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장우중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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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황
3. 해석
4. 이후
5. 이모저모



'여 수장 우중문 시', 직역하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이다.


1. 개요[편집]


神策究天文(신 책 구 천 문 그대의 귀신 같은 전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다하였고

妙算窮地理(묘 산 궁 지 리 기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지리를 통달했구나

戰勝功旣高(전 승 공 기 고 전쟁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 족 원 운 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고구려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보냈다고 전해지는 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억양법[1]이 사용된 시이다.


2. 상황[편집]


2차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군의 철저항전 때문에 공격에 난항을 겪고 있던 수양제의 수 지휘부는 우중문 장군을 지휘관으로 삼아 병사 30만 5천 명을 뽑아서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으로 곧장 내려보냈다.

을지문덕은 이들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항복 사신을 가장하고서 수나라 진영에서 우중문을 만났다. 이미 수 양제에게 적 장수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잡으려고 했지만, "대국의 장수가 어찌 항복을 타진하러 온 사신을 붙잡는다는 말이오? 대왕께 아뢰어 황제 폐하를 뵙게 하겠으니 나를 보내주시오."라는 말을 듣고, 상서우승 유사룡의 만류도 있고 해서 무사히 돌아보내고 만다. 그리고 을지문덕은 굶고 지친 수나라 군대의 상황을 샅샅이 살핀 후, 우중문에게 이 시를 보낸다.


3. 해석[편집]


사실 이 시는 내용을 천천히 뜯어보면 정말로 우중문을 칭찬하는 게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반어법으로 '우중문을 비꼬기 위해 쓰인 시'다. 정규 교육 과정 중 한문 시간에 배우는 경우가 많아 한시 중에서는 비교적 지명도가 높지만, 이 시가 수나라 군대를 조롱하는 내용이라는 간단한 설명만 하고 넘어가는게 대부분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동아시아에서 병법을 논할 때는 3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논했는데 인화, 지리, 천문(또는 천시)이 그것이다.[2] 각각을 해석하면 여론, 좋은 땅, 시기 또는 운명으로 해석이 가능한데 을지문덕은 이것을 뒤집어서 역순으로 천문, 지리, 인화를 논하면서 우중문이 직면한 상황을 비꼰 것이다. 구성 자체가 반어법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대의 귀신 같은 전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다하였고

→ 당시 시점은 음력 6~7월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7~8월 즈음이었다. 즉, 한여름이었다. 삼국지나 역사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여름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심히 꺼렸다. 그 이유는 여름은 농번기이기 때문에 농사를 지어야 할 농부들을 병사로 징집하면 그해 농사는 망치는 것이었고, 장기적인 국력을 스스로 깎아먹는 자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또한 농사 문제는 제쳐 두고서라도, 동아시아의 여름은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으로 덥고 습한 기후를 띠는데, 이런 기후조건 때문에 갑주나 병장으로 꽁꽁 무장한 병사들의 피로도가 상승하고 열사병을 유발할 수 있었으며, 당시 시점인 7~8월은 현대에도 장마폭염이 번갈아 오는 시기로, 대량의 폭우와 무더운 날씨는 행군을 비롯한 전략, 전술적 행동에 큰 차질을 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체력을 떨어뜨리고 전염병을 유발할 수 있었다. 또한 활의 접착제로 쓰이는 아교가 습기에 약했기 때문에 고온다습한 환경에서는 사용하기 나빴던지라 궁병의 운용에도 차질을 주었다. 이성계 역시 요동 정벌을 반대하는 4불가론 중에 여름이라는 점을 두 번(두 번째, 네 번째)이나 강조했다.
사실 을지문덕의 이 천문 드립은 수군의 당시 상황뿐만이 아니라 수군의 첫 출병 시점까지 도매금으로 묶어서 깐다고 볼 수도 있는데, 수군은 1월, 즉 한겨울에 출병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겠지만 대부분의 병법서에서는 겨울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극구 만류한다. 병사를 부리기 힘든 혹한이 몰아치기 때문. 게다가 주요 싸움터인 만주 지방은 겨울에 시베리아 이상의 기록적인 기온이 가끔 나올 정도로 혹한으로 유명한 곳이다.[3] 먼 훗날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그 후의 독일 국방군도 결국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대패했으니 을지문덕의 말대로 천시를 제대로 잘못 고른 셈이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는 상황마다 다르지만 4월 말에 출병하여 6월~7월이 되기 전에 1차 목표를 달성(적들의 1차 방어선을 와해시키고 점령지를 확보)한 후, 8월까지 보급을 충당하고 양적 주력을 담당하는 병력을 예비대로 교체한 후 9~10월쯤 다시 출병하여 12월이 되기 전에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좋다. 또한 동원하는 병력은 실제 동원 가능한 장부상의 병력의 10%~30%가 가장 적합하며, 전쟁을 벌이기 전에 최소한 1년 먹을 식량을 축적하여 그 해 농사가 파탄나는 것을 막는 것이 합리적이다. 진격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늦가을(현지에서 민간인들의 추수가 끝나 상당한 양의 식량을 자체조달할 수 있는 시기)이 좋으며 이때문에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 당시 반격을 꾀하던 아신왕은 계속해서 늦가을에 북상해 왔다. 이 시기를 지키기 힘들고 어떻게든 농번기에 전쟁을 일으켜야 하는 상황이라면, 국가의 역량을 쥐어짜야 나올 병력이 아닌 최소한의 군주에게 복종하는 상비군과 믿을 만한 전선사령관급 장수 3~5명만을 끌고[4]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이 좋다. 그 정도로 마무리지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나라라면, 자폭이므로 전쟁을 하면 안 된다.

