 같이 일하던 하인 중에 제인 파월(Jane Powell)이라는 배우지망생이 하나 있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대로 부엌데기로 살다가 출신 성분 때문에 하녀장도 못 될 상황이었던 엠마는 이 배우 지망생을 따라서 여러 연극 리허설에 참여하는데, 이게 잘 되어서 코벤트 가든에 있는 왕립 극장(Theatre Royal Drury Lane)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 이 극장에는 영국 최고의 예술가였던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도 이곳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당시 런던에 제임스 그레이엄(James Graham)이라고 스코틀랜드 출신 돌팔이 의사가 하나 있었는데, 자신의 직업을 프로섹스학자(Sexologist), 의사(Quack doctor)라고 칭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충 성 의학인데 이 인간 하던 짓을 보면 그냥 지금 기준으로는 좆문가였다. 런던 한복판에 "건강의 신전(Temple of Health)"이란 사이비 교단 비스므리한걸 차려 놓고 예쁘고 젊은 모델들이나 귀족 부인들이 발가벗고 춤추거나 모델 포즈를 취하게 한 후, 방문 환자들에게 별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데 가장 인기있었던 게 "천상의 침대"라고 고객이 침대에 누워 모델들이 발가벗고 춤추는 걸 보고 있으면 침대로 약한 전기충격을 주어서 누워있던 고객이 쾌락을 얻게 하는 거였다. 문제는 이게 대단히 세련된 상류계층 문화가 되었고 이 사기꾼은 이게 몸에 좋은 거라고 약을 팔아서 불임 커플들이 '불임 치료 해주세요.'라고 찾아가면서 제임스 그레이엄은 영국 사교계의 스타가 된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십대 초반의 돈 없고 빽 없는 연습생이었던 엠마에겐 선택지는 없었다. 엠마는 에이미 라이언(Emy Lyon)이란 이름으로 건강의 여신 헤베(Hebe Vestina)역으로 모델일을 하면서 이런 짓을 해야 했다.[2]

1780년 엠마가 15살이 되자 엠마의 재능을 알아봤던 해리 페더스톤하우 준남작(Sir Henry Fetherstonhaugh)[3]이라는 작자가 자기는 예술의 수호자라며 자기 저택에서 파티를 열 때 춤을 추고 모델이 되어 달라며 엠마를 데려오는데, 저택에서 파티가 열리면 식탁 위에서 발가벗고 춤추는 게 엠마가 주로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해리 경은 엠마를 자기 정부(mistress)로 칭했는데 당시 엠마의 나이는 고작 15세였다. 그러나 해리 경은 당연히 엠마를 부인으로 맞을 생각도, 애인으로 대해줄 생각도 없었고 파티, 사냥, 술 등 돈이 제공할 수 있는 쾌락에 빠져 엠마에게 무관심하게 대했다.[4] 엠마는 곧 해리 경의 저택에서 열리던 파티에서 자주 봤던 해리 경의 친구인 찰스 그레빌(Charles Francis Greville)과 눈이 맞는다.

찰스 그레빌은 워윅 백작가의 둘째 아들인데 상류사회 사교 때문에 해리 경의 파티에 참가하던 인물이었다. 평가는 멍청하지만 신실하다(dull but sincere)라고 하는데 판단은 알아서 하길 바란다. 찰스 그레빌의 집안은 보통 귀족 가문도 아닌 당대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고, 그레빌의 아버지인 워윅 백작은 의회의 멤버로서 카리스마로 집안을 휘어잡으니 찰스 그레빌같은 방탕한 아들이 나올 만 했다. 이제야 좀 인생 좀 풀리나 싶었지만 불행히도 1781년 6월에 엠마는 16살의 나이로 자신의 고용주인 해리 경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당시 해리 경의 나이는 27세. 해리 경은 엠마도 그녀의 아이도 책임질 생각이 없었고, 엠마는 자신의 옆에서 가만히 있던 그레빌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레빌은 아이가 태어나면 자기 집에서 키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엠마를 자기 정부(Mistress)로 맞아들인다. 이렇게 태어난 엠마의 사생아인 엠마 케어루(Emma Carew)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은 엠마를 키워줬던 그녀의 외할머니의 집에 맡겨지게 된다. 이때 당시 엠마의 외할머니는 77세였다.

그러나 찰스 그레빌도 좋은 인간은 아니어서 엠마를 런던 외곽 시골의 작은 마을에 있는 그레빌 가문의 시골 별장(Paddington Green)인 작은 집에서만 지내게 했다. 또한 어디서 평민 여자를 데리고 와 첩으로 삼았다는 구설수를 듣기 싫었는지 엠마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리를 극도로 싫어했으며, 엠마에게 연습생 시절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고 사교계를 멀리 하고 단정한 옷을 입게 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이때 엠마의 나이는 17세~18세였다.

