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독일연방공화국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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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총선
2. 제2대 총선
3. 제3대 총선
4. 제4대 총선
5. 제5대 총선
6. 제6대 총선
7. 제7대 총선
8. 제8대 총선
9. 제9대 총선
10. 제10대 총선
11. 제11대 총선
12. 제12대 총선
13. 제13대 총선
14. 제14대 총선
15. 제15대 총선
16. 제16대 총선
17. 제17대 총선
18. 제18대 총선
19. 제19대 총선
20. 제20대 총선
21. 관련 문서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이후 실시된 연방하원 선거의 결과를 다루고 있는 문서이다.


1. 초대 총선[편집]


1949년 8월 14일 (총원: 402석, 과반의석: 202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독일당
사회민주당
바이에른당
공산당
기타

139석(115석+24석)
52석
17석
131석
17석
15석
31석
2차 대전 종전 이후 처음 수립될 의회를 선출하기 위해 시행된 선거. 각 주에서 5% 이상 씩 득표한 정당에 의석을 배분했기 때문에, 지역 정당이나 군소정당 후보도 당선되었고 무소속 당선자도 있었다.

당초 쿠르트 슈마허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의 압승이 예상됐지만[1], 냉전이라는 시대 상황[2]과 기독교민주연합 소속 관료 에르하르트가 주도한 경제개혁 정책의 지지에 힘입어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이 주도권을 차지한다. 이후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은 자유민주당, 독일당과 연정을 이루는데 성공하였고[3] 초대 연방 대통령으로는 자유민주당의 테오도어 호이스가, 총리로는 기독교민주연합의 콘라트 아데나워가 선출된다. 이렇게 구성된 초대 연방하원은 신생 서독의 민주주의 정착[4]과 경제 회복 및 국제 지위 상승이라는 복잡한 임무가 주어졌다.

참고로 이 선거 이후 독일 공산당은 독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서 강제로 해산된다.


2. 제2대 총선[편집]


1953년 9월 6일 (총원: 509석, 과반의석: 255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독일당
사회민주당
전후이주자연합[5]
가톨릭중앙당

249석(197석+52석)
53석
15석
162석
27석
3석
초대 총선에서 각 주 별로 5% 이상 득표한 정당에게 의석을 배분하던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적으로 5%를 득표한 정당에게만 의석을 배분하는 걸로 바꾸었다.[6][7]

사실상 연합군 체제 아래에서 민주주의 확립과 전후 복구를 거치며 여당이던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호이스와 아데나워는 연방 대통령과 총리로 재선출된다. 그리고 이 총선 이후 독일이 연합군으로부터 실질적인 주권을 모두 회복함에 따라 연방하원은 좀 더 많은 책무를 지니게 된다. 2대 연방하원이 이룬 주요 업적은 로마 조약을 통해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경제 공동체(EEC) 창설 및 연방군 건설을 통한 서독 재무장 등이 있다.


3. 제3대 총선[편집]


1957년 9월 15일 (총원: 519석, 과반의석: 260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독일당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277석(222석+55석)
17석
181석
43석
시간이 지날수록 군소정당이 줄어드는 것이 보이는가?
독일의 경제 복구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라 집권여당이던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이 압승했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립 이후, 총선에서 특정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데나워는 무난히 3선에 성공한다. 사실 기독교민주연합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 했던지 총선 당시에 독일당을 밀어주었고[8],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음에도 독일당과 연정을 꾸렸다.

한편, 계속된 콩라인 신세에 집권여당이 될 방법을 찾기 시작한 사회민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 정당에서 사민주의로의 전환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애초에 당 이름이 사회민주당 아니었나 한편 1959년에 테오도르 호이스가 대통령 3선을 포기함에 따라, 하인리히 뤼프케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4. 제4대 총선[편집]


1961년 9월 17일 (총원: 521석, 과반의석: 261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251석(201석+50석)
67석
203석
이 때부터 독일 연방 하원은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만이 당선자를 내는 상황이 1980년 총선까지 이어진다. 1957년 총선에서 독일당이 후보를 낸 지역구에는 후보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독일당을 지원했던 기독교민주연합은 단독 과반수 획득에 자신감을 얻어 독일당을 지원하지 않았고, 기독교민주연합의 도움 없이는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 할 것이 뻔한 독일당은 총선에 불참해버린다.[9] 그리고 상상도 못 한 일이..