신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지리를 통달했구나

→ 우중문의 수군은 보급선의 한계를 넘어 지나치게 진격하는 바람에 군량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병사 개개인에게 군량을 비롯한 보급품을 스스로 운반하게 하고 있었던 터라 현대의 완전군장 이상의 군장을 싸매고 행군하는 상태였다. 몇주치 식량을 짊어지고 갑주에 창까지 꼬나든, 질병을 치료할 백신도 없는 고대 군대가 변변한 냉방기구도 없이 장마철에 산과 언덕, 습지대를 지나간다면 어떤 헬게이트가 열릴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병사들은 제대로 끼니를 때우지 못해서 사기도 왕창 떨어져 있었다.

전쟁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이 시의 클라이맥스. 내용만 보면 "싸움에서 이긴 공적이 높다"고 칭찬하는 것이지만, 정작 전쟁 내내 우중문은 고구려를 상대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앞에서는 천문, 지리를 제대로 언급했음에도 이 파트에서는 인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통으로 생략해버렸다.[5] 물론 공이라는 것은 결국 여론이나 지도자 등 사람의 의견으로 좌우되는 부분이므로 넓게 보면 인화에 해당하는 파트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정작 세운 공이라는 게 거의 없는 상황을 반어법으로 칭찬한 것이니 인화가 없다고 비꼰 셈이 된다.
을지문덕의 계산에 따라 의도된 승리를 거두고 있었던 수나라 입장에선 그야말로 허탈한 기분. 게다가 이걸 이 전쟁의 없는 전공을 칭찬한 게 아니라, 우중문이 그동안 대장군 자리까지 오르기 위해 쌓아야 했던 전공을 칭찬한 것으로 해석한다면[6] 우중문의 처지는 훨씬 더 처참해진다.
다른 방향으로는 을지문덕은 겉으로는 항복하기 위해서 찾아온 사신이었다. 그런데 그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오히려 잡아가겠다고 위협까지 해서 내쫒은 상황이라 사실상 고구려의 항복을 받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되면 평양성을 점령해야 하는데, 이미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이 박살난 상황이고 출발할 때부터 보급품은 바닥나서 병사들이 굶어죽는 실정이라 장기간에 걸쳐 공성전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우중문은 공훈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오

→ 간단하게 "목숨이 아까우면 알아서 후퇴하는 게 좋을 거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7]


4. 이후[편집]


을지문덕! 이 자가 나를 속이고 무사히 돌아가더니 이제는 이런 시를 보내서 나를 조롱하는구나! 젠장, 어쩔 수 없다. 가자!

-지경사, 만화 한국사


으! 이놈이 이젠 나를 놀리기까지 하는구나! 완전히 속았군.

Why?, 만화 한국사


드러난 문장과 정반대로 철저히 비꼬는 의미임을 우중문 역시 모를 리가 없었기에 당연히 격노했지만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던지라 퇴각을 결정한다. 도발의 의미도 어느 정도 직감했는지 우중문은 퇴각에 속도도 내지 못하고 가시돋친 경계태세를 유지하며 미적미적 퇴각했으나 얼마 뒤 살수 강에서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총 병력의 99%[8] 사망, 도주, 나포되었다. 당연히 유사룡은 패전 이후 처형당했고, 우중문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에 화병으로 형집행정지된 뒤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5. 이모저모[편집]


이 시는 운율을 분석했을 때 고체시에 해당하며, 상성으로 압운을 맞추고 있다. 또한 1행과 4행, 2행과 3행이 각각 담백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미묘하게 운율을 변주하고 있다.[9] 이규보는 이를 두고 '구법이 기고하여 아름답게 꾸미려는 투가 없다'고 높게 평가한 바 있다.