물론 엠마가 자진해서 조용한 생활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엠마를 데려온 그레빌은 엠마가 그전까지 쓰던 연습생 시절 이름 대신 원래 자신의 이름과 성인 엠마 하트(Emma Hart)을 쓰도록 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치며 단정한 옷을 입게하고 집에 숨겨두어 사회생활을 멀리 하도록 한다. '과연 평민 연습생 따위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신사계급의 나라 태생인 영국인이 하는 짓이냐?' 라고 반문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엄연히 18세기라는 한계점을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전근대적인 시대였던 18세기에서 조선은 아직 신분제가 존재하던 영조, 정조 시대였다. 이쯤되면 눈치챘겠지만 그레빌 같은 신사(Gentry) 계급이 엠마 같은 모델 겸 댄서를 집에 두는 이유 중 하나는 고상한 상류사회로서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과시하기 위함인데, 말이 그렇지 사실은 자기 저택에 데려다가 정부로 쓰면서 가끔 파티를 열어서 친구들을 초대해 놓고 나가서 노래 부르고 춤 추게 하는 기생 출신 애첩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엠마를 자기 취향에 맞게 가르친 그레빌은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하기 시작하는데, 그레빌이 초대한 친구들 중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 조지 롬니가 있었다. 롬니는 당시 새로운 젊고 아름다운 모델을 찾고 있었는데 롬니에게 엠마는 완벽한 모델이었고, 그레빌은 엠마한테 모델 일을 시키고 수수료를 떼먹는 짓을 시작한다. 롬니는 엠마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들이 인기를 끌면서 엠마는 당대 최고의 미녀로 떠오른다

1783년에 생각 없이 돈을 막 쓰다가 자금난에 허덕이기 시작한 그레빌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돈 많은 아내를 구하는 것이었다. 신사(Gentry) 타이틀과 인맥만으로 부잣집 딸래미를 아내로 맞아 자금을 충당하는 건 당시로는 흔했던 일이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신사(Gentry)는 예의바른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계급 자체를 뜻하기도 했다. 곧 그레빌은 돈 많은 미혼 상속녀 헨리에타 미들턴(Henrietta Middleton)을 만난다. 그레빌은 애초에 엠마의 미모에 빠져 엠마를 받아들였지만 자신이 엠마의 애인으로 알려지는 것은 싫어했다. 엠마를 그린 롬니의 작품들이 유명세를 탈 때도 그레빌은 "저는 그런 여자 안 만나요" 라고 말하고 다녔고 곧 엠마를 치울 방법을 궁리한다.


2.2.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이 되다[편집]


윌리엄 해밀턴 경은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상관으로 유명한 인물이였다. 사실 실질적인 지휘는 넬슨에게 모두 맡기고 자신은 바지사장이나 하면서 넬슨에게 작전자유를 보장해주었던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는 육군 장교로 참전했었고 복무 이후 나폴리 대사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아내 캐서린 해밀턴(Catherine Hamilton)과는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는 금슬 좋은 관계였다. 두 사람은 열과 성을 다해서 서로를 사랑하며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데, 결혼 생활 22년만인 1782년에 부인 캐서린이 병으로 먼저 사망해 버린다. 아내와 사별하고 고향도 아닌 머나먼 나폴리에서 은퇴를 앞두고 있던 윌리엄 해밀턴 경은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식도 없었기에 더욱 외로워했다. 이렇게 아내가 죽은 후 4년 동안 심적으로 매우 힘들어하던 윌리엄 경은 55세가 된 어느날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 런던에 들리게 된다.

런던으로 잠시 돌아온 윌리엄 경은 위에서 서술된 자기 누나의 아들인 조카 찰스 그레빌을 상속자로 선정한다. 그러나 그레빌은 자신을 상속자로 선정하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고향 영국으로 돌아온 외삼촌에게 자신의 방탕한 삶을 정리하고, 부잣집 상속녀와 결혼하기 위해 엠마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해밀턴 경에게 엠마는 내가 예의범절도 다 가르친데다 내가 부잣집 딸래미랑 결혼만 하면 바로 다시 데리러 올거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면서 말이다. 당시 엠마는 젊은 상류층 신사가 데리고 있던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는데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이지 않았고 무슨 상황인지 굳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도 빤히 보였지만, 이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싶었던 윌리엄 해밀턴 경은 조카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엠마를 데려오기로 한다.

1786년 4월 26일에 엠마는 21살 생일날에 어머니와 함께 나폴리에 있는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저택에 도착한다. 윌리엄 경은 거진 자신의 딸뻘이었던 엠마가 안쓰러웠던지 개인교사를 고용해 엠마에게 이탈리아어와 노래를 가르친다. 당시 젠트리 여자들이 배우던 대표적인 것들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정말 딸처럼 대했던 셈이다.

그레빌은 엠마를 맡기면서 "다시 데리러 올게!"라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엠마는 그레빌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잘 대해주던 해밀턴 경의 정부(Mistress)가 되기로 한다. 그렇게 5년 후인 1791년에 61세의 윌리엄 해밀턴 경은 국왕의 허락을 받아 26세의 엠마와 결혼한다. 젊은 시절 국가를 위해 군복무도 했고 평생 국가를 위해 헌신한 노귀족이 인생 말년에 행복을 찾겠다는데 말릴 사람은 없었다. 신분도 명성도 나이도 맞지 않는 부적절한 관계임에도 결혼 허락을 받은 윌리엄 해밀턴 경과 엠마는 런던의 한 작은 교회에서 조용히 식을 올린다.

