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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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9~2021년 역대 총선결과
2.1. 초대 총선 (1949)
2.2. 제2대 총선 (1953)
2.3. 제3대 총선 (1957)
2.4. 제4대 총선 (1961)
2.5. 제5대 총선 (1965)
2.6. 제6대 총선 (1969)
2.7. 제7대 총선 (1972)
2.8. 제8대 총선 (1976)
2.9. 제9대 총선 (1980)
2.10. 제10대 총선 (1983)
2.11. 제11대 총선 (1987)
3.1. 제12대 총선 (1990)
3.2. 제13대 총선 (1994)
3.3. 제14대 총선 (1998)
3.4. 제15대 총선 (2002)
3.5. 제16대 총선 (2005)
3.6. 제17대 총선 (2009)
4. 관련 문서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이후 실시된 연방의회 선거의 결과를 다루고 있는 문서이다.


1. 1949~2021년 역대 총선결과[편집]


파일:독일 역대 선거결과 1949~2021.png


2. 1990년 재통일 이전 (서독)[편집]



2.1. 초대 총선 (1949)[편집]


1949년 8월 14일
총원: 402석, 과반의석: 202석
아데나워 1기 내각
208석
야당
194석
CDU/CSU
자유민주당
독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중앙당
남슐레스비히 유권자 연합
기타
139석
115석+24석
52석
17석
131석
15석
10석
1석
37석[1]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처음 수립될 의회를 선출하기 위해 시행된 선거. 각 주에서 5% 이상 득표한 정당에 의석을 배분했기 때문에, 지역정당이나 군소정당 후보도 여럿 당선되었고 무소속 당선자도 있었다.

원래는 쿠르트 슈마허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 유리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사회민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거대 정당 중 하나였고, 나치 시절에도 지하 조직이 건재했기 때문에 종전 후 곧바로 재건되어 다른 정당에 비해 조직력이 월등했다.

반면 우파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수많은 군소 정당으로 난립했으며, 그나마 20년대 후반부터 나치가 표를 쓸어가면서 다른 우파 정당들은 지리멸렬했다. 종전 후 자유주의 우파 계열 정당인 DZP, DDP, DNVP, DVP정당 출신들이 연합하여 CDU/CSU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민련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우파 정당들도 상당했다. 특히 기민련의 보수적 중도우파가 아닌 순수한 의미에서 자유주의적 우파를 지향했던 자유민주당과 끝내 통합에 실패한 것은 기민련에게는 끝내 아쉬운 일이었고, 이는 나중에 70년대에 자민당이 사민당에 붙어 연정에 참여하면서 CDU/CSU가 사민당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0년간 야당에 머무르는 단초가 되었다. 당시 CDU/CSU에는 독일 제국 시절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을 거치며 정치, 행정 경력도 상당한 인물들도 많았고, 반나치 활동가 출신도 많았지만, 문제는 상당수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서로 티격태격하던 반목하던 사이였고, 언제 당이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유권자들도 이런 기민련에 쉽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2]

허나 결국 소련의 반대로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역, 즉 서독 지역에서만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하면서 사민당의 텃밭인 동독 지역이 날아가버리고 만다. 게다가 갈수록 냉전이 격화되고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정당인 사민당은 유탄을 맞게 되었다. 물론 슈마허는 본인과 사민당 출신들이 적극적인 반나치 활동을 벌였고 나치로부터 핍박받았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했으며, 공산당에 대해서도 붉은 나치라고 비난하며 거리를 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주의 중립국, 부분적 계획경제, 서방과 소련 양측의 등거리 외교 등을 주장하던 사민당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반면 베를린 봉쇄 사태가 벌어지며 소련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자 그동안 반목하던 우파 계열 정치인들은 서로 갈등을 그치고 CDU/CSU을 중심으로 단합하자고 결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기민련 소속 관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주도했다고 대중들에게 인식된 경제개혁 정책의 지지에 힘입어 선거 결과 CDU/CSU가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처음에 CDU/CSU의 대표이자 총리 후보였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사회민주당에 대연정을 제의했지만 사민당 당수였던 쿠르트 슈마허가 이를 거부했다. 결국 CDU/CSU는 자유민주당, 독일당을 파트너로 연정을 구성했다.

초대 연방 대통령으로는 자유민주당의 테오도어 호이스가, 총리로는 기독교민주연합의 콘라트 아데나워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초대 연방의회는 신생 국가 서독의 재건과 민주주의 정착[3]과 경제, 국제 지위 회복을 위해 일하게 된다. 또 아데나워 총리는 나치의 범죄에 대해 사죄하며, 서독이 국제 사회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2.2. 제2대 총선 (1953)[편집]


1953년 9월 6일
총원: 487석, 과반의석: 244석
아데나워 2기 내각
333석
야당
154석
CDU/CSU
자유민주당
전후이주자연합[4]
독일당
사회민주당
중앙당
243석
191석+52석
48석
27석
15석
151석
3석
이 선거 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독일의 선거 제도로의 모습이 갖춰지게 된다. 초대 총선에서 각 주 별로 5% 이상 득표한 정당에게 의석을 배분하던 제도를 폐지하고, 봉쇄조항을 전국 단위 5%로 격상하였다. 봉쇄조항의 규정이 까다로워진 대신, 초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투표 결과만을 바탕으로 비례의석을 분배했던 것과 달리, 지역구 선출과 별개의 전국 단위 정당 투표, 다시 말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이 때부터 도입된다.[5]

전후 복구, 민주주의 확립, 경제 성장을 이뤄낸 여당 CDU/CSU이 초대 총선과 비교해서 득표율이 10% 이상 늘어나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단독 과반수에 단 한 의석이 부족했던 CDU/CSU는 지난번과 달리 2개 이상의 당과 연정 구성을 할 필요는 구태여 없었지만, 범우파 진영의 연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아데나워는 자민당 이외에도 독일당과 전후이주자연합을 모두 연정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반면 당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쿠르트 슈마허를 1년전 뇌졸중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잃은 사민당은 에리히 올렌하우어를 대체자로 내세웠지만 지난번 총선과 비교해서 오히려 득표율이 떨어지면서 완패를 맛보았다.

