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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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伯奢
? ~ 189년 혹은 190년

파일:Lu_Boshe_Qing_portrait.jpg
청 왕조 시기 그림이다.

垂老歸林下(수로귀림하): 늘그막에 시골로 돌아와서

悠然世外思(유연세외사): 유연히 세상 밖에 거했는데,

豈知滅門禍(기지멸문화): 어찌 알았으리오? 멸문의 화가

即在宴賓時(즉재연빈시): 빈객 모신 잔치 때 있을 줄을.

1. 개요
2.2. 곽반의 세어
2.3. 손성의 잡기
3. 기타 기록
5.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의 인물이다.

조조의 옛 친구로 조조가 동탁의 추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그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조조는 그의 가족들이 자기를 잡으려 하는 걸로 착각하여, 접대의 관습을 어기고 다 죽여버리고 이후 여백사마저 죽여버린다.

이 정도가 흔히 알려진 이야기고, 살해 정황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기록이 약간씩 다른 점이 있다. 보통은 조조가 호의를 오해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도로 알려져 있다. 사건 자체는 조조의 잔혹함을 보여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야기 수준이다. 역사적으로 사건 자체의 중요성은 떨어지지만, 조조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내용이 알려져 삼국지 배경 창작물이라면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1]



2. 정사 삼국지[편집]


정사 삼국지에서는 무제기에 단 배송지의 주석에서 언급되는데 출전마다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일단 조조가 여백사의 가족을 죽였다는 점은 같으나 위서에서는 그들이 진짜 조조를 잡으려 했기에 조조의 정당 방위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어와 잡기에서는 조조가 그들의 언행을 오해해서 무고하게 살해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의 사학자들은 신빙성에 의심이 가고 왜곡이 많은 위서보다는 세어와 잡기의 기록을 믿는 편이라, 조조가 무고한 여백사의 가족들을 죽인 것으로 보고 있다.


2.1. 왕침위서[편집]


위서에서 이르기를 태조(조조)가 동탁이 끝내는 반드시 뒤집혀 패망할 것을 알고 마침내 등용에 응하지 않고 달아나 향리로 돌아왔는데, 몇 기를 데리고 옛 친구인 성고의 여백사에게 들렀다. 백사는 집에 없고 그 아들과 빈객들이 함께 태조를 겁박하여 말과 재물을 빼앗으려 하였는데, 태조는 손수 칼을 휘둘러 여러 명을 죽였다.

魏書曰: 太祖以卓終必覆敗, 遂不就拜, 逃歸鄕裏. 從數騎過故人成皐呂伯奢;伯奢不在, 其子與賓客共劫太祖, 取馬及物, 太祖手刃擊殺數人


여백사 사건을 부당한 것으로 비판했던 아래의 둘과 다르게, 왕침은 여백사 사건을 조조의 정당방위로 기록했다. 서진동진 시대에 살았던 후대인인 곽반과 손성과는 달리 왕침은 위나라에 살았으며, 그렇기에 조조를 미화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 있을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위서 자체가 당나라의 유지기가 "사통"에서 엄격하게 지탄했을 정도로 왜곡이 많은 서적이다.[2] 때문에, 현대의 사학자들은 배송지가 그러했듯이 대부분 위서의 내용을 믿지 않는다.[3]

거기다 이 왕침이란 사람은 따지고 보면 조조의 관점에서도 더러운 사람이다. 《진서》와 《한진춘추》에 의하면 말년에 위의 마지막 충신들이 사마소를 공격하기 위해 일을 꾸미고 있던 중 왕침 역시 왕업, 왕경과 함께 위황제(조모)에게 불려가 그러한 계획에 대해 듣고 협력을 요청받게 된다. 그러나 앞으로 진의 시대가 올 것을 직감하고 왕업과 함께 사마소를 찾아가 이 사실을 밀고해 결국 조모가 시해되게 만든 인물이다. 이렇듯 왕침은 여러 역사서에서 기회주의적이고 천박한 자로 까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현대에는 그가 집필한 내용을 거의 믿지 않는다.[4]