한편 엠마를 떠넘긴 1786년부터 5년간 아무 소식도 없었던 찰스 크레빌은 엠마가 "레이디 해밀턴"이 되자 다시 나타난다. 그레빌은 엠마를 받아들인 후 엠마의 사생아(Emma Carew)의 양육비도 자신이 부담하고 있었는데, 외삼촌이 엠마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양육비를 윌리엄 해밀턴 경에게 떠넘긴다. 당시 엠마의 사생아는 어느 학교의 교장 부부가 키우고 있었는데, 그레빌은 윌리엄 해밀턴에게 '이제 이 아이도 외삼촌의 양녀니까 외삼촌 저택으로 데려가는게 어때요?' 라고 했다. 이때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윌리엄 해밀턴 경은 양육비는 떠맡았지만 엠마의 사생아를 나폴리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오지는 않았다.

감이 왔겠지만 윌리엄 해밀턴 경도 소설 속 주인공 마냥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엠마의 사생아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화두를 돌리거나 모르는 척을 했다. 또한 평민인 엠마를 같은 젠트리 계급처럼 대하며 정실부인으로 받아들이고 "해밀턴 부인"의 명칭을 주었지만, 잠시 데리고 있을 목적으로 20대의 젊은 엠마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당시 50대였던 윌리엄 해밀턴 경이었다. 해밀턴 경의 입장에선 엠마는 사랑했지만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가 껄끄러운 엠마의 사생아조차 사랑하지는 못했던 모양. 어쨌거나 엠마의 사생아는 이후에 평민으로 사무직 비서나 하며 살아서였는지, 돈 좀 있으면 개나소나 그려서 남긴다는 초상화 한장도 없다.

더군다나 사실 윌리엄 해밀턴 경이 보호하고자 했던 대상은 엠마가 아니라 조카였던 찰스 그레빌이였다. 결혼 당시 엠마는 26세였고 해밀턴 경은 60세(...)였으며, 위에서도 언급했다싶이 평생 해로했던 부인과 사별한 이후였다. 누가 봐도 조카의 추문을 덮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으며 불순한 목적으로 엠마를 떠안은만큼, 해밀턴 경도 명색에 자신의 아내인 엠마에게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일 엠마가 넬슨과 바람을 피우든 말든 무관심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윌리엄 해밀턴 경은 엠마를 정실부인으로 받아들이고 열과 성을 다해 그녀를 지원했다. 나폴리 대사로서 각종 행사에 데리고 다니며 당당하게 엠마를 자신의 부인이라고 소개하고 다녔는데, 당대 영국 최고의 미인으로 유명했던 엠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들은 엄청났다. 여러 사교 행사에 다니면서 곧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엠마는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는데, 나폴리 왕국의 왕비였던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5]와도 매우 친해졌으며 예술가, 가수로 여러 파티와 공연에 출연하며 더욱 더 큰 인기를 끌었다. 대표작으로는 "Attitude"가 있는데 이것도 나체로 춤추는 꽤나 외설스러운 공연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엠마와 만났던 사람의 일기에서도 그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엠마에 대해 "친절하고 자상하며 아름답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다"라고 묘사한다.(Elizabeth Wynne)


2.3. 호레이쇼 넬슨과의 염문[편집]


당시 유럽은 프랑스 혁명정부와 이를 막으려는 영국 정부의 대립으로 난장판이었다. 미국 독립전쟁 이후 발령대기 상태로 백수로 집에서 부인 프랜시스 "패니" 넬슨(Frances "Fanny" Nelson, 1758~1831)과 지내던 호레이쇼 넬슨은 다시 소집되어 64문급 소형 전열함 아가멤논의 함장이 되어 지중해 함대로 배치되었고, 1793년, 넬슨이 35세, 엠마가 28세일 때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저택에서 만나게 된다. 나폴리에 5일간 머물며 지원을 받은 넬슨은 그 후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맹활약을 하며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린다.

엠마와 윌리엄 해밀턴 경의 사이는 매우 좋았던 걸로 보인다. 엠마는 윌리엄 해밀턴 경을 "최고의 남편이자 친구"라고 표현했지만 엠마는 윌리엄 경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다. 정황상 윌리엄 해밀턴 경은 발기부전이거나 무정자증이거나 둘 중 하나였던 듯. 이 때 엠마는 둘 사이에서 아이가 안 생기니 영국에 있는 자기 사생아를 나폴리로 데려오자고 했지만 윌리엄 경은 이를 거절했고, 나중에 사생아가 나이가 차자 영국 내에서 남편감을 찾아달라는 부탁도 거절한다.

이후 넬슨은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박살내고 나폴레옹이집트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하여 영국의 영웅이 되었다. 프랑스 해군을 박살낸 넬슨은 엠마와 처음 만난지 5년 후인 1798년, 생일 전에 나폴리로 돌아온다.

