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페도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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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페도클레스
Ἐμπεδοκλῆς' | Empedocles

파일:Empedocles Line engraving after C Vignon.jpg

이름
엠페도클레스
Empedocles
출생
기원전 490년경
시칠리아 아크라가스[1]
사망
기원전 430년경
시칠리아 에트나 산
직업
철학자, 시인, 극작가, 의사, 연설가
학파
다원론자

1. 개요
2. 생애 및 일화
2.1. 죽음에 대한 전설
3. 사상
3.2. 인식론
3.3. 정화의례
4. 평가
5. 창작물에서의 엠페도클레스



1. 개요[편집]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의사, 시인, 극작가, 정치가. 수사술[2]의 최초 고안자라고 알려져 있으며,[3] 4원소설을 주장했다. 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활화산 에트나산 분화구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2. 생애 및 일화[편집]


기원전 490년경 그리스 시칠리아섬 남서부의 도시 아크라가스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4]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의 할아버지는 71번째 올림피아 경기에서 우승했으며 경주용 말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빛나는 가문 출신이었다.

엠페도클레스는 한때 파르메니데스의 학생이었는데, 이후 그를 떠나 아낙사고라스피타고라스의 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피타고라스에게서는 삶의 태도와 몸가짐에서의 위엄을 배우려고 애썼고, 아낙사고라스에게서는 자연 연구를 배우려 애썼다. 하지만 엠페도클레스가 발표한 시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교설이 세상에 공표되어 버린 사건이 있은 후로부터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강의에 엠페도클레스를 비롯한 그 어떤 시인도 참석할 수 없다는 규칙을 세웠다고 한다.

언젠가 계절풍이 맹렬하게 불어 곡물에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을 때, 그는 당나귀의 가죽을 벗겨서 자루를 만들도록 명령한 다음, 바람을 붙잡기 위해 그 자루들을 언덕 위와 산등성 주위에 늘어놓았고, 이로 인해 바람이 잦아들었기 때문에 '바람을 제지하는 자'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엠페도클레스는 의술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숨을 쉬지도 않고 맥박이 멈춘 상태로 기절한 여인의 몸을 30일간이나 유지했다가 결국 살려냈다고 한다.

시칠리아 남서쪽 해안도시인 셀리누스에서 사는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려 주민들은 목숨을 잃고 여자들은 유산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던 적이 있었다. 인근의 강에서 나오는 고약한 냄새가 원인이라고 파악한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돈을 들여 이웃하는 두 강을 그 강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생각했고 실제로도 강의 흐름을 합류시켜 신선한 물이 흐르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전염병은 사라지게 되었고, 셀리누스의 시민들은 이를 축하하며 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 이 때 엠페도클레스가 나타나자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엎드려 경배하고, 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에게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그는 자유인다워 어떤 권력도 혐오했으며 민주정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그가 권력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음식 뒤에 포도주가 나오고 나서야 연회의 좌장은 추천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연회가 진행된 후에도 여전히 포도주가 나오지 않고 주최자가 독단적으로 연회의 좌장을 결정하였으며 연회의 좌장은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든가 아니면 머리에 쏟아붓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이를 참주정의 기미라고 보고, 바로 그 다음날 초대한 주인과 연회의 좌장을 법정으로 끌어내어 그 두 사람의 유죄선고를 받아내서 사형에 처하게 이르렀다고 한다. 또 한번은 의사 아크론이 자신이 의사들 중에서 최고라는 이유로 조상의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장소를 민회에 요구했을 때, 엠페도클레스는 연설자로 앞에 나가서 그건 평등하지 않으므로 제지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후에 엠페도클레스는 세워진 지 3년밖에 되지 않는 '천인회의체[5]'를 해산시켜 버렸다.

올림피아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아크라가스에 돌아와 정착하려 했을 때, 그에게 적의를 품었던 자들의 자손들은 그의 귀향을 반대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펠로폰네소스로 물러가 그곳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정확하지 않고 이보다 더 유명한 얘기들이 전해진다.