이 때부터 서독이 연합군으로부터 실질적인 주권을 모두 회복함에 따라 연방의회 역시 완전한 주권 국가의 의회로 기능하게 되었고 더 많은 책무를 지니게 되었다. 이후 기민당이 주도하는 서독 정부와 의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서독의 신뢰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되는데, 2대 연방의회가 이룬 주요 업적은 로마 조약을 통해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경제 공동체(EEC) 창설 및 연방군 건설을 통한 서독 재무장 등이 있다.

이 선거에서 독일 공산당은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으며 이후 1956년 독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서 강제로 해산된다.


2.3. 제3대 총선 (1957)[편집]


1957년 9월 15일
총원: 497석, 과반의석: 249석
아데나워 3기 내각
287석
야당
210석
CDU/CSU
독일당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270석
215석+55석
17석
169석
41석
콘라트 아데나워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슬로건인 "Keine Experimente (실험은 하면 안된다)"를 내걸고 3선에 도전했다. 사민당에서는 지난 선거에 이어 에리히 올렌하우어가 다시 아데나워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민당은 아데나워의 나토 가입으로 상징되는 친서방 외교/군사 노선을 반핵투쟁과 연계시키는 선거 전략을 사용했고, 아데나워는 이에 대해서 "사민당의 집권은 신생 연방공화국의 종말이다."라고 맞대응했다. 하지만 1957년 초, 2차 대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사실상 프랑스가 관할하고 있던 자르 보호령이 주민선거를 통해 최종적으로 독일 연방공화국의 16번째 주인 자를란트로 복귀하기로 결정하면서, 아데나워의 친서방 외교노선은 다시 한 번 귀중한 승리를 거두었고 사민당은 또 한 번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게다가 아데나워 2기 내각 내내 논의됐던 연금개혁안[6]이 대다수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데다가,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독일의 전후 경제 복구가 순탄함을 넘어서서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던 것도 집권여당 CDU/CSU가 압승에 큰 도움이 됐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립 이후, 총선에서 특정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아데나워는 3선에 성공한다. 사실 선거 직전만 해도 기독교민주연합은 승리를 자신하지 못했던지 독일당을 밀어주었고[7], 선거 이후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음에도 독일당과 연정을 꾸렸다.[8]

한편, 계속된 콩라인 신세에 집권여당이 될 방법을 찾기 시작한 사회민주당에서는 두 번 연속으로 참패를 당한 올렌하우어가 뒷선으로 물러나고 , 소장파 정치인 빌리 브란트가 당 대표로 선출된다. 빌리 브란트는 곧바로 당의 체질 개선에 착수하여서,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공표하면서 사민당의 지향점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에서 사민주의로 전환했음을 선언한다. 한편 1959년에 테오도르 호이스가 대통령 3선을 포기함에 따라, 하인리히 뤼프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신생 연방주 자를란트에서는 CDU/CSU가 같은 선거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하지 않고 동시에 후보를 냈는데, 1949년 이후 CDU와 CSU가 지역구에서 후보단일화를 하지 않고 독자 출마를 한 사례는 이때가 유일무이하다.[9]


2.4. 제4대 총선 (1961)[편집]


1961년 9월 17일
총원: 499석, 과반의석: 250석
아데나워 4기 -> 에르하르트 1기 내각
309석
야당
190석
CDU/CSU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242석
192석+50석
67석
190석
이 때부터 독일 연방 하원은 CDU/CSU,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만이 당선자를 내는 상황이 1980년 총선까지 이어진다. 1957년 총선에서 독일당이 후보를 낸 지역구에는 후보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독일당을 지원했던 기독교민주연합은 단독 과반수 획득에 자신감을 얻어 독일당을 지원하지 않았고, 기독교민주연합의 도움 없이는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 할 것이 뻔한 독일당은 총선에 불참했다.[10]

이 선거부터 자유민주당이 지역구에서 전멸하고 정당명부로만 당선자를 내는 상황이 이어져 오다가 2013년 총선에서 5%를 확보하지 못 하면서 전멸했다.

선거에서 CDU/CSU가 다시 한번 승리했지만, 이전 선거보다 의석이 줄었으며, 그에 반해 사민당은 21석 증가했다. 선거 열기가 한창 달아오를 무렵 베를린 장벽이 동독 당국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서베를린의 시장이자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인 빌리 브란트에게는 정치적 위기가 될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위기가 전쟁으로 확전될까 경계하며 대응을 자제하던 기민당의 중앙 정부에 비해, 현직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는 이것을 기회로 활용하여 연일 현장에 머무르며 동독과 서방 양면에 사태 해결을 촉구하던 모습이 국민들에게 호감을 가면서 사민당의 지지율 상승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1957년의 선거와 비교해서 사회민주당은 20석 가량을 더 얻었고 기독교민주연합은 20석 가량을 잃었다.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의 단독과반은 붕괴됐고, 아데나워는 다시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이루어야 했다. 정국에서 자유민주당의 입김이 커진 것은 당연지사. 이때 이미 85세의 고령이었던 아데나워는 2년 안에 에르하르트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줄 것을 약속했다.[11]