그 5년동안 넬슨은 갖은 고생을 다 했던 터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넬슨은 전투에서 팔 한 쪽과 다리 한 짝을 잃었고 이는 거의 다 빠졌으며, 천식인지 뭔지 모를 지금으로서는 알수 없는 기침병에 고생하고 있었다. 장교이고 젠트리 계급이라 사정이 나았다지만 넬슨 역시 12살 때부터 해군에서 근무했다.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천성적인 배멀미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차갑고 습한 바다에서 야채도 제대로 못 챙겨 먹으며, 바닷물보다 짜서 바닷물에 담가놓으면 좀 덜 짜지는 염장고기를 맹물에 삶아 먹고 비스킷을 먹는 생활을 영유했다. 게다가 이끼가 끼거나 썩어가는 물에 술을 타서 먹으며 수십년을 보내다보니 넬슨은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하여간 모두의 환대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나폴리로 돌아온 넬슨은 패니의 친아들이자 자신의 양아들 조사이아(당시 18세)[6]를 데리고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저택에 머문다. 엠마는 넬슨이 도착하기 전에 사랑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데, 넬슨이 도착하자 달려와 안기며 "Oh God, Is it possible?" (세상에, 지금 일어나는 일이 사실인가요?) 라고 외치고 기절한다. 이후 엠마는 자기 남편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저택에 머무는 넬슨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며 곁을 떠나지를 않았다. 급기야 곧 다가올 넬슨의 40세 생일(9월 29일)을 위해 손님만 1,800명 가량을 초대한 파티를 연다.[7]

이 파티에서 자기와 넬슨의 관계를 마음껏 과시한 엠마는 이때부터 넬슨의 비서로 활동하며 사교계 다른 사람들과 소개 등을 맡아 정치적 후원자가 되었다. 곧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기보단 이제 눈치 볼일이 없어서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엠마의 남편 윌리엄 해밀턴 경(1798년 당시 69세)은 이 관계를 오히려 응원 해줬는데, 자기 저택에서 엠마, 넬슨과 함께 살면서 "우리는 셋이 모여 하나다!" 같은 소리를 했다. 윌리엄 해밀턴 경은 이미 예전부터 50대에 은퇴하기를 원했었고 군복무로 배에서 생활하다보니, 건강도 급속도로 악화되던 시기인데다 당시 수명을 생각했을 때 당장 내일 사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였다. 넬슨과 윌리엄 경도 불편한 감정 없이 서로를 존중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캔들은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는 터라 곧 런던에서는 나폴리에서 넬슨 제독과 영국 최고의 미인 엠마 해밀턴과의 공개적인 불륜이 핫토픽으로 떠올랐다. 젠트리 출신도 아닌 평민 연습생으로 젠트리 신사들의 파티에서 벌거벗고 춤이나 추던 엠마가 귀족에다 국가 영웅인 넬슨을 유혹했다면서 온 나라가 웅성댔다. 하지만 엠마 해밀턴 역시 나폴리의 왕비와 친밀한 사이인데다[8]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되어 넬슨에게 정치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큰 손이 되어 있었기에 이 스캔들이 본격적으로 불타오르지는 못했다. 1799년 나폴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아일랜드 반란으로 정신 없던 영국 본토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넬슨이 반란을 진압하는데도 엠마가 중재자로서 큰 역할을 한다.[9]

그러던 중 지난 10년간 매년 본국에 보낸 자신을 은퇴/전역시켜 달라는 해밀턴 경의 요구가 1800년에 받아들여지고, 넬슨 제독 역시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임신한 엠마도 같이 런던으로 돌아왔다. 런던으로 돌아온 넬슨은 엠마와 함께 런던의 한 호텔에 머물렀다. 넬슨의 정실부인인 패니와 노쇠한 넬슨의 아버지는 집에서 축하파티를 여니 어서 집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어서 직접 넬슨과 엠마가 머무는 호텔로 찾아와 그곳에서 함께 식사를 같이 한다. 여기서 패니는 엠마가 넬슨의 아이를 임신한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어쨌든 이 관계는 곧 신문에서 대서특필로 보도되고 온 영국과 전 세계가 이 토픽으로 핫하게 불타오른다. 넬슨이 없는동안 가정을 돌보고 헌신했던 정실부인 패니는 이 관계를 부정했지만, 엠마는 이미 정치적 영향력으로도 대스타가 되어있던 터라 여론은 엠마 편이었다. 영국의 모든 여자들의 엠마 해밀턴의 옷차림, 스타일을 따라하려고 했고, 넬슨은 패니를 아예 무시해버린다. 이렇게 불편한 런던 생활이 이어지다가 12월에 넬슨이 부제독(Vice Admiral)로 승진하고 다시 원정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자, 패니는 자신을 택하던지 엠마를 택하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에 넬슨은 한치 망설임도 없이 엠마를 택하고 패니와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한편 넬슨의 아이를 임신한 엠마는 이미 사랑하는 남편인 윌리엄 경마저 자신의 사생아를 무시하는 것을 지켜봤기에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초조해했다. 심지어 윌리엄 경은 넬슨과 만나기도 전부터 엠마에게 사생아의 존재를 숨기라고 말할 정도였고, 엠마도 이를 따라 넬슨에게 자기 사생아의 존재를 비밀로 했다.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이 될 지도 모르겠다.