2.1. 죽음에 대한 전설[편집]


그의 유명한 죽음은 이렇다. 엠페도클레스가 죽은 여인을 살려서 돌려보냈기 때문에 그는 (축하를 위한) 희생제의를 수행하였고 그의 친구들 몇몇이 이 희생제의에 초대되었다. 그 중에는 엠페도클레스의 제자[6] 파우사니아스도 있었다. 이어서 축연이 끝나자 다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휴식을 취했는데, 어떤 자들은 그 땅에 인접한 나무 밑에서 쉬었으며, 어떤 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찾아 쉬었다. 엠페도클레스도 축연을 하느라 그들이 누어 있던 그 장소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날이 밝아 모두가 일어났을 때, 그의 모습만 찾을 수 없었다. 그를 찾으려고 종들에게 물어봤지만 그들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던 차에 그들 중 누군가가 한밤 중에 괴이할 정도로 큰 목소리가 엠페도클레스를 부르는 것을 듣고서 일어나 보니 하늘에서 빛이 비치고 횃불이 빛나는 것을 보았으며[7]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 일의 사정에 대해 후대의 히포보토스[8]가 말하길, 엠페도클레스는 일어나자마자 에트나 화산으로 갔고, 이윽고 분화구가 있는 곳에 이르자 그 불 속으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는 신이 되었다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확실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야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이 불꽃에 휩싸여 올라옴으로써 비로소 그 진실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청동제 신발을 신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자 파우사니아스는 이러한 이야기에 반대했고, 그는 내려와 그를 찾아보도록 몇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자 그는 엠페도클레스가 바랐던대로 그는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를 애써 수색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파보리누스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어떤 제전에 참석하기 위해 메세네로 마차를 타고 가다가 떨어져서 허벅다리 뼈가 부러지게 되었고, 이로써 병을 얻게 되어 77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무덤도 메가라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테라우게스는 엠페도클레스가 늙은 나이로 발을 헛디뎌서 바다에 미끄러져 빠져 죽은 것으로 전한다. 아무튼 그는 죽음을 앞두고 갑작스레 사라진 건 사실인 듯하다. 그의 죽음은 일종의 미스테리가 되었고 그 까닭을 추측하는 자들에 의해 여러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3. 사상[편집]



3.1. 4원소설[편집]


원소는 4개로 불, 물, 흙, 공기이다. 그 밖에 이것들을 결합되게 하는 '사랑' (Philia)과 그것들을 분리되게 하는 '불화' (Neikos)가 있다. (..중략..) "그리고 이것들은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어 결코 멈추는 일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서, 그는 이와 같은 질서는 영원한 것처럼 생각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9]

엠페도클레스는 모든 만물이 4개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10] 불, 물, 땅, 공기가 바로 그것이다. 4원소는 모두 동등하며 각기 자신만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혼합되어 만물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어떤 것이 더 많이 섞이거나 어떤 것이 더 적게 섞이거나에 따라서 온갖 다양함이 생겨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와 같은 섞임은 항시 변하지 않는 원소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벽돌로 벽을 쌓는 것과 같은 결합이다.[11] 이것은 서로가 잘 뒤섞여서가 아니라, 작은 조각들이 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접촉함으로써 생기는 단단한 결합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12]

4원소들은 어느 때는 '사랑(Philotes)'에 의해 하나로 합쳐졌다가 어느 때는 다시 '불화(Neikos)'에 의해 분리되어 여럿으로 변한다.[13] 만물은 이런 사랑의 결합을 통해 생성되고, 또다시 불화의 분리를 통해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4원소 자체는 소멸되지 않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자리바꿈 하면서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게 된다.

'사랑'의 결합은 결국 하나의 구(球; Sphairos)를 형성한다. 반대로 '불화'가 강해지면 구에서 분리됨으로써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불화는 4단계이며 '지체', '사람의 얼굴을 가진 황소', '통째로 하나', '자궁'의 발생학적 과정을 거쳐서 온갖 종류의 형태를 지닌 갖갖이 생명들이 탄생한다.

파일:Colored_four_elements.jpg

3.2. 인식론[편집]


엠페도클레스는 사물이 거울에 비칠 때 사물 각각에서 방출물들이 나오며, 그것들은 상(image) 같은 것들로서 눈에 꼭 들어맞는다.

『옥시링쿠스의 파피루스』 (DK31B109a)[14]

모든 것은 방출물을 내뿜는데, 사람들은 그 방출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들이 있어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엠페도클레스는 주장했다.

3.3. 정화의례[편집]


파일:Empedocles_in_Thomas_Stanley_History_of_Philosophy.jpg

엠페도클레스는 문학적 소양도 매우 뛰어났다. 특히 그는 정화의례에 관한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여러 문학작품들을 남겼다. 동물을 희생해서 제사를 지내는 희생제의를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윤회하여 동물로도 환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은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5] 또한 신은 감각으로 느껴질 수 없는 일종의 정신(phrēn)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여러 신들처럼 사람의 형체를 띄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엠페도클레스는 호메로스적 시풍을 지녔고 풍부한 비유와 다른 여러 시적 고안을 사용함으로써 시적 표현에 아주 능숙했다. 그는 이런 시를 지었다.

벗들이여, 황금색 아크라가스 강변의 크나큰 도시,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여

오직 선한 일들에 마음을 쏟고,

이방인들을 환영하는 항구이자, 악에 물들지 않는 사람들이여.