이 선거부터 자유민주당이 지역구에서 전멸하고 정당명부로만 당선자를 내는 상황이 이어져 오다가 2013년 총선에서 5%를 확보하지 못 하면서 전멸(...).

선거 열기가 한창 달아오를 무렵 베를린 장벽이 동독 당국에 의해 세워진다. 당시 서베를린의 시장이었던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을 초청해 그 유명한 베를린 연설을 만들어 내는 등 의연한 대처로 독일인 사이에서 인기를 높였던 것과 달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수수방관하다 못해 서베를린을 포기해도 좋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서 인기를 크게 잃는다. 이를 기회로 빌리 브란트는 야심차게 총리직에 도전했지만, 아쉽게도 석패하고 만다. 그렇지만 지난 1957년의 선거와 비교해서 사회민주당은 20석 가량을 더 얻었고 기독교민주연합은 20석 가량을 잃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기독교민주연합의 패배라고도 볼 수 있는 선거였다.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의 단독과반은 붕괴됐고, 아데나워는 다시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이루어야 했다. 정국에서 자유민주당의 입김이 커진 것은 당연지사. 이때 이미 85세의 고령이었던 아데나워는 결국 2년 안에 에르하르트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줄 것을 약속해야 했다.[10]

1962년 국방장관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11]가 언론사 슈피겔을 상대로 벌인 언론탄압[12] 사건이 특히 유명한데, 이 사건을 통해 독일의 민주주의는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이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로, 살인의 공소시효를 놓고 의회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5. 제5대 총선[편집]


1965년 9월 19일 (총원: 518석, 과반의석: 260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251석(202석+49석)
217석
50석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빌리 브란트의 대결에서, 독일 국민들은 다시 한 번 에르하르트의 손을 들어줬다. 50년대 경제발전을 이끈 에르하르트가 독일을 더 번영시킬 것이라는 신뢰를 보내주었던 것. 덧붙여서 에르하르트의 소득세 절감과 사회복지 확대 공약도 승리에 한 몫 했다. 하지만 기민당 내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전임 총리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의 발목을 집요하게 잡은 데다가, 1966년 예산 문제를 놓고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이 반발해 내각에서 총사퇴하자 에르하르트는 총리직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르하르트의 뒤를 이어 기민당의 총재에 오른 쿠르트 키징어가 선택한 연정 파트너는 놀랍게도 사회민주당이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대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허나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 문제를 놓고 사민당과 기민당은 격렬한 충돌을 빚었고, 동유럽 공산권과의 외교 정책을 두고도 대립을 빚게 된다. 이는 기민당은 소련을 제외하고는 동독 및 동독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과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의 유지를 내세웠으나, 사민당은 동독 및 공산권 국가들과의 직접 대화를 주장하는 동방 정책을 계속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6. 제6대 총선[편집]


1969년 9월 28일 (총원: 518석, 과반의석: 260석)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기독교민주/사회연합
237석
31석
250석(201석+49석)
1961년, 1965년에 이어 세번째로 총리직에 도전한 빌리 브란트는 68 혁명의 시대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큰 호응을 얻게 되고, 4년전의 총선보다도 20석 가량을 더 얻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원내 제 1당은 기민당이었다.[13]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브란트는 뛰어난 협상력을 발휘해서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의 연정을 구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사회민주당은 1949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 반대로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은 첫 야당 생활을 겪게 된다.

새로 수상이 된 빌리 브란트콘라트 아데나워가 기초를 다진 서독의 외교 정책인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동방정책을 내세우면서 많은 논란을 빚게 된다. 이중에서도 가장 결정타는 2차대전 이전까지 독일의 영토였던 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을 사실상 포기하고 오데르-나이세 선을 실질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외교 노선은 연정 파트너 자민당은 물론이거니와 사민당 안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다수의 자민당 의원과 사민당 의원들이 탈당하여 기민당으로 소속을 옮기는 사태까지 이루어진다. 이에 1972년 4월 기민당은 내각불신임결의를 통해 브란트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행했지만 단 2표가 모자라서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브란트의 의회 장악력이 떨어졌다는 것은 명확했기에 브란트 역시 정치적 승부수를 띄운다. 전 국가적 행사였던 1972 뮌헨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여당인 사민당을 움직여 스스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브란트는 의회 해산을 대통령에게 요청하고, 의회가 해산됨에 따라 총선이 한 해 앞당겨져 열리게 됐다.