한미 FTA(...) 체결 협상 당시 농림부 농업협상팀 담당자에 의해 이 한시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 대표단에 전달된 적이 있었다. 이쪽에서 어느 정도 양보안을 내놓았으니 미국 역시 공세의 수위를 조절해 달라는 의미로 전달된 것. 참신하고도 운치 있는 발상이라는 평가가 나왔으나, 외교 관례를 넘어선 '돈키호테'식 행동은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미국 쪽에서는 한시라서 원래 의미를 잘 몰랐는지 '과찬'이라며 웃고 넘긴 듯(…).[10]

번역본은 아래와 같다. (Sui와 Yu Zhongwen은 수, 우중문의 중국 발음 표기)

To Sui General Yu Zhongwen

Heaven knows how marvelous you are in your strategy,

Earth knows how shrewd you are in your calculation.

Your name already knows no bounds in this war,

Time to know satisfaction in your toil.


2차대전 이후 영국군 장교였던 아서 파커 중령도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을 조롱하기 위해 비슷한 내용의 서한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이걸 적장의 칭찬으로 받아들인 무타구치는 한층 뻔뻔해졌다.

SBS 연개소문에서는 45회에서 묘사되었다. 우중문은 이 편지를 받자마자 "이 자가 나를 조롱하는 것인가!"라고 분노하였으며, 뒤늦게 편지를 읽은 우문술도 이건 빨리 돌아가라는 협박 같다고 했다. 그러나 수나라 군의 상황은 이미 군량도 바닥나고 더 이상 싸움을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녹록치 못해버렸던지라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물리게 되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30만 별동대가 몰살당하다시피 하는 대참패를 당한다.

KBS 대조영에서는 2회에서 양만춘당 태종을 도발하기 위해 피에 물든 수나라 깃발과 이 시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당연히 당 태종은 크게 노발대발하고, 한편으로는 '분명 이건 양만춘 그자의 계략이다. 이렇게 뛰어난 자를 뒤에 남겨 두고 평양성을 공격한다면 그건 더욱 위험하다.'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려서 안시성 전투를 결정하게 된다.

대체역사소설 '감자세자와 뒤주대왕'에서는 조선왕이 된 주인공이 청나라 황제에게 (나의) 전략은 하늘에 닿았고 (나의) 계책은 지리를 꿰뚫었으니 (너는) 꺼져라' 라며 자뻑용으로 썼다. 실제로 전쟁에서 이기는 중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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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억양의 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작시법. 시행마다 일정 수의 강세 음절을 포함시켜야 한다. 음절의 길이를 중시하는 양적인 작시법과 대비된다.[2] 맹자에서도 나오는 말이다(공손추 하 1). 삼고초려 때에도 제갈량유비에게 "조조는 천시를 잡았고, 손권은 지리를 잡았으니, 장군은 인덕을 잡아 서쪽을 취하십시오."라고 조언한 바 있다.[3] 지금같이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에도 (옛날만큼 못하지만) 계속 혹한이 들이치는 지역 중 하나가 만주 지방이다. 한반도의 혹한도 먼저 만주 지방을 거쳐 오는 경우가 절대 다수. 그리고 지구온난화가 전무하여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낮았던 고구려 후기 때는 얼마나 혹독한 한파가 들이쳤을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4]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회전을 치를 경우 방진은 중진, 좌익, 우익으로 나누기 때문에 군주가 중진을 맡는다 해도 사령관급이 최소한 2명 필요하고, 공성전을 치를 경우 성문이 동서남북으로 있는 경우가 많기에 4방향으로 공격해야 하므로 사령관급이 최소한 3명 필요하다. 여기에 보급선을 지휘하는 행정관 1인, 민사작전을 지휘하는 행정관 1인까지 합쳐 최고사령관은 군주 밑에 3~5인 정도를 두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몽골 제국칭기즈 칸사준사구라고 불리는 8인의 지휘관을 두었다. 교대배치를 고려한다면 전선에 항상 4명씩은 끌고 다니겠다는 의미.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는 북부집단군, 중부집단군, 남부집단군의 주력 병력에 각각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 가장 신임하는 장군들을 심어두었고, 귄터 폰 클루게, 게오르크 폰 퀴힐러 등의 장군들로 이를 보조했다.[5] 수나라가 전쟁 전부터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끌고가 강제로 무장시켜 전쟁터라는 사지로 내몰았던 광경에서 이미 인화라곤 눈씻고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6] 이렇게 해석한다면 "여기서 안 물러나면 그 대장군 커리어마저 말아먹을 텐데?" 라는 뜻이 되어버린다.[7] 이 지족(知足)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 글을 도교와 연결짓는 견해도 있다. 사신도 등 도교와 고구려 간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이 가설은 꽤나 인정받고 있는 듯하다.[8] 30만 5천 명 중 단 2,700여 명만이 생환했다. 군사학적으로 20%만 잃어도 전멸이라고 보는데 (명량 대첩에서도 이순신의 함대가 직접 격파한 왜선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무려 99%나 잃은 전투는 전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9] 평입거평 (1행) / 거평거 (2행) / 거평거 (3행) / 평입거평 (4행)[10] 다만 한시인 것과 별개로 외교적 수사로서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수준의 느낌은 주기 때문에, 미국 측이 아예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