안녕하신가! 나는 그대들에게 불멸하는 신이요,

더 이상 죽을 운명의 인간이 아니로다.

마치 나에게 걸맞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나는 머리에 장식 끈과 화려한 화관을 두른 채

만인에게 존경을 받으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네.

내가 그들의 풍요로운 시내 가운데로 가면

남자들과 여자들에게서 나는 신처럼 추앙받는다네.

숱한 사람들이 나를 뒤따르며,

어디에 이득을 구할 지름길이 있는지 물어오네.

어떤 이들은 신탁을 구하고,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심한 고초를 겪은지라,

온갖 질병들을 치유할 확실한 말을 듣기를 청하네.

그 밖에도 엠페도클레스는 여러 시를 썼고, 비극과 정치학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또한 연설을 너무나 잘해서 고르기아스가 제자로 들어와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4. 평가[편집]


엠페도클레스는 4원소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그것은 엘레아 학파의 존재 개념인 '있다'를 긍정하는 것이면서도,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즉, 변치않는 '존재'는 4가지 원소이며, 그 '변화'는 사랑과 불화에 의해 이들의 조합이 달라지는 것에 있다.

그의 다원자론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4원소설을 받아들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으로 인해 중세 이후 거의 모든 교육 기관에서는 어김없이 4원소설을 가르치게 되었다.

최근에 들어선 과학자들에 의해 그는 "원소의 수가 4개인 최초의 주기율표를 만들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5. 창작물에서의 엠페도클레스[편집]


  •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이라는 미완성 희곡을 썼으며, 이를 스트로브-위예가 영화화했다. 물론 스트라웁과 위예 특성상 영화는 상당히 실험적인 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도 엠페도클레스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스 비극 시대에서 철학의 탄생》에는 엠페도클레스의 운명에 관한 드라마의 세 가지 초안이 실려 있다.

  •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엠페도클레스는 피펫과 비슷한 도구로 대기압의 존재를 최초로 관찰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미쳐서 스스로 신이라 여긴 나머지 화산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용암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엠페도클레스는 "매우 용감한 지구물리학자"였을 것이며 "생명을 무릅쓴 관측 중에 일어난 실족사였을 것"이라 말한다.[16]

  •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서 등장한다. 성우는 Fanos Xenofós. 약간은 신들린 듯한 인상을 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수 유적 중 한 곳을 여는 퀘스트와 연관이 있다. 퀘스트 마지막에 이수 유적으로 미스티오스와 함께 입장하게 되는데, 창조주를 경배하다가 스포일러에게 데스신도 없이 한 방에 끔살을 당한다. 단, 실제 역사에서 엠페도클레스는 오디세이의 시작시점인 BC 431년에서 고작 1년 뒤에 사망하기 때문에,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 뤽 베송의 첫 SF영화 《제5원소》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1] 당시 시칠리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였다고 한다.[2] 말을 꾸미는 방법. 말을 잘하는 방법. 웅변술을 말한다.[3]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소피스트》에서 엠페도클레스가 수사술의 최초 고안자이고 제논은 변증술의 최초 고안자라고 말했다.[4] 전통적으로 데메테르를 숭배하던 지역이고 이탈리아에 유행하던 피타고라스 학파 및 오르페우스 비교 등 여러 비교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라고 한다.[5]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과두정적 정치체제다.[6] 혹자는 소년 애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소년 애인은 일종의 멘토이자 정신적인 양자관계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말그대로 동성애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정과 플라토닉 러브 사이에 있는 관계로 소년 애인을 두는 것은 당시 그리스의 관습이었다.[7] 화산폭발을 묘사한 듯 보인다.[8] 히포보토스(Hippohotos): 기원전 200년경에 활동한 역사가. 《철학자들의 목록》이란 책을 저술했다고 알려진다.[9]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2021. 나남출판사. p.210[10] 그는 이것을 네 가지 '뿌리 (rhizomata)'라고도 말한다.[11] "엠페도틀레스를 따르는 이들에 의하면 도대체 변화란 어떤 것인가? 변화란 벽돌들이나 돌들로 벽을 쌓는 것과 같은 결합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혼합은 항시 보존되는 원소들로부터 원소들의 작은 조각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서 형성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p.354)[12] 현대의 분자를 연상시킨다.[13] 여기서 말하는 '사랑'과 '불화'는 신이나 신적인 힘을 말한다.[14]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p.407[15] 특히 "가련한, 아주 가련한 자들이여, 콩에 손대지 마라." 라고 말한 점은 빼박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p.436 참조)[16]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코스모스(특별판)』, Chapter 7, 사이언스북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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