7. 제7대 총선[편집]


1972년 11월 19일 (총원: 518석, 과반의석: 260석)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기독교민주/사회연합
242석
42석
234석(186석+48석)

기민당은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경제정책을 맹비난하면서 승리를 자신했지만, 뚜껑을 열고보니 결과는 사민당+자민당 연합의 압승이었다. 68혁명 이후 대동단결한 좌파 지식인과 학생운동가들의 힘이 폭발한 것. 덧붙여서 중도 성향의 시민들도 1971년 빌리 브란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전범국 낙인이 찍혀있던 독일의 위상을 세워준 것도 있고 해서 전반적으로 빌리 브란트 정권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렇게 사민당은 1949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한다.[14] 이 총선 이후 브란트는 연임에 성공했지만 채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터진 귄터 기욤 사건으로 수상직에서 사임하게 되고 헬무트 슈미트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편 기민당에서도 세대교체가 일어나 42세의 젊은 정치인 헬무트 콜이 당수직에 오르게 된다.


8. 제8대 총선[편집]


1976년 10월 3일 (총원: 518석, 과반의석: 260석)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기독교민주/사회연합
224석
40석
254석(201석+53석)
빌리 브란트와 달리 새로 독일의 수상이 된 헬무트 슈미트는 사민당내 온건파라 연정파트너인 자민당과 별다른 마찰없이 지냈다. 즉, 사민당과 자민당 사이의 연정이 틀어질 요소가 적었다는 의미이다. 한편, 헬무트 콜의 지도하에 기민당은 49%의 원내 좌석을 차지하지만, 이 1%의 차이로 아쉽게도 여당 자리에 복귀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9. 제9대 총선[편집]


1980년 10월 5일 (총원: 519석, 과반의석: 260석)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기독교민주/사회연합
228석
54석
237석(185석+52석)
슈미트는 3선에 도전했고 기민당 측에서는 바이에른의 주지사로 재직 중이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총리 지명자로 등장했다. 슈트라우스는 기사당 출신이었는데, 기민당이 아니라 기사당 출신이 총리 후보로 나선 것은 이 때가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1962년 슈피겔 지가 국방부의 비리에 대해 폭로하자, 슈피겔 편집인들을 반역 혐의로 기소하였던 전례에서 보이듯이 정치적으로 극우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이는 그의 열렬한 표밭이던 바이에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마이너스로 작용했다.[15] 결국 기민당은 4년전에 비해 무려 26석을 잃는 대참패를 당하며 이번에도 데꿀멍해야 했다.[16]

하지만 이렇게 수립된 슈미트 내각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1982년 슈미트 내각은 부자 증세를 놓고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과 충돌을 빚는다. 그리고 이 틈을 기민당이 놓치지 않았다. 기민당은 자민당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여 1982년 내각불신임안을 통과시켰고, 이로 인해 슈미트 내각은 붕괴한다. 슈미트 내각의 후임으로 의회에서 선출된 사람은 바로 기민당의 당수 헬무트 콜. 그렇게 기민당은 1969년 이후 13년만에 여당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1979년 창당한 녹색당이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해서 1.5%를 득표했다.[17]


10. 제10대 총선[편집]


1983년 3월 6일 (총원: 520석, 과반의석: 261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녹색당
255석(202석+53석)
35석
202석
28석
환경 문제를 들고 나온 녹색당이 급부상한 총선이었다. 허나 이런 녹색당의 부상은 사민당에겐 뼈아픈 지점이 되었는데, 녹색당이 전통적인 사민당의 지지층을 상당부분 흡수했기 때문. 그렇게 선거는 헬무트 콜이 이끄는 기민당이 승리한다. 그래도 녹색당은 1961년의 총선 이후 20년만에 원내 진출에 성공한 기민/사민/자민당 이외의 정당이란 의의를 가진다.


