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소야대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여소야대()는 정부 여당이 원내 소수파를 형성하고, 야당이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요컨대 여당이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상황을 말한다. 만일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단 하나도 없더라도, 여당이 아닌 다른 정당들끼리 연합하여 과반을 형성할 수 있으면 여소야대(혹은 야대여소)로 분류된다. 반대로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점유하지 못하는 여당이 친정부적 야당과 연합하여 과반을 형성하면 여소야대 구도를 탈피할 수 있다. 분점정부라는 말로도 쓰인다. 반대말은 여대야소[1] 또는 단점정부이다.

2. 대통령제인 경우[편집]


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의 경우, 국가원수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이 따로 존재하고 있지만, 의회의 다수당은 야당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국민투표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과 의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게 된 거대 야당의 의견이 충돌하게 되면 정통성의 이원화 문제가 발생함과 동시에, 국정 운영에 심각한 병목이 올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다수당 야당의 힘을 통해 정부의 독선을 견제하고 입법부행정부권력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장점 또한 있다.

행정부의 수장과 입법부를 국민의 직접 주권 행사로 구성한다는 이원적 정통성(dual legitimacy)을 근간으로 하는 대통령제에서는 의회에서 일원적으로 내각을 구성할 권한을 갖는 의원내각제와는 달리 필연적으로 여소야대(분점정부)가 나타날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특히 정당의 기율이 강하고 행정부와 원내다수파 야당 간의 이념, 정책적 간극이 분명한 경우 행정부의 국정운영이나 정책시행에 상당한 걸림돌이 될 우려가 존재한다. 심각한 경우 정부 통치력의 행사가 무능력하고 비효율적이며 무책임하게 변할 수도 있으며, 이는 재정적자 등의 국정 현안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어렵게 만드는 등의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여소야대(분점정부)가 출현할 가능성의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는 역시 선거제도이다. 특히, 대통령 선거국회의원 선거(양원제인 경우 하원)의 주기의 차이가 문제된다. 가령 미국의 경우 대통령 선거는 4년에 한번 실시되는 반면에 하원의원 선거는 2년에 한번 실시되는데, 이로 인해 대통령 임기 중간에 여당에 대한 일종의 평가로서의 하원선거+상원 일부 교체[2]중간선거가 실시됨으로써 다수여당이 중도에 소수세력으로 전락할 수도 있고, 반대로 소수여당이 원내다수파로 부상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5년마다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와 4년에 한번 실시하는 국회의원 총선거 간의 간극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통령 재임 중에 필연적으로 한번은 총선이 실시됨으로써 원내 세력구도가 삽시간에 뒤바뀔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로, 특히 여소야대(분점정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자들은 대통령선거와 총선거의 주기를 통일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는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자는 견해와 함께 피력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대통령선거와 총선거를 동시에 실시하게 된다면, 매우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바에야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대통령은 A당 후보를 뽑아놓고 국회의원 선거는 B당 후보를 더 많이 뽑아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 다만 이것도 19대 대선 같은 다자 대결 구도가 되면 사표가 되어도 군소 정당 후보에게 소신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이 정당도 군소 정당에 찍거나 1위나 2위 후보에게 전략적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이 정당은 자기 정치 성향에 더 일치 하는 군소 정당을 찍을 가능성이 높아서 과반 득표를 못한 채로 당선 되고 여소야대가 될 수 있다. 대선 직후에 총선을 하면 여대야소가 되겠지만 사실상 입법부가 행정부에 귀속 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견제균형을 중시 하는 사람들은 여소야대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3. 의원내각제인 경우[편집]


의원내각제에서는 정부수반총리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고 대신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 또는 연립정부에서 총리를 배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의원내각제에서 여당의 의석이 야당보다 적은 여소야대 구도는 의회의 의석수로 나타난 국민의 선택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따지면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민주적인 의원 내각제에서는 최대한 여소야대 구도가 발생하지 않게끔 연립정부, 내각불신임, 의회해산(조기총선) 등의 제도가 존재한다.