주수창(周壽昌)[5]이 이에 대해서 평가하길 애당초 여백사의 자제와 빈객이 과연 조조를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준비가 돼있었을 텐데 조조 혼자서 어찌 그들을 대적할 수 있었겠느냐며, 여백사의 다섯 자식은 모두 부친의 친구라 조조를 대접했고 아울러 교사한 마음도 없었는데 조조가 스스로 의심하였기에 그들이 준비하지 못한 것을 노려 죽였을 뿐이라고 했다. 소위 '타인을 저버리거나 자신을 저버린다'라는 것은 양심을 다 버린 것, 바로 양심을 감추며 둘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곽반, 손성의 두 설이 확실하고, 위서는 전부 조조를 위해 글을 아름답게 꾸민 것으로 조조의 악함을 숨기고 여백사 가문을 더럽힌 것이라서 믿기엔 부족하다고 하였다.


2.2. 곽반의 세어[편집]


세어에서 이르기를 태조가 백사에게 들렀다. 백사는 밖에 나가 있었고, 다섯 아들들이 모두 집에 있어 빈 주례를 준비하였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을 저버린 것 때문에 그들이 자기를 도모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손수 검을 휘둘러 밤중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

世語曰: 太祖過伯奢. 伯奢出行, 五子皆在, 備賓主禮. 太祖自以背卓命, 疑其圖己, 手劍夜殺八人而去.



2.3. 손성의 잡기[편집]


손성의 잡기에서 이르기를 태조가 식기가 내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를 도모하려 한다 여기고는 마침내 밤중에 그들을 죽이고는 처량하고 구슬프게 말하기를 "차라리 내가 다른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

孫盛雜記曰: 太祖聞其食器聲, 以爲圖己, 遂夜殺之. 旣而悽愴曰:「寧我負人, 毋人負我!」遂行


조조가 진궁에게 잡혔던 일도 정사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정사 본전에선 조조가 중모(中牟)현을 지날 때 정장(亭長)의 의심을 받아 붙잡혀 현으로 보내졌는데 읍인 중에 몰래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에게 청하여 풀려났다 한다. 배송지 주 세어에서는 현의 공조(功曹)가 조조를 알아보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는데 천하의 웅준을 구금해서는 안된다고 현령에게 아뢰어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이 현령이 진궁이라는 언급은 없으며 정황상 진궁은 아닌 듯 하다.


3. 기타 기록[편집]


애초에, 태조가 옛 친구 여백사에게 들렀다가, 마침내 떠났다. 날이 저물고, 길에서 두 사람을 만났는데, 용모가 위엄있고 씩씩해, 태조는 그들을 피해 길을 갔다. 두 사람이 웃길 : "군을 보니 달아나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태조가 비로소 그들의 기이함을 깨닫고, 이에 모두 고했다. 장차 이별하려 하며, 태조가 패도(佩刀)를 풀어 그들에게 주며, 이르길 : "이 것은 저의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니, 두 현인께선 부디 말씀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태평어람 권 478에서 인용한 양조(梁祚)의 위국통(魏國統)



4. 삼국지연의[편집]


사건 당시 조조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미 대가족을 이룬 인물을 '옛 친구'로 설정하기에는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패륜적 요소를 더해 조조의 냉혹함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삼국지연의에선 조조의 '옛 친구'가 아니라 아버지 조숭과 의형제를 맺은 웃어른 격의 인물로 등장한다. 또한 여백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4회에서 세어와 잡기의 기록을 적절하게 섞어 재구성[6][7]하였고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진궁이 함께 등장한다.

조조가 동탁 암살에 실패하고 도망쳤다가 현령으로 일하던 진궁에게 붙잡혔는데, 진궁의 호의로 함께 떠나게 되었다. 둘은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 마침 도중에 있던 여백사의 집에 가게 된다. 여백사는 진궁이 조조를 구해준 이야기를 듣고 마치 친아들을 구해 준 것과 같이 진궁에게 감사를 표하고, 둘을 후하게 대접하기 위해 가족들에게는 돼지를 잡으라고 시켜 놓은 채, 자신은 술을 사러 옆 마을로 떠난다.