11. 제11대 총선[편집]


1987년 1월 25일 (총원: 519석, 과반의석: 260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녹색당
234석(185석+49석)
48석
193석
44석
전년도였던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 덕에 녹색당이 다시 한 번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 선거를 기점으로 녹색당은 전국 차원의 정당으로 확실히 안착하게 된다. 제2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당 내의 계파 싸움과 녹색당의 표 잠식으로 인해 이번에도 기독교민주/사회연합에게 힘없이 여당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기독교민주연합 역시 지난 선거와 비교해서 원내 의석을 꽤 많이 잃었지만, 잃은 표의 상당 부분이 자유민주당에게로 옮겨졌기 때문에 재집권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러한 의석수 양도는 연정 파트너 자유민주당이 녹색당에게 밀려서 그 세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기독교민주연합이 의도적으로 유도[18]한 부분이기도 하다.


12. 제12대 총선[편집]


1990년 12월 2일 (총원: 662석, 과반의석: 332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민주사회당
동맹 90/녹색당
319석(268석+51석)
79석
239석
17석
8석
1990년 10월 3일 통일이 이루어진 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총선이다. 전통적으로 동독 지역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까지 사회민주당의 아성과 같은 곳이었고, 실제로도 처음 여론 조사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앞서나갔다. 하지만 기독교민주연합 측이 통일의 조속한 시행과 화폐교환비 1:1 지정과 같은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우면서 판세를 뒤집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기독교민주/사회연합과 자유민주당이 도합해 원내 좌석의 60%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어서 헬무트 콜의 3선이 성공한다.

한편, 구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과 "모두가 통일을 얘기한다. 우리는 환경을 얘기한다."던 녹색당은 봉쇄조항을 넘지 못 했다. 원래대로라면 의석을 배분받지 못할 상황이었으나, 이번 선거에선 동독 지역에서 5%를 넘는 정당에 의석 배분이 가능하도록 하였는데 실제로 동독 지역에서 5%를 넘는 득표율을 얻어 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동독 지역 녹색당은 구 동독의 정치연대였던 동맹90과 선거연대했고, 이후 동맹90이 동서독의 녹색당과 정식으로 합당하여 동맹90/녹색당이 된다.


13. 제13대 총선[편집]


1994년 10월 16일 (총원: 672석, 과반의석: 337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동맹 90/녹색당
민주사회당
294석(244석+50석)
47석
252석
49석
30석
통일 이후 최악으로 치닫던 경제 상황으로 인해 기민당과 헬무트 콜에게 독일인들이 보냈던 지지는 빠르게 식어버렸다. 그렇지만 헬무트 콜은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기민당의 원내 1당 자리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고, 다시 한 번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4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90년의 총선과 비교해서 기민/자민당의 연정의 위상은 곤두박질쳤기에 어디까지나 상처뿐인 승리였다. 한편 녹색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정권에 참여할 의사[19]를 밝혔고, 실제로도 49석을 차지하면서 선방했지만 아쉽게도 내각 참여는 무산되고 만다. 한편 민주사회당의 경우 5% 미만의 득표율을 얻어서 원래대로라면 원내진입이 무산될 처지였지만, 다행히도 지역구에서 4석을 차지하면서 기사회생[20]할 수 있었다.


14. 제14대 총선[편집]


1998년 9월 27일 (총원: 669석, 과반의석: 335석)
사회민주당
동맹 90/녹색당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민주사회당
298석
47석
245석(198석+47석)
43석
36석
1998년 시점에서 독일의 경제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실업률은 10%에 근접해갔고 많은 이들은 헬무트 콜 정부와 여당이었던 기민/자민당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이에 98년 총선을 앞두고 헬무트 콜이 총리직에 출마하지 않고 볼프강 쇼이블레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지만 이러한 소문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98년 4월 헬무트 콜은 5선 도전을 선언했다. 한편 사민당은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여론조사에서는 기민+자민 연합과 사민+녹색 연합이 오차범위 내의 접전인 것으로 보였지만 개표결과는 좌파정당의 압승[21]이었고,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정으로 게르하르트 슈리더가 총리직에 취임하면서 헬무트 콜은 16년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5. 제15대 총선[편집]