의회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하나도 없고 제1당의 의석조차도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위에서 말한 대로 복수의 정당들이 협의를 통해 연정을 하여 의회 과반수를 채운 후 내각을 구성한다. 이때 연정하는 정당 간의 정치적 합의를 통해 상대적으로 소수당인 정당에서 총리를 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소수당이라도 연정에 참가하면 여당의 일원에 속하게 되므로 이것을 여소야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회 과반수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연정구성도 실패했을 경우, 의석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정당이 소수파 정당과 타협하여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것보다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거나 소수파 정당들이 연정에 참여하여 여당이 되는 것보다 야당으로 남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득이라고 판단하면[3] 소수파 정당들이 의회 내 투표에서 내각 신임에 찬성이나 기권을 하되 연정에는 참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소야대 정부를 출범시킬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 2017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과반에 약간 미달한 수의 의석을 획득했으나 민주통일당과 중요한 사안에 대해 협조한다는 합의를 얻어 사실상 과반 정부를 구성하였지만 민주통일당이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고 연립 정부를 선언하지 않은 상태인데 이를 신임 공급이라 한다. 물론 과반수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다수파 정당이 여소야대 정부 출범을 원하지 않거나 신임투표가 부결되는 경우에는 의회를 다시 해산하고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 예를 들어 스페인에서는 2015년 12월 총선 이후 정당들 간의 정치적인 지향점의 차이가 커서 연정 구성이 되지 않아 조기총선을 2번 치렀는데도 과반수를 차지하는 정당이 안나와서 신임투표를 3번씩 하는 혼란 끝에 결국 어쩔 수 없이 사회당이 내각신임투표에서 기권하는 방식으로 국민당 내각이 재집권하게 된다. 이렇게 의회 과반이 내각을 명시적으로 지지하지 않지만 예외적으로 집권하는 상황을 소수정부라고도 한다. 스페인의 사례와 같은 상황에서는 연정도 신임도 거부할 정도로 집권여당에 호의적이지 않은 야당들이 의회과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내각불신임이 결의되거나 조기총선이 실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수정부의 사례로는 1952년 일본의 자유당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있다. 당시 자유당은 중의원 총선거를 했는데 중의원 과반수에서 6석이 모자랐고, 일본 참의원에서는 250석 중 고작 63석만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최대 야당이던 일본 사회당과 자유당과 가까웠던 민주당 등 그 어떤 정당도 신임 공급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연정 협상을 하다가 무려 5개월 동안 도저히 협상이 안 되어서 총리 지명 투표에서 사회당이 기권하는 형식으로 소수정부 출범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53년 요시다 시게루가 밀어붙였던 일본 자위대 설립을 골자로 한 경찰법 개정안을 두고 국회 공성전도 발생하였다. 결국 1954년 말 의회해산을 통해 새 중의원을 구성하고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현재의 자유민주당, 이른바 55년 체제가 성립한다.

집권 도중에 갑자기 여당의 인기가 폭락해서 여당 의원들이 대거 탈당한다면 여소야대가 가능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내각불신임이 발동되어 정권이 교체되거나 총리가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하게 되므로[4] 결과적으로 여소야대는 발생하지 않는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일부 의원내각제 국가들의 경우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국회의원탈당 자체를 금지하여 탈당할 경우 의원직을 박탈한다는 법조항이 있다.

의원내각제에서 일본처럼 양원제를 채택한 경우에는 일단 총리와 내각을 조각하는 하원에서는 여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상황에서도 하원과 별개로 상원에서는 여소야대가 형성되는 것이 가능하다.


4. 이원집정부제인 경우[편집]


이원집정부제 국가에서는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가 형성되면 동거정부가 출현하여 총리직은 야당이 차지하고 외교권이나 군사권 등을 제외한 나머지 실권도 야당이 차지한다. 프랑스가 대표적인 예인데 프랑수아 미테랑 시절 처음 좌우동거 정부가 탄생하자 미테랑은 총리인 자크 시라크에게 군사, 외교 분야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

단, 여소야대라고 해도 야당들의 성향이나 이해관계가 같지는 않을때도 있다. 이럴때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정당이 어느쪽에 붙느냐에 따라 진짜로 정권이 오가기도 한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한 진영이 의회 과반이 넘는 승리 거두는식이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가 나온적은 없지만 루마니아나 몽골에서는 진짜로 이런식으로 정권이 교체된적이 있었다.