하지만 밤중에 조조와 진궁은 여백사의 가솔들이 "묶어서 죽이자."라고 중얼거리는 수상한 소리를 엿듣게 되고, 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한 조조와 진궁은 여백사의 가솔들을 모두 베어 죽인다. 그런데 모두 죽이고 보니 부엌에 돼지 한 마리가 묶인 채 꿀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백사의 가족과 하인들은 조조와 진궁을 대접하려고 돼지를 잡으려 했던 것인데, 두 사람은 그걸 오해하여 오히려 은혜를 악으로 갚아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일, 어쩔 수 없으니 둘은 다시 길을 떠난다. 묶인 채로 가버리면 혼자 굶어죽을 텐데 놓아주든가 먹든가 하지

그런데 도중에 멀리서 술을 사가지고 돌아오던 여백사와 마주치게 된다. 여백사는 왜 벌써 가는지 물어보지만, 조조와 진궁은 급한 일이 있다면서 황급히 길을 서두른다. 그런데 갑자기 조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여백사에게 "저쪽에 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말해서 고개를 돌리게 하고 그대로 여백사까지 베어 죽인다.

놀라는 진궁에게 조조는, "이 사람이 돌아가서 가족들이 죽은 것을 보면 반드시 자신에게 원한을 품어 신고할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대답한다. 이어서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 영교아부천하인, 휴교천하인부아)는 말을 남긴다. 진궁은 조조의 잔혹함에 경악한다.

조조가 악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진궁은 밤중에 몰래 조조를 죽이려 하지만, 차마 그런 비겁한 행동을 할 수 없어 그만두고 그냥 조용히 떠나게 된다.


짧고 간결하지만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중 하나, 조조의 명언이 나오는 명 에피소드 중 하나다.

겉으로 보이는 공명정대한 선량함 속에 냉혹함과 잔인함을 감추고 있는 조조의 캐릭터를 잘 묘사하였다 평가받는다. 또한 진궁을 등장시킴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복선을 깔아놓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서주대학살 사건이나 아무 잘못이 없었던 부하장수를 희생해 수춘성을 공략하는 에피소드를 접했을 때, 독자들이 조조의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개연성을 느낄 수 있는 징검다리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 이전까지만 해도, 조조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앞뒤 생각 안하고 동탁 암살을 시도할 정도로 혈기와 정의감이 넘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8]

이 에피소드에서 나타난 조조는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악당이다. 일단 여백사의 가족들의 언행을 오해해서 죽인 것은 범죄자로 찍혀 도주하고 있던 상황이라 마음이 불안해 일어난 일이었다 치면 이해의 여지는 있다. 물론 이해의 여지가 있긴 해도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건 진궁도 함께 오해한거라 진궁도 이걸 가지고 조조가 악인이라고 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오해로 빚어진 실수였음을 인식한 뒤에 취한 행동이 목격자 제거를 위해 은인이던 여백사마저 죽여버린 것이라 도저히 옹호하기 힘들다. 여백사에게 사죄해서 용서는 받기 힘들더라도 적어도 인간성은 가졌음을 보여줄 수도 있고 아니면 최소한 그냥 모른 척 서둘러 도망쳐버렸어도 된다. 하지만 조조는 그 여백사마저 죽여버리는 길을 선택했고, 이건 순전히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행동이라 도덕적으로 옹호의 여지가 없다. 같이 있던 진궁도 아마 원래는 적당히 시치미떼고 서둘러 가려고만 했던 것 같은데, 조조의 이 행동을 보고 충격을 받아 결국 조조 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진궁은 조조 못지 않게 인간성이 개차반인 여포를 섬기면서 그를 경멸했음에도 끝까지 조조의 곁으로는 안 돌아갔는데, 이 사건이 진궁의 행동에 당위성을 보태준다.

게다가 "남이 나를 버리게 하진 않겠다"라는 말을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연의만의 명대사로 탈바꿈시켜 조조가 천하를 삼키려하는 야심 많은 간웅임을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만들었다. 연의의 조조가 '간교하지만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이라는 캐릭터를 얻은건 이 순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서주 대학살과 함께 '조조'라는 캐릭터를 완성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후일 조숭일가가 장개에게 살해되자 연의는 후세인이 지은 시를 덧붙여 이 사건의 인과응보라고 서술한다.

