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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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양회에서의 적 격파
2.2. 각지를 전전하다
2.3. 조정에서의 활동
2.4. 만년의 실수
3. 기타
4. 평가



1. 개요[편집]


呂文德, ?~1269
남송의 명장으로, 수춘 안풍군(安豊軍) (현 안후이성 화이난시의 일부)사람이다. 평민 출신으로 일찍이 조규[1]의 수하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30여 년 동안 강회, 형호, 사천 각지의 전선을 전전하며 여러 차례 몽골군을 물리치고 눈부신 전적을 올렸으나, 유정을 무시하여 남송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고, 몽골군에게 속아 몽골군이 양양을 공략하도록 허용하게 한 실수를 하였다. 시호는 '무충(武忠)'이고, '화의군왕(和義郡王)'으로 추봉된다.


2. 생애[편집]



2.1. 양회에서의 적 격파[편집]


생년 미상으로, 여심(呂深)의 아들로 태어났다.[2] 그는 동생 여문복(呂文福), 여문신(呂文信) 등이 있으며, 여문환은 그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송대 명문 동래 여씨 출신으로 송초 재상 여몽정의 후예였다.[3] 땔감 장수 출신이었고, 조규의 밑에서 종군하여 군 경력을 시작하였다.[4] 여문덕은 그 후 수십 년간 전공을 쌓으며 현환으로 군림했고, 그 집안의 자제들도 전장을 누비며 거대한 군사 집단을 형성했다.

조규를 따라 단평의 입락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문덕은 1237년 지주도통제로 승진했다. 몽골이 1235년부터 남송을 침공하면서 40여 년간의 송몽전쟁이 본격화되었고, 그는 오랫동안 항몽전선에서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237년 여문덕은 지주의 도통제로 안풍(安豊)을 지원하여 두고와 함께 몽골군을 격퇴한다. 이듬해 두서, 예빈 등과 함께 정예군을 거느리고 요충지에 복병을 두어 27차례나 승전보를 전했는데, 특히 그가 진주를 수비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순우 원년(1241년) 3월 송 조정은 여문덕을 지여주로 삼았고, 순우 3년(1243년) 2월 복주관찰사·시위마군부도지휘사로 발탁되어 변방을 방어하였다. 이번 여름부터 겨울까지 3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전함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변량을 들이받아 허둥지둥하다 철수했다. 순우 4년(1244년) 5월, 몽골이 수춘부를 포위하자 여문덕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를 풀자 조정은 그에게 관전 백만을 주어 위로하였다. 6월에 조정은 여문덕을 회서초무사로 임명하고 호주를 겸하여 호(號)·안풍(安豊)·수(壽)·박(薄) 4주(四州)의 군대를 통제하였다. 순우 5년(1245년) 봄, 몽고병들이 대거 오하구를 공격하자 여문덕은 이에 맞서 보채를 불태우고 호주로 후퇴하여 고수하다가 몽골이 호주를 공격하자 물러났고, 여문덕은 그 틈을 타 오하구를 탈환하여 송 조정은 그를 3계급 특진시켰다.순우 8년(1248년) 봄, 사주의 포위를 푼 공로로 시위마군도지휘사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몽골의 회서 지방에 대한 공격을 막아낸다.

이후 맹공, 두고, 여개 등 남송 1세대 항몽중신들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남송 항몽의 버팀목을 맡아 독보적인 주역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출세 과정에서 자신의 친족과 고향 나무꾼, 탄농 등이 엮은 흑탄단(黑彈團, 일명 여가군)에 의지하여 싸웠고, 그의 친척인 여문신(呂文信)[5], 여문복(呂文福), 여문환(呂文煥), 조카뻘인 여사기(呂師基), 여사룡(呂師龍), 여사도(呂師道), 여사맹(呂師孟), 여사망(呂師望), 사위 범문호[6], 동향 하귀(夏貴)[7] 등이 요직에 중용되었다.