5. 대한민국의 사례[편집]


군사정권 시기의 선거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러진 선거인데다가 선거제도를 의도적으로 여당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5](예: 국회의석의 1/3을 유신정우회에게 배정, 전국구 의석의 2/3를 정부여당에게 배정, 군 부재자 투표에서의 부정선거[6]) 모두 여대야소 정국이 형성되었다.

반면 현행 헌법 시행 이후 국민이 선거를 통해 만들어낸 정치구도는, 오히려 여소야대가 일반적이고 여대야소가 이례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만큼 민심은 한쪽에 권력을 몰아주지 않고 싶어하는 견제심리가 강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정착한 제6공화국 체제 이후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여소야대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대통령은 이명박 뿐이다.

집권당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의원 빼오기나 합당 혹은 탈당한 이들을 복당시키는 등 인위적인 정계개편으로 어떻게든 여대야소를 만들려 하며 이 과정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발생한다. 1990년부터 2001년까지는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나왔음에도 의회에서 여대야소가 된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5.1. 20세기[편집]



5.1.1.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집권당인 대한국민당신익희가 이끄는 민주국민당에게 제1당 자리를 내어주고, 친이승만계 범여권 정당의 의석을 모두 합쳐도 총 210석 중 57석에 그치는 여소야대 정국이 벌어졌다. 당시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패배가 예상되자,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단행하였다. 이를 발췌 개헌이라고 한다.[7] 이후에는 1950년대에 자유당이 관권선거를 하면서까지 여소야대의 출현을 막았으며 그로 인해서 1954년 총선과 1958년 총선에서는 자유당이 과반수를 여유롭게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 이후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여대야소가 당연한 것이 되었고, 대통령제로 회귀한 1960년대에는 역시 관권선거를 동원해서 민주공화당이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게 했고 그 결과로 1963년 총선, 1967년 총선, 1971년 총선에서는 민주공화당이 여유롭게 과반 이상을 확보했다. 그 뒤에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에는 유신정우회가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배정하는 식으로 여소야대의 출연을 막았고, 1980년대 5공화국 때는 지역구 1당에게 전국구 의석의 2/3 배정이라는 선거법을 도입하여 여소야대 정국의 출현을 막게 만들어서 1973년 총선과 1978년 총선, 1981년 총선, 1985년 총선에서 민주공화당과 민주정의당의 득표율이 30%대로 그리 높지 않았던데다가 지역구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전체 의석 과반을 여유있게 확보할 수 있게 만들었다.


5.1.2.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 1990년 3당 합당[편집]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은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켜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민정당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125석을 확보하여 과반수[8]에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열기와 군사정권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으며, 이것이 민주정의당의 과반수 의원석 확보 실패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보수정당 간의 연합을 추진하였고,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전 대통령, 통일민주당 김영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3명의 총재는 3당 합당을 선언하였다. 이 결과 1990년 2월 9일 개헌선을 초과하는 217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5.1.3.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노태우 정부 임기 종료까지[편집]


인위적인 정계개편으로 출범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은, 결국 3당 합당으로 인한 계파 갈등[9], 물가 상승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선거 전 213석을 보유하던 민주자유당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49석을 확보하는 데 그쳐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는 듯 했지만, 무소속 의원 다수가 친여당 성향이었던지라 무소속 의원 상당수를 영입해서 국회 개원당시에 일단 여대야소가 되었고 이후로 새한국당 창당으로 일부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세력누수가 있었지만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승리한 이후로는 통일국민당에 압력을 넣고 온데 갈 곳 없어진 국민당 의원 상당수를 영입해오면서 170석대까지 의석을 늘려놓았는데 결과적으로 김영삼은 총선에서의 부진에도 별 어려움 없이 국정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5.1.4.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편집]


민주자유당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로 정치개혁을 주창하면서 당내 계파간 갈등이 다시 표면화되었고 1995년 들어 신한국당[10], 자유민주연합[11]으로 분당되었고 상당수 의원들도 자민련으로 합류하였다. 게다가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지원에 나서며 정계에 복귀했고, 이 과정에서 민주당을 깨고 나와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등, 이합집산 끝에 치러졌던 선거였다. 결과는 여권 139석, 야권 144석, 무소속 16석으로, 당초 기대보다는 집권당이 선전한 선거로 평가받기는 하나 여전히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다. 신한국당은 민주당과 자민련, 무소속 의원 빼가기로 어찌어찌 과반은 확보하였으나 1996년 연말 노동법 파동의 원흉이 된다.