曹操奸雄世所誇(간웅 조조가 세상에 자만하며)

曾將呂氏殺全家(일찍이 여씨 가문을 몰살했네)

如今闔戶逢人殺(이제 지금 집안이 남에게 몰살되니)

天理循環報不差(천리가 순환해 보복함이 모자라지 않네)



5.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여백사/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현대 중국어 문법으로는 宁我负天下人, 不可天下人负我또는 약간 더 옛스럽게 宁肯我负天下人, 休叫天下人负我라고 한다. 신삼국에서는 뒷문장이 조조의 대사로 나온다.[2] 유지기가 위서를 보고 그 왜곡에 어찌나 열을 받았던지 사통 곡필편에서 "왕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첨하여 기술하였다"고 한후 "기록의 간적, 대필의 흉인"이라고 걸쭉한 욕을 내뱉으며 "시호(호랑이)의 먹이로 던져넣어도 상관 없다"고 일갈했다.[3] 거기에 정사 삼국지 본전에선 조조가 이름을 바꾸고 몰래 샛길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위서는 조조가 몇 기를 거느리고 왔다고 한다. 세어, 잡기를 비롯해 이후 조조가 잡힌 기록만 봐도 조조는 몰래 혼자 이동하다가 잡혔을 가능성이 높은데 다른 기록에선 조조가 이렇게 몇기를 거느렸다는 기록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필시 이렇게 된 이유는 밑에서 지적했듯이 조조의 정당방위로 묘사하고 싶은데 '조조 혼자서 함정에 빠뜨리려고 작정한 여러 명을 어떻게 당해내느냐?'라는 지적에 대해서 비호하려고 꾸며낸 것으로 보인다.[4] 위서의 왜곡이 어느 정도냐면, 예를 들어 문소황후를 죽인 것이 바로 문제(조비)인데 왕침은 위서에 문소황후가 죽자 문제가 매우 애석해했다고 적어놨을 정도이다. 위서의 기록이 연의(소설)보다 정확하다고 맹신하는 건 1970~1980년대 중국의 마오이즘, 1980~1990년대 이후 한국와 일본에서 퍼진 관점이다. 이후에는 위서도 전형적인 어용학자의 기록으로서 의심하고 본다.[5] 청나라 호남(湖南) 장사(長沙) 사람. 자는 응보(應甫) 또는 행농(行農)이고, 만호는 자암(自庵)이다. 도광제 25년(1845) 진사가 되고, 편수(編修)를 거쳐 시강(侍講)에 발탁되었다. 태평군이 상(湘)을 공격할 때 새상아(賽尙阿)와 화춘(和春)이 작전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탄핵하여 과감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나중에 경기(京畿)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 상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무고한 사람을 석방했다. 내각학사(內閣學士) 겸 예부시랑(禮部侍郞)까지 올랐다. 광서제 초에 파직되고 경사(京師, 베이징)에 머물면서 저술에 전념했다. 시문서화(詩文書畵)에도 고루 뛰어났다. 저서에 『한서주교보(漢書注校補)』와 『후한서주보정(後漢書注補正)』, 『삼국지주증유(三國志注證遺)』, 『사익당집(思益堂集)』 등이 있다.[6] 낙양에서 동쪽으로 가면 여백사의 집이 있는 성고를 거쳐 더 동쪽으로 중모현이 나온다. 따라서 시간 순서 상 여백사 사건 후에 중모현에서 조조가 잡혔다가 공조가 알아보고 풀어주는 일이 나와야 하지만 연의에서 진궁을 넣으면서 사건을 극적으로 만들고 조조의 비정한 면모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 순서를 바꾸었다.[7]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낙양탈출과 중모현 사건 사이에 여백사 사건이 주석으로 들어가있다.[8] 또 이 에피소드는 당대 실제로 동탁과 대립각을 세운 원소가 아닌 조조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조조의 캐릭터성을 확립한 연의 오리지널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동탁토벌의 제문을 쓴것을 조조로 설정함으로서 조조는 반동탁연합의 중요 캐릭터로 위치가 급상승한다. 즉 정사 원소가 가진 캐릭터성이 연의 조조로 옮겨 갔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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