1962년 국방장관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12]가 언론사 슈피겔을 상대로 벌인 언론탄압[13] 사건이 특히 유명한데, 이 사건을 통해 독일의 민주주의는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이 다시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로, 살인공소시효를 놓고 의회에서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2.5. 제5대 총선 (1965)[편집]


1965년 9월 19일
총원: 496석, 과반의석: 249석
에르하르트 2기 내각
294석
야당
202석
CDU/CSU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245석
196석+49석
49석
202석
1950년대 독일 경제회복을 이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이끈 CDU/CSU은 소득세 절감과 사회복지 확대를 공약했고, 또다시 선거에서 승리했다. CDU/CSU도 이전 선거보다 의석수가 2석 증가하기는 했지만, 사민당이 12석 늘었고, 자민당이 18석 줄었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약 1년만에 총리직에서 내려왔다. 에르하르트가 실각한 원인은 근본적으로 감세와 사회복지 확대라는 모순된 공약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기민당에서도 이러한 모순된 포퓰리즘적 공약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당내 반발이 있었다. 실제로 에르하르트 취임 직후 재정적자는 꾸준히 악화되었고, 그 속도는 에르하르트 본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결국 1966년 에르하르트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증세를 할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의 공약을 뒤집었다. 하지만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은 기민당보다도 더 자유주의적인 정당이었기 때문에 에르하르트가 감세 공약을 뒤집고 증세를 하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에르하르트와 마찰을 빚었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증세를 밀어붙였고, 결국 자민당은 내각에서 총사퇴했다. 이로서 연정은 무너졌고, 여전히 기민당 내에서 강한 헤게모니를 발휘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에르하르트를 총리 자리에 아주 부적합하다고 여기고 있던 아데나워의 영향을 받은 기민당 동료 정치인들이 에르하르트에게 사퇴를 종용하면서 에르하르트는 굴욕적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키징어 내각
447석
야당
49석
CDU/CSU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245석
196석+49석
202석
49석
에르하르트 사임 후 벌어진 후계자 쟁탈전의[14] 승자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 출신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였다. 그리고 키징어가 선택한 연정 파트너는 놀랍게도 이념적으로 간극이 매우 큰 사회민주당이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로 연방정부에서 대연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기민련과 사민당이라는 물과 기름의 대연정에서 극심한 마찰이 발생했다.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 문제를 놓고 사민당과 기민련은 격렬한 충돌을 빚었다. 양당은 이를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서 미국과의 외교 관계 설정 등의 연장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극심한 대립을 이어갔다. 여기에 동유럽 공산권과의 외교 정책을 두고도 대립을 빚었다. 기민련은 소련을 제외하고는 동독 및 동독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과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의 유지를 내세웠으나, 사민당은 동독 및 공산권 국가들과의 직접 대화를 주장하는 동방 정책을 계속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2.6. 제6대 총선 (1969)[편집]


1969년 9월 28일
총원: 496석, 과반의석: 249석
브란트 1기 내각
254석
야당
242석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CDU/CSU
224석
30석
242석
193석+49석
이 선거 결과 CDU/CSU보다 의석수가 적은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 헌정 사상 원내 제2당 당수가 제1당 당수를 제치고 총리가 된 최초의 사례였다. 사민당의 브란트는 자민당과의 연정이라는 과감한 시도를 통해 제2당의 당수임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이전에 대연정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간 제1당 당수가 총리가 되어왔지만 그 관례가 깨지게 되었다. 또 CDU/CSU 보다 고전적 의미에서 사실 더 우파적인 정당인 자민당과의 연정은 꽤나 파격적으로 받아 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이전 1961년, 1965년 총선을 거쳐 세번째로 총리직에 도전한 사민당의 당수 빌리 브란트는 68운동의 시대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기존 18개월의 병역 의무복무기간[15]을 12개월로 줄이겠다는 공약 덕분에 젊은 자녀를 군에 보내야하는 부모들의 표심이 쏠린 측면도 컸다.

선거 결과 사민당은 4년전보다도 22석을 더 얻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CDU/CSU엔 부족한 의석수였고[16]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브란트는 협상력을 발휘해서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의 연정을 구성하는데 성공한다.

새로 수상이 된 빌리 브란트는 당시 서독의 주요 외교 정책이었던 할슈타인 원칙(동독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외교 정책)을 폐기하고 동방정책을 내세우면서 많은 논란을 빚게 된다. 할슈타인 원칙은 이미 기민련 정권에서도 명분상으로만 내세웠지 현실 외교에서는 이를 주장하지 않은지 오래였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폐기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브란트가 할슈타인 원칙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겠다고 한 것은 동독을 동등한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핵무기를 가지고 대치하고 있던 시절이라 할슈타인 원칙을 공식 폐기하겠다는 브란트의 정책은 서독 내에서 격한 논쟁을 불러왔다.

게다가 브란트가 1970년 모스코바 조약과 바르샤바 조약을 통해 2차대전 이전까지 독일의 영토였던 슐레지엔동프로이센을 포기하고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면서 서독 내에서 엄청난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17] 이러한 외교 정책에 대해 매국노라는 비판까지 나왔으며,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연정 파트너 자민당은 물론이거니와 사민당 안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다수의 자민당 의원과 사민당 의원들이 탈당하여 기민련으로 소속을 옮기는 사태까지 이루어진다.

1972년 4월 기민련 등은 브란트 정권에 대한 내각불신임결의 투표를 추진했지만 단 2표가 모자라서 부결되고 말았다. 내각불신임투표가 야당의 패배로 끝나며 브란트는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얼마 후 브란트 내각이 제출한 예산안이 부결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서 브란트 내각의 국정 장악력이 상실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브란트 총리가 의회 장악력을 상실했다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브란트는 식물 내각을 이끄는 대신 조기 총선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띄운다. 1972 뮌헨 올림픽이 끝나자, 여당인 사민당을 통해 스스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브란트는 의회 해산을 대통령에게 요청하고, 의회가 해산됨에 따라 총선이 한 해 앞당겨져 열리게 된다.