5.1.5.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후[편집]


헌정 최초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여야 위치가 바뀌어서 자연스럽게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고, 대통령 취임당시까지는 한나라당이 160석대를 확보하는 거대야당이었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합쳐도 122석에 불과한 소수여당이었지만 이후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한나라당과 국민신당 의원 빼오기를 통해 의석수를 불렸다.[12] 결국 1998년 하반기 들어서 한나라당의 과반수가 붕괴되었고, 국민신당새정치국민회의간의 합당이 성사되며 개헌저지선을 넘겼다, 공동여당인 자유민주연합도 보수파 의원 영입을 통해 15대 총선 당시에 얻은 50석을 4석 상회하는 54석까지 의석을 늘렸는데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157석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하여 어찌어찌 과반은 확보하였다.


5.2. 21세기[편집]



5.2.1.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16대 총선 때 연합공천이 무산되어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이 각자 따로 후보를 내었는데 민주당은 98석에서 115석으로 의석수를 늘리나 자민련의 참패로 양당을 합쳐도 132석으로 한나라당에게 1석이 못미치는 여소야대 정국이 되었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이 자민련에게 원내교섭단체를 유지하는 대가로 의원을 4명 꿔주면서 연정을 유지하였고 거기에 민주국민당, 희망의 한국신당을 추가로 연정파트너로 끌여들이며 일단 2001년 8월까지는 여대야소가 되었다.

그러나 2001년 8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안 가결에 자민련이 동참했고, 이를 계기로 자민련과의 연정이 무너지면서 또다시 여소야대로 전환했으며 거기에 더해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며 한나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였고 이후 강성구, 원유철 등 일부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을 영입하여 세를 더욱 불려나갔다. 이후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의 대선 승리로 정권을 재창출하게 되었지만 한나라당이 국회 과반을 넘기고 지자체장과 지방의회 대다수를 점유하는 거대야당이었던지라 국정수행에 있어 견제를 받을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더해서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의 분당으로 여소야대의 상황은 더더욱 심화되어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전체 의석비율의 17%를 차지하여 개헌저지선의 반을 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5.2.2. 2005년 재보궐선거 ~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의 과반의석을 확보함에 따라 여대야소 정국이 형성되었다. 의외로 이게 현행헌법에 따라 치러진 선거결과로는 최초의 여대야소이다. 그러나 이때 채용된 신진 의원들. 이른바 탄돌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기정치를 하면서 참여정부레임덕에 빠져버렸으며 이후 벌어진 재보선에서 연이어 참패하고, 이후 탈당 러시가 벌어지면서 턱걸이 과반의석은 손쉽게 붕괴되었다.

이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권이 교체되고, 그의 취임 불과 1개월 남짓 후에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 정권에 대한 반감이 높지는 않았고 뉴타운 열풍이 불고 야당투표층의 투표율도 저조하게 나타나며[13] 한나라당이 153석으로 과반의석을 차지하였으며 이후에 재보선에서 여러번 패배하기는 했지만 친박연대와 무소속 의원의 복당으로 한나라당의 의석이 170석을 넘었기 때문에 임기내내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은 지켜낸다. 이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새누리당이 예상 밖으로 152석의 과반의석을 가져갔으며,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현행 헌법이 시행된 이래 가장 오랜 8년간의 여대야소 정국(2008~2016)을 이어가게 되었다.