2.2. 각지를 전전하다[편집]


순우 11년(1251년), 경호제치사(京湖制治使) 이증백(李曾伯)의 요청으로 호북무마사(湖北無馬使) 겸 지협주(知峽州)로 전출되었다. 보우 2년(1254년) 여름, 이증백은 명을 받고 사천(四川)을 선무하여 죽고 없는 여개를 대신해 사천(四川)의 정세를 수습하고, 여문덕에게 경호 방면의 군사를 맡겼다.

같은 해 7월 송 이종은 여문덕에게 강릉·한양·귀·협·양·견영군마사를 총통으로 임명하고 사공안을 임시로 두어 상하로 응원했다. 당시 몽골은 남송을 우회 공격하기 위해 토번, 대리를 정복한 후 남송 서남쪽 변방을 덮쳐 서남쪽의 전쟁이 긴박해지자, 송 조정은 보우 3년(1255년) 7월 여문덕 어주로 상서의 정, 예, 진, 원, 징 5주를 수비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지상덕부와 정주를 차례로 옮겨 몽골이 형호 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했다.

보우 5년(1257년) 가을, 몽골의 장수 우량카다이가 운남(雲南) 귀주(貴州)의 아씨귀국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문덕를 귀주 일대로 이동시켰다. 여문덕은 남서쪽에서 몽골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고 성을 쌓고 토착을 달래는 수단으로 방비를 강화했다. 그는 양(楊)씨를 비롯한 토착 세력과 연락해 황평(黃平) 등 3성을 쌓고 구이저우 지역의 소수민족을 위로했다. 개경 원년(1259년) 정월, 송이종은 "여문덕은 황평하고 오랑캐는 깊이 들어가며, 위계는 세 번 벼슬과 싸웠다"고 조서를 내렸고, 상을 수여하였다. 귀주가 아닌 광서(廣西)에서 남송(南宋)으로 진격한 것[8]은 구이저우 지역에서의 여문덕의 전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천(四川) 전선으로 자리를 옮겨 개경 원년(1259년) 3월 보강군절도사(保康軍節度使), 사천제치부사(四川制治副使) 겸 지중경부(知重慶府), 4월 사천 군정은 물론 송나라 무장(武將)의 최고 영예인 절도사(節度使)라는 직함을 얻었다. 이때 몽골 대군이 몽케 칸의 지휘 아래 합주(合州) 조어성(釣魚城)을 포위 공격하는데, 여문덕은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가 합주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고, 뉴린이 이끄는 몽골군도 몽케의 명을 받들어 수륙으로 병진하면서 부주에 주둔하고 장강에 부교를 놓아 여문덕, 상사벽 등이 이끄는 원군을 막아 촉으로 들어오는 걸 견제했다. 수십일 동안 계속된 끝에 5월, 여문덕은 불어난 물과 순풍을 틈타 부교를 끊고 몽골군을 물리치고 촉도를 뚫어 중경으로 입성했다.이종은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 6월 초, 그는 10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가릉강을 따라 올라가며 조어성을 증원하기 위해 몽골 장수 리진의 방어선을 뚫었으나 사천택이 이끄는 군대에 가로막혀 중경으로 되돌아갔다. 송군의 주력은 합주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조어성의 군민들은 성을 지키며 잘 싸웠다. 동년 7월 몽케가 전투 중 사망하면서 사천 전역은 일단락됐다.

몽케는 죽었지만 동생 쿠빌라이가 이끄는 또 다른 벌송군은 악주[9]를 맹공했다.[10]

개경 원년(1259년) 9월 중경(重慶)에서 악주로 쉴 새 없이 건너가 몽골군 장수 발도아의 군대를 격파한 그는 악주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수호가 더욱 단단해졌다. 이후 쿠빌라이가 아리크부카와 가한의 자리를 다투기 위해 북으로 철군하자, 악주의 포위가 풀렸다.[11] 송 이종은 조서를 내려 그를 칭찬하였다.