2002년 9월 22일 (총원: 603석, 과반의석: 302석)
사회민주당
동맹 90/녹색당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민주사회당
251석
55석
248석(190석+58석)
47석
2석
지난 선거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헬무트 콜을 '실업 총리'라고 부르면서 경제 문제에 화력을 집중하여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슈뢰더의 집권 후 4년이 지난 2002년의 총선에서 경제 문제는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여전한 불황과 유로화의 도입으로 인한 혼란 등에 대해 기민당이 맹폭을 가했던 것. 하지만 슈뢰더 내각은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대중의 지지를 어느 정도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선거 결과 양측이 초접전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나마 사민당/녹색당 연정이 신승[22]을 거두었고 슈뢰더는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난 선거에서 동독 지역만의 득표로 봉쇄조항을 충족했던 민주사회당은 이번 선거에서 동독 지역의 유권자들이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바람에 비례대표 득표율 봉쇄조항을 넘지 못 하고 만다. 지역구 당선자도 2명 뿐이라 봉쇄조항[23]의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하여, 정당명부 당선자가 단 한 명도 없이 지역구 당선자 2명 만으로 연방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민주사회당은 구 서독 지역 내 세력 부재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구 서독 지역의 파트너를 찾게 되었고 2005년에 사회민주당 탈당파가 조직한 좌파당과 연대하게 되었다.


16. 제16대 총선[편집]


2003년 무렵부터 슈뢰더가 감행한 복지 및 연금 개혁은 슈뢰더 내각의 인기를 하락[25]시켰고, 2005년 지방 선거에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이 기민당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전통적으로 사민당의 아성이었던 이 지역이 기민당에게 넘어간 것은 충격을 일으켰고, 슈뢰더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내각불신임결의을 통과시켜 총선을 조기에 치르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다. 기민당이 슈뢰더의 맞상대로 지명한 인물은 앙겔라 메르켈이었다.

선거운동 초기에 사민당의 인기는 바닥을 기었지만 9월 4일 펼쳐진 슈뢰더와 메르켈의 생중계 토론에서 슈뢰더가 예상대로 뛰어난 언변을 보이면서[26] 기민당과 사민당의 지지율은 오차 범위 내에서 엎치락뒤치락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 투표 결과도 그러했다. 기민당과 자민당이 도합해서 47% 가량의 득표를 거두었고, 사민당과 녹색당이 도합해 43% 정도의 득표를 거두었다. 전통적인 연정 구성으로는 어느 쪽도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다. 이는 오랜 불황에 실망한 구 동독 지역이 구 동독 공산당을 계승한 민주사회당에게 막대한 지지[27]를 보낸 것에서 기인했다. 이때 민주사회당과 좌파당의 선거연대가 큰 성과를 거둔 것에 자극받아 민주사회당은 정식으로 좌파당과 합당하여 좌파당이 된다.

메르켈과 슈뢰더 모두가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는 대혼돈의 상황. 사실 사민당은 기존의 연정 파트너 녹색당에다가 같은 좌익 계열의 좌파당까지 연정에 포함시켜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총리 슈뢰더와 좌파당 당수 오스카 라퐁텐의 사이가 극히 나빴다는 점이 문제였다.[28] 그렇다고 기민당이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서있는 좌파당과 연정 파트너를 맺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민/사민/자민/녹색당이 협상에 협상을 거듭한 가운데 마침내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에 오르는 것을 조건으로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이 이루어진다. 1969년 키징어 내각 이후 36년만에 세워진 대연정 내각이었다.


17. 제17대 총선[편집]


2009년 9월 27일 (총원: 622석, 과반의석: 312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좌파당
동맹 90/녹색당
239석(194석+45석)
93석
146석
76석
68석

전반적으로 지루한 선거전이 이어졌다. 양 당의 당수였던 앙겔라 메르켈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그렇게 화려한 언변 능력을 갖춘 정치인은 아니었을 뿐더러, 기민당과 사민당이 모두 정권에 참가했던 원죄(...)가 있던 터라 상대방의 실정에 대한 일방적인 공세가 힘들었기 때문. 너..너도 같이 했잖아 하여튼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기민당의 현상 유지 / 사민당의 몰락 / 군소정당의 약진.