5.2.3.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박근혜 정부 임기 종료까지[편집]


당초 야권 분열 등으로 여당 새누리당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나, 선거 결과 새누리당은 122석에 그친 반면, 야당인 더불어민주당123석, 국민의당이 38석, 정의당이 6석을 차지하였고, 무소속 후보 11명이 당선되어, 새누리당은 여소야대를 넘어 국회 제1당 자리까지 빼앗기는 참패를 당하였다. 참고로 무소속 당선인 중 7명은 새누리당, 2명은 더불어민주당 출신이고, 2명은 구 통합진보당 계열[14]인데, 새누리당 계열의 무소속 당선인들을 복당시켜 원내 제1당은 탈환했지만, 그래봐야 맥시멈 129석으로 과반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복당을 놓고도 당내 이견이 많았기에 복당이 큰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새누리당에서 바른정당이 분당하고, 추가적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국회의원이 나오며 마침내 94석으로 추락하여 개헌저지선마저 뚫리는 극단적인 여소야대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헌법재판소2016헌나1 판결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당하면서 새누리당에서 당명을 변경한 자유한국당은 명목상[15] 여당 자격마저 상실해버렸다. 여태껏 있던 여소야대의 사례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단적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5.2.4.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2017년 5월 10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이 당선되면서 여소야대 상황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120석이었기 때문에 개헌을 위해 연정 구성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연정 구성도, 개헌도 현실화되지 않았다.[16] 더군다나 연대 가능성이 있던 정당 가운데 체급이 가장 컸던 원내 제3당 국민의당은 바른정당과의 합당 과정에서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으로 쪼개져 버리면서 사라졌다. 물론 일부 정당들간 정책 연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2019년 하반기에 여당인 민주당과 바른미래당 일부, 대안신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일부 야당들이 4+1 협의체를 구성하여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을 추진하기 위한 일시적 정책 연대를 하기도 했다.

한편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야권의 이합집산이 복잡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민주평화당정동영계에 반대하는 세력이 대안신당을 차리면서 2차 분열되었으며, 바른미래당손학규 대표와 구 바른정당 계열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구 바른정당계 의원들이 새로운보수당을 차리면서 2차 분열되었다. 그런데 바른미래당에서 구 새누리당계가 완전히 빠지면서 호남 색채가 선명해지자 도리어 비슷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대안신당이 도로 합당하여 민생당을 창당하였다. 거기에 야인으로 남아있던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대표도 국민의당을 다시 창당하였다.

이러한 이합집산은 호남계나 제3지대 정당뿐만 아니라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정당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우선 선거법 개정에 반대했던 제1야당 자유한국당은 비례대표용 위성정당미래한국당을 창당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여당 더불어민주당도 더불어시민당을 만들며 대응했다. 거기에 결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자유한국당과 유승민계의 새로운보수당 + 이언주 의원이 이끄는 미래를향한전진4.0 + 일부 손학규, 안철수계 의원과의 합당까지 성사되며 미래통합당이라는 보수 통합정당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21대 총선을 앞두고 국회가 더불어민주당 + 더불어시민당(민주당계 정당)과 미래통합당 + 미래한국당(보수 통합정당), 민생당(호남계 제3지대 통합정당), 정의당(진보정당), 국민의당(제3지대 중도 정당), 열린민주당(친문 민주당계 정당)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더불어민주당 + 더불어시민당이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180석을 가져감으로써 이러한 여소야대 구조는 깨지게 되었다. 특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서 군소정당의 의석수가 늘 것이라는 당초 의도와는 달리 거대양당이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오히려 양당제가 더욱 공고해지는 결과가 발생했다. 20석으로 교섭단체 지위를 갖고 있던 민생당은 단 한 석도 얻지 못하며 원외정당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정의당, 국민의당, 열린민주당 등 기타 군소정당들도 한 자리수 대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5.2.5.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 ~ 현재[편집]


상술했듯 168석의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을 확보한 상태에서 112석의 국민의힘 윤석열이 당선되면서 다시 여소야대가 되었다. 이 문제는 대통령 선거 전부터 제기되었기에 국민의힘에서는 대통령 선거 승리 시 더불어민주당 내 비주류를 끌어들인 정계 개편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의견도 여러 차례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결과가 당초 예측과 달리 소수점 단위의 진땀승에 그쳤고 탈당의 유인이 적어져 대규모 정계 개편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최소한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전까지는 여당 의석이 야당에 크게 밀리는 상태가 지속될 것이 확실하다.[17]

앞선 사례들과는 달리 다당제 구도도 아니고 압도적 의석 수의 단일 야당 하나가 버티고 있는 페루의 쿠친스키 정부 시절처럼 보기 드문 상황이라[18][19], 그동안은 아주 이례적인 경우에나 쓰이던 법률안 거부권국무위원 해임 건의안 등 행정부-의회 간의 견제 수단이 임기 내내 수시로 발동되고 있다.