2.7. 제7대 총선 (1972)[편집]


1972년 11월 19일
총원: 496석, 과반의석: 249석
브란트 2기 -> 슈미트 1기 내각
271석
야당
225석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CDU/CSU
230석
41석
225석
177석+48석
브란트의 승부수가 통했고, 여러가지 천운이 따랐다. 기민련은 브란트 내각의 국경선 포기 문제, 동방정책, 경제정책을 비난하면서 승리를 자신했지만 결과는 사민당-자민당 연정이 예상밖 대승을 거두었다. 이 선거 결과로 사민당은 독일연방공화국 출범 이후 처음으로 CDU/CSU를 앞서는 의석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브란트-슈미트로 이어지는 사민당 정권 13년 동안 사민당이 선거에서 CDU/CSU를 누루고 제1당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머지 선거에서는 전부 CDU/CSU가 제1당을 차지했지만, 사민당은 제2당임에도 불구하고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을 이어갔다.

사회로 진출한 68혁명 세대가 폭발적으로 지지한 것이 큰 원동력이 되었다. 덧붙여서 중도 성향의 일부 시민들도 1971년 빌리 브란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추축국 낙인이 찍혀있던 독일의 위상을 세워준 것이 여전히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빌리 브란트 정권에 대해 우호적인 상황이었다.

이 총선의 결과로 브란트는 연임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하는듯 했지만 채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오일쇼크 불황과 함께 브란트의 측근인 귄터 기욤 간첩 사건 및 브란트 본인의 섹스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총리에서 사임하였다.

후임으로는 같은 당내에서 브란트와 대립 포지션에 있었던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가 되었다. 브란트가 사민당 내 강경 좌파를 대표했다면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 관료 출신이었던 슈미트는 사민당 소속이라는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중도를 넘어서 때로는 우파에 가까워 보이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브란트와 당내에서 대립하던 슈미트가 총리가 되면서 이후 내각의 방향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슈미트는 사민당 내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비판했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때문에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폐기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또 경제 정책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그런데 슈미트가 이렇게 우파 성향의 인물이었던 덕분에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거듭하고 있던 연정파트너 자민당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고 이에 슈미트 내각은 의외로 안정을 유지했다.

한편 기민련에서도 세대교체가 일어나 42세의 젊은 정치인 헬무트 콜이 당수직에 오르게 되었다.


2.8. 제8대 총선 (1976)[편집]


1976년 10월 3일
총원: 496석, 과반의석: 249석
슈미트 2기 내각
253석
야당
243석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CDU/CSU
214석
39석
243석
190석+53석

70년대 중반 서독의 경기 침체로 인해 1976년 선거에서는 헬무트 콜이 이끄는 CDU/CSU가 다시 부상하며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CDU/CSU는 총 유효표의 49%를 득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반에 1%가 부족했고, 사민당과 자민당 연정이 과반을 아슬아슬하게 확보하면서 집권을 이어가게 되었다.

자민당과 적잖은 파열음을 냈던 빌리 브란트 총리 달리 그의 후임 헬무트 슈미트는 사민당 내에서 사회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온건파였기 때문에 연정파트너인 자민당과도 별다른 마찰없이 지냈다. 덕분에 사민당은 자민당과의 연정을 무리 없이 이어나가 정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49%의 지지율을 얻으면서 민심을 회복한 CDU/CSU의 존재는 슈미트 내각으로서는 큰 부담이 되었고, 정책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도 4년전에 비해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오게 되는데, 야당인 CDU/CSU나 연정파트너 자민당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민당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강성 좌파 계파들의 불만이었다. 종종 우파로 보일 정도로 안정 지향적이고 때로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슈미트의 정책에 대해 사민당 내부의 강성 좌파들이 큰 불만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브란트의 실각 이후 타격을 입었던 사민당 내 강경 좌파가 전열을 재정비한 후 '체제극복적 개혁'을 내세우며 슈미트 총리를 공개 압박하는 등 크게 반발하면서 슈미트 총리의 입지를 곤란하게 했다.


2.9. 제9대 총선 (1980)[편집]


1980년 10월 5일
총원: 497석, 과반의석: 249석
슈미트 3기 내각
271석
야당
226석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CDU/CSU
218석
53석
226석
174석+52석
사민당의 현직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3선에 도전했고, CDU/CSU 측에서는 바이에른의 주지사로 재직 중이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총리 후보로 등장했다. 이 선거에서 CDU/CSU는 4년전에 비해 17석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민당을 누르고 원내 제1당을 차지했다. 그러나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이 이어지면서 슈미트는 총리에 연임되었다.