2.3. 조정에서의 활동[편집]


몽골은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아 한동안 남쪽을 돌볼 겨를이 없었고, 수년간 국경에서 큰 전투가 없었다. 남송에서는 내분이 시작됐고, 그 과정에서 여문덕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유정은 남송의 명장 중 하나였는데[12], 여문덕은 그를 시기하여 유정이 꾀를 낼 때마다 들은 체 만 체했고, 공훈을 세워도 이를 보고하지 않았던 데다가, 유정과 사이가 나쁜 유흥으로 하여금 사천제치사를 담당하게 했다. 그렇잖아도 상사벽, 조세웅이 가사도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정은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경정 2년(1261년) 6월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하면서 사천 지역의 상황이 크게 나빠졌다. 유흥은 유정을 토벌하러 출병했다가 유정에게 패했다. 패보가 전해지자 송 황실은 여문덕을 급파하여 노주로 진격하게 하고, 경정 3년(1262년) 정월 노주를 탈환하고, 여문덕은 공로로 개부의사를 봉했다. 비록 노주는 수복되었지만, 유정의 투항은 남송에 엄청난 손실이었다.[13]

한편 그는 송 조정에서 의지할 곳을 찾아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처음에 그가 의지한 것은 조규였고, 조규 이후 사방숙을 섬겼으며, 그 후로는 가사도를 섬겼다. 개경 원년(1259년) 악주 전투 때, 총수 가사도가 제부의 존중을 받지 못하였고, 또한 제부의 관계를 조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달·조세웅 등이 꺼리지 못하게 하였다.

경정 5년(1264년) 송 이종이 승하했을 때 가사도는 송 도종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이종의 승하 후 거짓으로 벼슬을 그만두는 한편, 여문덕을 시켜 군정을 거짓으로 보고하게 하고 도종을 급소하는 등 권세를 굳혔다. 가사도의 도움으로 여문덕과 그 가문의 군사집단이 여러 해 존속할 수 있었고, 여문덕은 종년에 96명을 천거하여 입조시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친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문덕도 단지 가사도에게 아첨하는 것은 아니었다.[14]


2.4. 만년의 실수[편집]


그는 만년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경정(景定) 4년(1263년) 7월, 유정이 쿠빌라이에게 남송을 정벌할 계책을 바치고[15] 양양성 밖에 의석장을 설치하여 군사행동을 엄호하였다. 그는 또 여문덕을 회유할 수 있다고 했다. 몽골이 여문덕에게 옥대를 건네자, 그는 뜻밖에도 논설위원장에 동의했다. 몽골인들은 또 "남인(南人)의 무신(無信)"을 핑계로 성벽을 쌓고 그 화물을 보호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몽골 사람들이 득세한 것을 보고 불쾌해하며 동의하지 않자, "장래의 성취를 논하는 것은 나의 이익이며,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건의가 나왔다.그러자 여문덕은 태도를 바꿔 송 조정에 시장을 개설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문환은 이것이 몽골군의 음모임을 간파하고, 여문덕에게 편지를 두 차례나 보냈으나, 여문덕의 심복에 의해 은폐되었다. 이후 몽골이 백학성에 제2보를 증축하자 여문환은 다시 여문덕에게 호소해 알게 됐고, 여문덕은 깊이 후회했다.

내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구나!

그 뒤 수성을 맡은 여문환은 여문덕에게 사람을 보내 몽군이 녹문을 쌓고 백하 등 진채를 쌓고 양번이 겹겹이 포위되었다고 보고하자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였고, 그로 인해 양번 지역의 지원 및 수비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함순 5년(1269년) 11월 말 여문덕은 벼슬에 나아가 소사(少師)를 특임하고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다. 이때 그는 이미 병이 위중하였고 여문덕은 스스로도 만년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여 같은 해 12월 2일(일설로는 12월 1일)에 졸하였다. 시호는 '무충(武忠)'이며 태부(太夫)에 추증되었고 덕우 원년(1275년) 12월, '화의군왕'으로 추봉되었다.


3. 기타[편집]


  • 훗날 여문덕의 가문은 여문덕과 여문신을 제외하고 원에 전부 투항했다고 한다.