결국 1801년 1월에 넬슨과 엠마의 아이가 태어난다. 엠마는 넬슨과의 부적절한 관계, 자신의 출신성분 때문에 이 두번째 자식마저 사회로부터 거부당할까 불안했는지 이 딸의 이름을 넬슨의 이름을 그대로 따 호레이샤 넬슨(Horatia Nelson Thomson)[10]이라고 지었다. 넬슨이 출정한 이후에도 엠마는 예술가이자 가수로서 런던의 유명한 극장들에서 공연을 했다. 이때 영국의 왕세자로서 훗날의 조지 4세가 되는 웨일스 공이 엠마에게 추근덕거렸다. 조지 4세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지만 그의 사생활은 문자 그대로 개막장이었다. 오입질과 난봉꾼 생활로 왕자 시절 왕실 예산의 절반이 넘는 빚을 진 적이 있으며, 입헌군주제가 자리잡은 영국의 왕세자로서 이례적으로 계속 정치에 개입하는 막장 행태를 보였다.

그렇다고 왕세자의 면전에다 꺼지라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엠마는 어쩔 수 없이 예의 갖추는 선에서 웨일스 공을 만나게 되었는데, 넬슨이 이를 질투하자 보다못한 해밀턴 경이 엠마는 너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편지까지 써야 할 상황이었다. 다음 해 2월 넬슨은 런던으로 돌아와 자기 딸을 만났다. 이때쯤 엠마는 넬슨의 형제에게서 고맙다고 편지도 받는 등, 넬슨 집안에서도 어느정도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넬슨이 나가있을 때에도 엠마와 넬슨은 항상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엠마는 넬슨에게 받은 편지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넬슨의 사실혼 아내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엠마는 조심스레 자신의 사생아의 존재를 넬슨에게 밝히는데, 뜻밖에도 넬슨은 엠마의 사생아 엠마 케어루(Emma Carew)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같이 지내게 했으며 타인에게는 "엠마의 친척(Emma Hartley)"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넬슨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넬슨은 엠마의 37세 생일파티를 여느라 아버지를 무시했고, 그렇게 엠마의 37세 생일날 넬슨의 아버지는 쓸쓸히 혼자 임종을 맞는다. 넬슨은 나중에 자기 아버지 장례식도 가지 않았다.

사실 엠마는 넬슨가에 인정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1800년 엠마는 넬슨의 고향으로 가 넬슨의 부인 패니가 1787년 이후 13년간 보살펴왔던 시아버지 에드문드 넬슨(당시 78세)을 모셨고 넬슨에게도 자기가 아버님을 모시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넬슨은 10일만에 고향을 떠나 다시 엠마와 함께 노포크에 있는 해밀턴 경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후 엠마는 넬슨의 누나와 여동생들의 자녀들의 학비를 대주고 조카들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넬슨이 없는 동안 집안을 관리하며 넬슨가의 믿음과 지지를 얻어냈다.

결국 넬슨이 자기 아버지 임종도, 장례식도 참가하지 않았던건 엠마보다는 넬슨의 문제가 컸던 걸로 보인다. 넬슨은 사실 해군 특성상 땅 밟고 생활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집에 없는 때가 더 많았기도 했고...1801년 넬슨은 교회에서 자기와 엠마의 딸 호레이샤 넬슨 톰슨의 세례를 받았는데, 여기서 자기 딸을 나폴리에서 자기가 거두어들인 고아로 기록한다. 애초에 엠마는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정실부인이고 넬슨과의 관계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던 불륜 관계였기 때문. 이쯤되면 눈치챘겠지만 넬슨도 앞서 엠마가 만난 남자들보다야 좀 나았을지도 몰라도 인간적으로는 막장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다. 역시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이 될 것이다.


2.4. 해밀턴 경과 넬슨의 죽음[편집]


그렇게 엠마가 당대의 패션스타이자 예술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국의 대스타로 살아가던 중, 1803년 갑작스레 윌리엄 해밀턴 경(당시 73세)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4월 6일, 윌리엄 해밀턴 경은 엠마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들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넬슨, 엠마, 윌리엄 해밀턴 경의 관계는 돈독했고, 엠마 역시 레이디 해밀턴으로서 자기 남편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런데 엠마와 넬슨, 윌리엄 해밀턴 경이 머물던 집은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저택이다. 윌리엄 해밀턴 경은 사별한 첫부인과도, 엠마와도 자식이 없었고, 엠마를 원래 자기 정부(Mistress)로 데리고 있던 자기 외조카 찰스 그레빌을 상속자로 선정한다. 그레빌은 자기 외삼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4월 6일) 찾아와서 저택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4월 23일에는 엠마를 저택에서 쫓아낸다. 그런데 엠마는 13살부터 남들의 정부(mistress)로 살아오면서 한번도 돈 때문에 허덕인 적이 없었다. 이런 엠마가 저택을 당대 최고의 예술의 장으로 만들었었으니 지출이 어마어마했다. 뺏고 보니 저택에 달린 빚이 장난이 아닌지라 그레빌은 엠마에게 오만 욕을 다 했다. 설상가상으로 윌리엄 해밀턴 경은 지난 1795년, 엠마의 도움으로 나폴리에서 대사관으로 했던 첩보 활동 등에서 자기의 역할을 부풀리고, 엠마의 역할은 보고서에 한 줄도 적지 않았었다. 이로 인해 영국 정부는 엠마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것을 거절한다.