슈트라우스는 기사련(CSU) 출신이었는데, 기민련이 아니라 기사련 출신이 총리 후보로 나선 것은 이 때가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1962년 슈피겔 지가 국방부의 비리에 대해 폭로하자, 슈피겔 편집인들을 반역 혐의로 기소하였던 전례에서 보이듯이 정치적으로 강경 우파적인 인물이었고, 이는 그의 열렬한 표밭이던 바이에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마이너스로 작용했다.[18][19]

하지만 슈미트 정권은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게 되는데, 우선 경기가 심각하게 침체되면서 지지율이 떨어지게 되었다. 지지율이 떨어지자 이전부터 슈미트와 대립해 오던 사민당 내부 강성 좌파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다. 슈미트는 사민당에서 매우 자유주의적이고 우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경제 정책에서 슈미트의 이러한 점은 두드러졌다. 슈미트의 정책 방향에 대해 사민당 내 상당수 인사들은 기민당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측면이 있었다. 점점 세력을 불려가던 당내 강성 좌파들은 슈미트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대놓고 반대와 비난을 퍼부었다. 슈미트는 어쩔 수 없이 강성 좌파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슈미트의 당내 입지는 더욱 약해졌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사례와 비슷하게, 슈미트가 총리에 오른 뒤에도 사민당의 당수는 오랜 기간 (슈미트보다 훨씬 좌파 색채가 강한) 빌리 브란트였고, 빌리 브란트는 1980년대 초반 독일 전역에서 일어나던 슈미트 내각에 대항하는 반핵운동에 참가해서 연설을 하는 등, 슈미트에게 내부총질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1982년 부자 증세 및 독일 내 핵무기 배치를 놓고 사민당 내에서 대분열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렇게 사민당 내에서 강경 좌파 기류가 강해지자 이로 인해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에서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CDU/CSU는 자민당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여 1982년 내각불신임안을 통과시켰고, 슈미트 내각은 붕괴하고 만다.

1기 내각
279석
야당
218석
CDU/CSU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226석
174석+52석
53석
218석

슈미트 내각의 후임으로 의회에서 선출된 사람은 바로 기민련의 당수 헬무트 콜. 그렇게 CDU/CSU는 1969년 이후 13년만에 집권 여당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의회 해산이 없이 여당과 야당이 뒤바뀐 것은 이번이 유일하다.

1979년 창당한 녹색당이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해서 1.5%를 득표했다.[20]


2.10. 제10대 총선 (1983)[편집]


1983년 3월 6일
총원: 498석, 과반의석: 250석
2기 내각
278석
야당
220석
CDU/CSU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녹색당
244석
191석+53석
34석
193석
27석
1982년 10월 1일 연방 하원 의회에서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대한 내각불신임결의안이 가결된 후 총리로 선출된 헬무트 콜은 이에 대한 국민들의 판단을 묻기 위한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했고, 이에 의회가 해산하고 조기 총선이 치뤄지게 되었다. 선거는 CDU/CSU의 승리로 끝났다. CDU/CSU는 모처럼 사민당과 50석 이상의 큰 차이를 벌이게 되었다. 이로서 국민의 신임을 얻은 헬무트 콜 정권은 국정 추진 동력을 얻게 되었고, 이후 콜은 독일 연방공화국 사상 최장기 집권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 이 선거는 환경 문제를 들고 나온 녹색당이 급부상한 총선이었다. 녹색당은 1961년의 총선 이후 20년만에 원내 진출에 성공한 CDU/CSU, 사민당, 자민당 이외의 정당이란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이런 녹색당의 부상에 대해 사민당은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는데, 녹색당이 전통적인 사민당의 지지층을 상당부분 흡수했다고 여기기 때문.


2.11. 제11대 총선 (1987)[편집]


1987년 1월 25일
총원: 497석, 과반의석: 249석
3기 내각
269석
야당
228석
CDU/CSU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녹색당
223석
174석+49석
46석
186석
42석
CDU/CSU은 지난 선거와 비교해서 21석이 감소하여 원내 의석을 꽤 많이 잃었지만, 사민당 역시 의석이 감소했고, 기민당이 잃은 표의 상당 부분을 연립여당 자유민주당이 벌충했기 때문에 재집권에 큰 문제는 없었다. 녹색당의 부상을 우려한 기민련이 비례대표는 자유민주당에 이런 식으로 어느정도 밀어준 것도 있었다.

전년도였던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 덕에 녹색당이 다시 한 번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이 선거를 기점으로 녹색당은 전국 차원의 정당으로 확실히 안착하게 되었다.

제2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당 내의 계파 싸움과 녹색당의 표 잠식으로 인해 지난 선거에 비해 7석이 줄어들었다.


3. 1990년 재통일 이후[편집]



3.1. 제12대 총선 (1990)[편집]


1990년 12월 2일
총원: 662석, 과반의석: 332석
4기 내각
398석
야당
264석
CDU/CSU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민주사회당
동맹 90/동독 녹색당
319석
268석+51석
79석
239석
17석
8석
1990년 10월 3일 통일이 이루어진 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총선이다. 통일 이후 과도기임을 감안해 전국 단위로 적용되던 5% 봉쇄조항서독 지역과 동독 지역에 분리하여 적용하였다. 즉, 전국적으로는 5%에 미치지 못하였더라도 동·서독 중 한군데에서만 5% 봉쇄조항을 넘기면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받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동독 지역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의 아성과 같은 곳이었고, 실제로도 처음 여론조사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앞서나갔다. 하지만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측이 통일의 조속한 시행과 화폐교환비 1:1 지정과 같은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우면서 판세를 뒤집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CDU/CSU자유민주당 연립내각이 예상 외 낙승, 헬무트 콜은 3선에 성공한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은 전국단위 5% 봉쇄조항을 넘지 못했지만 동독 지역에서 5%를 넘기면서 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서독과 동독의 녹색당 조직은 별개였다. 선거 직후에 합당하기로 결정되어있었기에 양당은 각각 독립적으로 선거에 임했다. "모두가 통일을 얘기한다. 우리는 환경을 얘기한다."라는 슬로건으로 선거에 임한 서독 녹색당은 서독 지역 한정으로도 5%를 넘지 못하면서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반면, 동독 녹색당은 구 동독의 시민사회 정치연대였던 동맹 90과 선거연대를 했고, 동독 지역 한정으로 5%를 넘기면서 전국 득표율 1.2%에 해당하는 의석을 간신히 확보하게 되었다.