한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취임 이후 영수회담을 권하기도 하면서 협치의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 하지만 현재는 양당간 극한대립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9 11:39:12에 나무위키 여소야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야소여대라고도 한다.[2] 상원의 임기는 6년이므로 2년마다 1/3씩 선거를 행한다.[3] 자유민주당이 2010년 총선 이후 보수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가 2015년 제56회 영국 총선에서 참패를 맛본 사례가 있다.[4] 실제로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민주당 의원들의 줄탈당으로 여당인 민주당의 중의원 과반 붕괴가 임박해지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중의원 해산을 선언했다.[5] 실제로 정부여당에게 유리한 조항만 빼더라도 9대 총선때부터 12대 총선때까지는 전부 정부여당이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6] 군 부재자 부정선거는 1992년 총선때까지도 행해졌으며, 군 부재자 투표에서의 부정선거가 사라지게 된것은 이지문 중위의 폭로와 함께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이 참패하고 나서부터였다.[7] 사실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이게(직선제) 맞는 것이긴 한데, 문제는 개헌 과정에서의 위헌성과 비합법성, 폭력성이다.[8] 과반수인 150석 미만을 차지하였고, 당시 민정당은 과반수에서 25석 차이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했다.[9] 3당 합당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노태우(박철언), 김영삼, 김종필의 세 축을 중심으로 각각 민정계, 상도동계, 청구동계의 계파가 형성되었다. 여소야대를 타개하기 위한 미봉책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름만 합당일 뿐 같은 당 안에서는 여전히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따로따로 노는 셈이었다.[10] 민자당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김영삼이 당명 변경을 지시하였다.[11] 김종필을 중심으로한 공화계 의원으로 구성되었다.[12] 이 당시 김대중이 보수층을 의식해서 보수적인 인사 상당수를 영입해온데다가 한나라당이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을 합당해 결성한 정당이다보니 원래 민주당에 소속되어있던 개혁파 의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도 영향이 컸다. 결국 이념적 색체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쉽게 당적을 이동할 수 있었던 것.[13] 투표일에 비가 온 것도 한 몫 한다. 만약 투표일에 비가 안 왔으면 한나라당이 과반 미달할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14] 이 2명은 훗날 새민중정당을 거쳐 민중당 소속이 된다.[15] 다만 황교안의 성향과 자유한국당의 황교안 지지 등을 감안하자면 그래도 사실상 여당 자격은 남아있던 셈이다.[16] 일단 제19대 대선을 기점으로 민주당은 기존 민주당계 정당들과는 달리 친문 계열 외에는 다른 파벌들이 모두 궤멸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간 호남계 국민의당 의원들의 복당도 당원들이 극렬히 반대하였다.[17] 만약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수 정당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면 윤석열 정부는 임기 5년 내내 여소야대로 보내게 되며 최악의 경우(즉, 야당 의석이 과반수 이상이나 개헌선 이상일 경우)에는 윤석열 대통령은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페루 대통령처럼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탄핵을 당하거나 자진사임할 가능성이 있다.[18] 사실 다당제 구도였어도 합의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20대 국회 때가 다당제 구도였는데 당시 3당이었던 국민의당은 제1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과 대부분 의견을 같이 했었다. 3당 입장에서도 여당이 확실한 유인책이라도 주지 않는 이상 여당과 반대 진영에서 활동하다 잠깐씩 여당과 손을 잡는 것이 자신들의 입지를 높이는데 당연히 더 좋다. 지나치게 여당에 붙었다가 자칫 여당 2중대 프레임에 빠지게 되면 양쪽으로부터 모두 외면당해 존재감이 크게 상실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20대 국회 때 정의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문제로 지나치게 더불어민주당 의견에 동조했고, 거기에 정의당의 양대 축이었던 노동계와 여성계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결국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존재감을 크게 상실했다.[19] 심지어 선거 기간 내내 이준석 전 대표와 갈등을 노출하는 등 윤석열 대통령의 당 장악력이 아주 확고하지도 않은 상황이라 여러모로 국회와의 관계 설정이 험난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