엠마는 하는 수 없이 넬슨과 함께 구입했던 넬슨 명의로 된 저택으로 가는데, 불륜관계인지라 주소를 따로 해야 해서 넬슨의 저택 옆에 작은 집을 사 주소지를 그곳으로 등록한다.

자기 집안이 이렇게 터져나가는 동안 넬슨은 지중해 함대 사령관(Commander-in-Chief)이 되는데, 1803년이면 나폴레옹이 한창 전 유럽을 휘젓고 다닐 때이고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시기다. 잦은 원정으로 집에서 엠마의 얼굴도 잘 못 보던 넬슨은 1803년 엠마에게 집안 관리를 전부 맡겨버리고 원정에 나선다. 넬슨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엠마는 새롭게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문제는 이 아이는 1804년 태어난지 6주만에 사망해버린다. 외로움에 시달리던 엠마는 넬슨의 저택을 예술의 장으로 다시 탈바꿈하는데 집중한다.

그렇게 1804년, 윌리엄 해밀턴 경이 죽고 넬슨이 떠나자 넬슨의 친지들은 넬슨의 저택과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제 힘없는 미망인이 된 엠마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당시 엠마는 넬슨과의 두번째 아이가 사망한 것도 비밀로 하고 혼자 외로이 버텨내고 있었다. 넬슨 저택의 실질적인 주인이었지만 엠마 주변에 자기 편은 하나도 없었다. 외로움에 시달리던 엠마는 음주와 과식, 도박에 빠져들었고, 온갖 사치를 부리게 된다.

이 와중에 이제 미망인인 엠마는 수많은 부자들에게서 청혼을 받게 되는데, 아직 넬슨을 사랑하고 있었고, 넬슨이 포상금을 자기에게 유산으로 남겨줄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모두 거절한다. 넬슨이 없는 저택에서 엠마는 자기 사생아 엠마 캐어루(Emma Carew), 넬슨과의 딸 호레이샤, 그리고 넬슨의 조카들과 생활한다.

지중해에서 프랑스 함대를 열심히 분쇄하던 넬슨은 1805년 잠시 런던으로 다시 돌아와 엠마와 재회한 후 다시 원정에 나서게 되는데, 넬슨이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13일, 엠마는 넬슨에게 편지를 한 통 받게 된다. 이 편지에서 넬슨의 유언장이었는데, "엠마 해밀턴이 자기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유산을 물려줄 것" 과 "입양한 딸인 호레이샤에게 넬슨 성을 사용할 수 있게 함"을 분명히 했다. 엠마의 희망대로 넬슨의 유산을 엠마에게 상속하고, 딸 호레이샤를 자기 적통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편지를 받은지 8일 뒤엔 10월 21일, 넬슨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사한다. 엠마는 넬슨의 죽음을 슬퍼하며 앓아누워 며칠간 침실을 떠나지 못했고, 손님이 왔을 때에도 눈물을 보였다. 몇 주 후 엠마는 넬슨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국가가 자신과 딸 호레이샤를 돌봐주기를 바랐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슬픔에 빠진다.


2.5. 초라한 말년[편집]


넬슨이 엠마에게 유산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철회하지 않자 엠마에게 감사편지까지 보냈던 넬슨의 동생 윌리엄 등 넬슨의 친지들은 엠마와 아예 연락을 끊었고, 엠마는 그동안 엠마가 돌보던 넬슨의 조카들의 어머니들, 즉 넬슨의 여동생들에게 의탁한다. 그런데 이 여동생들은 넬슨의 죽음을 애도하고 엠마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온갖 사치를 부렸고, 엠마는 이 여동생들과 여동생들의 친구, 친지들에게 많은 돈을 준다.

넬슨의 유언은 12월에 읽어진다. 넬슨의 형제 윌리엄은 엠마가 머무는 저택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고 국가로부터 넬슨 백작위를 수여받고 윌리엄의 아들(Horatio/Horace)는 자작위를 수여받았다.[11] 엠마는 넬슨의 저택, 2,000파운드, 그리고 연간 500파운드 연금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넬슨의 저택을 유지하지도 못할 돈이었다. 넬슨은 국가의 영웅이었지만 엠마와 딸을 돌봐 달라는 넬슨의 유언은 거의 무시되었고, 장례식에서 엠마가 노래를 부르게 해 달라는 요청도 묵살되었다.