예정대로 선거 다음날인 12월 3일 서독 녹색당과 동독 녹색당 사이의 합당이 이뤄졌고, 1993년에는 동맹 90과도 합당이 진행되며 현재의 "동맹 90/녹색당"이 되었다.

3.2. 제13대 총선 (1994)[편집]


1994년 10월 16일
총원: 672석, 과반의석: 337석
5기 내각
341석
야당
331석
CDU/CSU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동맹 90/녹색당
민주사회당
294석
244석+50석
47석
252석
49석
30석
통일 이후 최악으로 치닫던 경제 상황으로 인해 기민련헬무트 콜에게 독일인들이 보냈던 지지는 빠르게 식어버린다. 그렇지만 헬무트 콜은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CDU/CSU의 원내 제1당 지위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고, 다시 한 번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4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90년의 총선과 비교해서 CDU/CSU-자민당 연정의 위상은 곤두박질쳤기에 어디까지나 상처뿐인 승리였다.

한편 녹색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정권에 참여할 의사[21]를 밝혔고, 실제로도 49석을 차지하면서 선방했지만 아쉽게도 내각 참여는 무산되고 만다. 한편 민주사회당의 경우 5% 미만의 득표율을 얻어서 원래대로라면 원내진입이 무산될 처지였지만, 다행히도 지역구에서 4석을 차지하면서 기사회생[22]할 수 있었다.

3.3. 제14대 총선 (1998)[편집]


1998년 9월 27일
총원: 669석, 과반의석: 335석
슈뢰더 1기 내각
345석
야당
324석
사회민주당
동맹 90/녹색당
CDU/CSU
자유민주당
민주사회당
298석
47석
245석
198석+47석
43석
36석
90년대독일통일 후유증을 심각하게 겪고 있었고, 1998년 시점에서 독일의 경제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실업률은 10%에 근접해갔고 많은 이들은 헬무트 콜 정부와 여당이었던 CDU/CSU자민당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이에 98년 총선을 앞두고 헬무트 콜이 총리직에 출마하지 않고 볼프강 쇼이블레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결국 98년 4월 헬무트 콜은 5선 도전을 선언했다.

한편 사민당에서는 대표적인 당내 우파인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총리 후보자로 나섰다. 슈뢰더는 당시 유럽 정계에 막 유행하던 제3의 길을 주창했다. 자본주의사회주의도 아닌 새로운 이념인 제3의 길을 추구한다는 슈뢰더는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 슈뢰더 말고도 영국 노동당토니 블레어, 프랑스 사회당리오넬 조스팽 등이 1997년을 전후로 동시다발적으로 제3의 길을 내세우며 정권을 잡았다.

여론조사에서는 기민/기사+자민 연합과 사민+녹색 연합이 오차범위 내의 접전인 것으로 보였지만 개표 결과는 사민+녹색 연합의 압승[23]이었고,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정으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총리직에 취임하면서 헬무트 콜은 16년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3.4. 제15대 총선 (2002)[편집]


2002년 9월 22일
총원: 603석, 과반의석: 302석
슈뢰더 2기 내각
306석
야당
297석
사회민주당
동맹 90/녹색당
CDU/CSU
자유민주당
민주사회당
251석
55석
248석
190석+58석
47석
2석
지난 선거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헬무트 콜을 '실업 총리'라고 부르면서 경제 문제에 화력을 집중하여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슈뢰더의 집권 후 4년이 지난 2002년의 총선에서 경제 문제는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되돌아 왔다. 슈뢰더 내각 1기 4년 동안 불황은 여전했고, 여기에 유로화 도입으로 인한 혼란으로 독일 경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24] 슈뢰더는 지난 선거에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이른바 제3의 길 노선을 주창하여 돌풍을 일으켰는데,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독일 국민들은 이에 실망했다. 사민당의 전통적 지지층은 슈뢰더가 사민당의 전통적인 노선을 버리고 우클릭했다며 분노했고, 중도 성향 지지자들은 슈뢰더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추구한다기에 여기에 혹해서 지지했지만 결국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실망했다.

다가오는 2002 선거에서 슈뢰더 내각은 희망이 없는 듯 보였지만, 선거가 다가오면서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대중의 지지를 어느 정도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선거 결과 양측이 초접전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나마 사민-녹색 연정이 신승[25]을 거두었고 슈뢰더는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난 선거에서 동독 지역에 의존해 봉쇄조항을 충족했던 민주사회당은 이번 선거에서 동독 지역의 유권자들이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바람에 비례대표 득표율 봉쇄조항을 넘지 못 하고 만다. 지역구 당선자도 2명 뿐이라 봉쇄조항[26]의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하여, 정당명부 당선자가 단 한 명도 없이 지역구 당선자 2명 만으로 연방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민주사회당은 구 서독 지역 내 세력 부재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구 서독 지역의 파트너를 찾게 되었고, 2005년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 탈당파가 조직한 WASG와 연대하게 되었다.

3.5. 제16대 총선 (2005)[편집]


2005년 9월 18일
총원: 614석, 과반의석: 308석
메르켈 1기 내각
448석
야당
166석
CDU/CSU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동맹 90/녹색당
226석
180석+46석
222석
61석
54석
51석
2003년 무렵부터 슈뢰더가 감행한 복지 및 연금 개혁은 슈뢰더 내각의 인기를 하락[27]시켰고, 2005년 지방 선거에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이 기민련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전통적으로 사민당의 아성이었던 이 지역이 기민련에게 넘어간 것은 충격을 일으켰고, 슈뢰더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내각불신임결의을 통과시켜 총선을 조기에 치르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다. 기민련이 슈뢰더의 맞상대로 지명한 인물은 앙겔라 메르켈이었다.