4. 평가[편집]


  • <송사>에서 간신이라는 오명이 남은 가사도와 함께, 후대에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 명대에는 양양의 화는 여씨 일족이 자초한 것이니 멸족당해도 싸다는 평을 받았다.

  • 남송 시기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 남송 항몽의 중추적 기둥이었지만,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16]

  • 자신의 일족들과 동향인들을 대거 기용하여 거대한 군사집단을 형성하였는데, 가문의 이익을 국익보다 우선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7]

  • 여문덕은 가사도에게 아첨하여 다른 사람들을 따돌리기를 좋아했다. 특히 1261년 남송의 또 다른 명장 유정[18]이 여문덕의 무시와 암해로 인해 자신이 지키던 노주[19]를 바치고 몽골군에 투항함으로써 남송 정부에 엄청난 손실을 주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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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범과 함께 조방의 아들이다.[2] 1959년 소주에서 출토된 여사맹 묘지명에 따르면 여심은 태사상(太師相) 국공(國公)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3] 이 대에 이르러서는 몰락한 지 오래라고 한다.[4] 여문덕의 종군 연도에 대해서는 송 영종 가정 말년 조규가 회서무마참의관 재임 시였다는 설과 송 이종 소정 6년(1233년) 조규가 회동제치사에 부임했을 때라는 설이 있다.[5] 1259년 몽송전쟁악주 전투에서 전사하는 무장인 여문신과 동명이인으로, 1275년 원의 군대와 조우해 사망한다.[6] 대부분은 범문호가 가사도의 사위로 알고 있으나, 바이두에서는 여문덕의 사위로 나온다.[7] 병졸 출신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고, 이곳저곳에서 활약한 무장이었으나 무명의 장수였다고 한다.[8] 몽골군이 광서 지역을 통해 남송으로 진격하려는 것은 맹공이 먼저 간파하였다. 그는 병사를 파견하지 말고 현지인들을 차출해 광서 지역을 지키고자 주장했다.[9]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시 우창구[10] 이 당시 악주는 장승이 이끄는 군대만이 악전고투하고 있었고 몽골군의 장영실은 남송군의 여문신을 참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승이 쿠빌라이에게 항복하겠다고 하고 성 내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이에 쿠빌라이가 공언휘를 보내 요격했지만 고달이 공언휘의 군대를 유인했고 고달은 몽골군의 공언휘를 계략으로 주살한다.[11] 쿠빌라이는 가사도와 문제의 화약을 체결하고, 북으로 철군했다고 한다.[12] 북방 한인 출신으로, 금말 맹공에게 투항하여 그의 수하로 군생활을 시작했고, 이존효와 맞먹었다고 한다.[13] 그 동안 몽골군은 수군이 부족하였는데, 유정의 투항으로 인해 몽골군이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14] 나중에 사방숙이 가사도에게 모함을 받았을 때 여문덕의 극력 구원으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15] 남송을 치려면 양양을 쳐야 한다고 하였다.[16] 당시 '석숭이 다 뭐냐'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17] 여가군은 남송 정부의 장기적인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씨 군사 집단은 몽골 침략에 저항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여문환의 항복 이후 대부분이 여문환의 권유로 싸우지도 않고 원에 투항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여문덕의 아들인 여사기, 여문덕의 사위 범문호, 여문덕과 동향인 하귀 등. 여문환은 1273년 양양 공방전에서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결국 원에 투항하고 말았고 여사기는 여문환 투항 뒤 바얀의 공격 때 투항. 범문호는 안경부에서 원나라의 군대와 싸우지도 않고 투항했으며 하귀는 악주에서의 패배 이후 정가주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회서로 도망쳤으며, 남송 정부가 항복하였던 1276년 회서를 바치고 투항한다.[18] 북방 한인 출신이었다. 금나라가 몽골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남송에 투항하였다. 이존효와 같다는 평을 받았고, 맹공의 수하였다.[19] 사천성 루저우 시[20] 비록 노주는 나중에 여문덕이 탈환하지만 유정의 투항은 몽골군이 수군을 육성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남송에 큰 손실 내지 위협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