특히 기민당과 연정을 하며 이에 실망한 상당수 지지자들이 이탈한 사민당은 1949년 이후 역대 최저 득표율을 받는 굴욕[29]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데 또 연정한다 이쯤되면 나중에 기민기사련도 사민당이 제안하는 연정은 거부할 명분이 없어질 기세 한편, 비록 원내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또다른 대안정당으로 해적당이 등장하여 꽤나 인기를 끌기도 했던 선거였다.[30]


18. 제18대 총선[편집]


2013년 9월 22일 (총원: 631석, 과반의석: 316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사회민주당
좌파당
동맹 90/녹색당
311석(255석+56석)
193석
64석
63석

자세한 내용은 제18대 독일 연방하원 총선거 항목을 참고.


19. 제19대 총선[편집]


2017년 9월 24일 (총원: 709석, 과반의석: 355석)
기독교민주//사회연합
사회민주당
독일을 위한 대안
자유민주당
좌파당
녹색당
246석(200석+46석)
153석
94석
80석
69석
67석

자세한 내용은 제19대 독일 연방하원 총선거 항목을 참고.


20. 제20대 총선[편집]


2021년 9월 26일로 예정되어 있다.


21. 관련 문서[편집]



[1] 바이에른 공화국 시기만 해도 사민당은 원내 1당을 차지할 정도로 지지 기반이 강한 정당이었다. 허나 분단 덕분에 텃밭이 많던 동독 지역이 날라가버린다 게다가 쿠르트 슈마허 역시 반나치 운동을 하며 수감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어 독일 정계에서 존경받고 있었기에 당 내부의 단결력도 좋은 편이었다. 실제 원내 1당을 하긴 했다. 기민/기사 연합에 밀렸을 뿐.[2] 서독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 측이 의도적으로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을 밀어준 감도 있다. 사실 분단은 안된다며 통일을 지향했지만 독일 공산당도 붉은 나치라며 반감을 드러낸 슈마허 입장에선 억울할법한 부분.[3] 처음에는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을 구상했지만 사민당 당수였던 쿠르트 슈마허가 이를 거부한데다, 아데나워 본인도 사민당과의 불편한 동거보다는 중도~중도우파계열 자유민주당, 독일당을 더 선호했다.[4] 바이마르 공화국의 황금기 5~ 6년을 제외하고는 독일에서 이 때까지 제대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5] 2차대전 종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출신의 실향민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전후이주자 연합이라는 것은 각종 정치/외교적인 상황을 고려한 중립적인 의역이고, 실제로 독일어 원어로는 훨씬 더 강경한 어감인 추방민 연합(Bund der Vertriebenen)이다.[6] 제2대 총선 이후 일부 지역에 만 출마하면서 봉쇄 조항을 충족(5%이상 득표)하는 정당은 기독교사회연합이 유일하다.[7] 다만 독일당과 가톨릭중앙당은 지역구 당선자가 있어서 정당 명부 의석을 얻었는데, 이 때 중앙당은 지역구 당선자 1석에 정당 명부 2석을 얻었다. 창조한국당? 봉쇄 조항에 지역구 3석 이상이라는 조항은 제2대 총선 이후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8] 독일당이 후보를 낸 곳에는 기독교민주연합이 후보를 내지 않았다.[9] 독일당은 이후 지방선거에서도 점점 밀리다가, 1964년에 그 때까지 남아있던 브레멘 주 의원 4명을 주축으로 독일국가민족당이라는 극우정당을 창당해버린다.(...) 당시 주 의원 4명 중 1명이 당 대표를 맡았으니 연방 내각에도 참여하던 독일당이 이렇게까지 몰락한 것이다. 1970년대 이후에는 지방의회에서도 전멸했다가 지금은 몇몇 지방의회에서 겨우 당선자를 내는 수준이나, 그마저도 어느 정당도 연정파트너로 삼지 않는 왕따 신세. 게다가 2010년대 들어선 독일을 위한 대안이 극우 포지션까지 선점하면서(...) 2016년 말에는 지방의회에 그나마 남아있던 의석도 독일을 위한 대안에 다 뺏겨버린다.