선거운동 초기에 사민당의 인기는 바닥을 기었지만 9월 4일 펼쳐진 슈뢰더와 메르켈의 생중계 토론에서 슈뢰더가 예상대로 뛰어난 언변을 보이면서[28] 기민련과 사민당의 지지율은 오차 범위 내에서 엎치락뒤치락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 투표 결과도 그러했다. CDU/CSU와 자민당이 도합해서 47% 가량의 득표를 거두었고, 사민당과 녹색당이 도합해 43% 정도의 득표를 거두었다. 전통적인 연정 구성으로는 어느 쪽도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다. 이는 오랜 불황에 실망한 구 동독 지역이 구 동독 공산당을 계승한 민주사회당에게 막대한 지지[29]를 보낸 것에서 기인했다. 이때 민주사회당과 WASG의 선거연대가 큰 성과를 거둔 것에 자극받아 민주사회당은 정식으로 WASG와 합당하여 좌파당이 된다.

메르켈과 슈뢰더 모두가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는 대혼돈의 상황. 사실 사민당은 기존의 연정 파트너 녹색당에다가 좌익 계열의 좌파당까지 연정에 포함시켜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총리 슈뢰더와 WASG 당수 오스카 라퐁텐의 사이가 극히 나빴다는 점이 문제였다.[30] 그렇다고 CDU/CSU와 자민당이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서있는 좌파당과 연정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통은 재선거를 하겠지만, CDU/CSU,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은 재선거 대신 협상을 거듭하던 가운데 CDU/CSU와 사민당이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에 오르는 대신 장관 요직 배분 등 사민당의 요구사항을 대폭 받아들이는 것으로 대연정을 선언하게 된다. 1969년 키징어 내각 이후 36년만에 세워진 대연정 내각이었다.

3.6. 제17대 총선 (2009)[편집]


2009년 9월 27일
총원: 622석, 과반의석: 312석
메르켈 2기 내각
332석
야당
290석
CDU/CSU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좌파당
동맹 90/녹색당
239석
194석+45석
93석
146석
76석
68석
전반적으로 지루한 선거전이 이어졌다. 양 당의 당수였던 앙겔라 메르켈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그렇게 화려한 언변 능력을 갖춘 정치인은 아니었을 뿐더러, CDU/CSU와 사민당이 정권을 함께 창출했던 원죄(...)가 있던 터라 상대방의 실정에 대한 일방적인 공세가 힘들었기 때문. 너..너도 같이 했잖아 하여튼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CDU/CSU의 현상 유지 / 사민당의 몰락 / 군소정당의 약진.

특히 CDU/CSU와 연정을 하며 이에 실망한 상당수 지지자들이 이탈한 사민당은 1949년 이후 역대 최저 득표율을 받는 굴욕[31]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데 또 연정한다 이쯤되면 나중에 CDU/CSU도 사민당이 제안하는 연정은 거부할 명분이 없어질 기세 한편, 비록 원내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또다른 대안정당으로 독일 해적당이 등장하여 꽤나 인기를 끌기도 했던 선거였다.[32]


3.7. 제18대 총선 (2013)[편집]


2013년 9월 22일
총원: 631석, 과반의석: 316석
메르켈 3기 내각
504석
야당
127석
CDU/CSU
사회민주당
좌파당
동맹 90/녹색당
311석
255석+56석
193석
64석
63석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8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8. 제19대 총선 (2017)[편집]


2017년 9월 24일
총원: 709석, 과반의석: 355석
메르켈 4기 내각
399석
야당
310석
CDU/CSU
사회민주당
독일을 위한 대안
자유민주당
좌파당
동맹 90/녹색당
246석
200석+46석
153석
94석
80석
69석
67석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9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9. 제20대 총선 (2021)[편집]