넬슨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영국 역사상 가장 호화롭게 치러졌다. 국비로 14,000파운드가 들었는데, 엠마는 참가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이때 엠마는 넬슨의 여동생과 조카들과 지내고 있었는데, 동생 덕분에 아무것도 한것 없이 백작이 되고 거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윌리엄 넬슨이 장례식 후 친척들을 완전히 무시한다. 돈을 노리고 달려드는 넬슨의 친척들은 처음에는 엠마를 닥달했지만 엠마는 정말 가진 돈이 없었다.

이 친척들은 유산 상속 진정을 요청하는 편지를 계속 정부 당국에 보냈고, 이가 받아들여서 엠마가 데리고 있던 조카들의 부모인 넬슨의 형제들은 각 10,000파운드씩을 받았다. 더 막장이었던 건 그런데도 자기 자식들은 엠마가 키우라며 엠마에게 떠넘겼다는 것이다. 유산 문제가 정리되자 윌리엄 넬슨은 백작으로서 100,000파운드짜리 저택을 산다. 문제는 아까 얘기한 엠마 몫으로 남겨진 연 500파운드의 연금을 이 윌리엄이 가로채고 엠마에게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엠마가 20,00파운드 가량을 쏟아부어 키운 넬슨의 조카들, 그 조카들의 부모들마저도 엠마를 저버렸고, 애정을 담아 키운 넬슨의 조카들마저도 자신을 저버리자 엠마는 우울증에 빠진다. 윌리엄은 엠마에게 상속된 넬슨 저택마저 내놓으라고 협박을 일삼았고, 엠마에게서 지속적으로 돈을 뜯어냈다.

문제는 엠마 역시 낭비벽이 심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에 도벽까지 있는 판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사기에 몇 번 당하고 과소비도 끊지 못해서 중년기에는 말 그대로 알거지로 살게 된다. 넬슨의 유언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해밀튼 경의 유산이나 넬슨 개인이 준 재산도 꽤 많았다. 그저 엠마의 낭비벽이 엄청난 것이 문제였다.[12] 그래서 이 와중에도 엠마는 지속적으로 넬슨 저택에서 공연을 열고 지출을 줄이지 않았다. 엠마에게 관심을 보이던 왕세자 조지 4세를 비롯한 수많은 신사들이 넬슨 저택을 들락날락했지만, 그 누구도 엠마를 도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3년 후인 1808년, 엠마는 15,000파운드라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경매에 붙여진 넬슨 저택은 아무도 사려하지 않았지만 존 패링 경(Sir John Perring)을 중심으로 엠마를 돕던 친지들과 이웃들의 도움으로 다음해인 1809년에 팔리면서 엠마는 빚을 어느정도 청산하게 된다.

하지만 엠마의 낭비벽은 변하지 않았고, 곧 다시 빚더미에 앉게 된다. 1810년, 엠마가 젠트리 계급 남자의 정부(Mistress)로 온갖 저택을 떠도는 동안 항상 같이 있으며 저택에서 하인 일을 하던 엠마의 어머니 카도간 부인(Mrs.Cadogan)이 사망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엠마는 채무로 인해 1811년부터 1812년까지 수감되는데, 이 와중에도 돈을 지불해 가택연금 상태로 딸 호레이샤와 생활한다.

1813년, 엠마는 자기에게 있는대로 추근덕대던 왕세자 조지 4세를 비롯한 후원자들과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결국 엠마는 넬슨의 유품들을 포함한 자기 소유품들을 모두 경매로 내놓을수 밖에 없었는데, 이 와중에도 계속 호화스런 공연을 벌이며 이제는 이자를 갚기 위해 돈을 융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814년, 더 이상 영국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던 엠마는 체포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기 딸 호레이샤와 함께 몰래 프랑스 칼레로 떠났다. 이 때 수중에 딱 50파운드가 있었다고. 여기서도 과소비가 멈추지 않았는데, 고급 호텔에 머물며 후원자들의 돈으로 생활하며 공연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곧 엠마는 과도한 음주, 아메바 성 이질[13]로 건강이 악화되어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작은 집으로 이사했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독한 술과 아편을 복용했다.


2.6. 사망[편집]


1815년 1월 15일, 엠마는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신은 21일 칼레에 묻혔으며 친밀한 친구였던 조슈아 스미스가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친척인 헨리 카도건이 엠마의 사망 당시 14살밖에 안된 그녀의 딸 호레이샤를 돌봤다.[14]


3. 기타[편집]


넬슨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호레이샤는 고모들이 데려다 키워서 엄마처럼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다만 하층민으로 태어나 순전히 타고난 미모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올랐던 엄마의 미모를 전혀 물려받지 못하고 아버지 넬슨의 외모만 물려받아서 외모 문제로 좀 구설수에 시달렸다. 남아 있는 젊은 시절의 초상화는 굉장히 못생긴 걸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못생긴 건 아니고 평범한 외모였는데 어머니가 워낙 소문난 미인이어서 후대에게까지 구설수가 되고 있다.