[10] 웃긴건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를 무척 싫어해서 어떻게든 에르하르트가 총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꼼수를 썼다는 것. 오죽하면 에르하르트가 아데나워가 날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며 토로했을 정도.[11] 기독교사회연합 소속이다.[12] 나토의 군사작전 초안을 슈피겔이 보도하자, 슈피겔의 편집진들을 반역 혐의로 기소해버렸다.[13] 당시 서독의 정치구조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바이에른을 비롯하여 바덴-뷔르템베르크, 라인란트-팔츠와 같은 남부 일대는 기민당의 표밭이었고, 전통적인 사민당의 표밭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을 제외하면 동독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14] 1949년 이후 최초라는 건 나치 독일 이전에는 원내 제1당이었기 때문이다.[15] 신사적이고 온건했던 슈미트의 행동거지와 달리 슈트라우스는 거친 막말로 정적들을 공격하곤 했다.[16] 결국 1980년의 총선 이후 슈트라우스는 중앙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기민당의 헤게모니는 헬무트 콜에 의해 확실히 장악된다.[17] 당시 기타 정당의 합계 득표율이 2%를 넘지 않았으니, 기타 정당 득표 대부분이 녹색당에게 간 것이다.[18] 방법은 자당 지지자들에게 지역구는 기독교민주연합, 비례대표 선거는 자유민주당을 지지해달라 이런 식.[19] 다만 사민당만을 연정파트너로 수용할 것임을 전제조건으로 달았다.[20] 득표율이 5% 미만이더라도 지역구에서 의원을 3인 이상 배출하면 득표율에 맞추어서 비례대표 의석이 배당된다.[21] 사회민주당이 차지한 의석이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자유민주당이 확보한 의석을 더한 것보다 많았다. 거기에다가 동독지역에서는 어차피 사회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될 거라는 전제 아래 민주사회당에 대한 소신투표까지 있었다. 당시의 여론조사가 얼마나 유권자들의 생각과 동떨어졌는지 알 수 있는 상황.[22] 여기에는 동독 지역의 민주사회당 지지자들이 사회민주당에게 전략적 투표를 한 것도 보탬이 되었다.[23] 정당득표 5% 이상, 지역구 당선자 3명 이상.[24] 이 때는 좌파당의 전신인 WASG(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와 민주사회당이 선거연대하는 상태로, 두 당이 좌파당이라는 이름으로 합당한 것은 2007년이다. [25] 이 와중에 오스카 라퐁텐을 위시한 일련의 당원들이 사회민주당을 탈당해 좌파당을 결성한다.[26] 메르켈은 당시 TV 토론을 상당부분 기피했으나(2회로 예정된 것도 1회로 축소), 막상 토론에 들어서자 생각보단 선방했다. 그러나 슈뢰더의 타고난 말빨(...)은 당해낼 수 없었고, 시청자들도 메르켈이 선전했지만 슈뢰더가 더 잘했다고 평가했다. 사실상 총리 개인 활약을 통해 지지율을 끌어올린 셈. 그리고 이날 토론은 자그마치 59.6%가 시청했다. 독일 월드컵 개막식 시청률과 맞먹는 역대급 토론이었기에,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27] 동독 지역에선 민주사회당이 사회민주당과 맞먹을 정도로 득표했고, 서독 지역에선 민주사회당과 연대한 좌파당이 5% 가까이 득표했다.[28] 지금 와서 보면 나중에 깨지더라도 일단 연정을 하는게 좌파 집권엔 더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오스카 라퐁텐의 탈당이 없었다면? 물론 이후 메르켈 내각에 사민당이 연립 파트너로 참여해버리고, 메르켈을 비난하는 독일을 위한 대안 같은 극우 정당까지 등장하며 독일 정계는 좌우 구분만으론 설명이 안되는 복잡한 양상이 된다.[29] 동독 지역에선 좌파당보다도 득표율이 낮았다. 안습[30] 처음으로 참여한 총선에서 2%를 득표했다. 녹색당이 처음에 1.5%를 득표했던 걸 생각하면 전망이 밝아보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해적당 항목 참조.