2021년 9월 26일
총원: 736석, 과반의석: 369석
숄츠 내각
416석
야당
320석
사회민주당
동맹 90/녹색당
자유민주당
CDU/CSU
독일을 위한 대안
좌파당
남슐레스비히 유권자 연합
206석
118석
92석
197석
152석+45석
83석
39석
1석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20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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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이에른당 17석, 경제재건연합 12석, 독일우파당 5석, 무소속 3석[2] 참고로 이러한 독일 우파 진영 내 콩가루 난맥상은 의회 내 초대 총리 선출 투표 결과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CDU/CSU - 자민당 - 독일당 연정은 도합 208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데나워는 과반보다 겨우 한 표 많은 203표를 받아서 총리직에 오를 수 있었다. 아데나워가 죽을 때까지 두고두고 곱씹었듯이, 아데나워 본인이 본인한테 표를 던지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초대 총리 선출부터 대판 스텝이 꼬일 뻔했다.[3] 바이마르 공화국의 황금기 5~ 6년을 제외하고는 독일에서 이 때까지 제대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4] 2차대전 종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출신의 실향민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전후이주자연합이라는 것은 각종 정치/외교적인 상황을 고려한 중립적인 의역이고, 실제로 독일어 원어로는 훨씬 더 강경한 어감인 실향-추방민연합(Bund der Heimatvertriebenen)이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만 비례대표 의석을 획득했으며 1961년 독일당에 통합되었다.[5] 참고로 제2대 총선 이후 일부 지역에만 출마하면서 봉쇄 조항을 충족(5%이상 득표)하는 정당은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유일하다.[6] 이 연금 개혁안을 통해서 최저생계 보장 수준에 불과했던 기존의 연금 지급액이 대폭 상향돼서, 연금가입자들은 은퇴 이전 소득의 60% 수준을 지불받는게 법적으로 보장됐다.[7] 독일당이 후보를 낸 곳에는 기독교민주연합이 후보를 내지 않았다.[8] 한 정치 세력이 단독으로 과반수를 차지한 것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이유로. [9] 독일 통일 직전 동독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총선에서 동독 지역 CDU와는 별도로 CSU가 동독 지역에 창설한 '사회연합'이 독자로 후보를 낸 바 있다.[10] 독일당은 이후 지방선거에서도 점점 밀리다가, 1964년에 그 때까지 남아있던 브레멘 주 의원 4명을 주축으로 독일국가민족당이라는 극우정당을 창당했다. 당시 주 의원 4명 중 1명이 당 대표를 맡았으니 연방 내각에도 참여하던 독일당이 이렇게까지 몰락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지방의회에서도 전멸했다가 지금은 몇몇 지방의회에서 겨우 당선자를 내는 수준이나, 그마저도 어느 정당도 연정파트너로 삼지 않는 왕따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2010년대 들어선 독일을 위한 대안이 극우 포지션까지 선점하면서 2016년 말에는 지방의회에 그나마 남아있던 의석도 독일을 위한 대안에 빼앗겼다.[11] 웃긴건 정작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를 좋아하지 않아서 에르하르트가 총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꼼수를 펼치기도 했다. 오죽하면 에르하르트가 아데나워가 날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며 토로했다.[12] 기독교사회연합 소속으로 강경파 포지션. 후술되어있듯 1980년 총선을 이끌었다 패했다.[13] 나토의 군사작전 초안을 슈피겔이 보도하자, 슈피겔의 편집진들을 반역 혐의로 기소했다.[14] 승자였던 키징어 이외에도, 아데나워의 최측근이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CDU 원내총무인 라이너 바르첼 등이 모두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었다.[15] 독일의 징병제는 2011년에야 폐지되고 모병제로 전환되었다.[16] 바이에른을 비롯하여 바덴-뷔르템베르크, 라인란트-팔츠와 같은 남부 일대는 기민련의 표밭이었고, 전통적인 사민당의 표밭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을 제외하면 동독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17] 심지어 이것은 서독의 영토도 아니었다. 물론 동독은 1952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일찌감치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승인했다.[18] 슈미트도 야당 여당을 안가리고 자기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냉소와 조롱을 뱉어내는 독설가로 유명했는데(해당 선거가 있기 직전, 운동권 출신 당내좌파들이 경제 및 복지정책을 더 좌클릭할 것을 요구하자, 전국에 생중계되는 전당대회에서 행한 "댁들은 지금의 경제상황을 이해할 뇌도 없소?"라는 내용의 발언은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슈트라우스는 이 슈미트보다도 두 수 더 뜨는 거친 막말로 악명이 자자했다.[19] 결국 1980년의 총선 이후 슈트라우스는 중앙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CDU/CSU의 헤게모니는 헬무트 콜에 의해 확실히 장악된다.[20] 당시 기타 정당의 합계 득표율이 2%를 넘지 않았으니, 기타 정당 득표 대부분이 녹색당에게 간 것이다.[21] 다만 사민당만을 연정 파트너로 수용할 것임을 전제조건으로 달았다.[22] 득표율이 5% 미만이더라도 지역구에서 의원을 3인 이상 배출하면 득표율에 맞추어서 비례대표 의석이 배당된다.[23] 사회민주당이 단독으로 298석(창당 이래 최다 의석)을 차지했는데, CDU/CSU, 자유민주당이 확보한 의석을 더한 것보다 많았다. 거기에다가 구 동독 지역에서는 어차피 사회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될 거라는 전제 아래 민주사회당에 대한 소신투표까지 있었다. 당시의 여론조사가 얼마나 유권자들의 생각과 동떨어졌는지 알 수 있는 상황.[24] 다만 이때 슈뢰더의 개혁 정책이 이후 독일의 실업률 저하 등에 도움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다.[25] 여기에는 동독 지역의 민주사회당 지지자들이 사회민주당에게 전략적 투표를 한 것도 보탬이 되었다.[26] 정당득표 5% 이상, 지역구 당선자 3명 이상.[27] 이 와중에 오스카 라퐁텐을 위시한 일련의 당원들이 사회민주당을 탈당해 WASG를 결성한다.[28] 메르켈은 당시 TV 토론을 상당부분 기피했으나(2회로 예정된 것도 1회로 축소), 막상 토론에 들어서자 생각보단 선방했다. 그러나 슈뢰더의 타고난 말빨(...)은 당해낼 수 없었고, 시청자들도 메르켈이 선전했지만 슈뢰더가 더 잘했다고 평가했다. 사실상 총리 개인 활약을 통해 지지율을 끌어올린 셈. 그리고 이날 토론은 자그마치 59.6%가 시청했다. 독일 월드컵 개막식 시청률과 맞먹는 역대급 토론이었기에,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29] 동독 지역에선 민주사회당이 사회민주당과 맞먹을 정도로 득표했고, 서독 지역에선 민주사회당과 연대한 WASG가 5% 가까이 득표했다.[30] 지금 와서 보면 나중에 깨지더라도 일단 연정을 하는게 범좌파 집권엔 더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후 메르켈 내각에 사민당이 연립 파트너로 참여하고, 메르켈을 비난하는 독일을 위한 대안 같은 극우 정당까지 등장하며 독일 정계는 좌우 구분만으론 설명이 안되는 복잡한 양상이 되었다.[31] 동독 지역에선 좌파당보다도 득표율이 낮았다.[32] 처음으로 참여한 총선에서 2%를 득표했다. 녹색당이 처음에 1.5%를 득표했던 걸 생각하면 전망이 밝아보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독일 해적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