어머니 엠마는 호레이샤가 15살 때 사망했는데 호레이샤는 죽을 때까지 엠마를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생모 손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했으니 애정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15세까지 엄마와 같이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 엠마가 남긴 빚이 너무 많아서 그걸 피하기 위해서 부인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어쨌든 호레이샤는 동네 목사 필립 워드(Rev. Philip Ward)와 결혼하여 조용히 살면서 10명의 자녀를 낳았고, 지금까지 그녀의 자손은 이어지고 있는데 큰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호라시오 넬슨(Horatio Nelson Ward)이라고 지었다. 호레이샤는 넬슨 제독이 입양한 고아 양녀로만 알려져 있다가 1850년대에 되어서야 넬슨 제독의 친혈육으로 인정받았으며[15] 당시 군인으로 복무하는 그녀의 자식들에게 소정의 은사금이 지급되었다.

"귀족과 남자들의 권위로 가득한 세상이 신분이 천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를 옭아메었다.(In a world of aristocratic privilege and powerful men, her common birth and gender ultimately circumscribed her options)"

제이슨 M. 켈리(Jason M. Kelly, 엠마를 연구한 역사학자).


엠마와 넬슨간의 불륜을 다룬 후대 매체로는 엠마 역으로 당대의 미녀 배우 비비안 리, 호레이쇼 넬슨 역으로 로렌스 올리비에가 나온 128분 짜리 1941년작 영화 레이디 해밀턴(해밀턴 부인, That Hamilton Woman)이 있다.[16]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공식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이었을 때 영국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심기 위해 제작되어 논란이 됐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여에 반대한 미국 제1위원회(America First Committee)는 이 영화를 두고 "미국인들을 전쟁에 대비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평가한 바 있다.

반면 영국 박스오피스에서는 1941년 통틀어 5번째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꼽혔으며 윈스턴 처칠이 이 영화를 83번이나 본 것으로 유명하다.

[1] 조지 롬니는 엠마가 26살에 해밀턴 경과 결혼하자 이에 실망했는지, 26살 엠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녀를 그리지 않았다.[2] 참고로 그레이엄은 자기가 하는 짓이 진짜로 신성하고 경건한 거라고 믿었는지, 말년에는 자기 평생 연구의 결과물이라며 서적까지 냈다.[3] 해리는 헨리의 애칭이다.[4] 아이러니하게도 해리 경은 반세기 후 칠순이 넘은 나이에 자기 집에서 일하던 메이드 메리 앤 블록에게 구애하여 결혼한다. 당시 메리의 나이는 약 스물.[5]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의 10번째 딸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6] Josiah Nisbet. 패니가 사별한 첫 남편 사이에서 난 아들. 당시 장교 후보생으로 넬슨 휘하에서 종군하고 있었다. 조사이아와 엠마 해밀턴의 사이는 나빴는지, 조사이아를 두고 엠마가 사팔뜨기 자식(squinting brat)이라 욕한 기록이 남아있다.[7] 여기서 엠마는 넬슨의 양아들 조사이아가 어릴 때부터 군생활만 하고 파티같은 곳에 잘 안 와봐서 쭈뼛대자, 너무 딱딱하다며 웃고 즐기라고 분위기를 띄워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사이아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붓 아버지가 친어머니를 버리고, 대놓고 바람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8]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는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한 후 엠마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9] 당시 윌리엄 해밀턴 경은 실질적으로 은퇴한 상황이었다.[10] 사생아이기 때문에 넬슨의 성을 바로 이을 수 없었다. 찰스 톰슨이라는 넬슨의 휘하 장교의 이름을 따 본인 동의 아래 호적상 친아버지라고 기록한 모양.[11] 윌리엄의 아들인 호레이쇼가 요절하는 바람에 누이인 수잔나 넬슨의 아들인 토마스 볼튼(Thomas Bolton)이 성을 넬슨으로 개성하여 작위를 이어받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12] 그녀의 일생을 그런 영화 레이디 해밀턴에선 알코올 중독으로 거지가 된 엠마를 그려서 논란이 됐었다.[13] 남편 윌리엄 해밀턴도 이 병으로 사망한 걸 고려하면 젊은 시절 나폴리에서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14] 출처 1 출처 2 출처 3 출처 4 출처 5[15] 영어 위키에 의하면 호레이샤 본인도 역사학자들이 연구차 본인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넬슨 제독의 친딸인지는 몰랐다는 듯.[16] 비비안 리가 28살이였고 로렌스 올리비에가 34살 때 두 사람이 결혼한지 얼마 안되었던 리즈시절에 찍은 영화다. 아이러니하게도 비비안-로렌스 커플 역시 남자쪽이 연상인 불륜 커플이고 두 커플 간의 나이 차이도 비슷하다. 이 영화에서 실존 인물과 실존 인물을 연기한 배우가 둘 다 비슷하게 당대의 절세 미녀였고,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와 불륜을 했고 우울증을 겪었으며, 비슷한 나이에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죽은 것까지 묘하게 닮았다는 걸 생각하면 좀 기묘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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